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본 불 교
- 불교학은 아함에서 부터 -
고 익진 (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1988년 작고
동국대 불교대학 고 고익진 교수님의 에세이입니다. 본 에세이는 < 불교학은 아함에서부터> 인데 스승님께서 월간 범성지에 기고한 글로써 학문적인 깊이를 따지지 않고라도 누구나 아함의 청어한 공기를 맘껏 들이킬 수 있는 에세이 입니다. 고익진 교수님은 팔리 니카야를 연구해 <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라는 논문을 제출하기에 이르러 불교학계에 다시 없는 귀중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불교를 처음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나는 아함에서 부터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불교 입문서나 불교학개론이 불교를 처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맨 처음에 추천되는 책들이지만, 이런 책들은 여행에 들어서서의 실제적인 '길'은 아니다.
아함은 불교라는 긴 여로의 맨 처음에 밟아야 할 길인 것이다. 불문에 들어와 이미 상당한 조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의 불교가 어딘지 모르게 헛점이 있는것으로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이런 분에게도 나는 아함에서부터 다시 읽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아함은 모든 불교학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대소승의 모든 불교사상은 원시불교로부터 시작된것이고, 아함은 원시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아함에 대한 연구없이는 불교학의 기초는 다져질 수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나는 아함을 부디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승불교는 아함의 이론과 정신을 바탕으로 성립한것이라는 점에 오늘날 모든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비근한 예로 반야심경만 보아도 거기 나오는 5온, 12처, 18계,12연기, 4제 ,지(智), 득(得), 보살, 불(佛), 삼약삼보리와 같은 개념은 어느것 하나 아함에 설해지지 않았던 것이 없다. 반야개공의 제법무자성 사상은 아함에 숱하게 되풀리 되고 있는 " 5온은 무상,고,무아 " 라는 교의의 발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법화나 화엄과 같은 높은 수준의 경전은 잘알면서도 그러한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아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함을 소승경전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함은 대승의 기초경전이라고 해야 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얻게 하려는 일대사 인연을 갖고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설하고 " 三乘方便 一乘眞實 " 의 교설의 뜻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모두 성불의 기별을 주고계신다.
이것은 아함에 " 여래는 세상에서 다섯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나니, 첫째는 법륜을 굴리고, 둘째는 아버지를 위해서법을 설하고, 셋째는 어머니를 위해서 법을설하고, 넷째는 범부를 깨우쳐 보살행을 닦게하고, 다섯째는 보살에게 기별을 주는 것이니라 " < 증일아함권 15 > 고 설한 부처님의 오사에서 넷째와 다섯째의 과업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함에 " 마음이 더럽기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기에 중생이 깨끗하다. 비하건대 화가가 하얀 화폭에 뭇채색을 갖추어 여러가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고 한것은 화업에서 "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오음을 그리나니, 모든 세계중에 만들지 않은 법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가 그렇고, 부처와 같이 중생이 그러하나니, 마음과 부처와중생의 이 셋은 차별이 없다 "고 한 주목할 만한 사상의 선구를이루고 있슴은 일독으로 요연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여기에서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함에 쌓여있다.
대승불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것은 아함이요, 아함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대승이라 할 정도이다. 원시불교 사상의 연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부디 아함에서부터 읽어 갈 것을 권하고 싶다.
부처님의 금구소설은 부처님의 제세시는 물론,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2,3백년 까지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문자에 정착되기는 부파불교 시대에 경율론(經律論) 3장의 성립이 이루어 지면서 부터라고 생각된다. 일미화합했던 불교교단은 불멸후 백 년쯤에 대중부와 상좌부로 분열하고 이 근본 2부로부터 다시 18파가 파생하여 20부파를 이루게 된다.
각 부파는 각기 독자적인 3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함은 이 중에서 경장(經藏)에 해당된다.아함이라는 말은 범어(agama)를 음역한 것인데 "옴" 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경장을 "옴"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뜻 하나만으로 경장을 아함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전으로 말한다면 율장(律藏)도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부처님의 교설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런 움직임은 교단내에서 견해차를 발생시켜 이것이 부파형성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럴 경우 이견(異見)의 대립속에 구전되어온 교설이야 말로 움직일수 없는 권위로 내세워질 것이다. 경장을 특히 아함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아함이 당시에 얼마나 중시된 경전이었던가 ] 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한역 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가 있다.
장아함 ( 22권 30경 )
중아함 ( 60권 222경 )
잡아함 ( 50권 1362경 )
증일아함 ( 51권 471경 )
장아함은 긴 경전을, 중아함은 중간 길이의 경전을, 잡아함은 짧은 경전을 모아 편집한 것이고, 증일아함은 법수(法數)에 따라 1법에서 11법에 이르는 경전을 모아 엮은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길이나 법의 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수집해 놓은 것은 아니다.
일단 그렇게 분류한 다음, 그들을 다시 어떤 방침 아래 편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편찬 방침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구구하지만, 어떻든 현 장아함은 4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제 1분은 부처님을 밝히고, 제2분은 부처님의 자각내용으로서의 법을 밝히고, 제4분은 세기경(世記經)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아함은 원시불교의 전반에 걸친 교리가 5송(五誦)으로 편집되어 있음을 본다.
현재의 한역 잡아함은 내용배열이 극히 혼란하고, 이질적인 요소(아소카왕에 관한 권23,25)까지 섞여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것이 어느땐가 착간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 착간의 시기를 대개 A.D. 5~6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착간 이전의 원형을 추구하여 훌륭한 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잡 아함은 앞으로 이렇게 복원된 원형에 의하여 읽는것이 좋을 것이다.
남방불교는 아함에 해당되는 경장으로 현재 다음과 같은 5니카야를 갖고 있다.
Digha-nikaya (장부) 3품 33경
majjhima-nikaya (중부) 15품 152경
Samyutta-nikaya (상응부) 5품 2875경
Anguttara-nikaya (증지부) 170품 2198경
Khuddaka-nikaya (소부) 15경
이 5니카야를 아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니카야(nikaya) 라고 부르는 것은 전승(傳承) 보다는 편집이라는 뜻을 강조한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팔리어로 니카야는 "신(信)" 이나 "집(集)"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각 부파의 경전이 대개 장.중.잡.증일의 형식으로 편찬되고 있음을 보면, 이런 편찬 형식의 기원은 상당히 오랜 것으로 부파 분열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편찬 방식은 기억.구전(口傳)을 위한 형식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따라서 구전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편찬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아함의 전승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므로 각 부파의 지송경전에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차이에는 시대가 흐르고 부파간의 대립이 심해짐에 따라 부파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더욱 증대되어 갔을 것이다.
오늘날 한역 4아함과 팔리 5니카야만 비교해 보아도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따라서 각 부파는 독자적인 3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부파의 3장이 오늘날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는것은 남방불교의 팔리 3장 뿐이다. 한역 4아함은 장.중.잡.증일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실은 여러 부파에 속했던 것이 한역되어 4아함을 형성하게 된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내용을 자세히 고찰함에 밝혀지는 것인데, 학자들은 각 아함의 소속부파를 대개 앞에서 표시한 바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
4아함은 총 18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부피이다. 그러나 그들속에는 중복되는 것이 허다하고, 같은 내용에 편찬 형식만이 다른것도 상당히 있다. 따라서 핵심적인 것만을 추린다면 그렇게 많지 않을것 이다. 오늘날 이런 작업은 행해지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되며 그런 작업이 행해져서 아함의 요집(要集)과 같은 것이 나온다면 아함의 지송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아함에는 불교의 원초적인 형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에 나타나는 부처님은 모든 염오의 차별상을 초월하여 광대무변한 법계에 충만해 있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도 아니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어 청정무구한 정토에 안주하여 중생들의 귀의를 받고 있는 부처도 아니다.
오만하기 이르데 없고, 사악하기 헤아릴 길 없는 중생들 속에서 처참할 정도로 고생하면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지혜와 사랑의 인간으로 나타나 있다.
아함을 읽는 이는 누구나 부처님이라기 보다는 인간 싯달타의 너무나도 청순한 인간미에 우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느낌은 다른 경전에서는 맛볼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근간 사상과 입장이 무엇인가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문제는 아함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파악되지 못할 것이다.
아함에서는 불교 흥기 당시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 사상이 불교에 도전 해오고 그런 도전에 대해서 부처님은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인생의 의의인가를 밝히고 게신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사상과 입장이 다른 철학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정통 바라문의 사상을 전변설(轉變說)이라 하고 새로운 사문들의 사상을 적취설(績聚說)이라고 한다면, 불교철학은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라는 것은 우리의 현실세계를 각자의 무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부처님은 전변설의 "아트만(我)"을 부정하고, 적취설의 단견(斷見)을 부정하여 그러한 두 끝을 지양한 중도(中道)적 "무아"를 종교적 실천의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연기만 알면 불교철학은 다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기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아함에는 6근.12처.육육법.5온.4제.12연기와 같은 법들이 잡다하게 산설(散說)되어 있다. 아무런 체계도 철학도 없이 법을 설해 놓은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조심히 살펴보면 그들은 모두가 연기의 일종이다. 범부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성인이 깨달은 것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짜임새로 시설된 것들이다.
연기의 진정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함에서부터 읽어가고 그 미묘한 뜻을 심시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아함에 그려진 부처님 제자들의 청순한 구도의 정렬과 생명을 아끼지 않는 홍법(弘法)의 정신도 우리들을 무한한 감도에 젖게 할 것이다. 증일아함 권13에 그려진 아나율을 보자. 부처님 제자중에서 아나율은 천안(天眼) 제일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그가 천안을 얻게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이 읽기에는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인 것 같다.
아나율은 어느날 좌선하다가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그때 마침 부처님이 이것을 보고 주의를 주셨는데, 그로부터 아나율은 결코 눈을 감지 않아 마침내 시력을 잃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처절할 정도로 뜨거운 구도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잡아함 권13에 나오는 부루나는 홍법에 목숨을 바친 일례라고 할 것이다.
어느날 부루나는 부처님 앞에 나와 서쪽 지방의 포교에 나가겠다고 청하였다.
부처님은 그에게 " 서쪽 지방 사람들은 사나우니, 욕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물으셨다.
그때 부루나는 " 때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고 답했다.
" 만일에 때린다면 ?"
" 몽둥이나 돌로 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 몽둥이나 돌로 친다면?"
" 죽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열반에 들게 해주는 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부루나는 드디어 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서방포교에 힘쓰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마쳤다 한다.아함을 통해 이러한 부처님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며 그들의 뜨거운 구도열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여 불자로서의 사명에 다시금 불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