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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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잡담1] 론리법에 약간 댓글:  조회:3920  추천:128  2007-05-03
잡담 1허동식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가 좋은가? 아니면 쏘련을 대표로 하는 사회주의가 좋은가? 민간에 뒤숭숭한 쟁론이 좀 성행했을 때, 미국의 제도에도 미흡한 점이 많다. 례를 들면 예사예사하다 하는 식의 뉴수도 아니고 학술론문도 아닌 잡담글을 꽤나 읽어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의 선거법을 두고 선거과정에서 발생되는 경제적인 랑비와 원가가 엄청나기에 미국식 선거법이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도 아닌 결론을 접해야했을 때의 나의 기분이 아주 애매했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중국의 경제개혁과 사회개혁이 이만한 정도에 이르렀고 사회적인 활상이 한단계 더 나아가려면 행정개혁을 비롯한 사회체재개혁이 필수품로 되여있음은 세인이 다 아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가끔은 디디장걸음(原地踏步)의 진전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개혁이란 등속운동이 아님은 알고 있고 또 우회적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은 내가 제일 괘씸하게 느껴지는것은 오는날에 이르기가지 우리의 주위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두고 리유도 아닌 리유를 만들어서 글을 쓰고 언론을 만들고 하는 그런 <<분식가>>들이 엄청나게 기생하고 있다는 일이다. 례를 들면 언젠가 개혁의 진전에 대하여 민간적인 원성이 조금 높아질 때, 구쏘련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이 실패한 실례를 들어서 우리의 온건한 개혁의 좋은점만을 크게 강조하던 일도 사실은 객관사물의 존재법을 따르는 론리법(逻辑学)의 규칙을 멀리 떠나 어떤 언행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근거와 증명의 합리성을 전혀 상관치도 않고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중국식 문화폭행을 하는 <<분식가>>의 걸작이다.요즘은 우리 주위에 있는 어떤 분들속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론할치라면 모든 원인을 사회체재에 밀어버리는 몹쓸 습관이 성행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일들은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 어떻게 좋은 대책이 없을가? 하는 사회적인 의문이 있으면 규정이 그런데, 제도가 그런데, 체재가 그런데 하고 입을 닦고 돌아앉아버리는 분들이 꽤나 많아지고  있다. 민주화의 진전과 사회발전이라는 거물앞에서 감히 사물발전의 합법성과 합리성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다만 규정이란 제도란 체재란 내가 만든게 아니라는 리유 하나로 모든 책임을 버리려는 그들의 고약한 심사가 확연하기는 하지만 규정도 제도도 체재도 사람이 만들도 운행하고 감독하고 개진한다는 언론과 론리법 앞에서는 그들은 묵묵부답이다.올해 잘 팔리는 책이라고 하는 于丹교수의 <<론어를 읽은 심득>> 한권을 사서 읽고보니 나는 감슴 어딘가에 밑창이 빠져나간 느낌을 받는다. 물론 <<론어>>의 확실한 의미에 대하여 아는것은 별로 없는 주제이지만 언감생심 한마디 하면 세상에는 아직도 <<론어>>를  형세를 따라 정치문화를 분식하는데 사용하는 교수도 있다니 가슴을 치면서 한탄하고 싶다.중국은 론리법이 결여된 나라일가? 론리의 전개가 모든 론리법칙을 떠나서 다만 실리를 위해서라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도 되고 하고싶은대로 해도 되는 나라일가? 신장을 비기는 시합에 와서 그 사람 키는 큰데 몸무게가 없잖아? 달리기를 하는데 그 놈이 1등은 했지만 너무 밉게 생겨먹었어! 하는 식의 평판을 하고 언론을 통해서 권위를 통해서 문화폭행을 거행하는 <<분식가>>들이 언제까지 살판칠가고 고민을 해본다. 
39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많이 실패했다는 그 원인에 대한 상상 댓글:  조회:2947  추천:122  2007-04-16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많이 실패했다는 그 원인에 대한 상상허동식밥먹고 할일이 없어 조금 생각을 해본다. 우선은 하기 상상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인 법적인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고 싶다. 그리고 읽어주시는 분들이 제발 참고로만 보아주시면 고맙겠다.   1. 한국기업이 중국에 진출하여 운영하는 항업과 항목들이 돈을 벌만한 항업과 항목이 적다. 한국에서는 지탱하기가 어려운 기업들이 중국은 인금과 땅값이 싸다는 생각을 유일한 근거로 남들이 다 해먹은 로동력밀집형의 제조업으로 중국에 진출하고나면 상품의 원가를 인하시키는 면에서 중국의 기업을 대등하기가 어려우며 아무런 우세도 없다. 2 한국기업인들이 중국을 너무 깔보고 모른다. 중국은 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중국 나름의 부유한 점과 우점도 있고 또 신문지상에서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정책과 운영도덕도 있지만은 중국식 잠재규칙(潜规则)이 엄청 존재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례를 들면 땅값이 싸지만은 대신 향장이라든가 촌장에게 드리는 돈이 땅값보다 많다는 것) 3 외국의 오단을 받을 생각만 하면서 중국시장은 상품의 단가가 싸기에 남을것이 없다는 판단하에서 중국시장을 개발하는데 힘을 쓰지않느다. 4 대만 홍콩 그리고 화교들 기업과 비교하면 통역과 관리일군을 사용하는 면에서 비용이 높다. 5 장기적인 타산이 적다. 중국에서 금방  크게 벌려는 욕심뿐이고 오래동안 눌러앉아 더 크게 더 넓게 생각을 굴리는 기업이 적다.(주요원인은 주식회사가 적고 개인회사가 많다?.) 6 중국의 각 령역에(특별히 국책과 지방정책) 이르는 조사와 연구가 필수적임을 알면서도 지키는 분은 적다. 7 중국은 변증의 나라이고 변증법의 나라임을 귀뜸하고싶다.   이상 두서없는 내용을 참고의 참고로.  
38    방문취업제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2695  추천:126  2007-04-05
                         방문취업제에 대한 생각                                                              허동식나도 한국에 몇번 다녀왔다.회사일로 출장을 다녔기에 하고싶은 려행도 못했고 또 번마다 친구분들의 신세를 가득 지고 돌아온 탓일가  언제면 또 한국행을 하는가는 전화를 받으면 예 앞으로 돈 좀 있으면 배낭려행이나 할렵니다고 대답을 하지만 한국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받을 때마다 한국공무원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으면서 조선족이세요 하는 물음에도 한족인것처럼 알아듣지 못하는듯한 표정을 보이고 입국허가 도장을 받고나서는 내 도망을 안가니 너무 그러지 마시요 한마디 넌지시 던지여 한국공무원의 성난 얼굴을 아주 재미있게 쳐다보던 일들이 상기된다. 앞으로도 그런 질문을 받고 그런 눈길을 받는다면 한국땅을 딛고싶은 욕심이 적어진다.     살아가면서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잘 알고 있다.한국의 국민소득과 중국의 국민소득이 현저한 거리를 두고있는 현실앞에서 우리는 온갖 수단을 가리지않고 한국에 가려고 버득거리고 있고 한국은 또 나라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동포들에게 적으나 많으나 례의와 혜택을 베풀려고 노력은 하고있음은 사실이다. 그래서 방취제라는것도 출현되였고 실행법사항이 리상적이 못되여 동포사회의 물의를 빚어내면서 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처를 남기기는 하지만 우리는 한국의 입장에서 방취제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성도 존재한다.     어떤 나라든 문제거리와 근심이 없는 나라는 없다.한국도 마찬가지다. 국내로서는 빈부의 차이가 심하여 여러가지 경제문제 사회문제 정치문제 때문에 골머리가 아플거고 6자회담을 둘러싸고 라렬되는 대북문제 한일관계 한중관계 등등이 <<집집마다 말못할 사정이 있다.>>는 중국속담의 진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 있어서 중국에 사는 동포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어떠한 책을 취하는가 하는것은 별로 큰 사회문제점도 아니고 정치문제점 아니다. 다만 그들이 정치를 운행하는 작은 장기쪽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적인 력사적인 인륜도덕적인 책임이라는 천평에나 올려놓을가 말가 하는 문제점에 지나지 않는다.     헌데 우리는 잘 살지를 못하니 방취업에 신명이 나고 그러다가 또 격분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제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 엄마 말씀을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정인갑교수의 이야기하신 자강책이야말로 우리가 平常心을 지니고 살아갈 방법이다.   
37    홍콩반환과 대만해협 그리고 반도통일(허동식43) 댓글:  조회:2017  추천:162  2007-03-30
          홍콩반환과 대만해협 그리고 반도통일                                             허동식   90년대 초엽에 홍콩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많은 홍콩사람들은 돈밖에 모르고 대륙에 대한 정감의뢰감이 적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했다. 97년에 홍콩반환이 실현될 때 내가 아는 홍콩인들이 일부는  미국과 카나다 그리고 호주로 이민을 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수많은 대륙인들은 그들을 무시한다든가 욕한다든가 등 행위를 삼가했다. 국책을 따르느라고 그랬을가? 대륙은 인구가 많다는 배포심에서 그랬을가? 아니면 중용문화의 아량에서 그러한 마음가짐을 지녔을가? 잘 모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현재 대륙과 홍콩은 <<1국2제>>의 혜택을 받아 기본은 잘 정진되고 있으며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는 현상도 있고 심지어는 대륙으로 입주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대륙인과 홍콩인들의 마음소통이 많이 좋아졌음을 느낀다. 하문으로 가면 배를 타고 금문군도에 속하는 작은 섬 하나를 오르지는 못하고 눈길로 구경할수는 있다. 배가 하문부두를 떠날 때에는 륙지에 집채처럼 만들어놓은 거폭의 <<1국2제로 조국을 통일하자>> 라는 정치구호를 쳐다보았느데 금문군도의 작은 섬을 바라보면  <<3민주주의로 조국을 통일하자>>는 거폭의 선전구호가 보인다. 그래서 정치선전의 애매함과 허구함을 조금 느끼게는 되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무슨 주의로 하던지 통일만 하면 중국인들의 감정완결도 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활무대가 이루어져서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대만인들과 거래를 하여보면 90년대 초엽에는 적관을 대륙에 둔 사람들이 대륙에 대한 정감의뢰감이 크지만 국민당의 토지개혁시기에 땅을 내놓아 부자로 된 대만토착인들은 대륙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보건대로는 현재 대만인들은 돈이 많은 사람은 통일을 별로 원하지 않고 좀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통일을 원하는듯하다. 돈이 많은 사람은 빼앗길가봐 가난한 사람은 통일을 계기로 신세개변을 꿈꾸느라고? 잘 모르지만 우리 대륙의 민간인들은 돈이 있든 없든 통일을 원하고 있으며 또 통일을 원하는 대만인과 통일을 원하지않는 대만인에 대하여 크게 차별하지는 않느다 회사에서 받아드리는 대만단체에 가끔 대만독립분자도 있기는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의 가이드와 기사들은 다 같은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해주고 민감한 이야기는 되도록이는 삼가한다. 반도통일에 대한 한국인들 태도를 생각해보고싶다. 정확한 사회조사와 통계수자는 없지만 나의 허약한 경험과 판단으로 보면 돈이 있는 한국인들의 반도통일에 대한 생각이 좀 애매하다. 야, 그 많은 거지들을 어떻게 먹여살리겠나 하는 서늘한 이야기도 내뱉는 사람도 만나보았으니 나로서는 빼앗길가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심리를 리해해주고싶다. 돈 없이 조금 가난한 한국인들은 살기가 힘들어서인지 반도통일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고 또 감성적으로 반도통일을 원하기는 하지만 소위 <<정치민족>인데도 크게 열성을 보여주지 않는 그들의 심리를 아직 알길이 없다. 물론 원해서 반도통일이 실현되는것도 아니고 원하지않는다고 반도통일이 도산되는 일은 아니지만  동북아의 정세가 소국의 의지로서는 좌우지못되는 현실앞에서 우리는 적어도 반도통일에 대한 마음가짐을 아름답게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쪼박글 하나를 갈겨본다.                    
36    동년시절 나와 돈 댓글:  조회:1658  추천:116  2007-03-29
3전이면 얼음과자 하나를 사먹던 소시적에는 철길에 버티고 앉아 돌틈 사이로 흘러내려가는 1전짜리 2전짜리 5전짜리 동전을 건져내는 꿈을 엄청나게 꾸었던 기억이다. 교환경제가 빈약했던 시골에서 애들이 느낀 돈의 용도란 기껏해야 사탕 과자를 싣고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던 <<마차이동상점>>의 물건을 살수 있다는 그런 정도였으니 그때에 가난은 했지만 돈에 대한 생각이 퍽 단순했기에 괜찮기도 했었다는 판단을 해본다. 그뒤 소학교를 다니면서 돈이 있으면 <<마차이동상점>> 대신 생겨난 공소합작사에 가서 공책도 사고 십몇전이면 카 하고 맛좋은 사이다도 사먹을수 있다는 경험이 쌓이여 유년시기보다도 돈의 용도를 많이 알고 더 좋아하게 되였다. 어느 초겨울에 어째서인지 갑자기 배가 아파서 부친께서 나를 생산대 소수레에 싣고 공사마을로 갔는데 나는 병원 대문을 들어가기도 전에 무엇을 좀 사달라고 떼질을 해서 끝내는 합작사의 신바닥과자와 귤을 얻어먹고나서 아마도 주사 맞고 약먹고 하는 일도 무서웠던지<<아버지 ,내 배 아니 아프꼬마 , 집에 가깁소 >> 해서 과자와 귤로 배 아픈 병을 치료한 전설적인 이야기도 엮은적이 있었으니 얼마나 먹고싶으면 그랬을가고 변명을 해본다.( 이런 연고가 있어 그런지 운청남시인의 소시적에 맞형의 잔치날에 귤을 얻어먹은 일을 그린 시 한수를 아주 즐겨읽는다.) 또 설이면 큰 매형이 주는 20전으로 100발짜리 폭죽을 사다가 하나하나 풀어서는 남들의 종종 걸음뒤에 터뜨리여 누군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구경하며 배를 끌어안고 좋아했던 장난질을 할수 있었다.그 때 우리 조선족 애들은 폭죽을 화약 줄에서 풀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담배장에 불을 달어서 들고다니면서 하나하나씩  터치웠느데 << 일년을 가난하게 살아도 설만은 가난하게 보내지 않느다>>(宁穷一年,不穷一日)라는 생활신조를 지키는 동네 한족집의 애들은 몇백개짜리 폭죽을 설날만이 아니라 정월 보름에도 줄배기로 터뜨리여서 아주 부러웠었다. 그 꿈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몇년전에 설에 계림으로 놀러 갔는데 현재는 폭죽을 금지하는 중국의 많은 도시와는 다르게 계림에서는 도시 주변의 큰 광장 하나를 폭죽을 마음대로 터뜨리는 장소로 지정하고 있어 밤에 광장으로 갔다가 아들놈과 둘이서 물동이 만큼 하고 하나에 350원 하는 제일 크고 비싼 花砲 에 눈독을 드렸는데 배동했던 우리집 재정부장(집사람)한테 욕만 실컷 얻어먹고 그날 밤 그 350원짜리를 사서 품에 안고 걸어다니던 꿈만으로 에따지웠다. 그래서 내가 동년시절에 걸렸던 폭죽부족증이 지금도 남아있음을 스스로 판단을 했다. 동년시절의 돈과 나의 관계를 총결하면 대답은 얼음과자와 폭죽 때문에 돈을 좋아했고 그리워했다는답이 나온다. 사실 돈의 사용가치에 대하여 간단하게 유치하게 알았던 시기이다.    
35    기억 1976년 댓글:  조회:2312  추천:182  2007-03-25
                                           기억 1976                                                                     허동식1976년이면 내가 만 아홉살 되는 해이다. 련발적인 사건들이 중국인들의 마음과 중국의 운명을 크게 흔들어놓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3월에 개학을 하니 <<우경번안풍>>을 비판한다고 우리 코흘리개 애들도 비판문장을 지어서 흑판보에 가득 붙혀놓았다. <<우경번안풍>>이란 무엇인지 누구도 몰랐지만 비판문장을 쓰면서 어느 정도는 글짓기 련습도 했고 글자를 곱게 쓰느라고 진땀을 펄펄 흘렸다. 4월인가?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적의 신문은 거의 매일이다싶이 1면이 나라 지도자들의 행적을 보도한 글과 사진이 실렸었고 또 인민공사의 영화방영대가 순회방영을 하면 주은래 총리가 외국손님을 만나는 뉴스 영화도 많이 보여주었길래 세상모르는 애들도 주은래 총리의 모습은 잘 알고 있었다. 인자하신 주은래 총리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니 슬퍼해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사실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는데 슬퍼하지 않으면 반동이라는 욕을 먹을가봐서 슬퍼하는척 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청명은 성묘날이라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챙기여 좀 먹고나니 또 무슨 천안문사건이라는것이 발생해서 학교에서는 애들을 들볶으며 비판문장도 많이 쓰게 했고 <<소근장을 따라배우>>는 노래도 힘차게 부르게 했다.(유감스럽게도 소근장이 어디에 있는 동네인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소근장의 무엇을 따라배웠던지도 기억이 없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지 얼마 안되여 또 주덕위원장이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주은래 총리 다음에 주덕위원장이 서거했으니 어른들이 올해는 무슨 해인가고 좀 수근거린다고 느꼈는데 얼마 안되여 또 모주석이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우리는 더욱 큰 슬픔에 잠기고말았다.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검은 완장을 장만해서 팔에 걸었고 작은 흰 종이꽃을 가슴에 걸고 공사마을에 림시로 만든 추도장에 가서 경례를 하고 묵도를 하는 식으로 모주석을 추모했다. 우리 학생들은 학교의 통일안배로 난생처음 추도라는 회에 참가했느데 우는 애들이 참 많았다. 울고는 싶었고 또 슬펐지만도 무슨 영문에선지 나는 눈물은 못흘렸던 기억이다. 다행이 선생님에게 저 놈이 모주석 추도장에 가서 눈물도 아니흘리더라는 고자질을 하는 애가 없어 그럭저럭 고비를 넘겼다.    그 다음 달인가? 일요일날 엄마와 같이 발로 디디는 방아를 찧고 있느데 동네 어른들이 야, 모주석 부인 강청을 잡았다오 하고 서로 소식을 전했다. 처음에는 요언날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선방송과 신문을 통해 <<4인방>>을 분쇄했다는 소식이 확인되였고 우리 애들은 또  <<4인방>>을 비판대회도 열었고 의미도모를 비판문장을 엄청나게 썼다.     나느 편벽한 작은 시골에서 이렇게 1976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동년이였던 나에게는 거의 무의미한 한해였다. 비판문장을 쓰고 슬픔에 잠기고 그리고 공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지금은 애들마저 정치에 내모는 세월과 굿두바이를 했다  이것도 중국이 진보했다는 하나의 유력한 증거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국민들이 자기의 운명을 어느 개인에게나 소수인의 집단에 맡겨야 했던 이야기도 서서히 종말을 보인다고 생각된다.
34    우리말 사투리를 위한 변명(허동식39) 댓글:  조회:2110  추천:143  2007-03-25
                       우리말 사투리를 위한 변명                                                                    허동식연변 조선족들이 안쪽에 사는 남도치들의 아빠, 밥 먹어라 하는 식의 억양을 웃었고 어른이고 애들이고 남자고 녀자고 데꺽하면 엠나 에미나 하는 갱명치못한 말들을 입밖에 내뱉는 신세이면서도 가시나 계집애 하는 소리들은 귀에 거슬리게 받아들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남도치들은 연변에서는 돼지고기를 도투고기라 하구 개장국을 개탕이라 하더라, 그리고는 연변인들 앞에서 어느 정도는 야유의 정서도 내비치면서 겠습둥? 꾸마! 등 접미사 사용법을 흉내내느라고 진땀을 펄펄 빼었었다. 같은 종족에 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면서도 부동한 사투리를 구사한 덕택으로 우스운 일도 좀 두었었고 심지어는 오해까지 발생했었다. 그 원인은 서로의 래왕이 적었기 때문이였고 또 서로가 아량이 적었기 때문이였다고 생각된다. 살다가 오늘날에는 가끔 허선생 고향이 어디세요? 억양이 북쪽 같은데 라는 질문을 받는 사례가 있다. 예 함경북도입니다. 억양이 서걱서걱 합지 퍼그나 거칠꾸마. 하는 우스개식으로 대답을 해놓고는 억울한 생각끝에 나는 괜히 <<삼십년은 강 동쪽 삼십년은 강 서쪽>> 하는 중국속담 풀이을 못해주었다는 후회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우리는 북쪽 말씨를 표준어로 배웠는데 당신들은 영어권과 좀 사귀여서 외래어도 척척 잘 쓰지만 영어권과 직접적인 래왕을 못한 우리는 그렇게 <<간단>>한 외래어도 모래밥을 씹듯이 삼키고 있다는것,또 언어도 경제실력을 안받침한다는데 우리도 잘 살 때가 있겠지 하는 식으로 그 때가 오면 우리 북쪽 말씨가 표준어로 될지도 모른다는 어린애식 심리반발을 나로서는 거절하기가 조금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가끔 북쪽 말씨가 거치르고 공산국가의 언어는 공격성이 강하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나면,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만도, 오늘은 연변말과 북쪽 말을 위한, 아니  우리말 사투리들을 위한 변명을 꿰하고싶다.     언어에 대한 정리도 좋고 표준말씨를 규준한 언어통일도 좋기는 하지만 나는 사투리가 출렁거리는 현상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단일민족으로서 문화적인 구성이 단일한것이 우리의 약점이기도 하다. 또 어떻게 보면 인구가 적은것이 우리의 가벼운 부위기도 한데 ,오늘날까지 여러가지 사투리가 그나마 조금은 생생하게 남아있고 이런저런 오해라든가 상술한 불필요한 심리반응까지 가지게 되지만 여러가지 사투리의 존재를 근거로 우리도 꽤나 큰 종족이구 사람종자두 많아서 사는게 재미있다는 결론을 남들에게 보이고싶다. 그리고 또 언감생심 우리도 그저 그렇게 간단한 종족은 아니다 하는 식의 자존심과 자신심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조선과 한국의 언어가 어떻게 구별되고 중국의 조선족언어와 한국어가 어떻게 구별되는가는 질문을 받을지라면 나는 아예 아닌 보살하고 당신 광동말을 전혀 못알아듣지? 아마 북경말과 광동말만큼의 구별은 될거야! 하고 으름장도 아닌 으름장을 한다. 돌아서서는 가만히 제 입을 딱 벌리기도 한다.     이상 두서없는 글을 우리말 사투리를 위한 변명으로 읽어주시면 크게 쎄쎄하겠다. 또 쌘큐하겠다.
33    이 겨울에 동년의 겨울놀이를 돌이켜본다 댓글:  조회:2043  추천:129  2007-03-20
겨울에는 한가한지라 친구들끼리 돈내기 마작을 좀 엄청나게 했다. 좋은 습관은 아닌줄은 알지만도 <<중국오락문화의 으뜸>>이고 <<변증법의 교과서>>이라는 나의 평가를 받은 마작놀이, 하여튼 놀고나면 허리가 시큰하지만도 재미는 있다. 마작을 하고나면 흘러간 동년이 생각힌다. 내 아이적에는 친구들과 같이 어떤 놀이를 했던가? 연변의 겨울은 춥고도 길기에 눈쌓인 산등성이에서 썰매를 타던가 얼음판에서 <<애도>>를 탄든가 손을 홀홀 불며 딱찌치기 한다든가를 내놓고도 실내놀이도 많이 했었다.      실내놀이로서 첫번째로 기억나는 놀이는 이야기놀이다. 집구석에 주렁주렁 모여앉아 애들끼리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놀이인데 책도 얼마 읽지를 못했고 세상구경도 얼마 못했으니 한다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였을가? 거의가 애들이 쥐꼬리만한 상상력을 리용하여 꾸며낸 이야기로서 고향말로 <<주겁에 들지 못하는 >> 그런것들이였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야기인데. 내용은 애들이 개미굴을 파보니 구멍이 점점 커지더라는걸, 그래서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않고 수십메터 파고들어가니 끝내는 특무들이 우글우글하는 지하궁전 하나를 발견했고 해방군들과 민병들이 특무굴을 크게 소탕해버렸다는. 누가 꾸면낸 이야기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또 어느 정도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 때문에 내 또래들이 좀 골탕을 먹었었다. 다음해 봄에 우리보다 큰 애들이 우리를 이끌고 산비탈에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는데 그 이야기 힌트를 받아  동굴을 크게 만들어서 마을의 전기가지 끌어들여 큰 지하왕국을 건설한다 했었다. 그래서 우리 열몇명이 이틀간 크게 고생하면서 거의 3메터 깊이의 작업을 완성했느데 산비탈 우에 있는 달구지길이 무너진다고  생산대원들의 큰 야단을 당했다. 그리고  또  지하궁전공정이란 사실 우리의 힘에 너무 부치는 일이여서 우리는 그 위대한 공정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로 기억나는 실내놀이는 윷놀이였다. 열콩으로 만든 윷은 모와 슝이 잘 나오지 못하고 뒤똘만 나오는지라 아예 싸리나무 가지를 절반 쪼개여서 윷을 만들면 가마목 부근의 공골에서 모와 슝이 제법 잘 나왔다. 허지만 아무런 내기도 걸지 않으면 너무 재미없기에 한판 끝나면 어른들한테서 당한 <<똥 먹이기>>를 했다 .이긴 편이 진 편을 상대로 주먹을 등위에 감추고 윷의 개수를 선택하여(빈타지도 포함) 내놓고는 몇개 있냐 물으면 대방이 알아마추면 끝나고 알아맞추지 못하면 알아맞출 때까지 개똥에 사람똥에 피똥에 하고 수두룩한 똥을 먹이고는 나중에는 장싸재 피똥이라는것까지 먹였다. 후에 알고보니 장싸재란 동네에 살던 한족사람 张瞎子가 무슨 일로 불타죽었는데 그 주검이 까맣게 타버려서 아주 흉했던지 동네에서는 죽은 사람까지 끌어넣으면서 윷놀이를 했던것이였다. 진짜 똥은 먹어보지도 먹이지도 못했지만 운수가 사납고 기술이 약하면 너무 당하는 판이라 지고는 도망가는 애들도 더러 있었고 윷놀이 <<똥 먹이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가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헌데 재래적인 윷놀이는 너무나 단조로워서 후에는 큰 종이장우에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기선과 비행기 등 교통수단을 그려넣고 정해진 선로에 간혹 지름길도 만들고 후퇴하는 길도 만들어놓은 윷판이 퍽 류행했던 기억이다. 현재도 그림이라곤 전혀 모르는 내가 비행기는 어느 정도 그릴수 있는게 아마 그적에 윷판을 좀 그려본 덕택이라고도 생각된다. 세번째로 기억나는 실내놀이는 화투치기와 트럼프 놀이다. 화투는 현문화관에 미술을 담당한 분이 그려서 간단한 인쇄만 해서 동네 친척집에 놓고 한장에 십전씩 팔었었다. 그림 한장에 48장의 화투가 그려져있어 반성품식이였느데 좀 부지런한 애들이 풀을 끓여놓고 낡은 트럼프장을 오려서는 거기에 화투그림을 하나하나 바르고 나중에 퉁기(清漆)칠까지 하고나면 한 이틀간은 신고해야 했다. 나도 한번은 그렇게 화투 한세트를 제작했느데 셋째형이 어떻게도 나를 구슬려서 내가 놀아보지도 못한 화투를 제가 몇일 놀고는 나한테 돌려주었던 기억도 난다. 화투란 노는 방식이 기껐해야 <<펄 따기>>여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고 재미가 적었던지 후에는 우리는 트럼프 놀이를 더 즐겼었다.누구던지 트럼프 한셋트만 있으면 꽤나 득세나 한것처럼 우쭐렁거리며 애들을 모여놓고  <<3자번지기>>  또는 <<썸지(升级)>>라고도 하는 놀이거나 도둑빼기를 하면 어느덧 방학이 다가고 개학을 맞이게 되였었다. 소학교 5학년때부터였던가? 우리는 내기가 없는 트럼프놀이가 싫어서 집의 석냥을 들고 나가 <<갑오배기>> 또는 <<싼따이>>로 석냥개비 내기를 했는데 애들의 손때가 너무 묻어서 석냥개비를 마찰해도 화약에 불이 일어나지 않으니 종종 엄마의 야단도 맞았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나의 동년. 그 때 모여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현재는 한국으로 러시아로 많이 나갔고  <<팔팔하지 못한 >> 몇이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언제이면 또 그들의 얼굴 한번 더 볼수가 있을가? 그립다.
32    문학작품에 대한 평론과 문학인인격에 대한 평론 댓글:  조회:1685  추천:149  2007-03-19
좋은 건축물 하나를 두고 보는것으만으로도 누리는것으로만 만족을 느껴도 괜찮다. 구태연히 건축설계자의 사소한 일까지 알아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훌륭한 영화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다. 스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운운지정까지 적라라하게 기록하여 대중들에게 선을 보이는 일은 일부 오락계 기자들의 생존수단이기는 하지만 가벼운 웃음 하나로 슬그머니 지나쳐버리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평론도 문학작품만을 거론하는 편이 신사다운 일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사람이니 인격적인 흠집도 있기 마련이고 생활고도 있기 마련이고 감정파렬도 있기 마련이다. 또 문학인의 취미와라든가 가치론 등도 평론자와는 크게 거리를 두었을지도 또는 손바닥과 손등처럼 완연 다를수도 있겠다.그래서 문학사적인 평론도 아닌데 문학인의 사사로운 일가지 건드리며 옴니암니 캐고드는 일은 어딘가 우스운 일이다. 윤리주의를 리상화로 추구하는 동네여서 그런지 아니면 요즘 무슨 바람이 잘못 불었느지 문학작품 평론에는 문학인의 인격을 크게 작게 건드리는 글들을 읽어보게 된다. 원래부터 큰 잔치도 아닌데 잔치에 오려는 사람들의 사적인 일들을 다룬다면 잔치에 참석하려는 인원수가 자연히 적어질거고 또는 마음을 든든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서로 두던해주는 패를 무어서 잔치를 들락날락할것이다.그러면 잔치는 명색이 잔치이지 루추한 싸움터로 변해서 세인들 웃음거리를 하나 더 만들기가 아주 가능하다. 추어올리기나 내리깍끼나 되도록이는 문학인의 인격에 대한 평가거나 건드림이 없도록 진행함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문학평론은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을 리지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지 문학인에 대하여 감성적으로 좋거니 나쁘거니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일은 절때 아니지 않느가고 이 쪼박글을 위하여 변명해본다.  
31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온 돈을 댓글:  조회:2227  추천:87  2007-03-19
      필리핀은 세계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가는 로무수출 나라이다. 필리핀의 해외에서 로무에 종사하는 인구가 700만명이며, 년간 로무수입이 75억딸라로서 로무수출이 국민경제를 거의 좌우지한다고 한다. 필리핀의 로무수출은 20세기 60년대로부터 시작되였으니 오늘날에 이르는 40여년이라는 동안에 외화를 적잖게 챙겨을것이고 국민경제도 많이 발전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사실은 그렇지않다. 로무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원시자본축적을 완성하는 흉내만 내고 현재도 후진국 딱지를 벗지못하고 있다. 필리핀인들은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들인 돈으로 먹고 마시고 쓰고 탕진했느가? 그들의 소비구조와 투자경제운행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필리핀의 이러한 상황은 세인들의 거울로 되여있음은 틀림이 없다.        작년 겨울에 연길행차를 했다. 2년사이에 연길은 크게도 변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늘이 크게 맑아졌고 고급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일어섰다.헌데 마음구석에는 연길의 인구가 얼마길래 아파트를 이렇게 많이 지을가고 의구심도 있었다. 그래서 연길 체류기간에 아파트가격과 판매상황에 대하여 조금 문의해보았고 또 아파트를 세를 주는 시세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나는 연길의 부동산 개발은 경제적인 규칙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경제현상이라는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되였다.    담배공장과 술공장을 내놓고는 산업경제가 거의 침체상태에 머물어있는 고장에서 가련할 정도의 농업경제의 수입으로는 학교도 운영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해외로 나간 20여만명의 로무자들의 피땀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부동산 개발을 한다는 이야기는 나로서는 납득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 부동산 투자도 경제의 장래성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안받침하여야 한다고 하지만은 무조건 집값이 오를거라는 생각 하나로 피땀으로 챙긴 돈으로 아파트를 장만하고 다시 해외로의 로무수출의 길에 나서는 사람들이 꽤나 많음을 느꼈다.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온 돈을 망탕 소비하기보다는 <<고명>>하겠지만 경제의 장래성이 별로 시원치 못한 고장에서 부동산 투기보다는 산업주의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아파트도 그렇고 부동산도 그렇고 산업경제에 비해서는 투기성이 강하고 주기가 짧은 경재투자이다. 산업경제가 락오되고 인구류실이 엄중한 연길에서 좋은 아파트를 많이 짓는다 해도 텅 비여가는 도시의 집값이 얼마나 오를가? 화페적인 계산으로 오를수도 있겠지만 내실이 빈약한 경제구조로서는 경제구조의 안바란스와 포말경제의 도래를 맞이하기가 쉽다. 나의 욕심으로는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온  돈일수록 알차게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농군들의.경제정신과 경제경험이 부족하며 또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연변은 아직 민영경제의 규모적인 활성화를 이루기 어려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정부와 연변국민경제 발전계획의 올바른 주도와 유도아래  우리도 차츰차츰 산업경제의 기능을 련마하고 산업경제의 머리를 키우면서 살어가는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30    [단상] 한가지 후회되는 일 (허동식34) 댓글:  조회:3194  추천:165  2007-03-04
한가지 후회되는 일허동식작년 11월에 고향행을 했다. 고향마을에 이르러 변모된 촌락의 모습을 둘러보고 현재는 동네 사람이 살고있는, 부친이 손수 지으신 초가삼간도 찾아보니 아름다운 동년이 기억나고 마음이 설레였다. 나를 배동한 셋째 매형도 24살에 우리 셋째 누나한테 혼사말을 왔을 때 바로 이 집이였고 또 내 누나를 데려간 집도 이 집이라 하며 무척 감개하다가 나중에 나보고 산에 올라 부친의 산소로 가보자 하였다. 하지만 나는 제사날도 아니고 추석도 아닌데 하며 외고집을 어물거리고는 끝내 아버지 산소로 가지않았다. 나는 여태껏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아무짓도 쓸모 없다는 실용주의를 신봉하여 왔다. 부친 생전에 아무런 효도를 못한 내가 부친께서 세상뜨신 20년 뒤에 부친의 산소에 가서 술을 붓고 절을 하고 하는 형식주의는 나로서는 실행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또 실말을 하여 나로서는 부친 산소로 가볼 용기도 별로 없었다. 부친이 저 세상으로 가신 뒤에 한번도 산소를 찾은적이 없었으므로 아무리 소위 유물론적인 삶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마음 깊이 어딘가에 큰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형의 권고도 마다하고 부친께서 묻혀있는 먼 산만을 쳐다보고 말았다. 헌데 요즘은 후회를 한다. 효도를 못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제사를 지내는 날이 아닐지라도 시간이 나는대로 아버지 산소로 가보아도 괘찮다는 느낌이다.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의식절차를 모른다 하더라도 또 벌초법마저도 모른다 하더라도 부친 산소옆에 조용히 앉아보는것으로만 하여도 나같은 인간으로서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제사도 그렇고 습관에 어긋난 성묘도 그렇고 모두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실행해야 할 민속이고 도리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고달픈 삶으로 하여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도 아버지 삶을 대신 정리해보고 우리의 삶을 정리하여 영위하기 위해서는 홀로가 아니라 형제들과 같이 조카들과 자식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로 가보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죽음에 대한 행사의식을 포함한 민속습관이 물론 옛날부터 전해지는 낡은  습관이기는 하지만 그 진정한 내용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행사의식임을 조금 느낀듯하다.    오늘날처럼 종족의 인구가 마이너스성장을 보이고 인정이 마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는 현상을 거절하려면 우리의 민속을 지켜가는 일도 방법중의 하나라고도 생각된다.  
29    [단상] 우리도 생각하는 종족이 되자 (허동식33) 댓글:  조회:3068  추천:139  2007-03-04
 우리도 생각하는 종족이 되자허동식  사람마다 종족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모두가 생각은 하겠지만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생각하는 내용이 다르다. 말하자면 사유능력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오랜 세월 물산이 풍부하지 못한 곳에 집거하여 살면서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웠고 또 문화적인 지배를 많이 받아왔기에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사유체계와  문화를 키워오기는 했지만 우리의 사유와 문화는 너무 실용주의에 머무르고 습관주의에 물젖어 있다는 생각이다. 많은 한국분들한테 <<한국사상사>> 아니면 <<한국문화사>> 비슷한 서적을 부탁하기는 했지만 <<야, 한국에 사상사 있나?>> 하는 대답이 아니면 찾아보아도 별로 마땅한 서적이 없더라는 기별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사상사란 문화사란 사상과 문화의 시간적인 맥락을 기록한 서적에 불과하지만 그런 부류의 좋은 서적을 구입하기 힘든 일에서도 우리의 사상사가 문화사가 빈약하다는 나름의 판단을 해본다. 실말을 하여 우리는 아직까지 아주 훌륭한 사상가를 배태한적이 없고 전민족적인 문화적인 반성이 풍족하지 못한 사실은 우리의 사유와 문화가 어느 정도는 빈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된다. 한개 종족의 사상과 문화를 이루는데는 여러가지 인소가 복합적인 작용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인소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우리 종족의 많은 주관적인 인소가 우리의 사상과 문화에 소극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객관 사물과 인간정신 등에 대한 태도로 볼때  흔히는 남들의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이기는 하지만 <<소화시스템>>이 잘 발달되지 못하여 영양분을 섭취함에 있어서 리상적이 못된다. 유학이 살판칠 때에도 그랬고 근대로부터 받아들이는 기독교문화도 여전히 <<우리식>>으로 전변을 하여 우리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가꾸는 면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이루지못하고 있다.거듭되는 생각과 쟁론과 선택성이 결여된 탓일가? 아니면 독립적인 자주적인 사유능력의 결핍 때문일가? 이문화를 대함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는 <<수박겉층먹기>>수준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본신과 우리 문화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먼 옛날부터 그랬다는 낱말 하나로서 도든것을 대체하고 우리의 사유와 행위에 대한 심층적이고 폭이 넒은 반성을 하는 사람이 적고 또 그런 반성적인 반항적인 습관이 잘 키워지지를 않는다. 그 원인은 잘 몰라도 이러한 현상들이 앞으로 우리의 머리를 활성시키는 면에서는 큰 장애물임은 틀림이 없다. 중국에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조금 이색적인 문화권에 살고 있지만 나름의 생각을 거친 반복적인 정리도 없이 남의 소리만 잘 받아외우고 다른 문화의 정수를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우리는 지금도 많이는 빈 소리만 하면서 지치여서 살고있다. 오늘날처럼 사람이 종족이 살아가면서 사상과 문화의 유효력이 뚜렷하게 표현되기는 처음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정보산업의 발달과 교육의 보급화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반면에 또 우리가 생각하는 종족으로 커가는 면에서 좋은 챤스를 만들어 주고있다고 생각된다. 먹는데만 신경을 쓰지말고 노는데만 신경을 쓰지말고 우리도 사유능력을 높이는데 힘써보자는 욕심이다. 그리고 또 아주 이색적인 사유를 도입하거나 창발하거나 하는 .<<미친놈>>들이 생긴다 하더라도 달갑게 받아들이고 사랑하여주고 흉금이 드넓은 문화환경을 만들자는 욕심이다. 그럼 우리도 생각하는 종족이 되자.  
28    아픈데만 건드리는 의사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3088  추천:122  2007-02-28
로신은 모주석 할아버지의 높은 평가를 받은 분이다. 문학가이고 사상가이고 혁명가이고 수두룩한 가의  칭호를 받았고 또 그 때문에 중국 현대사에서 거의 신으로 받들리는 정도에 이른 신화적인 인물로 되여있다. 헌데 누군가 만약 로신이 당대까지 생전이였더면 건국 뒤에 수많은 인테리들을 투쟁해버린 모택동이 <<욕을 잘 하>>는 로신을 가만 놔두었을가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로신은 중국 사람의 아픈 곳만 칼로 해부하는 사람으로서 또 인격적으로도 모주석 할아버지의 그릇된 점을 용서할 분이 절때 아니다. 한다면 로신이 건국뒤에도 생전이였다면 모주석 할아버지와 로신 사이에는 어떤 혈투라도 발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론리적으로는 성립되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반면에 중국인들의 재미있는 가설력에 감복도 한다. 20일전에 책 한박스를 들다가 허리를 크게 상했다.그래서 봉사님 의사들이 운영하는 맛싸지 집에 부지런히 다녔다. 다친 허리에 맛싸지를 받으면서야 소경들도 이렇게 부지런히 사는데 나도 일 잘 해서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또 봉사님 의사들이 아주 고의적으로 내 아픈 허리의 근육을 힘차게 주물러주면 아파서 새된 소리를 지르고는  속으로는 이게 어디 맛싸진가? 이런 수준이면 치료가 아니라 나를 완전 병신으로 만들어주는게 아닐가 하는 의구심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아픈 곳에 맛싸지를 많이 받으니깐 많이 좋아진듯 하다. 생각을 해본다. 허리에 있는 근육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아픈데는 힘차게 주물러야, 칼로 해부해서 고름을 제거해야 아픔이 낳아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모두가 불합리적이고 병태적인 일면이 있다. 현재 중국도 마찬가지다. 잘 살려면 우리도 로신처럼 아픈데만 건드리는 용맹한 의사들이 필요하다. 헌데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아픈데만을 건드리는 의사들이 별로 많지는 못하다. 더러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알다싶이 어느 권력자에게 당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느 고용된 깡패무리에게 죽게 당하는 신문기자도 있다. 그래서 글을 쓴다든가 연구를 한다든가 하는 어떤 인테리들은 나는 사회적으로 현실적으로 문제를 생각하는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학리적으로 문제를 생각한다는 명안을 고안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음 구석 어디엔가는 만약 문화대혁명 비슷한 운동이 또 오면 어떻게 살어? 하는 불안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사유능력과 어느 정도의 사회경험을 가진 자는 그 누구나 아픈데만 건드리는 의사가 좋은 의사인줄을 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우리는 아픈데만 건드리는 의사들을 용납하고 지켜주고 키워줄 여건이 아주 부족하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다. 현실적인 원인도 있고 제도적인 원인도 있겠지만 나는 언감생심 중국은 먼 옛날부터 아픈데만을 건드리는 의사를 좋아하는 문화전통이 부족한 동네라는 생각을 해보고싶다. 먼 옛날 진시황 시기의 <<분서갱유>>도 사실은 제왕사상을 지배적인 사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픈데만 건드리는 의사들과 그런 의사들의 사상을 도살해버린 피비린 교훈이다. 그 뒤에도 간언을 하는 충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중앙집권과 제왕사상을 수호하는 이야기가 더 두툼하게 기록되여 있는 력사이다. 만일 중국의 문화전통에 이런 고질이 정말 존재하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도 그런 원죄를 벗어날수가 없다. 모택동 할아버지도 그렇고 평민들도 그러한 문화전통의 고질을 다소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잘 살려면 아픈데만 건드리는 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새삼스레 느낀다.아픈데만 건드리는 의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분들이 필요함을 새삼스레 느껴보는 지금이 우리에게는 행운이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그리고 아픈데만 건드리는 의사들이 술술 배태되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온다면 나의 이처럼 시시한 이야기는 아마 들어줄 사람이 하나라도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27    중국 시문화의 몰락 그리고 일견 댓글:  조회:2894  추천:116  2007-02-21
 1곁에 동년배 시인이 한분 있다. 언젠가는 열혈남아로서 詩作도 엄청나게 했었고 대학교 詩社의 회장도 지냈으며 지금은 대학교 선생으로 일하는 시인의 시집 한권을 얻어 읽었다.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끝까지 읽어내려갈수가 있는 그런 詩作들은 아니였다.시인은 지금은 시창작을 그만두고 소설을 쓴다고 한다. 인터넷에 인기소설을 많이 연재했고 또 출판도 해서 많이 판매되여 돈도 벌었고 동료들로부터 명과 리를 일거량득한 유명인물이라고 부러움을 받으며 산다. 그래서 시집외에도 시인의 소설책도 안받침하여 받았는데 나로서는 읽어내려갈 자신이 없는 소위 대학생생활소설이라 그만 책장에 넣어버렸다. 물론 사람마다 흥미가 다르고 사는 재미가 다르겠지만 나는 과거에는 정열적인 순수 문학도였고 소박한 詩情을 너무나도 틀에 째이게 표현하던 (시인의 시에 대한 나의 느낌) 시인이 현재는 독자들의 구미에 따라 소설창작도 아닌 소설<<제작>>을 하는 상업형 작가로 대전환된데 대하여 조금 아쉬움을 느끼면서 그 시인의 문학창작의 대전환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다시 20세기 80년대 말엽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시가 독자들을 많이도 잃어버렸고 중국의 시인들이 어떻게 보면 漫長하기도 한 이 세월을 침묵으로만 대하는 현상을 소위 중국 시문화의 몰락이라 이름짖고 그 현상과 근원에 대하여 좀 생각해보고 싶었다. 2중국은 먼 옛날부터 詩國이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사용하는 문자가 표현수단이 이미지적인 문자이고 또 유학의 學과 術을 바탕으로 삼은 과거시험제도를 대표로 하는 문화전통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음운문이 아주 각광을 받아왔었다. 그래서 중국 전통적인 인테리들의 공부는 시공부가 많았었고 시를 모르면 인테리(士)라고 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시문화는 관방문화권과 귀족문화권 그리고 인테리문화권만이 아니라 민간문화권에서도 절대적인 중심을 자리매김하여 왔었다.중국고전소설의 대작으로 꼽히는 <<홍루몽>> <<삼국연의>> <<수호전>>도 사실은 명나라 후기부터 시작되는 市井문화권 산물로서 <<이야기 집>>에 평민들이 모여들어 선생의 <<說書>>를 얻어듣던 시대의 이야기 각본에서 기인되였으며 그 시대에는 문학의 高品에 전혀 끼이지도 못했었다. 중국의 문학적인 목적을 지닌 서사문학은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서방문화와 서방소설을 접하고 백화문운동을 해서부터 시작된다. 그 뒤에는 파금 전중서를 비롯한 소설 名家들도 많이 나타났고 20세기 30년대로부터 서서히 문학의 서사시대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문학쟝르형식의 전이과정에서도 중국문학은 시문화와 완벽한 리탈을 한것은 아니다. 深厚한 시문화 우세를 빌어 국난시기와 격변시기에는 詩國 이름에 손상이 없도록 곽말약 애청 등 훌륭한 현대시인들을 배출하였었다.당대에 들어서서는 비상시기였던 50년대로부터 70년대 초엽까지는 시를 쓰고 읽는 사람도 많았고 全民이 시를 쓰는 애국운동까지 했었지만 별로 훌륭한 시인들을 낳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70년대 중엽에 발생했던 북경시민들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주은래총리를 기념하는 집회와 <<4인방>>을 분쇄하던 사회정치사건을 배경으로 北島를 대표시인로 하는 몽롱시파가가 중국의 시문화사의 또 하나의 크지도 작지도 않는 고봉기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80년대말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사문학의 상대적인 번영과는 판이하게 시문학은 독자군체가 많이 줄어들고 있으며 점차적으로 중국시인의 사회지위 사회영향 등이 아주 미소해졌다. 내가 대학을 다닐적에는 문과생은 거지반 시집을 몇권씩은 챙기고 있었는데 요새 우리 회사에 취직하는 대학생들을 보면 태반이 문과생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며 집사람 학생들을 보아도 시를 좋아하는 대학생들이 별로 없다. 대학생들마저 시를 별로 읽지를 않는다면 서점의 시집이 잘 팔리지않는다는 문화현상은 리해하기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볼 때에도 전에는 시를 자별나게 좋아했느데 요새는 시 읽을 기분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이러한 시문화현상을 나는 중국시문화의 몰락이라 칭하고싶다.3경극을 비롯한 중국의 전통적인 희곡들이 거의 박물관에 보존되여 가듯이 중국의 시와 시인도 이제는 자취를 감추어버리는것이 아닐가? 眼下를 둘러보면 시와 시인은 냉대를 받지만 나의 생각에는 아무것도 아닌 超女들이 크게 환대받고 있으며 또 새로운 문화형식과 문화현상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것들을 보면서 나는 詩徒로서 조금은 당황감을 다소 지니게된다.나는 중국 시문화가 몰락하는 원인은 우선은 문화표현교류수단의 다양화와 중국국민경제의 쾌속적인 공상업화와 국민들의 물질생활의 향상 반면에 내존하는 非적응성이라는 객관원인에서 찾아보고싶다. 문화가 언어와 문자에만 크게 의뢰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과학기술의 발전과 리용에 따라 현시대는 여러가지 표현수단이 중겹으로 사용되는 시대이다. 문자에만 종이에만 매달리던 사유가 현재는 테레비요 인터넷이요 하는 여러가지 현대적인 표현교류수단을 리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빠르게 전수하고 빠르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보급되는 소위 快餐문화가 주요한 문화표현교류형식으로 변해감에 따라 언어문자가 아닌 符號들이 조금은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우리의 사유방식과 문화방식을 영향주고 간섭하고 또 <<신신인류>>계층의 생활방식을 지배한다.따라서 언어문자와 인쇄업을 표현전달수단으로 하는 시문화는 자연히 그 수단의 전통성과 어느 정도의 <<시수양수준>>을 필수로 하는 詩文자아요구로 하여 자연히 독자들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였고 시문화와 시인은 부득불 사회지위의 하락을 맞이하게 된다.거의 30년이 되는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실은 선진적인 공상업시대로 돌입하는 초급단계이다 .중국은 기나긴 농경사회를 거치였고 또 수십년에 달하는 침침한 계획경제시대와 가난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공상업화의 물결에 휘말려들었기에 공상업시대의 視角과 높이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하여야 할 전통문화정리를 미처 끝내지 못한 사정이며 어떻게 보며는 버리지말어야 할 문화전통을 많이도 잃으며 또 허겁지겁 버리기도 한다. 중국시문화도 당연히 그 재화를 입고있다. 공상업사회의 혜택을 입어 물질생활수준의 향상되는 반면에 詩徒들을 포함한 중국의 인테리들과 국민들의 삶은 개인소유시간의 소실이 많아졌으며 또 제한된 개인시간소유내에도 가볍게 쉽게 오락적이게도 접촉할수 있는 문화생활형식이 많아졌으므로 자연히 인간의 정서와 사상을 조금은 <<까다롭게>> 발로하는 특징을 지닌 시문화를 버리고 꺼리고 있다. 快餐문화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시간소모가 길고 정서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시문화는 상술한 사회변혁조건하에서는 렬세에 처하여있으며 또 공상업사회의 초급단계에 보여지는 중국인테리들과 국민들의 自若이 부족한 非적응성은 중국의 시문화를 더욱 창백하게 무력하게 만들고 있다.4 중국의 시인과 시문화는 이러한 현실앞에서 흰기를 내들것은 아니다 . 언어와 문자가 존재하는한, 언어와 문자가 인류사회의 제일 기본적인 교류수단으로 사유수단으로 존재하는한 나는 중국인의 언어와 문자를 통한 사상정서의 발로가 필연코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중국시문화의 몰락을 거절하고 중국시가 문화와 문학의 一席을 차지하려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나는 중국 시문화의 남다른 자아반성도 중국시문화 몰락을 저지하는 필수품이 아닌가고 생각한다.중국은 詩國이기는 하지만 서구문화권과 비교하면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인은 아주 적다. 그 주요한 원인은 중국시를 다른 문자로 옮기는 번역난문제에 있기는 하지만 문화력사적인 시각으로부터 볼 때는 나는 중국시인 인문정신의 폭과 깊이가 제한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거의 당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테리와 중국시인들의 머리를 지배하여온 사상은 유학사상이다. 물론 중국인테리와 중국시인들이 불교와 도교의 사상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불교사상은 중국식불교사상이였고 도교사상도 많이는 <<개인적인 삶의 경지>> 에만 제한되였다. 서구와 비교하면 중국의 인테리들과 시인들의 인간수업은 <<우국우민>>과 <<治天下>>이라는 리상적인 境界도 있기는 하였지만 인간의 終極價値에 대한 관심과 神과의 대화( 형식적으로는 신령과의 대화로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으로서 인간과의 대화가 아닌가고 생각한다)를 지니지를 못했었다. 따라서 중국의 인테리와 시인들은 종교사상의 洗禮와 인문사상의 대폭팔(서구에서의 문예부흥)을 감지하지 못했으며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과 높이가 지역성이 짙었고 지방정치색채가 짙었다. 때문에 중국의 인테리들과 시인들은 줄곳 대인문정신부족증에 깊이 빠져있었었다. 그 대신 중국의 인테리들과 시인들은 전통적으로 지역정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민감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력대적으로는 실리를 추구하여 국가기구와 지배층에 아부도 많이 했고 의뢰도 많이 했으며 반항도 많이 했다. 굴원의 시는 <<楚왕에게 드리는 애원가>>였고 리백 두보를 대표로 하는 당시인들도 자신을 알아주는 좋은 황제를 만나 한자리 하려는 幹谒詩라는 시형식마저 만들었으니 옛날 중국시인들의 내실의 일부분을 알아보기에는 알마춤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중국시인들의 대인문정신부족증은 당대 시인들의 몸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아주 재간둥이였던 곽말약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쓴 詩作과 유명한 시인이였던 애청의 문화대혁명이 금방 끝난 시기에 쓴 詩作들을 읽으면 그러한 陋習의 변형형이 일목료연하게도 잘 보여진다. 중국인테리들과 중국시인들의 대인문정신부족증에 대하여 어느 정도 판단이 된다면 , 당대에 있었던 거짓말도 아주 화려하게 꾸미던 중국시인들의 詩作을 읽으면 지금 겪고 있는 중국시문화의 몰락은 리해하기가 쉬운 문화현상이 아닐가? 개혁개방이래 중국국민들의 사유의 폭과 깊이가 엉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심층적으로는 전통보다도 높은 차원의 심미요구와 대인문정신을 기대하고있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중국인테리들과 중국시인들이 자아반성은 아주 필요하며 중국도 진정으로 령혼의 자유를 지니고 있는 시인 만들기를 하는 작업이 바로 시문화 부흥의 묘약의 하나가 아닐가 하는 욕심을 생각해본다.
26    텔레비와 뉴스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3057  추천:115  2007-02-21
소학교시절이였다고 기억된다. 겨울방학에 용정시골 큰 누나집에 놀러갔다가 심양에서 온 외사촌형과 이상 외조카 그리고 나 셋이서 해란강변에 있는 어느 휴양소에 텔레비구경을 갔다. 헌데 휴양소는 문을 닫고 있어 <<영화가 나오는 기계>>를 구경도 못하고 돌아왔다.중학교 시절에 미장공으로 일하는 한족집에서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흑백텔레비 한대를 사놓았는데 온 동네 애들이 그 집에 밤마다 사태처럼 밀려들어 알아듣지도 못하는 중국말 방송을 시청하던 일이 있었다.고중에 들어가서는 현정부 청사 어느 사무실을 <<방문>>하여 텔레비드라마 <<곽원갑>>을 구경했는데 나로서는 채색텔레비가 난생처음이였고 즐거웠었다.대학을 졸업해서 결혼할 때만 하여도 채색텔레비 냉장고 세탁기가 3대기물이였던 시절이여서 나도 피땀으로 번 외화권 3500원(암가격으로 인민페 5000원정도)으로 지금 생각하면 아주 고가로 20촌 채색텔레비를 사놓고 쳐다보았다.현재는 텔레비를 쳐다볼 욕심이 별로 없다.아무리 좋은 텔레비라 하여도 나에게는 무용지물이다.위성중계로 하여 수십개의 챤넬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별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기가 어려운 일인듯 하고 또 나이변화에 따라 관중적인 흥미가 없어지는듯하다. 다만 이 세상을 사는데는 뉴스라도 좀 보아야 할것 같아 뉴스프로그램은 조금씩 쳐다보지만 뉴스같은 뉴스는 별로 없다는 느낌이다.이 넓은 땅 뉴스라는건 령도자들의 행적과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회의뿐인듯하다. 더 우스운건 지방텔레비에 나오는 뉴스는 엄동설한에 북방의 푸른 전야에서 농군들이 어찌고 또 어떻고 . 맙시사 新闻 아니라 旧闻도 아닌것을 가지고 떠들어대는 방송국이 가련하다.물론 좀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모택동시대 《枪杆与笔杆》논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언론업체들은 신경과민증에 허덕이고 있으니 뉴스의 내용과 형식이 많이 좋아지려면, 언론업체가 만백성의 나라의 언론업체로 전변하려면 아직도 피타는 노력이 요구된다. 언론업체들의 新闻자유화와 민주화는 좋은 살림을 구축한다는 현대사회진입의 필수조건이면서 또 그 목적이기도 하다.
25    대학입학난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2931  추천:137  2007-02-21
석간지는 어느 시골 한 가정에서 올해 자식 셋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는데 경제난으로 부모가 자식 셋을 모여놓고 소위 <<제비뽑기>>로 누가 대학교에 갈건가 나머지 둘은 대학을 포기할건가를 정한다는 기사가 실리였다. 다음날에는 그 애들의 대학입학을 위하여 사회인들이 모금을 시작했고 또 돈 얼마를 모금했다는 련속기사가 보도되였다. cctv에서도 <<공동관주>>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입학을 앞두고 경제난에 허덕이는 민고들을 엄청나게 방송하고 또 녕하는 얼마 복건은 얼마 하는 식으로 기금의 수액배렬을 이야기하고 있다.얼마 안되는 중국의 국민생산액과 비교하면 교육의 산업화과정에 교육비용은 껑충 올랐고 많은 교육비리가 사회문제로 나타났으며 가난한 사람들 대학공부는 하늘의 별따기로 되였다. 헌데 인구대국이면서 또 빈부의 차이가 나날이 심해지여 빈곤선 아래서 허덕이는 절대인구수가 수천만을 헤아리는 나라에서 단 기금이라는 자비심이라는 수단으로만 대학공부난이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할수가 있을가고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을 해본다.나도 내가 사는 동네의 깊은 시골로 가서 <<희망공정>>이라는 명목하에 세워진 소학교를 구경한적도 있고 <<희망공정>> 소학교의 선생님들과 이야기도 좀 나누었으며 또 공청단성위 <<희망공정>> 일군과도 <<희망공정>>의 <<내속>>을 알아보면서 <<희망공정>>의 실행에 대하여 좀 실망을 햇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교육제도와 보장제도에 대하여 여태껏 그 <<쇼>>적인 일면을 부정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따라서 대학입학난을 두고 진행하는 <<모금운동>>도 다소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얼마 납세는 못했지만도 납세인의 생각으로서 우리 납세인들의 돈이 다 어디로 흘러갔을가고 생각도 해본다. 민간에는 관리배들을 두고 <<담배 한갑에 우리 한달 식량이요, 식사 한끼에 우리 부림소 한마리요, 엉뎅이 아래는(승용차를 말함) 집 한채요>> 하는 말도 류행하다싶이 현재 중국의 재정수입의 태반이 공무원들의 소비돈으로 되여있다. 언젠가 주용기 전 총리가 <<밥통정부>>라는 말을 했듯이 방대한 관료기구가 납세인들의 피땀을 엄청아게 빨아먹고있다. 각급 정부마다 재정적자를 보는 현상이 수두룩하고 공무원의 봉급이 얼마 안되는 상황하에서도 <<공무원시험>>에 참가하는 사람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현상을 보더라도 그 누구나 공무원직에서 풍기는 <<비린내>> 잘 알기 때문이 아닐가? 나의 욕심으로는 공무원직에서 풍기는 <<비린내>>를 철저히 없애는 밀방이 있다면 오늘날의 <<제비뽑기>>라는 슬픈 이야기는 자연히 많이 사라질거고 또 불쌍한 기자친구들의 진땀을 빼면서 벌리는 <<쇼>>도 관중이 많이 없어질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24    축구와 사회불신임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3216  추천:149  2007-02-21
아시아녀자축구컵의 반결승전에서 조선이 중국에게 0:1로 패했다. 축구에서도 성패는 병가지상사로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울면서 축구장을 떠나는 조선의 축구선수들을 보면서 어딘가 마음이 아주 아팠다. 잘 못사는 나라일수록 나라의 영예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욕심은 오히려 더 크다. 올해 또 홍수때문에 갖은 신고를 해야 할 살림일거고 또 그럴수록 똘똘 뭉쳐서 가난과 봉쇄를 이겨나가려면 심리적인 기둥이 무조건 필요품이 아닐가?중국은 이겨서 좋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중국국민들이 이번 축구경기에 대한 평판보다도 이 시합에 나왔던 재판과 아시아 축구협회에 대한 불만이 더 많이 표현된다. 이태리籍 재판의 3차나 되는 잘못된 판단과 또 이 시합에서 오스틀라리아의 邊裁를 사용했다는것은 물의를 일으킬한만한 일이다.현재 중국의 축구든 이탈리아의 축구든 세계의 축구든 내막을 들여다 보면 모두가 종말적으로 돈이 살판을 친다. 스포츠정신과는 거리가 멀게 축구의 매력과는 반대로 축구는 상업적인 종족적인 정치적인 투기수단으로 전변하고있다.현대 사회에 있어서 축구와 스포츠는 사회의 주요한 一環으로 되여있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그리고 인류의 위대한 스포츠정신은 인류사회의 발전을 대변하는 유력한 근거의 하나임도 틀림이 없다. 반면에 축구와 스포츠의 타락현상은 사람들더러 스포츠와 사회에 대한 불신임을 지니게도 한다.축구와 스포츠에 대한 불신임은 인간사회에 대한 불신임중의 하나로서 또 언젠가는 사회불신임위기의 계기로 될지도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현재 국내사회와 국제사회에 어느 정도의 신임과 불신음으로 살고 있을가? 나라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또 수학적인 정답도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은 살펴보면 반신반의가 류행이다. 너무 신임해도 당하고 너무 신임하지 못해도 당할것이라는 선입견으로 반신반의와 사회와의 타협으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이런 의미에서는 나처럼 신령을 믿지도 못하는 사람은 산다는게 어딘가 불행한 이야기로도 된다.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에 신임을 주지못하고 <<눈을 딱 부릅뜨고>> 살아간다는것은 힘들고 지쳐버릴 일이다.요새 조선의 핵문제 해결책으로 진행되던 6자회담은 아주 종무소식이다. 小題大作라는 의심을 받을만도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국제사회는 조선의 협력만 요구했을뿐 조선의 신임을 받을만한 일은 별로 하지를 못했다고 생각한다. 만날 <<독재의 나라>> <<악의 나라>> 등 언어공격과 형상회손에 전력하고 경제봉쇄와 외교봉쇄술로만 대처하는 국제사회에 대해 조선은 어느 정도의 신임도를 지니고 있을가? 나는 다만 조선의 국제사회에 대한 신임도가 령으로 저락하지 말었으면 하는 욕심뿐이다.1차세계대전뒤에 독일은 전쟁수단으로써 국제사회의 불신임과 불평등을 벗어나려는 욕심에서 파쑈의 길을 걸었고 또 인류발전사에서의 침통한 교훈도 빚어내였던것처럼 度를 지난 制裁는 목적과는 다르게 상대의 큰 반발심과 불신임을 가져오기가 쉽다.또 우리로서는 제 안속만 차리기를 좋아하는 미국이라는 나라만 바라볼것이 아니라 조선으로부터의 신임도를 높이기에 노력해야 하겠다.
23    중국 고급인테리들과 사면초가 댓글:  조회:3024  추천:147  2007-02-21
근간에 내가 사는 동네 대학교의 마흔살을 앞둔 부교수 한분이 컴푸터 앞에서 폭사(暴死)를 했다. 正교수로 되려고 밤낮으로 학술논문을 쓰다가 지치여 죽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수근거렸다. 신문에는 현재 중국의 고급인테리의 70%가 과도 피로의 변두리에서 허덕인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위 고급인테리란 대학교 선생이 아니면 연구기관의 연구일군들이라 생각되는데 내가 보건대는 교육과 과학발전으로 나라의 진흥을 엿보는 중국으로서는 고급인테리야말로 참으로 보귀한 인력자원이 아닐수가 없다. 수많은 고급인테리가 해외진출을 하여 귀국을 포기하는 오늘날, 중국인구수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가냘픈 비률을 보이는 고급인테리들이 피로전으로 하여 생사를 다툰다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의 장래가 어딘가 근심스럽다.헌데 인테리들이라 말은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그 나젊은 부교수의 폭사를 두고 << 야, 우리 학교 교장은 밥을 짖는 사람더러 금똥을 누라는게 아니야? >>하고 익살을 부린다. 밥을 짖는 사람더러 어서 뒤간에 가서 금똥을 누라는 이야기, 재미있는것 같지만 사실은 슬프고도 말못할 사연이 많이 깃들어있다. 교수든지 연구원이든지 연구를 하고 또 무슨 학술논문을 쓰려면 天時地理人合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착실하게 성사될것이라는 판단은 아주 상식적인 판단이다. 헌데 그러한 그러한 조화가 이루어지기전에 착실한 고급인테리로 되려니 ,좀 고급인테리답게 살려니 문제점이 많이도 생겨난다.봉급은 얼마 안되고 진테를 좀 많이 받아먹고 얼굴을 쳐들고 여유있게 살려니 직함승진과 박사공부 박사후공부 등 학위따기에 아글타글 전력해야한다. 직함승진을 이루려면 학술논문도 많이 발표해야 하고 연구항목도 있어야 하고 또 돈과 인맥의 받침도 있어야 하니 그들은 몹시 피곤할 것이다. 대학교에 근무하는 내 집사람도 무슨 논문을 쓰느라고 밤을 많이 패고 무슨 규획항목을 하느라 눈코뜰새가 없다. 내가 볼바에도 착실한 공부는 별로 없고 비교적 완숙된 생각도 없이 쓰기만 하니 좋은 학술논문이 나올리가 있을가?알아보니 그 대학교에서는 선생들의 직함은 승진할수도 있고 떨어질수도 있는데 직함보존과 승진을 하려면 교학도 어느 정도 해야 하고 일년에 A급 또는 B급 간행물에 논문을 얼마 발표해야 하며 또 어떤어떤 상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년말에는 상술한 규정에 따라 선생들에게 점수를 매기고 점수에 따라 경제적인 보상과 기타 보상이 주어진다고 한다. 고급인테리들의 학문수준과 연구수준을 높이려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겠지만 또 그 중의 하나가 상술한 점수제이기는 하겠지만 중국의 이상한 현상으로서는 목적 좋고 제도 또한 물샐틈없이 만들지만도 어찌하여 집행중에 변이가 많이 생길가? 현재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版面費라는 돈도 내구 원고료는 편집에게 양도하고 연구항목을 하나 신청하려면 여러가지 수단을 써야 하고 또 지도교수가 거느린 제자들에게 렴가의 봉급을 주면서 부려먹기에 "로반(사장)"이라고도 불린다는 이러저러한 현상은 우리의 고등교육과 학술제도가 목적과 목표와는 다르게 어딘가로 정처없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진다나노니 현재 중국의 고급인테리들은 사면초가에 깊이 묻혀있다. 그들이 직면하는 사회는 상업사회외와 관료사회와 그리고 건강볼손과 허약한 심리셰계이다 . 이러한 맹수무리가 이룬 사면초가앞에서도 고급인테리들이여 잘 지탱하라!
22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2877  추천:140  2007-02-21
언젠가 한국에서 오신 분이 나하고 한국인과 중국인은 어떤 구별이 있는가 물은적이 있다. 너무나 엄청난 문제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대답할수가 없지만도 어떤 문제이든 자신의 관점을 표명하기를 즐기는 나쁜 습관이 있는 나는 참지를 못하고 예, 한국인은 術적이고 중국인은 略적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물론 깊이 생각해본것은 아니지만 중국과 한국의 력사 흐름이라든가 중국인과 한국인의 행동거지를 살펴보며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티벳에 여행갔을 때 중국은 가난하기는 하지만 중앙정부는 년간 수백억의 재정수입을 소비하면서도 이 불모의 땅을 지키고 있습니다.이것이 중국인의 略입니다. 하고 손님들과 이야기 한적도 있다. 지구땅에 중국인처럼 눈앞의 리익과 작은 리익을 버릴수는 있지만 앞으로의 리익과 전민족적인 리익을 꾸준하게 추구하는 나라와 종족이 몇이나 있을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뒤 한무제시대에 이미 큰 국토의 륜곽을 지니게 되였고 또 수당과 청제국을 거쳐 광활한 국토를 정비했으며 무력과 민족융합을 변증적으로 리용하여 중화제국을 이루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나는 중국인의 뛰여난 略에 감복한다.중국에 여행하러 오셔서 지저분하고 가난하기는 하지만 땅이 넓어서 부럽다는 한국분들하고 우리 조상들은 왜서 땅을 조그만치 챙겼을가 하고 나도 함께 한탄한적도 있다. 추운 땅덩어리라 하더라도 그적의 생산력으로는 뭘 챙길것이 없는 땅이였다 하여도 조정의 국고가 비인다 하더라도 땅을 조금만 더 장만해주셨더면 하고 엉터리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국인은 약삭바르고 성격이 급하여 극단적이며 지혜롭고 인정이 깊지만 중국인은 만만디고 중용적이고 인정도 인정이지만 리익앞에서는 게으르지 않다는 점도 나는 한국인의 術과 중국인의 略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한개 종족으로서 略과 철학이 없이는 번창할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해빛정책>>으로 하여 돈이 많이 나간다고 가슴아파하는 한국분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현재 나의 곁에는 중국대륙이 대만에 실리를 준다고 아웅다웅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略이란 하루아침사이에 쉽게 이루어지는것이 아님을 느께게 된다. 하지만 독도에 대한 뉴스를 읽어보면서 오 이제는 하고 무릎을 탁 칠때도 있다.
21    영어붐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2986  추천:158  2007-02-21
영어를 모르면 사람값도 못한다는 느낌이 올 정도로 영어붐이 중국을 기습한지가 이제는 몇해가 될가? 외국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관리법을 배워 잘 살겠다는 실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외국어를 배운다고 떠든지가 이제는 30여년이 된다. 대학입시는 물론 전공이나 료리사를 비롯한 직업도 직함(职称)승진을 하려면 외국어시험에 합격되여야 한다는 우스운(?) 말도 들었다. 이처럼 외국어공부가 형식주의에 물젖어 여러면에서 반면적인 영향도 끼치기는 했지만 현재도 외국어붐 특히는 영어붐은 중국을 크게 휩쓸고 있고 중국의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시간 그리고 정력을 크게 점하고 있다.오늘 석간지에 중국어가 영어에게 쓴, 장난끼가 어린 <<편지>>가 보인다. <<위대한 영어님, 저는 중국어인데 이제는 당신한테 백기를 들었습니다. 중국문학을 배우는 대학생도 중국문학은 락제를 맞아도 괜찮지만 4급영어를 통과못하면 졸업장과는 빠이빠이를 해야 하듯이 당신은 과연 대단합니다.>>고 말이다.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지니고 있고 또 한자를 그 력사문화의 중심핵의 하나로 하는 나라에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국어 대신 영어가 거의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한다고 할 때, 나는 영어가 중국인의 거대한 자부심에 찍어놓는 상처의 흔적을 바로 보고있는듯한 느낌이다. 중국인으로서 또 한자와 중국어를 사용하는 자로서 나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 허전하다.하지만 영어붐이라는 사회현상을 정서적으로만 받아드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중국은 개혁개방전야에 대외무역액이 국민생산액의 2%도 안되였지만 현재는 40%라는 사람도 있고 70%라는 사람도 있듯이 중국의 국민경제는 경제세계화의 물결에 휘말린뒤부터는 대외무역을 떠날수가 없다. 중국은 대외무역이 없이는 <<세계의 공장>>이라는 칭호도 있을수가 없고 우리의 물질생활 나아가서는 다채로운 정신생활도 상상할수가 없다. 영어권이 우리보다 선진적이고 또 우리의 사회변혁이 가속화될수록 우리는 영어를 거절할수가 없다.언젠가 근처에 사시는 언어철학을 연구하시는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적이 있다. 그 분의 이야기로는 상형문자인 한자와 자모문자인 영어를 비교하면 , 또 어법과 론리성이 결여된 중국어와 엄밀한 어법과 론리조직능력을 지닌 서구의 언어를 비교하면, 중국인은 상대적으로 경험실증주의정신이 결핍되여있고 사유가 상상적이고 직관적이며 정서적인 주요한 원인을 알수가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영어붐이 실리추구만이 아니라 중국인의 언어사유방식을 개조하고 풍부하게 하고 완숙하게 하는 효익도 가져다 주었으면 하는 엉뚱한 욕심도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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