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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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기록은 인류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이다”(김수철전 7)     편자후기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농학원의 1기생이고 필자는 지난 70년대 김수철교수의 제자이다. 필자는 스승님의 명성이 높음을 한국에서 알았다.. 1999년에 필자는 “세계자연농업전도사” (사단법인) 한국자연농업협회 회장 조한규박사가 실시하는 제113기 자연농업기본연찬과정을7일간 이수하였다. 하루는 조박사가 필자를 데리고 서점에 가더니 “原色白頭山資源植物”이란 두터운 화책을 사더니 나한테 선무로 주었다. “이 비싼 책을 받으려니(책값 5만4000원,한화)과분합니다” 는 필자의 말에 조박사는 “어디가나 책값이 비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식물전문가들이 2년 동안 백두산유용자원식물을 탐사하고 농학, 식물학, 약학, 림상학, 축산학연구의 지침서로 세상에서 처음 보는 보귀한 책입니다.”며 이 책은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님이 주필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필자가 김수철교수님의 제자라고 소개하니 “오선생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 얼마나 행복한가”며 부러워 하였다. 2011년3월28일, 필자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고저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에 게시는 김수철(87세)교수님을 방문하였는데 37년 만에 만난 스승님의 신체가 의심할 정도로 건강하셨다. 그래서 수인사로 건강비결을 물었더니 “나는 길옆의 풀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삽니다”고 하였다. 그후부터 필자는 가끔씩 스승님을 만났는데 번마다 싱싱한 신문소재가 있었다. 어느 하루 김교수의 신문기사를 읽던 부인이 나에게 “이렇게 대단한 분을 그의 생전에 책으로 쓰라”는 건의했다. 부인의 건의에서 령감(灵感)을 얻은 필자는 일부러 스승님을 찾아가서 스승님의 자서전을 쓰겠다는 의향을 밝혔더니 교수님이 “감사는 한데 김수철이란 평민에게 무슨 남들에게 읽혀질 글거리가 있겠소이까…”며 보기좋은 웃음으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포기하지 않고 필자의 독자팬인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서규철연구원(87), 황영수(87) 등 농학원원로들의 적극적인 배합으로 끝내 스승님으로부터 “핍박에 못 이겨 량산에 오른다“는 답복을 받아냈다. 2016년 10월 5일, 필자는 언녕 준비했던 40여가지 취재 질문제강을 스승님께 드린 뒤를 이어 2017년 5월초에 봄에 일찍 꽃을 피우는 식물조사로 훈춘을 단다는  교수님을 이틀간을 동행하였다. 그사이 필자가 제일 놀랍고도 감동된 것은 90대 고령인 스승님이 “오기자가 낸 ‘숙제’를  내가 제때에 필답으로 완성하겠다”는 약속이였다. 2016년 11월 30일에 필자는 약속대로 무게가 9근이나 되는 스승님의 “숙제책”을 받아 가지고 12월4일에 일본에 왔다. 스승님의“숙제책”은 페지마다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 조상과 민족에 대한 효와 충성이 슴배여 있었고 평생을 현역으로 식물연구와 집필에 열과 성을 다하는 스승님의 위상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듯 하였다. 스승님은 대자연이 낳은 김수철이고 백두산이 배육한 김수철이며 대자연을 거울로 자신을 비추며 평생을 대자연에 보답하는 백두대간의 불로송이였다. 필자는 스승님의 “숙제책”에서  스승님이 세상에 태여난 리유와 목적이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살기 위함임을 일목료연하였다. 스승님은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자기가 평생 수집한 25000여 종의 식물표본에서 2300종을 선택하여 도문병무(圖文幷茂)한 “길림성식물도감”을 출판하고저 식물사진을 보충하고저 90고령에 혼자몸으로 3년간 내몽골까지 다니며 고군작전을 하였다. 스승님은 식물학연구에서 국가급수상자, 길림성로동모범, 연변주우수당원으로 손색이 없는 명불허전의 동아급식물학자의 본보기였다. 그러기에 연변대학의 모책임자는  “연변대학당안관에 ‘김수철인물관’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비범한 인물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으로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스승님이 “자서전이 나 개인의 명리를 위한 소작이 아닌, 인생철학의 대작으로 쓰라”는 부탁에 진정 망설이게 되였다. 한동안의 추고 끝에 필자는 “피할 수가 없으면 즐긴다” , “가장 어려운 일을 가장 값진 일로 한다”는 긍정적인 사로(思路)로 대담히 필을 들었다 … 필자는 자서전의 편집원칙을 두가지로 정하였다.   첫째, 90대인 김교수가  60대건뇌(健腦)로 완성한 “숙제”의 내용과 편폭을 거의 모두 올린다. 둘째, 교수님의 서화술(書畵術)을 독자들과 함께 공감하고저 90대 고령에 그린 교수님의 자화상, 삽화, 간력을  原圖와 親筆로 올린다. 선현(先賢)들은 한 사람의 고하평가의 기준을 “身, 言, 判, 書””4”자로 하였다. 이 기준에 비춰 보면 스승님은 조목마다 우수한 대재이다. 그러기에 어느 유명박사는 김교수님의 사적을 읽고 “김수철교수는 6개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활용하는 동아급(東亞급)식물학자로 당년의 리시진보다 더 위대하다”며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이란 책 제목을 다시 선택하라고 건의하였다.  이번 집필기회에 필자가 더욱 감동을 받은것은 스승님이 90대 고령에 그린 자화상이였다.  자화상은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화가들의 ‘자화상’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타인에게 쉽게 꺼내지 못한 고백을 자신의 얼굴에 담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스스로를 응시하는 동안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현재의 겉모습뿐만아닌, 지나온 삶의 과정을 검색하며 자신을 반성한다. 스승님이 그린 자화상을 보고 그의 딸님이 “아버지, 눈섭이 없습니다”며 눈섭을 그려 넣으세요”는 권고에 스승님이 “눈섭을 그려 넣으면 딴 사람이 된다”고 거부하는 것이였다. 스승님은 이렇게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히 밝히고 자신을 미용할줄 모르는 순박하고 진실한 인간이였다. 이 밖에 금상첨화라고 할가. 필자가 본 편집을 거의 마무리를 할 때 “길림신문”사 홍옥편집선생이 필자가 김교수를 모델로 쓴 칼럼(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삼고)이 “길림신문”우수칼럼으로 평선되였다는 소식을 보내주어 “백두대간의 불로송”에 푸른색을 덧칠을 하였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아온 김수철교수는 중화민족의 재산이며 우리민족의 자랑이다.  김교수는.“사회생활의 문자기록은 문명의 산물이다. 문자기록은 인류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이다”고,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고 하였다. 민족의 바탕이 민족문화인만큼 민족문화를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가 바로 민족문화와 민족력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 한 세기를 살아온 김수철의 빛나는 력사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민족력사의 기록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기록은 정치나 종교와 관계없이 오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양서로 될것이라 확신한다.  끝으로 이 책을 쓰도록 제안한 부인, 필자의 집필에 적극 협력해 주신 서규철, 황영수 원로와 아들 오무송,  그리고 연변과 동경을 이어준 “교두보” 최명림씨, 책의 출판에 무척 애를 쓴 연변대학출판사 김미숙편집선생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일본동경에서 吳基活 2018년 5월,   
299    오기활기자와의 인터뷰 <기자문집>을 출간하면서 댓글:  조회:3959  추천:0  2019-12-28
을 출간하면서        오기활 략력 1947년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달라자 출생 1974년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 졸업 1986년 연변대학 정치학부 본과졸업(통신학부) 1974~1984년 도문시 홍광향축목수의소 소장,홍광향 당위선전위원, 조직위원, 경제위원회 부주임,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실연구원 1984~2006년 연변일보 도문주재 기자, 해외부 기자, 대외사업부 부장, 중국저널(한국), 중앙경제신문(한국) 연변지사장 2006년 정년퇴직후 현재까지 길림신문 기자 저서로는 화집- 《성공을 향하여》,  《부자로 가는길》,《일하는 멋 베푸는 삶(정경락 오기활 공저)》    기자문집-《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 등  “후반전에 더 멋진 꼴”을 넣겠다며 젊음의 기백으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멋지게 그려가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60 대 중반에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는 두권의 묵직한 기자문집을 펴내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지닌 오기활기자이다.  오기활기자를 통해 기자정신이 무엇이며 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 하는지 그의 견해를 들어본다.   기자직업에 대한 열망은 언제부터? 조실부모로 큰집에 얹혀살 때 백부님은 나의 무슨 장점을 발견하고 그랬는지 장차 변호사가 되라고 늘 말씀하였다. 그때는 백부님의 기대를 리해할수 없었다. 그후 1963년에 연길현4중(그후 도문시1중)제 16기 졸업식때 학교에서는 저를 본기졸업생대표로 발언하게 했다. 그 졸업식에서 당년 역시 도문시 1중의 제 2기(?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음) 졸업생인  김동기(당시 길림일보 연변주재기자)선배님도 졸업생대표로 발언을 하였는데 김동기선배님의 발언내용이 장백산에서 국민당특무를 잡던 취재과정과 생동한 내용이여서 전체 사생들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그때 본기졸업생대표로 장차 농촌서 문학가가 되겠다고 결심발표를 한 저로서 기자사업이 그렇게도 영예롭고 책임심이 중한 간고한 사업임을 처음으로 가슴깊이 새기게 되였다. 그후1964년 전국적인 사회주의 교육운동때 우리 마을에 온 사회주의 공작대원인 연변인민방송국 서명준기자의 영향으로 기자를 더욱 동경하고 (나도 기자가 되였으면…) 하는 꿈을 간직하게 되였다. 그런데 하느님이 나에게 하사하신 선물이라고 할가? 서명준선생님을 만난 꼭20년만에 나는 연변일보사 도문시주재기자로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근 10년간의 도문시주재기자부터 시작하여 연변일보 일요경제부, 경제부, 대외사업부부장으로 활약하다가 퇴직후 지금까지 길림신문 초빙기자로 활약하고있다. 그간 나는 도문서 승진의 기회도 서슴없이 버리고 기자직업을 선택한데 대해 후회한적이 없다. 나를 놓고 말하면 직업중에서 신문기자이상 더 좋은 직업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내가 머리 숙이면서 남한테 굽실거릴 필요없이 중립자세로 사회의 이모저모를 파헤치고 반영할수 있기때문이다. 기자로 활약한지 30년, 그동안 수백명인물들의 사적을 다루었고 400여편의 칼럼을 쓰면서 기자로의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확고히 다지게 되였다.   2권의 기자문집을 펴내게 된 계기가 있다면? 신문사에 있으면서 많은 칼럼을 썼고 인물취재도 많이 했다. 특히 길림신문 ‘일사일언’코너에 매주 미니칼럼을 발표하면서 칼럼쓰기에 전념했다.그런 과정에 나더러 기자문집이나 칼럼문집을 펴내라는 친지나 동료의 권고도 몇번은 있었지만 나는 선뜻이 나서지 못했다. 원인은 내가 남들에게 읽혀지는 책을 출간할수 있겠는가는 신심부족에서였다. 그러던중 ‘가물에 단비’라고나 할가. “길림신문”사에서 출간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주년에 만난 60인” 출판,발행식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전임주임은 “이 60인은 건국후 사회주의 건설과 개혁개방에서 조선족을 위해 기여를 한 분들이다. 책의 출간은 민족형상을 보여주는 한차례 ‘민족공정’이다고 말했다. 리덕수동지의 평에서 깨우침을 받고 나도‘민족공정’에 적극 참여하리라 마음먹었다.     책에 대해 설명 부탁드린다면?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은 30년간 인터뷰한 300여명의 인물중 130명을 선정해 책속 모델로 등장시켰다. 50만자에 달하는 이 책은 11개 장절로 나뉘였으며 인터뷰한 내용에 사실을 더욱 생동하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적으로 가필 혹은 생략을 하였고 또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저 문장의 뒤부분에 부언으로 주인공의 오늘을 밝혔혔다. 그리고 독자들의 구독에 휴식의 여가를 마련하고저 장절에 따른 개관과 시대성을 엿볼수 있는 “짧은 글(일사일언)”을 가미했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는 그동안 나름대로 보고 느낀 생각을 ‘사색의 여울목’, 일사일언, 오늘의 화제 등 코너에 발표했던 졸작들이다. 특히 길림신문 일사일언 코너에 6년간 매주 발표했던 글이 큰 폭을 차지했다.   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 하는가? 지난 6월 18일 출간기념좌담회 소식이 조글로 등 인터넷 신문들에 실리자 이런  댓글이 올랐다. ㅡ 참 별 회괴한 제목을 다 봤다. 뭘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라구? 기자가 어떻게 사회의 병을 진맥하냐? 기자는 가치중립의 차원에서 평의하게 국민이 알 권리를 취재하는것인데… ㅡ 의사는 진맥만이 아니고 병을 고쳐야 하는데... 사회가 발전하려면 기자는 사회를 파헤치고 정부는 기자가 파헤치는 문제를 메우면서 나가야 한다. 즉 기자가 찾아내는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론리에서 필자는 기자를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로, 정부는 사회의 문제를 치료하는 ‘의사’라 한다. 의학에는 생리학과 병리학, 진단학과 치료학이 따로 있다. 또 의사도 진맥을 잘하는 의사와 치료를 잘하는 의사가 다르다. 고로 기자는 진단을, 정부는 그 진단에 따라 치료하는 ‘의사’라는 말이다. 기자의 활동무대와 활동능력은 전 사회를 대상하여 존재하는 문제를 발견, 폭로, 비평하는 정도이다. 기자의 폭로와 비평을 제때에 받아드리냐 외면하냐, 기자가 폭로한 문제를 제때에 개정(치료)하느냐 안 하느냐는 정부의 몫이고 정부의 힘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기자의 진단에 따라 정부가 “치료”를 제때에 했다면 “기자덕분에 그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으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다”는 말이 된다   자신만의 인생철학이 있다면? “먼저 인간이 되고 후에 일을 한다” 로 “인간답게 살려면 불의에 도전하고 편안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라”는 김학철선생의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백성의 리익을 위해 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기에 노력해왔다. 이를테면 량수탄광에서 소비자의 리익을 침해한 사건을 련속 보도해 피해자의 합법적인 리익을 보호하여 주었고 한국에서 한국인의 사기피해를 당하고 귀국한 녀성의 사건을 한국 매체를 통해 폭로까지 하면서 그녀성을 재입국 하도록 도와주는 등 여러가지 실질적인 일들을 많이 해주었다. 좀 싱겁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백성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신문에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많은 걸린문제들을 제때에 해결해 주었다.  향후에도 사회와 백성을 위한 책임감으로 생활에 밑줄을 그어가며 단순히 신문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닌 백성의 “입”과 “눈”이 되는 기자로 민생(民生)과 민설(民舌)을 다루는 “평생기자”로 활약하고저 한다.   전하고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미 2권의 머리말에서 하고픈 말을 올렸으니 머리말에서 못다한 말을 하련다.  첫째, 감사한 마음 전하고싶다. 기자생활을 시작하여 오늘 이 책의 출판에 이르기까지 저에게 활동무대를 마련해준 연변일보사, 길림신문사, 연변인민출판사 및 지부생활잡지사 등 언론잡지사에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특히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저를 “30년기자직에 충성한 명기자”라며 저의 칼럼집(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을 무료로 출판발행한것에 너무도 감사하다. 둘째,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길림신문에서 연변특간인 “연변25시”를 꾸리며 저를 초빙하였다. 그 때로부터 “연변25시”에 일사일언 코너에 “고급기자” 오기활로 실렸다. 이에 필자는 당년의 “연변25시”주필인 박금룡주임을 찾아서 제때에“나는 고급기자가 아니니 절대 “고급기자”라고 달지 말라. 량심이 가책된다”며 몇번이나 청원했으나 박금룡은 “나는 고급기자만을  초빙한다”면서 그냥 고집하였다. 하여 나는 본의 아니게 “고급기자”의 가마를 타게 된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2권의 책 출간도 “고급기자도 아닌데 무슨 출간이냐?”며 독자들이 비웃을가봐 두렵고 또 나의 이 두책이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책으로 될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던 중 얼마후에 연변일보사 군중사업부 주임으로 지낸 김승길선배님이 어느 도서실에서 나의 출간작품을 봤다면서 나의 두 손목을 굳게 잡고서 “오선생은 확실히 고급지자자격이 있습니다”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고 하니 그만큼이나마 다행으로 느끼였다. . 셋째로 아쉬움을 전하는바이다.  책 출판이 근 3년이란 시간을 소요한데서 저의 책 출간소식을 알고 축하하고 기뻐하며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고 오태호연변일전임주필님, 책출판을 적극지지한 고 박금룡 길림신문연변지사장, 그리고 왕청현하마탕뱀술공장 고 최석준공장장, 저의 글을 보고 후반전에 멋진 꼴을 넣겠다며 80고령에 나무뿌리조각품을 다루던 고 리인규할아버지 등 타계한 6명 고인들이 나의 책을 보지못한데서 안타까움을 표하며 이 글을 빌어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문인숙기자                                                                                        
298    분수 있는 삶 댓글:  조회:4113  추천:0  2019-12-26
분수(分數)란 , 을 말한다.  분수의 은 몫이란 뜻이다.  사람은누구에게나 자기의 몫이 있고 자기의 형편과 처지, 자기의 실력과 정도가 있다.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 분수를 아는, 분수있는 삶이다. .  분수를 삶의 자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사람의 삶의 척도에 따라 그 사람을 로 평가한다. 이로 보아 분수는
297    국가는 초심 국기는 사명 댓글:  조회:4180  추천:1  2019-12-19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제136조에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는 ‘의용군행진곡’, 중화인민공화국국기는 오성붉은기다’고 밝혔다.   필자는 국가, 국기, 국휘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중앙텔레비뉴스프로를 시청할 때마다, 특히는 올해 국경70주년행사마다에서  국가로 이어지는   펄럭이는 오송붉은기,국민들이 한결같이 웨치는“조국만세!”화면을 시청할때마다  국가의 노래말은 중화민족의 초심이고 신주의 중화땅에 나붓기는 오성붉은기는 중화민족의 사명임을 절실히 느낌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한어노래말이다. 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 筑成我们新的长城!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每个人被迫着 发出最后的吼声! 起来!起来!起来! 我们万众一心,冒着敌人的炮火 前进, 冒着敌人的炮火, 前进!前进! 前进!进!! 이 노래말은 총 84자로 국민들에게 “일어나 나라의 주인이 되라”는  호소가 10자, 중화민족이 이룩하려는 목표가 14자 ,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해 “전진,전진진”의 동원령이 29자로 국가노래말은 중화민족 혁명의 초심이라 하겠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전투고지정상에 나붓기는 군기를 꼽는것으로 상징하고 새나라정권의 성립은 국기의 계양으로 상징한다. 우리 나라의 국기는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중화민족이 대단결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대업을 완성하기 위햐여 끝까지 분투하려는 중화민족의 사명이 새겨져있다. 건국전야(1949년 9월 25일)에 모택동동지는 오성붉은기의 도안은 “우리나라 인민의 대단결을 표현, 지금 대단결을 해야할뿐만 아니라 장래에도 더욱 단결하여 끝까지 혁명을 진행해야한다”고 국기도안으로 중화민족의 사명을 해석하였다. 국기는 국가, 민족 존엄의 상징이며 모든 중국국민을 대표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모욕을 당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우리나라 “국기법”(1990년 10월 1일부터 시행)은 “중화인민공화국국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과 표지로서 매개 공민과 조직에서는  국기를 존종하고 국기를 애호해야 한다(제 3조)”고 제정하였다. 지난 8월 3일 향항의 일부 극단급진분자들이  모 건축물 앞에 걸린 중화인민공화국 국기를 끌어내리고 바다에 내버린 악렬한 행위에 향항 각계가 분개하여 민중들이 국기를 재차 게양하고 국가존엄을 수호하고 국기수호행동으로  향항 네티즌들이 ‘국기수호행동’까지 발기했다. 중화인민공화국주석 습근평동지는 전당의 동지들에게 “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명기하려면 반드시 강렬한 자아혁명 정신이 있어야 한다. 자아정화, 자아보완, 자아혁신, 자아향상에 공력을 들여야 한다. 당의 자아혁명은 임무가 무겁고 갈길이 멀기에 절대로 멈추거나 쉬였다 가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호소하였다.(8월 1일《구시》잡지 제15호)  필자는 “국가를  높이 부르고 국기를 높이 계양하고 수호하는 것”은 절대로 형식만이 아닌“초심을 잊지말고 사명을 지키는것”의무의 하나로 엄숙히 대하자는 바람이다. (국경절기간 란잡하게 취급된 국기현상 유감) 오기활 
296    명리를 위한 小作 아닌 인생철학大作으로(김수철 전 6) 댓글:  조회:3902  추천:1  2019-12-08
오기활선생에게; 2016년 10월15일에 선생이 작성한 질문제강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 고령자에게는 전화나 면전질문보다도 이런 문자질문제강이 편리합니다. 인제는 사유력이 퇴화되고老腦로하여 어순배렬기능도 많이 못해졌으니 오선생의 취재때 수차나되는 질문을 받을때마다 답안이 틀릴가봐 걱정을 했는데 오선생이 미루 질문제강을 짜서 주니 다행이였습니다. 내가 질문제강에 따라 고심히 연찬하면서 선조들이 걸어온 력사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개인생활과 사회활동을 계통적으로 쓴다면 후세에 대한 책임감으로 내용이 확실하고 체계적이며 시간적으로도 퍽 효과적일 것입니다. 기실 나는 오선생이 나의 자서전을 쓰겠다니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거절하다가 오선생의 부인(金今福)까지 나의 기사를 읽고 김교수와“3同”(吃,住,行)을 하면서 사적을 채록하여 김교수의 생전에 책을 출판하라는 부탁과 오선생이나더러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자연인의 인생사를 쓰고 싶은대로 다 쓰라”는 권고에 생각을 바꾸고 “시름을 놓고 마음대로 쓰겠다”고 필을 들었습니다. 오선생이 작성한 질문제강은 저의 앞길을 훤히 밝혀주는 리정표입니다. 저의 글에는 지금 젊은세대들이 볼수없는 당년의 자연환경, 사회환경과 력사인물, 력사사실을 쓸것이니 나의 傳記는 후세교육에 대한 교양서로 될 것으로 자신합니다.  저의 글에는 내가 걸어온92년(1925ㅡ2016년)동안의 인생사도 많겠지만 근400년전의 우리 민족의 력사도 있습니다. “못말리는 갓바위집이야기” 속에는 근400년전의 살아있는 戶口簿에 슴배인 사람냄새가 풍기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저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온 중국조선민족의 血緣史에서 처음보는 史料로 眞品名品이 될것입니다. 지금 조선족실업가들이 많고 그들에게 재산도 많겠지만 이렇게 력사를 기록한 살아있는 비물질재산이나 宗親記錄이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나의 傳記는 다만 학습, 학교생활, 교육생활, 과학학술활동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평범한 생활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인생 생활사의 “回味無窮”를 인생철학의 경지에 상승시킨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 봅니다. 오기자와 나의 宿命적인 만남과 인연도 역시 나의 아버지의 “先見之術”로 이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런 인연과 운명의 체험을 위해서는 “尽人待天命”이 賢明人士의 소행임을 어찌 할바없습니다. 나는 더 큰 것을 위해서 나를 고달피는 오기활선생을 사랑해야하는 것만이 나의 참다운 인도주의라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오선생역시 오선생에게 많은 페단을 끼치는, 오선생의 金蘭같은 시간을 훔쳐내는 김수철을 “미워”함이 “理之所在”라고 짐작을 하지만 “김수철이 天時를 잘 맞난 덕분에 얻은 생명”이니 오선생이 어디까지나 나를 건져야지요, 허,허, 허,.. 끝으로 김수철의 傳記를 “김수철 개인의 명리를 날리는 小作이 아닌 인생철학의 大作”으로 되게끔 쓰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평생을 장자의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지켜왔습니다. 장자는 수천년전에 벌써 至人은自己라는 것이 없고 神人은 功績이라나는 것이  없으며 聖人은 名譽라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시각으로 상당한 부류의 현대인들이 자기를 맨 앞자리에 놓으려고 욕심을 부리며 겸손을 잊고 타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패배라고 여기며 자신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한 사람들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지인(至人)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출세를 위해 땀을 흘리고 명예를 출세와 동반하는 부산물로 여기며 안하무인으로 자신의 인격이 점점 황페화되는 것을 모릅니다.  지인은 명예를 쫓지않습니다. 지인은 욕심과 명예를 모르기에 행복합니다. 자연은 왜 사람을 행복하게 할가요? 그것은 자연에는 명예나 욕심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을 부언하면서 오선생의 아낌없는 로고를 부탁합니다.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밤 12시)  x           x                x                    x 그랜드모스는 71세에 그림을 시작했고  갈릴레오는 74세에 최후의 저서를 출간하였습니다. 파블로카 찰스는 85세 때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였고 김수철은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지”가 빠진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94세에 圖說“길림성식물지”를출간하였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합니다.   오기활
295    감동의 스승님 김수철교수(김수철전 5) 댓글:  조회:3992  추천:3  2019-12-01
나는 연변농학원 제3기 졸업생이다. 나는 김수철교수의 제자로 연변농학원을 졸업한후 연변농업과학원에 배치되여 연구원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다. 나는 “길림신문”에 실린“감동인물”을 즐겨보는 독자인데“감동인물”이 어떤 경로와 추천을 통해 신문에 발표되는지를 모른다.  나는 “감동인물”을 읽을 때마다 아쉬움이 있었다. 왜냐면 우리 조선족의 동아급(東亞級)식물학자로 “21세기의 리시진”이라 불리는 김수철교수는 왜 “감동인물”에 오르지 못하는가는 의문 때문이였다. 김교수는 93세를 넘은 고령학자로서 학자의 책임감과 식을 줄 모르는 사업 열정으로 “내가 죽기전에 못다한 일을 끝까지 마무려야 한다”며 사모님마저 불편하다며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자취하면서 식물을 채집하고 연구하며 많은 저서를 출판한 저명한 식물학자이다. 1947년에 김수철은 룡정의과대학 입시시험에 합격되였다가 정치심사에서 가정성분이 “규편중농”라는 원인으로 학생자격을 취소당했다. 그후 연변대학이 선후 연변대학 농학부 수의학과에 입학 하였는데 모종 윈인으로 연변대학 농학부를 농업전과로 격을 낯주니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면서 반대한 원인으로 학교당국에서 농학부를 취소하고 농학부학생들을 다른 학부로 전학시켰는데 그때 김수철선생은 다른 한 친구와 함께 할빈에 있는 동북농학원에 입학하고 얼마간을 다니다가 동행한 친구가 한어교학이 힘들다며 중퇴하려니 부득불 함께 연변으로 돌아 왔다. 얼마후 연변대학 농업전과 학부에서 김수철을 식물학 실험원으로 배치하였다. 김수철선생은 대학공부를 1년밖에 못하고 말단 실험원으로 열심히 독학을 하면서 식물을 채집하여 실험표본을 만들고 그림도면을 그리면서 식물학을 전공 하였다. 노력의 뿌리는 쓰지만 노력의 열매는 달았다.  1952년 학교지도부에서는 김선생을 교단에 올려 식물분류학을 강의하게 하였다. 식물분류학은 많은 식물을 세분하게 갈라야하고 영어, 라틴어, 중국어, 조선어, 로씨아어, 일본어 등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장악해야 하는 과목인데 그때 김선생은 로어공부를 하면서 교학을 시작하였다.  그는 밤을 새우면서 공부하며 열심히 비과를 하였기에 우리가 강의를 받을 때 그의 얼굴을 보면 늘 수척해 보였고 두눈이 침침한 상태였다. 그때의 나의 인상에 (저 선생님이 교학을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였기에 저렇게 피곤해 보일까?) 는 느낌이 머리속에 자리를 하였다. 나에게는 식물분류학과목이 제일 어려웠다. 왜냐면 식물분류학은 소유의 식물종류의 분포, 식물이 속하는 과, 속, 식물의 학명, 특성… 등을 암기해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나는 김선생님의 강의를 두 학기를 받으면서 시험에 겨우 통과되였다. 그래도 그만한 기초가 있었기에 공작에 참가한후 1956년에 길림성수리보편조사단의 단원으로 주내 하류량안의 토양조사임무를 맡고 전 주내를 답사하면서 연변의 토양류형, 식물피복, 지질모질(地質母質)을 훌륭히 집필하여 해당부문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허나 졸업후의 세월은 김선생님과 나의 연구분야가 다르기에 자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세월은 흘러 지금은 스승님은 93세, 나는 86세의 로인이 되였다. 지난 2016년의 어느하루, 나는 연변대학 농학원 리퇴직교원 몇몇 분들과 함께 김수철선생님의 평생연구기지인 룡정시 조양천진 삼성촌을 처음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몇 십년만에 만났는데 그의 옥체가 너무나도 건강하기로 정말 감동적이였다. 교수님은 비록 허리가 구불었으나 정신상태, 기억력, 눈정신은 모두가 우리 제자들보다도 훨신 좋았다. 방안의 네 벽은 몽땅 책무지로 막혔고 구들도 온통 책무지와 식물그림으로 널려 있었다. 그는 로친이 곁에 있으면 불편하다며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자취를 하면서 계속하여 식물연구를 하였다. 나는 그때 김선생님이 왜 이렇게까지 자기의 사업을 열애하고 그렇게도 열심히 일을 할가!? 그는 만년에 왜 아빠트를 떠나서 이 산골의 외딴집에서 고생을 찾아 하는가에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여태껏 중국에서 이름난 교수도 아니고 신문지상에 뻐젓이 소문난 학자도 아니건만 90고령에도 아직 하려는 일을 못 끝냈다면서 그렇게도 열심히 일을 할가? 는 생각으로 선생님을 쳐다보기마저 부끄러웠다. 정년퇴직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념을 안하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데 저 로인의 꿈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의 머리속에는 이런저런 미지의 물음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김생님은 평생 남들의 앞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고 꼬물만치의 승급욕이 없는 사람으로 그의 인생철학을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지 나로서는 답이 없다. 김선생님은 지난세기 5, 60년대 우리나라 경제곤난시기에 얼마도 안되는 봉금으로 집살림을 유지하면서 자식들을 뒤바라지를 하였고 한눈도 팔지않고 교학에만 정력을 몰부었다. 후에 생할이 펴워도 남들처럼 편히 행복한 생활을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식물학에 미쳐버렸다. 길을 가면서 길가의 식물에만 눈을 팔았고 약용식물을 찾는데만 정신을 팔았다. 김교수는 꾸준한 독학으로 국제학술론문발표회에서 영어, 일어, 한어, 조선어로 학술론문을 발표하고 장백산자원식물연구로  세계식물학술계의 중시를 받았다. 김교수는 명문대학도 다니지 못했고 말단 실험원으로부터 강사, 부교수, 교수로 부상 되였다. 교수님의 바람은 오직 하나 ㅡ “내가 아직까지 채 하지 못한 일을 끝까지 하고 죽어야  한다”는 학자의 고상한 책임감을 지키고 실현하는 것이다. 스승님은 진정 사람을 감동시키는 교수, 식물학자로 우리 삶의 영원한 본보기이다. 제자는 스승님의 건강장수를 기원한다.   서규쳘                                 2018년 3월 20일
294    가슴을 뛰게 하는 한권의 책(김수철전4) 댓글:  조회:4968  추천:1  2019-11-15
                 추천사                                             가슴을 뛰게 하는 한권의 책(김수철전4)                                                                                                        신봉철     지난해 하반년, 유명기자이며 오랜 벗인 오기활선생이 나에게 연변농학원의 93세의 고령인 김수철 교수의 인생스토리를 얘기해주었다. 당시 비록 구두로 한 얘기였지만 아래의 세가지 점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첫째, 김교수는 ‘21세기의 리시진’이라는 것이다.  둘째, 93세의 고령임에도 안경을 모르고 산천을 누비며 식물채집을 한다는 것이다.  셋째, 김교수를 ‘길림성감동인물’, 나아가서는 ‘중국감동인물’로 추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날 오선생은 상론조로 이미 김교수의 자서전(전기)을 썼는데 나에게 추천서를 써줄 것을 청탁하였다.  이에 내가 “김교수는 중량급 인물인데 내가 추천서를 쓰는 것이 타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오선생은 “연변농학원이 당년에 룡정시에 자리했고 당신이 룡정시당위서기를 담임하였기에 비교적 상황에 익숙하니 쓰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다른 토를 달지 않고 승낙하였다. 얼마후에 오기자는 두툼한 원고를 나의 이메일로 보내왔다. 나는 지대한 흥취를 가지고 진지하게 김교수의 사적을 열독하였는데 읽을수록 맘속의 감동을 금할 수 없었고 김교수의 인생경력, 탁월한 성과, 드넓은 흉금, 고상한 정조, 지칠 줄 모르는 탐구정신에 탄복되여 오래도록 펜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기자의 ‘지청구’에 어쩔 수 없이 93세의 고령인 당대 ‘리시진’에 ‘평어’를 쓰기로 하였다. 빛나는 인생 김수철, 1925년 4월 1일, 룡정시 태양향 횡도촌 향양툰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였다. 7살 때부터 당지의 한문서당에서 계몽교육을 받았다. 10살 때에는 양흥사숙(阳兴私塾)에서 교육을 받았고 11살 때에는 중흥사숙(中兴私塾)에 전학하였다.  천성이 총명한 김수철은 소학교 3학년 때 일어로 된 고전명작 ¡ì서유기¡í를 읽을 수 있었고 미술을 배우면서 야외스케치를 할 수 있었다. 17살—18살  때(1942년—1943년), 연길국민고등학교 1년급—2년급에서 공부하고 3년급—4년급은 왕청국민고등학교에서 축목수의와 일어, 영어를 배웠다. 해방초기에는 가정성분이 부농으로 획분되였다가 2년후에 ‘규편중농(纠ø¶ñé农)’으로 규정되였다. 김수철은 이 성분‘딱지’로 하여 고통스러운 정신생활을 하게 되였다.  1944년에 왕청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도문시친화목재주식회사 역축보건지도원으로 배치받고 선후로 팔가자출장소, 고동하벌목장, 로령벌목장에 출근하다가 심한 전염병에 걸려 정신상, 육체상의 고통으로 하여 자살까지 시도했다. 1946년 1월부터 김수철은 1년 동안, 룡정시 태양구중심소학교에서 무보수로 교직으로 지내다가 1947년에 시험을 거쳐 룡정의과대학에 합격되였지만 ‘규편중농’ 때문에 ‘정치심사’에서 락방되고 참군도 불허되였다.  그로부터 4년 동안 농업생산로동에 종사하면서 촌의 민주대동맹활동에 참가한 김수철은 유일한 청년위원으로 선거되여 활약하면서 다방면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50년대초에 연변농학원의 생물실험실의 실험원으로 배치를 받은 김수철은 1950년—1958년 기간에 여름방학과 공휴일을 리용하여 연변 각지와 장백산구를 답사하면서 3,000여종의 식물표본을 채집하였다. 그 후 연변농학원에서 조교로 교직에 있으면서 1959년—1965년 사이에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동북3성을 누비면서 25,000점의 식물표본을 채집하였다. ‘10년내란’ 때에는 백전(白专)로선을 걸었다는 ‘죄명’으로 비판투쟁을 받고도 동북3성과 내몽골, 산서, 해남도의 50여개 산봉우리를 돌면서 2,500여종의 식물표본을 채집하였다.  김수철은 연변농학원 강사, 부교수, 교수로 있었고 1987년에 정년퇴직을 하였다. 김수철은 퇴직후 30년 동안, 시종 식물 채집과 연구를 견지하면서 17권의 전문저서와 론문(조선어, 한어, 일어, 영어)을 출판하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퇴직후 원시자료, 회화, 사진 및 동영상으로 3,200여종의 식물삽도를 제작하고 조선어, 한어, 영어, 라틴어로 몇천가지 식물의 학명, 별명, 산지, 약효 등을 기록하고 정리하여 명실공히 당대의 ‘리시진’으로, 동아급(东亚级) 식물학자로 부상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우수당원, 길림성로력모범, 길림성 중약자원보충조사 선진사업일군으로 된 김수철은 1990년에 국가농업부로부터 ‘전국초원자원조사우수상’을 받았다. 김수철은 선후하여 연변생물학회 명예회장, 길림성초원학회 고문, 대한민국식물자연학회 고문, 연변알로에연구소 소장직을 지냈다. 김수철옹의 포인트 김수철은 중국뿐만 아닌 아시아 식물학령역에서 널리 전해지고 칭송되는 식물학계의 거인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상에서 어떤 보귀한 정신적 재부가 체현되였는가?  첫째, 탐구정신 400년전에 리시진은 30년을 거쳐 1,892종의 식물로 ¡ì본초강목¡í을 집필하였다. (후에 374종의 새 품종을 첨가함.) 그러나 400년후 김수철은 60여년(퇴직후 30년)이나 산을 넘고 재를 넘으며 2만 5천점의 식물표본을 소장한 생물실험실을 건립하였다. 90고령엔 ¡ì길림성식물채색도감¡í을 출판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이나 로친을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산골초가집에서 자취하면서 산과 재를 넘나들었으니 그의 탐구정신은 ‘산신(山神)’임에 틀림없다. 둘째, 평생학습정신 김수철 교수는 여섯개 나라의 언어를 장악했다. 한어, 조선어, 일어,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하고 론문을 쓰며 식물표본에 주석을 달고 문학작품까지 열독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결과는 그의 말씀 대로 산을 다니며 식물표본을 채집하는 배움의 길을 통해 이룬 것이다. 그리고 식물표본을 그리기 위해 50~60세에 스승을 모시고 회화, 촬영을 배워 전업수준에 이르렀다. 그가 만년에 컴퓨터를 세번이나 바꿨다니 그의 평생학습정신을 알 수 있다. 셋째, 유머와 락관정신 김수철 교수는 평소에는 말수가 적지만 대화를 시작하면 유머감이 넘친다.  94세의 고령임에도 몸건강이 50대로서 책이나 신문을 볼 때에 안경을 쓰지 않는다. 건강비결을 물으면 “일생동안 길섶의 풀과 산속의 식물을 먹었기에 오늘까지 건강하게 살며 병원이 어딘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큰병은 뜸이다.”라고 하며 ‘뜸’으로 여러가지 잡병은 물론 가족들의 암까지 치료하였다.  넷째, 사심 없는 겸허함 김교수의 업적과 공헌에 비기면 그가 받은 영예는 새발의 피라 할가. 내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구동성으로 “김교수는 머리 숙여 일만 하는 늙은 황소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매체의 취재에 별로 나서지 않기에 매체들이 그에게 접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다행히도 오기활기자가 김교수의 제자로서 이 책을 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는데 결국 김교수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끝내 승낙을 받게 되였다.  이런 겸손과 부드러움은 오직 마음속에 사업밖에 없고 명리를 탐내지 않는 인테리의 이미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다섯째, 대의를 위한 봉사정신 김교수는 일생동안 한눈 팔지 않고 신념, 의지, 탐구, 분투로 대업을 이룩하고 대의를 실현하였다. 중국꿈과 민족꿈을 실현하기 위한 한길에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대의를 도모하는 정신, 의연한 분투, 고집스러운 탐구, 각고의 노력, 불후의 업적이 소요된다. 필자는 이 책이 김수철옹에 대한 가장 권위적인 ‘평가서’로서 모든 분발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거울’로, 그리고 ‘모듈의 책(模块书)’으로 되며 중국꿈을 실현하는 ‘안내서’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믿으면서 독자들에게 얻기 힘든 김수철옹의 대작을 추천하는 바이다.   ¦ 부언 책의 저자에 관하여   오기활씨는 신문계에서 쟁쟁하게 이름이 나있다.  이하는 몇십년 동안 익숙하게 지내온 오기활씨에 대한 나의 소견이다. 첫째, 풍부한 경력을 갖고 있다.  비록 농학원을 졸업했지만 자기의 능력을 잘 알고 한평생 신문사업에 종사하면서 자아를 실현하였다.  둘째, 많은 작품을 출산하였다. 몇십년래 무수한 신문원고를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적지 않은 경전적인 가작들이 있다. 셋째, ‘과감히’ 쓴다. 특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직언직설(òÁåëòÁ说)하며 백성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인다. 넷째, 유쾌한 사람이다.  70대에도 술상에서 반근 술은 거뜬히 하는데 그 이미지가 마치 어느 위인과 근사하다.  다섯째, 의리를 중히 여긴다. 사람됨이 의롭고 감히 성을 내고 울고 웃으며 감히 의협심이 강한 말을 쏟아낸다. 이렇게 투명한 사람이 김수철이란 호인(好人), 기인(奇人), 대인(大人)을 좋은 책으로 펴냈으니 저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부언한다!                           신봉철 (원 길림성 인력자원 및 사회보장청 부청장, 현임 중국 ‘단군문학상’리사회 회장) 2019년 1월 21일 해남도 금전심성(金典心城)에서 
293    이런“무명”씨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립니다! 댓글:  조회:3438  추천:2  2019-11-13
월전에 필자는 두발로 항일(독립, 반일)유적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뛰여다니며 우리민족 선렬들의  숨결을 답사하면서 책으로 력사 에 남기는 리광인선생이 “도문혁명로근저지건설 촉진” 사업을 함께 상론해 보자는 제의로 하여 자택에서 리선생을 만났다.   1982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선후로 연변일보사 기자,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원, 절강월수외국어대학교수를 지낸 리선생은 사비를 팔며 동북3성은 물론,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을 비롯하여 2만 5천리 장정의 발자국까지 답사를 하면서 (전4권), (전 2권), , , 평전 《홍군장령 양림》, 평전 《백포 서일장군》, 평전  등 33여부를 출판하였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일전에 화룡시에서 “화룡혁명로근거지발전사업촉진회” 책임자(한족)와 함께 사업을 연구하던중 그 책임자가 “리선생이 그많은 책을 펴냈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까지 한문으로 된 책을 한권도 못밨기에 아무것도 모릅니다”고 말하니 너무나도 서운했다며 “우리민족을 세상에 알리는 일(조선문작품을 한문으로 번역하는)을 우리민족의 미룰수 없는  대업으로  삼고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재삼 부언했다. 리선생은 특히 무정장군을 곁들면서 “무정이 팽덕회가 이끄는 홍군 제3군단 포병지휘관으로 있을 때주덕은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와 토론하고 무정을 군위직속 홍군포병퇀 퇀장으로 제발시킨 뒤를 이어 중앙군사위원회 제1야전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  “그리고 장정때 무정이 팽덕회사령원을 받들어 장국도와의 투쟁에서 불멸의 기여를 하였다는것을 알게 된 주덕은 이 조선혁명가 무정에 대하여 탄복해마지 않았다...”  “...우리민족에게는 이러한 우수한자료들이 아주 많으니 우리민족의 위상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조역한”(朝譯漢)사업을 적극 촉진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필자는 리광인선생의 관점에 100% 동의다.    2005년 8월 5일, “김학철, 김사량항일문학비”를 태항산에 설립하는 행사에  참가한 필자는 그날 중국작가협회주석이 참가한 모임에서 김학철선생은 당대의 로신으로  그의 작품들을 한문으로 번역되여 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건의을 제의하였다.   그 후로부터 필자는 “조역한””(朝譯漢)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늘 지켜보던 와중에 일전에 채영춘선생이 쓴 “애국과 점철된 민족정감”을 읽고 다행히도 이사업 시작의 희망을 보게 되였다.  재영춘선생은 글에서 “우리 주변에는 우리 민족의 자랑찬 혁명력사를 대대손손 전승하고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공화국 충신들이 많다. 이번에 공화국 창건 70돐에 당중앙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분투자’ 영예칭호를 수여받은 왕청현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이 바로 전형적인 인물이다.”    “... 이 선행의 사례 또한 그 부름을 계속하는 도미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필자는 경건한 마음으로지켜 보고 있다...그중 한 사람(본인이 이름을 감추려 하기에 필자는 그의 이름을 한동안 가슴속에 묻으려 한다.)은 일찍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조선족문학의 거장인 김학철옹의 평전을 비롯하여 단 한권의 한어문도서도 출간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자기로 출판비용을 마련해 김학철옹의 첫 한어문도서 《철 협장으로 찍어낸 발자취(铁拐下的足迹)》를 출간한 뒤를 이어 일전에 또 본인이 출판비용을 구하여 을 살고 있는 김춘섭의 업적을 다룬 실화문학집 《동만항전 발자취를 추적하는 로병(一个追寻东满抗战足迹的老兵)》을 한문으로 출간해냈다.”고 밝혔다.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필요한 사업을 하는 “필요한 사람”이 “타민족에게 조선족을 알리는’ 일을 조용히 벌려가는 것은 실로 남들이 볼수 없는 땅속에서 땅을 적져수는 수맥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런 “무명”씨에게 충심으로 되는 경의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보람차고 숭고한 사업은 단 한두명의 “무명”씨에게만 의탁할것이 아니라 각급 당과 정부,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기업가협회, ‘단군문학상’리사회 등)에서 “조역한” 사업을 애국애족이라는 미룰수 없는 사업의    일사일정에 올려놓고 힘차게 추진할 것을 겅의한다. 오기활
292    그의 인생철학은 “상선약수(上善若水)” (김수철 전 3 ) 댓글:  조회:4173  추천:5  2019-11-01
연변대학 건교 70돌에 즈음해 오기활선생의 편저로 된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이하 김수철전)이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최근 출판되였다. 《김수철전》은 연변대학 농학원 원로교수이며 석학인 김수철교수(95세)의 자서전이다. 이 자서전에는 김수철교수의 도전과 배려의 삶과 끈끈한 효사랑과 가족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학자의 마음으로 후학양성과 학술연구에 림한 경험담이 진솔히 담겨져 있다. 21일 오후에 있은 《김수철전》 출간좌담모임에서 《김수철전》의 오기활선생은 지난 3년간의 집필과정은 바로 인생공부 3년의 보람찬 시간이였다고 회고했다. 오기활선생은 집필을 통해 김수철교수님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배웠고 김수철교수님이 지내온 가슴뛰는 일과 가슴뛰는 삶을 가슴깊이 느꼈다고 말했다. 더욱이 김수철교수님은 연변대학 농학원의 자랑이자 조선족의 자랑이며 중국꿈의 실현을 위해 정년을 모르고 일생을 현역으로 분투하는 중국지식분자의 본보기라고 높이 평가했다. 출간좌담모임에서 참가자들은 《김수철전》은 근 한세기를 살아온 김수철교수님의 인생사 기록이며 우리 민족의 백년력사 기록이며 우리민족의 문화사 기록이라고 인정했다. 또한 《김수철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되고 힘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과서로 될것임을 확신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김수철전》은 한문으로도 번역되여 출간된다. 길림신문 안상근 김성걸기자 (발표시간, 2019.9.21)   《김수철전》에 연변대학 농학원 량성운원장이 머리말을 썼다. 량성운원장은 머리말에서 “김수철교수의 인생철학은 ‘상선약수(上善若水)’입니다”며 “ ‘상선약수’란 로자사상에서 물은 만물을 리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이 세상 최고의 선이라고 이르던 말입니다.”고 부언하였다. 이하는 《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전》의 ”머리말” 이다. ㅡ마침내 연변대학 농학원 교수이고 석학이신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이 출간되였습니다. 이 자서전은 김수철 교수님이 남긴 업적일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김수철도 보여줍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마냥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을 손에 들고 단숨에 읽어내려가며 김수철 교수님의 삶을 마주하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자서전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기술한 전기 또는 회고록으로서 어렵고 위험을 수반하는 작업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기억은 제한성이 있고 기술함에 있어서도 오류가 생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신의 치부와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도 감추거나 미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은 도전과 배려의 삶과 끈끈한 가족의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학자의 마음으로 후학양성과 학술연구에 임한 경험담이 진솔하게 담겼습니다. 우리는 자서전을 통하여 그동안 김수철 교수님에 대해 궁금했던 점과 그에게 여쭤보고 싶었던 질문들의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례를 들어 그의 성장과정은 어떠하였는지, 그의 꾸준하고 왕성한 농업연구와 활발한 인재양성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인생과 사람을 대하였는지,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여곡절을 이겨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리론과 실험을 모두 능숙하게 해내는 만능형 농업학자입니다. 그는 연구실에서 리론연구를 진행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조사설비와 분석기계가 없는 시대에 두 발이 닳도록 다니며 조사하고 한 글자 한 글자 필사하여 오늘날 농학연구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는 선공후사(à»Íëý¨Þç)의 정신으로 나라와 당의 사업을 최우선 순위에 놓았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언제나 당과 정부의 각종 사업과 정책의 실행에 앞장섰기에 ‘길림성로력모범’, ‘연변주로력모범’, ‘우수공산당원’ 등등의 영예로운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초지자원 조사사업’과 ‘중약자원 조사사업’에서 걸출한 공헌을 하여 ‘우수사업일군’의 명예로운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옛것을 본받고 옛것으로 시대에 걸맞은 창조력을 발휘하는 ‘법고창신(Ûöͯ创ãæ)’의 정신으로 연구에 임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연구성과인 은 ‘길림성 축목업 과학기술진보 3등상’의 영예를 수여받았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농업전문가로서 농업리론의 발전뿐만 아니라 농업리론을 실제의 농업현장과도 결합하여 우리 나라 특히 연변지역의 전반적인 농업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나아가 연변대학 농학원에서 교편을 잡은 몇십년 동안 나라와 민족의 농업발전에 기여하는 우수한 후속 연구일군들을 양성했습니다. 김수철 교수님의 자서전을 통하여 그의 인생철학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선약수’란 로자사상에서 물은 만물을 리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이 세상 최고의 선이라고 이르던 말입니다. 김수철 교수님은 곧 물과 같이 생활, 연구, 교육, 사업 여러 방면에서 가정, 학교, 사회에 리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상선약수’의 인생을 이룩했습니다. 저처럼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김수철 교수님의 인생을 통하여 자신만의 울림이 있을 거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여러 방면에서 눈부신 성과와 업적을 이룩하고 인생의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한권의 책에 집약하기 위하여 노력해주신 김수철 교수님의 로고에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올립니다.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연변대핵 농학원 원장 량성운  부록: “김수철 전” 출판 발행좌담회 발언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의 저자 오기활입니다. 오늘의 만남이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수선먼저 지난 세기 70년대 연변농학원(축목수의계)졸업생,  80년대 연변대학(통신학부, 정치계 사회반 제1기 본과) 졸업생의 신분으로 자랑스러운 모교의 70주년 생일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그리고 신주의 중화 땅에 연변농학원의 튼튼한 자리매김을 위하여  70년간 동이 땀을 흘리신 모든 원로분들과 지금 한창 현직에서 맡은바 사업에서 열과 성을 다하는 연변농학원의 전체 임직원들에게 가장 충심으로 되는 경의와 성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건교 70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오늘의 행사를 뜻깊게 마련한 연변농학원 원부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95세의 고령에 “길림성식물지”를  출판한 김수철교수님께 충심으로 되는 축하를 올립니다.  아래에 이런 순서로 여러분께 말씀을 올리렵니다.  먼저는 책의 출품을 발기하고 도움을 주신 이런 분들에게  순서적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1, 필자의 제1독자로 저더러 몇 달이고 김교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김교수의 생전에 그분의 자서전을 꼭 출판하라고 건의한 저의 부인 김금복씨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 신문잡지에서  김수철교수님의 많은 기사를  읽고 독자로서 제일 먼저 저에게 김수철교수님을 “길림감동인물”로 추천하자는 전화를 보내온 연변농업과학연구소 서규철 연구원(88)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서규철님은 여러면으로 김교수의 사적을 저에게 제공했고 또본 책에 “감동의 스승님 김수철 교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3, 연변농학원 황영수교수(88)님게 감사를 드립니다.   황교수님은 서규철교수님의 부탁에 따라 주변의 원로분들로 “희망조”를 조직하여 김교수의 자서전 출판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면서  농학원지도부의 협조와 지지를 쟁취하였습니다. 그사이 황수님은 김교수를 만나려 룡정ㅡ조양천을 오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치료까지 받으셨답니다. 4, 하는 사업이 그렇게도 분망하면서도 “김수철 전”에 머리말을 쓰신 연변농학원 량성운 원장님게 감사를 드립니다. 5, 다망중에서도 저의 원고를 열심히 읽으시고 본 책의 추천서를 쓰신 중국 “단군문학상” 리사회 신봉철회장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본 책이 출판되기까지 지나온 3년은 저의 인생공부  3 년이였음을 특히 밝힙니다.  저는 김수철교수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이번 집필을 통해 김수철스승님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알게 되었고 김교수님의 가슴뛰는 효사랑, 가슴뛰는 일, 가슴뛰는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수철교수님은 21세기의 “리시진”, 동아급(東亞級)식물학자, 백두대간의 불로송입니다.  김수철교수님은 연변대학(연변농학원)의 자랑이며 조선민족의 자랑이며 중국꿈의 실현을 위해 정년을 모르고 일생의 막날까지 현역으로 분투하는 중국지식분자의 본보기입니다.   제가 이런 비범한 인물을 문자로 력사에 남길 수 있음은 저에게는 둘도 없는 행운이며 영광이였습니다.  김수철교수님은 저의  삶의 평생본보기이며 참된 라침판이며 저의 삶의 질의 방부제로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과정을 통하여 력사문자기록의 중요성을 한층 깊이 터득 하였습니다.    “사회생활의 문자기록은 문명의 산물이다.”   “문자기록은 인류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이는 김수철교수님의 명언입니다.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빚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서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 수 있다”  이는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 헬릿카의 명언입니다.   근 한 세기를 살아온 김수철교수님의 인생사 기록은 우리 민족의 백년사기록이며 우리 민족의 문화사기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연변대학출판사” 편집선생님이 “연변농학원에서 요구하는 출판시간(9월 10일)을 보증하려면 원고내용을 퍽 줄여야 한다”는 요구에 할수 없이 원래 준비한 본책의 출판원고에서 20여 편의 원고를 줄이였습니다. 그리고는 김수철교수님의 백년력사와 우리 민족의 문화사를 문자기록으로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3천 여원의 인쇄비를 더 투자하여  “백두대간의 불로송 ㅡ 김수철”을 비매품 책으로 출판 하여  “김수철 전”의 전부 내용을 문자기록으로 세상에 남겼습니다. (이 책은 문법, 문자, 기호에 틀림이 있음을 밝힘)  그러니까 “21세기의 “리시진” ㅡ 김수철전”은 김수철의 선집(選集),  “백두대간의 불로송 ㅡ 김수철”은 김수철의 전집(全集)으로 우리 민족의 력사에 영원히 남게 되였습니다.    필자는 “김수철전”은 정치나 종교와는 관계없이 오늘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론 미래에 살아 갈 누구의 삶에도 도움이 되고 힘이 될 한부의 력사교과서와 인생교양서로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끝으로 연변대학출판사 김미숙편집선생의 로고에 감사패를 드리는 것으로 뜨거운 감사를 표합니다!  김수철교수님 건장장수하세요! 감사합니다!  오기활 .  2019년 9월 21일(연길국제호텔에서)  
291    사명감이 없이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김수철 전 2) 댓글:  조회:4311  추천:2  2019-10-28
미국의 R.E.Perdue같은 학자는 이미 5만종의 식물을 훌터서 그가운데서 암세포에 대하여 파괴작용을 지닌 2200종의 성분을 발견해 내기로 하였으나 아직도 완전한 특효약이 개발될려면 전도요원한 감이 든다. 그런데 본초학의 역사적 전통을 지닌 중국에서 소중한 문헌이 발간되였으니 “常敏毅 編著.抗癌本草”1989年板. 湖南科學技術出版社刊이 그것이다. 그와 같이 좋은 문헌이 나왔으나 언어의 장벽, 더군다나 “簡化字”로 기술되여 있어서 읽기가 어려워서 곤란이 있었는데 금반 “延邊農學院植物學 敎授 金洙哲 先生”에 의하여 한국어로 번역되였을 뿐만 아니라 자상스러운 주해(註解)까지 마련되여 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아니할수 없다. 이와 같은 역작(力作)을 이룩한 김 교수는 비록 중국에 계시는 교포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모국에 이바지할려는 드높은 사명감이 없이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출판사 “바람과 물결”의 사장이신 구윤서 선생의 물심양면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번역사업이 이룩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 속히 활자화되여 연구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와 같은 학술서적의 번역이란 실로 어려운 일이며 특히 본초서에 있어서는 기원식물(基源植物)의 동정(同定)이 문제가 되며 동물실험이나 화확적 연구에 있어서 항암효과의 단서가 보인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인체에 대한 치료제가 된다는 보증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번역된 원고를 보니 고증과 주해가 번역자에 의하여 추가되였고 식물의 도해(圖解)까지 들어 있어 번역본의 책이름도 “註解圖說抗癌本草”라고 되여 있다. 듣건대 원본을 이미 대만에서는 간화자(簡化字)아닌 정자(定字.繁體字)로 인쇄된 것이 출판되였으며 미국학자에 의하서 영문판도 준비되고 있다고 하니 이 책에 대한 내외의 기대가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수 있다… . 고국의 암 연구 발전을 위하여 우리말로 번역의 노고를 스스로 맡으신 번역자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내고자 한다. 1992.1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약학박사 洪 文 和 識 (“註解圖說抗癌本草” 서문에서 )  
290    “이 위대한 사업을 누가 완성할수있는가?”(김수철 전 1) 댓글:  조회:4546  추천:0  2019-10-21
                                                                                                       (오른쪽 김수철교수) 연변농학원의 정년퇴직교수, 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교수(95)는 식물학자의 량심과 사명감으로 “길림성식물지”를 출판하여 후세에 전하고저 수년간을 고군작전을 하던중  2017년6월18일에 이렇게 자기한테  두번째 동원령을  내렸다.     ㅡ 나는 자연이 낳은 김수철, 백두산이 배육한 김수철, 자연을 거울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자연에 보답하려는 김수철이다. “吉林省植物誌”출판은 길림성식물연구사업의 위대한 고봉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이 고봉을 등반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위대한 사업의 완성자를 중국의 5천년력사가 기다리고 있다. 20년전까지 매우 어려웠던 이 프로젝트가 지금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완성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렇다면 누가 이 위대한 사업을 책임지고 완성할수있는가? 평상시에 이 방면에 뜻을 두고 남모르는 노력으로 때를 기다리던 사람에게만이 이 위대한 사업을 완성할 수 있는 챤스, 권리, 의무가 부과된다. “하늘 땅에 감사하다(謝天謝地)”고 할가, 아니면 다행이라할가.   하늘은 준비된 文獻자료가 수두룩하고 식물분류학 기초가 있고 꾸준히 한 우물을 판, 몸 건강 상태가 좋은 金洙哲에게 이 프로젝트를 완성해야할 의무와 권리,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즉 하늘이93세의 이 老軀에 건강, 정신, 활기를 注入하여 나더러 이 사업을 완성하도록 “미캐니즘”을 설치하여 작동하는 “로보트”로 만들어 놓고 이 “로보트”가 정말 이 일을 참답게 해낼수 있을가를 여러모로 試驗하고 있다. 하늘은 내가 갖은 애로를 물리치고 끝까지 완성할수 있는가를 시험한다. 나에게서 “머모리디스크”도 훔쳐내고 디스크의 기록도 지워 버리기도 하면서 내가 악렬한 조건에서도 힘을 내여 전진, 또 전진 하는가를 지켜 보면서 나를 고험한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試驗에서 락제를 하면 필경 나를 금밖으로 밀어 낼 것이다.  나는 하늘의 이런 속심을 언녕 짐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락심하지 않고 아무리 악렬한 조건이라도 웃음으로 넘기고 아홉번을 넘어지면 열번 일어서는 “오또기”(不倒翁)정신으로 기필코 敢當해 낼 것이다. 내가 신심있게 “하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되면 한다!”며 적극 따라 나서서 나를 협력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자아 보건법으로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면서 담대포천(膽大包天)의 정신과 의력으로 계속 한 우물만 팔 것이다. 나에게는 조선족으로, 연변대학의 일원으로, 다른 민족에 못지 않게 사회의 발전에 유익한 일을 추진하겠다는 경쟁심도 있다. 지금 우리가 연변축구의 사회적 경쟁심을 피부로 느끼듯이 나도 식물학이란 “축구장”에서 풀 뽈을 차는 조선족 스포츠맨으로 비록 기교는 다르겠지만 기필코 승부하려는 경쟁심만은 같을 것이다.  저 하늘의 뭇별들이 백번 넘어지면 천번 벌떡 일어서는 나를 향해 반짝이며 나에게 크낙한 용기와 희망을 준다. 그리고 태양은 나더러 하늘의 시련을 웃음으로 받아 넘기며 종전보다도 더 강한 특수 강철이 되라고 뜨거운 불덩이로 이 몸을 담금질을 한다.   나는 꼭 잘 해 내겠다! 오직 잘 해 내는 것만이 나의 사명이고 운명이다. 김수철 2017년6월18일 (이 밤도 연구비 결핍으로 고민을 하면서) “그렇다면 누가 이 위대한 사업을 책임지고 완성할수 있는가?” 이에 “길림신문”사 김성걸, 안상근기자가 소식을 전해 왔다.  ㅡ 연변대학건교 70돌계렬행사의 하나인 《길림성식물지》 발행식이 9월 21일 오후, 연길에서 있었다. 《길림성식물지》는 연변대학 농학원의 원로교수인 김수철과 그의 손녀이며 현임 연변농학원 교수인 김영화가 주필을 맡았다. 식물지는 한 나라와 지역의 식물종류를 기재하는 분류학 전문저작으로서 식물학분야 과학연구와 지역생태문명건설에서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올해 95세 고령인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 농학원의 제1대식물학 전문가로서 60여년 긴 세월을 길림성 실지고찰을 통해 식물표본 수만종을 수집하면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길림성식물자원분포와 종류를 장악했다. 이번에 출간된《길림성식물지》에는 김수철교수의 60년간의 과학연구심혈과 성과들이 깃들어 있어 출간의미가 크다.  료해에 따르면 현재 우리 나라의 길림성과 섬서성을 제외한 기타 지역들에는 모두 성, 시, 구의 식물지가 있다. 길림성은 북반구유라시아대륙에서 가장 큰 물종유전자고인바 식물자원이 풍부하고 야생식물종류가 전국총수량의 13%나 차지할뿐만아니라 자연생태자원이 전국적으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이날 《길림성식물지》의 출간을 길림성의 식물지편찬의 공백을 메웠을뿐만아니라 중국식물지편찬의 공백을 메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출간식과 함께 연변대학교에서는 지난 70년간 식물분류학연구에서 중대한 기여를 한 김수철교수의 업적을 기리여 그에게 “길림성식물분류 백과전서”라는영예칭호를 수여했다. 연변대학 농학원 책임일군은 출간식 축사에서 “김수철로교수의 초심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사업하는 정신은 후학들을 깊이 감동시킨다”면서 “김수철교수는 연변대학의 자랑일뿐만아니라 후학들이 따라배울 새시대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길림신문, 2019. 9.21)  지난 10월 11일 몇몇 원로교수들의 축하모임에서 김수철교수는“길림성식물지”(총6집)와 “길림성식물도감”(3권)을 끝내자면 아직도 6년 남짓한 시간이 수요된다. 그러니까 내가 죽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 죽는다”. “나는 지금  매일 ‘그림알’을 낳는다”며 두손들어 자신감을 표했다. 오기활
289    듣기 좋은 소리 댓글:  조회:4402  추천:0  2019-10-01
남의 외모에 관한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상이 아니라면 차라리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의 면전에서 지나치게 아부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는 것은 차라리 돌아서서 그를 욕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당신의 상사나 최고 경영자라면 말이다.   이런 사화가 있다.   제나라 상국(재상) 추기는 키가 팔 척이나 되고 외모가 출중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옷을 잘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서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나와 성 북쪽에서 사는 서공을 비교하면 누가 더 잘났소?” (서공은 제나라에서 유명한 미남자다.) “당연히 당신이 잘났죠. 어찌 서공을 당신에게 비기겠어요?”  추기는 자기가 서공보다 잘났다는 부인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 다시 첩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을 비기면 도대체 누가 더 잘났소?”  “서공을 어떻게 나의리에게 비기겠습니까?”  첩도 같은 대답이였다.  다음 날 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와 담소를 나누던 중 추기는 또 그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잘났소?”  “서공이 상공보다 못합니다.”  손님의 대답이다.  또 며칠이 지나 서공이 찾아왔다. 추기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신이 서공보다 잘났다는 말이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거울 앞에 서서 곰곰히 자신을 뜯어보니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이 서공에게 비길 바가 못되였다.  밤에 추기는 침대에 누워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생각해보니 마침내 스스로 모든 것이 리해가 되였다. (부인의 듣기 좋은 소리는 나를 편애하기 때문이요 첩이 그러는 것은 나를 두려워하는 때문이며 손님이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서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로다!)  추기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대답들이였다.  필자는 꼭 9년전에 “길림신문”에 “손금이 없는 간부”라는 글을  올렸다.   글에서 필자는 “백성의 질고를 고려하지 않고 다만 ‘상급지도자’의 정서를 고려하며  ‘상급지도자’의 “애착”을 바라며...  상급에 아부하는  사람(간부)들을 “손금이 없는” “지체장애자”라고 칭했다. 이네들은 상급지도자의 앞에서 그저 허리를 굽실굽실거리며 “예, 예”하며 손바닥만 싹싹 비벼대다 보니 손금이 달아서 없어 졌다는 뜻에서  말이다.  필자는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그나마 제때에 찾은  추기의 “재상맛”이 감미스럽다.  오기활
288    “실패학” 유감(有感) 댓글:  조회:3854  추천:0  2019-09-01
일본 도꾜대학  하타무라요타로(畑村 洋太郞)교수는 “실패학”이란 학문을 처음 정립한 사람이다. 그가 쓴 “실패학의 권유”는 유명한 저술로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일본의 세계적인 경영자 혼다 소이치로(本田 宗一郞)는 회사에 “실패상”을 설치하여 독창적인 기술의 개발을 독려하였다. 그는 기술자들이 당당하게 실패한 프로젝트에 대해 그 원인이나 경로를 정확히 밝혀내면 책임을 묻는 대신에 상을 주며 격려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고무해 주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을 맺어 혼다 기술 연구소는 자동차 엔진 기술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경쟁력을 지닐 수 있었다.  또 lBM의 설립자인 톰 왓슨은 정당하게 실패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그 담당자의 책임을 추구한 일이 없다. 이것은 그의 인재관리 성공비결 중 하나라고 할수 있다.  한번은 젊은 부사장이 매우 모험적인 신제품 개발계획을 보고했다. 톰 왓슨은 과연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지를 그에게 물었다. 부사장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일수록 큰 수익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며 계획의 실행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신제품 개발사업은 회사에 1천만 딸라에 달하는 거액의 손해를 입히고 실패하고 말았다. 톰 왓슨이 부사장을 불렀을 때 부사장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책임을 통감하며 사직서를 제출합니다.”고 말했다  이에 톰 왓슨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소린가! 나는 자네를 교육하는 데 무려 1천만 딸라를 들였는데...다시 시작하게” 톰 왓슨의 격려에 고무된 부사장은 다시 한번 도전해 마침내 그 사업을 성공의 궤도에 올렸다. 우리는 성공 사례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성공 사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실패 사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통해 배우듯이 실패를 통해서도 배울수 있어야 한다. 실패로부터 얻는 교훈은 창조적인 발전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점을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실패학이다.  실패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실패든 그것을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업의 구성원들이 그 실패의 과정과 교훈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기활
287    “질문”을 통해 세계의 문이 열린다 댓글:  조회:4124  추천:0  2019-08-23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페막연설 때 일이다.   오바마가 페막연설을 마치고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드리고 싶군요”고 말했다. 이는 오바마가 개최국에 대한 례의로 한국 기자들이 미국대통령에게 직접 질문을 할수있는  특권을 준 것이다. .  하지만 손을 든 한국 기자가 한 명도 없었다. 오바마는 “한국어로 질문하면 아마도 통역이 필요할 겁니다”라며 웃음으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때 한 명의 기자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 기자는 한국 기자가 아닌 중국 기자였다. 오바마는 정중히 거절하며 한국 기자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질문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대통령에 대한 질문권은 중국 기자에게로 넘어갔다.  이에 비춰 2001년 10월 15일에 있은 “중국연변/한국현대뻐스생산판매투입소식발표회”가 생각된다.   그 발표회에 중, 한 신문 매체와 중, 한동업자, 국내 구매업체에서 참가하였다. 주체측이 소식발표를 끝내고 기자들에게 질문을 청하였는데 질문자가 없었다. 이에 필자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저 일어나 자신을 연변일보기자, 한국 ‘중앙경제신문’ 연변지사장이라고 밝히고 “오늘 발표에서 국내외적으로 자동차산업경쟁이 심하다고 하는데 한국측에서는 오지로 불리는 연변이 어떤 우세가 있기에 연변현통과 손을 잡았는가?”를 질문해 기자들의 체면을 지켰다.    2011년에 필자가 중한수교의 전기인물인 한성호박사의 “건강법”을 칼럼으로 썼더니 한박사가 하는 말이 “내가 북경대학에서 나의 건강법을 강의 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따금씩 질문을 해도 아무 대답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질문시간을 줬는데도 한 사람의 질문도 없더라”며 “기자는 그 누가 무슨 상을 탓고 누구를 만났다는 사적만을 쓸 것이 아니라 질문으로 그 사람의 사상을 써내야 한다”고 교시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질문을 하지 않는가?   물론 여러 가지 리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한마디로  우리들의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교육은 태교,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있다.)   원래 우리는 말을 시작하면서 부모에게 “나는 어디에서 왔어요? ’’  “왜 사람은 날수 없어요?,, 는 등등의 질문으로 부모가 지칠 정도였다. 그런데 흔히 많은 부모들(가정교육)이 “그건 크면 알게 된다”, “그건 몰라도 된다”  “어른의 말에 대꾸(질문)를 하면 못 쓴다” 며 아이들의 질문을 막아 버린다.    그리고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몇점을 맞았나?”며 점수로 자녀들을 단속한다. 그리고 학교도 정답형 학생을 만들기 때문에 학령이 늘어날수록 학생들이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린다.   세상엔 답이 있는 것보다 답이 없는 것이 많고 답 자체를 스스로 창조해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학교는 수능으로 대변되는 시험을 중심으로 오로지 한 문제에 하나의 답만이 있는 훈련과 그 답을 잘 맞힌 학생이 높이 평가되는 속에서 학생들이 배양된다.    “서울대학에서 누가 A+를 받는가”는 책의 저자(리혜정)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공부법으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돕자고 연구를 했는데 결과가 예상치 못하였다.    저자는 서울대 2, 3학년의 최우등생 150명중 46명의 학생을 심층 인터뷰를 한 기초에서  일반 학생 1,213명을 설문조사를 하고나서 최우등생과 일반학생들을 비교했는데 최우등생들의 특별한 공부법이 바로 독특한 노트필기였다. 즉 교수의 강의를 토 하나도 빼지 않고 필기하는 것인데 최우등생의 87%가 교수가 언급한 내용을 그대로를 받아 적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필기로 시험공부를 한단다. 결과 교수의 말 자체가 정답이고 그 정답을 잘 알고 있는 학생들이  A+ 성적을 따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여러가지 참고자료를 찾아 푹넓게 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니 최우등생들의 방식대로 해 보았더니 거짓말처럼 성적이 올랐다. 결국에 그 학생은 공부가 재미없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학교 교육시스템이 학생들로하여금 질문을 멀리하고 비판적 사고를 상실해 버리는 정답형 학생으로 만들었다.    .유태민족은 세계인구의 0,25%로 력대 노벨상 개인수상자의 22%와 미국 억만장자의 40%를 차지한 위대한 민족으로 그들의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은 우리와는 거의 반대이다.   그들에게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런 문화가 인재를 배출한 비결이다. 아버지는 아직 학교에 다니기 전의 자녀와  “탈무드”를 펴놓고 서로간 번갈아 관련 내용을 읽고 론리적 공격과 방어를 반복한다. 지고 이기고는 관계없이 자식의 지혜와 사고력을 풍부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부모는 자녀교육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 질문이다. 자녀가 하학하면 부모는“오늘 뭘 배웠나?”를 묻지 않고 “오늘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나?”를 묻는다. 이렇게 좋은 질문을 하는 학생이 그 학급의 리더로 된다.    그렇다면 질문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질문이 없다는 것은 지적 호기심이 빈약하다는 것, 질문이 사라졌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의문이 없다는 것이다.   의문이 없는 것은 “비판적 사고”가 결여한 것이다. 누구나 당연한 현상에 “정말 그럴까?”는 의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성장과 발전이 있어 새로운 것이 탄생될 수 있다. 비행기, 내피없는 타이어, 휘발유 없는 라이타...는 “... 새처럼 날수 없을가?”  “... 공기를 주입하지 않으면 안 될가?”,  “...휘발유가 없어도 안 될가?”...는 가지가지의 현상에 호기심이 많은 “엉뚱한 사람”들로 창조되였다. .   지적인 호기심으로 수 없는 “왜?”를 풀려면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만큼 지식이 있을 때 “지식의 공백”을 점점 더 느끼며 더 알고자는 욕구가 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연히 독서이다. 독서로 습득한 다양한 지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 호기심의 세계에로 이끈다. 그래서 세계의 문은 “질문”을 통해서 열린다고 한다.   독서는 우리들에게 지식의 부재를 알게 하고 실제로 느끼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지적인 호기심을 갖도록 한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고 본 것만큼 느끼고 느낀 것만큼 쓰고 행동한다.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주장들이 충돌하게 되며 그 충돌 속에서 살아남은 독자가 비판적 사고라는 엄청난 무기를 얻게 되며 그에 따라 비판하는 방법도 알게 된다. 비판적 사고는 독서를 통해 얻은 지적 보물이다.  지적인 호기심, 비판적 사고와 함께 독서가 잃어버린 질문을 되살릴 수 있기에 지적인 호기심을 느끼는 당신이 당연히 “질문”을 하면서 “질문”으로 세계의 문을 연다.     2008년에  이스라엘 주한국대사로 부임된 투비아 이스라엘리(Tuvialsraeli.55세) 는 유태인의 특성을  첫째는 독서, 둘째는 모든 것에 의심을 품고 기존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 셋째는 독립심과 자기희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라면서 한마디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라고 하면서 한국인들의 자녀교육에 이런 조언을 하였는데 우리에게도 귀감으로 된다.   ㅡ한국의 경제적 성공에 교육제도가 핵심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바 없다. 다만 한가지 개선을 바란다면 유태인들의 전통 교육법인 “질문교육”을 강화하였으면 한다.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더 좋은 답변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교육의 핵심요소다. 책이 물고기라면 질문과 토론은 낚시법이다.  ㅡ 다음으로 지적할 점은 독서이다. 요즘 한국인의 독서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위험한 일이다.   오기활  
286    우리 동네 골목 풍경선 댓글:  조회:4094  추천:0  2019-08-18
‘인생 70 고래희’ 라고 하던데 내 나이가 벌써 73살 된다. “아이들은 날(日)이 빠르고 해(年)가 늦고 로인들은 날이 늦고 해가 빠르다”는 말과 같이 실로 감짝 사이에 한해가 지나니 말이다.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늙어서는 추억으로 산다더니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지나간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어린 시절 우리 사는 동네는 층집이라곤 거의 없다. 모두가 20여평방짜리 단층집에서 살았다. 게다가 줄집이고 집 면적이나 집안의 구조도 대체상 같았다. 심지어 앞마당 구조까지 거의 비슷했다.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에서 중학교 동창들과 함께 있는 필자 량철수(오른쪽 두번째)   그 때 집들은 집과 집 사이의 간벽이 얇은데다가 밀봉까지 잘되지 않아 조용할 때면 옆집의 말소리도 다 들렸다. 집집마다 부엌쪽 앞마당에 자기 집 너비 만한 자그마한 헛간이 있었다. 집과 집 사이를 막지 않고 자그마한 공간을 두고 집집이 이어졌는데 그 공간이 마당이자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이기도 했다. 줄집의 중간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가려면 반드시 여러 집들의 문 앞을 지나야 했는데 집안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누가 지나가는 지를 알 정도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이다. 중간 집에서 사는 남정이 술에 취해 앞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속옷 바람으로 구들에서 대자로 누워 낮잠을 잤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본 젊은 각시가 되려 얼굴이 뜨거워나 어쩔줄 모르는 상황이니. 10여호 가구가 좁은 공간에서 밀집거주하며 이웃사촌처럼 지내면서 큰 말썽 없이 화목하게 보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사회가 바로 오늘 말하는 ‘조화로운 사회’가 아닌가 싶다. 당시 쌀과 식유는 물론 석탄까지 배급(통장)제로 하다 나니 날씨가 덥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석탄을 절약하느라 집에 불을 지피지 않고 밖에서 풀무로 밥을 지어 먹었다. 흙으로 만든 풀무나 나무로 만든 풀무가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되는 생필품으로 되였다. 지금은 민속전시관에 가야만 그런 풀무를 볼 수 있다. 집집마다 석탄콕스도 어지간히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한달에 한집에서 석탄을 400키로그람씩 공급해주었는데 겨울에 쓰기 위해서 여름에는 석탄을 절약해 썼다. 그 당시 매건(煤建)에서 계서(鸡西)탄, 화룡탄, 량수탄을 공급했는데 사람들은 계서탄이 비록 값은 비싸다고 하지만 화력이 세고 콕스가 많이 난다고 했다. 석탄재도 막 버리지 않고 꼭 재무지를 다시 뚜지며 작은 콕스알갱이까지 모조리 주어왔다. 밥 할 때가 되면 집집마다 앞마당에서 아낙네들이 잽싼 솜씨로 풍로(风炉)로 밥을 지었다. 그 때의 밥 짓는 정경이야말로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선이라 하겠다. 연기가 사처에서 스멀스멀 피여오르고 절주 있는 풀무소리에 따라 탁탁 튀는 불꽃, 깔깔거리는 아낙네들의 웃음소리, 구수한 밥향기… 어느 하루 저녁, 네번째 집에서 사는 영봉이 엄마가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하도 이상하여 그 집에 들어가보니 석달 난 어린애가 낮부터 열이 나서 해열제를 먹였는데 열이 더 오른다는 것이였다. 남편은 출장 가고 젊은 각시가 어쩔바를 몰라했다. 영봉이 엄마는 다짜고짜로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뒤늦게야 이를 알고 동네 아낙네들이 제 집 일처럼 병원으로 달려가 어린애 상황을 알아봤다. 의사에 따르면 아기가 급성 페염에 걸렸다 한다. 제때에 구급치료를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번했다며 동네분들은 혀를 찼다. 우리 옆집에는 ‘동네아주머니’라 부르는 분이 살았는데 그 분은 우리 어머니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분은 해주 김씨란다. 마음씨가 곱고 인품이 후한 ‘동네아주머니’는 나를 몹시 귀여워했는데 색다른 음식만 있으면 나부터 챙겨주셨다. 이웃들과 나누던 따뜻한 정, 사람냄새가 나는 아름다운 생활, 한마음 한뜻으로 동네를 살찌우던 그 시절… 오늘따라 인간미가 넘치던 그 때 그시절의 우리 동네가 생각난다.  / 량철수               길림신문  2019-08-1  
285    트렁크 댓글:  조회:3932  추천:0  2019-08-03
   우리집 옷장안에는  내가 시집올때 나와같이 시집온  푸른색 트렁크가 듬직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반세기도 넘게  세월은 지나서도  이 트렁크는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나 역시 이 트렁크가 유달리 정감있고  이 트렁크에 눈물겨운 사연이 깃들어 있기에  해마다 옷과 가정기물들을  청리 했어도 이 트렁크만은 절대 버리지 안(못)하고있다.    비록 오랜 세월속에서 몸체가 낡고  퇴색했지만 우아하게 생긴  트렁크는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귀중한 유품으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있는  함이다.   우리아버지는 일자무식이였지만  부지런하고 착실한 실농군으로 생산대 농사일엔 언제나 선줄군이였고  손재간도 뛰여나 생산대의 각가지 농구들과  크고 작은 건축물들엔 아버지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농사철이 지나 겨울이 되면 산에가  나무를 하서 팔아  자식들의  공부뒤바라지를 한테서 큰 오빠는 우리 마을의 첫 대학생으로, 나도 연변사범학교 고사반을 졸업하고 어였한 인민교사로 사회에 진출하였다. 아버지는 산에 너무하려 갈때면  옷속 갚숙히 술병하나를 넣고 가서는 추위와 배고품을 달래며 나무를 했고 십리도 넘는 도문장마당에  나무팔러  가서도  온종일 밖에서서  나무가 팔리기만 기다리다가  나무가 팔리면  뼈속까지 얼어든  몸을 풀고저  쑈풀(소상점)에 들어가 소금알이나 미역을 안주로 60도술을  마시고는  혼곤히 취하여 빈수레에 누워 잠든채 집마당까지 오시군 하였다. 아무튼 령리한 소들이 절로 집을 찾아 오니깐.   이렇게   아버지는  쉴새 없이 일만 하시더니  끝내  지치고  병들어 1968년겨울에는  식도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두분 오빠가 아버지를 모시고 장춘병원에 가서 방사선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 입원을 시켜 주지않아  한 마을에서 지내던   삼촌벌집에 주숙하면서  치료받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자립할수 있었기에 혼자걸음으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 받았는데 추운겨울   남의집 방에서  항암차료를  받으며  아품을 달랬으니  고통과  외로움이 오죽했으련만  무식한 아버지는 암이란 병명도 모른채 큰병원에서 치료하면 호전될줄로만 알고  참고 견디며  한달동안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게 되였다.  오랫동안  항암치료에 지쳐서 몸은 휘청거렸고 얼굴은 여위여   백지장 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혼식을 앞둔  큰 딸이 시집갈때  트렁크가 없다는 생각으로 병든 몸으로 장춘에서 이곳저곳 돌아  다니며 (그때는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사기 힘들었다) 끝내 멋진 트렁크를 사서 끈으로 묶어서 등에지고 기차에 올라  곡수역전 까지 와서 차에서 내리고는  다시 트렁크를 등에 지고 반시간도 넘게 걸리는  얼름강판길을 걸어서  집까지 오셨다,    나는 아버지가  커다란 트렁크를 등에 지고  휘청거리며  맥없이 집에 들어 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며  생각할수록  목이메여  할말을 잃고   가슴만  아려났다. 이렇게 아버지가 사온 트렁크에 나는 새색시가 되여 입을옷과  례단감을 넣어  가지고 시집을가서 단칸집 방에서 새살림까지 꾸렸는데 트렁크위에 첫날 이불과   알락달락 자부동까지  포개여 올려놓고  코바늘  뜨개로   뜬  새하얀  이불보까지 폭 씌워 놓았더니 제법 산뜻하고  멋스러웠다. 그때  새살림 구경하려 온 친척과 친구분들이 저마다 트렁크를  만져보며 어디서 이리도 멋진 트렁크를 샀는가고 물을  때면 나는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병마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이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끝내 59세의 젊은 년세에 안탑깝게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시집 온지도 어여간 반세기도 넘었지만  트렁크안에는  여전히 나의 첫날 한복과 남편의 첫날 사지양복이 들어 있고 그후  자식들이 시집장가 갈준비로  마련한  모본단 이불등, 사지, 니즈, 베리도옷감 등등 부동한 년대의 류행에 따라 제일 좋고 제일 귀중했던  옷감들은 모두 이트렁크에  보관되였다.  하기에  아버지의 유일한 유물인 이 트렁크는  그냥 옷견지만 넣어 두었던 함이 아니라  발전변화하는 우리사회의 모습과 나날히  향상된  우리생활의    변천사가  차곡차곡 담겨진   력사의  견증물이고 아버지의  가슴아픈  사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함이다.   나는 이트렁크를  볼때마다  아버지에대한 그리움과 애절한 심정을 느껴지며 그때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추모하며 이 트렁크를    보물처럼  아끼로 사랑하며 정중히 모셔 오래오래 보관 하겠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꿈속에서 만남을 약속합시다.                              큰딸     최정금 올림                       2019년 7월30일  
284    그녀가 여러분게 하고픈 충고 댓글:  조회:3867  추천:0  2019-08-02
          미국서 “딸기장미”를 비롯한 2백 여종의 제품을 자랑하고 “딸기 장미 꽃다발”을 특허까지 받은 독창적인 녀기업가 사리스베리는 녀자의 몸으로 사업을 하는 게 힘들지 않는가는 질문을 수업이 받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단호한 한마디 “천만에!”, “녀자라는 사실이 도움이 되였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다. ㅡ 내가 성장기의 세 아들(남편까지 치면 넷)을 돌보려면 집과 학교, 그리고 방과 후 각종활동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녀야 한다.   물론 어렵고 힘겨울 때가 많다. 그러나 그때마다 가족이 제일 우선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그런 생각 덕분에 나는 두 가지 삶을 잘 조화시킬수 있었다. 엄마로서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기회는 단 한번뿐이지만 사업적인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녀는 “내가 할수 있는 일이면 여러분도 할 수 있다”며 “남자건 녀자건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비결로 남을 수있는  충고를 하고 싶다며 이런 글을 올렸다. ㅡ 언제나 직원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직원들은 절대 사장이 자신들을 대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고객을 대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일은 절대 직원에게도 시키지 말라( 그런 일은 그냥 내가 직접 한다. 믿거나 말거나). ㅡ 해마다 1백명 고객을 선정해 감사 카드와 선물을 보낸다. ㅡ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 가지 선택해서 그걸로 돈을 버는 방법을 궁리해 보라.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나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생계도 꾸려갈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ㅡ 고객은 언제나 옳다.   최고의 서비스로 당신이 제품을 뒷받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ㅡ 사회 봉사 활동을 게을리 하지 말라.  공동체는 자신을 돕는 회사를 지지하기 마련이다. ㅡ일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는 가족을 부양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절대로 일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여서는 안 된다. ㅡ 1백 원짜리를 잘 다스리면 1천 원짜리는 저희들이 스스로 알아서 보살핀다.  오래 전에 우리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ㅡ 돈을 잘 감시하라.  오프라는 지금도 모든 수표에 직접서명을 한다.    필자는 특히 그녀가 말하는 “어렵고 힘겨울 때마다 가족이 제일 우선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우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한다. 절대로 일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여서는 안 된다.”는 말에 머리가 숙여진다. 한국 천호식품 김영식회장은 자신의 성공사례로 “가족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힘있다”고 한다.   한국의 성공전도사로 대한민국 전 국민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자만들기운동”까지 벌린 김회장은 1994년 부산에서 현금보유량이 가장 많은 100등 안에 들었다가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들이 파산되여 3년 만에 부산에서 빚이 많기로100등 안에 들었다.   그러다가  김회장을 10년만에 다시 년매출이 500억원대 회사로 재생시켜준 사람들이 가족이였다. 그래서 역경에서 성공을 이뤄낸 김회장은 “어려울 때는 피로회복제보다 가슴에서 울어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힘이 된다. 어려울수록 가족끼리 화이팅을 하고 똘똘 뭉쳐야 한다.”  “가족사랑의 힘으로 무슨 일이든 할수 있다. 이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있는것이 가족사랑이다”고 한다.  가정(족)은 집이 아니다. 집이 있어도 가정이 없는 사람이 있고 집이 없어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 있다. 가정은 생활의 터전이요, 행복의 보금자리다. 가정이 없는 사람은 생활의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뿌리가 없는 식물은 의지할데가 없다. 그래서 늘 방황한다.  가정은 사랑의 기업이다. 사랑의 기업인 가정이 생산하는것은 건강과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세상에 수출한다.  남자는 집을 짓고 녀자는 가장을 짓는다고 한다.  일류 안해가 일류 남편을 만들고 일류 남편이 일류 가정을 만들며 일류 가정이 일류 국가를 만든다.  필자는 그녀의 성공비결이 단 그녀 혼자만의 전매특권이 아닌,긍정적으로 사업하는 모든 사람들의 성공의 비결로 될 것임을 확신한다. 오기활    
283    기자와 고추종자 댓글:  조회:4806  추천:0  2019-07-25
중한수교의 전기인물 한성호박사를 취재하는 필자 시장에서 건강식품으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끄는 파프리카(皇冠甜椒)를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이 뿌듯하다. 가끔씩 친구들에게 ‘기자와 고추종자’를 화제로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내가 처음 ‘기자’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도문중학교 졸업식에 참가했을 때이며 기자의 직업을 좀 더 깊이 알게 된 것은 지난 세기 60년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교양운동을 할 때이다.   1963년 도문중학교(당년 연길현 4중이였음) 제 16기 졸업생으로 그 때는 도문중학교가 초중반과(조, 한족 반), 고중반 (조선족반)이 함께 있는 상당한 규모의 민족련합 학교였으며 초,고중이 겸비한 고급 중학교였다.   그 때 졸업식에서 선배 졸업생 대표로 김동기선배님 (《길림일보》 연변주재 기자,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있었음) 이 장백산에서 국민당 특무를 잡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발언을 하고 본기 졸업생 대표로 당년에 도문중학교 뢰봉학습 모범생이였던 내가 ‘붉은 마음으로 새 농촌건설의 훌륭한 일군이 되겠다’는 내용의 결심발표를 했다.   나의 발언이 끝나자 열렬한 박수가 터지고 김동기선배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기가 주석대에서 받았던 꽃묶음을 나에게 안겨주며 굳은 악수로 고무격려해주었다.   이렇게 나는 그 날 졸업식에서 처음으로 기자라는 부름을 듣게 되였다. 그리고 기자의 직업을 좀 깊이 알게 된 것은 지난 60년대초에 전 주 농촌에서 진행한 사회주의교양운동 때였다.   그 때 나는 고향인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 (달라자)에서 정치 대장직을 맡고 활약했다. 우리 마을에 온 사회주의교육공작대가 바로 키 크고 인물이 잘 생긴 연변인민방송국의 서명준기자였다.   서기자는 우리 마을에 오기 전에 수남대대 고려툰(지금의 흥진)에 파견되였다면서 그 때 고려(高丽)가 너무나 가난하여 잘살아보라고 그가 나서 고려마을을 흥진(兴進)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위풍이 당당한 서기자는 한동안 농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생동한 실례로 기자라는 직업의 사회책임을 감명깊게 들려주었다. 바로 이런 과정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그렇게도 부러워한 나다.   그런데 행운이라 할가, 아무튼 필자가 김동기기자와 서명준기자를 알아서 꼭 20년 만에 《연변일보》사 도문 주재기자로 선정받고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고 기자사업에 충직하고 있다.   1986년 12월 26일에 농촌취재를 할 때의 이야기다.   이날 필자는 남새농사로 한해 순수입을 만원 이상 올렸다는 도문시 홍광향 달라자촌의 남새기술원 리명달을 취재하면서 “농민들의 절박한 수요가 무엇입니까?”고 물었더니 그가.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 청년들을 조직하여 문화실을 꾸려야 하지요”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에게 요긴한 것은 과학기술 전수와 정보입니다. 전 시에서 오이농사 생산량이 우리 집이 제일 높은 셈입니다. 지난해에 오이 포기당 60여개씩 달렸는데 대부분이 절로 떨어지다보니 나중에 한포기에서 평균 10개 밖에 뜯지 못했습니다. 이런 실정을 알고 과학기술 부문에서 단위당 수확고를 높일 수 있는 기술을 농민들에게 전수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료를 보니 산동성 이남현에 외국에서 수입한 단고추 품종이 있다고 하는데 고추 하나의 평균 무게가 250그람, 심지어 750그람이나 되는 고추도 있답니다. 관련 부문에서 우리에게 이 고추종자를 제공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리명달의 말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귀로에 오른 나는 리명달이 농민들의 절절한 요구를 대표해서 말한 것이다고 생각했다.   하여 1987년 1월 10일 《연변일보》에 는 제목의 톱기사를 발표하고 그날 신문과 함께 산동성 관련 부문에 변강 소수민족 기자의 신분으로 산동성에서 변강의 소수민족 농민들을 부유의 길로 나가도록 도와달라는 절절한 편지를 올렸다.   과연 2월 16일에 이남현 남새연구회 주순(朱順)이라는 녀성이 회답편지와 함께 한알에 십몇전씩 팔았다는 미국 ‘황관단고추’ 종자 40여알을 부쳐왔다. 고추종자를 받던 날 나는 기자의 영예감과 자호감으로 흥분되여 밤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40알의 고추종자가 리명달의 몇년간의 고심한 끝에 달라자에 뿌리내려 는 소식이 신문, 방송, 텔레비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몇년 후 이 고추는 길림성 우량고추품종으로 평선되였다.   1988년 2월 12일,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전 시 총화대회에서 시정부의 문건을 발부하여 “도문을 홍보하는데 모든 정력을 바친 오기활기자에게 ‘공을 기입’(記功一次)한다”며 표창하였다.   이 소식을 1988년 2월16일 《연변일보》가 “연변일보사 력사에서 지방정부의 표창을 받은 기자가 오기활기자가 처음이다.”는 내용으로 1면 기사에 올렸다.   기자란 무엇인가?    수십년간의 체험으로 나는 “기자는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하는 ‘백성의 고발자’, 미움을 사랑으로 이끄는 조애사(助愛士), 백성의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며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라고 정의한다.   바로 기자였기 때문에 많은 선진인물과 영웅인물을 제때에 발견하고 홍보하여 사회주의정신문명 건설에 기여할 수 있었고 기자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비리를 폭로, 비판할 수 있었으며 기자였기 때문에 ‘이웃절’을 발기할 수 있었다.   나의 좌우명은 “참다운 언론인으로 금전과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고 흙탕에서 피지만 오염을 모르는 평생 ‘련꽃기자’로 되련다”이다.    오기활  
282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댓글:  조회:4085  추천:0  2019-07-01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누구나 많은 욕되는 일과 어럽고 고통스러운 일을 참아 나가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참을 인(忍)자는 칼날 인(刃)자 밑에 마음 심(心)자를 받힌  글이다. 즉 칼날 인자 밑에 마음심자를 받쳐서 우리 마음에서 지혜의 칼날이 늘 번쩍이도록 참아나가자는 뜻이라 하겠다.  만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참지 않고 제각기 하고픈 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가.  탐욕을 참지 못하면 살벌한 싸움으로, 어리석은 치심을 방한다면 시기과 살인, 방화...등의 온갖 죄업이 만연되여 온 세상은 문란한 죄악의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령지가 밝고 지혜가 많은 까닭에 삼강오륜, 례의 범절 등 도덕과 법률을 만들어 서로가 자제하면서 탐욕...을 방지하는 덕분에 이만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성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고해를 사바세계라고 하셨다. 사바란 감인(堪忍)이라는 뜻이다. 또 성인들은 사바세계의 고통을 여덟가지로 총괄하였는데 그중 첫째가 태여나는 고통, 둘째가 늙는 고통, 셋째가 앓는 고통, 네째가 죽는 고통이다. 이 네가지 고통을 생로병사라고 한다. 계속하여 다섯째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 여섯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리별하는 애별리고(爱别离苦),  일곱째는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인 원중회고(怨憎会苦),여덟째는 오음이 치성함으로써 쫓아 일어나는 오음성고(五隂盛苦)이다.   이 여덟 가지 고통은 부귀빈천과는 관계없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세상에 태여난 이상 이 여덟가지 고통속에서 싫든 좋든 참고 견디며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옛날 당나라의 어느 장씨네 가족이 구대가 한 집에서 살아왔는데 황제가 그 장씨네 집에 행차하시여 묻기를 “한 집안에서 열명의 가족도 불만없이 살기가 어려운데 그대는 무슨 방법으로 구대의 자손들이 한 집안에서 살아 왔느냐?”고 물은 즉 장씨는 아무 대답이 없이 참을 忍자를 백자를 써서 바쳤다고 한다.  이를 본 황제는 감탄하시고 칭찬하면서 많은 상을 내렸다고 한다.    열 백번을 참는 집안에는 항상 행복이 든다.  고인들이 말씀에 “참는 몸이 항상 편안하며 온 집안이 화목함으로써 언제든지 기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참는 개인에게는 성공이 있고 참는 가정에는 화목과 행복이 깃든다. 그러므로 일상속에서의 참는 련습은 곧 자기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참을 인자 셋이면 생명도 구한다”고 한다. 즉 도저히 참기 힘든 상태에서 한번 더 생각하고 한번 더 참는 것이 바로 생명을 구하는 길이요 참는 나 자신이 행복을 얻는 길인것이다.  다만 참음에서 관과해서 안될 점음 참음이 단지 맹목적인 참음으로 그쳐서는 안된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참는 것 자체가 인간 행동의 목표나 틀이 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참음을 위한 참음이란 결국 인간의 사고능력을 무시하는 어쩌면 비인간적인 덕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고능력을 갖춘 령장으로서 주체적인 판단에 의한 인(忍)을 생활화해 나아갈 때 비로서 우리의 생은 행복에 충만된 앞날을 또한 현제를 맞게 될 것이다. 이 밖에 필자는 “참음”과 “용서”를 한 동전잎의 량면으로 추천한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동이 아닌 누구보다도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용서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이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증오의 감정은 자신을 파괴한다.   바다가의 조약돌을 둥글고 예쁘게 만드는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닌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나그네의 솜옷을 벗기는것은 매서운 북풍이 아닌 따뜻한 해살이다. 오기활      
281    젊은 후배를 두려워 하라 댓글:  조회:4615  추천:0  2019-06-01
오륙월의 하루빛이 어디냐, 후배 녀석이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처럼 버르장머리 없이 덤빈다며 기갈을 부리는 선배가 있다면 그러한 선배를 “오륙월의 빛이 하루가 새롭다” 며 무시해도 될것이다.   나이, 졸업년도, 입사년도 등등을 앞세우며 선배라고 강조하는 자는 그자의 능력이 부친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누워서 절 받기로 선배에 대접을 후배에게 강요하는 자도 역시 매 일반이라 하겠다.    그들은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에 선배티를 내면서 후배에게 군립하려고 발버둥지를 하는 꼴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후배가 밀고 올라오면 기득권이 위험받는다고 걱정 하기보다도 젊은 후배들이 새로운 생각을 갖고 있다며 그것을 수용하여 자신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선배들만이 후배들의 존경을 받게 마련이다.    뉴톤에게 바레트란 선생이 있었다고 한다. 바레트 선생이 제자로 맞이한 뉴톤을 가르치며 보니 뉴톤이 수학을 자신보다 잘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바레트가 학생의 자라에 있는 뉴톤을 불러 그대가 설 자리는 교단이고 내가 앉을 자리는 학생의 자리라고 분명히 말하고 나서 뉴톤에게 새로운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나이만 많이 먹었다고 해서 사람이 가야할 길을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쉼 없이 배우는 사람만이 후진을 두려워할 줄을 안다.  공자는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삶의 길을 진실로 밟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음을 잊지 말라며 후배를 두려워 하라고 했다. 모택동 주석은 일찍 자기가 3일만 배우지 않으면 류소기동지에게 떨어진다며 항상 배움에 게으르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진보가 없으면 삶의 맛이 없음을 일러 매일매일 새사람을 만나라는 경구가 있다. 지인들의 어느 모임에서 “당신의 자본이란 무엇인가?”는 물음에 “자기가 같(알)고 있는것, 같(알)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 그리고 매일 새사람을 만나는 것”이다고 답한 사람이 수석을 차지했다고 한다.    공자의 말이다 “젊은 후배를 두려워하라. 먼훗날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만 못할 것이라고 말핤수 있을가?”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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