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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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잡담122]"곽원갑"으로부터 "엽문"에 이르기까지의 套路 댓글:  조회:4441  추천:37  2010-05-06
      인터넷에 영화 <엽문2>가 잘도 판매된다는 뉴스가 올랐다. <엽문1>은 구경한적이 있는데 때마침 텔레비에 그것이 방송되므로 다시 한번 대충 구경하는것처럼 하였다. 엽문은 력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다. 광동성 佛山인으로서 영춘권술 교관으로 되여달라는 일본점령군을 피하여 홍콩으로 건너갔고 뒤에는 무술관을 꾸렸으며 영화배우 이소룡의 스승이다. 그러나 력사적으로 존재한 엽문은 영화 <엽문1>에서 나오는 뛰여난 무술가이고 애국주의자이고 중국인의 분풀이를 잘도 해주는 엽문과 어느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을가? 나의 판단에는 엽문이라는 이름만을 내놓고는 아마도 만팔천리는 된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물론 예술작이고 상업목적을 지닐수도 있다. 때문에 력사에 실존하는 엽문의 이름만을 빌릴수는 있다. 그런데 나는 <엽문1>를 시청하면서 갑자기 20여년전에 즐겨 구경하던 텔레비 드라마 <곽원갑>의 생각되고 <엽문1>이 많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원갑도 력사에서 실존하는 천진의 무술가이다. 러씨아 권투수를 때려팬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텔레비드라마 <곽원갑>에서의 곽원갑도 력사에 실존한 곽원갑하고는 만팔천리 거리를 둔 인물이다. 중국의 표현무술은 套路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홍콩인들에 의하여 제작되는 무술영화나 무술드라마도 아마  套路가 잠재하는듯 하다고 생각한다. <곽원갑>이든 <엽문>이든 모두가 그 套路에 찍혀서 만들어지는(비슷한 력사인물을 찾아내여 렵기적인 애국주의자로 부상시킴)것들이다. 그러한 套路는 이제는 실증나는것들이고. 재미없는것들이다 그런데 왜서 <엽문1> <엽문2>는 잘도 판매되는것일가? 조금은 이상하다. <곽원갑>이든 <엽문>이든 흔상성이 있고 오락성도 있다. 그리고 대폭적인 선동성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심심풀이로 적으로 구경하는 관중들더러 순간적인 충동적인 애국열을 훨훨 불타게 할수가 있다. 그런데 가석한것은 그렇게 훨훨 불타오를수가 있는 애국열들은 거지반은 套路적인 애국열에 불과하다는것이다. 시간은 류수인데 애국열이 套路에만 갇혀있는것이 좋은 일이 아니다. <곽원갑>과 <엽문>에 나오는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침략자들은 엄청 가증스럽고 중국사람들은 선량하고 어지고… 나중에는 외국무술사를 크게 때려패고 그래서 다시 당하고 그러면서 민중의 애국의식을 자각시키고… 그러면서 그러한 내용을 쳐다보는 관중들더러 애국열에 불타게 하고 주먹을 불끈 감아쥐게 하고? 이러한 套路는 어느만큼의 관성과 생명력과 사회의의를 지니고 있을가? 나는 조금은 부정적인 판단을 해보고싶다. 그리고 나는 <곽원갑>이든지 <엽문>이든지를 물론하고 그것을 구경하는 관중들이 套路라는 옹노에 그만 걸려들기를 바란다. 듣는 말에 의하면 花拳绣腿는 격투술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는데 애국주의에서도 花拳绣腿는 어리석은 짓거리다.    감숙성 란주에서
179    [잡담180]중국의 三立說 그리고 물질재부창조에 대하여 댓글:  조회:3729  추천:32  2010-04-27
중국은 三立說 문화가 줄기차게 성행하여 온 나라이다. 적어도 공부를 하는척 하는 문화인들속에서 三立說은 2천년 이상으로 튼튼한 또치카로 중국문화전통을 지키여왔다. 소위 三立說은 중국의 첫번째 편년사저작인 <<左傳>>에서 기록된 이야기에서 발원하였다고 한다.  기원전549년,鲁国의 大夫인 穆叔이 晋国으로 公家출장을 갔는데 晋国의 卿인 范宣子의 도전적인 질문을 하나 받었다. <<고인들이 死而不朽를 거론한적이 있는데 그대는 무엇이 死而不朽인가고 생각하누?>>  침묵을 행하는 穆叔이 대답이 궁한듯하자 范宣子는 스스로 <<나의 조상들은 虞舜전에는 陶唐氏이고 夏뒤에는 御龙氏고 商뒤에는 象韦氏로서 周朝때에는 唐社氏이다. 周王室이 衰败된 뒤에  우리 晋国이 中原의 盟会를 다루고 집정자는 바로 范氏이다. 소위 死而不朽란 바로 이런 일이 아니겠수?>>하고 해석하자 穆叔이 끝내는 대답하기를 << 그런거야 世禄이지 뭐! 어찌 死而不朽라고 말하겠누? 鲁国에 이미 작고한 藏文种이라는 大夫가 있는데 그가 죽어서도 그의 말씀들은 世世代代로 사람들의 버림을 받지를 않고 있는데 그런거야말로 不朽가 아니겠누? 고인들은 제일 큰 大上을 立德이라 하였고 그 다음에는 立功이라 하였고 세번째는 立言이라 하였거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3不朽일건데!>> 중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령혼의 탈출이 아니라 자손의 번창으로서 생명개체의 영생을 구도하는 민속문화를 고집하여왔다. 근데 목공이 감히 자손번창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3립설로 3불수로 인간생명의 진미를 제시하려고 덤벼든것은 일개 거사가 아니였을가? 그 뒤에 세상이 흐르면서 <<좌전>>이 유학의 경전으로 되고 3립설은 3불수는 중국의 전통사상으로 전변되여 중국의 인테리들을 꽤나 많이 지배하여왔고 많으나 적으나 세속사회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추구라는 큼직한 도장을 찍어두었다. 그래서 3립설과 3불수는 중국사회를 진맥하고 중국사회를 이끌어나간다는 중국문화인들의 중축적인 인생가치관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중국문화인들과 중국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최고의 境界로서 자손번육이 아닌 립덕 립공 립언으로서 인생을 빛내려는 수단과 꿈이다. 3립설이 적극적인 의의가 없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족점도 있다. 우선은 공리주의를 떠난 형이상학적인 생각이 결여되여 인간본원에 대한 명상이 부족하다. 리타적인 개념이 착용되여 <<남들더러 배불리 먹게 하고 따뜻하게 입게 하는>>  욕망은 번뜩이지만 남들의 정신세계를 행복하게 만들려는 종교적인 형이상학적인 명상이 결여되뎠으며 부처님의 반야와 같은 대지혜 대명상과는 조금은 경지적인 거리를 둔다. 그래서 중국전통문화는 현실적인 문화이고 래세에 대한 관심이 없는 문화라는 평판을 받는다. 물론 세계각지의 래세와 정신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들이 중국에 많이 종착하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중국선종을 대표로 하는 중국식종교로, 현실을 위하여서 서비스하는 사상으로 조직으로 전변되였으며 끈끈한 3립설과 3불수를 이겨내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공자의 <<살아가는 일도 잘 모르고 어려운데 죽은 뒤의 이야기는 뭐라고 하는건고?>>가 지금까지 련속되고 있다. 다음에는 3립설과 3불수의 깊이에는 물질재부창조와 물질재부창조행위에 대한 지나친 기시책이 숨어져있다고 생각된다. 3립중에서 립덕은 리상적인 륜리의 실천을 강조하여 왔고 립언은 리상적인 륜리의 사상확립과 홍보를 강조하여 왔으며 립공은 리상적인 륜리의 집중적인 분출을 강조하여 왔다. 륜리1위가 확립되는 력사과정에 중국문화와 중국문화인들은 륜리興起에만에 초점을 두어왔고  물질재부창조에 대해서는 거의 기시책을 실행하여왔다. <<금전은 관속에 넣어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가지는 못한다>>는 생각은 중국사회더러 사회물질재부창조와 사회물질재부창조행위를 지나치게 깔보게 만들었고 문화인들더러 물질재부앞에서 조금은 코웃을 치게 만들어주었다. 사회문화가 사회물질재부의 여건들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외면하면 물질문명을 아주 떨쳐버릴수가 없는 인간문명진척은 손상을 받는다. 중국문화와 중국력사는 자고로 부자들에게 <<傳>>의 위치를 내주지를 않았다는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중국력사에 있어서 권력에 아부하지못한 부자들은 10명에 9명은 물질재부를 겁탈을 당하는 수난을 겪어왔다. 부자란 착취자로 대두할수도 있고 또 사회물질재부창조자들의 집중표현이라고 말할수가 있다. 물질재부傳承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은 대내적으로 부자들에 대한 겁탈을 악순환시키는 중에서 력사를 빚어왔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물질재부전승의 략탈문화가 발달되면 당연히 인간문명진척은 랑비와 후진과 퇴보를 만드는것이다. 서양도 중세기에 일기까지 중국과 거의 비슷하게 물질재부창조에 대한 기시책을 떠받드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근세기의 종교개혁으로서 물질재부창조와 물질재부창조행위의 합당성과 불가침범성을 신성한 위치에 올려주었으며 그래서 근대자본주의라는 물질문화의 번성을 이루었다.기독교의 획기적인 문화혁명과 비교하면 중국은 어디까지나 물질재부창조와 창조행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문화적인 반성이 많이 필요하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중국사회는 <부자들을 미워하는> 사회심리가 살판을 치고 권력과 동떨어지는 부자들이 가끔은 <마른 벼락>을 맞는것은 사실이다.   나는 중국문화란 물질재부창조에 대한 정확한 심기와 태도와 정책과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78    [잡담121]헌법이 있다고 憲政의 나라일가 댓글:  조회:3713  추천:29  2010-04-15
  중학교 때 <<법률상식>>이라는 과목을 배우는척 하였다. 학교마을 이웃동네에 사시면서 학생들과 함께 도보로 통근하시던 <<법률상식>> 선생님은 언제이면 다른 선생님처럼 자전거를 사실건가는 학생들의 물음에 자전거가 인민페 1원정도로 될때면 좋은 자전거를 사시겠다고 롱담을 잘하시는 분이시였는데 우리들더러 <<법률상식>>은 자꾸만 베껴쓰고 암송하라고만 하셨다. 그 덕분에 <<헌법은 나라의 근본법이다.>>는 한마디를 오늘까지 기억하고 있다. 대학을 다니면서 법학과와 관련된것들을 특히는 소위 <<경제법>>들을 배우는척 하였다. 그러나 근본법이라는 헌법의 조목조목에 대해서는 배워주지도 않았고 스스로 읽어보지도 못하였고 또 그 조목조목마다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자상하게 알고싶은 욕심이 없었다. 중국인은 법률의식이 박약하다고 평하는 말은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有法可依,有法必依,执法必严,违法必究라는 선전구호를 배우는척도 하여왔지만 갑자기 헌법에 대한 이상야릇한 생각이 들었던지, 그래서 변호사를 한다는 친구에게 헌법을 문의하였더니 글쎄! 나는 헌법을 둘러싼 송사는 해본적이 없고 할 능력도 없으니 그처럼 복잡한것은 그만두자!고 말하면서 法理에 의하면 雙規라는것도 비법적인것일수가 있다는 생소하지만 리치가 잊는 말을 얻어듣게 되였다. 헌법이 있고 헌법정신이 진정으로 집행되는 나라는 어느 개인도 조직도 법치를 초과하여 권익을 행사할수도 없고 의무를 집행할수가 없는 일이다. 그 친구의 말에는 오늘날에 있어서 착오를 범한 령도자들에게 雙規를 진행하는것은 어딘가는 법치정신을 떠난 규정치 또는 人治현상으로서 법적인 근거는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雙規가 사법기관의 행위가 아니고 어느 행정기관을 비롯한 어느 부문 어느 개인들에 의하여 집행이 된다면 그것은 사실 진정한 법치국가를 만든다는 정신과 현대적인 헌법정신에 어긋나는것 일일수가 있겠다. 어찌 雙規뿐이랴? 우리는 중국은 아직도 사법독립이 이루어지지못한 나라임은 승인하지 않을수가 없다. 사법권이 행정권을 비롯한 권력시스템과 긴밀하고 복잡한 그물로 엉키여져 있음은 중국의 현실이다. 그리고 사법집행과정에 있어서도 애매하고 루추한 일들은 수없이 발생하여왔다. 과거에는 수십원 인민페를 강탈한 법죄자들도 嚴打에 걸려들기만 하면 다짜고짜로 법관이 하고싶은대로? 아니면 명령에 따라 무기도형에까지 처하던 일이 많았는데 오늘날에는 고장난 은행현금기에서 수만원을 빼내였다고 중형에 처하는(그런데 수년후에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징벌이 많이 달라지고), 큰 도적과 작은 도적도 구분못하는 탄성이 강한 사법혼란사건이 발생한다. 사실 시골쪽으로 내려가면 지방쪽으로 내려가면 어느 서기라든가 시장의 전화 하나가 법원 원장의 <<마음씨>>를 아주 정해버리는 일들은 너무나도 평이로운 일이다. 사법혼란이 빈번하고 가소로운것은 종극적으로 보면 그 원인은 사법정신이 헌법정신의 집행과 거리가 멀고 헌법이 있다고 하여도 사실은 헌정의 나라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현실에 있다. 세상에는 헌법이 있어도 헌정의 나라가 아닌 나라는 적잖다. 그러한 나라에는 애국주의자들이 용솟음을 하겠지만 헌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 적다. 헌법을 위하는 목숨까지 바치는 영웅이 적은것은 우리들 재간으로서 참고 견디여 낼수가 있겠지만 중국처럼 幇閑그릅들이 고서로부터 진시황시대의 한비자의 法治까지 끄집어내다가 중국은 오래전부터 법치사회라고 떠들고 있는 사실은 차마 참고 견디여 내질을 못하여 밸이 꼬인다..문화가 깊다는 幇閑그릅의 인원들도 현대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법과 규정이란 완연하게 다르다는것을 잘 알고 있겠는데 하며 말이다. 인간세상에서 리익이라는것이 참으로 제일 무서운 괴물이다. 그 리익때문에 헌법해부가 힘들고 헌법집행이 힘들고 또 아무것도 아닌 초개같은 우리 만백성들도 우리의 헌법을 다시 배우고 다시 배우고 다시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77    [잡담120]예술의 一脈인 형식미와 인간령성 댓글:  조회:4373  추천:23  2010-04-15
      어릴 때 <<홍색낭자군>> 영화는 몇번이나 구경하였을가? 나의 기억이 틀리지가 않는다면 남패천이라는 놈은 가증스러웠고 또 바레무가무극 <<홍색낭자군>>을 올려쳐다보면서 우리 시골애들은 다리를 건뜻건뜻 높게 들어보이는 홍상천인지 하는 사람을 두고 <<에구, 가다리 찢어지겠다.>>를 부르짖었다. 애들은 물론 시골어른들을 상대하여서도 홍상천이 다리를 놀이감처럼 놀리는 장면들은 이야기거리가 너무나도 단조롭고 오락성이 적어서 재미가 없었다. 그 뒤에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홍색낭자군>>도 모주석 할아버지의 부인 강청의 본보기극에 속한다고 비판을 받았고 우리들의 추억에 씁쓸한 흔적으로 허구픈 웃음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런데 <<홍색낭자군>>은 바레무오페라라는 시각에서만 보면 명작이 아닐수가 없고 대작이 아닐수가 없다. <<가다리 찢어지는것들>>이 바로 바레무의 극치이고 서방세계의 바레무와 중국고전희곡중의 정화들이 유기적으로 조화된것들이다. 남패천을 대표로 하는 지주계급의 악착함을 죄다 무시하고 홍상천과 녀자주인공 吴琼花의 영웅적인 기상을 죄다 무시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사회정치적인 배경을 죄다 무시하여도 <<홍색낭자군>>은 사실 바레무극의 경전이다. 말하자면 예술의 일맥인 형식미의 하나인 舞의 극치에 오른것이다. 내용을 떠난 형식미는 존재의 가능성을 잃게 될수도 있다. 적어도 발생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 그런데 왜서 수많은 예술품들은 와중에 내용과는 아주 상관이 없이 오똑하게 존재하여 인간령성의 눈부심을 앓고 또 인간들의 매혹을 독차지하게 되는것일가?  그 영문을 조금이라도 알고싶다.  工具理性이 주류의식으로 된 사회에서는 계급성이요 민족성이요 하는것들만이 울부짖어지고 나붓기여지여 價値理性은 가끔 수욕을 당한다. 그러면서 계급과 민족을 초월하여 공존하는 인간령성이라는것은 실리때문에 가짜예술이라는 평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인 세부를 무시하면 어느 개인도 조직도 민족도 나라도 필경은 인간령성미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는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고려청자도 고려백자도 조선반도에서의 탄생과도 관련이 크지 않게 다만 인간령성의 걸작으로서 세인들의 찬탄을 받는다. 운동주시인의 시작들도 그가 중국조선족시인이든지 한국시인이든지와는 관련이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176    [잡담119]방양과 권양 그리고 목자문화 댓글:  조회:3457  추천:20  2010-04-15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초원을 사는 양떼는 목자의 指導와 가르침 아래 초원의 산하를 거닐면서 풀뜯고 련애하고 자식낳고 그렇게 살다가 잡혀먹히는것으로 팔려가는것으로 된다. 그런데 그것은 조금은 과거의 풍경이다. 초원의 면적이 적고 양마리수가 많은 동네로 가면 가끔은 울타리속에 갇히여 키워지는 양떼를 보게 된다. 초원의 풀이 아니고 사료를 먹고 하천을 흐르는 물이 아니라 주인이 쏟아주는 물을 받아먹고 련애도 자식낳기도 주인의 의사를 다소는 따라야 한다. 물론 나중에는 잡혀먹고 팔려가고. 목축업이 放養으로부터 圈養으로 전변된것은 일종 생산력의 진보라고도 말한다. 또 그것은 외국으로부터 배워온 선진적인 기술이라고 떠들어대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선진적이든 락오적이든 중국의 초원지대 목축업이 목축지가 받어당할수가 없는 정도의 마리수로 가축을 보존한는 상황을 잘 설명한다고 한다. 1평방킬러에 70-80마리면 족한데 200마리를 보존하려고 허둥대면서 권양을 하지만 때로는 요행을 바라고  초부하로 운영되는 초원에 양떼를 방양하여 그래서 초원이 사막화되고 황사가 불어치고 있다나? 그런데 초원의 목축업이 방양에서 권양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목자문화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을가? 과거에 초원에 가면 가끔은 말을 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축들을 방목하는 목자들의 손에 채찍을 쳐들었거나 또는 돌멩이를 내뿌리는 특제가죽조박을 들고있던 모습들이 아주 위풍스럽고 씩씩한듯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씪씩하던 목자들이 오늘날에는 양떼를 비롯한 가축들을 울안에 가두어넣고 상냥스러운 웃음까지 내지으면서 사료를 시주해주고 물을 내주고 똥오줌도 쳐주면서 진짜로 가축들의 지도자로부터 친구로 되였있는건 어딘가는 근사한 목자문화로 표현되는듯도 하다. 그러나 사실은 씪씩한 목자이든 상냥스러운 주인이든 다정한 친구이든 그들이 진정으로 노리는것은 가축의 번성에 따르는 육류와 모와 피혁이 가져오는 실리임은 틀림이 없다. 인간사회에서도 방양과 권양의 길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목축업의 방양으로부터 권양에로의 양상과는 달리 인간사회에서의 방양으로부터 권양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보면 인성위반인 가혹한 행위임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에 있어서 목자문화의 권양상은 도시와 시골을 갈라놓고 또 그것을 인공유전까지 시키려는 호적제도를 비롯한 수많은 엉터리짓들이 포함된다. 수많은 엉터리짓중에서 나는 목자문화의 가축들의 령혼세계까지 손에 쥐흔드는 사회현상을 제일 증오한다. 호적제도이든지 문화독재이든지 그런것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만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들이고 사람과 토지를 꽁꽁 묶어놓고 령혼세계까지 강박하는 목자문화이다. 오늘날의 목자문화는 관리자 말하자면 목자 또는 주인의 리익으로부터만 편의로부터만 출발한것이 너무나도 많다. 경제권의 목자주의로부터 문화권의 목자주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지는 생태는 권양되는 가축들은 수많은 권익들을 수탈당한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먹을줄만 아는 소위 <<독립사유능력>>과 <<정신가원>>을 잃어버리는 그림자로 전락이 된다. 국민들이 권양되는 현실하에서도 국수주의자들은 누군가 그러한 상황을 곁들어서 누군가 당신네 국민소질은 조금은 그런데! 하는 말을 내놓기만 하면 당금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된다. 그래서 입에 거품을 물고 大唐성세를 거론하여 대당시기에는 중국이 전 세계에서 국력이 제일 번성한 나라라고 고집하는데 소위 대당성세까지 소유하였던 동네의 국민소질이 어떻게 발바닥 수준인가는 반문 비슷한것을 내놓는데 소위 당시를 어릴때부터 배웠다는 그들은 왜서 두보시인의 朱门酒肉臭, 路有冻死骨를 아주 잊어버리는것일가? 그러면서 그들은 또 현세의 성세까지를 울부짖기도 하는데 나라의 주석들도 감히 거론하기를 싫어하는 성세설을 팔고 사는 어용문인들의 파렴치상은 가관이다. 황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양떼들은 가련한 존재일수도 있다. 그런데 목자들의 채찍아래에서 또는 빚어내는 상냥한 웃음아래에서 양떼들은 필경은 가련한 존재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목자일위를 울부짖는 동네는 가축들은 우선은 먹고 살어야 가축이 되는게 아닌가는 생존일위를 리론근거로 방양과 권양을 고집한다.나는 그러나 나는 사실은 만백성을 가축에 비유하여 사실은 기득권의 행색만을 유전하려는 목자문화가 싫다. 사람은 필경은 가축이 아니므로 누구나 경제의 자유권과 인성의 자유 그리고 정신세계의 초탈을 갈망하게 되여있다. .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중화계 력사학자 黄仁宇선생은 <<黄河青山>>에서 大历史观이라는 주장을 펴내였다고 한다. 황인우선생의 대력사관이란 거시적인 력사안목으로 력사를 생각하고 력사의 纵横总体를 출발점으로  구체적인 력사사건을 다루는 력사연구법이다. 황인우선생의 대력사관은 진시황의 개인적품덕이 여차여차게 <<분서갱유>>를 만들었다거나 무측천이 여차여차게 음란하였다는 등등의 놀이식 력사연구법을 멀리 떠난 엄숙하고 랭정한 력사시각으로서 력사를 평함에 있어서 <<반드시 자신의 이델레오기와 정감에만 근거하는 도덕적인 무단적인 시비평판을 하지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력사에 도덕적인 해석을 가첨하는것은 력사의 시공배경을 무시하는 어리석고 불합당한 일이기 때문이며 ,중국력사를 두고 말할라면 150년 또는 더 긴 시간을 하나의 력사單位로 취급한다면  중국 력사사건들의 내재적인 바탕의 진실과 흐름을 잘 알수 있다>>는 력사연구법이며 력사관이라고 한다 . 과거에 우리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만을 줄거리로 하는 력사책에서 일반적으로 사회모순의 집중적인 극단적인 폭팔분출을 농민봉기 또는 민란이라고 말하여왔다. 그러면서 관방과 민간의 모순을 들추어내면 그 모든것을 계급모순과 착취계급의 무진한 탐욕과 비인간성에만 귀결하고 관방과 민간사회의 모순의 내재성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많이도 적었다. 근년에 중국에도 많은 사람들은 중국력사를 보는 독점적시각인 상술한 전통설에서 많이 리탈되고 있다. 그래서 중국대륙적인 대력사관도 출현되고 있다. 費孝通선생은 중국의 끈질긴 중앙집권문화에 집성에 대하여 그 근본원인을 중국이라는 특수한 생존단원(북은 초원문화와 대결하고 서와 남은 지세병풍에 막히고 동은 바다로 하여 세상과 격리된)으로부터 줄거리를 찾아보았고 어느 력사학자는 중세기 중국 북방의 농민봉기는 지주와 소작농들 사이이 발생하는 계급모순이 아닌 관방과 자작농들 사이에 장기적으로 내재하였던 모순의 발로였다는 관점을 펴내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중국력사에는 맑스주의 주장과는 직접적인 관련도 없이 중국식 바탕이 존재할수도 있는것이 아닐가? 맑스도 아시아생산방식이라는 말을 꺼낸적이 있듯이 중국력사는 중국특유의 바탕이 존재하여온것이 아닐가? 만일 그것이 성립된다면 중국력사는 물론이고 중국의 현실도 중국이라는 생존단원과 주위환경변화를 떠나서는 운운할수가 없으며 중국의 력사적인 문화적인 바탕을 떨쳐버릴수가 없는것이다.과거에 지성력사학은 맑스가 배렬해놓은 력사발전단계표에 어긋나 유심적인 기계적인 력사관이라고 비평을 받았고 중국력사의 독특한 바탕으로 보여지는 중국력사속의 관방과 민간의 모순점에 대한 연구는 너무도 적었음은 유감스러운 사실이다, 오늘을 살면서도 우리는 중국력사문화의 중국식 바탕을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북방초원민족의 쇠잔뒤에 륭기된 쏘련과 형제를 맺었다가 아웅다웅하였던 일, 절대적인 중앙집권에 의한 금해쇄국책이 성했던 명청시대 등등은 모두가 중국력사의 지성학적인 력사문화적인 중국식 바탕에 대한 반복적인 기록이 아닐가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중국의 현실까지 련속되는 관방과 민간의 모순점에 대하여서도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개혁개방이래 개체호로 시작된 중국경제의 민간경제는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몇해전부터는 또다시 <<국진민퇴>>의 길을 걸어왔다. 말하자면 중국의 사회물질재부 축적은 어느 정도로 급속상승선을 그어왔지만 국가소속 물질재부의 엄청난  증가에 비하면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의거하는 민간소속 물질재부축적은 국가소속 물질재부축적 상승선에 同步성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다는것이다. 분배학적으로 <<국가것이자 국민의 것이다>>는 말은 리론적인 성립은 된다. 그러나 국가것이 국민의 것으로 전변되는 과정에 중국은 수많은 有機적인 체재적인 비리와 불공정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부 <<재간있는 부류>>가 국가물질재부를 개인호주머니에 꽁꽁 챙기고 있는 중국식 부정태풍은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사법기관도 아직도 그것을 크게 이겨낼 겨를과 조건을 구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사회물질재부의 분배만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여러가지 소유체 사이에 실존하는 공평성부족점에서도 관방과 민간의 모순이라는 중국력사문화의 관성적인 바탕과 약점이 잘도 로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중국은 소위 국계민생에 관련되는 고리윤액경제는 국영에서만 운영하는 전통을 아직 철저하게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미국금융위기를 발탁점으로 하는 국제경제위기속에서 국영업이 싫어하는 분야 또는 국영업의 부속물로만 생존하여온 민간업은 융자 우혜책 등등의 제한을 크게 받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고난의 년대>>를 힘들게 지탱하고 있음은 이번 2회의 위원들과 대표들의 조언속에서도 많이 튕겨아왔다. 여러가지 소유제의 화합성을 부르짖기는 하지만 국영업을 제외하고는 사인업이든지 집체업이든지 약소세력으로 존재함은 큰 화근이 아닐수가 없다. 또 <<체면을 세우고 보여주어야 할>> 국계민생만을 독점운영하는 중앙소속기업들이 2회가 금방 끝난 오늘날에도 감히 국무원 부동산책까지를 엇서면서서 땅부자로 되려는 <<울치기 운동>>에 전력하고 있으며 <지왕> 선출에 열중하는 뉴스가 통보되는것을 보면 나는 중국 국영업의 물질재부획득 비정당성과 비합리성을 크게 의심하지 않을수가 없다. 사회물질재부와 물질재부창조가 거의 대부분이 국가와 국영업에만 집약되고 민생취업에서는 큰 몫을 담당하던 민간업이 중국 국민경제불공평성의 희생품으로 되여있다는것은 중국의 중앙집권문화를 받들어주는 경제문화로서 민주로 나아가는 길에서의 제일 큰 걸림돌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경제기회의 균등화는 관방과 민간의 모순을 완하시키는 령단묘약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경제기회 불균등으로서 관방과 민간의 모순을 가열화시키는것이 안닐가고 근심을 하여본다. (1989년 북경천안문사건의 시작에 개체호들도 아주 열성적이였고 관도를 때려부시자고 울부짖은것도 사실 경제기회 불균등화 비합리성을 반대한것으로 생각하여왔다)  중산층을 재배하고 물질문화전승에 있어서 인도적이고 화합적인 목표를 이루려면 또 중국을 진정한 강대국가로 만들려면 경제운행의 바탕이 력사의 관성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     물질재부가 인성에 걸맞는 정상적인 운행과 축적을 이루지 못하면 어느 나라이든지 학비를 내지않을수가 없다.  2차대전시기에 국가사회주의라는 명목과 수단으로 물질재부를 대거집중하였던  파쑈독일이라든가 사회재부1체화로 앞장서서 공산주의로 들어간다던 구쏘련이 하루아침사이에 무너지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러한 력사사실에는 사회물질재부창조와 분배와 점유의 비정상성 그리고 경제기회의 극단적인 불군형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가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174    잡담117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 댓글:  조회:2626  추천:42  2010-03-02
1   1978년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은 주강삼각지와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장강삼각지를 수선발전지로 강요하는 발전책을 실행하여 왔다. 그것은 <<부분적인 사람과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국책중의 <<부분적인 사람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개별지역을 중점지역으로 발선하는  수선발전책으로서 全面식이 아닌 點線식 발전모식이다. 수십년 세월이 지나간 오늘날의 시각으로부터 되돌아보면, 점선식발전책은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나타난 지역경제발전불균형이라는 사회문제가 형성된 원인의 하나로 보여진다. 어떠한 발전책에도 플라스면이 있으면 마이너스면이 동반된다.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발전책은 集權식 국가운영의 산물로서 중앙집권경제발전모식 또는 국가자본주의 변형형태이며 중국경제의 재빠른 성장을 비롯한 여러가지 성취를 따내는 동시에 지역경제발전불균형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문제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부인할수가 외면할수가 없다.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발전책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아직은 量化적인 계산이 확실하게 발포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명제아래에서의 공산주의식국가경제학설과 그 실천 그리고 변종된 凯恩斯主义학설과 그 실천도 만능이 아님을 다소 감안할수가 있다.  목하, 해마다 국민생산액을 둘러싸고 배렬되는 소위 경제大省 납세大省 등 현상들을 살펴보면 그 배후에는 경제후진지역의 고달픔과 무가내가 실존하고 있으며 경제발전지역의 오만무지도 선명하게 보여진다. 주강삼각지도 장강삼각지도 개혁개방중에 중앙집권을 경유한 전중국의 국책지원과 기술지원 인재지원 재정지원 등등이 그들의 오늘날을 만들어주었음이 사실인데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운운하는 사람과 언론이 아주 적음은 공평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또 오늘날에 있어서 경제후진지역이 경제발전지역을 바라보는 눈길과 심리상태에 음영이 짙게 끼여있다는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지역간의 경제발전불균등이 대폭적인 기복을 이룬다면 그것은 부동한 지역간의 광범하고도 내재적인 사회모순을 가져올수도 있는것이다. 2 중국의 어느 경제후진지역도 지역성적인 곤혹을 앓고 있음은 목하 중국의 사회현상이다. 과거에 중국의 조선족이 삶을 집중적으로 영위하던 <<산좋고 물맑은>> 연변도 현재 지역성적인 곤혹을 앓고 있다. 그 지역성적인 곤혹은 우선은 연변의 경제발전 후진성과 침체성에서 기인되고 있으며 경제발전저수준이 가져다주는 사회발전저수준과 밀접히 관련된다. 개혁개방뒤, 경제발전지역과 비교하면 중국1위의 중공업기지였던 동북3성의 고물식중공업(일제시대 생산설비와 건국초기 구쏘련으로부터 도입한 생산설비 생산기술 경제관리를 특성으로 함)과 자원의존성경제(특히는 광산과 삼림자원에 의존함)가 점선식발전책으로부터 리탈되면서부터 동북공상업경제는 정체적으로 침체/하강/엉망이라는 길을 걸어왔다는 평판이 된다. 동북3성의 전통적인 공업경제의 침체/하강/엉망은 끝내는 직접적으로 연변의 전통적인 공업경제의 도산을 초래하였다. 말하자면 동북3성 전통적인 공업경제의 미소한 일부분으로서 低下적인 부품이나 만들어내던 연변의 <<망치공업>>과 규모운영을 론할수가 없었던 경공업, 모주석기념당을 지을때 홍송 백송을 얼마를 보낸다고 자랑하던 림업경제와 중약재재배업은 경제생산액이 보잘것없는 수준으로 하강되였고 연변의 국민경제가 중국국민경제로부터 크게 邊緣화되여 있다.      구식경제가 현대식신형경제로 전환하는데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수된다. 소위 경제학에서 운운하는 자본 기술 시장 지리우세 등등이다. 그러나 연변은 국가발전책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조우중에 그 어떤 유리한 조건도 구비하지를 못하여 왔다. 다만 민간자본의 상대적인 륭기가 상대적인 지역우세로 보여지였을뿐이였다. 연변의 민간자본의 상대적인 륭기란 바로 로무수출수입으로 구축된 민간자본이다. 연변은 사실 지금도 중국에서도 주목을 받는 로무수출 집중지역이다. 그러나 인균액으로는 엄청난 외화벌이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아직도 연변경제발전에 자본촉매제로는 활용되지 못하고 있으며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 로무수출수입으로 표현되는 연변의 민간자본 상대적인 륭기가 연변지역경제의 경제산맥을 이루지못하는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연변의 민간자본이 산업자원으로 전환되지 못하는데는  주요하게는 연변의 로무수출수입이 인균액은 크지만 그 총용량은 현대식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있고 결구적으로는 분산성이 강한 특점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여러가지 기성조건의 결핍과 민간자본운영저수준은 연변경제의 변연화를 개변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3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은 또 지역문화결구의 급변에 있다.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연변의 명함장은 <<조선족>>이다. 그런데 <<조선족>>을 둘러싼 연변의 지역문화결구는 엄중한 위기속에서 날마다 해체되고 있다. 연변의 조선족인구의 감소와 조선족문화영향력의 감소는 지역문화의 내용과 이미지의 급변을 가져오고 있으며 그것은 조선족은 물론 연변을 사는 여러 민족들에게도 큰 손실이 아닐수가 없다. 연변의 국민경제가 변연화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에서의 합당한 定位를 구축하려면 <<조선족>>은 사실 무형자본으로 일급수단으로 사용되여야 한다. <<문화가 대를 쌓고 경제가 주역을 감당한다>>는 말은 사실 때가 지난 말이기는 하지만 연변을 상대하였을 때에는 깊은 참고가치가 있다.   4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을 이루는 연변경제후진성은 언제이면 개변상을 보일것인가? 연변지역경제의 후진성 원인은 연변의 민간자본이 지닌 자아특성외에도 또 동북아지역의 불안정성과 국제정치의 불안정성에 따르는 연변경제결구의 취약성에서도 보여진다.  20세기로부터 21세기까지 연속되는 동북아지역의 불안정성은 주류자본의 연변입주를 방해하고 있으며 연변경제더러 수익주기가 짧은 경제분야에만 매달리게 하는 경제결구를 생성하게 하고있다. 이러한 배경은 연변의 분산된 민간자본이 산업재생산에 계획적으로 과학적으로 투입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가열화시키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연변의 민간자본랑비와 기형적과대적소비경제라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본의 특성으로 볼 때, 투입구를 찾지못하면 자본랑비는 자연히 직접적인 경제곤혹을 가져오게 된다.         목하 중국은 민생사회라는 슬로건외에도 지역경제발전불균형증을 대치하려는 지역경제발전균형을 구상하고 있는중이다. 일부 언론체의 보도에 의하면 2010년부터 중국은 대만해협경제구역과 발해만경제구역 그리고 신강구역을 대표로 하는 변강경제발전규획 그리고 그 규획실천으로이 백열화될것이라고 하며 두만강경제개발구역도 과거의 <<부분적인 지역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발전책이 가져온 마이너스면과 지역경제발전불균형을 타파하려는 국책의 돌파구로 될것이라고 한다. 연변은 두만강경제개발구역에 속한다. 한다면 2010년부터 연변도 락후한 <<구석경제>>의 딱지를 떼여버리는 스다트를 내보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연변이 새로운 형세하에서 훈풍을 타고 지역성적인 경제곤혹과 문화곤혹을 이겨내는데는 관료주의를 멀리하는 정부와  정진을 거듭하는 연변인들의 노력이 바람직한 일이다.
173    [잡담115] "지식청년"에 대한 의문, 당대사회에 대한 의문 댓글:  조회:4248  추천:32  2009-11-13
<<지식청년>>에 대한 의문, 당대사회에 대한 의문   허동식요즈음 <<지식청년>>에 대한 의문이 새삼스럽다. 나의 어느 글에 들어갈 인물이 <<지식청년>이므로, 나는 <<지식청년>>을 지내본 경력이 없으므로 곁에 있는 나이 있는 분들과 문의를 하여보았다. 놀라운것은 그분들의 경력이 내가 읽어보던 소설보다도 생동하고 아주 실감이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마음속의 상처로도 남아있는 경력이기는 하지만 청중인 나는 재미있게만 느껴지였다. 내가 어릴적에 마을에 있는 상해지식청년들도 몇이 기억나는데 뜨개질을 하는 남자상해지식청년이 생각나고 셋째누나와 친하던 조선족 지식청년들도 생각난다. 그런데 너무 아리숭하다. 그들의 희노애락은 나는 거의 모른다. 책에 씌여진것과 곁에 있는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내려간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식청년들이 무리를 지어 농촌으로 내려갔으며 전사회적인 희비극을 제조한것일가? 책에는 확답이 없다. 곁에 분들과 물어보니 그분들도 <도시에 일자리를 찾지못하는 청년들이 득실거리니 모주석이 우리를 농촌으로 녀려보냈다.>고 한다.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기록만 있고 지식청년현상에 대한 원인을 거론한 글이 아주 적다. 새삼스럽게 의문되는것이 나의 고질병이다. 지식청년현상만이 아니다. 중국 당대에 발생한 수많은 전사회적 사건들이 아직은 확답이 없다. 반우파도 그렇고 문화대혁명도 그렇고 멀리로는 항미원조도 월남자유반격전도 그렇고 림표도 4인방도 모두가 만백성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그 근본원인과 정치적인 사회적인 배경을 두리뭉실한 정도에만 그치게 알고 있다. 중국 당대 사회에서 나는 이것이 만백성의 불행이 아닐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만백성은 나라의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정치에서의 장기쪽으로만 사용되여왔다. 장기쪽으로 사용된 일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주었는가? 누가 나라주석이 되든 누가 싸우든 만백성은 먹고 살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만백성이 무도와 마작을 즐기다가 이제는 <<질탕 먹고 마시고 입고 놀고> 또 리혼도 류행으로 여긴다거나 <<애인이 없으면 바보이고 애인 하나면 괜찮고 둘이 있으면 인물이고 셋이 있으면 위인이고 몇명 이상이면 짐승이고…>> 메신저가 핸드폰에 수없이 들어온다. 언제는 핸드폰 메신저가 거의 위법으로 될번하였는데 중국을 아는데는 메신저가 으뜸이 아닐수가 없다. 물론 현상을 거론한것이고 원인분석은 없지만 핸드폰 메신저가 중국의 밑바닥을 잘 드러내는 통신으로도 사용된다. 그렇다면 왜서 핸드폰 메신저가 뉴스보다도 더욱 믿음성이 있는 줄거리들을 생활에 대한 만백성의 태도를 알려주는것일가? 또 하나의 새삼스러운 의문이다.당대사회에 의문을 지닌다고 하여서 반당 반사회주의로 몰아주는 자식도 의문스럽다.
172    [잡담114] 종족편견에 약간 댓글:  조회:4872  추천:34  2009-09-24
종족편견에 약간허동식   력사적원인으로 하여 은원형식의 표현을 이루는 종족편견이 많다. 그러한 은원뒤에는 흔히 종족사이에 력사적으로 발생하였던 리익쟁탈이 안받침되였다. 먼 옛날 유럽의 백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 사이에는 뚜렷한 종족편견이 없었다. 최초에 흑인들과 거래를 한 라틴종족도 뒤에 흑인들과 거래를 하던 게르만종족도 흑인들에 대하여 대집성적인 보편적인 종족편견을 지니지않았다. 헌데 신항로가 개척되고 식민주의책이 창궐해지면서 유럽 렬강들에게는 아프리카를 략탈하고 점령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아메리카를 개발하기 위하여 흑인노예제가 필요하였으며 따라서 모든 수단을 가리지않는 종족편견, 말하자면 흑인은 락후하다는 우매하다는 등등의 종족편견을 보편화시켰다. 유럽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종족편견이 제조되는 과정에 박애를 부르짖는 기독교세력도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는 인문사상도 큰 억제작용을 이루지 못하였던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의 공동리익이라는 종족리익의 존재와 어느 문화든 얼마나 우아하다 하여도 가끔은 인성완성의 방향과 배도되는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가는 생각을 하여본다. 리익쟁탈을 뒤받침하는 력사적인 은원적인 종족편견은 아주 세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이웃끼리 아주 오래동안 사이가 좋았던 나라가 적은것이, 서로 아니곱게도 보고있는것이 바로 어느 종족이든 리익앞에서는 신사가 없다는, 그래서 어느 종족이든 종족내에 다른 종족에 대한 종족편견이라는 아편을 일부러 류행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여본다.  다음에는 리익쟁탈이 원인으로 되는 종족편견과 문화적인 종족편견이 합류하여 이루어지는 과도성적인 복합성적인 종족편견이 있다. 리익쟁탈중에 종족편견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화를 아름답게 위장하고 남의 문화에 醜化라는 정형수술을 진행함이 인류의 아주 상투수단으로 사용되여왔다. 헌데 외곡과 몰리해와 기시로 충만된 문화판단이 문화적인 종족편견을 이루고 리익쟁탈의 문화편견과 합류하면 리익쟁탈이 이룬 종복편견보다도 더욱 견고하고 지구한 생명력과 회손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과거 유럽인들이 유태인데 대한 종족편견이 바로 그러한 종족편견의 실례라고 할수가 있겠다. 유태인들의 재부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략탈자로서는 그러한 과도적인 종족편견을 보현화시킴은 필수였을수도 있다.  또 다음에는 단순한 문화적인 종족편견이 있다. 물질리익을 위한 직접적인 종족편견도 아니고 또 물질리익을 위한 종족편견과 문화편견으이 이루어지는  과도적인 복합적인 편견도 아닌 종족편견이다. 력사적으로 아시아인과 흑인들은 직접적인 리익쟁탈이라고 없었다고 볼수가 있고 물질리익을 위한 문화편견을 만든 일이 없다고 볼수가 잇다.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편견적인 문화판단을 수박 겉핱아먹기로  배워서 흑인이라 하면 조금은 아니아니 하여왔다. 또 미국이라든가 유럽의 흑인들도 백인들의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적인 문화판단을 겉 핱아먹기로 배워서 황인종 하면 아니아니 하여왔다.   종족편견이 없었던 인류력사는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지구 우에는 아직도 종족편견으로 넘친다. 사회가 발전될수록 부동한 종족사이에 종족편견이 무너지고 조화가 있으리라는 판단과 욕심과는 많이 다르게 마치도 인류의 어떤 回光처럼 존재한다. 리익쟁탈을 안받침한 <<근원적인 종족편견>>이든지, 리익쟁탈과 문화원인이 합류되여 만들어지는 <<과도적인 복합적인 종족편견>>이든지, 순수한 문화차별과 관념으로 만들어지는 <<문화종족편견>>이든지 모두가 불화를 만드는 도화선이다. 특별히 어느 종족편견이든지 어떤 정치인들에게 리용되는 경우에는 <<초인간>.>적인 회손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악마중의 하나가 종족편견이 애국주의라는 옷을 입고 거리로 싸다니는 일이다.   일전에 남경대학살을 내용으로 한 << 남경! 남경!>>이라는 중국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되였다. 종래로 남경대학살을 엮은 영화가 상영된적이 없는 일본의 미성문관례가 무너지여 좋다고 하는 중국사람이 있고 <<남경! 남경!>>은 허구해낸 어느 일본군인의 시각으로 만든 영화이기때문에 력사사실과는 판연하게 다르다면서 중국영화감독으로서 陸川은 볼장을 다 본듯도 하다.  남경대학살이라는 력사사실을 현실의 국제관계와 리익정치라는 층면에서 벗어나 단순한 문화적인 시각에서 력사적인 시각에서 말할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거론하는 사람은 아주 적음은 사실이다. 간혹 있다 하여도 남경대학살을 두고 대부분의 중국인과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손바닥과 손등마냥 부동한 문화립장에 서고 부동한 문화해석을 진행한다. 어떤 중국인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옛날 견당사의 돛대만 얼른거리고 명청시대의 왜구라는 해적들의 총칼만 얼른거리고 갑오전쟁의 포성을 비롯한  중일전쟁의 피냄새만 짙어있고 과거의 아시아 농경대국으로서의 자부심에만 받침된 일본인에 대한 여러가지 종족편견이 반죽이 되여있다. 그래서 국민정부의 버마원정군이 일본포로들을 천여명 생매장하던 일은 영화로 제작하라는 말은 못하고 있다.   중국인을 바라보는 많은 일본인의 눈길에도 반성과 뉘우침이 적고 근대로부터의 중국의 락오상과 실패만이 보이며 다른 종족은 전혀 무시하려는 고질적인 종족편견이 무성하다.     종족편견을 메우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겠지만 종족편견의 근원을 찾아보는것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가는 생각을 하여본다.
171    [잡담113] 공자와 중국력사 댓글:  조회:4924  추천:31  2009-08-29
[잡담113]    공자와 중국력사 허동식   공자는 亂世인 춘추시대를 살면서 폭력이 아닌 인정(평화수단)으로서 나라의 통합과 질서를 유지함을 주장하였고 그래서 周禮질서 회귀를 원하였으며 그 수단으로는 윤리도덕의 昌盛과 인성의 善에 부합되는 인치를 울부짖었다. 헌데 리상주의자 공자는 죽은 뒤에 자신의 인문주장이 력사의 갑문으로 될줄을 생각이나 하였을가?  중국력사를 5천년 長河라 한다면 공자는 그 시간흐름속에 안치돤 하나의 閘門이다. 란세가 도래하면 공자는 보수인물로 등장하여 신흥세력의 비판을 받으면서 튼튼한 갑문의 위세를 전혀 잃고 혼탁하고 거세찬 물결에 침전되고 파멸되기도 하였다. 헌데 성세가 도래하면 공자는 다시 성현으로 받들리면서 기득권의 질서유지 수단으로 되여 또 하나의 갑문으로 분식되고 리용되여왔다.   하지만 공자라는 인물은 현세를 살고있는 우리에게도 진실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력사라는 長河속에서 무수한 정치인들과 인문인들에게 수없는 변형수술을 당한 공자는 어느덧 성현이 아니면 괴물로 둔갑하는 <천당과 지옥 게임>의 주역으로 되여있고 공자의 인문주장은 학설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늘 상징적인 부호로 표기법으로 사용된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공자와 공자의 儒학을 주장하거나 비판하거나를 물론하고 순수한 학술적인 립장과 연구는 많이 부족해보인다. 중국력사에서 있어서 어떤 관점에 대한 쟁론은 늘 리익갈등과 권력갈등을 동반하여왔다. 그래서 공자는 력사의 갑문이면서도 또 력사의 晴雨表가 아닐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중국사회의 상황을 판단할라면 공자가 받는 대우가 어떠한가는 晴雨表가 제일 실용적이라는, 아둔하지만은 괜찮게 감각되는 생각을 더듬어본다. 
170    [잡담112] 옛말 한컬레 그리고 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댓글:  조회:5525  추천:32  2009-08-24
[잡담112]옛말 한컬레 그리고 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허동식 동년시절, 친구들끼리 옛말하기를 할라면 동네의 어느 아이든지 전술할수 있었던 옛말이 한컬레 있다.  멀고먼 옛날, 어느 나라에 부모 잃은 삼형제가 살었는데, 큰놈은 오줌을 억수로 퍼부을수 있는 오줌싸개이고 둘째놈은 휘파람을 불면 차디찬 광풍을 불러올수가 있는 휘파람쟁이고 셋째놈은 발길을 억세게 빨리 놀릴수 있는 힘장사 발길쟁이였다나 .헌데 삼형제는 째지게 가난해서 밥도 배불리 먹지못하는 신세였는데 어느해 북방으로부터 수십만의 외국대군이 침입해 오자 삼형제는 어느 문무대신들도 좋은 대안을 내놓지못해 크게 불안스러웠던 궁전에 가서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삼형제가 일졸일병 필요없이 적군을 물리치겠나이다. 그 다음날 삼형제는 수십만 적군이 장사진을 친 산마루에 올라서 큰놈이 오줌을 누기 시작했는데 그 오줌발이 폭포처럼 줄기차게 흐르면서 하루사이에 산아래 진을 친 수십만 적군들더러 오줌홍수속에 아주 잠겨버리게 만들었고 그러자 둘째놈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는데 삽시간에 광풍이 휘몰아치고 기온이 저락되여 일기가 아주 엄동으로 변하면서 수십만 적군이 잠긴 오줌홍수는 얼음강판으로 변했버렸다나. 그 다음에는 셋째놈이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산아래로 내려가 오줌강판우에 드러난 수십만 적군의 목을 힘찬 발길질로 잠간 하는 사이에 죄다 따버렸다나. 그래서 수십만 적군을 무찌른 공훈으로 삼형제는 당연히 왕의 삼공주에게 장가 들고 아들딸 낳고 크게 잘 살고.  중국 조선족들 태반은 민족사 반도사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을 얼마 받지를 못했다. 하지만 신화와 전설 민담의 형식을 통한 간접적인 수단으로 반도사와 민족사의 몽롱한 모습을 전승하기도 했다. 그러는 과중에 자연히 민족적인 정서와 민족적인 가치관을 전승하기도 했다.  민속이 력사의 <살아있는 화석>이라면 민족사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민담들이 승리자들과 문화우세자들이 자아립장에서만 기록한 문자력사에 대한 불신임을 자아내게 하며 또 소위 <과학적인 력사관>이 지니는 비진실성과 과대성의 부족점을 미봉하는 작용을 할수는 없을가? 그 작용이 아주 미흡하기도 하고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겠지만 문자기록력사와 문헌자료력사에만 매달리는, 현세서비스만을 좋아하는 력사연구풍보다는 어딘가 활달된 인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신화전설 민담은 사실주의적 민족사연구에는 큰 참고치가 없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민족성격과 민족가치관을 비롯한 민족문화탐구에 있어서 관방문헌의 기록보다는 문화우세자들의 문자기록보다는 더욱 진실에 접근하는 단서를 제공하여줌도 사실이다.  그러한 신화 전설과 민담을 분류해보면서 우리에게는 어느 부류의 옛말이 많고 어느 부류의 옛말이 적은가를 그리고 그 결구적인 특성을 가늠해보고싶다.1.민족발상에 관한 신화 전설과 민담  단군신화를 비롯한 민족발상설은 어느 민족과도 못지지않게 무성하다. 2. 정치인물들에 대한 신화 전설 민담들이 있기는 하지만 민간적인 시각에서는 정면인물로 제작한것이 조금 적다. 3.민족영웅에 대한 신화 전설과 민담용맹과 기백으로 넘치는 민족영웅설은 기본적으로 력사에 존재한 진실된 인물들로 바탕을 두었다.(을지문덕 리순신 등), 반면에 아주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영웅인물이 많이 부각되지 못하였다. 4.민족의 인문지혜에 대한 신화 전설과 민담민족의 인문지혜에 대한 것들은 거의 공백이다.(제갈공명과 같은 지혜신이 제작되지 못하였다)5. 민족의 工商醫藝면과 관련된 신화 전설 민담이 거의 공백인듯도 하다 6.민족의 리상적인 부녀자에 대한 전설은 <심청전>과 <춘향전>이 대표적이다 7.민간사회의 정의자로서 杀富济贫 괴수들은 홍길동이라든가 림꺽정 등 인물들이 많이 존재한다.전문이 아닌 내가 어벌차게도 상기 특성을 나름대로 적고나니 또 그 결구적인 특성에는 어떤 문화내막이 잠재할가고 고심해보고싶다.  
169    [잡담111] 정권이전과 사회원가 댓글:  조회:5201  추천:33  2009-08-21
잡담     정권이전과 사회원가허동식《激情燃烧的岁月》와 《亮剑》은 근년에 중국에서 꽤나 인기를 지닌 텔레비죤 드라마이다. 그래서 간혹 눈요기를 해보면서 나의 구미와는 생각과는 조금 별로라는 판단을 하여왔다.왜냐하면 정면인물로 구가되는 군인 주인공인물들이 개성이 뛰어나고 군사재능도 있고 인생경력이 렵기적이기도 하여 매력적인 일면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아주 武夫들인 그들의 호쟁으로 표현되는 천성적인 인성결함을 과대 극찬하는 일면을 지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과대 극찬의 인문주장에 동조하기 싫기 때문이다.중국력사문화 內室에는 아직도 《打江山 坐江山》이라는 생각과 행위가 아주 정상적이고 합리하게 모셔져있다. 력사의 주역뿐들만 아니라 천하의 만백성들마저도 <打江山>하는 이들의 <坐江山>을 달갑게 받아들임도 아주 력사진리로 현실진리로 되여있으며 , 그러한 인문관력관이 모택동의 <枪杆子里出政权>라는 현대판본으로도 연역되여왔다. 그러면서 중국은 당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軍政사회와 準군정사회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는 중 우리는 군정사회에서 準군정사회에로 , 準군정사회에서 訓정사회에로의 진입하기도 하면서 가끔은 복귀라는 위험지대를 경과하기도 하였다.사회발전중의 전환점로 되는 권력이전에 있어서 과대한 사회원가지불은 나라와 만백성의 초부하적인 짐이고 근심이 아닐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회원가지불을 전혀 무시하는 <파괴가 없으면 건설이 없다>는 론조가 성행하던 시기도 있었고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력사시기도 있었다. 그 교훈은 엄청나다.수양제는 중국력사책에 폭군으로 등장하는 황제이다. 물론 수양제가 폭군의 일면을 지니였을수도 있었겠지만 수양제가 폭군으로 기록된것은 수나라를 뒤엎은 당이 력사편찬중에 수양제에게 <구정물을 크게 들씌운> 일과 전혀 련관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폭군 수양제는 해마다 장안에서 서역 각국을 포함한 주변 나라들의 악대와 歌舞대를 불려들려 큰 국제잔치를 벌리였었다. 그 잔치에 국고가 거덜이 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진걸로 배워왔는데, 현재 누구는 수양제의 흔장만장 하는 국제잔치가 전쟁을 하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인명적으로 크게 수익이 좋았다고 주장을 펴고 있다. 그 병행적인 근거로 오늘날에 있어서 중국이 올림픽을 하여 경제적수익이 아니좋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인명적으로 좋은 일이 아닌가?고 주장을 편다.그런 주장을 읽으면 나는 만백성에게는 정상적인 사회운영이야말로 정권이전이야말로 행복지수의 최고원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중국의 중세기는 건설-파괴-재건설에 병행되는 군정-훈정-군정이라는 악순환력사이다.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선진적인 대자산계급을 대표한다는 국민당 장개석정부도 종극은 군정을 하였으며 선진적인 로동계급을 대표한다는 공산당의 일원인 림표일당도 군사정변에 고심하였고 4인방도 특수수단과 특수경로를 통한 정권탈취를 꿈꾸다가 군사행위에 분쇄되고 말았다. 장개석도 림표도 4인방도 어떻게 보면 모두가 중국식 력사문화가 낳은 희생품이고 재래의 정권이전문화의 필연적인 산물이 아닐수가 없다.어느 책에서 미국독립전쟁 공훈자인 워싱톤이 전쟁승리뒤에 곧바로 국회회의에 나가서 공손하게 경례를 올리고 군권을 상징하는 쥐휘검을 풀어 바치고는 아주 평민으로 되였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참으로 미국의 헌정에 대하여 감복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 뒤에 워싱톤이 미국대통령으로 출마함은 그의 군공과 전혀 관련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필경은 군인신분을 버리고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는 점은 미국헌정정신의 구현이 아닐수가 없다). 가끔은 근 2백년동안,중국력사가 배태한 풍운인물들과 미국력사가 배태한 풍운인물들을 배렬해보고싶은 욕망을 가지게 된다. 중국의 풍운인물은 군인출신과 군인이 많지만 미국의 풍운인물들에는 변호사 사회활동가 그리고 종교인사마저 많이도 섞여있다. 그 내막을 미국의 흑인혈통 대통령 오바마가 <미국의 위대함은 강력한 국력과 국방력이 아니라 독립선언과 헌법에 적혀있는 평등과 자유의 정신이며 극대한의 집행이라고>고 말하고 있는데 또 미국흑인들 비폭력저항운동의 령도자 였던 马丁 路德를 소개한 글들을 읽으면서 미국헌정정신이 만들어주는 미국사회의 저변과 깊이의 튼튼함과 특색들을 생각해보지않을수가 없다.미국은 남북통일전쟁뒤에는 국내폭력이 크게 성행하지 않았다는 일은  미국인의 행운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일인듯 하다.  
168    7월 명동에 다녀왔습니다 댓글:  조회:2688  추천:32  2009-07-27
7월 명동에 다녀왔습니다   비암산을 내리면서 친구는 어디에 가고싶은가 물었다. 명동에 가보고싶다니 승용차는 륙도하 언덕 콩크리트 길을 나는듯이 달린다. 차창밖에 산야가 검푸르고 륙도하는 보이지 않는다. 강우량이 옛적보다 많이 줄어들었을가 아니면 식피회손때문에 강물이 줄어들었을가? 아주 어릴적 룡정에 오면 어느 다리 아래로 종이공장 누우런 거품이 섞인  강이 보이던데 기억에는 그 강을 륙도하로 알고 있는데, 몇칠전에도 로모께서는 어릴적 명동촌에 살적에 큰 물이 나져 집 7채가 물에 밀려나가던 기억을 이야기하시던데 하고 생각을 굴리는 사이에 길가에 옛적이는 명동촌으로 불리웠다는 신화촌이라는 표식이 보인다. 내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느 산마루에 묻혀있는 동네이고 돌아가신 부친의 청소년시절이 잠적하고 있으며 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고향이여서 로모 그리고 외삼촌 이모들의 동년을 희미하게 받아본다. 욕심으로는 주차시키고 조금 둘러보고싶기는 하였지만 체면때문에 차는 어느새 선바위 앞에 이른다. 선바위를 중국말로 어떻게 표현할가 상론하니 达砬子라고 한다. 하지만 달라재라는 말과 선바위란 어원적으로 너무나도 거리가 있고 또 이 지역에 만주족어가 풍기는 지명이 없으므로 이 골연은 내 조상들이 도강해서의 정착하기전에든 무인지대가 아니였을가는 생각을 해본다.   명동에 이르러 남산 산발이 아주 굳었고 그 기세가 연연하게 솟구치여있음을  바라보면서 어딘가 즐거워진다. 저 남산이 책에서 나오는 오랑캐령일가? 어이 저 남산 산기세가 대단하구만 , 풍수는 모르지만 그 즐거움을 나누고싶어 친구들에게 한마디하고 김약연선생의 기념비를 잠간 우러르고 전시실에서 사진들을 쳐다본다. 작은 책매대에는 윤동주시인의 <서시> 원판이 사진으로 복사되여있어 들여다보면서 윤동주시인이 살던 시대의 조상들 심성을 다시 들여다보는 흉내를 해본다. 참으로 마음이 깨끗했어 그리고 바라봄이 순직했어, 박애가 듬뿍한 종교가 성행하였던 시기여서 신앙심이 작간도 하였고 또 고유의 민족적인 심리바탕도 순결하였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판단을 해보면서 복원된 윤동주생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진에서 조금 보아오던 팔간집인던 마루에는 20여명의 한국인들이 도시락식사가 한창이다. 헌데 안경을 끼신 분이 함께 식사하자고 하시면서 대구 어느 대학 교수이고 목사라고 하신다. 그래서 잠간 강의도 받고 민족독립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로 이루어진 단체인데 청산리는 이미 가보시구 래일은 봉오동으로 가신다 한다. 부럽기만 하여 흠모의 이야도 하고 또 김좌진장군과 홍범도장군의 반일무장과 김약연선생의 간도국민회 연관성에 대해 문의도 해보는중에 운 좋게도 나젊은 한분이 윤동주시인의 <하늘 바람 그리고 별>을 선사하신다. 윤동주시인의 시집은 몇권 소장하고 있지만 거의 전집식으로 되여있는 초책자는 처음이라 참으로 즐거웠다. 좋은 려행을 축복하고 나중에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이 골연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중국조선족의 발상지요 그리고 이주 초창기의 경제중심일수도 있소 아는것은 없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자꾸만 지껄이고만 싶었다. 그러다가 15만탈치사건 다리 부근에서 촌락으로 들어가 주덕해생가를 보여준다 한다. 맹랑하게 정문에 자물쇠가 잠겨있기는 하였지만 주덕해생가앞에서 남산을 오래오래 쳐다보면서 이 골연은 참으로 대장연의 정기가 응집된 곳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책을 뒤져보면 이 지역은 선조들의  개명된 문화사상터였는데 행동지였는데 하고 친구들에게 다시 지껄인다.     룡정에 도착하니 그날 술은 참으로 맛있다.     저녁에 연길로 들어오니 로모는 고향에 아주 가보고싶으신지 홀로 명신촌과 명동으로 다녀왔다고 크게 나무람하시다가 선바위가 아직 건재하든가 물으신다. 예 , 선바위는 아직도 깍아지르게 푸름푸름하게 있습더구마 고 나느 답을 하였다.      
167    [잡담110] 관료본위와 금융위기 댓글:  조회:3399  추천:27  2009-07-06
고향에 가면 아직 長자를 따지못해 술 먹고는 울먹해하는 어느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대학을 나왔겠다 실무능력도 높겠다 이제는 나이도 꽤나 잡수었겠다 그까지 과장이야 못하랴 하는 속셈을 알아주고는 싶었다. 너도 나도 장자 하나 따려는것은 관료본위 사회의 본질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무슨 인민을 위해서 더 복무하려는것보다도 장자 하나 붙으면 수입의 직선상승이 가능하고 사회지위도 둥둥 떠오르고 마누라의 얼굴도 밝아질것이고 개인적인 삶의 보람도 느낄것이고, 하여튼 좋은 일들이 수두룩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라고 우리는 사회는 보편적으로 그렇게 인정한다. 중국은 아직도 가치취향의 다원화가 성행하지못하고 있다. 유명한 운동원도 스포츠감독도 나중에는 관리로 전변하는 일들은 아무리 무식쟁이라 하여도 롱구 하나만 잘 해도 갑부로 인기인물로  되는 외국의 가치취향의 다원화구조와 어느 정도 대립을 이룬다.  재래로 중국은 정부가 국민들의 가치취향을 인도하는 길을 걸어왔다. 요즘에도 대학생창업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대학생들의 취업난을 풀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대학생 村官들이 많아지는것을 보면 사실은 관료본위가 얼마나 튼튼한가를 짐작하게 된다 관료본위는 현실적인 력사문화적인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나는 중국산식물이다. 이 식물의 독성은 강하여 그 곁에는 다른 식물들이 살기가 많이 힘들다. 헌데 우리는 그 독성이 강한것을 키우고 뜯어먹고 중독되고 후손들에게 유전해주고. 금융위기뒤에 중국은 중앙정부 재정지출을 늘이는 방법으로 내수를 확대화하는 길을 걷고 있다. 재정지출로는 고정재산투자가 엄청 늘어나기는 하지만 그 오단들 대부분은 국유기업소가 全擔하고 있다. 그래서 중소기업은 융자만 힘든것이 아니고 시시각각 국유대기업소에 잘 보이느라고 또 먹히울가봐 전전긍긍한다. 중소기업소란 민간기업이 많고 지역적으로는 경제신흥지역에 집중되여 있다. 계속 이런 형편이 지속된다면  국유대기업소에만 경사도가 큰 경례를 하는 경제책이 장구지책으로 된다면 이번 긍융위기를 통하여 중국은 또 국유화 확대화와 절대화가 되지 않을가는 , 중소기업과 민간경제는 큰 회손을 보지않을가는 근심을 해본다. 중소기업과 민간기업의 지나친 저락은 필연코 재부점유에서 국가의 절대적인 독점을 이루게 된다. 물질재부가 국가에 대집중이 되면 민간경제는 자연히 활력소를 잃게 되고 나중에 민간인들의 가치취향의 주류는 자연히 관료본위에만 머물게된다. 그렇다면 이번 금융위기가 중국의 경제면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가치취향을 포함한 이델레오기에도 큰 여파를 만들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리 중구인들은 앞으로 어떻게 버득거려야 할가? 당신 과장 하고싶다는 사람이 당표나 땄나? 고향친구가 너무나도 억울해하길래 한마디 물어보았더니 그가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던 장면에는, 현실을 직면하는 너도 나도의 무가내가 잠재하고 있었음을 새삼스레 느낀다. 상식적으로 당표도 없는 놈이 공무기관의 과장을 한다는것은 아주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처럼 <아는 떼질을 하>는 친구가 조금은 미워보였었다.          
166    [잡담109] 모주석기념당 그리고 정치동물 댓글:  조회:3793  추천:31  2009-07-06
 천안문광장에 많이 가보았지만 모주석기념당에 한번 입장한적이 없다. 무료입장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먼 발치에서도 줄을 서서 모주석기념당에 입장하는 사람들 행렬을 훤히 바라볼수가 있었지만 다행이 동참을 해보고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나같은 인간은 모주석에 대한 생각과 정서가 복잡하지 않을수가 없다. 모택동할아버지의 神光을 쪼이면서 성장하였고 또 그 陰影하에 숨쉬기가 힘듬을 느꼈던 이상, 모주석에 대한 생각과 정서가 복잡하지 않을수가 없다. 또 력사정치인물들에게  입혀지는 두툼한 포장이 존재하는 한, 또 부동한 사회정치리익이 존재하는 한  력사정치인물들에 대한 평판은 언제나 <안개속에서 꽃구경>이라는 신조를 믿는 나로서는 모주석기념당을 비롯한 력사의미지보다 정치이미지가 짙은 기념물들을 좋아할 이유가 없는듯도 하다.    오늘에 있어서 나로서는 모주석을 좋아할 또는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진정 모주석을 좋아한다면 차라리 먼지낀 모택동선집이라든가를 읽어보는 편이 더 재미있고 이상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모주석은 허세우상장을 내놓고는 모든 고위급들이 화장을 하자고 약속을 한 사람이다.헌데 모주석의 신광을 빌어 자기를 빛내려는 , 또는 자신들의 야욕을 달성하려는 부류들이 모주석기념당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몇천년간 발양되였다는 충과 의도 공연히 버리고 모택동과의 약속마저 아주 아랑곳하지않는, 오로지 살아있는 자들의 리익과 간계가 적라라하게 표출이 된 건축물이다. 그 때문에 모주석기념당이 싫었다. 그리고 좋은 광장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 이상한 생각> 때문에 모주석기념당이 싫었다.  월남자유반격전에서 총을 쏘고 대포를 쏘고 공훈을 세운 군인들은 한 때 사회지위가 엄청 좋아었다 헌데 중국과 월남 사이가 조금 정상화되면서 그들을 영웅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훨씬 줄어들었다. 관방언론도 민간도 마찬가지다.그 영웅들도 역시 정치희생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수많은 조선족들도 항미원조에서 죽었다. 그들을 아주 영웅으로 취급하든 시대는 아주 지나가고 이제는 그들에게도 부득불 정치희생품 비슷한 모자가 차려지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막강한 정치인물과 평범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치에만 리용되는 사회정치문화가 나는 싫다. 평민으로서 인간으로서 더 진실하게 인간의 삶을 영위할수가 있는 사회를 지향해보고싶다. 작년에 대학교 시절 학부 단지부서기직을 맡았던 y선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89년도 기억을 잠간 더듬어보았다.  학생들의 데모가 금방 시작되였을 적에는 정부가 아직은 학생데모에 대한 확정한 태도를 규명하지 않았음으로 하여 감히 학생들과 합류하지는 못하고 다만 학생 대렬을 바깥에서 감시인지 배동인지만 하던  y선생, 만일 학생데모가 인정되면 참석자로 지휘자로 둔갑하고 만일 인정받지못하면 감시자로 둔갑하려던 그 투기심은 우리 학생들더러 어느 정도는  혐오감을 만들게 하던 y선생 , 헌데 그 사태가 지나가고 정치생명이 결속되여 지금은 평범한 교사로 보내고 있는 y선생, 괘나 보고싶었다.사람은 정치동물이라는 명언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앞으로 중국도 사람을 너무나도 정치동물에 내몰지말기를 빈다. 
165    [잡담108] "泛反華세력"은 댓글:  조회:3603  추천:32  2009-06-20
목하 국외의 <反華세력> 하면 반화세력은 모두가 중국을 반대하고 모든 중국인을 반대하는 부류로 취급하는 현상이 있다.그것은 우리의 개별언론이 주도한 결과이다.우리들의 독립사유가 부족한 무분별한 의식의 판단결과이다. 중국의 현존 체재를 반대한다고 중국의 어느 조직을 싫어한다고 반화라는 이름을 선물함은 어떤 정치사기군들과 문화사기군들의 언어게임 확대화에 불과하다.    사기군들의 론리대로 말한다면 중국 현존의 무엇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국외의 모든 조직과 인간들은 무조건 반화이고 무조건 반중국인인데 사실 한심한 사기가 아닐수가 없다. 그런 사기군들의 어불성설을 계속 풀이하여 반화세력은 모택동도 반대하고 더 나아가서는 진시황마저 반대한다는, 현존 사회상태를 반대하고 심지어는 중국의 13억 인구의 전부를 반대한다는 결론을 보급하고 있는데 천하에 소웃다가 꾸레미 터질 일이 아닐수가 없다.   물론 저들의 전략적인 리익을 위하여 국외에 반화하는 세력과 조직이 적은것은 아니지만 또 인간사회의 普世가치를 위하여 중국에서 발생하는 일들의 그 내막을 , 중국인중의 어느 부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과 조직 그리고 외국인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또 누군가 현존 조선의 체재를 비판한다고 그를 조선의 력사문화를 부정하고 만백성까지 비판하고 반대하는 작자로 조직으로 세력으로 생각함도 판단함도 똑 같은 행위인줄을 알아야한다.
164    [잡담107] 주체사상의 배후 댓글:  조회:3865  추천:26  2009-06-18
  대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중문으로 번역된 <김일성저작>을 읽은적이 있다. 실말이지만 <모택동선집>보다도 권수가 많은, 첫 페지부터 마지막 페지까지 주체사상이 최대반복법으로 기록되여있어 지루한 느낌을 받았었다. 공산권 극권주의 나라는 히틀러에 못지않게 사상언론기구을 독점하고 리용하여왔다. 그래서 받아듣는 사람이 리해를 하든 못하든 , 신앙하든 신앙을 거절하든 주입수단만을 고집하면서 그 과정에 색다른 사상과 언론과의 무조건적인 격리를 실행하였다. 그러면서 하루 내내, 일년 내내 수십년 내내 빨간 색상만 구경시켜주니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는 빨간 색상만 존재하는줄로만 아둔하게 알고있었다. 주체사상이 어떠한가? 쉽게 평판할수는 없는 일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주체사상은 반도력사경험주의 사상이 아닐수가 없다. 종족주의 사상으로는 민족주의 애국주의 사상이고 철학적으로는 조금은 주관경험주의이며 또 력사문화사상으로 보면 민족자각의식의 독특한 표현으로 보여진다. 반도는 대국사이에 끼워있는 력사운명을 소유하여왔다. 때문에 국제정서가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때마다, 대국에 의존하고 리용당하는 수난을 겪지않을수가 없었다. 이러한 침통한 력사를 되돌아보면 과거와 현재의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일거일동의 深根을 정서적으로 경험적으로 리해를 진행할수가 있다. 조선전쟁---6.25동란뒤에 소위 우리가 말하는 <연안파>를 비롯한 파벌들에 대한 숙청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거 그리고 핵개발 등 주체의 력사사실 배후에는 <대국만을 믿을수가 없다.  우리의 힘으로 살자>는 의식이 크게 잠재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주체사상이란 어느 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다도 력사경험주의에서 출발된 반도에 실존하는 하나의 사조라고 판단해본다. 어떠한 사조이든지 구체적인 력사문화를 떠나서는 운운할수가 없다. 또 어느 나라이든지 어느 한 사조가 국가권력기관의 해정권을 빌어 장시기동안 절대적인 지배를 이루면  비운을 초래할수 있는 가능성을 배태한다. 가끔은 개방적이고 중용적이고 다원적인 의식구조가 극단주의를 배제하고 사상생태와 인간생태를  이루는 밀방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복잡다단한 국제정서 중에서 , 주체성만 강조하고 각 나라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전혀 무시하는 작법은  정서적인 주관주의다. 또 상호의존성만 강조하고 주체의식을 잃어버리는 작법은 력사경험을 존중하지않는 아둔한 행위이다.   
163    [잡담106] 啓蒙과 救亡 댓글:  조회:3667  추천:29  2009-06-04
언제부터 계몽과 구망이란 력사교과서에만 적혀있다가 가끔 놀러나오는  문화술어만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산업화와 로무수출의 진전중에 전통적인 촌락공동체가 무너지고 집거지가 취약해지고 민족인구가 감소되면서 또 민족언어와 문자를 비롯한 민족의식이 흐리멍텅하게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중국땅에서 우리문화를 보존할수가 있을가는 의구심과 우리공동체의 구망이라는 희망사항이 출현되고 있다.아주 오래동안 침몰되여있던 단일문화분위기로부터 그 봉페상을 떨쳐버리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깊고 넓은 생존문화 계몽을 조금 념두에 두고 있는척 두리번거리던  찰나에 우리는 구망이라는 희망사항을 직면하게 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계몽에 관한 의식과 행동들이 많이 빈약해지고 있으며 모든 우선권을 생존구망에만 내주있으며 계몽은 거의 코웃음으로 대하는 살풍경을 내보인다.  <먼저 먹고 살 판이지, 언제 그런것들을 살피겠는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하지만 나는 구망시기의 계몽은 필요한가? 어떻게 필요한가를 조금 거론해봄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본다.       일전에 5.4운동을 기념한다고 아우성이다. 중국에서는 5.4운동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정치적인 평판보다 문화적인 평판이 훨씬 적어보인다. 5.4운동은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여 나중에는 구망운동으로 전변하면서, 계몽은 많이도 흐지부지해진것이 5.4운동의 局限성이다. 5.4운동이 구망이라는 비상시기에는 계몽도 무가내로 소실되는 력사의 래력을 말해준다면 5.4운동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천신만고는 우리가 지나친 실용종족으로서는 구망에 직면하여 계몽이라는 弦은 툭 끊어버리는 그  위험성을 경종하여준다. 계몽이라는 튼튼한 받침이 없이는 어느 위대한 구망도 나중에는 허전함을 내비치지 않을수가 없다. 5.4운동의 철저한 세례를 받지못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중국인은 아직도 정신세계의 허황함을 떨쳐버리지못하고 있으며 그 본질적인 정신세계는(협애한 민족주의와 현실실용주의) 국력성장과 세계화물결과 비해서는 유아기에 머물러있을뿐이다. 중국만이 아니다. 일본도 근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족구망과 현실생존이라는 기발아래서 계몽결핍의 고배를 수없이 맛보아왔다. 과거에 있었던 일본의 군국주의는 주기적인 자본주의경제위기가 그 경제원인이라 한다면 일본의 <정신세계의 부실공사>는 일본군국주의의 문화적인 심리적인 심층적인 원인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구망비상시기에도 계몽은 크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계몽이 없는 구망은 구망성공 뒤에도 새로운 구망을 직면할 가능성을 내재한다고 생각한다.계몽중에 어떤 공동체는 <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를 찾듯이 > 자신의 전통문화에만 크게케 매달리는 복벽주의가 우세하는 경우도 많았었다. 그 속에는 민족자존심이라는 심리동기가 크게 작용하면서 많은 역효과도 보이여왔다. 구망중에 선인들의 지혜에서 무엇을 얻을가 하는 욕심은 좋기는 하지만 누구든지 자신의 전통문화를 더 높고 넓은 차원에 모시지 못하는 자는 계몽실패를 하지않을수가 없다.20세기 초엽에 일제의 통치하에 한반도에 대종교가 흥성했던 일과 중국의 개혁개방중에 서양문화 앞에서 열세를 직감하면서도 신유학이 흥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결코 좋은 력사를 만들지는 못하였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해본다.   또 나를 내놓고는 인간이 아니다, 내 나라를 내놓고는 다 인간나라가 아니다는 사고방식이 계몽대적의 하나임을 말하고싶다.. 자아비평을 조금 진행하는 작자에게 崇洋媚外라는 모자를 선물함도 계몽의 대적임을 말하고싶다.
162    [잡담105]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댓글:  조회:4053  추천:28  2009-05-22
     约瑟夫·熊彼特는 20세기 유명한 경제학자로서 그와 凯恩斯(국가자본주의학설의 창시자)는 瑜亮이라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삼국지에서 주유가 적벽지전 뒤에 울분끝에 죽으면서 <유를 만들었으면 어찌 또 량을 만들었는가? 既生瑜,何生亮> 개탄하던 일을 빌어  당대사회에서 凯恩斯의 학설이 크게 주목받고 리용되였지만 约瑟夫·熊彼特의 뛰여난 재능과 학설이 상대적으로 위축받은 사실을 두고 중국은 瑜亮情結이라는 중국식 언어표현을 하여왔다. 约瑟夫·熊彼特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저작을 남기였다. 경제학저작으로서 물론 정치학견해도 다소 보인 經典이라고 한다.중국에서는 반동경제학자로 몰리워 죽음까지 당한 고준이 이 저작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내가 소위 경제학공부를 하는 시절에도 约瑟夫·熊彼特는 서방경제학사 교과서에마저 적은 편폭으로 소개되여 거의 인상이 없던 인물이다. 현재도 중국에서는 경제학분야가 아니면 잘 알려지지않은 상태이다.   그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책 이름에 민족주의라는 명사까지 붙여놓으면 근 백년간의 인간사 축도가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라 하면 우리들더러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를 포함한 사회제도 그리고 상관된 이델레오기를 연상케 한다. 민족주의는 흔히는 제도와는 조금 거리를 두어 이델레오기를 다루는 명사로 인상이 깊다. 2차대전 뒤, 국가와 국가사이의 리익경쟁은 소위 체제경쟁으로 연역이 되여왔다. 체제경쟁은 제도경쟁과 이델레오기경쟁이다. 뿐만아니라 동일한 국가내에서도 체제경쟁이 파급되면서 반공주의라든가 계급투쟁주의가 성행되여왔다. 특히는 극단적인 정당 또는 부류가 집권하는 나라는 주의가 절대적 일위를 차지하고 그속에 가끔 협애한 민족주의라는 유령마저 떠돌면서 사단을 일으키고 불화를 저지르면서 무수한 민고를 도탄에 내몰아왔다.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면서 교육의 희생품이기도 하다. 체제경쟁이 가열화되던 시절에는 국어교과서마저 정치교과서로 되여있어 우리는 극단적이고 일면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일원화에만 물들어왔다. 현재 체제경쟁이 어느 정도 무너지고 다원화복구사업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내가 사는 중국이든 주위의 나라이든 결국은 일원화체제의 잔여가 많이 남아있음은 사실이다. 기득권의 악착함과 문화의 관성으로 말미암아 인터넷이 발달된 시절이라 하지만은 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같은 음식을 나누는 인군사이에 산생되는 분쟁이 주의의 전쟁으로 포장되고 표현되는 경우도 많은데 크게는 우에서 말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로 총괄이 된다.        이 세상에는 사회주의자라 자처하면서도 무엇이 자본주의고 무엇이 민주주의고 무엇이 민족주의인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무엇이 진정한 사회주의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다른 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그 원인은 인간의 편애된 인식수준과 제한된 인식능력 그리고 강대한 선전기구들이 수십년간 악전고투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개방된 사회라면 여러가지 주의가 적어도 그런 학설들이 동등하게 소개되여야 하고 연구되여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런 리상사회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어떤 주의이든지 신성한 옷을 차려입는 날에는 그 주의가 아무리 과학적이고 인도적이고 리상적인 주의라 할지라도 배타적이고 보수적이고 공구적으로 변질하면서 은페된 력사를 꾸미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래서 가끔 어느 주의의 교활한 기만성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  
161    [잡담104] 문場인가 학場인가 아니면 리익場과 名欲場인가 댓글:  조회:3645  추천:32  2009-05-12
중국조선족 문단이 과중한 짐을 등지고 고행을 하여왔다. 문학의 사회공능을 행사하면서 또 중문만을 사용하는 군체와는 조금 다르게, 우리 군체의 사색의 기록자와 촉구자로서의 문학과 문학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부하를 짊어지고 운행이 되여왔다. 그 사색과 사회여파가 유치하든 심각하든 조선족 문단은 민간<사상계>로서의 역활을 해왔음도 사실이다. 헌데 중국조선족 문단이 결구적으로 보면 문제점이 전혀 없은것은 아니다. 주류의식의 령도와 관방의 재정지출하에 그 심처에는 리익이라는게 부품과 나사못으로 내재하여왔다. 소위  문학에 몸담은 어떤 문학인들이 원고료가 아닌 전직작가요 어느 협회주석이요 등등의 직과 봉급으로 대우로 일상을 누려야 했기 때문에  부득불 리익갈등이 많이 존재하여 왔다. 그러는 중에서 또 이델레오기 분쟁도 끼여들어 밀고제가 빈번했고 패거리싸움이 출현도 했고 리익쟁탈이 인신공격이라는 탈을 쓰고서 많은 기습을 하여왔다. 그래서 아무리 사치한 수작을 한다 하더라도 문단쟁명이라든가 인신공격이라든가 요언날조라든가 의심병유행이라든가는 가끔 세속의 리익쟁탈과 명욕쟁탈의 혐의를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물론 참여되는 매 개인의 수양과 전혀 연관없는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도와 생존결구가 만들어준 산물이다. 그래서 진정한 시민사회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리는 판이다. 납세자들의 돈이 재정이라는 경로를 거쳐 문학인들의 일상으로 전변하는것이 아닌, 문학인들의 신성한 로동이 직접 사회와 등가교환을 진행하는 시민사회말이다. 우리에게는 인구가 적고 지역이 작은 약세가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문화관료주의와 지나친 리익분쟁을 면하는 좋은 방책이 아닐가고 생각된다.       유감스러운것은 아직도 문장과 학장이 리익장으로 명욕장으로 표현을 이루고 있으니. 과거에 민간<사상계>의 배역까지 조금 해오던 기세와 영광은 와르르 무너지고 있다.  부끄러운줄을 아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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