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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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잡담64] 나 또는 우리의 공간意識 댓글:  조회:4676  추천:72  2008-10-05
[잡담64] 나 또는 우리의 공간意識허동식인간 또는 人群이 공간에 대한 리해와 활발된 상상력이 인간 또는 人群이 물젖은 문화의 요점이라는 느낌을 적어보고싶다. 세상이 크고 넓은것은 아리숭하게 알지만 도대체 얼마나 크고 넓은것인가는 념두에도 두지못했던 유년시절, 어른들의 옛말에서 서울과 동경(토오쿄)이 튀어나오고 유선방송에서 북경이 튀어나오고 시골에 배달되는 신문에서 쏘련과 미국 그리고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선을 보이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무렵에 소유했던 공간의식이 아주 유치했음을 아프게 생각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흑판에 쓴 문자를 필기하고 암송방법으로 시험을 보던 지리과를 배우면서 지구라는 星球는 지구의처럼 둥글다는 사실보다도 애들끼리 지부랄타르해협을 <쥐 불알 타래 >해협이라고 부르는 앙극(恶作剧)에 열중하던 아픈 기억만을 남기였다. 고중시절에는 대학교시험을 보기위해서는 문과를 배우는 애들이 지도를 기웃거리며  리과생의 비웃음을 자아내던 일들이 기억된다. 소위 리과를 배워내지못하는 남자애들이 녀성남쇠의 문과반에서 고학을 하면서 화학을 배우면 화학비료나 만들어 농산물수확고를 올릴수가 있지만 지리를 배워서는 어디에 써먹을가고 苦心한 일은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지리상식도 전혀 모르는 동년기의 리과생들도 가련하기 짝이 없다. 요즘은 리해력이 빈약하지만도 영국과학자의 <時間簡史>를 억다짐으로 읽어본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공간의식이 허약하기 그지없고 우리 人群문화가  심어준 공간의식이 상상력커녕 울타리 만들기에만 열중했음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너무나도 직감적인 인군은 혜초스님과 같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하여도 필경은 全群적익 공간상상력양상에는 거의 도움이 없었고 우리들더러 아주 오래동안 공간탐구정신결핍증에 시달리게 하였다. 너무나도 실리적인 인군은 달나라 계수나무나 전설이나 전하는데만 열중하였을뿐, 고되고 메마르고 < 밥이 생길수가 없는 > 수학계산이라든가 우주공간을 자유로이 종횡무진하는 異論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을 표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고중시절 어느 친구가 하늘에 있는 뭇별이 얼마나 크다고 역설하길래 내가 뭇별이란 어느 별하나가 아니고 수많은 별을 가르키는 말이라 반박을 했다. 헌데 그 쟁론의 실용가치가 전혀 없어서인지 곁에 있던 친구들이 쓸모없는 화제는 그만하라고 못밖아주어서 우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공간의식이란 옳던 그르던, 크든 작든, 어느 인간이나 인군이나 소유하기는 하겠지만 다만 크다 넓다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알기에는 너무나도 어림도 없다, 정밀하게 알아서는 밥이 생기느냐 하는 배짱에서 얼룽땅뚱 넘겨버림이 나 또는 내가 소속된 인군의 고질이 아닐가 하는 근심을 해본다.   나도 우리도 활발한 공간의식과 실천이 필요하다.
119    [잡담63] 대표인물들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3910  추천:89  2008-09-25
[잡담63]대표인물들에 대한 생각허동식언제부터이던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중에 소수인들이 중국조선족의 대표인물로 자처하고싶어한다든가 또는 그러한 평판을 받고싶어하는 경향성을 은밀하게 내보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현실사회에서의 대표란 선거를 거쳐야만이 , 무식하게 말해서 산수계산의 절차와 통계를 거쳐야만이 대표로 됨에도 불구하고, 또는 대표란 어느 개인의 사상과 행실이 력사로 된 뒤에 사회로부터 追認되는 명칭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대표문화에 집착심을 보임은 그런 소수인들이 명욕과 리욕에 너무나도 눈과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대표란 사회의 보편성적인 인정과 희망요구 사항을 접수하고 그 희망요구사항을 실행해야만이 진정한 대표임을 알고있으면서도, 대표인척 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살판치고 있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필경은 투명정도가 불안정하고 대표문화에 대한 리해가 미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상수준을 대표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에 내재한 보편적인 의미에 비해서는 최상이란 시간에 맞물린 평가로서 대부분을 대표하지못할수도 있다. 누가 어느 령역에서 잠간 최상이라 차지한다 하더라도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최상으로 될수가 없으며 또 특정된 령역을 벗어나 전민적인 대표로 되기는 힘든 일이다. 무례한 말이지만 우리의 리익을 대표하는척 우리의 정서를 대표하는척 우리의 사상을 대표하는척 하는 자들의 꼬락서니가 참 보기가 싫어진다. 자아조립한 대표문화에 집착하는 소수인들이 밉다.
118    [잡담62] 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 댓글:  조회:3915  추천:87  2008-08-13
[잡담62]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  허동식<백두산을 독한 술이라고 하니 어떻게 산을 액체에 비유할수 있는가구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데.> 언젠가 최시인으로부터 지용문학상수상시집을 선물받으면서 최시인의 크게 억울해하던 얼굴표정을 길게 쳐다보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백두산은 산이기는 하지만 그 이미지는 산을 초월하여 정신적인 심리적인 신볼로 존재하여 왔으므로 독한 술, 말하자면 아름답게 향기롭게 빚어지여 문화적인 민족적인 감성적인 리성적인 무한의 문화내용을 간직할수도 있는 존재로 볼수있다면,백두산을 독한 술에 비유함이 좋은 시어일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사실 백두산은 참으로 우리에게는 독한 술이 아닐수가 없다.      많은 군체들이 자연물 아니면 인공물을 상징적인 정신之柱로 공유하기에 힘써왔다. 그 내속은 인간의 무가내속에서의 지혜이고 랑만이고 희망의 지속이다. 특별히 종교민족이 아닌 경우에는 군체 공동소유의 정신심리상징물에 대한 경건한 숭배심과 대대로 전해지는 의뢰심은 신화와같은 존재인듯도 하지만 사실 살아가는 응집력 등 힘의 래원으로 그 작용을 보인다.      만족도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간주한다. 일본인들도 후지산이 없으면 무조건 정신세계의 공허를 느낄것이라는 글귀를 읽은적이 있다. 곤륜산(상상중의 곤륜산)이 없으면 중화민족도 어딘가 망므속 한구석이 허전해질것이다.     륙지민족이든 해양민족이든 많은 종족들이 산에 대한 , 특별히 성산에 대한 애착심은 거의 비슷하게 표현을 이룬다.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고 민감한 말썽이 있기는 하지만 그 쟁론은 나에게는 큰 장애가 없다. 왜냐하면 백두산이라는 상징물이 나의 뇌리에 이미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깊은 밤 , 눈을 감고 나의 토끼꼬리만큼한 상상력과 미숙한 시정으로 나의 백두산을 한번 우러르자. 거창한 정서가 물결쳐온다.
117    [잡담61] 혈연과 族緣과 人緣 댓글:  조회:4159  추천:77  2008-08-11
 [잡담61] 혈연과 族緣과 人緣 허동식<피는 물보다 짙다> 라는 말에 대해 조금 생각해본다. 어딘가 혈연과 족연을 인연의 앞자리에 두는 문화습관이고 문화사유일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혈연을 비롯한 족연 등을 인연의 앞자리에 놓는다. 그러노라면 자연히 < 제 피줄도 모르는 놈이 남들을 생각해주면 잘 해주면 얼마나 진심이고 얼마나 잘 해줄가?>하는 말과 론리가 태여나게 된다. 또 < 제 민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식이 다른 종족을 사랑할수가 있겠느냐?>는 의문과 론리가 성립될지도 모른다. <피는 물보다 짙다>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지당한 경지일지는 모르지만 때로는 경우에 따라 속된 자사자리한 협애한 습관으로 사유로 전변할 가능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가족과 가족사이의 은원을 대를 물려가면서 연의적인 이야기를 꾸미던 일이 많이 발생하던 시대도 있었다. 대대로  할아버지 원쑤를 갚느라면 서로 피비린 바람속에서 세월을 보낸 이야기가 도선관에서만 보관되여있음도 아니다. 순수한 리익만이 아니라 민족감정을 전제로 하는 민족전쟁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며, 또 모든 이교도들을 짐승으로 보는 종교광인들에 의하여 종교전쟁도 있는 현실을 살펴보면서 나는 <피는 물보다 짙다>라는 말에 대하여 스스로의 의구심을 표하지않을수가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 차라리 <물이라는 溶濟가  없으면 피가 없다>는 말이 좋은 말로 생각된다.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을 갖추지못했다면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해도 그 효도가 인간의 건전한 효도일가? 제 민족을 크게 사랑한다 하더라도 다른 종족을 사랑할줄 모르는 인간의 민족애는 기형적인 민족애로 표현되지 않을가? 고 의심을 해본다.
116    [잡담60] 북경올림픽개최전 도적촬영 댓글:  조회:3774  추천:96  2008-08-01
[잡담60] 북경올림픽개최전 도적촬영허동식한국 어느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북경올림픽개최전 련습장면을 도적촬영하여 방송했다는 사실이 중국인들의 마음에 꽤나 큰 상처를 남겨놓은듯 하다. 도적촬영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촬영중에 촬영을 제지하는 중국인이 있었든 없었든, 련습장면이 텔레비에 방송된것은 부인할수가 없는 사실이다.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해석을 하든 거의 엎지른 물이다. 중국인들을 상대해서는 북경올림픽이란 무식한 말로 부모 생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날이 아닐가? 아주 오래동안 중국은 세계무대에서 소외된 배역을 하여왔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은 북경올림픽을 통하여 중국을 세계에 더욱 널리 알리고  진정한 세계일원으로서 인류활동에 동참하려는것이 진정한 심리동기로 보인다. 올림픽개최전을 위하여 중국은 거대한 심혈을 몰부어왔다. 세인들에게 중국인들에게 경이롭고 다채로운 명절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기대하는 마음> 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중에 한국 어느 텔레비방송국에서 국제관례를 타파하고 련습내용을 촬영해서 공공연히 방송했다는 일은 참으로 중국인들에게 미안한 ,례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질책을 받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한국국민들에게도 미안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약싹빠르게 한국인들에게 <선>을 보인듯하지만 사실은 한국의 이미지에 먹물을 발라놓은것이다. 도적촬영한 텔레비방송국이 한국을 대표하는것은 아니지만, 필경은 한국의 방송국이므로 일부의 중국인들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와 립장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이웃나라로서 <비밀을 고수하여>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일인데 공공연히 <발가놓는다는것>은 너무나도 큰 실수이다. 인간사이도 그렇고 나라사이도 마찬가지다. 어느 경우에는 력사적인 리익적인 은원을 벗어나 함께 기뻐할줄도 알고 슬퍼할줄도 아는 신사다운 면이 있어야한다. 남을 존중할줄 알아야 하고 남의 제일 <민감>한 구역을 회피하고 보호해줄 능력을 지니지를 못했다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는> 행위를 범할수가 있다.. 
115    [잡담59]부처님의 거룩함(허동식) 댓글:  조회:3763  추천:87  2008-07-31
[잡담59]부처님의 거룩함허동식사천성 어느 큰 티벳불교사원에서 몇해간 티벳불교를 배웠다는 조선족친구를 만났다. 좀 배우려고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친구는 티벳불교의 초자연적인 怪力을 많이 이야기했다. 나로서는 귀속에 마음에 담을수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였으므로 이 꼬라지에도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부처님의 敎義라고 할수있는, 여러 불경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내용과 수행법은  잘 모르지만은 불교를 알고싶다.하지만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속세에서 속세의 목적을 이루는, 례를 들면 경제조직으로도 활용되는 불교조직에 대해서는 조금 불신임이다. 왈가부갈 등등. 하지만 부처님은 거룩하기 그지없다.       2천여년전의 인간으로서 인간생명에 대하여 普世적인 天問적인 명상을 진행하셨고 그 명상실천을 위하여 일심으로 全力하셨다는 부처님의 이야기는 인간생명으로서의 장쾌한 행진과 랑만이 아닐수가 없다.  2천여년이 지나간 오늘날, 불교의 普適성에 대하여 비판하는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생명존재의 의의에 대한 무관심이 무성한 주위와 나의 일상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부처님께서 위대한 생명명상들을 하신 리유와는 관계없이 부처님의 거룩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여추위선생의 근간의 글 한편을 읽어보았다.중국불교사와 관련된 글이였는데 이족의 문화사상을 아주 깔보던 중국고전시기,중국인들의 문화 터는 공자라든가 로자라든가 장자라든가에 의하여 滿員이였던 상황에서도 사대부들과 황족들과 민간은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못하고(중국불교사는 멸불력사사건도 있지만 주맥은 부처님을  따름이다) 부처님 사상을 받아드린 원인의 하나가 불교 본신이 지닌  생명진미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고 한다. 말하자면 먼 옛날, 실리를 즐기는 중국고인들도 생명의 진미를 사색하는 부처님 사상에 깜짝 놀라고 그 지혜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다.       부처님의 거룩함, 나는 어느 사원이나 불상앞에서 부처님의 거룩함을 찾지는 못한다. 찾지는 못하지만 부처님의 거룩함을 즐기고싶다.
114    [잡담58] 댓글:  조회:2783  추천:97  2008-07-30
[잡담58] "권력을 세습할수가 있다"에 대하여허동식     寶鷄시에서 차를 타고 서안으로 이동하는 중, 눈길에 마주치는 고속도로 간판광고에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문자광고를 하나 읽었다.부동산 아파트의 판매광고같아 보였는데  <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내용이였다. **의 첫글자는 金변에 官자를 붙힌, 새로 조작한 한자로 의심되는 한자였고 두번째 글자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는 어느 아파트小區의 명칭인듯했는데 호매로운 판매광고였다.       새로 발포된 광고법은 잘 모르지만도 학교시절 광고관리조례를 배운적이 있으니 내 추측에는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가 있다>는 광고는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내재한 민주주주의사상에 어긋나는 광고이므로 위법광고라고 생각된다.       <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광고내용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한켠에 놓아두고 다만 그속에 내재한 무엇인가가 나를 자꾸만 울분하게 만든다.    <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우선 **아파트가 고급아파트로서 일반일들이 아니라 권력자들이 집거를 한다는 의미가 내비친다.물론 <나으리들이 모여드는 아파트로서> 아주 고급아파트구역으로 자처하려는, 경제상업적인 기교를 부리어 <멋진> 광고언어를 만들어내려는 심사가 보이기도 하지만 공공연히 권력숭배와 권력세습을 떠받드는듯한 행위는 좋은 행위가 아니다.       <**에 입주하면 권력을 세습할수 있다>는 그 광고 아이데어를 낸 사람도 좋고 부동산개발상도 좋고 고속도로광고회사도 좋고 <멋진> 광고 하나로  중국인들이 수천년이란 원가를 지불한 사회정치리상을 경이하게 박산낸다는 느낌이다.       반동광고가 번듯하게 걸려져있다는것은 상기 관련자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회배경문제도 있다.경제개혁을 하고 정치행정개혁도 한다지만은 우리중의 많은 사람들이  권력숭배에 물젖어있고 권력이 본질인 관료사회를 쉽게 받아들이고 그 지속성을 승인하고 참석하려는 문화심리를 내비기도 한다.        .  
113    [잡담57]조선족학생의 대학입시 語種선택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4529  추천:109  2008-07-24
 [잡담57]조선족학생의 대학입시 語種선택 그리고 기타     허동식조선족이 대학입시에 조선어로 시험을 보는가 아니면 중국어로 보는가는 심각한 문제이다.  조선어를 대학입시를 보려면 조선족학생은 한족학생들보다 어학수업에 조선어문이라는 과목이 하나 추가되므로 공부에 요구되는 累計시간이 당연히 한족학생들보다 많아진다.또 중국어수준도 한족학생들에 비해서는 많이 떨어진다. (물론 순수 시간적인 원인으로만 이루어지는 중국어수준 저하현상은 아니지만) .결과 대학에 입학해서 중국어수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공부에서 후진으로 되는 현상이 있다. 필자는 중국어수준이 아주 저질이여서 대학교를 다니면서 크게 힘들었다.古文은 한족학생들이 유치원 시절에 암기하는 《早辞白帝彩云间,千里江陵一日还。两岸猿声啼不住,轻舟已过万重山》이나 배운 주제에 중국고전문학 중국력사 등 사회학과를 배우는 흉내를 내느라고 아주 힘들었다. 수학과에서 나타나는 개념의 차별(조선어로 편찬된 수학교과서는 영어음역으로 표기된 개념이 많지만 중국어로 편찬된 수학교과서는 意譯이 많았던 기억이다)은 그럭저럭 극복할수는 있지만 근 2년동안 대뇌속에서 돌아가는 사유언어가가 조선어였으므로 선생님의 강의는 물론 ,중국어로 해야 할 습작 등 면에서 한족학생들의 발꿈치도 따라갈수가 없었다. 연변태생인 내가 이러했으며 <안쪽>에서 온 조선족학교를 졸업한 조선족학생들도 구두어면에서 연변조선족학생들보다  나은편이였을뿐 별로 큰 장점을 보여주지못하던 기억이다. 그리고 조선족학생은 보통 일본어를 배웠으므로 서구권리론에서 연역되는 여러가지 리론을 배울라면 서구언어의 표현식과 사유식을 리해하기도 아주 힘든 이중적인 장애를 받았다. 20여년전과 비교해서는 중국조선족사회가 중국어를 접할 폭과 수단이 넓어졌으리라고 생각해왔다. 헌데 서안에 가니 연변친구 하나가 중국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알아듣지못하여 북경 어느 학교를 그만두고 5년전부터 한국어가이드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個案으로 중국조선족학교의 중국어교육수주을 판명함은 억다짐이기는 하지만 조선족학교의 중국어교육수준이 어느만큼의 진전을 가져왔을가 의심을 해보고싶다. 독일사람들이 힘든 일을 두고 중국어를 배우는 일과 같다고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사실 중국어는 힘든 언어이고 문자임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어느 언어도 문자도 쉽지는 않다.그리고 조선어도 잘하고 중국어도 잘 하는 경우에도 사유語境의 전환도 힘든 고비이다. 상기한 어학과제를 전제로 하면 내가 생각하건대  20여년전부터 우리의 중국어교육은 낮은 수준의 언어문자교육에만 머무르고(20여년전 대학입시 중국어에서 만점을 땄다 하더라도 그 실력이 한족학생들의 초등중학교 우수생의 실력이나 되였을가?) 중국어로 사유하는 훈련과 교육을 무시하고 있지않을가고 의심을 해본다. 지금 돌이켜보면 20여년전의 조선족학교의 중국어교육은 针对性과 과학성이 부족했음을 느껴본다.상형문자인 한문에 대한 깊은 리해를 지닌 선생님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조선족에게 적합한 중국어교육방법모색이 결여되여 있었다. 교재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강의법과 훈련법을 포함한 여러 면에서 중국고등학교 교육상황을 전제로 한 중국어교육이 아니였다고 판단을 해본다. 현재 상황은 많이 개변되였을지도 모르지만 정인갑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조선족학생들의 중국어 공부는 큰 과제이며 조선족사회의 중시를 받아야한다고 생각된다.  조선족학생은 중국어를 실력적으로 배워야 하지만 또 조선어도 잘 배우면 좋은점이 수두룩하다.부동한 언어는 부동한 사유방식이라는 말처럼 조선족학생들이 부동한 사유방식을 하나 더 챙겼으므로 생존수단을 포함하여 매 개인에게 가져오는 실리와 의의는 말할 필요도 없다.또 민족동화문제가 심각해지는 오늘날 ,조선족학생들이 중국어로 대학입시를 본다면 그 결과는 학생들 대부분이 한족학교로 몰려들것이고 동화의 촉매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조선족학생이 조선어로 대학입시를 보는가 아니면 중국어로 대학입시를 보는가는 기술적인 문제로 대두되는듯하지만 실은 민족생존의 전략성적인 문제이다.길림성에서 내놓은 <중국어수준시험>제도는 중국조선족사회에게 유리한 점이 크지는 않다.대학입시에서 합격되였지만 중국어수준이 결여된 조선족학생은 예비과에 넣지못할 망정,대학정문을 들어서지 못하게한다는것은 중국의 소수민족어정책에 위반되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생존환경의 급변화속에서 조선족사회는 명석한 사유를 해야한다.중국조선족은 이중국적은 아니지만 이중신분임은 틀림이 없다. 때문에 힘들기는 하지만 조선어도 잘 배우고 중국어도 잘 배워야한다.조선어도 잘 배우고 중국어도 잘 배우는 방법과 제도화는 급선무이다, 전문기구의 설립이라든가 연구와 과학적인 실천이 아주 필요하다.
112    [잡담56]오늘을 살면서(허동식) 댓글:  조회:4179  추천:105  2008-07-22
잡담 56오늘을 살면서허동식미국을 다녀온 어느 친구로부터  < 미국은 참 좋더라,거리에 나서면 질서가 잡혀있어  성을 낼 필요도 없이 한생을 기분좋게 살수 있으니.> 하느 려행담을 들은적이 있다..   언제부터든가 나도 기분좋은 인생을 살려고 마음먹었다.어떤 일을 직면해도 어떤 사람을 상대해도 화기롭게 대하고 되도록이는 성을 내지 않고도 지나칠수있는 생활을 목적으로 하고싶었다. 헌데 오늘을 살면서 내 욕심은 잘 실현되지 않는다.  중국관방 집행문화는 우선 관리자의 편함을 우선으로 하고 피관리자의 편함을 뒤로 하는것이 통병으로 되여있다. 우리의 사회제도라든가 그 실행细则는 본의적으로는 광범한 인민대중의 장기리익을 도모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 집행과정은 변형을 이루어 집행당담자들이 자신의 편리를 도모함을 우선으로 하기에 광범한 인민대중들은 제도의 진미를 향유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어느 공직기관에 가서 일을 좀 보려해도 푸르뎅뎅뎅한 대접을 받어야하니 중국 납세자들은 어딘가 불쌍하기도 하다. 나는 사회와 회사를 제쳐놓더라도 적어도 거리에 나서면 질서가 잡힌 어떤 분위기속에서 살고싶다.하지만 현실은 거리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만나기가 많이 힘들다.        우리는 관방문화만이 아니라 민간문화도 흔히는 < 내> <우리>가 우선이고 <너> <당신들>은 뒤전이다. 공상업을 비롯한 사회경제면에서도 소비자의 편함보다도 생산자라든가 판매자라든가 운영자의 편함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국영경제운행자들이 이런 민간문화의 대표이다. 그래서 거리로 나가면 날마다 입싸움하는 장면을많이 구경하고 심지어 손찌검질하는 장면도 적지않게 만난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오늘을 살면서 웃는 얼굴과 마음으로 살기가 참으로 힘들다. 우리가 심리수행에서 락제를 쩜?/SPAN> 탓도 있겠지만 그릇된 관방문화와 민간문화의 살판질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중국사람들은 <你不够厉害, 别人就欺负你 。네가 드세지못하면 남들이 업신여긴다> 는 말로 애들을 교육하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락오된 관방문화와 민간문화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다.
111    [잡담55] 배부른 타령과 배고픈 타령 댓글:  조회:3941  추천:115  2008-07-21
잡담55배부른 타령과 배고픈 타령허동식한여름 아침이나 점심을 조금 배불리 먹으면 졸리는 경험이 있다. 아무런 욕구도 없이 자고만 싶어진다.교실에 앉아있어도 선생님의 강의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를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친구의 아이가 식성이 좋아서 잘도 먹는다. 친구는 < 너무 먹으면 아둔하니 그만 먹으라 > 하여 애 할머니로부터 꾸중을 받는다. 자연조건이 좋아 물산이 풍부한 동네는 사람들이 손발과 머리를 움직이기를 싫어할수 있다는 내용과 비슷한 글귀를 읽은적이 있다. 배가 너무 부르거나 , 상대적으로 쉽게 물질재부를 획득할수 있는 사람이나 동네나 또는 족속은 머리를 굴리기를 싫어하고 습관에 젖어 살아갈수 있겠다는 멍텅구리 생각을 해본다. 기득권일수록 향유에 젖어있고 퓽요로운 동네일수록 오락문화가 발달되여 있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부자는 3대를 못넘긴다>는 중국속어가 혹시 배부른 사람들이 손발과 머리를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사실결과를 은유하는게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헌데 배부른 사람만이 상기의 습성이 있는것이 아니라 아주 배고픈 사람이나 동네나 족속도 손발 놀리기를 싫어하고 머리 굴리기를 싫어하는 경향성이 있음도 생각해본다. 배고프면 그 누구나 <窮者思變>을 이루는것은 아니다.  가난에 지지눌려서 허리도 펴지못하고 나중에는 유전적으로 손발도 머리도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그것이 습관화되고 문화화가 되면 큰 일일수도 있겠다. 아무튼 긴 세월을 대를 물려가면서 가난을 밥먹듯한다는것은 좋은 일은 아니라 생각된다.  배가 너무 불러도, 물산이 너무 풍부해도 문제로 된다. 배가 너무 고파도, 물질재부획득조건이 너무 연약하여도  문제로 된다. 사람의 손발과 머리를 꽁꽁 묶어서 꼼짝달싹 못하게 할수가 있다. 그래서 배가 너무 부르지도 않게 , 너무 고프지도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가? 우리들더러 손발과 머리를 부지런하게 놀리는 빈부구조에 대한 산수적인 답안은 없을가? 배부른 타령과 배고픈 타령을 조화롭게 합주하는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 
110    [잡담54]大智若愚 그리고 지혜의 종류 댓글:  조회:3691  추천:84  2008-07-15
[잡담54]大智若愚 그리고 지혜의 종류허동식大智若愚란 중국고대경전인 <로자>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현재에도 일상에서 많이 사용된다. 물론 사용하는 자와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된다. 하지만 그 순수한 문자의미가 우리말의 < 큰 지혜는 아둔하게 보인다.>고 번역이 될가?       지혜를 작은와 지혜 큰 지혜로 나눌수가 있다면 나는 순수 경험과 五感만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혜를 작은 지혜로 생각하고싶다. 반면에 인간의 인식상상력이 리용되고 오감만이 아니라 엄정한 사유론리를 거쳐 인간의 생리적인 국한성을 벗어나 만들어지는 지혜를 큰 지혜라고 생각하고 싶다.          보이는것만 만져지는건만 들리는건만 맛볼수있는것만 맡을수있는것만에 머무른다면 , 순수 직감적인 경험에만 머무른다면 오늘날의 인간과 세상은 어떻게 될가? 지혜와 인간사유의 필연련관성에 미치고나니 문화란 부동한 사유방식이란 말이 다시 새삼스럽다. 직감적인 경험적인 지혜는 누구에게나 차려지는 챤스가 거의 균형적이라 볼수는 있지만 사유방식에 의해 배출되는 큰 지혜와 작은 지혜는 균형적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과 종족에 따라 불균형을 이루어왔다.     지혜를 또 속세의 지혜와 정신신앙의 지혜로 나눌수가 있다면 나는 모든 속세의 지혜를 작은 지혜, 정신신앙의 지혜를 큰 지혜로 보고싶다. 정신신앙의 지혜는 실용적인 면은 결여되여있지만 < 세상은 인간은 무엇인가? 본질은 무엇인가?>등등의 의문과 탐구를 진행할수가 있음이 바로 인간특대의 근본특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큰 지혜는커녕 작은 지혜마저 잘 배우지를 못했다. 학비가 부족한 탓일가 아니면 운이 나쁜 탓일가?   나를 두고 당신은 大智若愚라 평판해주는 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허허, 나에게 그런 안위를 해주시는 분에게 술 한잔 대접하리라.  
[잡담 53]<현대판라성교이야기>의 내막-기둥 하나로 집을 지으려는 일허동식건축은 전혀 모르지만 기둥 하나로 집을 지을수 있을가 생각해본다.기하상식으로는 삼각형이 제일 온건하고 실물로는 기둥 4개인 집이 많은데 기둥 하나로 버섯이나 우산과도 비슷한 집을 지을수가 있을가? 그리고 버섯형 또는 우산형 집이 얼마나 실용적일가 멋있을가?인간도 인간사회도 건축물로 볼수가 있으리라. 인간은 금방 태연나서는 인성이 텅 비여있는 空白물로서 可塑성이 큰걸로만 알고있었다. 말하자면 주위에 있는 사람과 사회가 마음대로 주물러서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수 있다는것이다. 인간이 可塑성이 크다면 인간사회도 可塑성이 큰걸로만 알고 있었다.어느 주의라든가 어느 정영인물의 욕구대로 인간사회는 주물러서 그 리상에 따라 만들수 있다는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인간과 인간사회라는 건축물에 기둥 몇개를 세울건가는 과제는 <과학>으로 둔갑한 주의와 정영인물들의 욕구로 해결된다고 믿어왔고 현재도 다소 그런 이미지속에 살고있다.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너무 간단하고 목가적인 판단을 진행하고 다면적이고 천성적이면서도 변화적인 복잡한 인성에 대하여, 또 그러한 인성과 관련이 되는 인간사회에 대해 <기둥 한개>의 주장을 하던 과거는 너무나도 고지식한 리상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판라성교이야기>의 내막은 <기둥 한개>로 집을 지으려는 사회리상이 인간사상과 사회와 이델레오기를 독점했던 과거에 대한 또 하나의 특색적인 회고로 보여진다. <현대판라성교이야기>는 과거의 인간건축법과 사회건축법에 질의를 표하고 거절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 질의와 거절이 조금은 은둔되고 애매한 불쌍한 라성교까지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적어도 과거를 되돌어보는 작법과 인성을 존중하고 인성자유를 존중하려는 생각은 내가 배울점이다.
108    [잡담52] 정신신앙과 속세사상(허동식) 댓글:  조회:4040  추천:76  2008-07-14
[잡담52]정신신앙과 속세사상허동식종교란 본질적으로 中性존재이다.인간과 신령사이의 존재형태관계를 표현하는 비리익적인 순수한 사유적인 의문이고 해답이다.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이 인간본질에 대한 인식이다>라는 말을 재삼 생각해보게 된다.      헌데 내가 사는 세상에서 종교는 필경은 속세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신앙사상이므로 속세에 리용되는 경우에는 중성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실례가 많다. 이런것들을 종교사상의 속세화에로의 회귀라고 일컫는다면 종교속세화는 종교조직 존재에서 집중표현을 이루고 있으며 그 속세화중에 종교사상과 종교조직이 또 많은 리익세력에게 리용되면서 칼 맑스의 <정신아편>이라는 평판도 받았다.      종교사상의 속세화가 정신신앙이 속세화되는 하나의 길이라 한다면 또 하나의 길은 속세사상의 정신신앙화이다. 속세사상이 인간의 정신신앙으로 된 력사사실은 많다.히틀러의 게르만민족주의가 거의 독일인들의 정신신앙으로 되였던 일,공산주의가 공산권의 정신신앙으로 되였던 일,중동의 민족종교주의가 일부 이슬람인들의 정신신앙으로 되여있는 일들이 전형사실로 보여진다.속세의 사상은 필경은 리익을 둘러싼 사상이므로 정신신앙으로 전변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리익사상이고 중성존재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정신신앙으로부터 속세사상으로의 길,속세사상으로부터의 정신신앙에로의 둔갑,이런 사회력사사실에 대하여 통일적인 가치판단을 내리기는 힘든 일이다.하지만 <굴러가는 력사의 수레바퀴>도 <밥을 먹고 할일이 없는 사람들은> 많이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는듯하다.       英美문화의 특징이라 할수 있겠는지는 모르지만 영국청교도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 영미문화권형성중에 정신신앙과 속세리익의 상대적인 분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사회문화형태이다.그들은 인간의 정신신앙을 존중하는 한편 또 속세리익도 존중하며 그들의 린접을 견결히 반대하고 되도록이는 정신신앙과 속세리익을 갈라놓는 작법을 취한다. <세계경찰> 미국과 옛날에는 미국의 <형님>이였던 영국의 행실들까지 살펴보고나면 그들의 <경찰행위>에는 실리적인 행위외에도 정신신앙의 자유를 보급하려는 의도와 흔적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그래서인지 과거와 현재 미국은 속세사상이 정신신앙으로 된 국가를 <때려잡기>를 좋아하고 정신자유가 결핍된 국가를 <때려잡기>를 좋아하는듯도 하다. 나는 <미국인들은 미국생활방식을 수출한다>는 말을 두고 정신신앙과 속세리익의 상대분리법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고싶다. 
107    [잡담51] 민족주의와 우리 댓글:  조회:3747  추천:87  2008-07-12
[잡담51]민족주의와 우리허동식민족주의는 世俗적인 리익적인 사상이고 실천이다. 민족주의는 情境적으로 정치리용적으로 또는 민족내환경적으로 신성한 가치면을 지니고 있을수도 있겠지만  필경은 언어와 지역과 종족의 계선을 초월한 普世적인 사상이라든가 종교와는 달리 그 신성함이 뚜렷한 국한성을 지닌다.      어느 종족의 민족주의도 그 자취를 살펴보면 력사情境이라는 구체조건의 지배를 받아왔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어느 종족의 민족주의도 아주 먼 옛날부터 있은 원초적인 사상과 주장이 아니라 특정된 력사환경의 산물로서 오늘까지 그 행적을 이어오고 있다.       민족각성이라는 낱말로 민족주의의 발원을 해석하는 경우가 있듯이 부동한 종족의 광범한 접촉교류가 시작되여서부터 각 종족사이에 존재한 정치경제문화의 사실적인 실력불균형과 불평등 그리고 민족갈등이 민족주의 사상을 대폭으로 분출시켰다. 그래서 인류의 발길과 눈길을 크게 넓혀준 신항로개척 시대가 민족주의폭팔의 전주곡으로 보여진다.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없는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도 먼 옛날부터 존재하여 온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주의란 전민족적인 민간적인 사상의 하나로 전변된것은 근대로부터의 현상이라 짐작된다.      근대로부터 현재까지 그 맥락이 선연하게 보여지는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하여 좋은것인가 나쁜것인가 하는 가치판단을 한다는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이며 구체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필요하다.       특별히 단순한 민족적인 감정에만 머물어 민족주의에 <신성>이라는 옷만 입히는 부류가 존재하는 오늘날,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해 랭정한 생각을 해봄은 아주 필요한 일이다.         격변시대에 거의 동화의 변두리에 있는 중국조선족은 인구적으로 지역적으로 보면 렬세족이다. 렬세일수록 민족심은 강력하게 편격적으로 로출을 보일수가 있다.그 마이너스 면은 다른 종족에 대한 배타성이라든가 자아망상증이라든가 자아반성결핍 등으로 보여질수가 있다. 사회공리성과 인류공리성을 떠난 실리적인 판단만 하여도 우리의 민족주의가 다른 종족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기 >쉬우므로 우리는 그런 맹목적인 비리성적인 민족주의는 삼가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한 재정리는 과거 또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을수도 있는 다른 종족에 대한 맹배와 맹종을 비판해야함과 마찬가지로, 민족자비심을 비판해야함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과제가 아닐수가 없다.       나로서는 이제는 누군가 때로는 <민족을 위하여>하는 말을 내비치면 그 空泛성에 놀라 멍청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행위가 민족학교를 하나 만들고 조선어문을 가르치는 일보다도 너무 재미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106    [잡담50] 민족의 변천과 우리민족 댓글:  조회:3314  추천:71  2008-07-12
[잡담50] 민족의 변천과 우리민족허동식      중국은 력사문화적으로 수많은 종족이 융합되여 새로운 공동종족을 구성하는 길을 걸어왔다. 그 중요한 원인은 중원지역이 주변지역보다는 정치경제와 문화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했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해왔으며 또 비교적 봉페적인 생존환경단원과 련관이 된다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중국에 사는 우리는 종족이란 단순하게 융합의 길만 걷는줄로만 리해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헌데 시각을 조금 넓게 열어보면 종족이란 분화의 길을 걷는 역행적인 력사사실도 있음을 알게 된다.       먼 옛날에는 유태인도 아랍인도 모두 아랍지역의 闪족이였지만 현재는 부동한 종족으로 존재하고 있고 인도인들은(인도인들은 혈연적으로 하나의 종족으로 볼수는 없지만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인도교와 이슬람교의 모순과 영국식민주의자들의 分治책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독립국가가 생겨날 정도로 부동한 종족으로 분화되였고 몇년전에 전유고슬라비아 波黑지역 주민들도 종교전쟁으로 부동한 종족으로 분화되였다.       겉으로 보건대는 종족분화는 종교와의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종교가 표현상이고 세계정치의 重新洗牌라는 리익분활이 내핵적인 인소로 작용하여왔다. 그러므로 실력이 있는 종족일수록 개방과 포용을 주장하면서 종족융합을 걷고 실력이 작고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종족일수록 분화의 길을 걸을수도 있다는 나의 망상을 해본다.       듣는 말에 의하며 미국은 <종족도가니>로서 어떤 종족도 언어와 피부색과 종교신앙을 물론하고 마꾸 끓여서 새로운 종족잡탕을 만드는 나라라고 한다. 헌데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먼 옛날에는 융합적이였던 조선인은 현재 남북분렬상태이고 그 원인을 따질 필요도 없이 거의 분화의 상태임을 알어야한다.다만 언어를 비롯한 동일한 문화상과 지역련접성 그리고 수천만 동포들의 心力에 의하여 종족분화가 저애력을 받고 있을뿐이다.      종족융합이 좋은가 종족분화가 좋은가 하는 가치판단은 내리기는 쉽다.하지만 종족융합도 좋고 종족분화도 좋고 피눈물이 얼룩진 결과가 아닐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력사책은 자신에게 유리한 일면만을 결과성적으로 과대포장하여 기록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력사책만을 믿어서는 아니된다.종족융합과 종족분화의 과정은 만고백성들에게는 큰 시대적인 대가를 요구함은 긍정적이다.
105    [잡담49] 다시 합정과 합리 댓글:  조회:3471  추천:67  2008-07-09
 [잡담49]  다시 합정(合情)과 합리(合理) 허동식      참으로 문학상 명목이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거의 지나가는 바람처럼 문학상 명목이 많아졌다. 문학상이 많아졌다고 해서 우리의 문학작품이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느낌은 받은적이 없다. 또 수많은 수상문학작품들 모두가 빼여졌다는 느낌은 받은적이 없다. 실말을 해서 문학상 명목에 비해서는 좋은 작품들이 얼마 안되고 좋은 수상작이 얼마 안된다는 느낌이 나날이 커가고 있다.       땅덩어리가 커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중국은 문학상이 즐비하다. 헌데 세월과 인간들 심미에 견디여낼만한 것들은 오히려 아무런 문학상도 받지못한 실례가 수두룩하니 문학상에 대해 의문부호를 내걸지않을수가 없다.        중국문단은 이렇고 우리문단, 바로 조선문으로 지탱되는 문단은 문학상을 둘러싸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가? 큰 차이가 없다. 명목이 많아서 좋은것들이 많은것도 아니고 문학상을 받았다해서 세인을 감동시키는 작품이 아닌 경우가 많다.        원인은 많겠지만 합정과 합리라는 시각으로 한번 들여다 볼수가 있겠다.          인맥을 둘러싸고 문학상을 주는 일은 참으로 적지는 않다. 누구누구는 하면서 줄서기를 한다든가 서로 주고받기를 한다든가가 현황임은 사실이다. 합정적이다. 인정세상이니 합정된 일을 해야한다. 허지만 그 합리성에 대하여서는 누가 책임을 질건가? 그 결과는 어떠할가? 어리석은 물음이다. 대답도 불필요하다.         작자를 평하지 말고 작품을 평하는 문학상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지않으면 그저 웃음 하나로 문학상을 지나치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또 소위 무엇을 추구한다는 분들이 합정된 일보다도 합리된 일을 많이 촉구하시면 좋겠다.
104    [잡담48] 合情과 合理 댓글:  조회:3499  추천:70  2008-07-07
  합정합리란 중국어에서 많이 쓰이는 낱말이다. 다른 언어에 합정합리란 낱말이 있느지 있다면 또 어느 정도 사용되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합정합리란 낱말에는 중국의 과거와 오늘이 중밀도로 재현되다 생각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부터 중국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린지가 2000여년이 되지만  민간사회는 물론 廟堂에 집정한 많은 어르신들마저도 현재까지 줄곧 血緣과 地緣을 출발점으로 하는 합정이라는 운행법칙을 지켜왔다. 그래서 혈연과 지연을 비롯하여 學緣이라든가 姻緣이라든가를 파생하고 력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합정緣을 종횡으로 표현하면서 감성세계가 지배하는 리익관계를 그야말로 합정적으로 구축하여왔다.       합정합리에서 합정이라는 낱말이 합리라는 낱말보다도 先을 차지하고 또 현실에서도 우리가 사물을 관찰하고 시비를 분별하고 일을 풀어가는 루루가 합리대신 합정이 살판치는 현상들을 일별하고나면 중국은 인정세계이고 합정세계이며 합리란 언제나 지각생임을 느껴본다.     남방빙설재와 문천대지진을 통해 우리는 또 한번 중앙집권의 강력성을 알게 되였다. 강력한 행정권력체계로 빠른 시일내에 여러가지 재난을 대처하는 방법은 먼 옛날부터 중국중앙집권이 사용한 상투수단이다. 남방빙설재와 문천지진중에 우리의 물력과 인력 그리고 재력에 대한 대집중능력은 소국인은 혀를 찰 정도였고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의회의 법안을 통과할 필요성도 없이 진행되엿으므로 엄지손가락을 내밀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동족동국이라는 감성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재난을 대처하는 방법의 합정성은 누구나 수긍적으로 받아드린다. 하지만 그 방법의 합리성에 대하여 질문하는 사람은 아주 적은듯하다.비상사태에 적응하고 재난을 이겨내는 機制가 단일적이고 너무나도 행정적이면 그 마이너스면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물력과 인력 그리고 재력에 대한 랑비가 크고 효률성이 제한되고 형식주의가 살판치고 그 난장판속에서도 무엇을 좀 건져보려는 각계의 인사들이 재난현장과 텔레비와 인터넷에서 여러가지 쇼를 벌리고 있음이 상술한 방법의 마이너스면이고 합정사회의 비과학성이고 부족점이라고 생각된다.           합리라는 낱말을 합정합리에서 단독으로 분리하면 언어적으로나 습관적으로 합정이라는 낱말의 대체품으로도 된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어떤 일을 두고 합리하다 평가를 판단을 한다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합정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우리의 문화배경이다. 고장난 현금지출기에서 은행돈을 도덕질했다가 과분한 판결을 받은 어느 농민공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동정심을 보였고 또 법원의 판결내용과 量刑이 합리성이 결여되였다고 하는 사람들중에 소수의 법학자들을 내놓고는 대부분은 중국법률과 법行의 어떤 부분에 존재하는 허약처와 비과학성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현상을 살펴보면 또 한번 중국은 합리보다도 합정이 중요하고 일위적이고 패권적임을 느껴본다.          농경사회가 끝나고 이미 공상업시대가 시작되여있는 오늘날, 합리보다도 우선 합정에 목매인다면 많은 외국인들은 중국인들을 보고 도리머리를 저음이 리해가 되는듯도 하다.중국에 장사하러 왔는데 담판석이 아닌 술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는 그런 이야기는 이제는 웃으면 대할 일이 아니다.  합정이란 우리의 전통에 맞는 말이다. 얼마나 인정미가 넘치고 얼마나 미학적인 낱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 합정이라는 허울아래 합리를 부정하고 합리를 대신하고 온갖 비리를 미화하는 인간들을 밉게 생각한다. 그리고 합정이라는 미명하에 비합리라는 현상이 우글거리는 어떤 풍경이 나타날가봐 우려심을 보이기도 싶다.      
103    [잡담47] 인프레(허동식) 댓글:  조회:4184  추천:90  2008-07-01
[잡담47]인프레허동식인프레는 산호랑이다. 동물원 쇠창살속에 갇힌 호랑이도 아니고 <종이범>도 아니라 크게 으르릉거리는 호랑이다. 헌데 산에서 내려와 행악질을 하려는 산호랑이는 누구를 먼저 잡아먹을가? 실험방법으로는 그 답안을 얻을수가 없다. 고운 사람을 먼저 잡아먹을지 살찐 자를 먼저 잡아먹을지는 실험으로는 알 일이 아니다. 숫호랑이는 녀자를 잡아먹을거고 암호랑이는 남자를 잡아먹을거고 하는 말은 술상에서 친구들끼리 지껄이는 우스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무튼 누군가 산호랑이 미식거리로 되여야 일은 풀린다. 산업경제가 빈약하고 농업이 뒤진 중국에서는 인프레가 오면  매번마다 농사군들이 제일 힘들다. 농업자료가격은 엄청나게 뛰여오르지만 농산물가격은 거의 앉은 자리에서 뱅뱅 돌림을 하고, 그렇다고 농사군들이 벌거벗고 살수는 없고 모든 생활소비를 농산물소비로 대체할수는 없고(례를 들면 알곡을 애들의 학비로 바치는 그런 일) 그저 그렇게 응응 하는 앓음소리를 내고는 이불짐을 들고 도시로 들어온다. 그래서 어떤 시골은 금방 건설하기 시작한 새농촌도 텅텅 비여야 한다. 농사군들이 시골에 들어온다고 도시사람과 동등하게 인프레의 성화를 받는것은 아니다. 작년인가 돼지고기가 갑자기 가격이 배로 오르면서 누구의 말을 들어보니 도시에서 돼지고기풍파에 제일 시달리는 사람들이 바로 <민공>이라 하였다. 도시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별로 즐기지않아 돼지고기풍파를 이길순 없어도 그럭저럭 피해다닐 여건은 되지만, 건춘장에서 고된 일을 하는 <민공>들은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로 생활개선을 해야하므로 고향의 돼지고기보다 엄청 비싼  돼지고기를 마음대로 사먹지는 못하고 입만 쩝쩝 다시고 있다나? 경제학에 恩格尔系数라는 명사가 있다. 생활필수품소비가 소비중에 차지하는 비률을 해명하는 명사로서 먹고 입고 하는데 소비가 많을수록 그 계수가 높아진다. 경제가 락후할수록 경제능력이 없을수록 인간의 恩格尔系数가 높다. 또 인프레중에서도 생활소비재의 인프레가 산호랑이중의 왕이므로 우리의 매번의 생활소비재 인프레는 우선 누구를 잡아먹는지 이야기할 필요성이 없는듯하다. 거리로 나가면 시골사람들이 엄청 많아졌음을 느낀다. 구두 닦는 아저씨하고 물어보면 몇푼지기 땅을 부치기보다는 그래도 2원씩 하는 구두닦기가 벌이가 좋다고 한다. 헌데 구두 한쪽도 완전히 닦지를 못했는데 쪽걸상을 들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도망을 한다. 그 구경을 몰라 < 그래도 구두 하나는 거의 완공이 됐으니 1원만 받으라 > 롱담 비슷한 소리를 지르는 중에 저쪽에 제복을 입고 푸르딩딩해서 오는 城管아저씨가 보여 구두닦던 아저씨가 부랴부랴 도망을 한 내막을 알고 하나는 번들거리고 하나는 어지러운 구두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혼자서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농사군들이 도시로 진입해서 무질서를 가져옴도 사실이다. 큰 거리든 골목이든 하고싶은 난전을 되는대로 벌리고 교통을 난잡하게 만들고 <문명도시건설>에 먹칠을 하고 <죄증>이 태산같다. 헌데 그들이 산호랑와 산업구조조절중에 제일 큰 대가를 지불한다는 생각이 들면 참으로 동정심을 죽일수가 없다. 
102    [잡담46] 시대의 아픔(허동식) 댓글:  조회:3812  추천:74  2008-07-01
[잡담46]시대의 아픔허동식아주 어릴적부터, 소위 코물을 빨아먹는 시절부터 시험지에 <네가지 현대화>란 무엇인가 답장을 쓰느라고  진땀을 흘려왔다. 향간에는 부모님과 < 네가지 현대화를 실현한 다음에 나를 낳을실거지> 하는식의 해학어가 류행될 지경으로 모두가 <네가지 현대화>를 크게 동경하고있었다.쏘련의 향간에서 공산주의를 <소고기 감자볶음>으로 리해를 진행했다는 말이 진말이라면 우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못지않은 통속된 방식으로 <네가지 현대화>에 나름의 주석을 붙였던것이다. 례를 들면 시골에서는 아주 귀중품이던 자전거가 집집의 소유물로 될것은 물론일거고 멀리 있는 학교를 통학하는 애들은 통학차를 리용할수 있을거고 또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수 있을거고 등등이 <네가지 현대화 실현>을 은근히 바라던 나의 심정 같은거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생산액을 살펴보든가 내 물질생활수준을 살펴보면 우리가 <네가지 현대화>를 이미 실현했다고 본다. 물론 도시와 시골의 물질소비재라든가 생활방식이 현저한 차지가 아직은 존재하고 있지만 적어도 내 어릴적의 <네가지 현대화>에 대한 표준과 비교할진대 <네가지 현대화>는 이미 <실현>되였다고 판단해본다.     헌데 <네가지 현대화>를 실현하면 잘 입고 잘 먹으면 사람의 진통이 적어지리라는 어릴적의 동경하고는 다른 현실을 날마다 면접해야 한다. 개인적인 진통이  집합되여서 나라적인 민족적인 시대적인 아픔을 이룬다고 한다면 목하 내가 사는 시대는 아픔이 없는것은 아니다. 많다. 7월 7일, 내가 사는 동네에서 올림픽성화봉송이 있는데 나도 길거리에 나가 구경하고싶다. 헌데 듣는 말에 의하면  시민들이 마음대로 구경하는 봉송이 아니라, 정부에서 조직하여 사전에 조직된 사람들만이 접근할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나로서는 진통을 느끼지않을수가 없다. 올림픽의 정치화는 국제적으로도 또 중국의 립장으로도 견결히 반대되는 일조인데 어찌하여 현실은 올림픽정신하고는 거리를 두고 이색적이 운행도 진행되고 있을가? 지방정부의 구체적인 고충은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티벳독립분자의 파괴활동을 방지하느라고?) 중국공민으로서 납세자로서 자원적으로 길가리에 나서 응원이라도 해본다는것이 금지된다면 어느 정도는 올림픽에 대한 못마땅한 리해이며 또 북경올림픽은 우선은 국민의 돈이 투자되여 진행되는 행사임을 모르고 하는 쇼라고 생각된다. 중국 어느 지역이나 모두가 이런식으로 성화봉송을 한다면 상술한 나의 진통이 바로 나라적인 아픔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인간사회란 책속에 씌여진것처럼 완전미결한 사회는 없다.사회진보는 있어도 월궁같은 환상의 인간세계는 도래할수가 없다. 인간이 어떻게 교묘하게 자연을 정복하든 리용하든,우리의 물질소비가 어떻게 풍부하든 , 인간으로서의 욕구본성과 인간과 인간사회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그 어느 시대마다 진통을 하지않는 시대는 없다. 소위 위대한 시대란 정치가들이나 력사가들이 인간세상의 개변이 집약되고 집중표현이 된 시대를 분식하는 과대평가하는 언어임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우리도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감성적으로 격정적으로만 보지말고 , 조금 더 리성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그래야만이 더 좋은 시대를 만들 가능성이 있는것이 아닐가.  
101    [잡담45] 인간령성과 원초미의 추구 댓글:  조회:3667  추천:80  2008-06-27
[잡담45]인간령성과 원초미의 추구 허동식     스스로 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이고 인간의 때가 묻지않은 것들을  아름답다게 받아들이고 즐기는 인간이라 자처해왔다. 산을 바라보면 아무런 건축물도 없는 산이 좋았고 정교한 옥조각품보다도 징이 가지않은 옥돌 원석이 좋았고, 정원에 심은 나무가 원예사인지 리발사인지 하는 사람에게 미용수술을 당하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그 원인은 내가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주는 아름다움에 사람이 손을 대면 자연의 진면모가 회손이 되고 사람몸에 내재하는 어떤 독기가  어울릴수 있다는 미신에 가까운 우려심에서 찾아본다. 하여튼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심성이 대응물에 대한 심리감응이고 욕구라는 어느 리론과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몰라도 인공되고 조잡화되고 사람 냄새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움은 아무리 걸작이라 할지라도 나의 눈에 들지않는다는 습관을 고집하고 있었다.      근간에 어쩌다가 가구시장에 들어가보았다. 물론 가구의 실용성과 판매가격을 살펴보고나서  가구장사군들의 과장되고 포장된 미사려구들을 전혀 무시해버렸다. 소위 새로운 재료로 조립된 멋지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그것들을 살펴보면서 좀 마음에 드는 가구가 없는것은 아니였지만 그 판매각격들이 <아이보다 배꼽이 클> 지경이므로 나의 힘들고 고된 가구시장행이 그만 아무런 결과도 이루지못했다.      나중에는 누구의 권고에 나는 나절로 가구재료를 사오고 좋은 목수를 청해다 가구를 짜는 소위 包工不包料라는 경제적이고 자유로운 방안을 택하게 되였다. 건축자재인지 장식자재인지 하는 도매시장에 가서 물건구입을 하고 강소성이 고향이라는 목수 한분을 청했다. 아주 어릴쩍에 고향에서 강소성목수들이 시골을 다니면서 단스(이불장)와 꼬디꾸이(高低柜)를 짜던 기억과 연변목수들과는 전혀 다른 그들의 손재간을 기억하고있는터라 좀 희망을 품고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나더러 역시 실망을 느끼게 하였다. 현재 목수들의 공구는 아주 기계이고 톱이라든가 대패라든가가 전기용구였고 또 재료가 실목이 아닌 인공합성널판지여서 소위 짜여진 가구들이 조립된 립체판자였기 때문이였다.      실용성만 보이고 그 심미성은 전혀 운운하지못할 지경으로 기계의 냄새와 흔적인 진동하는 령성이 없는 가구들 , 나로서는 몇해 지나면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거라 판단이 되는 립체판자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고향에 있는 누나한테 " 누나 , 그  전번에 팔아버리겠다던 20년 넘는 단스 말이요, 절때 팔지마오, 그게 짠 가구돼서 앞으로 돈이 될거요" 라고 전화 한통을 했다.      조립된 립체판자가 목수의 손과 지혜와 그리고 령성이 너무 결여되고 다만 기계화시대의 건방진 냄새만 퍼붓기에 나는 참으로 싫어진다. 연변말로 "부스깨나 있으면 다 패서 태워버릴 것들"이 나의 시야를 흐트리고 정서를 흐트린다.      원초적인 미를 신앙하는 내가 가구를 대하며는 왜서 인간의 령성이 있는 미를 추구할가?  원초적인 미를 완전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집안에 원초적인 가구(례를 들면 통나무를 새끼로 묶어서 만든)를 놓아야 하는데 나는 왜서 명나라가구와도 비슷한 목수들의 재간이 스며있는 원목가구를 원할가?   나로서는 아직 리해를 풀이할수가 없다. 모순되는 심미정서가 아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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