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려니 우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물론 힘들다. 그런데 힘든 게 어디 개뿐이랴. 고양이로 사는 건, 걸핏하면 생매장 당하는 소, 돼지, 닭, 오리로 사는 건 얼마나 힘든가. 농가소득증대라는 미명 아래 낯선 땅에 끌려왔다가 괴물쥐의 오명을 쓴 채 죽어가는 뉴트리아는 또 어떤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찍이 간디 선생께서는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수준은 그 나라의 동물이 어떻게 대우받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동물이 살기 힘든 이 나라에서 사람도 그리 행복해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얼핏 상관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동물과 인간이 각자 직면해있는 고통은 실은 모두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은 당연히 존중받고 지켜져야 할 거의 모든 가치들을 새카맣게 망각해버린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개의 고충 따위가 뭐 그리 유별난 것이겠는가마는, 하여튼 잠시 그것을 따로 떼어 얘기하려고 하니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사례1.
개와 자주 산책 다니는 공원에 어느 날 현수막이 나붙었다. ‘주민들의 쾌적한 산책을 위하여 공원에 개를 데려오지 맙시다.’ 어안이 벙벙했다. 혹시 내가 잘못 읽었나, 다른 뜻으로 쓴 글을 내가 곡해했나 몇 번을 다시 보았다. 개에게 산책은 생명과도 같은 일인데 공원엘 오지 말라니 물고기더러 물에 오지 말라는 격이었다. 트위터에 일러바쳤더니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노해주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당연하다, 그럴 만 하다는 견해를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의무부터 다하라’는 요지였다. 사실 내 생각에도 공원엔 개똥이 너무 많았다. 목줄을 묶지 않은 개가 뛰어다녀 개 무서워하는 사람이 질겁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개똥도 꼬박꼬박 치우고 목줄도 반드시 채우고 다니는 내가, 그들 방식으로 말하자면 ‘의무를 다한’ 나와 내 개가 어째서 다른 이의 벌을 대신 받아야 한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사례2.
친구와 이태원의 펍엘 갔다. 친구는 자신의 커다란 개와 함께였다. 개를 데리고 아무 가게나 드나드는 건 아마도 한국에선 외국인이 많이 사는 이태원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대개 그냥 지나치거나 개를 향해 씩 미소만 짓고 마는 외국인들과 달리, 다가와서 개를 만지고 사진 찍고 하는 이들은 예외 없이 한국인이었다. 역시 그런 곳에서 개를 만나는 게 이색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터였다. 방식이야 어쨌든 그것이 개에 대한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 나는 그냥 좋게 생각하고 응대하는 편이다. 하지만 친구는 본디 동의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개를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점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몹시 취한 한 남자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개를 거칠게 만지기 시작했다. 인내심이 찰랑거리던 친구에게 한계가 찾아왔다. 만지지 마세요! 무안해진 남자는 달리 화풀이할 곳이 필요해졌고, 결국 그는 가게 전체가 뒤숭숭하도록 소란을 피우다가 경찰이 온 후에야 간신히 자리를 떠났다.
두 개의 사례에서 개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아마도 정반대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나는 개를 싫어해서, 다른 하나는 개를 좋아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이 두 가지 경험에서 묘한 공통점을 느낀다. 뭐랄까, 어쩌면 이걸 ‘개의 타자화’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와 함께 살아가는 건, 이제(라기 보다는 진작부터) 한국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삶의 한 방식이다. 꼭 내가 개를 키우지 않더라도 좋든 싫든 주변에 개가 우글댄다. 어떤 이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개 때문에 웃고 울고, 사람이 아닌 개에게서 위안을 얻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쑥쑥 늘어간다. 말하자면 이건 존재의 한 양태인 것이다. 새로운 룰이 필요할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저 개와 개 주인을 대상화하지 말고 오히려 기존의 룰을 적용해야 한다. 개는 개 주인에게 속한 무엇이다. 개 주인은 (개를 키우며 살아가는) 그저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처럼, 너무 멀리 배척하거나 너무 바싹 다가서지 않으면 된다. 싫으면 싫어할 수 있다. 좋으면 적절한 예의를 갖춰서 호의를 표현할 수 있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 우린 여태 그런 룰을 그럭저럭 운영해가며 살아왔다. 개똥을 안 치우는 개 주인, 공공장소에서 개에게 목줄을 채우지 않은 개 주인은 룰에 따라 제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책임을 다른 개 주인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그와 나 사이에는 연대책임을 져야 할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이다. 일부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해서 불특정다수의 정당한 자유와 권리를 빼앗아도 좋다는 발상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의 사고방식이 아닐까? 하긴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의 논리가 횡행하는 게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남 탓은 실컷 했으니 이제 내 탓을 좀 할 차례다. 한국에서 개로 살아가는 게 힘들다면, 가장 큰 이유는 뭐니 해도 개 주인의 무지일 것이다. 개는 이 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등동물이다. 인간과 비슷한 점도 많지만 신체구조라든가 사는 방식이라든가 의사소통 수단이라든가, 다른 점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체다. 그런데 그런 대상을, 그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정보도 없이 간단히 품에 안고 와 집안에 내려놓는다. 화분 하나를 들이려고 해도, 금붕어 한 마리를 기르려고 해도 알아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말이다. 나 역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개를 좋아한다는 기분에 빠져 개를 입양했다가 3일 만에 병으로 떠나보낸 적이 있다. 개가 집안을 어지럽히고 말을 안 듣는다고 혼을 내거나 때린 일도 많았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깨닫고 나서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처럼 무식하고 무책임한 인간에게 이렇게 곱고 여린 생명을 맡긴단 말인가. 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내게 말을 걸거나 호소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 일은 고작 그걸 멋대로 오해하고 인간의 방식을 강요한 것뿐이었다. 스위스에서는 개를 입양하려면 반드시 필기와 실기에 걸친 애견관리과정을 이수해야 한다고 한다. 1972년에 개정된 독일의 동물보호법 1조 1항은 ‘동물과 인간은 이 세상의 동등한 창조물이다’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머나먼 곳을 인용해야 할 때 느끼는 기분은 세계 7대 꿀꿀함 중 하나다.
얼마 전 TV에서 < 당신은 개를 기르면 안 된다 >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 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던 개 주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개들은 분리불안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프로그램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하루에도 수백 마리의 유기동물들이 길에서, 보호소에서 죽어간다. 꼭 완벽한 주인이 아니더라도, 하루의 절반만이라도 함께 보내주고 보살펴줄 보호자가 그들에게 나서 준다면 어떨까. 그래서 그들이 얼마간 주인을 기다리는 외로움을 견뎌야 할지라도,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문이 열리고, 집안을 어지럽힌 대가로 뜻 모를 잔소리를 좀 듣고(소용없는 일이니 안하면 좋겠지만), 그런 약간의 시련이 지나고 나면 맛있는 저녁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그리곤 잠시 주인과 놀다가 그 곁에서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개를 기르기 어렵다, 그래도 용기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