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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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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창건후 첫 고위급간부 암살사건
2014년 03월 30일 22시 15분  조회:6096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공화국창건후 첫 고위급간부 암살사건

 
(번역)



 
 
1951년 2월에 중앙인민정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반혁명징벌조례》를 반포하였는데 그때로부터 전국적으로 기세드높은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였다. 그러나 일부 반혁명분자들은 멸망을 달가와하지 않고 의연히 새로 태여난 인민정권을 뒤엎으려고 취후발악을 하면서 한번 또 한번 새 정부의 고위급간부들을 암살했다.

1951년 3월에 모택동의 원 비서이며 산동성인민정부위원이며 산동성군구 정치부 부주임인 황조염(黄祖炎)은 인민해방군내부에 숨어든 반혁명분자에게 암살되였다. 이는 새 중국이 성립된후 처음으로 발생된 고위급간부암살사건이기에 중앙지도자들까지도 경악했다.

1951년 3월, 제남의 밤은 아직도 쌀쌀하여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3월 13일 밤 8시 30분에 경이로에 위치한 제남시정부의 강당에서 북소리와 거문고소리가 울려퍼졌다. 산동성군구문화사업좌담회의가 방금 끝나고 문예야회의 공연이 시작된것이였다. 좌담회에 참석한 대표는 200여명이였는데 대부분이 산동성군구계통 사정(司政)기관의 문화, 선전교육을 책임진 과급이상의 간부들이였다.

황조염은 앞줄의 오른쪽 첫좌석에 앉아있었는데 그는 그날밤 좌담회에 참석한 간부들중에서 직무가 가장 높은 수장이였다. 공연이 시작되기전에 그는 주석대에 올라 대표들을 향해 강화를 한후 자기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때 누구도 회의에 참석한 일군중에 한 사람이 황조염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그날밤에 황조염은 원래 열이 몹시 나서 강화를 마친후 집에 돌아가 쉬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흥을 깨뜨릴가봐 계속 남아서 문예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이 한창 고조에 오르고있을 때 황조염의 좌측 뒤쪽에 앉은 한 사내가 흉악한 눈길로 황조염을 쏘아보고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주의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사람들이 관람에만 몰두하느라고 자신에게는 주의를 돌리지 않는것을 보고 살그머니 황조염의 뒤로 다가가 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1초동안 황조염의 머리를 겨눈후 방아쇠를 당겼다.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황조염은 당장에서 쓰려졌다. 흉수는 이어 오른쪽 처장의 좌석에 대고 한방 쏘았다.

너무 갑작스럽에 발생된 일이라 모두들 어리둥절해졌다. 한참후 누군가 큰소리로 “저 놈을 붙잡아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는 흉수가 이미 자진한 뒤였다.

산동성군구 보휘부의 장일평 등은 급히 화조염을 성립병원으로 호송했다. 의사들이 모든 방법을 다해 구급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황조염은 불행하게 사망되였다. 향년 43세였다.

황조염을 암살한 흉수는 공개된 반혁명분자가 아니라 당내에 숨은 반혁명분자 왕취민이였다. 왕취민은 혜민군분구 선전교육과 부과장이였다. 산동성 문등현 서횡요촌의 한 지주의 가정에서 출생한 왕취민은 항일전쟁초기에 소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40년에 팔로군에 혼입해들어왔고 이듬해에 공산당내부에 혼입해들어왔다. 1944년에 농민의 소작료, 토지세, 대출리자 등을 낮추는 정책을 실시하자 자신의 가정리익에 손해를 입는것을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병을 핑게로 장기적으로 집에서 휴식했다. 토지개혁운동때 그는 부모가 투쟁을 당하게 되자 군중들을 욕하면서 요언을 퍼뜨려 토지개혁을 반해했다. 하지만 그는 처분을 받지 않았다. 1950년 11월에 왕취민은 혜민군분구에 전근되여 선전교육과 부과장직을 맡았다. 그후 그는 직권을 리용하여 조직에서 나서서 자신의 아버지가 악패지주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요구가 거절을 당하게 되자 당과 당의 토지개혁정책에 더욱 큰 불만을 품게 되였다.

1951년 2월에 전국적으로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였다. 3월 6일에 혜민군분구에서는 왕취민의 고향사람들이 부쳐보낸 련명신을 받았다.

“악패지주인 왕취민의 아버지는 두 농민을 핍박하여 죽게 한 죄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왕취민은 1938년에 적에게 두명의 지하당원을 밀고한적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번 반혁명진압운동에서 그들을 처리해주기를 바랍니다.”

혜민군분구 정치부의 지도부에서는 왕취민의 정서에 영향을 끼칠가봐 엄숙하게 처리하지 않고 산동성군구에도 보고하지 않았다. 왕취민은 고향사람들이 자신을 적발했다는것을 알게 된후 놀라서 함께 죽더라도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총을 닦고 칼을 갈면서 기회만 기다렸다. 하지만 혜민군분구지도부에서는 왕취민의 반상적인 행동에주의를 돌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를1951년 3월 13일에 제남에서 열린 산동성군구 문화사업좌담회에 참석하게 하여 황조염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되게 하였다.

해방초기에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 당내에는 왕취민과 같은 가정에서 출새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토지개혁정책을 옹호하고 지지하면서 혁명사업에 충성했다.

황조염이 암살당한 그날밤에 중공산동분국과 산동성군구에서는 즉시 이 소식을 중앙에 보고했다. 모택동 등 중앙지도동지들은 황조염이 암살당한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모택동은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각 중앙국, 대군구, 지원군 당위 및 해당단위에 통보를 내려보냈다.

“산동성군구 정치부 부주임 황조염동지는 3월 13일에 좌담회에 참석했다가 반혁명분자 왕취민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는 우리 당의 고위급간부가 당내에 숨어든 반혁명분자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서 과거에는 보기 드물었습니다. 이에 전당에서는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통보합니다.

첫째, 반혁명분자들의 보복을 엄하게 방지해야 합니다. 반혁명분자들의 보복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것을 인정하고 반드시 사전에 방지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경비를 강화하는 외에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하여 반혁명조직을 파내고 반혁명소굴을 짓부셔버려야 합니다. 반혁명분자들이 미처 보복할 사이가 없이 견결하고 신속히 그들을 소멸해야 합니다.”

둘째, 절대 무사태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당내, 정부내, 군대내에 소수의 반혁명분자들이 혼입해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이 문제에 주의를 돌려 의심스러운 분자들을 조사하여 재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지구당위 및 행정공서 1급이상의 기관, 군분구 및 사(师) 1급이상의 기관, 도시에서는 시구량급기관내에서 특별히 의심스러운 분자들을 주의하여 조사해야 합니다. 확실한 조사하여 재료가 확실하다면 반드시 합당하게 처벌하여 당, 정, 군 각급지도기관의 순결과 안전을 보장해야 합니다. 절대 우유부단하거나 관용을 베풀어 나쁜 일을 하도록 조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건이 발생된후 산동성군구에서는 욍취민소재의 혜민군구의 지도부와 해당간부에 대해 엄숙하게 처리하고 이번 사건의 교훈을 참답게 총결했다. 반혁명진압운동이 방금 시작되여 군대내부에서는 반혁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결과 각급 조직에서는 마비사상이 존재했고 경각성이 부족했다. 보위부문에서는 안전사업이 소홀하여 회장에 대한 경호배치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사건이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군구에서는 구체적인 조치를 제정했다. 산동성군구 사령원 허세우는 명령을 내려 이후 기관간부들이 토비토벌 등 임무를 집했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률로 총을 휴대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1952년 10월 26일에 모택동은 처음 제남땅을 밟았다. 모택동이 이번에 산동에 온것은 사업회보를 듣고 산동각지를 시찰하는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일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황조염렬사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오후에 산동분국의 시찰활동계획배치에 대해 알아본후 모택동은 산동성군구 사령원 허세우한테 물어서 황조염의 묘지가 남쪽교외의 사리산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모택동은 허세우를 보고 말했다.

“내가 묘지에 가보아야겠소. 난 1938년초에 연안에서 그와 리별했댔소. 그때 그는 신4군을 편성하러 산에서 내려온 진의를 맞이하러 갔댔는데 벌써 14년이 되였소.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리별이 될줄은 생각도 못했소.”

1952년 10월 27일에 모택동은 허세우와 함께 승용차에 앉아서 화조염렬사의 묘지로 찾아갔다. 묘지로 가는 도중에 모택동은 허세우를 보고 말했다.

“조염동지는 얻기 힘든 인재요. 문무에 능하고 사람됨됨이가 너그럽소. 그는 조직관념과 사업심이 강하고 자신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며 동지들과의 우애도 깊었소. 난 그가 몹시 그립소.”

황조염의 묘지는 렬사릉원의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모택동은 황조염의 묘지앞에서 허리를 굽혀 묵묵히 묵도를 하고나서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염동지, 내가 당신을 보러 왔소!”

모택동이 눈물을 흘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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