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서 쫓겨나 총망히 비행기를 타고 대만에 내린후 장개석은 어디에 거주할것인가에 신경을 썼다. 그러다가 결국 양명산아래에 있는 사림(士林)을 선택했는데 이 동을 사림관저(士林官邸)라고 불렀다. 그후 30년동안에 사림관저는 대만정치권력을 다투는 무대로 되였다. 그때의 장개석으로 말하면 자기의 권력을 회복하고 국민당을 재정돈하는것이 가장 급히 처리해야 할 사무였다.
1950년 1월에 송미령이 미국에서 대만으로 날아왔는데 이는 저조상태에 있던 장개석에게 큰 위안이 되였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에 능한 송미령은 줄곧 장개석의 외교고문으로 있었는데 이는 장개석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였다.
송미령이 대만에 도착한후 장개석은 곧 부인을 동반하여1950년 3월 1일에 직무를 다시 회복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장개석은 다시 대통령의 보좌에 앉게 되였다. 대만을 견고하게 하는것은 당시 장개석과 전체 국민당에 있어서 모두 중점중의 중점이였다. 그러나 장개석의 옆에서 지켜보던 진성은 매우 똑똑히 알고있었다. 그 시기 대만환경은 그 자신이 장개석의 파견으로 대만성주석 겸 대만경비 총사령직을 맡고있던 1948년보다 더 복잡했던것이다. 진성의 아들 진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올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장위원장과 연원이 있는 사람이였지요. 원래부터 장위원장과 불화가 있었던 사람은 자연히 오지 않았지요.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인연관계였습니다. 장개석이 대만에 온후 모두 그의 말을 들었고 그가 다시 나서서 령도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를 놓고 말하면 원래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니 의견도 달랐고 원래 대륙에 있었을 때의 파벌도 그대로 대만에 옮겨오게 되였지요.”
장개석이 직무를 회복하는 의식은 유쾌한 기분속에서 행해졌지만 어색한데가 있었다. 그것은 “부대통령”이 없는 장소였고 전임대통령대리였던 리종인이 이미 미국으로 갔기때문이다. 리종인은 곧 검찰원의 탄핵제안을 받아 대만당국(当局)의 책임추궁목표로 되였다. 이어 장개석은 개조위원회를 성립했다. 16명위원의 명단중에 진과부, 진립부형제의 이름을 찾아볼수 없었다.
대만력사학자 류유개는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도착한후 대륙을 잃은 책임을 찾아서 분석하게 되였습니다. 누가 대륙을 잃게 했는가? 모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때문에 그때에야 당을 개조하자고 말하면서 CC파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CC파는 진씨형제를 위수로 한 중앙구락부조직을 가리키지요. 이는 국민당내부의 중요한 파벌인데 진씨형제 성씨의 첫자모를 따서 지은것입니다.”
CC파는 내전시기에 매우 활약했는데 핵심인물은 진과부와 진립부형제였다. 그들 형제는 장기적으로 국민당을 조종했기에 사람들은 “장가천하에 진씨당”이라고 형용했다. 국민당개조가 시작되자 진씨형제가 제일 먼저 그 대상이 되였다. 개조위원회가 성립된후 얼마 안되여 진립부는 곧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대만에 남아있던 진과부는 얼마 안되여 병으로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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