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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티벳의 "삶과 죽음의 지혜"에서 보는 현대사회의 죽음 댓글:  조회:1599  추천:99  2007-10-04
내가 처음 서양 사회에 도착했을 때, 그때까지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비추어보건대 새로 접한 서양 사람의 태도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많은 것을 성취했음에도, 현대 서구 사회는 죽음이라든가 죽어가는 과정 또는 죽음 이후 무엇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실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상 죽음을 부인하게끔 교육받았으며 죽음은 상실과 소멸을 뜻할 뿐이라고 배웠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죽음의 공포 아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건전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죽음에 맡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믿는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란 모든 권리를 다 써버리는 것이고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소박하면서도 분별 없이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티베트의 한 고승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종종 죽음을 하찮게 여겨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누구나 죽는다. 그러니까 죽음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지. 죽음은 자연스러운거야. 나는 괜찮아.' 그러나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1)   죽음을 대하는 이러한 두 가지 태도 가운데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허둥지둥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내버려두면 자연히 처리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견해 모두 죽음의 참된 의미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물론 기독교를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전통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전해 주고 있다. 그 비전은 우리가 지금 영위하는 이 삶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에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현재의 삶을 전부로 여길 만큼 영혼이 메말라 있다. 삶 이후의 삶에 대한 어떤 실제적인 또는 근거 있는 신념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야기되는 참담한 결과는 한 개인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 참담함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 생이 유일한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현대인은 장기적인 비전을 계발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지구의 천연 자원을 약탈하는 행위를 자제하게 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으며, 미래에 치명적일 수 있는 자신만의 이기적인 삶을 억제시킬 방도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산성비로 황폐화된 아마존 강에 책임 의식을 느끼게 하는, 브라질의 전임 환경부 장관의 발언 같은 경고를 우리는 얼마나 더 들어야 하는 것일까!   현대 산업 사회는 광신적인 종교 집단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지구의 온갖 생명 시스템을 먹어치우고 독살하고 파괴하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차용 증서에 우리가 서명하는 셈이다.......우리는 이 지구상에 사는 마지막 세대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나의 가슴 속에, 마음 깊숙이, 자신의 비전 한가운데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지구는 숯처럼 검게 그을려 황막한 금성처럼 종말을 맞게 되리라.2)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무지로 우리의 삶 전체를 위협하는 환경 파괴가 갈수록 격화되어 간다. 사람들이 죽음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기에 환경파괴가 더 한층 심화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죽음 뒤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자신의 삶 뒤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어떤 희망도 제시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삶의 모든 의미와 죽은 뒤 자신의 삶에 열쇠를 쥐고 있는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주제에 관해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높은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티베트 불교의 몇몇 고승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단 한 가지 간단한 질문은 종종 나의 흥미를 돋군다. 그대는 이 삶 이후의 삶을 믿는가? 그들은 이런 질문을 철학적 명제로서 묻는 것이라기보다 마음 깊이 느끼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그들은 만일 이 삶 이후의 삶을 믿는다면, 인생관 전체가 달라지고, 책임감과 도덕관이 한층 또렷해진다는 것을 안다. 티베트의 고승들은 이 삶 이후의 삶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이 없는 사람들이 행동의 인과응보에 대한 충분한 사려 없이, 근시안적인 결과에만 집착하는 사회를 형성하게 될 것을 염려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진실된 자비심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잔인한 세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지 않을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강대국들이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마왕들이 사는 세계가 아닌지 종종 생각한다. 마왕들은 영혼의 차원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온갖 쾌락에 빠져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한다. 죽음이 닥치기 전에는, 또한 예기치 않은 몰락의 신호가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듯하다. 그러나 파탄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마왕들의 부인과 연인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다시 마왕으로 태어나길 바란다는 의례적인 축원과 함께 저 멀리서 꽃다발만을 던질 뿐이다. 지난날의 행복이나 쾌락의 추억도 그들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고통을 경감시켜 주지는 못한다. 마왕들은 한층 난폭해지고 마침내 비참한 상태에서 혼자 죽어가게 된다.   마왕들의 이러한 운명은 현대 사회가 늙은이, 병자, 죽어가는 사람을 취급하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현대 사회는 젊음, 섹스, 그리고 권력에 사로잡혀 있고 늙음과 쇠약함은 멀리하려고 한다. 연로자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쓸모 없어지면 버림받는다는 것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이 아닌가? 노인을 경로원 같은 곳에 맡겨 외롭게 방치한 채 죽어가게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가?   또한 암과 에이즈 같은 시한부 인생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우리가 취급한 방식에 대해 되돌아보자.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나는 심지어 그들의 친구조차도 그들을 부랑아로 취급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에이즈 환자로 낙인찍힌 그들은 큰 절망에 빠져 자기의 인생을 구역질 나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다. 우리가 알거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어갈 때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그가 죽어갈 때, 우리는 그의 미래에 관해 어떤 식으로도 용기를 줄 수가 없다. 죽은 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지 또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조차 넌센스라고 해서 비웃음거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런 현대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이전보다 더 한층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말이 분명하게 제기된다.   다행스럽게도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호스피스 운동은 죽어가는 사람을 실질적인 면과 동시에 감정 조절의 측면에서 보살피는 훌륭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죽어가는 사람이 그러한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한층 더 깊은 어떤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들은 죽음과 삶의 실제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것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궁극적인 의미에서 위안을 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그의 영혼을 평온하게 이끄는 일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에 직면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앎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서양에서 Elisabeth Kübler-Ross와 Raymond Moody 같은 개척자들이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는 기운을 얻게 되었다. 퀴블러로스는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좀더 밝은 태도로 임한다면 그들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심지어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고 밝혔다. 레이먼드 무디의 용기있는 작업을 계승한, 임사체험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활발한 과학적인 연구들은 삶이 죽음과 더불어 끝나지 않으며 '삶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실재한다는 생생하고도 강력한 희망을 인류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렇게 놀라운 새 사실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지극히 매혹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죽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여 절망적인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한 비극적인 젊은이들의 일화를 전해 들은 일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직면하기를 거절하거나 낭만적으로 여기는 경우, 죽음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죽는다고 절망해서도 안되고 죽음에 도취해서도 안된다. 죽음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고 흥분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과정일 뿐이다.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임박해서야 우리들 대부분이 삶의 진가를 인정하려 드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관련해서 나는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 파드마삼바바의 다음 말을 종종 회상하게 된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준비를 시작한다. 죽음이 닥치면 그들은 회한으로 인해 날뛰게 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지 않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위해 아무 준비도 없이 살았던 것처럼, 어떤 준비도 없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현대 사회에 소름 끼치는 일이 어디 있을까?   --------------------------------------------------------------------------------------   주(註)   1) 차고뤼 튈쿠 린포체, <죽음과 삶의 관계 Life in Relation to Death> (Cottage Grove, OR: Padma publishing, 1987), 7쪽   2) 런던의 , 1991년 3월호에 인용된 Jose Antonia Lutzenberger의 말  
35    선경대의 기이한 불광현상 댓글:  조회:1541  추천:115  2007-10-03
9월 22일 오전 9시반쯤 선경대 락타봉에 나타난  불광반시간지속되다가 운해와 함께 사라졌다.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height=324 width=402 align=middle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     五彩晕光     姜龙哲 摄     和龙仙景台上空出现罕见的“佛光”9月23日,和龙市仙景台国家级风景名胜区上空出现五彩晕光奇观。23日早晨6点左右,骆驼峰上空云层中骤然幻化出一个红、橙、黄、绿、 青、蓝、紫的七色光环,中央虚明如镜。这一现象一直持续近两个小时,当时数十名游客目睹了这一奇观,仙景台工作人员姜龙哲马上拿出摄像机记录下了这段影像。     观看者背向偏西的阳光,会发现光环中出现自己的身影,举手投足,影皆随形。这种自然奇观的彩色光环民间又被称作极为罕见的“佛光”,佛光是一种非常特殊的自然物理现象, 佛光的出现需要地形和云海等众多自然因素的结合,只有在极少数具备了以上条件的地方才可欣赏到。   来源:延边日报
34    인생을 살면서 내가 나에게 할수있는 최고의 선물 댓글:  조회:1869  추천:67  2007-10-02
명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한 부분이다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일은 주의 깊게 내 마음을 알아 차리는 일이다.- 우 조티카 스님     学会冥想,是你这辈子所能给自己最大的礼物! 호흡 명상을 해보라 / 탓닉한 스님"숨을 들이쉬며 나는 느낀다, 내가 숨을 들이쉬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대의 숨결은 몸과 마을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그 고리와 접촉한다면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 안의 모든 것, 몸과 마음의 모든 것과 접촉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된다.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떠밀리지 않는다. 그대의 생각에 의해서도.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몸과 그대의 전 존재로 충만하다. 숨을 들이쉬거나 숨을 내쉬고 있음을 느낄 때, 그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 시작한다. 앉아 있거나, 서있거나, 걷거나. 그러니 느낀다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일이 참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건 어렵지 않다. 쉬운 일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자신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그것이 깨어 있음이다. 먼저 호흡으로 깨어 있음을 수행한다면, 그대는 몸과 마음으로 깨어 있게 될 것이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깨어 있게 될 것이다.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하는 것은 매우 좋은 수행법이다. 위의 일상생활에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하는 법을,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햇빛이나 강물, 구름, 가족, 친구들 같은 경이로운 것들과 접촉할 수 없다. 그러니 호흡 명상은 매우 좋은 것이다. 깨어 있는 호흡은 수행하기가 쉬우며, 매우 유쾌하다. 몇 분 동안 자리에 앉아서 호흡을 하며 그대 자신에게 들려줄 수 있는 시가 있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느낀다, 숨을 들이쉬고 있음을. 숨을 내쉬며 나는 느낀다, 숨을 내쉬고 있음을. 들이쉬고, 내쉬고. 숨을 들이쉬며, 나는 한 송이 꽃. 숨을 내쉬며, 나는 상쾌함을 느낀다. 꽃, 상쾌함. 숨을 들이쉬며, 나는 하나의 산. 숨을 내쉬며, 나는 견고함을 느낀다. 산, 견고함. 숨을 들이쉬며, 나는 잔잔한 물. 숨을 내쉬며, 나는 사물의 그 모습 그대로 비춰본다. 물, 비춰봄. 숨을 들이쉬며, 나는 공간. 숨을 내쉬며,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공간, 자유로움. 먼저, "들이쉬고, 내쉬고"를 세 번 수행한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느낀다, 숨을 들이쉬고 있음을. 숨을 내쉬며 나는 느낀다, 숨을 내쉬고 있음을." 그런 다음 "꽃, 상쾌함"을 연습한다. 즉,"숨을 들이쉬며, 나는 한 송이 꽃. 숨을 내쉬며, 나는 상쾌함을 느끼다." 세 번째는 "산, 견고함"을 수행한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하나의 산." 가부좌를 튼 자세는 매우 견고하고 안정된 자세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조용히 호흡을 하며 미소를 머금는다면, 그대는 산처럼 견고해질 것이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 또는 어느 방향에서 부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숨을 들이쉬며, 나는 하나의 산. 숨을 내쉬며, 나는 견고함을 느끼다." 네 번째 연습은 "물, 비춰봄"이다. 투명하고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면, 하늘과 구름을 직접 쳐다볼 때처럼 선명하게 물에 비친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숨을 들이쉬며, 나는 잔잔한 물. 숨을 내쉬며, 나는 사물을 그 모습 그대로 비춰본다." 그것은 내가 사물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잔잔한 물처럼 느낀다"고 말하지 말라. "숨을 들이쉬며, 나는 잔잔한 물"이라고 말하라. 우리 자신이 잔잔한 물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 산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 꽃인 것이다! 나는 내가 보는 푸른 하늘을 그대로 비춰본다. 나는 사물을 왜곡하지 않는다. 나는 투명하고, 나는 고요하기 때문이다. 잔잔한 물은 매우 고요하다. 그대는 고요할 때 현실을 제대로 비춰본다. 마음이 고요하거나 잔잔하지 않을 때에는 사물을 부정확하게 지각하면 왜곡한다. 밧줄 한 토막을 보고 뱀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대는 충분히 평화롭거나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춰보지 못한다. 상을 왜곡해서 보여주는 그 우스꽝스런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그런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기가 힘들다. 얼굴은 길쭉해지고 눈은 동그랗게 보인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진짜 모습이 아니다. 마지막 수행은 "공간, 자유로움"이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공간." 공간이 있으면 편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그대에게 충분한 공간이나 자유를 주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 숨을 들이쉴 때, 자신을 무한한 공간으로-모든 것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공간으로-여기면 숨을 쉴 수 있다. 그런 공간이 없다면 숨을 쉬거나 미소를 머금을 수 없다. 그대 안에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는다. 미움도, 분노도, 절망도, 욕망도, 빈 공간처럼 그대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숨을 내쉬면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해보라. "숨을 들이쉬며, 나는 공간. 숨을 내쉬며,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한번 해보라. 꽃과 산과 물과 공간의 이미지는 집중을 더 잘하게 도와주며 기운이 나고, 안정되고, 고요하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갖도록 도와줄 것이다. 앉기 명상을 하는 동안 수행할 수 있는 또 다른 호흡 연습은 이렇다. "들이쉬고 내쉬고, 깊이 천천히, 고요하게 편안하게, 미소짓고 놓아주고, 현재의 순간 경이로운 순간." 숨을 들이쉬며 나는 안다, 숨을 들이쉰다는 것을. 숨을 내쉬며 나는 안다, 숨을 내쉰다는 것을. 내 들숨이 깊어지면서, 내 날숨은 느려진다. 숨을 들이쉬면 고요해지고, 숨을 내수면 편안해진다. 숨을 들이쉬며, 미소를 짓는다. 숨을 내쉬면서, 놓아준다. 나는 안다, 숨쉬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맨 처음."숨을 들이쉬며 나는 안다, 숨을 들이쉰다는 것을. 숨을 내쉬며 나는 안다, 숨을 내쉰다는 것을."이라고 뇌인다. 그런 다음. "내 들숨이 깊어지면서, 내 날숨은 느려진다." 이제 그대 숨결의 특질을 자각한다. 그대는 그 숨결을 길거나 깊게 만들고 싶지 않다. 다만 이제 더 깊어지고 더 느려지면서 그 숨결을 자각할 뿐이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면, "고요하게, 편안하게"로 옮겨 간다. "숨을 들이쉬면 고요해지고, 숨을 내쉬면 편안해진다." 편안해짐은 공간과 같다.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말한다. 가볍고 자유롭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다. 편안해진다는 것은 어떤 것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것도 그대의 평화보다 중요하지 않다. "숨을 들이쉬며, 미소를 짓는다." 왜 미소를 짓는가? 어떤 것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미소를 머금는다. 그대는 미소의 이점을 알고 있다. 미소를 머금으면 얼굴의 모든 근육이 이완된다. 그대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안다. "숨을 내쉬면서, 놓아준다." 그대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놓아줄 수 있다. 이것이 놓아줌이다. 놓아줌은 행복의 원천이다. "나는 안다, 숨쉬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 그대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러한 행복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 수행은 어렵지 않다. 평화와 행복은 얼마간 떨어져 있다. 고통과 괴로움과 함께. 하지만 기억하라.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그대는 그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채널 중에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음을. 그대는 평화와 행복을 고를 수 있다.
33    불교의 명상 댓글:  조회:2546  추천:123  2007-10-02
불교의 명상 *주1 명상이라는 정신수행은 어떠한 계통의 종교에서나 볼 수 있다. 기독교의 기도는 일종의 사념적 명상법 *주2 이며, 힌두교에서 행하는 `게송'이나 `진언'의 암송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영감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들 명상체계의 대부분은 명상의 목적과 명상의 부수물들을 혼동하고 있다. 즉 때로는 즉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특별한 심령현상을 명상의 목적으로 여기는 나머지 반 몽환상태에서 경험하는 환시나 환청을 명상훈련의 최종성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닦는 명상방식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아직도 대부분의 인류는 마음이란 것이 어떤 기능을 하며 그 힘이 어느 정도까지 미치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영매의 상태에 이르는 자기 최면과 직접적 인식에 이르는 정신정화 과정을 일반인들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후자야말로 불교에서 구하는 정신집중의 참된 목적이다. 기독교도는 그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성자들을 보게 되고, 또 대화도 한다. 힌두교도는 만신전의 신들의 화현을 목도한다. 모두가 그런 식이다. 한 예로 벵갈 지방의 신비가인 라마크리슈나 빠라마항사는 기독교를 그의 명상주제로 취하자, 전에는 그렇듯 선명하게 나타나던 힌두교 신들의 화현 모습 대신에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종교의 신비가들이 각자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환영을 보고 환청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명상은 기껏해야 평소 잠재의식 깊숙이 엎드려 있던 관념을 의식의 표면에 떠올려 객관화시킨 데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최면술의 경우, 피술자가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 용이하게 최면가의 암시에 걸린다. 이때 이 최면 상태의 사람을 잘 관찰해보면, 피술자가 시술자에게 복종적일수록 시술자는 능력껏 솜씨를 발휘해 자기가 겪어보고 싶은 경험을 그를 통해 마음대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명상에는 전혀 색다른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하겠다. 즉 영매능력을 더 발전시켜 피술자로 하여금 다른 차원의 존재를, 예를 들어 천상계나 불행한 유령들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을 실제로 보고 듣도록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욕계천상(欲界天上) *주3 이나 아수라 세계 *주4 는 우리 인간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므로 용이하게 접근해 올 수 있으며, 이 사실이 곧 서양 심리주의의 영적 현상을 올바로 설명해주는 해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불교 명상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명상의 부수물로서 발생하기는 하나 이는 불교 수행의 올바른 목적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애인 것이다. 예수를 본 기독교인이나 성스런 끄리슈나와 얘기를 나눈 힌두교인은 자신의 종교생활의 목적이 이루어졌다하여 대단히 만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부처의 환영을 보는 경우, 자기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관념이 구상화(具象化)되기에 이르렀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어떤 신이나 인간도 더이상 당신을 볼 수 없다고 스스로 확언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명상 및 선정과 타종교의 명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명상과정에 들어가는 불교인은 이 차이를 잘 알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의식 가운데 선명하게 정립해 놓는다. 재생과 고통의 근본원인은 갈애와 결합하여 상호작용하는 무명이다. 이들 두 가지 원인은 악순환을 이룬다. 한편으론 무지로 인해 관념들이 생기고 다시 관념에서 욕망이 생긴다 원래 이 현상계는 정작 우리가 해석하여 갖다붙인 의미말고는 그 이상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 해석이 무명에 의해 조건지워질 경우 우리는 전도(顚倒) *주5 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 때문에 우리는 무상(無常)한 것을 변함없는 것[常]으로, 괴로운 것[苦]을 즐거움[樂]의 원천으로, 실체가 아닌 것[無我]을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我]로 뒤바꿔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여섯 개의 인식통로[六根], 즉 눈·귀·코·혀·몸·의식을 통해 얻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에 대해 그릇된 해석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근래에 물리학이 발달하면서 밝혀진 물리적 세계의 실상은 종래 우리가 육근을 통해 감각적으로 인식해오던 세계와는 매우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습에 가까워져 가고 있어서 우리는 새삼 불교진리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감관이다. 우리가 즐거움의 대상을 소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추구하고 있는 것은, 기실은 신기루를 동경한 나머지 헛그림자를 좇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알고 보면 무상이며, 고이며, 무아이다. 즉 덧없는 것이고, 고통과 결부된 것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추구는 또다시 새로운 무상, 고, 무아의 원인이 될 따름이다. 즉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수밖에 없다. 또 그런 환상을 좇고 있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로 무상하고 고통에 얽매여 있으며, 어떤 일관된 자아원칙도 없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따라서 우리가 욕구를 좇고 있는 것은 꼭 그림자가 그림자를 좇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불교의 명상목적은 이런 진리의 실상을 단순히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무명과 갈애를 실제로 종식시킴으로써 무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보다 원대한 데에 있다. 이와 같이 궁극적 완성에 이바지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명상이라면 ― 그 효과는 바로 명상자의 인격됨됨이와 인생전반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 분명히 명상 체계 자체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그것을 쓰는 방법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 명상을 통해 빛을 보았다거나, 환영을 지니게 되었다거나, 또는 황홀경을 맛보았다 해서 명상의 목적이 성취된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들쯤은 불교 명상의 목적을 참되게 이해하고 있는 불교인에겐 너무나 평범한 것이어서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경험들에는 실제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위험은 정신병리학을 연구해본 학도라면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그런 것이다. 참된 불교 명상의 목적과 그 방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념의 수행법에 관한 경, 즉 <대념처경(大念處經)> *주6 속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육체와 마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육체의 움직임과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를 주의깊게 살피는 능력을 키워야만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이 육체와 정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가지고 `자아'라고 그릇되이 여기지 않게 되고,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히 그것들을 바라보게 된다. 즉 육체의 움직임을 사대(四大 : 地·水·火·風)의 결합이 물리적 인과법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게 되며, 또한 정신적 움직임도 외부자극에 반응하여 생하고 멸하는 의식의 끊임없는 흐름의 상태로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을 마치 자신과 하등 관계도 없는 별개의 현상의 질서인 것처럼 완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만일 자아란 관념[有身見] *주7 이 없다면 이기적인 태도나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과연 어디서부터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만약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취하는 버릇이 별로 줄어들지 않은 채 여전하다면 그 사람의 명상수행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나무의 가치는 과일로 평가되듯이 사람은 그 행위로 평가된다. 달리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이 점은 특히 불교 심리학에서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행위 그 자체로 보기 때문이다. 가장 진실한 의미로 말한다면 이들 행위 때문에, 아니 이들 행위가 나타내는 업인(業因)과 과보의 연속 때문에 우리는 한 생애의 모든 단계를 통해, 또 심지어 금생과 내생을 이어서까지 어떤 동일체가 지속하는 것처럼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주의깊게 살핌으로써 우리는 자아란 미망을 깨뜨릴 수 있게 되며 나아가서는 외부적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까지도 끊을 수 있다. 그리하여 궁극에 가서는 갈애하는 `자아'도 갈애되는 대상도 없게끔 된다. 이와 같은 공부는 길고도 힘드는 것이며, 세속에서 또 세속적인 근심에서부터 물러났을 때만 해낼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잠깐만 현실로부터 비켜서서 이 공부를 닦아도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사에 있어서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상당한 정도로 갖출 수 있게 된다. 일단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일이야말로 명료한 사유를 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봄으로서 우리는 개인적 편견이나 그 밖의 어떤 다른 편견도 가지지 않고 당면한 상황을 신속히 파악하여, 용기있고 신중하게 이에 대처할 수 있게끔 된다. 그러나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작 중요한 선물은 오히려 정신집중이란 귀중한 선물일 것이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의 점에 계속 고정시킬 수 있는 능력[心一境性, ekaggataa]인데 이 능력이야말로 공부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훌륭한 비결이다.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은 마치 바람처럼 이리저리 끊임없이 헤맨다. 꼭 길들이지 않은 말과도 같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이 우주에 그보다 더 강력한 도구는 달리 없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자야말로 삼계(三界) *주8 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정복하면 첫째, 공포가 사라진다. 공포는 마음과 몸[名色] *주9 을 `자아'와 결부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는 몸이나 마음에 가해지는 손상을 바로 자기자신에 가해지는 손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미망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오온(五蘊 ;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 *주10 의 작용이 바로 다름 아닌 인과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 그와 같은 미망은 사라지고 그 사람은 다시는 죽음이나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는 성공도 실패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덕을 해치는 행위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어떤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떨어져 볼 수 있는[遠離] 힘을 키우면 그만큼 공덕을 해칠 가능성도 줄어든다. 불건전한 행동은 불건전한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청정해지고 무질서한 상태가 개선되면 악업은 더이상 축적되지 않는다. 그는 그릇된 행동을 두려워하게 되고 관대함[無貪], 자비로움[無瞋], 지혜로움[無癡]에 바탕을 둔 행위에서 점점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출입식념(出入息念)- 호흡을 지켜보는 수행법 -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신집중 개발법은 출입식념, 즉 들숨과 날숨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공부방법이다. 이 수행법에서는 요가에서처럼 호흡에 대해 까다로운 요구를 늘어놓지 않고 오직 평상시의 호흡 그대로를 전제로 한다. 호흡은 단지 주의력을 한 지점에 고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뿐이며 보통은 코끝에다 의식을 집중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주의력이 어떤 이유로도 이리저리 방황해선 안되며, 심지어 호흡을 좇아서 움직여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일단 선택한 곳에 주의력을 단단히 고정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호흡을 확실히 지켜보기 위한 방편으로 호흡횟수를 헤아리는 방법을 써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위적인 방편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음이 고정된 채로 지속될 수 있게 되면, 헤아리는 노력은 중지하고 그냥 들숨과 날숨을 염하며, 다만 때때로 주의력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헤아려 보는 것이 좋다. 심리적 동요가 정지된 상태[止, samatha]에 가까이 갈수록 호흡은 점점 더 가늘어져서 마침내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 단계에 가면 반드시 어떤 심령적 현상이 나타나는데 처음 겪을 땐 대개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또 실제로 우리 몸을 통해 고(苦)를, 즉 신체의 물리적 요소[色蘊]가 생멸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단계가 온다. 이때는 혼란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럴 때 기억해 둘 것은 이와 같은 교란 상태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몸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것인데, 이제 마음이 안정되니까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고를 직접 체험해보는 첫경험이라 하겠다. 즉 사성제의 첫번째인 고의 진리[苦聖諦]를 자기의 내부에서 깨닫는 것이다. 이 경험이 지나가면 곧바로 뒤이어서 기쁨을 느끼는 단계가 온다. 즉 신체와 관련된 황홀한 기쁨의 체험단계다. 이렇게 설명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 관법(위빠싸나)을 지도할 때는 제자에게 다음엔 무엇무엇을 경험하게 된다고 미리 설명해주는 일이 없도록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미리 설명해줄 경우 그것이 암시효과를 내어 그릇된 반응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그 제자가 매우 암시에 민감하거나 스승의 영향력에 크게 좌우되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명상계발을 위한 도구 명상수행 *주11 에선 관심을 기울여 쏟는 집중처로써 흙이나 색깔과 같은 특별한 외부적 보조도구를 쓸 수도 있다. 촛불이나 벽에 난 구멍, 또는 금속으로 된 대상물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이용법에 대해선 빠알리 경전과 <청정도론> *주12 에 설명되어 있다. 특히 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어떤 명상대상을 지정해주실 때는 반드시 그 제자들의 특성에 맞추어 이를 주셨으며, 그때 각자에게 알맞는 기술을 골라주신 부처님의 오류없는 지혜는 사람의 전생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었음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 사념적 명상을 시킬 때도 마찬가지로, 그 주제를 고를 때 제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제자가 성격적으로 지니고 있는 큰 결함을 시정하는데 도움될만한 것으로 골라주셨다. 그래서 가령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에게는 신체의 부정(不淨)을 명상[不淨觀]하거나 `묘지에서의 명상법[白骨觀]'을 취하도록 권유하셨다. 그 목적은 이들 명상을 통해 애착심을 염오심으로 중화시키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애착과 염오 모두가 사라지는 구경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교묘한 방편'에 불과하다. 구경에 도달한 아라한에게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다. 대목건련 존자가 어느 나병환자로부터 한 덩어리의 밥을 받았을 때 보여주었던 것처럼, 아라한은 매사를 대함에 있어 완벽한 평온심으로 대한다. 염주의 사용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염주를 사용하는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다른 종교에서처럼 판에 박은 듯이 정형구(定型句)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기 위해서만 염주를 사용할 뿐이라면 아무리 경건하게 수많은 글귀를 거듭 되뇌어본들, 불교에서는 별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다만 주의력을 지속시키고 마음을 맑히는 방법으로 염주를 사용하는 경우엔 대단히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염주사용법의 하나가,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불·법·승의 공덕을 빠알리어 정형으로 되풀이해 외우는 길이다. 염주의 첫 알을 돌리면서 "이띠 삐 소 바가와!-"로 시작하여 다음 알을 돌리면서 두번째 자질에까지 계속하여 "이띠 삐 소 바가와 아라하-"하는 식으로, 계속하여 마지막 알에 가선 정형구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방식으로 해나간다. *별주* 이런 노력은 온 마음을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성공적으로 이행해 낼 수 없다. 이렇게 노력해나가다보면 불·법·승의 거룩한 공덕을 되새기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높은 경지로 고양된다. 다시 말하면 이 말들이 지니고 있는 뜻이 생멸하는 심찰나(心刹那) *주13 에 하나하나 새겨지기 때문이다. 아비담마 *주14 적 심리학 용어로 말하면, 이 공부의 가치는 생기고[成] ·머물고[住]· 사라지는[壞] 각 국면에 걸쳐 심찰나가 선한 성질을 띠는데 있다. 이들 선량한 심찰나들의 각각 그 하나하나는 상카라, 즉 성향의 요소[五蘊]의 개선에 기여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심찰나는 그 후속 심찰나들을 보다 높은 수준의 영역으로 향하게 이끎으로써 인격을 그 수준에 정착시키는데 기여한다. 적정[止]의 수행 적정한 마음을 닦는 지[止]수행을 하면 세 가지 이익이 따라온다. 금생에 행복을 가져오고, 좋은 내세를 기약하며, 마음의 때[垢]를 맑게 해준다. 이 세번째 요소는 통찰[觀, vipassanaa]을 성취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적정에 들면, 마음은 휘저음이나 출렁거림이 완전히 멈춘, 고요하고 맑은 호수처럼 되어, 그 표면에 사물의 본성을 여실히 거울 비추듯 비출 수 있게 된다. 즉, 갈애의 출렁임 때문에 평상식(平常識)으로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정을 이룬 마음, 그것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평화롭고 충만된 모습이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호(相好)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바 있어 부처님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도 이 상호를 대하면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부처님의 상호는 그 자체가 바로 명상의 적절한 주제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대다수의 불교인들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고요 적정한 부처님의 상호는 세속적 희망이나 공포로 어지러울대로 어지럽던 마음을 가라앉혀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상호자체가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열반의 소식이다. 관법수행 관법수행은 존재의 세 특상(特相) *주15 인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직접적 통찰로써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 세 특상은 과학이나 철학의 진실과 마찬가지로 지성적 사유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유방식을 통한 깨달음으로는 그 자체가 지니는 한계성 때문에 이기심과 갈애라는 양대 장애를 없애기에는 불충분하다. 존재의 궁극적 실상은 이런 장애들을 완전히 극복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인식 즉 직접적 `직관'의 차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때 이들 세 특상은 심리적 사실로서 실제적 체험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본인이 직접 체험을 통해 확인하기 전까지는 감관적 인식계[육근과 육경] *주16 나 그에 따른 감관적 반응이 지성적 확신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한다. 결국 서로 다른 두 수준의 의식이 병행하여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보통 이 무대에서는 무명이 지배적으로 우세하여, 의지적 활동이란 형태로 줄곧 작용하면서 생의 진로를 주도해나간다.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살아가는데 실패한 철학자야말로 이론과 실제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가장 비근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직접적 인식을 얻게 되면, 지금까지는 최고의 지성단계일지라도 기껏 이론에만 머물고 있던 것이 이제는 마치 우리가 뜨겁거나 찬 것을 또는 배고프거나 목마른 줄 `알 듯' 그렇게 실제적인 지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직접적 인식에 도달한 마음은 진리 위에 굳건히 자리잡게 되어 미망 대신 반야[慧] *주17 가 자리잡도록 한다. 기독교의 기도와 같은 종류의 사념적 명상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어 언제든지 누구라도 행할 수 있다. 거기에는 특별한 준비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좀더 차원 높은 훈련인 지(止)와 관(觀)을 행하는데는 기본 도덕률인 계율의 엄격한 준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수행을 위해서는 세속의 불결함을 떠나, 공부를 이룬 스승 밑에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한거상태(閑居狀態)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흔히들 이런 점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함부로 기술적인 연마에 뛰어들었다가 영적 손상을 입고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을 한갓 시험대상으로 삼는 경솔한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만일 믿을만한 스승의 지도 아래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일 때에는 공부를 오직 사념적 명상에 국한시키는 편이 최선책이다. 이 공부로선 깨침이라는 구극단계에까진 도덕적 면에서 많은 진전을 성취할 수 있으며 보다 본격적인 다음 단계를 위해 착실한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애관법의 실천 자애관법(mettaa-bhaavanaa)은 사념명상법 중 가장 보편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행법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닦을 수가 있다. 보편적이고 차별이 없는 자애의 염은 마치 라디오 전파처럼 온 사방으로 뻗쳐나감으로써 마음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힘을 드높이 승화시킨다. 자비관법을 꾸준히 지속해나가면 마침내 악의라곤 잠시도 품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진정한 평화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려면 모든 이들의 마음이 평화로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다만 반시간 정도라도 자애관법 훈련에 바칠 수 있도록 된다면 어떤 국제 협정보다 효과적으로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해 참된 진전을 이룩해낼 것이다. 만약 지금 이 새로운 부처님의 법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신조의 사람이든지 범세계적 자애관법 수련운동에 참여하도록 청해서 그들 각자의 종교가 표방하는 최고의 교의에 따라 생활하도록 다짐하게끔 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존하신 부처님께 경의를 드리면서, 동시에 자기네 특정 종교지도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경의를 표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대종교들이 적어도 이 수준에서만은 생각들이 일치되기 때문이다. 각 종교간에 공통분모가 찾아질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보편적 자애의 가르침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가르침만이 영원하고도 일체를 포용하는 진리의 힘으로 모든 인류를 교리적 차이를 초월해서 한데 규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숫따니빠따[經集]>의 자애경 *주18 에는 명상을 통해 계발해야 할 사랑의 마음가짐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경은 명상을 시작하기 전과 끝낼 때 반드시 암송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데, 실제 이 방식은 지금도 불교국들에선 변함없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이 경의 글귀는 자애의 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정신상태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써, 그리고 명상수행의 주제로써 두루 쓸모가 있다. 불교에서는 관법을 수행해 나갈 때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애를 갖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엔 심원한 심리학적 진실이 담겨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신을 혐오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은 남에 대해서도 진정한 자애를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더 가까운 대상은 없다. 따라서 만약 자신에 대한 태도가 건전하지 못하다면 사랑이 솟아나올 샘이 그 근원에서부터 독으로 오염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을 경탄의 대상으로 이상화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결점과 결함을 충분히 알고 있되, 이를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고쳐나가겠다고 결심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마음속 깊이 신뢰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애관법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나에게서 적대감이 사라지기를!나에게서 악의가 사라지기를!내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내가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이와 같은 생각이 발전되면 다음 단계에서는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똑같은 강도로 자기가 자연스럽게 정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데는 두 가지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첫째 그 대상인물을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으로 해야하고, 또 이성(異性)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19 둘째는 자애의 감정이 자칫해서 바로 이웃한 적(敵)인 색정으로 변질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감각적 기호면에서 성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경우엔 그들의 필요에 맞추어 이 규칙을 적절히 변경할 필요가 있다. 자애의 생각이, 친한 벗에 대하여 충분히 무르익었으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이번에는 별로 뚜렷하게 좋다 싫다 하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자애의 마음을 펼쳐나간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적대감을 가진 사람을 향해서 자애의 생각을 돌려야 한다.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이 단계에서다. 명상자는 이들 어려움을 미리 예상하고 그 어려움과 맞닥뜨려 씨름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를 위해  청정도론을 위시한 몇몇 문헌에 여러 가지 방안이 서술되어 있다. 그 첫째 방안은 적대인물을 무아, 즉 실체가 없다는 면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는 적대인물을 비인격적인 구성요소로, 즉 몸뚱이[色], 감각[受], 인식[想], 의지적 행위[行], 의식능력[識]으로 분석하라고 권유한다. 우리의 몸뚱이는 순전히 물질적 세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카락, 몸의 털, 피부, 손톱, 이빨 등등 이런 것들을 놓고 적대하고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 감각, 인식, 의지적 행위, 의식능력 등은 모두가 일시적 현상으로 상호의존하여 조건지워지고, 그리고 고(苦)에 묶여 있다. 결국 이것들은 무상·고·무아로서 이내 사라질 것들이고 고통으로 가득차 있으며, 자기라고 내세울만한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몸뚱이 그 자체에 개별적 인격성이 있을 수 없듯이 정신적 요소에도 마찬가지로 개별적 인격성은 없다. 그런 그들에게 적대감을 품을 여지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방법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른 방법도 있다. 가령 적대적인 사람을 연민으로 대하는 것과 같은, 정서적으로 중화시키는 마음상태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명상자는 이렇게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나와 다름이 없다. 나는 그와 다름이 없다. 우리는 둘 다 고통과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둘 다 무명과 갈애로 인해 어김없는 생명의 수레바퀴(윤회)에 매여 있다. 우리는 둘 다 같이 인과법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선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 고통을 치뤄야 한다. 그럴진대 무엇 때문에 남을 원망하고 적으로 삼을 것인가? 차라리 내 마음을 맑게 하고, 그리고 그도 그렇게 되도록 바라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 둘 다 같이 고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런 생각을 간절하게 계속하고 있으면 마침내는 적대감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리하여 드디어 자애의 생각을 이들 네 가지 부류의 대상들에게 ― 자기 자신, 친우, 중립적으로 대하는 사람, 적 ― 똑같은 질과 심도로 행할 수 있게 될 때 그 명상은 성공적인 것이 된다. 대상을 보편성으로 확대하여 자애로 충만시키는 방법으로서 명상자는 자애의 대상을 다음 다섯 제목에 따라 차례로 생각한다. 느낄 줄 아는 모든 존재들[有情物],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들[生命體], 존재 세계에 태어난 모든 존재들[存在體], 인격을 지닌 모든 것들[人格體], 개별체의 형식을 취한 모든 것들[個體], 그리하여 이들 각 집단에 대해 따로따로 다음과 같이 일정한 생각을 되풀이한다. `그들에게서 적대감이 사라지기를!그들에게서 악의가 사라지기를!그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그들이 부디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명상자는 명상 대상에 대해서 일일이 위에 든 다섯 가지 보편화시킨 명칭을 차례로 불러가면서 각기 그 명칭에 따라 그 대상을 생각하면서 자애심으로 충만시켜 나간다. `모든 유정물이…, 모든 생명체가…, 모든 존재체가…, 모든 인격체가…, 모든 개체가 적대감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등등.' 이 같은 명상에서는 어떤 대상이든 국소(局所)적 위치를 문제삼지 않고 일체를 보편적으로 포용한다. 그래서 `대상을 보편화하여 자애로 충만시키는 방법'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은 대상을 분류, 한정해 나가면서 자애로 충만시키는 방법인데 여기에는 대상을 일곱 부류로 분류하여 한정시킨다. 일곱 부류란 즉 모든 남성, 모든 여성, 모든 고귀한 분(성스러운 네 가지 결실[四果]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성취한 사람), 모든 범부, 모든 신, 모든 인간, 모든 악도의 중생들이다. 이들 각각의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위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명상한다. `모든 여성들에게서 적대감이 사라지기를…, 모든 남성들에게서 적대감이 사라지기를… 등등.' 이 방법은 대상을 성질과 조건에 따라 분류, 한정하기 때문에 `한정시켜서 자애로 충만시키는 방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시방에 있는 일체 존재를 사랑으로 충만시키는 방법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행한다. 자신의 마음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명상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정신을 모은다. `동쪽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적대감이 사라지기를! 그들에게서 악의가 사라지기를! 그들이 고에서 벗어나기를! 그들이 부디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마찬가지로 서쪽, 북쪽, 남쪽, 북동쪽, 남서쪽, 북서쪽, 남동쪽, 위쪽, 아래쪽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의 `보편화하여 충만시키는 법'과 한정화시켜 충만시키는 법`에서 말한 열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제각기 시방의 각 방위에 따라 또다시 적절한 정형구에 맞추어 생각한다. 이상의 스물두 가지 자애관법 수행방식 중 어느 것이든 이를 실천하면 본삼매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즉 선(禪)이라는 정신적 몰입상태로 이끄는 정신 집중상태[定]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을 `자애를 통해 마음의 해탈을 얻는 방법[慈一心解脫]'이라고 부른다. 이는 또 네 가지 범주처(梵住處)의 첫번째 것이기도 한데, 이 네 가지 거룩한 상태에 대해 자애경은 `여기에 가장 높은 삶이 선포되었다'고 설하고 있다. 자애·동정·동희·평온[慈悲喜捨]의 네 마음상태는 세간식(世間識) *주20 에선 가장 높은 수준을 점한다. 이들 마음상태에 도달하여 그곳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에겐 생의 고가 뚫고 들어갈 수 없다. 마치 신처럼 그는 운명의 시련과 세속상황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보호받는 가운데, 흔들림 없는 고요 속에 움직이고 행동하게 된다. 이 네 가지 마음가짐 가운데 제일 먼저 닦아야 할 마음가짐이 바로 자애다. 왜냐하면 무한한 사랑을 통해서 마음은 처음으로 해탈의 맛을 보기 때문이다. 부록 : 자애관법(慈愛觀法) 자 애 경(<숫따니빠따> 제143∼152 게송의 부처님 말씀) 선행에 익숙해진 사람이평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해야 할 바는 이러하다. 유능하고 곧고 의연하며상냥하고 점잖고 겸손하다또 만족할 줄 알아 구하는 바가 적으며잡일을 만들지 않고 홀가분하게 산다. 감관을 고요히 하여 빈틈없고, 잘 절제하며속인들과 접하면서 탐심을 내지 않는다또 다른 현자들이 마뜩찮아 할 일은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생각한다) 안전하고 행복한 가운데모든 중생이 행복한 마음이 되기를살아 숨쉬는 존재라면 그 무엇이든연약하거나 튼튼하거나를 가리지 않고하나도 빠짐없이, 그것이 길다란 것이든커다란 것이든, 중간치든 짤막한 것이든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또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볼 수 없는 것이든멀리 살든, 가까이 살든존재하고 있든, 존재를 구하고 있든그 모든 중생들이 다 행복한 마음이 되기를. 그 누구도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기를어떤 경우일지라도 남을 경멸해서는 안된다그리고 성내거나 원망하는 마음에서 서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서도 안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자식을 보호하듯 그것도 하나뿐인 자식을.꼭 그와 같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늘 지니기를또 전세계에 대한 사랑에서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늘 지니기를위로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 두루장애없이, 적이 없이, 경쟁자도 없이. 그리고 서 있거나 걷거나 앉아있는 동안또 누워있는 동안도 졸음에 빠지지 않는 한이 (자애의) 염을 단호히 지켜야 한다사람들은 이 염을 세상에서 거룩한 머물 곳[住處]이라 부른다. 그래서 그가 그릇된 견해에 말려들지 않고계를 온전히 하고, 통찰을 완성하면그래서 감관적 욕구와 관련된 탐심을 버리면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주21 주해 1) 명상 : 사전에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함. 고요히 사색에 잠김"이라 설명하고 있듯 명상이란 말은 사유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다만 그 깊이와 집중면에서 일반 사유와 구별될 뿐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 말하는 바와나(bhaavanaa)는 비록 meditation(명상) 으로 번역되긴 하지만 내용은 많이 달라서 사유를 좇아 다니지 않고 정신집중에 의해 직관적 통찰을 얻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역 역시 정확을 기할 때는 meditation 대신에 mental development를 쓴다. ∥본문으로∥ 2) 사념적 명상법 : 생각을 좇는 명상법. 사유활동을 계속하면서 그 사유가 이끌어내는 바를 깊이 성찰하는 것. 3) 욕계천상 : 삼계(뒤의 주8 참조) 가운데 하나인 욕계에서 가장 높은 세계. 여기엔 사왕천, 도리천, 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의 여섯 하늘이 있다. 4) 아수라 세계 : 욕계 육도(천상계, 인간계, 아수라계,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의 하나.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들의 세계. ∥본문으로∥ 5) 전도(顚倒, viparyaasa) : 올바른 이치에 반하여 뒤바뀐 것.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하는 입장. 인식[想]의 전도, 마음[心]의 전도, 견해[見]의 전도 중 어느 하나 때문에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고통인 것을 즐거움(또는 즐거움의 원천)으로,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는 것으로, 부정(不淨)한 것을 깨끗하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아는 네 가지 전도를 범한다. 영역은 perversion 또는 hallucination. 6)<대념처경(大念處經)>: <장부(長部)> 22. 7) 자아관념[有身見, sakkaayaditthi] : 오온이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것에 불과한 이 개체를 상주한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8) 삼계(三界) : 윤회세계를 이루는 욕계·색계·무색계의 세 세계.1.욕계 :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는 오욕(五慾)의 세계(육도로 이루어짐).2.색계 : 음욕과 식욕 등은 여의었으나 감관작용은 존재하고 있는 청정한 물질의 세계[색계 사선(四禪)에 의해 들어가는 세계].3.무색계 : 물질을 여의는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사무색정(四無色定)에 의해 들어가는 세계]. ∥본문으로∥ 9) 명색(名色, naama-ruupa) : 마음과 육체, 정신과 물질. 원래 고(古)우파니샤드에서는 현상 세계의 명칭과 형태를 의미했으며, 불교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구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에는 명은 개인 존재의 정신적인 면, 색은 물질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오온 전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씀.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는 4항으로 식(識)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또 육처(六處)를 조건짓는다. 10) 오온(五蘊, pa~nca-khandha) : 존재[有]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집합. 또는 집착 대상의 다섯 범주. ①물질 또는 신체의 요소[色蘊], ②느낌의 요소[受蘊], ③지각의 요소[想蘊], ④의지의 요소[行蘊], ⑤의식의 요소[識蘊].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므로 그냥 오온이라 부르고 아직 집착이 남아있는 범부와 사향, 삼과의 경우는 오취온(五取蘊, pa~ncaa-upaadaana- kkhanda)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함. ∥본문으로∥ 11) 명상수행(kamma.t.thaana) : 한문으로는 업처(業處)라 번역. 논장(論藏)에만 나오는 전문 술어로 kamma는 명상 또는 숙고행위를 뜻하며 .thaana는 처소란 말인데 여기선 주제 또는 연습을 뜻한다. 따라서"명상의 주제" 또는 "주제를 정하여 명상하는 공부"란 뜻. 12)<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 Magga)>: 인도의 논사인 붓다고사[佛音 또는 覺音]가 5세기 초에 스리랑카에 가서 그곳에 전해지고 있던 모든 논서를 수렴 정리하여 빠알리어로 저술한 명저.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 가장 권위를 누리고 있는 해석서. ∥본문으로∥ * 정형구의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함]Iti'pi so bhagavaa-arahaaa, sammaasambuddho, vijjaacara.nasmpanno, sugato, lokaviduu,anuttaropurisadamma-saarathi, satthaa devamanussaanam, buddho, bhagavaa ti. 그분 세존께선 바로 아라한[應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또는 正遍知]이시며, 지혜와 실천이 구족하신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깨달으신 분[覺者], 세존(世尊)이시다. [불법의 공덕을 생각함]Svaakkhaato bhagavataa dhammo, sanditthiko, akaariko, ehipassiko,opanayiko, paccattam veditabbo vi~n~nuuhi ti. 세존께서 잘 설해주신 법은, 당장에 공덕을 드러내며, 시간을 초월하여 타당하며, 와서 보라는 권유이며, (열반에의) 길로 이끌어주며, 지혜있는 자 누구나 스스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의 공덕을 생각함]Su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uuju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naaya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saamici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yadidam cattaari pursayugaani atthapurisapuggalaa esa bhagavato saavakasangho, aahuneyyo, paahuneyyo, dakkhi.neyyo, a~njalikara.niiyo anuttaram. pu~n~nakkhettam lokassaa ti. 세존의 제자이신 스님들은 길을 잘 걷고 있으며 길을 바르게 걷고 있으며, 길을 지혜롭게 걷고 있으며, 길을 충실하게 걷고 있으니 저 네 쌍의 분들, 여덟 단계에 계신 분들이다. 이들 세존의 제자분들은 공양을 올려 마땅하며, 시중들어 마땅하며, 보시하여 마땅하며, 합장드려 마땅하며, 이 세상에 다시없는 복전(福田)이다. ∥본문으로∥ 13) 심찰나(心刹那, cittakkha.na) : 아비담 교학에서 파악하는 인식의 전개과정은 대단히 정밀하다. 논장과 청정도론에 의하면 오근(五根)을 통해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는 데는 열 가지 기능이 차례로 진행되며, 제6근을 통한 인식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작용한다. 이 각 기능이 작용하는 매 단계에 소요되는 시간을 `심찰나'라 하며, 이는 다시 비롯됨과 머무름, 사라짐의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한 찰나는 지극히 짧은 시간으로 번개의 섬광의 10억분의 1보다 짧다고 한다. 그처럼 우리의 인식은 급속히 바뀌고 있다. 영역은 consciousness-moment 또는 thought-moment. ∥본문으로∥ 14) 아비담마(abhidhamma) : `수승한 법'이란 뜻. 일반적으로 불교 교리체계를 가리키는 경우와 불교 삼장 중의 논장(論藏)을 가리키는 경우의 두 가지 용도로 쓰임. 여기서는 논장 계통을 이어 발달된 남방교학 전통을 가리킴. 15) 세 특상(ti-lakkhana) : 존재의 본성을 이루는 무상, 고, 무아의 세 성질. 불교 세계관의 골격으로 북방의 삼법인에 해당함. 다만 삼법인에서 보통 고 대신에 열반적정을 넣음. 영역은 three characteristics 또는 three signs of being. ∥본문으로∥ 16) 육근(六根) : 대상을 인식하는 경로인 눈·귀·코·혀·몸·마음[意]. 육경(六境) : 육근에 대해 대경을 이루는 빛·소리·냄새·맛·감촉·의식대상[法]. 17) 반야[慧, pa~n~naa] : 지혜를 나타내는 용어로 가장 널리 쓰이는 말. 불교 전문 술어로서는 분별지에 대칭되는 통찰지를 의미한다. 이는 팔정도의 정념(正念), 정정(正定)에서 닦는 위빠싸나[觀]에서 결과하는 것으로 존재의 세 특상을 꿰뚫어 보는데 있으며, 성스런 사과(四果)와 열반의 실현을 가져온다. 이 반야가 생기는 조건에 따라 사유에 근거한 지혜, 배움에 근거한 지혜, 수행에 근거한 지혜의 세 가지 지혜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반야는 오근의 하나이며, 삼학의 하나이며, 십바라밀의 하나이다(남방의 십바라밀 : 1.보시 2. 지혜 3.이욕(離慾) 4.반야 5.정진 6.인욕 7.진실 8.결의 9.자애 10.평온). ∥본문으로∥ 18) 부록참조.19) 논(論)에는 다음 여섯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자관(慈觀)은 초심자는 피하도록 권하고 있다. 1.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 억지로 사랑하는 자리에 놓으려면 피곤해진다.2. 매우 좋아하는 벗 - 중립적 자리에 두려면 피곤해지며, 또 그에게 사소한 불행이라도 생기면 근심과 슬픔이 생기니까.3.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 - 그를 존경하는 자리나 좋아하는 자리에 두려면 피곤해지니까.4.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 - 그를 마음에 떠올리면 화가 치미니까.5. 이성에 대한 생각 - 욕정이 생기므로.6. 죽은 사람 - 죽은 사람에 대한 자관은 아무리 힘써도 근접삼매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20) 세간식(世間識, lokiya citta) : 출세간식(lokuttara citta)에 대칭되는 말. 명색(名色)의 세계를 대상으로 계속 업을 짓고 있어 아직 `업지음을 벗어난 식(kiriya citta)'에 이르지 못한 식. 선식(善識), 불선식(不善識), 이숙식(異熟識)으 세 식을 말함. 21) 모태에 들지 않는다 : 다시는 존재를 받지 않는다. 즉 윤회를 벗어나 해탈한다는 말. ∥본문으로∥   불교의 명상BUDDHIST MEDITATION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 / 정 승 석 옮김Francis storyThe Anagarika Sugatananda (BODHI LEAVES NO. B 15)BUDDHIST PUBLICATION SOCIETYKANDY, SRI LANKA 펴낸곳  도서출판 고요한 소리http://www.calmvoice.org/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   110-300)☏ 739-6328/725-3408  글전송 723-9804(대구 053-425-4035/부산 051-513-6650)E·mail:calmvs@unitel.co.kr대구지부 053)425-4035/부산지부 051)513-6650 출처:http://trek.pe.kr/
32    죽음 명상 댓글:  조회:1390  추천:112  2007-10-02
누구나 홀로 맞을 수 밖에 없는 그 시간. 죽음의 순간을 명상함으로써 성숙해집니다. 세상에서 아침을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하루를 값지게 살기를 원한다면집착 없이 당당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연습도 하나의 좋은 명상이 될 것입니다.자리에 누워 몸을 편안히 이완시킵니다.당신이 죽었다고 상상합니다.눈, 코, 입, 귀, 촉감.당신의 모든 감각기관이 하나 둘 닫히기 시작합니다.죽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당신이 몸에서 떠나버렸다고 상상합니다.몸에서 빠져 나온 당신의 의식은 편하게 잠들어 있는 당신의 몸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감정, 성격, 얼굴, 몸, 인간관계를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덤덤히 바라봅니다.시신이 된 몸을 관찰합니다.흙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은 썩어 없어지고뼈마저 삭아 바람과 비에 흩어져 가는 것을 바라봅니다.     시신이 자취 없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평화롭게 이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편안한지, 두려운지, 슬픈지, 아쉬움이 있는지 나에게 일어나는 느낌을 느껴봅니다.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때론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당신의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당신은 여전히 평화롭게 존재합니다.사라진 그것들이 실제 당신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느낍니다.삶의 이유 없는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괴로움의 근원인 집착이 사라집니다. <작자 미상> 누구나 죽는 다는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하지만 죽음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안다하기보다도 오히려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갖고 있다.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못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도 한번쯤 조용히 사색해보는것도 좋은 일일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것은 삶에 대한 진정한 태도이고 어떻게 인생을 살것인가는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낄뿐 정면으로 대면할 용기를 갖지못한다. 결국은 죽음에 다달아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 모두가 준비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그러니 인생을 살면서, 지금 현재 숨을 쉬고 있으면서 한번쯤은 과연 나도 죽을때 원이 없이 미소를 머금고 갈수있는가를 생각해보자. ... 앞으로 미래에 나는 석달밖에 살지못한다고 가정해보자!내가 이 석달사이에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가? 앞으로 내가 정말 석달밖에 못 산다면 아직도 지나간 어제처럼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랑비할수 있을가?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나누며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도 해보고....진정 내가 하고싶었던 일은 무엇이였던지...내가 죽는 다면 여직껏 나의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가?...시간을 더 앞당겨 지금 현재에 현재에 내가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어쩔수 없이 내가 지금 있는 그대로  죽는다면 어떠한 상황이 일어날지를  상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의 말도 할수도 없이 죽어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내 몸이 관속에 들어가 외계와는 더 연계할수 없어 전화 한통도 칠수없다고 생각할때, 혹 나는 어떤 느낌일가?... 죽음을 생각하는 명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제 얼마 되지 않아서  흐느끼기시작한다.  삶에 대한 애착일가 아니면 후회일가 아니면 두려움일가.... 내가 이제 다시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면 그때에 가서도 나는 내 고집대로 옛방식대로 살아갈가? 아닐것이다. 다시는 안해가 해주는 밥이 맛이없다고 투정부리지않을것이며 다시는 남편하고 사소한 일로 화를 내지 않을것이다. 다시는 자식들보구 애를 태운다고 원망을 않을것이며 부모보고도 짜증을 부리지 않을것이다.  나는 다시는 나의 이웃과 동료들을 볼수없는데... 어찌 그들을 질투를 하고 싸울수가 있단말인가.... 인생은 무상하다. 우리는 늘 그 무상함을 생각하여야 한다. 죽음이 멀다고 생각하지 말라, 죽음은 청천벼락처럼 아무때건 우리의 뒤통수를 때릴수가 있다. 죽음이 그러하오니 오늘오늘의 이 순간순간을 뜻깊게 보내는게 가장 현명한 일이다.  래일 당장 죽을 사람이 사소한 일에 집착하여 싸울수가 없는 법이다. 바로 그 무상함을 알면 우리의 생활에는 다툼이 있을수가 없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것이다.사랑도 부족하겠거늘 어찌 다툴수가 있단 말인가....  
31    9월 25일 선경대일출 댓글:  조회:1252  추천:97  2007-10-02
                         
30    12연기법도표 댓글:  조회:2871  추천:97  2007-10-01
12연기법도표     12인연법해석 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인연법을 설명하리니 잘 기억하고 그 행을 닦아 익혀라." 비구들은 아뢰었다.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분부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인연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의식이 있으며, 의식을 인연하여 이름과 물질이 있고 이름과 물질을 인연하여 여섯 감관이 있으며, 여섯 감관을 인연하여 닿임이 있고 닿임을 인연하여 느낌이 있으며, 느낌을 인연하여 욕망이 있고 욕망을 인연하여 잡음이 있으며, 잡음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늙음, 병, 죽음과 근심, 걱정, 고통, 번민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리하여 다섯 쌓임의 몸을 이루었느니라. 무명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고통을 모르고 그 원인과 그 사라짐과 그 사라지는 길을 모르는 것이니 이것을 무명이라 한다. 행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행에는 세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이른바 몸의 행, 입의 행, 뜻의 행이니 이것을 행이라 하느니라. 의식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알음이니, 여섯이란 이른바 눈, 귀, 코, 혀, 몸, 뜻의 알음이다. 이것을 의식이라 한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느낌, 상상, 기억, 닿임, 생각이니, 이것을 이름이라 한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네 가지 요소와 네 가지 요소로 된 몸이니, 이것을 물질이라 하며 물질과 이름은 각각 다르므로 이름과 물질이라 하느니라. 여섯 감관이란 무엇인가. 안의 여섯 감관이니, 여섯이란 이른바,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감관이다. 이것을 여섯 감관이라 한다. 닿임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여섯 닿임의 몸이다. 여섯 닿임이란 즉 눈, 귀, 코, 혀, 몸, 뜻의 닿임이니 이것을 닿임이라 하느니라. 느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세 가지 느낌이다. 어떤 셋인가. 즉 즐거운 느낌, 괴로움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 이것을 느낌이라 한다. 욕망이라 무엇인가. 이른바 세 가지 욕망의 몸이 그것이니, 욕심 세계의 욕망, 형상 세계의 욕망, 무형 세계의 욕망이니라. 잡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네 가지 잡음이 그것이다. 어떤 넷인가. 즉 욕심 세계의 잡음, 소견의 잡음, 계율의 잡음, 의 잡음이다. 이것을 네 가지 잡음이라 한다. 존재란 무엇인가. 이른바 세 가지 존재이다. 어떤 셋인가. 욕심 세계의 존재, 형상 세계의 존재, 무형 세계의 존재이니 이것을 존재라 한다. 생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생이란 어느 집에 태이어 갖가지 존재를 받아 다섯 쌓임을 얻고 여섯 감관을 받는 것이니 이것을 생이라 하느니라. 늙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들의 몸에서 이가 빠지고 머리털이 세며 기력이 쇠하고 감관이 무르녹으며, 수명이 날로 줄어들어 본래의 정신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들이 받은 몸의 온기가 없어지면서 덧없고 변하여 다섯 친척이 각기 흩어지며 다섯 쌓임의 몸을 버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알라. 그러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라 하느니라. 이것이 인연법으로서 그 이치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모든 부처 여래가 큰 자비를 일으켜 수행해야 할 일을 나는 이제 마쳤다. 너희들은 나무 밑이나 한데서나 혹은 무덤 사이에서 이것을 생각하고 좌선하면서 두려워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지금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으리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사뢰었다. "여래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매우 깊은 인연법을 설명하셨나이다. 그러하오나 제가 관찰하오매 그다지 깊은 이치가 없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쳐라, 그쳐라, 그런 생각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이 十二 인연법은 매우 깊고 깊어 보통 사람으로서 능히 밝게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옛날 이 인연법을 깨닫기 전에는 생, 사에 흘러 다니면서 벗어날 기약이 없었느니라. 그리고 아아난다야, 이 인연법이 그다지 깊지 않다고 말한 것은 비단 오늘 너만이 아니다. 옛날에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을 말하리라. 지나간 세상에 수염이라는 아수라왕은 가만히 생각하였다. '저 바다 밖으로 나가 해와 달을 붙들어 보고 싶다.' 그래서 변화시킨 몸이 아주 커서 바다 물이 허리와 가지런하였다. 그 때에 그 아수라왕의 아들 구나라는 그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나도 지금 바다 물에 목욕하고 싶습니다.' 수염은 말하였다. '바다에 들어가 목욕하려고 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바다 물은 매우 깊고 또 넓어 결코 거기서 목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나라는 아뢰었다. '나는 지금 그 물이 대왕의 허리와 가지런한 것을 보는데 왜 매우 깊다고 말하십니까.' 그래서 아수라왕은 곧 아들을 붙잡아 바다에 넣었다. 아들은 그 발이 물 밑에 닿지 않자 매우 겁이 났다. 때에 수염은 아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까 바다 물이 매우 깊다고 너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너는 두려울 것 없다고 말하였거니와 오직 나만이 바다에 목욕을 할 수 있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 때에 수염 아수라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달리 생각하지 말라. 그는 곧 나이니라. 그리고 그 때의 그 아들은 바로 너이니라. 그 때에 내가 바다 물이 매우 깊다고 할 때 너는 두려울 것 없다고 말하더니, 지금 또 매우 깊은 十二 인연법을 너는 그다지 깊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구나. 모든 중생들은 十二 인연법을 알지 못하고 생, 사에 헤매면서 거기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행의 근본을 알지 못하여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면서 영원히 다섯 가지 번뇌 속에 있으니 벗어나기를 구하지마는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라. 나도 처음에 불도를 이루었을 때 十二 인연을 깊이 생각하였기 때문에, 악마의 권속들을 항복 받고 무명을 없애어 지혜의 밝음을 얻어 온갖 어두움이 아주 없어지고 티끌과 때가 없어졌느니라. 또 아아난다야, 나는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설명하고 이 十二 인연법을 말하여 곧 도를 깨닫게 하였다. 이 사실로서도 十二 인연법은 매우 깊고 깊은 것으로서 보통 사람이 능히 밝혀 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아아난다야, 매우 깊은 이 十二 인연법을 생각하여 받들어 행하고 그와 같이 공부하기를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五) 聞如是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今當說因緣之法。善思念之。修習其行 諸比丘白佛言。唯然。世尊。爾時。諸比丘從佛受教 世尊告曰。彼云何名為因緣之法。 所謂無明緣行。行緣識。識緣名色。名色緣六入。六入緣更樂。更樂緣痛。痛緣愛。愛緣受。受緣有。有緣生。生緣死。死緣憂.悲.苦.惱.不可稱計。如是成此五陰之身 彼云何名為無明。所謂不知苦。不知習。不知盡。不知道。此名為無明 彼云何名為行。所謂行者有三種。云何為三。所謂身行.口行.意行。是謂為行 彼云何名為識。所謂六識身是也。云何為六。所謂眼.耳.鼻.舌.身.意識。是謂為識 云何名為名。所謂名者。痛.想.念.更樂.思惟。是為名 彼云何為色。所謂四大身及四大身所造色。是謂名為色。色異.名異.故曰名色 彼云何六入。內六入。云何為六。所謂眼.耳.鼻.舌.身.意入。是謂六入 彼云何名為更樂。所謂六更樂身。云何為六。所謂眼.耳.鼻.舌.身.意更樂。是謂名為更樂 彼云何為痛。所謂三痛。云何為三。所謂樂痛.苦痛.不苦不樂痛。是謂名為痛 彼云何名為愛。所謂三愛身是也。欲愛.有愛.無有愛。云何為受。所謂四受是。                                        云何為四。所謂欲受.見受.戒受.我受。是謂四受 彼云何為有。所謂三有。云何為三。欲有.色有.無色有。是名為有 彼云何為生。所謂生者。等具出家。受諸有。得五陰。受諸入。是謂為生 彼云何為老。 所謂彼彼眾生。於此身分。齒落髮白。氣力劣竭。諸根純熟。壽命日衰。無復本識。是謂為老 云何為死。 所謂彼彼眾生。展轉受形。身體無熅。無常變易。五親分張。捨五陰身。命根斷壞。是謂為死。 比丘當知。故名為老.病.死。此名為因緣之法。廣分別其義。諸佛如來所應施行起大慈哀。吾今已辦。當念在樹下露坐。若在塚間。當念坐禪。勿懷恐難。今不精勤。後悔無益 爾時。阿難白世尊言。如來與諸比丘說甚深緣本。然我觀察無甚深之義 世尊告曰。止。止。阿難。勿興此意。所以然者。十二因緣者極為甚深。非是常人所能明曉。 我昔未覺此因緣法時。流浪生死。無有出期。又復。阿難。不但今日汝言因緣不甚深。昔日已來言不甚深也。所以然者。乃昔過去世時。有須焰阿須倫王竊生此念。欲捉日月。出大海水。化身極大。海水齊腰 爾時。彼阿須倫王有兒名拘那羅。自白其父。我今欲於海水沐浴。須焰阿須倫報曰。莫樂海水中浴。所以然者。海水極深且廣。終不堪住海水中浴。時。拘那羅白言。我今觀水齊大王腰。何以故復言甚深。是時。阿須倫王即取兒著大海水中。爾時。阿須倫兒足不至水底。極懷恐怖。爾時。須焰告其子曰。我先敕汝。海水甚深。汝言無苦。唯我能在大海水洗浴。非汝所能欲洗 爾時須焰阿須倫者。豈異人乎。莫作是觀。所以然者。須焰者即我身是也。爾時阿須倫兒。即汝身是也。爾時海水甚深。汝言無苦。今復言十二因緣甚深之法。汝復言無是甚深。 其有眾生不解十二緣法。流轉生死。無有出期。皆悉迷惑。不識行本。於今世至後世。從後世至今世。永在五惱之中。求出甚難。我初成佛道。思惟十二因緣。降伏魔官屬。以除無明而得慧明。諸闇永除。無塵垢。又我。阿難。三轉十二說此緣本時。即成覺道。 以此方便。知十二緣法極為甚深。非常人所能宣暢。 如是。阿難。當念甚深。奉持此十二因緣之法。當念作是學 爾時。阿難聞佛所說。歡喜奉行    
29    현대사회에 필요한 명상 댓글:  조회:1925  추천:125  2007-09-30
관법(觀法)명상이란 아래의 문장은 본 명상클럽의 취지와 일치하므로 참고로 옮겨온 글임을 밝혀둡니다.   오늘날 실로 다양한 명상이 널리 보급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자연과 사회적 환경의 오염, 개인 및 사회적인 심리적 위기의식, 인간의 의식 수준의 향상 등의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명상 및 관련된 적절한 노력을 통하여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인류 문명 전체의 수준으로나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촌에서 행해지고 있는 명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그 의미를 쉽게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자면, 명상이란 결국 우리 본래 상태를 회복하여 더불어 드러내는 마음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명상의 관점에서 보는 우리 본래의 상태란 인지적으로는 마음이 활짝 일깨워진 깨달음의 지혜의 상태요, 정서적으로는 조건 없는 사랑 또는 연유 없는 대비(大悲)의 상태이며, 아울러 그 행동에 있어서 걸림이 없고 생명력이 넉넉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현상적 존재들은 더불어 조화롭게 있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여, 그것을 다시 역사ㆍ사회적으로 제약된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마음의 활동이 명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관법(觀法) 명상이란 우리 자신과 세계를 돌아보며 이 마음을 일깨워가는 인지적(認智的)인 노력을 중심으로 사랑과 자비(慈悲)에로의 정서적인 성숙 및 그 걸림 없는 행동으로의 구현까지 포함하는 전일(全一)한 성격의 명상으로서, 실제로 다음의 세 단계에 걸쳐 의식적인 발전의 노력을 해오고 있습니다.   먼저, 남ㆍ북방의 불교의 명상을 통합하고,   둘째로, 그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마지막으로,   이를 현대적 삶의 길의 한 부분으로 발전시켜 가려고 합니다.   먼저, 모든 위대한 종교 및 정신적 전통마다 명상이 있습니다만, 불교의 명상은 특히 경험과 이성(理性)에 바탕을 둔 마음과 몸에 관한 심층적인 탐구라고 할 만한 보편적인 성격이 뛰어나서, 우리 현대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문화적 보고(寶庫)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는 그 오랜 역사를 통해서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명상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을 꼽는다면, 미얀마 등의 남아시아의 사념처(四念處) 또는 이른바 ‘위빠사나 명상’, 동아시아의 선(禪), 그리고 티벳의 이른바 람림(Lamrim, 菩提道次第) 및 밀교 명상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오랜 불교전통에서 동아시아에서도 선정(禪定)과 지혜(智慧), 또는 지관(止觀)을 함께 닦는 것(雙修)은 널리 강조되어온 바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통합적 정신을 살리면서도, 최상위에 밀교의 수행을 두고 있는 티벳의 명상과는 달리, 오늘날의 새로운 관점에서 그러한 지역적인 차이를 뛰어 넘어, 나름대로 통합적 명상에의 시도를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러한 통합적 명상은 전통적인 다양한 명상이 현대적으로 해석(解釋)된 것이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불교 자체가 주요한 문화를 이루어온 남아시아나 티벳과는 달리, 그리고 근본적으로 유사성이 많은 힌두교나 유교(儒敎) 또는 도가(道家) 사상을 다른 사상으로 만나온 인도나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의 삶과 세계는 이미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서양의 문물이 깊숙이 자리 잡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근본적으로 상이(相異)한 세계관(世界觀)과 삶의 길이 만나고 융합하는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의 명상은 이러한 변화된 역사ㆍ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시 해석(解釋)되어진 것일 때 비로소 적절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 모두가 보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은 이제 명상이 기존의 종교적인 수행(修行)의 엄격하고 무거운 틀을 벗어나서, 상당히 자유롭고 다채롭게 우리의 일상의 삶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으로서 다양하게 평가할 소지가 있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보다는 일반인 또는 ‘수련자’ 중심의,어떤 면에서 해방적(解放的)인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자신들의 심신(心身)의 전일한 건강, 그리고 정신적 구제(救濟)를 포함한 역시 전일한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삶의 길로서 명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취지의 관법명상은 지난 2002년 9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가 개교한 이래 정규 교과목의 강의로 개설되어 왔고, 아울러 지금까지 열네 차례의 정기수련회 및 월례 1일 수련회를 개최해왔습니다. 이 명상은 기본적으로 인도의 고엔까 계통의 위빠사나 명상의 기법에 바탕을 두면서도, 마음을 고요하게 집중하는 명상과 분석하여 통찰하는 명상 및 자비(慈悲), 그리고 명상적이면서도 심리학적인 자기분석(自己分析)과 일상의 삶과 행동으로의 이 모든 내용의 자연스런 융합(融合)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명상은 종교나 사상, 연령과 국적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지금의 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삶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진실(眞實)에 의지하며, 조금씩 마음의 문제를 직면하여 풀고 성장하기를 바라고, 아울러 우리 이웃 및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자연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존재와 더불어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마음과 노력을 보태며 이러한 명상적 움직임을 함께 이끌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28    호흡을 생각하는 명상 댓글:  조회:1501  추천:78  2007-09-30
(八) 聞如是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修行一法已。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具。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安般 佛告諸比丘。云何修行念安般。便有名譽。成大果報。眾善普具。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宣。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 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說 諸比丘對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 世尊告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安般。所謂安般者。若息長時。亦當觀知我今息長。若復息短。亦當觀知我今息短。若息極冷。亦當觀知我身息冷。若復息熱。亦當觀知我今息熱。具觀身體。從頭至足皆當觀知。若復息有長短。亦當觀息有長有短。用心持身。知息長短。皆悉知之。尋息出入。分別曉了。若心持身知息長短。亦復知之。數息長短。分別曉了。如是。諸比丘。名曰念安般。便得具足。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安般念。便當獲此諸善功德。 如是。諸比丘。當作是學 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八.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널리 펴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아나아파아나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아나아파아나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의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비구는 몸과 뜻을 바루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아나아파아나를 생각한다. 즉 이른바 아나아파아나란, ‘ 만일 숨이 길 때에는 <나는 지금 숨이 길다>고 관해 알고, 만일 숨이 짧으면 <나는 지금 숨이 짧다>고 관해 알며, 만일 숨이 매우 차가우면 <나는 지금 숨이 차갑다>고 관해 알고, 만일 숨이 뜨거우면 <나는 지금 숨이 뜨겁다>고 관해 안다. 그리고 머리에서 발에까지 온 몸을 두루 관해 안다. 만일 숨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면 <숨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고 관한다. 마음을 쓰고 몸을 단속해 숨의 길고 짧음을 모두 알며, 숨의 나고 들음을 찾아 분별해 환희 안다. 혹은 마음이 몸을 단속해 숨의 길고 짧음을 아는 것도 또한 알며, 숨의 길고 짧음을 세어 분별해 환희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아나아파아나 생각으로서, 곧 완전히 갖추게 되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아나아파아나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27    선경대 운해장관 댓글:  조회:1337  추천:95  2007-09-30
                    선경대운해는 자연적으로 묘한 위치와 기후의 변화때문에 생기는 자연현상이다. 선경대동쪽산맥은 선경대보다 더욱 높아 여기서 남북의 기후차이를 두게 된다. 다시말해 산이높아 구름이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기때문에 두만강변의 주위에는 비가 오지만 선경대북쪽엔 비가 오지않을때가 대부분이다. 선경대운해는 동쪽에서 아침해빛을 받아 뜨거운 기운으로 밀려오는것부터 생긴다. 특히 가을의 선경대운해는 가장 장관인데 비가 많이 오면 올수록 기관이다. 많은 수분이 증발하여 구름을 형성하고 그 구름이 동쪽의 뜨거운기운에 밀려 동서로 되여있는 선경대골짜기를 따라 들어오게 되는것이다. 그 힘도 마침 선경대에서 절정에 이르며 선경대서쪽골짜기를 벗어못난다.  운해를 감상하면서 동쪽에서 밀려오는 들끓는 운해를 발견할수가 있다. 마침 전문용사진기가 있어 렌즈를 당겨 찍었는데 말 그대로 비등하는 운해였다. 장거리렌즈가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테지만 그건 앞으로 사진전문가들의 창작으로 남겨두고 싶다....
26    호흡명상에 관하여 댓글:  조회:1559  추천:77  2007-09-30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명상이 있다.그러나 그 많은 명상을 다 할 필요는 없고 자신에게 적합한 명상만  선택하여 행하면된다. 왜냐하면 명상의 방법은 나 자신의 신심정황의 변화를 치료하기위하여 생겨난것인것 만큼 본인의 정황에따라 선택하여 명상을 할수가 있기때문이다. 례하면 탐욕에 불타서 괴로울땐 몸을 생각하는 명상이나 혹은 어지러움을 생각하는 명상(不淨觀)을 하며 화가 나거나 해치는 마음이 일때는 자비명상을 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일때는 기쁜 마음을 생각하는 명상을 하고 근심과 걱정이 많을때는 호흡명상을 한다. 특히 호흡명상은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지혜를 늘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호흡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데 아래에 우선 호흡의 중요성부터 알아보다호흡명상은 고대로 부터 전해 내려온 유구한 명상방법이다. 하지만 호흡에 관한 이론과 체계가 부족했으며  석가모니시대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고 이론과 체계가 완미한 불교명상이 되였는바 고금중외에 긍정하는 수행방법의 하나이다. 여기서 이론과 체계가 완미하였다는 말은 석가모니시대 많은 제자들의 호흡명상에 관한 가르침과 수행감상을 적은 경전기록이 있는데 타 종교에서 볼수없는 이론과 체득들이다. 특히 석가모니의 아들인 라훌라가 아나아파아나(일명 안반수의법이라고도 하는데 호흡명상을 가리킴)수행을 닦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기록은 후세의 많은 수행자들의 본보기가 된다. 경전기록에 의하면 호흡명상을 해서 오를수있는 최고의 경지는 四禪인데 도가에서의 劍仙의 경지도 여기에 이룰수있다고 한다. 장자도 진인의 호흡은 발뒤축까지 이룰수있다고 말했다. 맹자도 호연지기를 말했으니 옛 성현들마다 호흡의 중요성을 다 알았다.호흡의 중요성에 관하여 <42장경>에 이러한 대화가 있다.부처님이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어디에 달려있는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 사람의 목숨이 어디에 달려있는가?" "예, 밥 한끼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도 도를 모르는구나." 세번째로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어디에 달려있는가?" "예, 숨 한 번 쉬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장하다, 그대는 도를 바로 알았구나!" 바로 한번 나간 숨이 다시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은 끝이다.이렇듯 호흡은 우리의 생명과 긴밀히 연계되였고 호흡의 비결을 잘 안다면 생사의 비밀을 안다고 말할수 있겠다. 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인체는 地 水 火 風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였다.이 가운데서 우리가 좌우지 할수있는 요소는 유일하게 風밖에 없는데 호흡은 풍의 일종으로서 우리가 몸과 마음의 고요함을  얻기위하여 손을 대기 가장 쉬운곳이 바로  호흡인것이다. 호흡은 우리의 건강과 정서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특히 몸이 비만한 사람,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의 호흡은 거칠다.자는 사람의 숨소리를 듣고도 그 사람의 건강을 알수가 있다.중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호흡은 늘쌍 가슴에 머물러있다.반대로 마음이 고요한 사람의 숨소리는 항상 고르롭고 길고 깊다.그러므로 평시에 호흡명상을 늘 하는 사람은 자연히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늘 고요할수있고 건강할수있는것이다.  호흡명상의 방법은 이외로 극히 간단하다.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그 자체를 주시하는 것이다.생각을 호흡에 두고 배가 꺼졌다 줄었다하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다다. 이는 우리의 생활 처처에서 언제든지 행할수있는 방법이다. 물론 호흡명상과 좌선을 결합하면 더욱 좋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오래 앉을수 있는 자세를 취하되 허리를 쭈욱 펴고 택을 조금 잡아당겨 눈을 감는다. (물론 눈을 감지 않아도 되겠지만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는게 좋다.) 손은 임의로 자연스럽게 두 다리에 올려놓으면 된다. 마음을 호흡에두고 현재 내가 숨을 쉬고있음을 알아차린다. 제일 좋기는 생각을 단전에 두어 배가 꺼졌다 일어섰다하는 느낌을 감수하는것이다. (여기서 단전호흡은 호흡이 깊을때의 현상을 가리키는데 처음부터 억지로 할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다보면 자연히 단전호흡을 하니 신경쓸 필요는 없다.)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가면 나가는 줄 안다. 때로는 숨이 길면 길게 들어오는 줄 알고 길게 나가면 길게 나가는 줄 안다. 때로는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 느끼지못할정도로 미세할때도 있는데 그것도 그런줄을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러다가도 차거운 숨이 들어오기도 하고 뜨거운 숨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대로 알아차린다....(이상 불교경전기록을 인용했는데 본문은 불교경전에 올리겠음)기록에 의하면 호흡명상의 절정은 많은 사람들이 기적으로 생각하는 호흡을 정지시킬수 있는데까지 갈수있다. 물론 이때는 페로 호흡을 하는게 아니라 피부로 호흡을 하는데 현대에도 이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있다.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기위하여 행하는 방법이 있는데 호흡을 내쉴때마다 혹은 들이 쉴때마다 하나 둘 헴을 헤는 방법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헤고 다시 아홉 여덟... 이렇게 하나 둘 셋....헨다.  도중에 다른 생각에 헴을 잊어버렸다면 다시 처음부터 하여야 한다....옛 문인인 소동파도 호흡명상을 하였다고 하는데 한번 앉으면 삼천호흡씩 하였다고 하니 그런 그가 깨우침을 얻지않을수가 없는 일이다.세상에 가장 총명한 사람도 호흡명상을 하였는데 우리처럼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현대생활에 쪼들릴대로 쪼들린 현대인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여기서 어리석을수밖에 없다는 얘기는 현대문명이 너무 찬란하여 우리의 오욕을 유혹하는 일이 너무 많아 우리는 그 속에 어리석게 빠져 감각적쾌락에만 빠져 있기때문이다. 그러한 현대인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갈수록 불안하며 행복의 그 자체와 멀어지는것이다. 바로 이러하기에 우리내면의 진정한 행복을 찾기위해서라도 우리는 호흡명상을 늘 해야 하지 않을가.... (八) 聞如是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當修行一法。當廣布一法。修行一法已。便有名譽。成大果報。諸善普具。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逮沙門果。自致涅槃。云何為一法。所謂念安般 佛告諸比丘。云何修行念安般。便有名譽。成大果報。眾善普具。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 爾時。諸比丘白世尊曰。諸法之本。如來所宣。唯願世尊為諸比丘說此妙義。諸比丘從如來聞已。便當受持 爾時。世尊告諸比丘。諦聽。諦聽。善思念之。吾當為汝廣分別說諸比丘對曰。如是。世尊。諸比丘前受教已 世尊告曰。若有比丘正身正意。結跏趺坐。繫念在前。無有他想。專精念安般。所謂安般者。若息長時。亦當觀知我今息長。若復息短。亦當觀知我今息短。若息極冷。亦當觀知我身息冷。若復息熱。亦當觀知我今息熱。具觀身體。從頭至足皆當觀知。若復息有長短。亦當觀息有長有短。用心持身。知息長短。皆悉知之。尋息出入。分別曉了。若心持身知息長短。亦復知之。數息長短。分別曉了。如是。諸比丘。名曰念安般。便得具足。成大果報。諸善普至。得甘露味。至無為處。便成神通。除諸亂想。獲沙門果。自致涅槃。是故。諸比丘。常當思惟。不離安般念。便當獲此諸善功德。如是。諸比丘。當作是學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八.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한 법을 닦아 행하고 널리 펴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에 이르러 스스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아나아파아나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아나아파아나 생각을 닦아 행하면 좋은 이름이 있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되는가.” 그 때에 비구들은 세존께 사뢰었다. “모든 법의 근본은 여래의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그 묘한 이치를 말씀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여래에게서 그것을 듣고는 꼭 받들어 가지겠나이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널리 해설하리라.” “그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은 앞으로 나아가 듣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비구는 몸과 뜻을 바루고 가부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아나아파아나를 생각한다. 즉 이른바 아나아파아나란, ‘ 만일 숨이 길 때에는 <나는 지금 숨이 길다>고 관해 알고, 만일 숨이 짧으면 <나는 지금 숨이 짧다>고 관해 알며, 만일 숨이 매우 차가우면 <나는 지금 숨이 차갑다>고 관해 알고, 만일 숨이 뜨거우면 <나는 지금 숨이 뜨겁다>고 관해 안다. 그리고 머리에서 발에까지 온 몸을 두루 관해 안다. 만일 숨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면 <숨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고 관한다. 마음을 쓰고 몸을 단속해 숨의 길고 짧음을 모두 알며, 숨의 나고 들음을 찾아 분별해 환희 안다. 혹은 마음이 몸을 단속해 숨의 길고 짧음을 아는 것도 또한 알며, 숨의 길고 짧음을 세어 분별해 환희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아나아파아나 생각으로서, 곧 완전히 갖추게 되고 큰 과보를 이루어, 온갖 선이 두루 모이고 단 이슬 맛을 얻어 함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의 결과를 얻어 스스로 열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항상 생각해 아나아파아나 생각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25    선경속의 신흥동마을 댓글:  조회:1473  추천:81  2007-09-30
 9월 23일 낙타봉에 올라 운해를 감상하는데 기적같이 불광이 또 나타나면서 동시에 왼쪽 골짜기 안개가 회오리치면서 운해속의 신흥동 마을이 빠끔히 나타났다. 와~ 어쩌면 이렇게 묘할수가.... 나 혼자 감탄에 쌓여서...    사진기렌즈를 조금씩 당겨보니...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났다. 마을도 길도.,..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인간세상을 내려보는 듯한 느낌! 혹시 저 마을이 신선들이 사는 마을은 아닐지...     마을전체가 보였으며 신작로도 보였고 지나가는 차량들도 보였다.... 그러나 이 시간이 일분이나마 지속되였을가 구름은 이내 다시 마을전체를  덮어버렸다. 꿈같이 환상을 본듯한 느낌이였으니 이 아니 선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24    현재를 산다는 것은 -- 活在當下 댓글:  조회:1721  추천:72  2007-09-30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过去心不可得、现在心不可得、未来心不可得) 이라는 유명한 경구가 있다.그 말인즉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그 마음을 얻을수가 없는 것이고 현재인 오늘도 이제 곧 지나가니 역시 머물을수 가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역시 얻을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나간 일에 슬퍼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근심하지 말라. 오직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만 전념하시라. "는 말도 있다.이것이 바로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이다.현재의 삶을 사는 사람의 얼굴엔 근심과 걱정이 없이 밝고 훤 할것이다. 반대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슬픔이나 걱정으로 얼굴이 어둡기 쉬운데 슬펐던 일을 자꾸 떠올린다는 것은 우울증에 사로잡히기 쉬운 일이다. 화나게 했던 일, 기분 나빴던 일을 회상하여 분해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못된다.다 알고 있을 재미있는 심리학 연구결과가 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의 96%는 망상이라고 한다. 망상이란 쓸데 없는 생각들인데 그 가운데 걱정의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하고 걱정의 30%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22%는 아주 사소한 일들에 관한 걱정이고,남은 8%의 걱정거리에서도 4%는 우리가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하는 많은 생각과 걱정거리들 중에서 오직 4%만이 생각하고 걱정할 만한 가치가 있고 나머지는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쓸데없는  96%로 인해 시달리며 걱정하며 번뇌에 시달리는 것이다.현재의 삶을 산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주시하는것을 가리킨다.  내가 걷고 있다면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내딛는 그 걸음걸이를 알아차리는 것이고 밥을 먹고 있다면 한 입 한 입 씹고 있는 그 자체를 알아차리고 느끼는 것이다. 조금 심도있게 공부할수 있는 이라면  내가 어디에 무슨일을 하든간에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숨소리에 귀를 귀울일수가 있으며 그 호흡으로 일어서고 가라앉는 아래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느낄수 있는것이다.  걸음은 한걸음 한걸음밖에 걸을수밖에 없는 법이며 밥은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입에 넣을수 밖에 없고 씹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급해 이 모든 절차를 잊고 산다. 걸어도 걷는 줄 모르고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밥을 먹고 있는 줄 모른다. 그들의 생각에는 온통 미래에 대한 망상이거나 과거에 대한 망상뿐이다. 이렇게 현재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송장이 걸어다닌다>(行尸走肉)고 말한다.  정신은 어디에 가 있는지를 모르니 죽은 몸덩어리만 움직인다는 말로 정신이 황황하여 갈길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해 말한다. 왜서 갈길을 모른 다고 하냐면 정신이 황황한 사람은 사실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재를 살수 있는 사람은 그 본신이 마음의 주시자가 되여 관찰과 통찰력이 생겨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손금보듯 하여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내릴수가 있는것이다. 이렇게 시시각각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음을 주시할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깨여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깨여있다는건 참 행복한 일이다. 깨여있는 사람에게는 번뇌와 망상이 있을수가 없고 근심과 걱정이 있을수가 없다.생활에서의 많은 번뇌와 근심과 걱정은 얻을려고 해도 얻을수 없는것을 얻으려 하기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특히 미래의 삶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단지 현재에 응당 해야 할 일들을 착실하게 하면 될뿐이지 미래의 결과에 대해 근심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수 없는 과거인바 우리가 아무리 후회하고 고뇌해도 변화시킬수가 없는 사실로서 단지 그것은 경험으로 삶고 미래에도 후회하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하는게 가장 현명한 일이다. 그리고 현재의 오늘도 머물을수 없는 사실로 오늘에도 과거와 미래가 있듯이 지난 한시간 혹은 앞으로 다가올 한시간의 일에 대해서도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것은 오직 지금 이 시각뿐이다. 우리가 삶을 산다는건 오직 지금 이 시각일 뿐인것이다. 바로 이 시각마다에 우리는 자신의 주시자가 될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행복이 되는것이다. (법성게에 일념즉시 무량겁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한 생각이 곧 무한한 시간이란 의미이다. 다시말해 현재의 한 생각을 주시할수가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사는것이라 해석할수도 있다. 그 한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은 바로 지금 이 시각을 주시하고 있는 깨여있는 알아차림인것이다. 이것이 곧 一心不亂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를 살수도 없고 미래를 살수도 없는것이며 오늘을 살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지금 이 시각을 주시하는 사실을 뿐이다.이 시각만을 주시하라. 이것이 곧 活在當下이다. 생각의 본신이 번뇌라고 말할수가 있다. 현재의 하고있는 일을 주시하는것은 바로 이러한 번뇌의 원흉이 되는 근심과 걱정을 차단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현재를 살수있는것이다.
23    박각시,,, 댓글:  조회:1855  추천:99  2007-09-30
회원 여러분 국경절 휘가 잘보내세요!
22    9월 24일 장수봉에서 본 일출 댓글:  조회:1393  추천:85  2007-09-28
세번째날 아침의 일출이다. 동쪽하늘에 실오리같은 구름들이 아침해볓에 찬란한 노을을 장식했다. 또 다른 정취다. 선경대의 운해는 아침해와 더불어 변화무쌍한 풍경을 구상해준다. 실로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선경이다.  새벽별이 사라지고 해가 얼굴을 내밀기 직전에 동쪽하늘에 찬란한 아침노을을  연출했다.  붉게 물든 동쪽 하늘-- 렌즈를 당겨온것    해님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면서  태양광선을 그대로 노출하니 어둡기는 하지만 한폭의 수채화같다  태양광선이 강해 이렇게 가리워도 별멋!   주봉에서 본 고려봉 운해--장수봉에 안개가 피워올라 사면이 몽땅 운해속에 잠겨 부랴부랴 주봉으로 달려갔다.  다시 장수봉을 내려보니 집채같은 운해가 당장 삼킬듯한 기세
21    다이어트 비결 -- 减肥偈 댓글:  조회:1737  추천:95  2007-09-28
아침에 안해가 무슨 큰 일이나 난것처럼 소스라쳐 놀라더니 하는 말이 청바지가 몸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가을이 들어서면서 몸이 근수가 올랐고 배살까지 나와 고민하고 있는것이였다. 참 여자들이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기도 한지...  며칠전 어느날 저녁을 먹으면서 안해가 배가 부르다면서도 왜 이렇게 맛나냐 계속 먹어댔다. 내가 듣다못해 음식은 조절해 먹을줄 알아야하고 배부르다 싶으면 적가락을 놓을줄도 알아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들을려고 하지 않았다. 결과는 뛸떼없으니 비만의 가장 적이 맛에 탐하여 량을 조절할줄 모르는것이다.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신없이 먹어대는데 비만의 가장  원흉이된다. 물론 남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들은 술) ㅜ뭔가 먹는데서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데 뭔가 잘못해도 한창 잘못된것이다.내가 아는 한 남성사장분이 있는데 몸은 150키로!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데 정말 먹새가 좋았다. 밤에 텔레비를 보다가 텔레비에서 뭔가 물만두를 먹는것을 보게되면 아무때건 상관없이 나가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에 한번씩 개를 삶는데 개를 잡는 다면 회사직원들도 기절한다고 한다. 혼자먹으면 됐지 직원들을 불러 함께 먹자고 하니 함께 먹어주는 놈도 귀찮다고 한다. 참 그 먹새가 업을 짓기도 하는데....어떻게 보면 이런 먹새는 맛에 탐하는것도 탐하는것이겠지만 병적이기도 하다. 가장 주요한 원인을 따져보면 음식을 절제할줄 모르고 자기를 관리할줄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마음을 좌우지 할줄 아는게 아니라 그 마음이 사람을 좌우지 하는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명상을 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줄 알아야겠거만...마침 불교에 파사닉왕이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 다이어트를 한 이야기가 있는데  다이어트할려는 사람들의 좋은 이야기거리가 되고 본보기가 될만하다고 생각되여 여기에 올리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물론 나도  게송을 적어서 식탁에 붙혀두고 안해한테 보여줄려고 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때 파사닉왕은 몸이 너무도 비대하여, 온 몸에서 땀을 흘리면서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갔는데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그때 부처님께서  "대왕께선 몸이 너무나 비대해지셨군요." 라고 하시니  대왕이 여쭈기를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이 너무나 비대해 큰 걱정입니다. 저는 늘 이 몸이 너무 비대해 창피스럽기도 하고 귀찮고 괴롭습니다." 세존께서 즉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생각을 한곳에 매어 먹을 때마다 양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곧 받는 고통 적어지고 편히 소화하여 수명을 보존하리라.    人當自繫念  每食知節量 是則諸受薄  安消而保壽 그 때 울다라라고 하는 한 나이 어린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파사닉왕이 울다라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제 세존께서 설하신 게송의 뜻을 받들어 지니고 있다가 식사할 때가 될 적마다 나를 위해 외워 줄 수 있겠느냐? 만일 그렇게만 해 준다면 금전 10만을 줄 것이요, 또한 평생토록 밥을 주리라." 울다라가 왕에게 아뢰었다. "분부대로 꼭 외워드리겠습니다." ...........................그 때 울다라는 왕이 식사할 때가 되면 그때마다 늘 게송을 외워 대왕에게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아시고 보신대로 이런 게송을 설하셨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생각을 한곳에 매어 먹을 때마다 양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곧 받는 고통 적어지고 편히 소화하여 수명을 보존하리라.    人當自繫念  每食知節量 是則諸受薄  安消而保壽 이렇게  얼마지나지 않아 파사닉왕은 몸이 점점 여위어져서 날씬하게 되었고 얼굴은 단정하게 되었다. ......원문은 불교경전란에 올리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경전이름은 천식경(喘息經)입니다. (一一五○)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時。波斯匿王其體肥大。舉體流汗。來詣佛所。稽首佛足。退坐一面。氣息長喘 爾時。世尊告波斯匿王。大王身體極肥盛 大王白佛言。如是。世尊。患身肥大。常以此身極肥大故。慚恥厭苦 爾時。世尊即說偈言  人當自繫念  每食知節量 是則諸受薄  安消而保壽  時。有一年少。名鬱多羅。於會中坐。時。波斯匿王告鬱多羅。汝能從世尊受向所說偈。每至食時。為我誦不。若能爾者。賜金錢十萬。亦常與食 鬱多羅白王。奉教當誦 時。波斯匿王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時。鬱多羅知王去已。至世尊前。受所說偈。於王食時。食食為誦。白言大王。如佛.世尊.如來.應.等正覺所知所見。而說斯偈  人當自繫念  每食知節量 是則諸受薄  安消而保壽  如是。波斯匿王漸至後時。身體傭細。容貌端正。處樓閣上。向佛住處合掌恭敬。右膝著地。三說是言。南無敬禮世尊.如來.應.等正覺。南無敬禮世尊.如來.應.等正覺。與我現法利益.後世利益.現法後世利益。以其飯食知節量故 1150. 천식경(喘息經)1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파사닉왕은 몸이 너무도 비대하여, 온 몸에서 땀을 흘리면서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가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 있었는데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그 때 세존께서 파사닉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께선 몸이 너무나 비대해지셨군요." 대왕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이 너무나 비대해 큰 걱정입니다. 저는 늘 이 몸이 너무 비대해 창피스럽기도 하고 귀찮고 괴롭습니다." 세존께서 즉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생각을 한곳에 매어 먹을 때마다 양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곧 받는 고통 적어지고 편히 소화하여 수명을 보존하리라. 그 때 울다라(鬱多羅)라고 하는 한 나이 어린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파사닉왕이 울다라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제 세존께서 설하신 게송의 뜻을 받들어 지니고 있다가 식사할 때가 될 적마다 나를 위해 외워 줄 수 있겠느냐? 만일 그렇게만 해 준다면 금전 10만을 줄 것이요, 또한 평생토록 밥을 주리라." 울다라가 왕에게 아뢰었다. "분부대로 꼭 외워드리겠습니다." 그 때 파사닉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그 때 울다라는 왕이 떠난 줄을 알고 세존 앞에 나아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게송을 받들고, 왕이 식사할 때가 되면 그때마다 늘 게송을 외우면서 대왕에게 아뢰었다. "불세존․여래․응공․등정각(等正覺)께서는 아시고 보신대로 이런 게송을 설하셨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생각을 한곳에 매어 먹을 때마다 양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곧 받는 고통 적어지고 편히 소화하여 수명을 보존하리라. 이렇게 하여 파사닉왕은 차츰 시일이 지나가자 몸이 점점 여위어져서 날씬하게 되었고 얼굴은 단정하게 되었다. 그는 누각 위에서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하여 합장해 공경하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세 번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여래․응공․등정각께 귀의하고 예를 올립니다. 세존․여래․응공․등정각께 귀의하고 예를 올립니다. 저에게 현세의 이익과 후세의 이익과 현세와 후세의 이익을 주셨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양을 조절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0    9월 23일 선경대 운해 댓글:  조회:1345  추천:101  2007-09-28
이틑날도 첫날못지않게 운해가 밀려왔는데 나 혼자 감탄!누구를 불러서 함께 감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실로 이 멋진 풍경을 나혼자 감상한다는게 뭔가 아쉬움이....
19    9월 23일 선경대 운해일출 댓글:  조회:1414  추천:104  2007-09-27
9월 23일 두번째날 맞이하는 운해일출-- 선태봉에서
18    공자의 지천명 댓글:  조회:2096  추천:93  2007-09-27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에 공자의 이런 말이 있다."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어 삼십에 립했으며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는 귀가 순했고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되 법도에 넘지 않았다."(子曰:吾,十有五,而志于学,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顺,七十而从心所欲,不逾矩.)  이 말을 간단히 해석하면 공자는 나이 열다섯살에 학문에 뜻을 두어 서른살에 섰다는것은 서른살에 인생의 의의를 알고 가야할 방향을 세웠다는 뜻이되겠다. 마흔살에는 불혹하였다는 말은  나이 사십에  사물에 미혹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쉰살에는 천명을 알았다 했는데 여기서 천명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주제는 곧  이 명에 관한 얘기이다.공자는 "명을 모르면 군자라고 할수없다" (不知命,无以为君子也.)라고 했는데 여기서 군자란 덕과 학식을 겸비한 리더를 가리킨다  명을 알아야만 군자라고 부를수 있으니 그렇다면 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가?아래에 命을 글자풀이로 해석하련다.우선 命자는 사람 人에다 하나 一, 그리고 입 口, 발足(叩-口)자로 이루어졌다. 이 네개의 글자를 한줄에 꿰어 말하면 한 사람의 명은 곧 입과 발 즉 행위에 결정된다는 뜻으로  명이란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다시말해  한 사람의 명이란 결국엔 그 사람의 말과 행위에 좌우지된다는 얘기가 되겠다.불교에도 열가지 선악의 표준을 말했는데 그 가운데서 입으로 짓는 악만 해도 네가지(妄言 绮语 两舌 恶口 즉 거짓말과 아첨하는 말, 두가지말,  쌍소리)가 되니 참으로 입으로 짓는 죄과가 크다. "화는 입으로부터 나오며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온다"는 속담도 있듯이 사람이 살면서 입을 조심하지 않을수가 없다.그 다음 행위 즉 몸으로 짓는 악은 殺生 도적질 邪淫 세가 지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더욱 엄중한 악이 된다.. 이 세상에 다른 생명을 해치는 사람을 좋아할이는 아무도 없다. 도적질과 사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사음은 자기 안해(혹은 남편)이외에  범하지 않는것을 가리키는데 남자와 여자의 가장 파멸의 길이 사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입과 몸으로 짓는 행위가 우리의 선악을 결정하고 우리의 명을 결정하는것이다.  그렇다면 입과 몸이 짓는 행위는 누가 결정하는가? 바로 우리의 뜻(意) 즉 우리의 생각이다. 뜻으로 짓는 악은  세가지인데 貪瞋痴 三毒이라 한다. 탐진치란 탐욕 진에(화를 냄) 어리석음인데 우리몸에 들어있는 독성물질과 같아 자기도 해치고 남을 해치므로 삼독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 열가지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가르는데 인과의 법칙에 따라 열가지 선의 업을 짓는 사람은 늘 좋은 곳에 태여나고 무엇이나 부족함이 없이 부유하고 건강하게 살수있다고 한다.  속담에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콩심은데 팥이 날수가 없는 법이다. 이 열가지는 종자 즉 원인이 되여 현실에서 직접 그 과보를 받을수가 있다.론어의 계씨편(论语.季氏)에서는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가지 두려움이 있다. 즉 천명을 두려워하며 대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을 두려워 하지만 소인은 천명을 모를 뿐더러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하지않으며 대인을 희롱하고 성인을 모욕한다"(君子有三畏:畏天命,畏大人,畏圣人之言。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狎大人,侮圣).군자라면 성인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않을수가 없다. 덕을 쌓는 사람은 작은 실수도 범할가 두려워하거늘 황차 큰 악을 범할수 있으랴. 공자는 세계 4대성인의 한분으로서 쉰살에 천명을 알기전에도 덕을 쌓는데는 꾸준한 노력을 했을것이다. 더우기 천명을 아는 군자임에랴! 그래서 그는 예순에는 귀가 순했다고 했는데 귀가 순하다는 얘기는 궂은 소리나 바른소리를 다 받아 들을수 있다는 말로서 남이 비방하거나 칭찬하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아마 삼십이립이후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래야만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되 법도를 넘지 않을수가 있는것이다. 여기서 법도란 곧 天 즉 하늘의 법칙 자연의 법칙을 가리킨다.이것이 공자의 인생칠십의 경력이다.한마디 더 하고싶다면 공자는 생사와 부귀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죽고 사는데는 명이 있으며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 (生死有命,富贵在天)그리고 부를 강조하여 "부를 구할수가 있다면 나는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마부)이라도  되겠다. 그러나 구할수가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것을 따르겠다." (子曰:富而可求也,虽执鞭之士,吾亦为之。如不可求,从吾所好。)공자도 부에 뜻이 없는건 아닌것 같다. 하지만 부란 아무나 추구한다고 해서 얻을수 있는게 아닌것 같다. 내 뜻대로 구할수가 없는 부라면  오히려 자신의 취미에 따라 살아가는게 가장 바람직하고 뜻깊은 일이라는 뜻이 아닐가....우리의 현실에도 이러한 유사한 일들이 많다. 비록 어렵게 살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자기만의 길을 걷노라면 언제든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기마련인것이다. 인생에는 잘 할수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두가지가 있다.내가 잘 할수있는 일은 내 취미와 뜻에 맞는 일이고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란 나의 바램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잘 할수있는 일은 버려두고 나의 바램에 따라 일을 선택한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뜻대로 되지 않을때 그 바램을 버릴수밖에 없다. 결국은 자신의 취미도 잃어버리고  바램도 잃게 되여 절반인생을 의미없이 랑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혹시 지천명을 모르고  자신의 바램대로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17    9월 22일 선태봉에서 본 일출 댓글:  조회:1498  추천:107  2007-09-26
선경대의 가을운해는 일출과 묘하게 결합되여 넋을 잃게 하는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 준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사람에게 희망과 신심을 준다.  일찍 일어나는 새는 먹이를 먼저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항상 일찍이 일어나는 사람에게는 충족한 시간이 있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있으며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듯이 아침에 뜨는 태양을 맞이 하는 사람은 언제나 뜻깊은 하루를 보낼수가 있다. 아마 이것이 일출을 구경하는 목적이 아닐가... 그래서 어느 친구의 말인데  자신은 해마다 설날(원단)아침이면 무조건 높은 산에올라 새해의 아침을 맞이한다고 한다.  그래야 그 한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수 있다는 미신?적인 말이였는데 너무 도리가 없는 얘기는 같지 않다. 선경대의 선태봉은 신선이 내려오는 곳이라 하여 仙台라 한것같다. 氣의 각도에서 보면 선태봉에서 일출을 볼수있다는건 어찌보면 아침해살과 함께 신선의 기를 듬뿍 받을수 있는 곳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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