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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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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의 전 남편 당납의 비밀신분
2016년 03월 27일 18시 43분  조회:7846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강청의 전 남편 당납의 비밀신분
 
(번역)


 
 
1914년에 강소성 소주에서 출생한 당납(唐纳)은 1935년 봄에 녀배우 람평과의 사랑에 빠져 그녀와 동거했다. 그러다가 1936년 4월 26일에 항주의 륙화탑에서 람평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조단과 엽로천, 고이기와 두소견도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세쌍의 명배우가 함께 올리는 결혼식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당시 당납은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그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납이 중국공산당특별당원이고 국가안전부의 정보일군이란 사실은 줄곧 비밀로 되여있었다.
람평은 선후로 유계위(俞启威-일명 황경), 당납, 장민(章泯), 모택동 네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네 남자는 모두 중국공산당 당원이였다.
 
결혼후 당납과 람평의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늘 언성을 높이며 다투었다. 부부싸움을 하는 차수가 점점 늘어났는데 어느 한번은 그들 부부가 또 크게 싸웠는데 하기언과 사매의 앞에서 강청은 당납의 머리카락을 잡고 휘둘러서 당납의 머리를 벽에 부딪쳐 놓았다. 당납은 부부간의 불화로 두번이나 자살하려고 했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당납과 람평이 리혼한후 일본군은 상해를 공격했다. 람평은 제남, 서안을 거쳐 1937년 8월에 연안으로 들어가 이름을 강청이라고 고쳤다.
당납은 1937년말에 무한으로 갔다가 제2의 수도 중경으로 들어갔다. 당납이 혼자서 고독하게 사는것을 본 조단은 18세의 녀배우 진로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1938년 3월의 어느날에 조단의 소개로 처음 만난 당납과 진로는 첫눈에 정이 들어 함께 말타기도 하고 수영도 하다가 번개식결혼을 했다.
 
1938년 10월에 당납과 진로는 윁남을 거쳐 향항으로 가서 한달 남짓한 동안 놀다가 상해로 돌아왔다.
당납과 진로는 프랑스조계지의 해격로(지금의 화산로)의 강소로구에 거주했다. 당납은 장기(蒋旗)라는 필명으로 《진원원》, 《생로》 등 장막극본을 썼다. 진로는 상해에서 배우로 활약했는데 당납은 그녀에게 “홍엽(红叶)”이란 예명을 달아주었다. “홍엽”의 함의는 “람평”과 상대되는것이다.
 
1940년 5월 1일에 진로는 아들을 낳았는데 당납은 몹시 기뻐서 아들의 이름을 마균실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아명을 엄마의 예명 홍엽에 따라 홍아라고 불렀다.
진로는 당시 당납의 정치신분을 모르고있었다. 다만 당납의 행적이 늘 비밀스럽다고 느꼈을뿐이다. 어느 한번 당납은 진로를 보고 “만약 내가 체포되여 당신에게 련루되면 당납과 리혼한지 오래된다고 말하오”라고 말해서 진로를 놀라게 했다. 몇년후에야 진로는 당납이 중국공산당의 지하활동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진로와 당납의 혼인은 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당납은 중경에서 다른 한 녀배우 강건을 사랑하게 되여 그녀와 동거했지만 얼마 못가서 성격차이로 헤여졌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중경에서 상해로 돌아간 당납은 《문회보》의 부총편집으로 사업하면서 마계량이란 필명으로 글을 썼다.
당납이 진로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진로는 이미 소금장사군과 결혼하여 잘 살고있었다. 그러나 당납은 늘 아들 홍아를 보러 다녔다.
 
1947년 8월에 미국대통령특사 웨더마이어(魏德迈)가 상해에서 연 기자초대회에 참석한 당납은 그곳에서 《자유론단보》의 녀기자 진윤경을 알게 되였다. 젊고 예쁘고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하고 재주가 출중한 진윤경에게 첫눈에 반한 당납은 거의 날마다 그녀에게 격정에 넘치는 련애편지를 써보냈다.
 
진윤경은 원 프랑스주재 중국(국민당정부)공사(公使)인 진록의 셋째딸이였다. 전칭이 특명전권공사인 공사는 외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중 대사(大使) 다음의 직급에 속한다. 1949년 2월에 진윤경은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의 미국사무소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미 《문회보》의 총편집을 담당하고있던 당납은 진윤경과 함께 있기 위해 사직하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당납은 뉴욕일보에서 사업하다가 유엔의 한 중문인쇄공장에 옮겨가 사업했다.
 
당납이 미국으로 간것은 진윤경을 만나기 위한것도 있었지만 강청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 시기는 국민당이 몰락하고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있는 때였다. 그가 계속 중국에 남아있을 경우 공산당이 나라를 세우면 보복심이 강한 강청이 그를 가만놔둘리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당년에 상해에 있을 때 사람들앞에서 당납의 머리를 잡아끌어 벽에 부딪쳐놓기까지 했던 강청이 제1부인의 신분으로 어떤 보복을 할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그후 진윤경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의 총부가 있는 프랑스의 빠리로 가자 당납도 그녀를 따라 빠리로 갔다. 빠리에서 진윤경과 결혼한 당납은 천교호텔을 개업했다. 그는 강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마소장이라고 고쳤다. 진윤경도 안나라는 영문이름을 썼다. 빠리의 화교들은 마소장이 원 프랑스주재 중국공사 진록의 사위라는것만 알았지 그가 중국공산당 제1부인의 전 남편이였다는 사실은 모르고있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당납은 해외에 있었기에 강청의 마수를 피면할수 있었다. 그후 “4인방”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후에야 당납은 귀국했다. 그런데 그를 접대한것은 중공중앙조사부였다.
 
중공중앙조사부는 1955년 6월 20일에 정식으로 성립되였는데 제1임 부장은 리극농이 겸임했다. 1983년 7월 1일부터 중공중앙조사부를 주체로 하고 공안부의 반간첩부문 및 기타 해당부문이 합병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를 세웠다.
당납은 중국대륙을 떠난후 1978년에 처음 빠리에서 귀국했다. 당납은 프랑스에서 마소장이란 이름으로 살았지만 중공중앙조사부는 그를 당납이라고 불렀다. 이로보아 프랑스에서의 당납의  비밀신분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강청은 장춘교한테 부탁하여 정군리를 찾아 담화하게 했다. 장춘교는 정군리를 불러놓고 “강청동지가 연안에 간후 당신에게 써보낸 몇통의 편지와 강청동지의 두장의 사진을 바치시요”라고 말했다. 1966년 10월 9일 아침에 상해 회해로에 위치한 강무청사 3층 정군리의 집에 홍위병차림을 한 공군 4군 교도대가 뛰여들어와 일기, 서한, 친필원고, 사진 등 자료들을 가져갔다. 얼마후 정군리는 체포되여 감옥에 들어갔다. 당납과 강청의 친구였던 정군리가 강청의 지난  력사를 너무 많이 알고있었기때문이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당납은 “만약 내가 국내에 있었다면 더 처참하게 당했을겁니다”라고 말했다.
중국대륙을 떠난후 처음 귀국한 당납은 1978년 12월에 북경에서 엽검영원수의 접견을 받았다. 엽검영은 무엇때문에 프랑스화교 당납을 회견하였는가?
 
당시 중공중앙 부주석이였던 엽검영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업도 주관하고있었는데 중공중앙조사부는 그의 직속령도를 받고있었다. 당납은 사실 중공특별당원이고 프랑스에서의 중공중앙조사부 중요간부였기에 귀국하자마자 엽검영의 접견을 받았던것이다. 엽검영은 당납의 부인은 부르지 않고 당납만 지명하여 접견했다. 엽검영이 당납을 접견했을 때 당납의 정치신분은 프랑스화교가 아니였다. 만약 프랑스화교신분이였다면 당납의 부인도 함께 엽검영의 접견을 받았을것이다. 이는 그번 접견이 중공중앙조사부의 내부회견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당시의 접견은 비밀리에 진행되였다. 그때로부터 옹근 30년이 지나서 엽검영의 일생을 소개할 때에야 엽검영이 당납을 접견했던 당시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사진설명에는 당납을 프랑스화교라고 소개했다.
 
당납이 프랑스의 빠리에서 천교호텔을 경영할 때 그곳은 명류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당납은 장인의 국민당신분의 엄호를 받았고 호텔경영인이란 신분을 가지고있었기에 정보사업을 하기 가장 합당했다. 때문에 누구도 당납이 중공중앙조사부의 고급정보간부일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1985년 9월에 당납은 또 귀국했는데 그때는 국가안전부에서 그를 배치해주었다. 1983년 7월 1일부터 중공중앙조사부는 국가안전부로 개칭했다. 중공중앙조사부는 중국공상당정보기구이지만 국가안전부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정보기구이다.
그번에 당납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국가안전부에서 상해의 5성급호텔인 신금강호텔에 배치했다.
 
배우, 영화평론가, 기자, 중국공산당 특별당원, 중공중앙조사부의 중요간부, 제1부인 강청의 전 남편 등 여러가지 신분을 가졌던 당납은 1988년 8월 23일에 페암으로 빠리에서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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