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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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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동 중국군사지도자들중 가장 신비한 대장
2015년 07월 12일 20시 58분  조회:5986  추천:2  작성자: 넉두리

서해동 중국군사지도자들중 가장 신비한 대장

 
(번역)




 
 
“중국공산당의 군사지도자들중에 서해동(徐海东)보다 더 이름이 나고 신비한 군사지도자는 없을것입니다.”
이것은 1936년 여름에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가 모택동과 홍군장군들을 취재하고 나서 내린 평가이다. 서해동은 중국인민해방군의 군사지도자이고 개국대장이며 걸출한 군사가였다. 건국후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그를 해방군의 36명군사가중의 하나로 인정했다. 모택동은 서해동을 “중국혁명에 큰공을 세운 사람”이며 “로동계급의 본보기”라고 높이 찬양했다.
서해동은 1900년 6월 17일에 호북성 대오현 하점구 서가요(지금의 대오현 신성진 서가요)에서 태여났다.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서해동은 1955년에 대장계급을 수여받았으며 1급8.1훈장, 1급독립자유훈장,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제1, 2, 3기의 국방위원회 위원, 중국공산당 제8, 9기의 중앙위원을 력임했다. 그는 1970년 3월 25일에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의 잔혹한 박해를 받아 억울하게 하남성 정주시에서 서거했다.
1925년에 광동에 도착한 서해동은 국민제4군소속의 사장 장발규수하의 패장대리로 임명되였다. 첫전투는 정사교에서 벌어졌는데 서해동이 거느린 패는 오패부수하의 4개 포병련을 소멸하고 12문의 포를 로획했다. 장발규는 몹시 기뻐서 전체 사를 집합시킨후 서해동을 앞에 불러놓고 칭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해동을 소위 패장으로 승직시켰다.
정사교전투이후 서해동은 북벌군을 따라 하승교, 남창, 정주의 전쟁터를 누빈후 다시 무창으로 돌아왔다. 그 시기는 1927년의 “4.12”반혁명대도살이 시작되였을 때였다. 당조직에서는 장개석이 공산당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서 서해동에게 속히 부대를 떠나라고 통지했다. 서해동은 총 한자루에 탄알 여덟발을 가지고 명부를 던져버린후 부대를 떠났다. 그후 서해동은 황파에 가서 군사부장직을 맡았다. 처음에 13명에 총 한자루, 탄알 여덟발이였다.
서해동은 홍군에서 싸움에 능하다고 소문이 났다. 어느 한 전투에서 그는 2000명의 병력으로 적의 한개 사를 섬멸하고 적군 사장을 생포했다. 그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된 국민당 사장은 자신이 어떻게 되여 졌는지 몰라서 서해동을 보고 “당신은 황포군관학교 몇기를 졸업했습니까?”하고 물었다. 서해동이 “나는 ‘청산대학(青山大学)’을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악예환(鄂豫皖)근거지는 점차 전국의 제2대쏘베트구역으로 발전했다. 홍군창건초기에 국민당에서 내건 체포명단중에 현상금이 가장 높은 세 사람은 모택동, 팽덕회, 서해동이였다.
당시에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는 15군단주둔지로 가는길에서 가는 곳마다 국민당이 비행기로 뿌린 삐라를 보았는데 삐라에는 “무릇 팽덕회거나 서해동의 목숨을 끊어놓는 자에게는 현상금 10만원을 준다”는 내용이 찍혀있었다. 서해동은 전쟁터에서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였지만 평소에는 아주 친절한 지휘관이였다. 서해동은 성질이 급하여 전쟁터에서는 두번 말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즉시 달려가야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채찍으로 때리군 했다. 전군에서는 모두 서해동이 엄격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장정도중에 어느 한번은 국민당부대와 갓 싸우고 난후라 매우 피로한 상태여서 호르래기를 불어도 모두 듣지 못했다. 급해난 서해동은 방마다 찾아다니면서 몽둥이로 200여명을 때려서 깨웠다. 당시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모두 국민당군에게 붙잡혔을것이다.
또 한번은 우가하전투에서 탄알이 서해동의 얼굴을 스치고 나갔다. 경호원이 “군장님이 부상을 입었습니다”하고 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서해동은 경호원을 무섭게 노려보며서 “누가 부상을 입었다구 그래? 입다물어!”하고 고함쳤다. 그는 자신이 부상을 입은것을 전사들이 알게 되면 군심이 동요될가봐 그랬던것이다. 사후에 그는 경호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서해동은 아홉번 부상을 입었는데 여덟번은 총상이고 한번은 “홍창회(红枪会)”에서 엉뎅이를 찔러서 난 상처였다. 어느 한번 그가 서른살 때 부상을 입었는데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그때 그는 몹시 섭섭했다. 그런 경력이 있었기에 그는 부상병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위문하군 했다.
1932년에 국민당군은 악예환근거지를 4번이나 포위토벌했는데 장국도는 핍박에 의해 홍4방면군 주력을 거느리고 쏘베트구역을 떠나 장정을 시작했다. 홍25군의 일부와 제75사, 제27사는 쏘베트구역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했다. 그들앞에 놓인것은 20만명의 국민당대군과 엉망진창이 되고 날로 줄어드는 근거지였다.
서해동은 그토록 험한 환경에서 홍25군을 거느리고 연안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도중에 악예섬(鄂豫陕)혁명근거지를 창건했다. 당시 서해동이 거느린 홍25군은 평균년령이 18세였다. 로혁명근거지에서 사망된 전사들이 매우 많았고 후에 참군한 병사들은 모두 청소년들이였다. 당시에 홍25군의 전투부대는 모두 18세이하의 전사들이 위주였다. 서해동의 부인이 장정에 참가했을 때 만 16세밖에 안되였다. 이런 연유로 하여 후에 구쏘련에서 《서해동과 그의 동자군》이란 책까지 나왔다.
서해동의 부대는 매우 젊었지만 싸움에서는 아주 용맹했다. 25군에는 한가지 전통이 있었는데 무릇 25군에 참가하려는 군인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우리 25군에 올수 없다”라고 묻군 했다. 이리하여 25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들만 모여들었다.
서해동은 25군을 거느리고 겹겹의 포위를 뚫고 섬북으로 진군하여 1935년 9월에 류지단과 회합했다. 1935년 11월초에 서해동은 마침내 중공중앙과 모택동을 만났다.
서해동의 일가친척중 66명의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27명이 가까운 친척이고 39명이 먼 친척이였다. 악예환전투가 벌어졌을 때 서해동은 어머니를 만난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해동의 명성이 높아지자 장개석은 서씨가문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30년부터 시작하여 국민당은 서씨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죽이는 바람에 서해동이 악예환을 떠나 장정에 참가했을 때는 이미 일가친척 66명이 살해당했다.
1932년에 홍4방면군이 떠난후 서해동은 23일동안에 어떤 때 잠시 선잠을 잤을뿐 대부분 잠을 자지 못했다. 그때문에 적을 물리친후 서해동은 련속 사흘동안 잠을 잤다. 결과 잠을 깼을 때 그는 피를 토했다. 그것은 서해동이 사장직을 맡고있는 시기였다.
여러번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돌아온 서해동은 자신의 건강에 매우 자신감을 가지고있었다. 1939년에 서해동은 화중에 파견되여 신4군 강북지휘부의 부총지휘직을 맡게 되였다. 처음으로 일본괴뢰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후 서해동은 또 피를 토했다. 서해동은 주가강전투에서 일본괴뢰군 160여명을 소멸하고 일본 소좌 한명을 사로잡았다. 원래 일본군이 너무 강대했기때문에 신4군은 감히 화중에서 일본군과 싸우려고 하지 못했다. 그때문에 그번 승리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1940년 1월 28일에 서해동은 앓아누웠다. 그는 페가 부어서 이불도 덮을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했다.
당시에 신4군의 지도자 진의와 장운일이 모두 중앙에 “서해동동지의 병세는 매우 위중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보고를 올렸다. 모택동은 서해동한테 전보를 보냈는데 후에 서해동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보문은 200여자였는데 주석께서 연안에 계시기에 나의 병문안을 갈수 없다는 내용이였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서해동동지가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여덟글자를 보냅니다”라는 내용도 있었다면서 그 여덟글자는 바로 “하늘이 무너져도 관계하지 말고 병치료에만 전념하십시오(静心养病,天塌不管)”라는것이였다고 말했다. 당시 그 전보문을 본 서해동은 눈물을 흘렸다. 《문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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