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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부처가 말하는 더 없는 행복이란... 댓글:  조회:1515  추천:85  2007-10-31
  問:“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행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을 말씀해 주십시오.” 答:“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할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자기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지식과 기술과 훈련을 쌓고, 그 위에 변재가 뛰어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와,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를 만나는 것, 때로는 이치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수양과 깨끗한 행위와 거룩한 진리를 보는 것,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이러한 일을 한다면 어떠한 일이 닥쳐도 실패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더없는 행복이다.”  
95    정신과 의사들이 절로 간 까닭은… 댓글:  조회:1763  추천:107  2007-10-30
정신과 의사들이 절로 간 까닭은… <조선일보 2006/5/18/목/종교 A23면>   “동양사상 알아야 마음을 치료하죠” 42년째 고승·한학자들 강의 수강 27일 ‘선수행과 정신치료’ 학술대회 ▲ 한국정신치료학회 회원들이 현웅 스님(왼쪽)으로부터 성철 스님 법어집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이 학회는 27일 연찬회를 개최, 동양사상을 실제 정신치료에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는지 그 사례를 발표한다. /전기병기자 gibong@chosun.com “불법(佛法)은 종교가 아니라 막힌 것을 풀어주는 방법입니다. 경계에 부딪힌 마음을 풀어주고, 가리는 것 없이 세상을 정확히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서울 성북동 동북신경정신과 2층. 10여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현웅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다. 성철 스님의 법어집을 읽으며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어려움을 견디러 나온 것”이라는 스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양자역학, 상대성이론까지 나온 세상에서 윤회(輪回)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는 수강생들의 날카로운 질문까지 섞이면서 1시간 30분이 후딱 지나간다. 매월 첫째, 셋째 수요일 저녁이면 벌어지는 똑같은 풍경이다. 한국정신치료학회의 ‘동양고전강독’은 정신과 의사들이 스님과 한학자를 초빙, 유불선(儒佛仙) 동양사상을 공부하는 자리로 벌써 42년째다. 그동안 모신 강사진도 숭산 스님을 시작으로 탄허, 월운(봉선사 조실), 종범(중앙승가대 총장) 스님 등 당대의 고승(高僧)들과 김충렬 고려대 명예교수 등 쟁쟁하다.   왜 서양의학을 배운 정신과 의사들이 유불선을 공부하는가? 1965년 이 모임을 발족시킨 이동식 한국정신치료학회 명예회장은 “제대로 된 마음치료, 정신치료를 위해서는 동양사상과 서양의학의 융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모임이 태동하게 된 계기도 이동식 박사가 환자를 면담하면서 비롯됐다. 불교신자이던 한 환자와 대화하던 중 환자가 갑자기 대혜 선사의 ‘서장(書狀)’을 읽으며 질문을 퍼붓더라는 것. 이 박사는 “그때 문답을 통해 부처님이야말로 2500년 전부터 마음을 고치는 명의(名醫)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국 전 회장도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불교와, 환자의 정신적 불편을 덜어주는 정신치료는 프로세스가 같다”며 “치료자가 먼저 감정을 정화시키는 데 동양사상 공부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매번 상경하는 황정환 성서정신과 원장은 “스님들의 강의를 듣고 대화하다 보면 그 동안 가지고 있던 틀이 깨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고 말했다. 1974년 정신치료사례연구회(한국정신치료학회의 전신)가 정식 발족하면서 연구활동이 본격화돼 현재는 학회 내에 동양고전강독 외에도 공부모임만 8개가 활동 중이다.   한국정신치료학회는 27일 오후 2시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선수행(禪修行)과 정신치료의 실제’를 주제로 학술연찬회를 개최한다. 동양사상과 정신치료의 실제 사례를 점검해 보는 자리다. 숭산 스님의 미국인 제자인 대봉 스님(무상사 조실)과 종범 스님, 박홍 서강대 이사장, 성철 스님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서강대의 서명원 신부 등 종교인들이 참석해 발표·토론하고 2부 ‘도(道)정신치료의 실제’에서는 이동식 명예회장과 허찬희 회장이 주제발표한다. 실제 치료사례도 소개될 예정이다. 허 회장은 “이번 연찬회는 동양사상 중 선수행이 어떻게 정신치료에 도움이 되는지를 실제적·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02)764-8432 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hansu@chosun.com 불교 禪수행, 정신의학과 만나다 禪수행을 정신의학·심리학 눈으로 바라보기"내면의 깨달음·몸과 마음의 조화 중시는 비슷사고·감정을 통제-의식자체 변화 부분선 차이"    2005.03.25 / [한국일보] 불교의 선(禪)수행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치열한 구도의 과정이지만, 그 내용은 ‘단지 정신차리고 사는 것일 뿐’이라고 선사들은 말한다. 그래서 선수행은 인간정신을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현대정신의학의 관심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선수행을 정신과의사, 심리학자의 눈으로 해부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한국정신치료학회가 26일 서울대 치과병원에서 ‘선수행과 정신치료’를 주제로 여는 학술연찬회에는 선수행의 경험이 많은 스님들과 정신치료 전문가들이 참가한다. 서울 육조사 선원장 현웅스님, 대구용연사 주지 지운스님, 전현수(전현수신경정신과의원) 박사 등이 수행체험을 발표하며, 이동식 한국정신치료학회 명예회장과 중앙승가대총장 종범스님이 좌장을 맡는 패널토의도 예정돼 있다.미국 유럽 등에서는 달라이라마를 위시한 티베트 스님들과 정신과학자들간의 대화가 빈번하지만, 국내에서는 1984년 전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과 부산 범어사 조실 지유스님이 정신치료 전문의들과 세미나를 한 이후 21년 만에 이런 만남이 성사됐다.선수행과 정신치료의 유사점은 이렇게 설명된다. 선에서는 애응지물(碍膺之物ㆍ가슴에 거리끼는 것)을 제거하면 곧 각(覺ㆍ깨달음)이라고 하고, 정신치료에서는 환자가 자기 발병의 원인이 되는 핵심감정을 깨닫고 정화함으로서 치료가 된다고 하는데 이 둘의 과정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수행과 정신치료의 비교’를 주제로 발제를 하는 정신과전문의 박병탁 박사(박병탁신경정신과의원)는“둘 다 자기를 관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정신치료는 의식의 내용인 사고와 감정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것인 반면에 선수행은 의식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미얀마에서 남방불교 수행법인 위파사나 명상을 체험하고 이를 환자 치료에 응용하고 있는 정신과전문의 전현수 박사는“정신적 고통은 과거의 영향을 많이 받아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에 파묻혀 사는 것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면서“호흡을 주시하는 위파사나 수행을 하면 현재에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과거의 영향에서 벗어나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명상과 자기치유 8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전 박사는“불면증 환자나 화를 많이 내는 환자에게 효과가 크다”고 덧붙였다.지운스님은 “불교수행은 몸과 마음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치료와 수행이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면서 “수행을 하면 몸이 바뀌고 그에 따라 고집 자만심 화를 일으키는 마음이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했다. 지운스님은 특히 불교수행은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비심에서 시작되고, 마음을 변화시키는 구체적 방법이 있는 점이 정신치료와 다르다고 말했다.이정국 한국정신치료학회장은“선수행은 본래의 자기 모습을 깨달아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동양적 방법인 반면, 정신치료는 자기 삶을 지배하는 정신질환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을 하자는 서양에서 발전된 방법”이라면서 “선 수행자들로부터 진솔한 경험을 듣고 토론을 통해 두 분야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고자 한다”고 기대했다. 남경욱기자 kwnam@ hk.co.kr
94    修行의 길 댓글:  조회:1611  추천:85  2007-10-29
  修行의  길무명(無明)의  어둠 속의  큰 등불이며,살아있는  지혜의  마음으로자기성찰(自己省察)을 통한  참다운 자기  자신을  발견 하는것이다"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아 왔는가?"회의(懷疑)와 무관심(無關心) 사이를  떠돌아 다니면서.......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였던  사람인가?이 세상  눈에 보이는  형태나 모습들은반드시 무너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것을  그 흐름속에불안하고  초조해지며  자신의 마음을 잃고  끝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악순환  그 허무 속에는  마음의 평안이 없기  때문이다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괴로운 추억이 있기마련이다이 모든것을  벗어나  사로 잡힘이없는  평안한  마음의 수행무상(無常)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괴로움에는  마음의 괴로움과  육체적인 괴로움의  두가지가 있다범부이거나  어진 이이거나   다 같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받게 되지만,성자(聖者)는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마음의 괴로움으로 까지가져가지 않는 것이다그리고  욕망의 집착과  번뇌에 벗어나  인생의  성패에 부딪치더라도자기 자신의 비굴과 자포자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자신을  소중하게  다루고  정성을 다해서  마음의 수양을 쌓아야한다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아니다,  즐거운 것이다.괴로움과  즐거움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생각해 버리는  그 자체가인생의 더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내 눈앞에  보이는것을  굳건한  마음으로  날려버리고내 소유라는  생각을 없애버렸을때이 세상의  모든것이  옮아가고  변화하여도강물처럼 흘러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수행(修行)안에서참된  자신의 자유와 진실이  얻어지는것임을참된 마음의  수행(修行)의 길로  깨달아야한다오늘 하루를 사는 것도 修行의 길이요부모와 자식의 연이 되는것도 修行의 길이요인연의 법(法)에 따라 인연(因緣)의 도리(道理)를  다하는것도 修行의 길이요생사(生死)의  괴로움을 초월하여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는것도 修行의 길이요늙고 병들고 죽는 세가지 괴로움(三苦) 또한 修行의 길인 것이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0165739');
93    42)하의경(何義經) 계(戒)를 가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댓글:  조회:1515  추천:114  2007-10-29
42)하의경(何義經) 제 1 [초 1일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에 존자 아난이 해질 무렵에 연좌(燕坐)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계(戒)를 가지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계를 가지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후회하지 않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계를 가지게 되면 곧 후회하지 않게 된다." "세존이시여,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워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후회하지 않으면 곧 즐거워할[歡悅] 것이다." "세존이시여, 즐거워함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즐거워하는 것은 기뻐하는[喜]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즐거워하면 곧 기뻐하게 될 것이다." "세존이시여, 기뻐함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기뻐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쉰다[止]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기뻐하면 곧 몸이 편안히 쉬게 된다." "세존이시여, 쉬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쉰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안락하게[樂] 하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몸이 쉬면 곧 안락함을 느끼게 된다." "세존이시여, 안락함을 느끼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안락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정[定]에 들게 하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안락하면 곧 마음이 선정에 들게 된다." "세존이시여, 선정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선정에 드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를 보고[見如實] 있는 그대로를 알게[知如眞] 하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선정에 들면 곧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알게 된다." "세존이시여,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싫어하게[厭] 하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알면 곧 싫어하게 되느니라." "세존이시여, 싫어함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싫어한다는 것은 욕심을 없게[無欲] 하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싫어하면 곧 욕심이 없게 된다." "세존이시여, 욕심이 없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난아, 욕심이 없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아난아, 만일 욕심이 없으면 곧 일체의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해탈하게 된다. 아난아, 이것이 이른바 계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곧 후회하지 않게되고, 후회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즐거워하게 되며, 마음으로 즐거워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되고,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편안히 쉬게 되며, 편안하게 쉼으로 말미암아 안락하게 되고, 안락함으로 말미암아 선정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多聞聖弟子]는 선정으로 말미암아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알게 되며,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앎으로 말미암아 싫어하게 되며, 싫어함으로 말미암아 곧 욕심이 없게 되고, 욕심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해탈하게 되며, 해탈함으로 말미암아 곧 해탈한 줄 알게 되어,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확립되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다음 세상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뜻을 안다. 아난아, 이것을 법과 법이 서로 이익되게 하고, 법과 법이 서로 의지한다고 하는 것이다. (是為法法相益。法法相因。) 이와 같이 이 계(戒)로 인하여 제일가는 경지에 이르게 되나니, 곧 이쪽 언덕[此岸]에서 저쪽 언덕[彼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비구들이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49)계경(戒經) 제 6 [초 1일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에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가 계(戒)를 범하면, 곧 후회하지 않음과 즐거움 기쁨 쉼 안락 선정 실다운 소견과 참다운 앎 싫어함 욕심 없음과 해탈을 해칠 것이요, 만약 해탈이 없으면 열반을 해치게 된다. 비구가 계를 지키면 후회하지 않음과 즐거움 기쁨 쉼 안락 선정 실다운 소견과 참다운 앎 싫어함과 해탈을 익히고, 만약 해탈이 있으면 곧 열반을 익히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92    계율를 생각하는 명상 댓글:  조회:1808  추천:105  2007-10-29
戒란 무엇인가?  글자풀이를 해보면 계는 바자굽에 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다시말해서 무엇인가 접근을 못하게 창칼을 치켜들고 엄숙하게 지킨다는 뜻이 되겠다. 율이란 자아절제로 대중의 화합을 위하여 지켜야 하는 규칙을 가리킨다. 사람이란 해야될 일과 하지말아야 할 일이있다. 어릴때부터 우리는 부모님들한테서 잘못한 일로 수많은 꾸중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미워서가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이였다.계란 바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향하는 지켜야할 도덕수양이다. 국가에는 국가의 법이 있고 가족에는 가족의 법이 있듯이 한 사람이 덕이 있고 수양이 있는 훌륭한 인간이 되기위해서는 그리고 대중의 화합과 이익을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할 사항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계율이며 그것을 반복적으로 사유하고 자신의 몸에 정착시킴으로 계율을 생각하는 명상이 되는 것이다. 계율을 가지는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의경에서 계율을 지켜야할 의미를 잘 설명했다.(불교경전란에 있음)계가 있는 사람은 보는 사람마다 기뻐하고 반길것일거요 계가 없는 사람은  누구나  싫어하고 멀리보기만해도  피할것이니 무엇인가 지켜야할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간관계에서 장애만 있을것이요 남의 손각락질만 받을 것이다. 때문에 계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수있는 길상병이라고 비유한다. 계가 있으므로 법이 있으며 계가 있으므로 또한 모든 법을 성취할수가 있다.아래에 경전속의 계를 생각하는 명상을 보자.四.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널리 펴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果報)를 성취하여,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계율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계율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의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혹 어떤 비구는 몸과 마음을 바루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계율을 생각한다. 즉 ‘이른바 계율은 모든 악을 그치게 하기 때문에 능히 도를 이루고 사람을 즐겁게 한다. 계율을 몸을 꾸며 좋은 모양을 나타낸다. 대개 계율은 길상병(吉祥甁)과 같아서 소원을 곧 성취시킨다. 모든 도품(道品)의 법은 다 계율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계율을 가지면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계율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四)聞如是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修行一法已。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戒佛告諸比丘。云何修行念戒。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說。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說諸比丘對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世尊告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戒。所謂戒者。息諸惡故。戒能成道。令人歡喜。戒纓絡身。現眾好故。夫禁戒者。猶吉祥瓶。所願便剋。諸道品法。皆由戒成。如是。比丘。行禁戒者。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戒念。便當獲此諸善功德。如是。諸比丘。當作是學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91    서구에서 심리치료에 응용되고 있는 불교명상법 댓글:  조회:1693  추천:96  2007-10-29
서구에서 심리치료에 응용되고 있는 불교명상법이종복 본지 해외통신원명상은 면역체계를 강화해고 발레리 박사(1946~2001) 를 위시한 몇몇의 과학자들과 달라이 라마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마음과 생명협회(Mind and Life Institute: http://www.mindlandlife.org)는 1987년부터 현재까지 지속하면서 수백 명의 과학자들의 동참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접견실에서, 때로는 2006년 여름에 열릴 ‘마음과 삶’ 여름캠프에 모여서, 그들은 동일한 객체, 즉 마음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제시하며 불교와 과학 간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티베트의 고승의 몸에 다양한 전극을 연결시켜 명상을 할 때 두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직접 확인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위스컨신-메디슨 대학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교수팀은 2003년 『Journal of Psychosomatic Medicine』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서 명상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현저하게 많은 항체를 형성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기반하여 2005년 데이비슨 박사는 스탠포드대학의 교수 로버트 사폴스키와 함께 한 공동연구를 통해 스트레스와 명상의 관계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명상은 인간의 면역체계를 강화시키고, 우울증 재발을 방지하고 콜티졸(Cortisol: 콜티코스테로이드 홀몬으로 스트레스의 반응과 관계있다. 콜티졸은 혈압과 혈당레벨을 높이고 면역체계를 약화시킨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Cortisol)) 레벨을 낮은 수위로 유지하게 해 준다고 한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 뇌 연구협회의 회장인 울프싱어는 “삼매의 경지가 이렇게나 명료하게 신경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존 카밧진은 이러한 명상과 스트레스의 관계를 실제로 응용한 결과를 보고했는데, 그는 생명공학 회사에서 회사원들을 상대로 “명상에 기반한 스트레스 줄이기”라는 제목으로 명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8주 후 검사 결과, 명상을 통해 단련된 집단의 경우가 감기 바이러스에 더 강한 항체들을 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앨런 왈레스와 달라이 라마는 명상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명상은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기보다는 감정적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심리치료에 응용되는 자비심 수행데이비슨은 또한 2004년 11월 8일자 『미국 과학자회보』에 “장기 명상수행자들의 정신 수행 중 자기유도에 의한 고폭의 감마동기성 (Long-term meditators self-induce high-amplitude gamma synchrony during mental practice)”을 발표하였다(이 논문 중 논자가 참조한 데이비슨의 논문은 『미국 과학자 회보』 2004년 11호 http://www.pnas.org/cgi/ content/full/101/ 46/16369에서 무료로 다운받아서 읽어볼 수 있다).우선 데이비슨 팀은 두 집단의 실험자들을 모았다. 한 집단은 달라이 라마의 지원하에 파견된 닝마파와 카규파(티베트의 4대 종파 중 두 파)에서 15년에서 40년간 수행해 온 승려들로 최소한 일만에서 오만 시간까지 명상을 해 온 집단이었다. 다른 한 집단은 자발적으로 지원한 대학생들로 구성되었으며, 명상의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평균 연령 21세의 대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학생들로 구성된 실험집단은 실험이 시작되기 전 뇌파 측정을 했으며, 1주일 동안 명상 훈련을 받았다.  실험을 시작하면서 데이비슨은 두 집단의 참여자들에게 모두 ‘무조건적인 자비심’에 대한 명상을 하도록 주문했다. 여기서 무조건적인 자비란 “살아 있는 존재들을 도우려는 무제한적인 준비심과 능력”이다. 1주일 동안 한 시간씩 명상한 대학생들로 구성된 실험집단은 준비과정 동안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주제로 하여 명상을 하도록 주문받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 대상을 확대하여 명상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리고 뇌파를 측정하는 동안에는, 수행자 집단과 대학생 집단 모두 대상에 구애되지 않는 자애와 대비심에 대해서 명상하도록 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자비심에 대해서 명상하는 승려들의 경우 1초에 40회 이상의 감마파 활동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수행자 집단의 경우 감마파의 강도는 일반 대학생들 집단에 비해 30배나 높았으며 아래 그래프 오른쪽 뇌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뇌가 전체적으로 활성화 되었다. 그리고 특히 좌측 전두엽 피질이 두드러지게 많은 활동을 보였다. 이 부분은 긍정적인 감정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데이비슨에 의하면, 이러한 감마파의 정도가, 임상심리학이 아닌 분야에서는 최고치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데이비슨의 연구결과는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에 소개되었고, 경영자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불교의 자비심과 명상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과학적 발견과 함께 불교의 자비심 수행이 심리치료에 응용되고 있다. 워싱턴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론 래드너(Lorne Ladner) 박사는 아직도 서구 심리학 전통에서는 자비에 대한  합의된 심리학적 정의가 없다고 성토하면서, 서구사회는 행복이 마음의 한 상태라는 것을 잊고, 부, 성공, 명예 등 외부적 요인에서 찾으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상기의 불교 명상에 대한 과학적 증명은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자비심의 개발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래드너는 그의 상담 예들을 근거로 우리가 분노, 질투 등의 감정의 힘은 절감하면서도 사랑, 소속감 등의 긍정적인 감정의 힘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불교의 다양한 수행 방법 중에서 심리치료에 응용 가능한 몇 가지 방법들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자비심의 수행, 보리심의 수행, 평등심의 수행 등이 있는데, 그는 이러한 수행을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자신의 행복을 더 빨리 성취할 수 있을 뿐더러, 타인을 직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명상이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어하지만 서구 학자들이나 심리치료사들이 이러한 긍정적인 방법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불교 수행자인 잭 컨필드(Jack Kornfield)가 1998년 발표한 「숙련된 명상 수행자라도 치료해야 할 오랜 상처가 있다(Even the best meditators have old wounds to heal)」는 명상을 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경계하는 글이다.그는 수년간의 명상을 통해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첫 번째로, 그는 심지어 깊은 삼매의 상태도 그 자신의 문제들 가운데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외로움, 인간관계, 유아기 때의 심리적 상처, 공포의 패턴들을 예로 들었다. 두 번째로, 그는 많은 서구의 (그리고 아시아의) 수행자들이 격리된 곳에서 수행을 하면서, 명상을 통해 자신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마음 깊이 상처받고, 신경과민이 되고, 공포에 질리거나 우울증에 빠지기까지 했으며, 수행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피하고 가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을 통해 그는 명상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며, 깊은 마음의 상처는 상담을 통해 치료하라고 적극 권유했다. 그리고 수행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불교와 심리치료의 양측에 대한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은 1991년 그랙 보가트가 발표한 「명상과 심리치료: 연구결과의 검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스트레스, 육체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명상이 효과적이며, 중독증, 고혈압, 공포증, 천식, 불면증 등에 대해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명상만을 통해 문제를 풀려는 것 역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불교의 명상은 자가 치료의 방법론을 명확하게 갖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끝으로, 이러한 조심스러운 접근에 기반한 전문 상담가의 불교적 응용의 예를 보겠다. 호주 아델라이드대학의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마크 오 도노휴(Mark O’Donoghue)는 불교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실제 상담치료에 적용해서 사용할 것을 그의 논문 「심리치료에 대한 불교의 중도적 접근(Australian and new Zealand Journal of Family Therapy, vol.23, no. 4, pp. 196-201)」에서 권하고 있다. 그는 심리치료에서 사용하는 중도의 범위를 윤리적 처방이 아닌 극단적 감정 사이의 중도로 한정하고 있다. 그의 환자들이 겪고 있는 극단은 ‘신뢰-불신,’ ‘낙관주의-비관주의,’ ‘이상화한 행복한 자아-우울,’ ‘극단적 자기애-자기혐오’ 등등이다. 그에 의하면 중도적 분석에서는 극단적 개념들을 맞대면시켜서 일어나는 모순을 통해 개념 자체를 없애는 것이지만, 심리치료에서 사용할 중도적 분석이란 특정한 개념의 모순을 드러내 파괴함으로써 보다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덜 괴로운 쪽으로 유도하여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심리상태에 기인한 삶의 예로서, 그는 과거의 극단적인 경험이 현재에 정반대의 삶을 살게 하는 경우와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을 예로 들고 있다. 너무나 공부에 열중한 학생은 ‘쉬라’는 말을 ‘공부를 하지 않는다’라고 이해한다고 한다. 이러한 학생은 공부를 너무나 오래 한 나머지 공부를 하지 않는 쪽에 매력을 느껴 이러한 이중 극단에 빠지고 만다고 한다. 그는 두 개의 화이트보드에 상담자는 인식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면들을 적어 놓은 뒤에, 중간적인 단계로의 이행을 권유하여 많은 성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중간 단계로의 이행 역시 심리치료적 중도를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발견된 문제에 직접 부딪히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상담자가 감당하기 쉬운 상황으로 전이시키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심리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서구에서는 불교의 수행법과 자비심, 무아의 교리를 치료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버지니아대학의 명상과 요가 과목은 종교학과에서가 아니라 의학대학에서 개설하고 있다. 그러나 잭 컨필드가 고백하듯이, 명상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점은 달라이 라마 역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명상이 면역력을 높인다는 발표에 이어, 달라이 라마는 2005년 심리학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교의 명상은 중생의 정서적 고통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지, 신체적 고통을 제도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말씀은 명상이 오로지 마음과만 관계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명상을 통해 만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의식에 대한 방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승불교사상으로 풀어본 정신치료 경주 동국대 불교학과 김성철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흔히 말한다. 다시 말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란 얘기다. 그런데 팔다리와 몸통, 뇌와 심장, 내장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 가운데 어디에 나의 마음이 존재하는지 지적하려고 하면,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내장이나 심장까지 이식하는 의술이 가능한 것을 보면, 나의 마음이 그런 곳에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몸에서 ‘나의 마음이 있는 곳일 수 없는 곳’을 하나하나 소거시켜 보면,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이 존재할 수 있는 장기로 뇌가 남는데, 뇌의 반을 절단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환자들이 있다는 점에서, 뇌에도 나의 마음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정신’과 ‘육체’, ‘몸’과 ‘마음’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막상 정신, 또는 마음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내려고 하면 앞이 탁 막힌다. 부처님께서는 ‘정신’과 ‘육체’가 같은지 다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후 연기법(緣起法)을 설하셨다고 한다. 그런 질문이, “정신과 육체는 별개로서 존재한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서 묻는 물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그런 질문을 ‘아기를 못 낳는 석녀(石女)를 보고서, 그 여인이 낳은 아이의 피부색이 하얀지, 검은지 묻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설명한다. 흔히 심리치료나 정신치료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정신’과 ‘육체’의 구분 자체가 ‘허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순수하게 심리적인 질병도 없고 순수하게 육체적인 질병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경증이나,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등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지 않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프로이드(Freud)나 융(Jung)과 같은 정신의학자들이 ‘마음’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시작된 서구의 정신의학이지만, 현대에 와서 육체에 투입되는 ‘약물’을 겸용함으로써 보다 나은 치료효과를 얻는 이유가 이에 있을 것이다. 정신치료에 대해 불교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과거 프로이드나 융의 방식처럼 ‘마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세상만사를 ‘식(識)’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대승불교의 유식교학에서는 마음의 병을 그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번뇌장(煩惱障)’이고 다른 하나는 ‘소지장(所知障)’이다. 번뇌장은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으로 야기된 감성적(感性的) 번뇌이며, 소지장은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法執)으로 인해 야기된 인지적(認知的) 번뇌이다. 현대 정신의학의 용어로 풀면 번뇌장은 ‘정서장애’, ‘소지장’은 ‘인지장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아픔을 겪는 이유는 세상과 타인과 자신을 바라보는 인지가 왜곡되어 있거나 세상과 타인과 자신을 대하는 정서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지의 왜곡과 정서의 불안이 해소될 때 우리의 마음은 편안해지고 생활은 원만해진다. 정신의학에서는 ‘환자’와 ‘정상인’을 구분한 후 ‘환자’만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지만, 불교에서는 아라한이나 불보살과 같은 성인(聖人)이 되지 못한 모든 사람을 교화의 대상, 즉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직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상, 평범해 보이는 일반인조차 일종의 ‘정신질환자’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도 ‘정상인’과 ‘환자’ 사이에 명확한 선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신치료에 궁극적 도달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힘들지 않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시켜 놓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교화의 대상, 즉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정신질환자를 정상인에 이르게 하는 의술이 정신의학이라면, 정신질환자와 정상인 모두를 성자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정상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갖가지 번뇌를 갖고 살아간다. 번뇌의 양과 힘이 감당 못할 정도로 많아질 경우 일상생활 속에서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정신질환자라고 규정되며 전문가들의 치료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신질환자든 정상인이든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번뇌장과 소지장이다. 다시 말해 정서장애와 인지장애가 심할 경우 우리의 마음도 힘들어지고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된다. 그러면 이런 번뇌를 해결하는 불교적 방법은 무엇일까? 유식교학에서 가르치듯이 자아에 대한 집착인 아집(我執)을 제거하거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인 법집(法執)을 제거하면 된다. 아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번뇌인 탐욕과 분노와 교만 등을 상쇄시키는 수행을 해야 하고, 법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모두 허구임을 자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집을 야기하는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나 이성(異性)의 몸이 언젠가 시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부정관(不淨觀) 수행을 해야 하고, 분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나를 비롯하여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비관(慈悲觀) 수행을 해야 하며,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하심(下心) 수행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법집인 고정관념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이나 사태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의 진리를 터득해야 한다. 공성의 진리는 대승교학 중의 하나인 중관학(中觀學)에서 가르친다. 이와 아울러 전생이나 과거에 내가 지었던 악업을 참회하고, 일거수일투족 선업을 실현할 때 정신질환자는 그 동안 겪었던 마음의 고통의 과보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국대학교 정각도량 2550(2006)년 11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140184');
90    천불지의 오봉산산행 댓글:  조회:1854  추천:46  2007-10-28
   요리조리 바위틈을 끼면선  천불지산에는  손가락바위들도 많아....  오봉산에는 괴상한 바위들도 많아 부처님의 엄지손가락  바위우에 뿌리를 박은 나무  정상에서 삼합쪽을 배경으로  부처바위  고인돌인가 아니면 부처님의 삿갓인가?  이렇게 모여앉아 무슨 설법들 할가....  세번째봉우리정상에 있는 바위들    오봉산정상에서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두 선녀가 내 어깨를 붙잡고 놓치를 아니하니 이 아니 좋을손가...ㅋㅋㅋ   나무꾼도 이럴때가 있나보네.... 오봉산은 연변에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로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봉산을 정복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 산이 높고 봉우리가 많아 체력도 체력이겠지만 자칫 길을 잃어 방향을 분간못한다. 그리고 오를때 길을 잘못선택하면 중도에서  지쳐서 포기하고 만다. 원시림의 울창한 나무숲에 빠지면 아무풍경도 볼수없거니와 방향조차 잡을수가 없다. 특히 여름엔 더욱 그랬다. 오늘 우리가 오른 큰 봉우리만 하여도  네개! 오봉산은 아래서 보면  다섯봉우리지만 사실 정상에 올라보면 일곱봉우리였다. 아래서 보이는 작은 봉우리 두개와 맞은켠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빼고 오늘 거이 다 오른셈이다. 참으로 수확이 큰 산행이였다.    
89    뇌과학과 명상 댓글:  조회:1840  추천:119  2007-10-27
뇌과학과 명상 우리의 뇌는 파충류뇌(원뇌라고 함. 먹고 마시고 번식하고 공격하고 도망하는 등의 뇌),   동물뇌(대내변연계라고 함. 쾌 ,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뇌, 개나 고양이 뇌)와 인간뇌(대내피질이라고 함. 상상하고 고뇌하고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는 뇌) 이렇게 3개의 구조로 되어 있고, 인간뇌에는 또 다시 두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좌뇌와 우뇌이다.(두 뇌는 뇌량으로 서로 연결 되어 있다)   좌뇌는 후천적뇌라 하며 논리, 계산, 이해득실, 언어, 쾌, 불쾌감을 느끼는 영역으로 보통 우리는 좌뇌의 생활만 한다고 한다. 자기라고 느끼는 것도 이 뇌의 역할이다. 살아가면서 제일 많이 필요로 하고 이 뇌를 쓸 때 아드레날린계통의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움직이고 일하고 생각할 때처럼 에너지를 필요로 할 때는 괜찮지만 이런 긴급한 일이 아닐 때 즉 쉬고 있을 때나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분비되면 치명적이라고 한다. 연구에 의하면 뱀독보다 무섭다고 한다. 스트레스 받을 때 분비되는 것이 바로 아드레날린계통의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이 바로 성인병의 근원이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플러스적인 생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이너스적인 생각을 하면 즉각 아드레날린 계통의 호르몬이 분비되어 피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하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손발 저림 현상 등이 생긴다. 이는 혈관이 이 호르몬으로 인해 수축된 것이다. 자주 일어나면 혈관이 막혀 병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잘못된 생각 등은 나쁘다는 것이다.   불교의 마음 챙김 공부는 플러스적인 생각을 유도하고 좌뇌의 망상을 잠재우는데 특효약이다. 우리 뇌의 현상은 일어난 것을 알고 깨닫게 되면 즉시 사라진다. 즉 아이들이 부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짓을 하고 있을 때 관심을 안가지면 몰래 하다가 부모가 지켜보고 있으면 안하는 원리와 같다. 마음속에서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을 마음챙겨 깨닫고 있으면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무상)는 이치와 같다.   그리고 어떤 주체자가 있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명령을 내리면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어떤 영원성을 가진 주체자도 상정할 수 없다.(무아) 다만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마음챙겨 알아차리면 된다. 그러면 나의 몸과 정신적인 현상(마음현상, 뇌의 현상)을 과학자가 실험대상을 보고 있는 것과 같이 관찰 할 수 있다. 즉 나를 객관화 시켜 지켜보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깨닫게 된다.(부처님은 뇌를 mano, manas, 즉 意라고 했다)   즉 나라고 하는 것이 다만 마음현상(뇌의 현상)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라고 하는 관념에서 자유로워지며 모든 집착과 고통이 사라지게 되는 도리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유전자의 오래된 경험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우주의 지혜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라고 했다. 이 세상에 창조자는 없다. 서로 서로가 인과 연이 되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연기) 과학이 이를 증명해 가고 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합치되는 종교는 불교다”라고 말한 것이다. 아직도 창조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인간이 두렵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전자의 모든 비밀을 안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곧 깨달았다는 것은 무지(잘못된 관념, 이념, 생각)에서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를 열반이라고 한다. 다음 우뇌는 선천뇌라고도 하고 지혜의 뇌라고도 한다.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보고 영상으로 처리하며 예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좌뇌와 우뇌의 차이는 엄청나고 우뇌가 훨씬 용량이 뛰어나다)   이 우뇌가 개발되면 대뇌 몰핀이라고 하는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뇌 호르몬이 흘러 나와 병도 없어지고 생활이 밝아지며 정신이 고요해진다고 한다.(뇌는 알파파를 내고 육체는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또한 우뇌는 인간이 진화해온 500만년의 경험을 저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뇌가 활성화 되면 지혜로운 자가 되고 항상 즐거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현생에 경험되는 모든 일들이 예전에 경험해 본 것이기 때문에 당황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후천뇌인 좌뇌의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과는 10만배 차이가 난다(50살 기준). 모든 천재나 음악가 예술가들은 우뇌를 사용한 자라고 한다. 창의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우뇌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명상은 항상 계산적이고 이것저것 재어보고 느낌에 함몰되게 하는 좌뇌를 쉬고 우뇌를 활성화 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우뇌가 개발되면 좌뇌를 제어할 수도 있고, 좌뇌의 현상인 번뇌를 제어할 수 있으며, 지혜가 쏟아져 나오고, 미소 짓게 되고, 일체의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평정(일념, 무념)의 상태에 도달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가 이제까지 경험한 모든 사실을 내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류애 곧 지혜, 사랑, 자비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이다.   이 삶을 살면 유전자는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데 그것이 바로 대뇌 몰핀이라는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이 분비되면 모든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인 고요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마음챙김공부를 하면 좌뇌를 조절할 수 있고 우뇌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갈 수 있다. 우뇌개발법  ① 플러스적(긍정적)인 생각을 하라. ② 맨손체조를 하라. 나이가 든 사람이 심한 운동을 하면 활성산소가 생겨 좋지 않다. 많이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지방 분해) ③ 고단백질 저칼로리를 먹어라. 특히 콩으로 만든 식품.(뇌 영양식) 축적이 안되므로 매일 먹어야 한다. ④ 명상을 생활화 하라.(anapanasati. 들숨 날숨에 마음챙겨 알아차림) 명상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것을 알고(깨닫고 있고) 나가면 나가는 숨을 깨닫고 있으면 된다. 또한 숨은 자연스럽게 쉬어야 한다.(단전호흡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긴 숨이면 긴 숨이라고 깨닫고 짧은 숨이면 짧은 숨이라고 깨닫고 있으라.”([대념처경])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난다고 깨닫고 다리가 저리면 다리가 저리다고 깨닫고 있으면 된다. 몸과 정신적인 현상을 다 깨닫고 있으면서 그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호흡으로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 걷기 명상 걸으면서 오른발이 나가면 오른발이 나가는 것을 깨닫고 왼발이 나가면 왼발이 나가는 것을 깨닫고 알아차리면 된다. 처음에는 ‘오른발’ ‘왼발’ 하면서 명칭을 붙이는 것도 하나의 테크닉이다. 이렇게 걷다가 보면 일체의 잡념이 사라지면 집중력과 알아차림이 더욱 개발된다. 매사에 열심히 마음챙김 하다 보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언제나 미소 짓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은 '고귀한 인간은 없다. 고귀한 삶만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누구나 고귀하기 때문에 특별히 고귀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고귀한 삶이란 무명이 타파된 사람인데 이 무명은 마음챙김(sati 사티, 알아차림, 집중, 깨닫기)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챙김이 있는 삶이 고귀한 삶이다.   마음챙김이 꺼지는 중요한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생기면 마음챙김이 꺼져버린다. 그래서 삼독(三毒)이라고 했다. 또한 욕망, 악한 생각, 가라앉거나 수면, 들뜨거나 과거에 대한 후회심, 의심이 들어와도 꺼져 버린다. 이것을 5가지 장애라고 한다. 뇌에서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 즉각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면 사라질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느낌 뒤에 일어나는 마음을 잘 챙겨 알아차려야 한다. 그 느낌 뒤에 일어나는 탐,진,치의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마음을 챙긴다면, 괴로움의 원인이 점차 없어지게 되어 궁극적으로 열반에 이르게 된다. “벗이여, 탐욕(貪)의 소진, 성냄(瞋)의 소진, 무지(癡)의 소진,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相應部]) 부처님은 탐,진,치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열반이며, 그 방법은 탐,진,치가 생겨날 때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다. 마음챙김(알아차림)의 힘을 길러나가는 일, 마음챙김으로 생겨나는 번뇌를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 잘라버리는 일 이것이 지혜이며, 수행이다.출처: 옥련암 원광스님
88    어머니의 손 / 범능스님노래 댓글:  조회:1656  추천:95  2007-10-27
어머니의 손 / 범능스님어머니 그 두 손에 바람이 불어와 두 손을 가를 때어머님의 맺힌 그 한이 가슴속에 사무친다살아오신 그 땅에 물기 마른 그 자리에 가뭄 들고 무서리 지는 시린 그 바람을 어머님 아시네어머니 그 얼굴에 설움이 몰려와 주름살 깊을 때어머님의 작은 그 두 눈에 맑은 이슬 흐르신다흰눈 쌓인 이 땅에 얼어붙은 그 자리에 봄이 오고웃음 꽃 피는 다순 그 손길을 우리는 알겠네
87    생활속에서의 명상 댓글:  조회:1374  추천:95  2007-10-26
■ 걷기 명상 1주일에 한두 번 틱낫한 스님이 걷기 명상을 이끈다. 또 머물고 있는 숙소의 스님과 함께 걷기 명상을 할 기회도 있다. 뿐만 아니라 플럼빌리지 내의 모든 이동은 걷기 명상과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걷기 명상은 수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수행이다. 걷기 명상은 명상 전용 길을 사용하기도 하고 각 마을 내에 있는 커다란 연꽃 연못 주변을 걷기도 한다. <여름 수련회> 기간에는 탐스럽고 거대한 연꽃이 하트나 타원형의 연못에 가득 피어 있어 무척이나 아름답다. 1주일에 한 번은 아랫마을에 있는 1,250그루의 자두나무 밭에서 걷기 명상을 하기도 한다. 걷기 명상을 할 때는 호흡과 걸음에 마음을 집중한다. 말은 하지 않는다. 만약 말을 꼭 해야 한다면 걷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말하는 사람, 말, 말을 듣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말이 끝나면 다시 걷기 명상을 계속한다. 자연 속에서 걷기 명상을 하면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풀들이 만드는 생명의 축제 속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 호흡 명상 항상 숨을 쉴 때는 깨어 있는 마음mindfulness으로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자신의 숨으로 돌아가야 한다. 숨을 고향으로 여겨 숨에 귀의하는 것이다. 숨을 통해 몸과 마음은 하나가 되고 매 순간 지금 이 순간에 도착한다. 들이쉬고in, 내쉬고out 깊이deep, 천천히slow 고요히calm, 편안히ease 웃고smile, 놓아버린다release 지금 이 순간present moment, 아름다운 순간wonderful moment ■ 종 명상 플럼빌리지에서는 하루에 서너 번씩 종이 울린다. 종이 울리면 사람들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호흡으로 돌아간다. 괘종시계가 울리거나 전화벨이 울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호흡에 온 마음을 집중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도착한다. 종소리가 그칠 때까지 호흡과 명상은 계속된다. 플럼빌리지의 종소리는 우리에게 '깨어 있는 마음mindfulness'을 갖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종소리이다. 종소리가 들리면 긴장을 풀고 그저 자연스럽게 숨을 쉬며 느긋한 마음으로 멈추면 된다. 들어봐, 들어봐! 이 아름다운 소리가 나를 진정한 고향으로 데려다주네. 틱낫한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도 이 같은 종 명상이 적어도 2-3번 있다. 강연이 길어지면 사람들의 주의력이 산만해지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법문을 들을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종을 세 번쯤 울리고 그때마다 스님은 말을 멈추고 호흡에 집중하며 깨어 있는 마음을 수행한다. 수련자들도 물론 함께 수행한다. ■ 식사 명상 매 식사 전에는 명상을 하고 침묵 속에서 먹는다. 음식이 여기 있음을 알고 내가 여기 존재함을 느끼면서 먹는 것이다. 수행가족(practice family)에 속한 20여 명의 그룹이 함께 모여 바람이 서늘한 정원의 그늘에서 식사를 한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다섯 가지 명상[오관게(五觀偈)]을 하며 온 우주에 감사한다. 하나, 이 음식은 전 우주와 지구와 하늘과 수많은 깨어 있는 노동이 가져다 준 선물이네. 둘, 우리가 이 음식을 받을 자격이 있도록 그런 방식으로 먹게 하소서. 셋, 어리석은 마음 상태를 변화시켜 적당한 양을 먹게 하소서. 넷, 우리 몸에 영양을 주고 질병을 예방해주는 음식만 먹게 하소서. 다섯, 이해와 사랑의 수행길을 이루기 위해 이 음식을 받게 하소서. 음식을 씹을 때는 적어도 30번씩 씹는다. 음식이 입안에 있는 동안 끝까지 인지하며 즐기고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교감하며 먹는다. '깨어 있는 마음mindfulness'으로 모든 음식이 진정 거기 존재할 수 있도록 한다. 식사가 끝나면 비어 있는 그릇을 보면서 배부른 위장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 일 명상 매 식사가 끝난 후엔 자기가 먹은 그릇과 포크 등을 스스로 씻는다. 플럼빌리지에서는 5가지 물통을 탁자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수련자들이 줄을 서서 통을 한 번씩 지나가면서 그릇을 씻기 때문에 사람이 많아도 설거지가 금방 끝난다. 요리에 쓰인 대형 솥, 냄비, 프라이팬 등은 하루에 한 번씩 여럿이 참가하는 일 명상 시간에 씻는다. 그밖의 일은 숙소의 공동장소를 돌아가며 청소하는 일과 각 개인의 빨래가 있다. 모든 빨래는 손빨래로 손수하도록 되어 있다. 일 명상을 통해 우리는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당신이 설거지를 하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든, 생각을 멈추고 의식 있는 호흡을 하면서 자신을 고요하게 한다면 그게 일 명상이다. ■ 차 명상 기쁨과 고요함이 충만한 가운데 수행자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차를 마시며 함께 있음을 축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차 명상 시간에는 차와 옆의 친구들을 100% 인지한다. 말은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원한다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악기를 가져왔다면 기쁜 마음으로 연주하라. 차 명상 시간은 우리 안에 있는 행복의 씨앗에 물을 주는 시간이다.
86    안도 오호령 오봉산풍경 댓글:  조회:1625  추천:47  2007-10-26
                               안도 오호령 오봉산
85    가장 훌륭하게 참는 법 댓글:  조회:1566  추천:88  2007-10-25
♡ 가장 훌륭하게 참는 법♡ 나는 항상 이치를 살펴서 어리석음을 다스리니 어리석은 사람이 성내는 것을 보더라도 지혜로운 사람은 침묵으로 성냄을 항복받는다. 힘이 없으면서 힘 자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의 힘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진리를 멀리 벗어나니 이치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약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라 할 수 있으니 힘이 없으면 어찌 참고 용서하겠는가. 남에게 온갖 모욕을 당할지라도 힘있는 사람이 스스로 참아내는 것은 가장 훌륭한 참음이니 스스로 힘이 없어 굴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찌 참는 것이라 하겠는가.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듯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남이 나를 향해 불같은 성질을 내더라도 돌이켜서 스스로 침묵을 지켜라. 이러한 이치를 잘 지키면 스스로 이롭고 남에게도 이롭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침묵하고 참는 사람에게 자신이 이긴 것으로 여겨 오히려 험담을 하나니 모욕을 말없이 참아내는 사람이 언제나 이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애써 참는 것은 두렵기 때문에 참는 것이요, 자기와 같은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싸우기 싫어서 참는 것이며, 자기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이 가장 훌륭한 참음이다. 『 잡아함경(雜阿含經) 中에서 』 경전속의 참음-- 인욕(忍辱)바라밀비구들이여 혹은 어떤 도적이 와서 예리한 톱이나 칼로써 너희들의 몸을 마디마디 자른다고 하자. 비구들아, 만일 어떤 도적이 와서 예리한 톱이나 칼로써 너희들의 몸을 마디마디 자를 때, 혹 마음이 변하여 바뀌거나 입으로 나쁜 말을 한다면, 나는 '너희들은 그로 인해 반드시 쇠퇴하리라'고 말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어떤 도적이 와서 예리한 톱이나 칼로써 너희들의 몸을 마디마디 자를 때에도 마음이 변하여 바뀌지 않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며, 그 자르는 사람에게 자애로움과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마음은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1방(方)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고, 이렇게 2 3 4방과 4유 상하 일체에 두루하고, 마음은 자애로움과 함께하여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는 선행을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하여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이와 같이 불쌍히 여김과 기뻐함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마음은 평정함[捨]과 함께하여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매우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는 선행을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이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고,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해 마쳐야 한다. 너희들은 남이 좋지 못한 나쁜 말을 나에게 했을 때 내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모든 비구들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다시 모든 비구들을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여야 한다.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고 나면, 너희들은 동방에서 노닐더라도 반드시 안락을 얻어 여러 가지 괴로운 재앙이 없을 것이요, 남방 서방 북방에 노닐더라도 반드시 안락을 얻어 여러 가지 괴로운 재앙이 없을 것이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여야 한다. 너희들이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한다면, 나는 너희들이 모든 착한 법에 머무른다고도 말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쇠퇴한다고 말하겠는가? 밤 낮으로 착한 법만이 자라나고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너희들은 마땅히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여야 한다. 비구들아, 사문의 가르침인 예리한 톱과 칼의 비유를 자주자주 생각하고 나면, 2과(果) 중에서 반드시 그 하나를 얻을 것이니, 곧 현세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혹은 다시 남음이 있어 아나함(阿那含)을 얻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모리파군나경에서--『중아함경 』 제 50 권
84    화가 났을 때 -- 틱낫한 댓글:  조회:1507  추천:111  2007-10-25
화가 났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났을 때는 화가 나지 않은 척해서는 안 된다. 고통스럽지 않은 척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지금 화가 났으며 그래서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말은 아주 차분하고 침착하게 해야 한다.- 틱낫한의《화》중에서 -* 화가 나는 것,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화를 내는 것,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화를 다스리고 푸는 것입니다. 화를 다스릴 줄 모르면, 한 순간의 화가 자칫돌이킬 수 없는 재앙(禍)으로 돌아옵니다. 아래는 탓닉한스님의 <화>에서 발취한 화에 관한 글입니다. 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 것은 독을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히게 한다. 따라서 화를 다스릴때 우리는 미움,시기, 절망과의 사이에 얽혀있는 모든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수 있다...... 마음이 화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말아야 한다 말도 하지 말고 어떤 행동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 화가 났을 때 섣불리 말을 하거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서 화를 잘 보살펴야 한다. 감자를 삶을 때는 열이 발산되지 않도록 냄비 뚜껑을 닫아둔다. 이것이 곧 집중이다. 화를 끌어안기 위해서 호흡과 보행을 의식적으로 할 때는, 다른 것을 해서는 안 된다. 라디오를 들어도 안 되고 텔레비전을 봐도 안 되고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 냄비 뚜껑을 닫듯이 자기를 닫아놓아야 한다. 보행명상을 하고  의식적인 호흡을 하고 자신의 백 퍼센트를 던져서, 마치 칭얼대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있듯이 화를 끌어안아야 한다. 한참 동안 화를 끌어안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떤 통찰이 생기고 화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기분이 한결 좋아질 것이고 상대방에게 가서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것이다. 이것은 이윽고 냄비뚜껑을 열었을때 향기로운 냄새가 풍기는것과 마찬가지다. 화의 에네지가 자애의 에너지로 변한 것이다.........
83    7)폐숙경(弊宿經) 래생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변론 댓글:  조회:1186  추천:68  2007-10-24
폐숙경(弊宿經) 그 때 동녀(童女) 가섭(迦葉)은 五백 비구와 구살라국(拘薩羅國)에 노닐어 사파혜(斯波醯) 바라문 촌에 갔다. 때에 동녀 가섭은 사파혜촌의 북쪽에 있는 시사바숲[尸舍婆林]에서 머물렀다. 때에 폐숙(弊宿)이라는 바라문이 있어 사파혜촌에 머물렀다. 이 마을은 풍성하고 즐거워 사람은 많이 살며 수목은 무성했다. 바사익왕은 따로이 이 마을을 떼어 바라문 폐숙에게 주어 범분(梵分)으로 만들었다. 폐숙 바라문은 항상 이견(異見)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도 없어 또 다시 남도 없으며 선악의 갚음도 없다’고 말했다. ‘이 동녀 가섭은 큰 병상이 있고 이미 아라한이 되었다. 나이도 많고 덕이 높으며 많이 듣고 널리 알며 총명하고 지혜롭다. 그리고 그 변재는 상대를 따라 잘 연설한다. 이제 만나 보는 것도 또한 좋지 않을까’ 하고 서로 말했다. 때에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계속해 가섭을 찾아보았다. 그 때 폐속은 늙은 다락 위에서 그 마을 사람들이 떼를 지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가는 곳은 알 수가 없었다. 곧 좌우에서 일산을 듣고 있는 시자(侍者)에게 물었다.“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떼를 지어 가는가.”시자는 대답했다.“저는 들었습니다. 동녀 가섭이 五백 비구를 거느리고 구살라국을 둘러 시사바숲으로 왔다는 것과 또 그는 큰 이름이 있고 이미 아라한이 되어 나이도 많고 덕이 높으며 많이 듣고 널리 알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그 변재는 상대를 따라 잘 설명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가는 것은 그 가섭을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때에 폐숙 바라문은 곧 시자에게 분부했다.“너는 빨리 저 사람들에게 가서, ‘잠깐 기다려 같이 가서 만나자고 말하라. 무슨 까닭인가. 저 가섭은 어리석고 미혹하여 세상 사람을 속이고 있다. 곧 다른 세상이 있고 다시 남이 있으며 선악의 갚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른 세상도 없고 다시 남도 없으며 선악의 갚음도 없다.”시자는 곧 사파혜촌 사람들에게 가서 말했다.“우리 바라문의 말이 너희들은 좀 기다렸다가 같이 가서 만나자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답했다. “좋다 좋아. 만일 올 수 있다면 같이 가리라.” 시자는 돌아와 “저 사람들은 멈추고 있습니다. 가시려면 가소서.”라고 사뢰었다.때에 바라문은 곧 높은 다락에서 내려와 시자에게 명령하여 수레를 준비시켰다. 그는 저 마을 사람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이어 시사바촌으로 가서 차에서 내렸다. 걸어서 가섭에게로 나아가 인사를 나눈 뒤 한 쪽에 앉았다. 저 마을 사람의 바라문이나 거사(居士)들은 가섭을 예배한 뒤에 앉는 자도 있고 인사를 나눈 뒤에 앉는 자도 있으며 자기 이름만 댄 뒤에 앉는 자도 있고 손 깍지만 끼고 앉는 자도 있으며 잠자코 앉는 자도 있었다.때에 폐숙 바라문은 동녀 가섭에게 말했다.“이제 나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 틈을 내어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가섭은 대답했다.“그대의 묻는 바를 따라 들을 것이니 그리 알라.”바라문은 말했다.“이제 내 주장은 다른 세상도 없고, 다시 남도 없으며 죄와 복의 갚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주장은 어떠합니까.”가섭은 대답해 말했다.“나는 이제 그대에게 물을 것이니 그대는 생각대로 대답하라. 지금 위에 있는 해와 달은 이 세상인가 다른 세상인가 사람인가, 하늘인가.”바라문은 대답했다.“해와 달은 다른 세상이요 이 세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이요 사람이 아닙니다.”가섭은 대답했다.“이것으로써 알 수 있다. 반드시 다른 세상이 있다. 또 다시 남도 있고 선악의 갚음도 있다.”바라문은 말했다.“당신은 다른 세상이 있고 다시 남도 있으며 선악의 갚음이 있다고 말하지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모두 없는 것입니다.”가섭은 물었다. “사뭇 어떤 까닭이 있어서 다른 세상도 없고 다시 남도 없으며 선악의 갚음도 없는 줄을 아는가.”바라문은 대답했다.“까닭이 있습니다.”가섭은 물었다.“어떤 까닭으로 다른 세상이 없다고 하는가.”바라문은 말했다.“가섭이여, 내 친족이 병을 앓아 매우 고생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각각 다른 소견을 가지고 말한다. 모든 살생, 절도, 사음, 두말, 욕설, 거짓말, 꾸밈말, 탐취, 질투, 사견을 가진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다 지옥에 들어간다고.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왜냐 하면 아직 죽은 사람으로서 다시 돌아와 그가 태어난 곳을 말해 주는 것을 전연 보지 못했다. 만일에 죽은 사람이 와서 태어난 곳을 말한다면 나는 반드시 믿어 받을 것이다. 이제 너는 나와 친하고 또 十악도 갖추고 있다. 만일 저 사문의 말과 같다면 너는 죽어 반드시 큰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이제 나는 너를 믿고 너의 말을 따라 결정할 것이다. 분명히 지옥이 있거든 너는 마땅히 돌아와 내게 말해 알려라. 그런 뒤에야 믿을 것이다’라고. 가섭이여, 그는 죽었지마는 지금까지 내게 오지 않습니다. 그는 제 친족으로서 아마 나를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반드시 뒷세상은 없는 것입니다.”가섭은 대답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도 이제 그대를 위해 비유를 끌어와 그것을 깨닫게 하리라. 비유하면 도적은 항상 간사한 꾀를 가지고 금하는 법을 범했다. 경관에게 잡혀 왕에게 가서 아뢰었다. ‘이 사람은 도적입니다. 원컨대 왕은 다스리소서.’ 왕은 곧 좌우에 명령했다. ‘그 사람을 결박지어 거리에 두루 포고한 뒤 그를 싣고 성을 나가 사형을 집행하는 자에게 맡겨라.’ 때에 좌우의 사람들은 곧 그 도적을 끌어다 사형 집행자에게 맡겼다. 그 도적은 부드러운 말로 수위(守衛)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놓아주시오. 고향의 모든 친족들을 만나 작별의 인사를 마친 뒤에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고. 어떨까 바라문이여, 저 수위는 즐거이 그를 놓아주겠는가.”바라문은 말했다.“안됩니다.”가섭은 또 말했다.“그는 다 같은 인류요 또 현세에 함께 살고 있지마는 오히려 놓아주지 않는다. 하물며 너의 친족은 十악을 갖추어 있는 자, 몸이 죽고 명이 끝나면 반드시 지옥에 들것이다. 지옥의 귀신은 사랑도 없고 또 인류도 아니며 죽음과 삶이 세상을 달리하고 있다. 그대가 만일 부드러운 말로 지옥의 귀신에게 요구하기를 ‘너는 잠깐 나를 놓아 다오. 나는 세간에 돌아가 친족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한 뒤에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한다면 놓여질 수 있겠는가.”바라문을 대답했다.“안됩니다.”가섭은 또 말했다.“이것으로 서로 비교해 보면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미(迷)를 지켜 스스로 사견(邪見)을 내는가.”바라문은 말했다.“당신은 비유로써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지마는 나는 그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가섭은 다시 말했다.“그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아는가.”바라문은 대답했다.“내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압니다.”가섭은 물었다.“어떤 이유로 아는가.”그는 대답했다.“가섭이여, 내 친족으로서 병을 만나 위독한 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각각 다른 소견을 가지고 다른 세상이 있다고 말한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두말과 욕설과 거짓말과 꾸밈말과 탐취와 질투와 사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다 천상에 난다고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죽은 사람이 돌아와 태어난 곳을 말하는 것을 전연 보지 못했다. 만일 죽은 사람이 와서 태어난 곳을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반드시 믿으리라. 이제 너는 나와 친하고 또 十선(善)을 갖추고 있다. 만일 사문의 말과 같다면 너는 이제 목숨을 마치면 반드시 천상에 나리라. 이제 나는 너를 믿고 네 말을 따라 결정할 것이다. 만일 분명히 하늘의 갚음이 있거든 너는 마땅히 와서 내게 말해 알려라. 그런 뒤에 나는 믿으리라.’ 가섭이여,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 지금까지 오지 않습니다. 그는 내 친족이라 나를 속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반드시 다른 세상이 없는 것입니다.”가섭은 또 말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또 그대를 위해 비유를 말하리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깊은 뒷간에 떨어져 머리까지 빠졌다. 왕은 좌우에 명령하여 그 사람을 끌어내어 대나무로 죽비를 만들어 세 번 그 몸을 긁고 조두와 정회(淨恢)로 여러 번 씻는다. 다음에는 향탕(香湯)에 목욕시켜 여러 가지 고운 가루 향으로 그 몸에 뿌리고 이발사를 시켜 그 수염과 머리를 깨끗이 깎인다. 또 좌우에 명령하여 거듭 씻긴다. 이렇게 세 번을 되풀이하고 향탕에 목욕하고 향가루를 몸에 뿌리며 좋은 옷으로 그 몸을 꾸미고 온갖 맛나는 음식으로 그 입을 만족시키며 다시 높은 집에 올라가 五욕(欲)으로써 향락시킨다. 그 사람이 뒷날에 다시 그 뒷간에 들어가려고 하겠는가.”그는 대답했다.“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은 냄새나고 악한 곳인데 어떻게 도로 들어가려 하겠습니까.”가섭은 말했다.“모든 하늘도 또한 그렇다. 이 염부리지(閻浮利地)는 냄새나고 더러워 깨끗하지 못하다. 모든 하늘은 위에 있어 여기서 백 유순(由旬)이나 되지마는 멀리서 사람의 냄새를 맡으면 뒤간 냄새보다 심한 것이다. 바라문이여, 그대의 친족과 친구들은 十선을 갖추었으므로 반드시 하늘에 났을 것이다. 五욕으로 스스로 즐기며 쾌락이 끝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즐거이 이 염부리지로 돌아오려고 하겠는가.”“그는 대답했다.“아닙니다.”가섭은 또 말했다.“이로써 서로 비교해 보면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미(迷)를 지켜 스스로 사견(邪見)을 내는가.”바라문은 말했다.“당신은 비유를 끌어와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지마는 나는 그래도 없다고 말합니다.”가섭은 다시 말했다.“그대는 또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아는가.”바라문은 대답했다.“내게는 다시 다른 이유가 있어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압니다.”가섭은 물었다.“무슨 비유로 아는가.”그는 대답했다.“가섭이여, 내 친족으로서 병에 걸려 매우 위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가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사문 바라문들은 각각 다른 소견을 가지고 뒷세상이 있다고 말한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사음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도리천에 난다고 하나 나는 또한 믿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아직 죽은 사람이 돌아와 태어난 곳을 말하는 것을 전연 보지 못했다. 만일 죽은 사람이 와서 태어난 곳을 말한다면 나는 꼭 믿을 것이다. 이제 너는 나와 친하고 또 五계(戒)도 구족했으니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도리천에 날 것이다. 나는 너를 믿고 네 말을 따라 결정하리라. 만일 분명히 하늘의 복이 있거든 너는 마땅히 돌아와 내게 말해 알려라. 그런 뒤에 나는 마땅히 믿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가섭이여, 그는 이미 죽었지마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친족이라 나를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반드시 다른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가섭은 대답했다.“이 인간 세상의 백 세는 바로 도리천의 하루 낮 하루 밤에 해당한다. 이렇게 하여 또한 三十일을 一개월로 하고 十二개월을 一년으로 한다. 이렇게 하여 저 하늘의 수명은 천 세다. 어떤가 바라문이여, 네 친족으로 五계를 구족한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반드시 도리천에 났을 것이다. 그는 하늘에 나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처음으로 여기 났다. 마땅히 二 三일 동안 여기서 즐거이 놀다가 그 다음에 내려가 그대에게 알리리라’한다면 그대를 볼 수 있겠는가.”그는 대답했다.“안됩니다. 나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일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보겠습니까.”바라문은 말했다.“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 와서 당신에게 도리천이 있고 그 수명은 그렇다고 말했습니까.”가섭은 말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끌어오리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나면서부터 장님이 되어 五백의 파랑, 노랑, 빨강, 하양과 굵고 가는 것과 길고 짧은 것을 모르며 또 해와 달과 별과 구름과 골짝을 보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이 장님에게 물었다. ‘파랑, 노랑, 빨강, 하양의 五색이 어떤가.’ 장님은 대답했다. ‘五색은 없다. 그와 같이 굵고 가는 것과 길고 짧은 것과 해와 달과 별과 산언덕과 골짝도 다 없다’고. 어떤가. 바라문이여, 저 장님의 말은 바른 대답인가.”그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왜냐 하면 세간에는 현재 五색의 파랑, 노랑, 빨강, 하양과 굵고 가는 것과 길고 짧은 것과 해와 달과 별과 산언덕과 골짝들이 있는데 그는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바라문이여, 그대도 또한 그와 같다. 도리천의 수명은 실로 있어 빈 것 아니다. 그대는 스스로 보지 못하고 곧 없다고 하는 것이다.”바라문은 말했다.“당신은 있다고 하지마는 나는 그래도 믿지 않습니다.”가섭은 또 말했다.“그대는 또 어떤 다른 이유로 그것이 없는 줄 아는가.”그는 대답했다.“가섭이여, 내가 봉(封)함을 받은 촌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관이 붙잡아 와서 내게 말했습니다.‘이 사람은 도적입니다. 원컨대 다스리십시오.’ 나는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을 묶어 큰 가마솥에 넣고, 가죽으로 동이고 진흙으로 덮어 굳게 봉해 새지 말게 하라. 그리고 사람을 시켜 둘러싸고 솥에 불을 때어 다려라. 나는 그 때에 그 사람의 정신이 나가는 곳을 보아 알고자 하여 모든 시종(侍從)을 데리고 솥을 둘러싸고 보았지마는 그 정신의 오가는 곳은 보지 못했습니다. 또 그 솥을 열고 보았지마는 또한 정신의 오고가는 곳의 흔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이유로써 다른 세상이 없는 것을 압니다.““가섭은 또 말했다.“나는 이제 그대에게 물으리라. 만일 답할 수 있거든 마음대로 대답하라. 바라문이여, 너는 높은 다락에 누워 잠잘 때 일찍 꿈에 산림과 강하와 동산과 욕지(浴池)와 나라와 고을과 거리를 보았는가.”그는 대답했다.“꿈에 보았습니다.”또 물었다.“바라문이여, 그대가 꿈꾸고 있을 때 그대 집의 권속들은 그대를 모시고 있었던가.”그는 대답했다.“모시고 있었습니다.또 물었다.“바라문이여, 너의 모든 권속들은 너의 식신(識神)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던가.”그는 대답했다.“보지 못했습니다.”가섭은 또 말했다.“그대는 이제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식신의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죽은 사람에게 있어서이겠는가. 그대는 눈앞의 현재의 일로써만 중생을 관찰해서는 안 된다. 바라문이여, 어떤 비구가 있어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정근하고 게으르지 않아 오로지 도품(道品)을 생각하고 삼매의 힘으로써 하늘눈[天眼]을 깨끗이 닦고 하늘 눈의 힘으로써 중생을 관찰한다. 그 때 그는 중생들이 여기서 죽어 저기 가서 나고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나며 수명의 길고 짧음과 안색의 좋고 더러움과 행을 따라 갚음을 받아 좋고 나쁜 세계에 가는 것을 다 보아 안다. 그대는 더럽고 흐린 육안(肉眼)으로써 중생의 가는 것을 보아 안다. 그대는 더럽고 흐린 육안(肉眼)으로써 중생의 가는 곳을 환히 보지 못하고 덮어놓고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바라문이여, 이로써 반드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바라문은 말했다.“당신은 비유를 끌어와 다른 세상이 있다고 말하지마는 내 소견 같아서는 그래도 없습니다.”가섭은 또 말했다.“그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다른 세상이 없는 줄을 아는가.”바라문은 말했다.“있습니다.”가섭은 말했다.“어떤 이유로 아는가.”바라문은 말했다.“내가 봉(封)함을 받은 촌에 도둑질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관이 붙잡아 내게 와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도적입니다. 오직 원컨대 다스리십시오.’나는 좌우에 명령하여 그 사람을 묶고 그 가죽을 산채로 벗겨 그 식신(識神)을 찾았으나 도무지 보지 못했습니다. 또 좌우에 명령하여 그 살을 베어 식신을 찾았으나 또 보지 못했습니다. 또 좌우에 명령하여 그 힘줄을 끊고 뼈 속에서 식신을 찾았으나 또 보지 못했습니다. 또 좌우에 명령하여 뼈를 쪼개고 수(髓)를 내어 수 속에서 식신을 찾았으나 또 보지 못했습니다. 가섭이여, 나는 이 이유로 다른 세상이 없는 줄을 압니다.”가섭은 다시 말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또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끌어오리라. 먼 옛날 과거에 어떤 나라가 있어 그것은 거칠고 허물어져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때에 어떤 상인이 五백대의 차로 그 땅을 지났다. 어떤 바라문은 화신(火神)을 섬기면서 항상 한 숲에 머무르고 있었다. 모든 상인들은 거기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른 아침에 하직하고 갔다. 그때 불을 섬기는 바라문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까 여러 상인들은 이 숲 속에서 자고 이제 떠났다. 혹 무엇을 빠뜨리지나 않았는가. 시험삼아 가 보리라.’ 곧 거기 가 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고 다만 한 살 난 어린애가 그 자리에 있었다. 바라문은 다시 생각했다. ‘내 이제 어찌 이 어린애를 차마 내 앞에서 죽게 하랴. 이제 차라리 이 아이를 내가 사는 곳에 데리고 가서 기르리라’고. 곧 어린애를 안고 사는 곳으로 돌아와 길렀다. 그 아이는 점점 자라 十여살이 되었다. 때에 이 바라문은 어떤 조그마한 일이 있어 속세에 가려고 아이에게 말했다. ‘나는 무슨 볼일이 있어 잠깐 떠나고자 한다. 너는 이 불을 잘 보호해 부디 꺼지지 않도록 하라. 만일 불이 꺼지거든 송곳으로 나무를 비비어 불을 일으켜 그것을 태우라.’ 이렇게 자세히 일러주고 숲을 나와 길을 떠났다. 바라문이 떠난 뒤 어린애는 장난에 빠져 자주 불을 돌보지 않아 불은 그만 곧 꺼져 버렸다. 어린애는 놀다가 돌아와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번민하면서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떠나실 때 자세히 약속하면서 내게 분부하셨다. 이 불을 잘 지켜 부디 꺼지게 하지 말라고. 그런데 나는 장난에 빠져 그만 불을 꺼지게 했다. 이것을 어쩌면 좋을까.’때에 그 어린애는 재를 불면서 불을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다시 도끼로 나무를 쪼개어 불을 찾았으나 또 얻지 못했다. 다시 나무를 끊어 절구통에 넣고 찧으면서 불을 찾았으나 또 얻지 못했다. 그 때 바라문은 속세에서 돌아와 숲 속으로 가서 어린애에게 물었다.‘내 먼저 너에게 당부하여 불을 잘 보살피라고 하였는데 불은 꺼지지 않았느냐.’어린애는 대답했다.‘저는 먼저 나가 노는 바람에 자주 보살피지 않아 불은 이제 이미 꺼졌습니다.’다시 어린애에게 물었다.‘너는 어떤 방편으로 다시 불을 찾으려 하였느냐.’어린애는 대답했다.‘불은 나무에서 나는 것입니다. 저는 도끼로 나무를 쪼개어 불을 찾았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다시 그것을 끊어 부수어 절구통에 넣고 찧으면서 불을 구했으나 불은 다시 얻지 못했습니다.’때에 그 바라문은 송곳으로 나무를 비비어 불을 내어 섶을 쌓아 태우면서 어린애에게 말했다.‘대개 불을 구하는 법은 이런 것이다. 그저 나무를 쪼개고 절구로 찧고 해서 구할 것이 아니다.’바라문이여, 그대도 또한 이러한 방편도 없이 죽은 사람의 가죽을 벗기어 식신을 구했다. 그대는 눈앞에 나타난 일만으로 중생을 관찰해서는 안 된다. 바라문이여, 어떤 비구가 있어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정근하여 게으르지 않으며 오로지 도품(道品)을 생각하여 삼매의 힘으로써 하늘 눈을 깨끗이 닦고 하늘 눈의 힘으로써 중생을 관찰하여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고,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나며 수명의 길고 짧음과 안색의 좋고 추함과 행을 따라 갚음을 받아 선악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다 보아 안다. 그대는 더럽고 흐린 육안으로써 중생의 가는 세계를 환히 보지 못하고 그저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바라문이여, 이로써 반드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바라문은 말했다.“당신은 비유를 끌어와 다른 세상이 있다고 말하지마는 내 소견 같아서는 아직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가섭은 다시 말했다.“그대는 다시 다른 이유가 있어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아는가.”바라문은 말했다.“있습니다.”가섭은 말했다.“어떤 이유로 아는가.”바라문은 말했다.“내가 봉함을 받은 촌에 도둑질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관이 붙잡아 내게 와서 ‘이 사람은 도적입니다. 오직 원컨대 이것을 다스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좌우에 명령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려다 저울로써 달아 보라.’ 시자들은 명령을 받고 곧 저울로 달았습니다. 나는 또 시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려다 편안히 두고 그것을 죽이되 가죽과 살은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자들은 내 명령을 받고 곧 그를 죽이되 상처를 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시 좌우에 명령하여 그것을 거듭 달았을 때 그것은 본래보다 무거웠습니다. 가섭이여, 그를 살려 두고 달았을 때에는 그는 식신이 아직 있어 안색은 아름답고 또 능히 말까지 했는데 그 몸은 가벼웠습니다. 그를 죽여 다시 달았을 때에는 식신은 이미 없어져 안색도 없고 또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 몸은 더 무거웠습니다. 나는 이런 이유로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압니다.”가섭은 바라문에게 말했다.“내 이제 그대에게 물으리라. 그대는 생각대로 내게 답하라. 사람이 쇠를 다는 것과 같다. 먼저 찰 때에 달고 다음에 뜨거울 때 달면 어떻게 광색(光色)이 있고 부드러운데 가벼우며 어떻게 광색이 없고 단단한데 무거운가.”바라문은 말했다.“뜨거운 쇠는 빛이 있고 부드러워 가볍고, 찬 쇠는 빛이 없고 단단하여 무겁습니다.”가섭은 말했다.“사람도 그와 같다. 살아서는 안색이 있고 부드러워 가볍고, 죽어서는 안색이 없고 단단하여 무겁다. 이로써 반드시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바라문은 말했다.“당신은 비유를 끌어와 다른 세상이 있다고 말하지마는 내 소견 같아서는 없습니다.”가섭은 말했다.“그대는 또 어떤 이유가 없어 다른 세상이 없는 줄 아는가.”바라문은 대답했다.“내 친족의 어떤 사람은 병이 들어 위중했습니다. 때에 나는 거기 가서 그 병인을 부축해 오른쪽으로 눕히매 바라보는 것이나 굽히고 펴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습니다. 또 왼쪽으로 눕혀도 뒤엎기와 뒹굴기와 굽펴기와 바라보기와 말하는 것이 보통과 같았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내 다시 사람을 시켜 부축해 굴리고 하고 왼쪽으로 눕히고 오른쪽으로 눕히기를 되풀이하면서 자세히 보매 다시는 굽펴기도 바라보기도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로써 반드시 다른 세상이 없는 줄을 압니다.”가섭은 다시 말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해 비유를 끌어오리라. 옛날 어떤 나라는 고동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때에 고동을 잘 부는 어떤 사람이 그 나라에 갔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 고동을 들어 세 번 불고 땅에 놓아두었다. 그 마을 사람의 남녀들은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모두 가서 물었다. ‘이것은 무슨 소리기에 이처럼 슬프고 부드러우며 맑고 트이었습니까.’ 그 사람은 고동은 가르치면서 말했다. ‘이 물건의 소립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손을 고동에 대보면서 말했다.‘너 소리를 내어라, 너 소리를 내어라.’그러나 고동은 도무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주인은 곧 고동을 들고 세 번 불고 땅에 두었다. 때에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아까 그 아름다운 소리는 이 고동의 힘이 아니라 손이 있고 입이 있고 기운이 있어 분 뒤에 라야 비로소 고동은 운다’하였다. 사람도 또한 그와 같다. 목숨이 있고 식(識)이 있고 숨결의 출입이 있어야 곧 능히 굽히고 펴고 바라보고 말한다. 목숨이 없고 식이 없고 출입하는 숨결이 없으면 곧 굽히고 펴고 바라보고 말하지 못한다.”또 바라문에게 말했다.“그대는 이제 마땅히 이 사악(邪惡)한 소견를 버리고 영원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 고뇌를 더하지 말게 하라.”바라문은 말했다.“나는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나는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외우고 익히어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버리겠습니까.”가섭은 다시 말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끌어오리라.오랜 옛날에 어떤 나라가 있었다. 그 땅은 치우쳐 있고 백성들은 피폐하였다. 그 나라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지혜롭고 다른 한 사람은 어리석었다. 그들은 서로 말했다. ‘나는 네 친구다. 우리 함께 성을 나가 짝이 되어 재물을 구하자.’ 그들은 곧 짝해 나갔다. 길가의 어떤 빈터에 이르러 삼이 있는 것을 보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함께 돌아가자고 하였다.때에 그들은 각각 한 짐씩 메고 다시 앞마을을 지나다가 삼실을 보았다. 그 지자(智者)는 말했다. ‘삼실은 공이 다된 것이요 또 가볍다. 우리 가지자.’ 그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이미 삼을 가져 단단히 묶어 있다. 이것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그 지자는 곧 삼실을 가지고 무거운 짐은 버렸다. 그들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다가 삼베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지자는 말했다. ‘이 삼베는 공이 다된 것이요 또 가볍다. 이것을 가지자’고 하였다. 그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이미 삼을 가져 단단히 묶었기 때문에 이제 버릴 수 없다’고 했다. 그 지자는 곧 삼실을 버리고 삼베를 가졌다. 그리고 스스로 소중히 여겼다.그들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다가 솜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지자는 말했다. ‘솜은 값이 비싸고 또 가볍다. 저것을 가지자.’ 다른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이미 삼을 가져 단단히 묶었고 먼길을 가지고 왔다. 버릴 수 없다.’ 때에 그 지자는 곧 삼베를 버리고 솜을 가졌다. 이렇게 앞으로 가다가 솜실을 보고 다음에 흰 천을 보고 다음에는 백동(白銅)을 보고, 다음에는 백은(白銀)을 보고, 다음에는 황금을 보았다. 그 지자는 말했다. ‘만일 금이 없으면 백은을 가질 것이다. 만일 백은이 없으면 백동이나 내지(乃至) 삼실이라도 가질 것이요 만일 삼실이 없으면 삼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마을에 황금이 많이 있으니 뭇 보배 중에 으뜸이다. 너는 마땅히 삼을 버려라. 나도 또한 백은을 버리리라. 그래서 우리 함께 황금을 가지고 스스로 소중히 여기며 돌아가자’고 했다. 그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이 삼을 가져 단단히 묶었고 또 가지고 오느라고 먼길을 걸었다. 버릴 수 없다. 너는 가지고 싶은 대로 가져라.’ 그 지자는 은을 버리고 황금을 취해 한 짐 잔뜩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족은 멀리서 그 사람이 많은 황금을 얻은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맞이했다. 때에 황금을 얻은 지자는 친족이 맞이하는 것을 보고 다시 크게 기뻐했다. 저 무지한 사람은 삼을 지고 돌아왔다. 친족들은 그것을 보고 불쾌히 생각하고 또 일어나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 삼을 지고 온 자는 더욱 더욱 부끄러워하고 번민했다.바라문이여, 그대도 이제 그 악한 습관과 비뚤어진 소견을 버리어 영원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 고뇌를 더하도록 하지 말라. 그것은 마치 저 삼을 진 사람의 고집이 굳세어 금을 취하지 않고 삼을 지고 돌아왔다가 부질없이 스스로 피로하고 친족들이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빈궁하여 스스로 걱정과 고통을 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바라문은 말했다.“나는 끝내 이 소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나는 이 소견으로써 남을 많이 가르쳤고 또 이익 되는 바가 많았습니다. 사방의 모든 왕들은 다 내 이름을 듣고 모두 내가 단멸(斷滅)을 주장하는 학자인 줄 알고 있습니다.”가섭은 다시 말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끌어오리라. 오랜 옛날에 어떤 국토가 있었다. 그 국토는 치우쳐 있어 백성들은 피폐했었다. 때에 천대의 수레를 가진 한 떼 장사꾼이 그 땅을 지났다. 물과 곡식과 섶풀은 스스로 댈 수가 없었다. 때에 상인의 주인은 생각했다. ‘우리는 사람은 많고 물과 곡식과 섶풀은 스스로 댈 수가 없다. 이제는 차라리 두 패로 가르자.’ 그 한 떼는 먼저 출발했다. 그 먼저 출발한 떼 장수의 길잡이는 어떤 몸이 크고 눈이 붉고 얼굴은 검으며 그 몸에는 진흙을 바른 한 사람을 보았다. 그가 멀리 오는 것을 보고 곧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오는가.’ 그는 대답했다. ‘나는 앞 마을에서 온다.’ 또 그에게 물었다. ‘네가 오는 곳에는 물과 곡식과 섶풀이 많던가.’ 그 사람은 대답했다. ‘내가 지난 곳에는 물과 곡식과 섶풀이 많이 있어 모자라지 않았다. 나는 도중에서 폭우를 만났는데 거기에는 물도 많고 또 섶풀도 풍부했다.’ 그리고 상인의 주인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수레에 만일 양식이나 물이 있거든 다 버려라. 저기는 그것들이 많이 있다. 구태여 수레를 무겁게 할 필요가 없다’고.때에 그 상인들의 주인은 여러 상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아까 앞에 가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는 눈이 붉고 얼굴은 검으며, 그 몸에는 진흙을 발랐었다. 나는 멀리서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오느냐.’ 그는 곧 내게 말했다. ‘나는 앞 마을에서 온가.’ 나는 곧 물었다. ‘네가 오는 곳에는 물과 곡식과 섶풀이 많던가.’ 그는 내게 대답했다. ‘그곳에는 풍부히 있었다.’ 그리고 또 내게 말했다. ‘아까 도중에서 만났는데 거기에는 풀도 많고 또 섶풀도 풍부했다.’ 그는 다시 네게 말했다. ‘만일 그대들 수레에 곡식이나 풀이 있거든 그것을 다 버려라. 거기는 그것들이 풍부하여 구태여 수레를 무겁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각각 모든 곡식과 풀을 버리고 수레를 가볍게 하여 빨리 나아가자. 이렇게 하여 하루를 가도 물과 풀을 보지 못했다. 二일, 三일, 내지 七일을 가도 또 보지 못했다. 때에 상인들은 넓은 늪에서 헤매다가 귀신에게 잡아 먹혔다.그 뒤에 다른 한 떼가 또 길을 떠났다. 상인들의 주인은 또 한 사람을 보았다. 눈은 붉고 얼굴은 검으며 그 몸은 진흙으로 발랐다. 멀리서 보고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오느냐.’ 그 사람은 대답했다. ‘앞 마을에서 온다.’ 또 물었다. ‘네가 오는 곳에는 물과 곡식과 섶풀이 많던가.’ 그 사람은 대답했다. ‘매우 많았다.’ 그는 또 상인의 주인에게 말했다. ‘나는 도중에서 폭우를 만났다. 거기에는 물도 많고 섶풀도 많았다.’ 그리고 또 상인의 주인에게 말했다. ‘만일 그대들의 수레 위에 곡식이나 풀이 있거든 곧 모두 버려라. 저기는 그것들이 많이 있다. 구태여 수레를 무겁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때에 상인의 주인은 돌아와 모든 상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아까 앞에 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만일 그대들의 수레 위에 곡식이나 풀이 있거든 다 버려라. 저기는 그것들이 풍부하게 있다. 구태여 수레를 무겁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상인의 주인은 말했다. ‘너희들은 부디 곡식이나 물을 버리지 말라. 모름지기 새것을 얻거든 마땅히 그것을 버려라. 왜냐 하면 새것과 묵은 것이 서로 계속되는 뒤에 라야 비로소 이 광야를 지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상인들은 무거운 수레로 갔다. 이렇게 하루 동안을 가도 물과 풀을 보지 못했다. 二일, 三일 내지 七일을 가도 또 볼 수 없었다. 다만 귀신에게 먹힌 앞사람들의 해골이 흩어진 것만을 볼뿐이었다. 바라문이여, 저 눈이 붉고 얼굴이 검은자는 나찰귀(羅刹鬼)였다. 그대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어둠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도 또한 저들과 같을 것이다. 앞에 떠난 상인들은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길잡이의 말을 따라 자지 자신을 멸망시킨 것이다. 바라문이여, 모든 사문 바라문들의 정신과 지혜로써 말한 바 있으니 그 가르침을 받들어 쓰면 곧 영원히 안락을 얻을 것이다. 저 뒤의 떼장수들은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위험과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제 그 악한 소견은 버리어 영원히 스스로 고뇌를 더하게 하지 말라.”바라문은 말했다.“나는 아무래도 내 소견을 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사람이 와서 억지로 나는 충고하더라도 나의 감정만 상하게 할 뿐 나는 끝내 내 소견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가섭은 또 말했다.“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끌어오리라. 오랜 옛날에 한 국토가 있었다. 그 나라는 치우쳐 있었고 백성들은 피폐해 있었다. 때에 어떤 사람이 있어 그는 즐거이 돼지를 길렀다. 그는 어떤 빈 마을에 가서 마른 똥이 있는 것을 보고 혼자 생각했다. ‘여기 많은 똥이 있다. 우리 돼지는 굶주리고 있다. 나는 이제 이 마른 똥을 풀에 싸서 머리에 이고 가리라.’ 그는 곧 풀을 뜯어 똥을 싸서 머리에 이었다. 도중에서 큰비를 만나 똥물이 흘러내려 발꿈치에까지 이르렀다. 여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다 미친 사람이라 했다. ‘그 구린내 나는 똥을 맑은 날에도 이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비오는 날에 그것을 이고 가다니.’ 그 사람은 화를 버럭 내어 도리어 꾸짖었다. ‘너희들은 미련하여 우리 집 돼지가 굶는 것을 모른다. 너희들이 만일 그런 줄을 안다면 나의 미련한 것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라 했다. 부질없이 미혹을 지켜 영원히 어둠 속에서 고통을 받는 일이 없게 하라. 그대는 저 어리석은 자가 똥을 이고 가는 것과 같다. 그는 여러 사람의 충고를 듣고 도리어 욕하고 꾸짖으면서 그들을 어리석다고 한다.”바라문은 가섭에게 말했다.“당신들은 만일 선을 행하면 하늘에 나므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면 당신들은 마땅히 칼로써 스스로 목을 찌르던지 독약을 마시고 죽던지 혹은 몸을 다섯 가지로 묶어 스스로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던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삶을 탐하여 죽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곧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가섭은 다시 말했다.“보든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끌어오리라. 옛날 이 사파혜촌에 어떤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늙어 나이는 백 二十세였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다. 하나는 먼저 아들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으로 아이를 배었다. 때에 그 바라문은 얼마 있지 않다가 목숨을 마쳤다. 그 큰어머니의 아들은 작은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가진 재보(財寶)는 마땅히 모두 내게 달라. 네가 가질 몫은 없다고 했다. 때에 작은어머니는 말했다. ‘너는 잠깐 내가 몸을 풀기를 기다려라. 만일 사내를 낳거든 마땅히 재물을 가르고, 만일 딸애를 낳거든 네가 장가들어 마땅히 그 재물을 가지라.’ 그 아들은 치근치근 재삼 재물을 요구했다. 작은어머니는 전과 같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조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때에 그 작은어머니는 곧 날선 칼로 스스로 그 배를 갈라 사내인가 계집인가를 알려고 했다.”다시 바라문에게 말했다.“그 어머니는 이제 자살함으로서 또 태아를 죽였다. 바라문이여, 그대도 또한 그와 같다. 이미 자신을 죽이고 또 남을 죽이려 한다. 만일 사문 바라문이 꾸준히 힘써 착함을 닦고 계덕(戒德)을 두루 갖추어 이 세상에 오래 살면 이익 됨이 많아 천상과 인간은 안락을 얻을 것이다.   나는 이제 최후로 그대를 위해 비유를 끌어와 마땅히 그대에게 악한 소견의 재앙 되는 것을 알게 하리라. 옛날 이 사파혜촌에 두 노름꾼이 있어 주사위 놀이를 잘했다. 그들은 재주를 다투어 한 사람이 이겼다. 때에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은 우선 그만 두고 내일 다시 시합하자.’ 그 진 사람은 곧 집으로 돌아가 주사위에 독약을 발라 말렸다. 이튿날 그것을 가지고 이긴 사람에게 가서 말했다. ‘다시 시합하자.’ 곧 앞으로 나아가 함께 놀았다. 그는 먼저 독약을 바른 주사위를 이긴 자에게 주었다. 이긴 자는 곧 그것을 머금었다. 그 진 사람이 다시 독약의 주사위를 주자 그는 곧 머금었다. 그 독기는 온 몸에 돌아 몸이 떨렸다. 때에 진 사람은 게송으로 꾸짖었더란다.”내 독약을 주사위에 발랐는데너는 머금어 깨닫지 못하는구나조그마한 재주로 너 머금었지만오랜 뒤에는 마땅히 절로 아리.가섭은 바라문에게 말했다.“그대는 이제 빨리 그 악한 소견을 버리어 온전한 미혹으로 스스로 쓰거운 독을 더하게 하지 말라. 너는 저 노름꾼이 독을 머금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때에 바라문은 가섭에게 사뢰었다.“존자(尊者)여, 당신이 처음에 달 비유를 말씀하실 때 나는 그 때 이미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당장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은 가섭의 변재와 지혜를 보고 굳건한 믿음을 얻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것을 믿어 받자와 가섭에게 귀의합니다.”가섭은 대답했다.“그대는 내게 귀의하지 말라. 내가 귀의하는 위없이 높은 어른에게 그대는 마땅히 귀의하라.”바라문은 말했다.“귀의해야 할 높은 어른은 지금 어디 계신지요.”가섭은 대답했다.“이제 내 스승님 세존은 멸도(滅度)하신 지 오래지 않다.”바라문은 말했다.“세존이 만일 계신다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마땅히 직접 뵈옵고 귀의 예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섭의 말씀을 들으면 ‘여래는 이미 멸도 하셨다’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곧 멸도 하신 여래와 법과 스님네에게 귀의합니다. 가섭이여, 내가 정법 가운데서 우바새가 되는 것을 허락하십시오. 나는 지금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간음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또 나는 마땅히 큰 보시를 행하겠습니다.”가섭은 말했다.“만일 그대가 중생을 살해하고 하인들을 때린다면 아무리 모임[會]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깨끗한 복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 자갈들 많은 메마른 땅에는 가시덩쿨이 많이 나서 거기에는 씨를 뿌려도 반드시 얻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대가 만일 중생을 살해하고 하인들을 때리고 큰 모임을 열어 사견(邪見)을 가진 대중에게 보시하면 그것은 깨끗한 복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크게 보시를 행하고 중생을 해치지 않으며 회초리로 종들을 때리지 않고 즐거이 모임을 열어 청정한 대중에게 보시한다면 그것은 곧 큰복을 거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좋은 밭에는 언제나 종자를 뿌려도 그 열매를 얻는 것과 같다.”“가섭이여, 지금부터 나는 항상 스님네들에게 깨끗한 보시를 행하여 끊지 않겠습니다.”때에 한 젊은 바라문이 있어 이름을 마두(摩頭)라고 했다. 그는 폐숙의 뒤에 서 있었다. 폐숙은 돌아보고 말했다.“나는 지금 일체의 큰 보시를 행하고자 한다. 너는 마땅히 나를 위하여 경영하고 처리하라.”때에 젊은 바라문은 폐숙의 말을 듣고 곧 그를 위하여 경영하여 크게 보시를 행해 마쳤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폐숙은 금생 후생의 복의 갚음을 얻지 말아지이다’라고 했다. 때에 폐숙은 저 바라문이, 보시를 경영해 마치고 이런 말을 들었다. ‘원컨대 폐숙은 금생 후생의 복의 갚음을 얻지 말아 지이다’라고. 그는 바라문에게 명령해 말했다.“너는 분명히 그런 말을 했는가.”그는 대답했다.“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왜냐 하면 이제 베푼 음식은 모두 추하고 떫은 거친 음식인데 그것으로써 스님네들에게 보시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왕 폐숙에게 드린다면 왕은 오히려 잠깐이라도 손을 대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그것을 스스로 잡수시겠습니까. 현재에 보시한 것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 못되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뒷세상에 깨끗한 과보를 얻겠습니까. 왕은 스님에게 옷을 보시할 때 순 삼베로써 합니다. 만일 그것을 왕에게 드린다면 왕은 오히려 잠깐이라도 발을 대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그것을 스스로 입으시겠습니까. 현재에 보시한 것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뒷세상에 깨끗한 과보를 얻겠습니까.”때에 바라문 폐숙은 또 젊은 바라문에게 말했다.“지금부터 너는 내가 먹는 음식, 내가 입는 옷으로 스님네들에게 보시하라.”때에 젊은 바라문은 분부를 받고 곧 왕이 먹는 음식과 왕이 입는 옷으로 여러 스님들에게 공양했다. 때에 바라문은 이 깨끗한 보시를 행한 뒤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 一하열천(下劣天)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모임을 경영한 젊은 바라문은 도리천에 났다.’그 때 폐숙 바라문 젊은 바라문, 및 사파혜촌의 바라문과 거사들은 동녀 가섭의 말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82    73)천경(天經)-나는 어떻게 하늘을 알았는가? 댓글:  조회:1766  추천:92  2007-10-22
73)천경(天經)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지제수(枝提瘦)에 유행하실 적에 수저림(水渚林)에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전에 미처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를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이렇게 하여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지게 해야 하겠다.' 나는 지견(智見)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저 하늘들과 함께 모이지 못하여 서로 문안하지 못하였고, 서로 논설(論說)하지도 못하였으며, 서로 답변하지 못하였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위로하며, 서로 논설하고 답변하며, 이렇게 하여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지게 해야 하겠다.' 나는 지견이 지극히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인하여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지극히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으며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차라리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으며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지극히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하여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차라리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하여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명이 다하는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인하여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나는가를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아서 이렇게 하여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지견이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 가운데 났는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나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차라리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태어났는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밝고 지극히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태어났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저 천상에 내가 일찍이 났었던가 일찍이 나지 않았었던가는 알지 못하였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내 광명을 내어 그 광명으로 인하여 형색을 보고, 또 저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났는가를 알고, 또한 저 천상에 내가 일찍이 났었던가 일찍이 나지 않았었던가를 알아서 내 지견이 지극히 크고 밝고 깨끗해져야 하겠다.' 나는 내 지견이 밝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하였다. 나는 멀리 떠나 혼자 살면서 마음에 방일함이 없이 수행하고 정근함으로 말미암아 곧 광명을 얻어 형색을 보고, 또 하늘들과 함께 모여 서로 문안하고 논설하며 대답하고, 또한 저 하늘들의 성은 무엇인지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떻게 먹고 어떻게 고락을 받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떻게 목숨이 다하는가를 알고, 또한 저 하늘들이 어떠한 업을 지은 뒤에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가를 알며, 또한 저 하늘들이 어느 하늘에 났는가를 알고, 또한 저 천상에 내가 일찍이 났었던가 일찍이 나지 않았었던가를 알았다. 만일 내가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 이 여덟 가지 행(行)을 얻었다면 곧 한결같이 증득했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요, 또한 나는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깨달은 줄을 알지 못할 것이며, 나는 또한 이 세간의 모든 하늘 악마 범(梵) 사문 범지들보다 뛰어날 수 없을 것이요, 나는 또한 여러 가지 해탈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나는 또한 모든 뒤바뀐 생각을 여의지 못했을 것이요, 생이 다하지 못했을 것이며,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다운 진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바르게 알고서 이 여덟 가지 행을 얻었다면 곧 한결같이 증득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나는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깨달은 줄 알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 세간의 모든 하늘 악마 범 사문 범지들보다 뛰어날 수 있을 것이요, 나는 또한 여러 가지 해탈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내 마음은 이미 모든 뒤바뀐 생각을 떠나,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참다운 진리를 알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81    하늘(天人)을 생각하는 명상 댓글:  조회:1517  추천:90  2007-10-22
이 세상외에 다른 세상이 있는가 없는가? 사람이 죽어서 다른 세상에 태여나는가 태여나지 않는가?이러한 의문들은 옛부터 시작된 물음인바 현대과학은 아직도 의혹에 싸여 답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2500여년전에 이미 명확한 대답을 주었다. 불교는 이를 놓고 전혀 문제로 삶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연하기때문이다. 혹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의혹에 찬 이라면 불교경전란에 올린 페숙경을 읽어보시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천경(天經)은 석가모니부처가 도를 성취하기전에 어떻게 하늘세계를 모르던데로부터 알게 되였고 또한 천인을 알고 볼수있었으며 지어는 대화까지 나눌수있었고 그들이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서 살며 수명은 얼마고 죽어서는 다시 어디에 태여나는가 등등의 모든 하늘세상을 알게 되였는가는 수행경험담을 기록했다. 어떠한 일이나 우리가 모르는 것은 무지이며 무명이라하며 어리석기때문에 모르는것이라 말한다.  의심은 마음의 병이며 무슨일이나 덧대고 부정하는것또한  큰 어리석음이라하겠다. ...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왜서 그럴가 자신한테 질문하고 사색하여 알수있는것이고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서 배우고 배우면서 또 사색하면서 하나하나 알게되는것이다....불교명상의 가장 위대한 점은 바로 우리들에게 바른 사유를 가지고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고  일깨워주고 가르친다는점이다. 또한 덧대고 믿는 것도 아니며 법을 얘기하고 이치를 얘기하고 세밀한 사유를 거듭해서 의혹이라는 매듭을 풀며 자신의 몸으로 직접 증명하여 진리를 체험할수있는것이다. 믿음은 하나의 힘이고 지혜이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지혜로운 말을 알아들을수가 있고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질수가 있다.아래에 경전속의 하늘을 생각하는 명상을 보자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널리 펴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果報)를 성취하여,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하늘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의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혹 어떤 비구는 몸과 마음을 바루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하늘을 생각한다. 즉 ‘몸과 입과 뜻이 깨끗하여 더러운 행을 짓지 않고, 계율을 행하여 몸을 이루고 몸에 광명을 놓아 비추지 않는 곳이 없으며, 저 하늘 몸의 좋은 과보를 성취하고 저 하늘 몸이 되어 온갖 행을 완전히 갖추자’고. 그리하여 이내 하늘 몸을 성취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하늘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곧 완전히 갖추게 되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하여 하늘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六) 聞如是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修行一法已。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法。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天 佛告諸比丘。云何修行念天。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說。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 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說 諸比丘對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 世尊告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天。身.口.意淨。不造穢行。行戒成身。身放光明。無所不照。成彼天身。善果報。成彼天身。眾行具足。乃成天身。如是。諸比丘。名曰念天。便得具足。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天念。便當獲此諸善功德。 如是。諸比丘。當作是學 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80    身言書判--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 댓글:  조회:1623  추천:75  2007-10-22
◈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 즉  <용모>, <언변>, <문필>, <판단>을 가리킨다. 사람은첫째. 인물이 잘나야 하고, 둘째. 말을 잘 해야 하며, 셋째. 글과 글씨를 잘 써야 하고, 넷째. 판단을 잘 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이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한다면 처세해 나가는데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첫째.신(身)은 외형적으로 인물이 잘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건강한 심신의 구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의 인물이 출중하더라도 심신의 건강을 상실할 때 그 사람의 재능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영국의 존 로크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은 인생 최대의행복이라고 했으며, 영국의 베이컨도 건강한 육체는 정신의 사랑방이며, 병든 육체는 그 감옥이다 라고 갈파했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기위해 평소 건강관리를 잘 해 병들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둘째, 언(言) 은 때와 장소와 대상에 알맞게, 자기의 의사를 조리있게 전달하는 화술이다. 맹자를 비롯한 중국의 제자백가들은 말을 잘 했기 때문에 명성을 얻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입을 지키기를 병(甁)과 같이 하라는 금언은 입은 재앙과 근심의 문이니, 말조심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중국성언에 자기가 입에 올린 말이면 그 말에 충실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열성과 진실로써 약속한 일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고 있다. 셋째 서(書) 는 글과 글씨를 쓰는 문필력을 가리킨다. 책을 많이 읽어서 무형의 자산인 지식을 축적하고 소화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력을 기르고 서자심화(書者心畵) 즉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라는 말을 되새겨 글씨의 한 획 한 획을 바른 자세로 정성을 들여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독서의 생활로 마음의 양식을쌓고, 교양을 넓혀 나가야 할 것이며, 글씨를 쓸 때는 수도자(修道者)의 자세로 바른 글씨를 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넷째, 판(判)은 사람이 공사생활(公私生活)에서 직면하는 일이나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하기 위해서 행동방향을 결정하는 판단력을 가리킨다. 판단을 할 때는 선입견, 경솔성, 편견성, 사리사욕을 지양하고 도덕성, 합리성, 객관성, 효율성 등을 고려하여 공명정대하게 결단을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나 문제 해결의 성패를 좌우하는 판단을 할 때는 미시적 안목을 지양하고, 거시적 안목에서 최대공약수를 추출할 수 있도록 결단을 해야 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sws20039>
79    근심은 알고 나면 허수아비다. 댓글:  조회:1346  추천:96  2007-10-22
나는 근심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는다.근심은 알고 나면 허수아비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으로 가서 허기를 채우려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복병들이다. 하지만 어떤 참새라도 그 복병들을 근심할 필요는 없다. 허수아비는 무기력의 표본이다. 망원렌즈가 장착된 최신식 장총을 소지하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길 능력이 없다. 자기 딴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으로눈을 부릅뜬 채 들판을 사수하고 있지만,유사이래로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린 참새는 한 마리도 없다.다만 소심한 참새만이 제풀에 겁을 집어먹고스스로의 심장을 위축시켜 우환을 초래할 뿐이다.나는 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서른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마흔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그런데 그 때의 근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지금은 흔적조차도 찾을 길이 없다. 근심에 집착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고, 근심에 무심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하지만 어떤 포박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1백 퍼센트 소멸해 버린다. 이 세상 시계들이 모조리 작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시간은 흐른다. 지금 아무리 크나큰 근심이 나를 포박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 내가 왜 시간이 흐르면 1백 퍼센트 소멸해 버리는 무기력의 표본 허수아비에 대해 근심하겠는가.【 출처 :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에서 / 이외수】 그렇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들이 때론 숨이 끊어 질듯 고통으로 다가온적 있을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하루 이틀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기하게 고통의 무게가 퇴색되어 짐을 느꼈을거다. 삶이 당장 끝날것처럼 조급해 하지 말라 겪어야 할 일이라면 순리를 거역하지 말라 훗날 알고나면 근심은 허수아비에 불과할것이다
78    솔로몬의 교훈 댓글:  조회:1824  추천:104  2007-10-22
솔로몬의 교훈******♠ 반지에 새겨진 글귀 ♠ 유대 미드라시(midrash)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한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를 위하여 반지 하나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매우 큰 승리를 거둬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그리고 동시에 그 글귀가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나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느니라." 보석 세공인은 명령대로 곧 매우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습니다.그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왕의 황홀한 기쁨을 절제해 주고 동시에 그가낙담했을 때 북돋워 드리기 위해서는 도대체어떤 말을 써 넣어야 할까요?" 솔로몬이 대답했습니다. 이런 말을 써 넣으시요.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왕이 승리의 순간에 이것을 보면 곧 자만심이가라앉게 될 것이고, 그가 낙심중에 그것을 보게 되면 이내 표정이 밝아질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다 순간이요, 곧 지나가 버리는 것임을 알 때, 우리는 성공이나 승리의 순간에도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고, 실패나 패배의 순간에도 지나치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행복이나 슬픔에 빠진 순간에 "이것 역시 지나가 버립니다." 라는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쉽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고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요!!! - 옮 긴 글 -
77    빈배 댓글:  조회:1666  추천:86  2007-10-21
아침의 명상 ♤ 빈 배 ♤ - 장 자 -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배가 그의 배와 부딪히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자료출처 鄭 珉 한문학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글:김정은/ 제작:왕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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