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심리치료에 응용되고 있는 불교명상법이종복 본지 해외통신원명상은 면역체계를 강화해고 발레리 박사(1946~2001) 를 위시한 몇몇의 과학자들과 달라이 라마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마음과 생명협회(Mind and Life Institute: http://www.mindlandlife.org)는 1987년부터 현재까지 지속하면서 수백 명의 과학자들의 동참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접견실에서, 때로는 2006년 여름에 열릴 ‘마음과 삶’ 여름캠프에 모여서, 그들은 동일한 객체, 즉 마음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제시하며 불교와 과학 간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티베트의 고승의 몸에 다양한 전극을 연결시켜 명상을 할 때 두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직접 확인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위스컨신-메디슨 대학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교수팀은 2003년 『Journal of Psychosomatic Medicine』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서 명상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현저하게 많은 항체를 형성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기반하여 2005년 데이비슨 박사는 스탠포드대학의 교수 로버트 사폴스키와 함께 한 공동연구를 통해 스트레스와 명상의 관계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명상은 인간의 면역체계를 강화시키고, 우울증 재발을 방지하고 콜티졸(Cortisol: 콜티코스테로이드 홀몬으로 스트레스의 반응과 관계있다. 콜티졸은 혈압과 혈당레벨을 높이고 면역체계를 약화시킨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Cortisol)) 레벨을 낮은 수위로 유지하게 해 준다고 한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 뇌 연구협회의 회장인 울프싱어는 “삼매의 경지가 이렇게나 명료하게 신경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존 카밧진은 이러한 명상과 스트레스의 관계를 실제로 응용한 결과를 보고했는데, 그는 생명공학 회사에서 회사원들을 상대로 “명상에 기반한 스트레스 줄이기”라는 제목으로 명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8주 후 검사 결과, 명상을 통해 단련된 집단의 경우가 감기 바이러스에 더 강한 항체들을 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앨런 왈레스와 달라이 라마는 명상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명상은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기보다는 감정적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심리치료에 응용되는 자비심 수행데이비슨은 또한 2004년 11월 8일자 『미국 과학자회보』에 “장기 명상수행자들의 정신 수행 중 자기유도에 의한 고폭의 감마동기성 (Long-term meditators self-induce high-amplitude gamma synchrony during mental practice)”을 발표하였다(이 논문 중 논자가 참조한 데이비슨의 논문은 『미국 과학자 회보』 2004년 11호 http://www.pnas.org/cgi/ content/full/101/ 46/16369에서 무료로 다운받아서 읽어볼 수 있다).우선 데이비슨 팀은 두 집단의 실험자들을 모았다. 한 집단은 달라이 라마의 지원하에 파견된 닝마파와 카규파(티베트의 4대 종파 중 두 파)에서 15년에서 40년간 수행해 온 승려들로 최소한 일만에서 오만 시간까지 명상을 해 온 집단이었다. 다른 한 집단은 자발적으로 지원한 대학생들로 구성되었으며, 명상의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평균 연령 21세의 대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학생들로 구성된 실험집단은 실험이 시작되기 전 뇌파 측정을 했으며, 1주일 동안 명상 훈련을 받았다. 실험을 시작하면서 데이비슨은 두 집단의 참여자들에게 모두 ‘무조건적인 자비심’에 대한 명상을 하도록 주문했다. 여기서 무조건적인 자비란 “살아 있는 존재들을 도우려는 무제한적인 준비심과 능력”이다. 1주일 동안 한 시간씩 명상한 대학생들로 구성된 실험집단은 준비과정 동안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주제로 하여 명상을 하도록 주문받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 대상을 확대하여 명상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리고 뇌파를 측정하는 동안에는, 수행자 집단과 대학생 집단 모두 대상에 구애되지 않는 자애와 대비심에 대해서 명상하도록 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자비심에 대해서 명상하는 승려들의 경우 1초에 40회 이상의 감마파 활동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수행자 집단의 경우 감마파의 강도는 일반 대학생들 집단에 비해 30배나 높았으며 아래 그래프 오른쪽 뇌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뇌가 전체적으로 활성화 되었다. 그리고 특히 좌측 전두엽 피질이 두드러지게 많은 활동을 보였다. 이 부분은 긍정적인 감정을 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데이비슨에 의하면, 이러한 감마파의 정도가, 임상심리학이 아닌 분야에서는 최고치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데이비슨의 연구결과는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에 소개되었고, 경영자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불교의 자비심과 명상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과학적 발견과 함께 불교의 자비심 수행이 심리치료에 응용되고 있다. 워싱턴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론 래드너(Lorne Ladner) 박사는 아직도 서구 심리학 전통에서는 자비에 대한 합의된 심리학적 정의가 없다고 성토하면서, 서구사회는 행복이 마음의 한 상태라는 것을 잊고, 부, 성공, 명예 등 외부적 요인에서 찾으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상기의 불교 명상에 대한 과학적 증명은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자비심의 개발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래드너는 그의 상담 예들을 근거로 우리가 분노, 질투 등의 감정의 힘은 절감하면서도 사랑, 소속감 등의 긍정적인 감정의 힘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불교의 다양한 수행 방법 중에서 심리치료에 응용 가능한 몇 가지 방법들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자비심의 수행, 보리심의 수행, 평등심의 수행 등이 있는데, 그는 이러한 수행을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자신의 행복을 더 빨리 성취할 수 있을 뿐더러, 타인을 직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명상이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어하지만 서구 학자들이나 심리치료사들이 이러한 긍정적인 방법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불교 수행자인 잭 컨필드(Jack Kornfield)가 1998년 발표한 「숙련된 명상 수행자라도 치료해야 할 오랜 상처가 있다(Even the best meditators have old wounds to heal)」는 명상을 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경계하는 글이다.그는 수년간의 명상을 통해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첫 번째로, 그는 심지어 깊은 삼매의 상태도 그 자신의 문제들 가운데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외로움, 인간관계, 유아기 때의 심리적 상처, 공포의 패턴들을 예로 들었다. 두 번째로, 그는 많은 서구의 (그리고 아시아의) 수행자들이 격리된 곳에서 수행을 하면서, 명상을 통해 자신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마음 깊이 상처받고, 신경과민이 되고, 공포에 질리거나 우울증에 빠지기까지 했으며, 수행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피하고 가리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을 통해 그는 명상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며, 깊은 마음의 상처는 상담을 통해 치료하라고 적극 권유했다. 그리고 수행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불교와 심리치료의 양측에 대한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은 1991년 그랙 보가트가 발표한 「명상과 심리치료: 연구결과의 검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스트레스, 육체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명상이 효과적이며, 중독증, 고혈압, 공포증, 천식, 불면증 등에 대해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명상만을 통해 문제를 풀려는 것 역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불교의 명상은 자가 치료의 방법론을 명확하게 갖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끝으로, 이러한 조심스러운 접근에 기반한 전문 상담가의 불교적 응용의 예를 보겠다. 호주 아델라이드대학의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마크 오 도노휴(Mark O’Donoghue)는 불교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실제 상담치료에 적용해서 사용할 것을 그의 논문 「심리치료에 대한 불교의 중도적 접근(Australian and new Zealand Journal of Family Therapy, vol.23, no. 4, pp. 196-201)」에서 권하고 있다.
그는 심리치료에서 사용하는 중도의 범위를 윤리적 처방이 아닌 극단적 감정 사이의 중도로 한정하고 있다. 그의 환자들이 겪고 있는 극단은 ‘신뢰-불신,’ ‘낙관주의-비관주의,’ ‘이상화한 행복한 자아-우울,’ ‘극단적 자기애-자기혐오’ 등등이다. 그에 의하면 중도적 분석에서는 극단적 개념들을 맞대면시켜서 일어나는 모순을 통해 개념 자체를 없애는 것이지만, 심리치료에서 사용할 중도적 분석이란 특정한 개념의 모순을 드러내 파괴함으로써 보다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덜 괴로운 쪽으로 유도하여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심리상태에 기인한 삶의 예로서, 그는 과거의 극단적인 경험이 현재에 정반대의 삶을 살게 하는 경우와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을 예로 들고 있다. 너무나 공부에 열중한 학생은 ‘쉬라’는 말을 ‘공부를 하지 않는다’라고 이해한다고 한다. 이러한 학생은 공부를 너무나 오래 한 나머지 공부를 하지 않는 쪽에 매력을 느껴 이러한 이중 극단에 빠지고 만다고 한다. 그는 두 개의 화이트보드에 상담자는 인식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면들을 적어 놓은 뒤에, 중간적인 단계로의 이행을 권유하여 많은 성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중간 단계로의 이행 역시 심리치료적 중도를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발견된 문제에 직접 부딪히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상담자가 감당하기 쉬운 상황으로 전이시키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심리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서구에서는 불교의 수행법과 자비심, 무아의 교리를 치료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버지니아대학의 명상과 요가 과목은 종교학과에서가 아니라 의학대학에서 개설하고 있다. 그러나 잭 컨필드가 고백하듯이, 명상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점은 달라이 라마 역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명상이 면역력을 높인다는 발표에 이어, 달라이 라마는 2005년 심리학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교의 명상은 중생의 정서적 고통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지, 신체적 고통을 제도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말씀은 명상이 오로지 마음과만 관계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명상을 통해 만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의식에 대한 방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승불교사상으로 풀어본 정신치료 경주 동국대 불교학과 김성철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흔히 말한다. 다시 말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란 얘기다. 그런데 팔다리와 몸통, 뇌와 심장, 내장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 가운데 어디에 나의 마음이 존재하는지 지적하려고 하면,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내장이나 심장까지 이식하는 의술이 가능한 것을 보면, 나의 마음이 그런 곳에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몸에서 ‘나의 마음이 있는 곳일 수 없는 곳’을 하나하나 소거시켜 보면,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이 존재할 수 있는 장기로 뇌가 남는데, 뇌의 반을 절단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환자들이 있다는 점에서, 뇌에도 나의 마음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정신’과 ‘육체’, ‘몸’과 ‘마음’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막상 정신, 또는 마음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내려고 하면 앞이 탁 막힌다. 부처님께서는 ‘정신’과 ‘육체’가 같은지 다른지 묻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후 연기법(緣起法)을 설하셨다고 한다. 그런 질문이, “정신과 육체는 별개로서 존재한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서 묻는 물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그런 질문을 ‘아기를 못 낳는 석녀(石女)를 보고서, 그 여인이 낳은 아이의 피부색이 하얀지, 검은지 묻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설명한다. 흔히 심리치료나 정신치료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정신’과 ‘육체’의 구분 자체가 ‘허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순수하게 심리적인 질병도 없고 순수하게 육체적인 질병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경증이나,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등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지 않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프로이드(Freud)나 융(Jung)과 같은 정신의학자들이 ‘마음’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시작된 서구의 정신의학이지만, 현대에 와서 육체에 투입되는 ‘약물’을 겸용함으로써 보다 나은 치료효과를 얻는 이유가 이에 있을 것이다. 정신치료에 대해 불교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과거 프로이드나 융의 방식처럼 ‘마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세상만사를 ‘식(識)’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대승불교의 유식교학에서는 마음의 병을 그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번뇌장(煩惱障)’이고 다른 하나는 ‘소지장(所知障)’이다. 번뇌장은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으로 야기된 감성적(感性的) 번뇌이며, 소지장은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法執)으로 인해 야기된 인지적(認知的) 번뇌이다. 현대 정신의학의 용어로 풀면 번뇌장은 ‘정서장애’, ‘소지장’은 ‘인지장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아픔을 겪는 이유는 세상과 타인과 자신을 바라보는 인지가 왜곡되어 있거나 세상과 타인과 자신을 대하는 정서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지의 왜곡과 정서의 불안이 해소될 때 우리의 마음은 편안해지고 생활은 원만해진다. 정신의학에서는 ‘환자’와 ‘정상인’을 구분한 후 ‘환자’만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지만, 불교에서는 아라한이나 불보살과 같은 성인(聖人)이 되지 못한 모든 사람을 교화의 대상, 즉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직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상, 평범해 보이는 일반인조차 일종의 ‘정신질환자’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도 ‘정상인’과 ‘환자’ 사이에 명확한 선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신치료에 궁극적 도달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힘들지 않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시켜 놓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교화의 대상, 즉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정신질환자를 정상인에 이르게 하는 의술이 정신의학이라면, 정신질환자와 정상인 모두를 성자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정상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갖가지 번뇌를 갖고 살아간다. 번뇌의 양과 힘이 감당 못할 정도로 많아질 경우 일상생활 속에서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정신질환자라고 규정되며 전문가들의 치료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신질환자든 정상인이든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번뇌장과 소지장이다. 다시 말해 정서장애와 인지장애가 심할 경우 우리의 마음도 힘들어지고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된다. 그러면 이런 번뇌를 해결하는 불교적 방법은 무엇일까? 유식교학에서 가르치듯이 자아에 대한 집착인 아집(我執)을 제거하거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인 법집(法執)을 제거하면 된다. 아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번뇌인 탐욕과 분노와 교만 등을 상쇄시키는 수행을 해야 하고, 법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모두 허구임을 자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집을 야기하는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나 이성(異性)의 몸이 언젠가 시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부정관(不淨觀) 수행을 해야 하고, 분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나를 비롯하여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비관(慈悲觀) 수행을 해야 하며,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하심(下心) 수행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법집인 고정관념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이나 사태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의 진리를 터득해야 한다. 공성의 진리는 대승교학 중의 하나인 중관학(中觀學)에서 가르친다. 이와 아울러 전생이나 과거에 내가 지었던 악업을 참회하고, 일거수일투족 선업을 실현할 때 정신질환자는 그 동안 겪었던 마음의 고통의 과보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국대학교 정각도량 2550(2006)년 11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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