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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된다(1)
로류(老劉)는 거의 매일이다싶히 내가 조련장(早練場)에서 만나군하는 한족친군데 그가 어느날 나보고 “김선생, 사람이 무지하면 어떻게 되는겁니까?“ 하고 묻길래 내가 “거야 말할거있습니까, 무지하면 야만이 되지요.”라고 대답했더니 로류는 “옳아, 바로그렇지!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면서 자기가 문혁시절(文革時節)을 보낸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에서 발생했던 “흑오류멸족사건(黑五類滅族事件)”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였다.
문혁(文革)이 시작되자 많이 생겨난 이러저런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비극중에서도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에서 발생한 이른바 “흑오류멸족사건(黑五類滅族事件)”은 하마터면 전국범위로 확산될번한, 현대력사에서 첫손을 꼽아야 할 미개하고도 잔인(殘忍)하고 포악(暴惡)한 “중국식생명청산”이였다고 하겠다. 그같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비극이 발생기게 된 것은 그당시 라서경을 내리떨구고 공안부 부장자리에 올라앉은 사부치(謝富治)의 한차례 인간성을 잃은 무책임한 강화로부터 시작된 것이였다.
“흑오류(黑五類)”란 해방초기에 획분한 계급성분ㅡ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뿐분자에다 우파분자를 더한것인데 문혁(文革)이 시작되자 어떤데서는 거기에다 지어는 그들의 자녀까지 포함시키켜 “무산계급전정대상”으로 한데몰았던 것이다. 그에 대치해서 생겨난것이 “홍오류(紅五類)”라는것이였으니 그것인즉은 공인, 빈농, 중농, 하중농, 혁명간부에다 그의 자녀들이였다.
1966년 8월, 사부치(謝富治)는 북경공안국에서 개최한 한차례 회의석상에서 말하기를 “지난때 규정한것들, 국가의 것이나 공안기관의 것이나 거기에 구속받을 필요없다. 나는 군중이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을 찬성하지 않지만 그들이 나쁜사람에 대해서는 뼈에 사무치도록미워하하고 증오하니 그러지 말라고 억지로 막을수도없는 것이다. 인민경찰은 홍위병켠에 서서 그들과 련계하고 감정을 같이하면서 그들에게 흑오류(黑五類)의 정황을 알려줘야한다” 라고 했다.
사부치의 이 말이 홍위병은 사람을 맘대로죽여도 죄가없다는 선동으로되였다. 하여 법을 무시하고 인권을 짓밟으면서 다른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무서운 참안이 생기게되였던 것이다.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의 공안계통에서는 사부치의 그 강화내용을 전달받자 신속히 부분적 파출소에다 자기의 관할내에있는 홍위병들게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뿐분자, 우파분자”의 불법행위를 알리여 그들의 증오심을 격발시키라했던 것이다. 한데 흑오류(黑五類)의 불법행위라는것이 기실은 다가 꾸며내거나 아니면 형편없이 과장된것들이였다. 그런것을 철없는 홍위병들은 아무런 분석도 없이 그대로 믿고 과감히 손을 펴 잔인한 대학살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길지는 않았다. 1966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사이였으니 짧디짧은 5일간이였다. 그사이 북경시 대흥현(大興縣)에서는 “오류분자(五類分子)”는 물론 그의 식솔까지 포함해서 22호나 멸족을 당했는데 생명을 잃은 326명중 나이가 많은것이 80살 고령의 늙은이고 제일적은것이 이제 세상에 태여난지 38일밖에 안되는 유아였다.
“마침 정의감이 있는 북경시위서기 마력(馬力)이 그 일을 알고 급급히 달려가 제지시켰을망정이지 그러지를 않았더면 그놈의 무지하고도 야만스러운 학살이 얼마 더 지속되였을지 모를일입니다.”
로류(老劉)가 하는 말이였다.
듣기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참안(慘案), 아무렴 어쩌면 인민의 신성한 복지ㅡ 사회주의국가라고 입이 째지도록 자랑고 선전을 해온 중국에서, 그도 자애로운 분, “억만인민맘속의 붉디붉은 은태양”이 계시는 “인민의 수도”곁에서 그같이 끔찍스런일이 다 생긴단말인가!?.....귀신이 들어도 놀라 피똥싸고 통곡할 일이였다!
그같은 학살이 다만 북경시 대흥현(大興縣)현에서만 생긴게 아니였다. 호남(湖南)의 령릉(零陵)지구에서는 우파를 빼놓은 “흑사류분자(黑四类分子)”에 대한 학살이 1966년 8월부터 12월까지 4개월나 지속된건데 통계를 보면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9,093명중 홍위병들손에 학살된것이 7,696명이고 자살한것이 1,397명이며 매를 맞아 불구로 된자가 2,146명에 이르었다.
로류(老劉)가 오늘은 신문을 한장들고와서 주길래 받아보니 올해의 정월 26일자 <<양성만보>>였다. 거기 한면에 실린 글의 표제인즉은 <<문혁시기광주도성사건(文革時期廣州屠城事件)>>이라는 것이였다. 도성(屠城)이란 도살도시란 말이다.
문혁(文革)때 광주(廣州)에서 그같이 도살한 대상은 우파분자를 제외한 “사류분자(四類分子)”였다. 따져보면 이미 흘러보낸 세월이 오라니 “사사류분자”라 하면 그 본인은 황천으로 간것이 적지 않을거고 대개는 그 가족이거나 걸레붙이였을것이다. 한데도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멸족을 시키는건가?.....
1967년 8월 광주시에서 발생한 <<4류분자(四類分子)>> 멸종참안은 그 본인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순 “로개범타도고조(打倒勞改犯高潮)”에 연유하건만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책임자가 나서지 않거니와 아예 밝히려는 사람도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이제는 력사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미결원안(未決怨案)”으로 될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신문에 난 글을 보면 이제야 비로서 내막이 공개되고있는 그 사건은 발생자체가 본래 있지도 않은 요언에 연유되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해여름의 어느날 근본 있지도않은 “월북로개범(粤北勞改犯)”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광주시내에 쫙 퍼졌다. 그통에 놀랜 시민들은 혼란스러운 공포속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1967년, 그해의 여름을 놓고보면 가뜩이나 전국적으로 패거리싸움ㅡ 우도우풍(武鬪風)이 휩쓸면서 총, 포성이 울리는 속에 열혈이 끓는 홍위병젊은이들이 쓰러져 생명을 잃는 판이였다. 이런때에 그곳의 <<홍위병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소식이 실리였던 것이다.
“.....근래 요사한 구름이 뒤덮은 속에 광주는 공포를 자아내는 내전기분에 휩쌓였는데..... 전정기관은 맥을 잃고 공안계통은 마비되였다! 도적과 건달이 기회를 만났다고 날치니 상점들은 오후 3시되면 문을 걷어닫고 거리는 어두워지면 행인의 발길이 끊긴다.... 수륙교통이 중단되는바람에 운수공급에 영향이 엄중해 온 시내가 긴장한 분위기다.”
형세를 알림으로써 방범(防犯)의식을 증강시키려했지만 이런 보도가 시민들에게 불안을 더해줄뿐이였다.
<<광주지방지(廣州地方志)>>에 기재된것을 보면 그해 8월 10일, 시수용유송참(市收容遺送站)에서 가두었던 84명을 돌려보내느라 풀어놓은 것이다. 한데 그 일이 한심하게도 이와전와(以訛傳訛)되여 “로개범(勞改犯)이 폭동(暴動)을 일으켰다”로 번져버렸다.
“로개범은 마땅히 때려죽여야한다!”
군중들의 사유는 그같이 험한 지경에 이르었건만 나서서 그것을 시정해주는 사람도 막는 사람도 없었다.
가뜩이나 이때는 천안문성루에 오른 “붉은태양”의 접견을 받고 돌아온 홍위병들이 담과 배짱이 바람을 뿔궈넣은 공기뽈같이 커질대로 커져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느니 “자산계급반동권위를 타도하자”느니 “자산계급보황파를 타도하자”느니 하면서 말끝마다 타도를 웨쳐대면서 “혁명은 죄가없다”, “반란에 도리가있다”면서 안하무인격으로 광기를 부리는때라 그들의 가택수색과 폭거는 도적이나 강도행위와 조금치도 다를바가 없었다. 하여 광주의 시민들은 자체보호책으로 생각해낸것이 가두 “련방대”를 조직해서 대처하기에 이른건데 “월북로개범(粤北勞改犯)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나도니 그들은 “로개범은 때려죽여야한다!” , “우선 뚜드려패놓고보자!” 웨치면서 조금치라도 의심나는 사람이라면 마구 붙잡아 심문하고 족치였던 것이다..... 그래서죽으면 위엄과 본때를 보여주느라 행길가의 나무나 전선대에다 달아매놓았던 것이다. 그 시체가 부지기수라 지금까지도 그 수자를 똑똑히 밝혀내지 못하고있다. 죽은건 거의가 제 광주사람이였다.
"10. 11일 광주가두에는 매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다. 장제로(長堤路), 연강로(沿江路)는 거의 가로수마다 죽은 사람을 달아놓았는데 이틀간 내린 비에 시체들이 불어나서 보기만해도 끔찍했다."
(<<湯生龍日記>>)
온 광주시내가 그런 판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심한 곳은 문화가 없는 하층시민인 운반공 구리로(咕哩佬), 삼륜차부(三輪車夫), 청소부와 변소치기에 허드레장사꾼 룸뻰이 모여사는 덕정로(德政路)일대였다.
누군가는 1995년부터 이 안건을 조사해왔다.
“내형(湯永耀)은 ‘문혁’전에 광주7중을 졸업(1962년)했어요. 초중때나 고중때나 학습성적은 좋았어요, 특히 당시와 송시읊기를 즐겼지요. 한데 가정성분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한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다보니 그만 정신이 정상이 되지 못한건데 그날저녁(아마 8월 11일겁니다)에 밤먹고 나간것이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 온집안이 초조불안해나서 찾은건데 이틑날아침때야 아버지가 동산구 1로차총참가에 있는 전선대에다 매달아놓은 시체를 찾아냈던겁니다. 나도 어머니도 그 소리에 그만 통곡했어요, 세상에 어쩌면.... 시체를 민정에서 처리했는데 골회도 남기지 않았고.... 그후 파출소사람이 와서 돈 백얼마를 뿌려주고말더군요.”
어느 한 사람이 한 말인데 그야말로 피눈물이 고인 공소였다.
왜 이런일이 생길가?
원인은 다른게 아니다.
사람은 무지하면 야만이 되는 것다!
(사부치(谢富治)의 선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그같은 “멸족학살”은 중국의 현대사상 보기드믄 원안(寃案)으로 되였다. “恶有恶报”라 천만다행인건 사부치(谢富治)가 암에 걸려 일찍죽었기에 그같이 한심한 “집단학살”이 더 지속되지 않은것이다. 사부치는 1972년 3월 26일에 죽었었다. “사인방(四人帮)”이 꺼꾸러지자 당중앙은 사인방(四人幇)과 동아리가 되어 공,검,법(公,檢,法)을 부시고 저지른 그의 각가지 죄악에 근거하여 당적을 취소햇거니와 림표,강청반혁명집단의 주범으로 판결해버렸다.)
사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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