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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920년 10월 18일.
가을날씨는 음침하고 스산했다. 청산리골어구를 향해 행진하고있던 북로군정서는 오후 4시경에 저쪽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서 장사진을 이룬 대렬이 구불구불 움직이고있는것을 발견했다. 적군이였다.
여러병종으로 편제된 이 부대는 아쯔마 마사히꼬 륙군소장의 수하 야스가와소좌가 이끌고있는데 그들도 독립군을 발견한것이다.
두 대오사이의 거리는 약 10여리. 북로군정서는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려고 급보로 전진했다.
김좌진은 전위대를 이끌고있는 련성대장 리범석더러 빨리 송림평(松林坪) 북방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적이 만약 불의습격을 한다면 그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적을 타격한다음 인차 급행군하여 청산리어구로 오라했다.
대오는 해질녘에 송림평마을에 이르었다.
김좌진총사령은 충신장부근에 가서 적정을 감시하던 정찰병의 보고를 받았다.
<<적들은 보병, 기병, 포병, 공병으로 구성된 혼합부대임. 병력은 약 한 개려단. 아군의 정황을 몰라서 진군을 멈추고 충신장에 주둔중임. 적의 전위부대는 충신장남쪽 칠리지점인 맹가장부근에 머물고 경계선을 포치하였음.>>
<<음ㅡ 됐어!>>
김좌진은 적이 추격을 멈춘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곧 회의를 열어 작전계획을 세웠다. 송림평고지앞의 개활지에 오는 적을 타격할수는 있지만 자칫하면 우세한 적의 포위에 들수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지 말아야한다. 싸움에 승산이 있자면 반드시 깊은 골안으로 적을 유인한 후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그를 타격해야하는 것이다.
김좌진은 친히 자기의 검정말을 잡아타고 진위대가 머물고있는 송림평마을로 달려갔다. 송림평마을 어른들은 이때 독립군을 위로한다면서 소 한 마리를 잡아서 한창 고기를 끓이고있는 판이였다.
마을에 다달은 김좌진은 즉각 군사들을 집합시켜놓고 명령했다.
<<룡정을 떠난 왜군이 우리를 소탕하려고 바싹 뒤따라오고있다. 전원은 당장 이곳을 떠날것!>>
마을사람들은 끓고있는 소고기도 대접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자제병들을 떠나보내는것이 안타까와 말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싸우면 안됩니까?>>
<<잠간만 더 기다려 익은 소고기나 자시구 가시우다.>>
김좌진은 그네들의 지성어린 성의에 감사함을 거듭 표시하고나서 사세가 너무나 급해서 막부득이 일각의 유예도 없이 자리를 떠야한다는 것, 여기서 싸운다면 무고한 백성이 화를 입게 된다는것을 알려주었다.
이때가 밤2시였다. 그는 주민들까지 모두 데리고 떠나면서 송림평마을에는 늙은 로인만 몇분 남기였다. 그러면서 그네들보고 일본군이 마을에 오면 독립군은 무장장비가 형편없고 사기도 없어서 군대같지도않다고 말하라 시키였다.
한편 좌진은 또 이곳 지형에 익숙한 사냥군 몇에게 이도구와 무산으로 통하는 큰길을 정찰케했다.
10월 20일, 부대가 청산리골안에서 행군을 계속하고있는데 새벽 3시경에 후위에서 적 기병정찰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사냥군정찰병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도구의 적들은 봉밀구로 후퇴하고있으며 무산으로해서 두만강을 건너온 적 한 개 부대는 바로 개가장쪽으로 전진해오고있는데 지금 적들은 삼면으로 청산리를 포위하여 독립군을 섬멸할 작정이라는것이였다.
좌진은 계획대로 보병의 3분의 2와 가족들을 포함한 비전투인원으로 편성된 제1대는 사령부를 따라서 전투장에서 멀리 떠나게 하고 사관졸업생을 전투원으로 한 제2대는 전투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송림평에서 늙은이들로부터 독립군의 형편을 들은 일본군은 자신만만히 청산리골로 깊숙이 따라들어오고있었다.
청산리는 함북도 무산북쪽에 자리잡은 삼도구(충신장. 지금의 화룡진)로부터 시작되는 장장 60리의 장곡으로서 그안에는 대진창, 송평리, 청산리(평양촌), 싸리밭골 등 몇 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띠염띠염 자리잡고있었다.
삼도구에서 서남방향으로 20여키로메터 되는 곳에 청산리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서 10여키로메터 더 들어가면 백운평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이곳은 해란강의 상류지역이다. 그래서 골짜기로 올라갈수록 수량도 적어져 어떤데는 너비가 불과 2메터좌우밖에 안되는 개천이여서 능히 건너뛸수 있었다.
이 백운평마을에서 개울을 따라 약 2키로메터가량 더 올라가면 베개봉(증봉산)이 있는데 그 산의 동쪽밑에 직소(直沼)라 불리우는 자그마한 공지가 있다. 복멸전을 벌리기에는 이 이상 좋은 곳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좌진은 이곳에서 적을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골짜기 좌우 량켠은 톺아오르기 힘든 산이고 골짜기가 어찌나 좁은지 불과 20∼30메터 되나마나하고 넓은곳이라야 40∼50메터밖에 안되므로 여기로 들어온 적군이 일단 습격만 받으면 전투대형같은것은 펼칠수도없는 곳이였다.
만원경을 손에 쥔 좌진은 말우에서 신심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 얼마나 리상적인 지형인가!
청산리북쪽에 위치한 이도구방면의 밀림지대는 북간도의 조선인 이주지역의 요지인 룡정에서 두도구와 이도구를 거쳐 백리지점에 위치한 어랑촌을 위시해서 갑산촌, 천수평, 봉밀구 등의 여러촌락이 점재한 장곡의 심산지대였다.
청산리와 이도구의 밀림지대는 서남쪽으로 안도현의 험준한 지대를 지나 백두산을, 북쪽으로는 천보산을 각각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또한 서쪽으로는 장백산에 둘러싸여있기에 오직 한면만 열려있는 동남쪽의 두도구와 룡정방면의 방어만 잘하면 족한 요새였다.
좌진은 발아래에 펼쳐진 좁은 골짜기와 마즌켠산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추격하는 적들은 기필코 이 참대통같은데를 지날것이다.
좌진은 자기와 나란히 서있는 리범석을 보면서 말했다.
<<여보게 리군! 전투는 벌서 우리들의 승리일세. 아직도 이 만주의 지형에는 깜깜인 놈들은 여기 이 밀림과 수풀속에 독립군이 숨어서 총끝을 제 이마빼기에 겨누는걸 어찌 알기나하겠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놈들을 일망타진해 본때를 보입시다.>>
리범석역시 자신만만해하였다.
좌진은 이제 20살밖에 안되는 이 전도유망한 어린 장군의 예지로 빛나는 눈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리범석은 1900년에 태여난 서울청년이다. 그는 1915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운남륙군강무학교 기병과를 졸업하고 곧추 만주로 달려왔던것이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민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놈들을.
삼천리 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그는 어느결에 이번의 청산리전투를 맞으면서 <<기전사가(祈戰死歌)>>를 지어 전사들이 부르게 하였다. 전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목숨바쳐 싸워 성결한 전사로 되리라 결심했다.
이번 전투는 선두부대만 참가했다.
작전포치가 곧 있었다. 리범석은 리민화 소속중대와 한건원 소속중대를 거느리고 우익의 동산을, 김좌진은 김훈 소속중대와 다른 한 중대를 거느리고 정면과 서쪽산을 맡았다.
600여명의 독립군전사들은 명령이 내리자 10여메터씩 간격을 두고 삽시에 세쪽 산의 요소에 빙 둘러 매복했다. 기관총과 박격포들도 자리를 잡았다.
밤이 되었다. 여름도아닌 늦가을의 밤기온은 너무도 차거웠다. 쥐죽은 듯 고요한 산간에 이따금 산짐승의 울음소리 처량한데 싸늘한 한기는 전사들이 입고있는 얇은 여름옷을 사정없이 꿰뚫고 들어와 뼈속까지 스며들었다. 이럴때 전사들은 모닥불을 얼마나 그리워했으랴. 하건만 담뱃불하나도 있어서는 안될 적막속에 오직 때가 돌아오기만 기다려야 할 뿐 자리를 비워도 안되였다.
시간은 각일각 흘렀다. 사냥개같이 약은 왜적은 언제나 나타나려는지 쪼각달마저 사라진 골짜기는 아른아른 보일 정도였다.
이때 김좌진장군은 나어린 강위곁에 있었다.
<<아,추워라.>>
강위가 혼자소리로 내지르는 말을 듣고 장군은 가랑잎을 모아 덮어주었다.
<<총사령님, 인제는 따뜻해요.>>
강위는 가만히 있더니 몸이 가랑잎에 묻히자 어린애같이 기뻐했다. 그리곤 이윽해서 입을 다시열어 물었다.
<<총사령님, 오늘이 중구날이지요?>>
<<그렇지.>>
<<중구날이면 우리 고향 남도는 따뜻하겠네요. 거겐 제 누이동생이 있어요.>>
<<이름이 뭔데?>>
<<계순이라해요. 아직은 어린애죠. 전 걔를 숙부집에 맡겨놓고왔는데... 우리 집 식구는 이젠 나하구 그애뿐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돌아가셔서....>>
이 애처럼 부모잃고 참군한 젊은이가 적잖았다. 언제면 독립연에 한자리에 모여놓고 좋은 명절음식 먹여줄가. 장군은 생각이 짙어졌다.
강위는 이윽고 잠이 들었는지 코고는 소리났다.
장군은 허리펴고 일어서서 사방을 보았다. 먼동이 트고있는 대지는 희끗희끗했다.
바로 이때였다. 전초에 나가있던 척후병이 그의 앞으로 달려와 헐떡거리면서 보고했다.
<<총사령관님, 보고합니다. 네시 사십분 현재, 전선 약 오마장의 지점에 왜적 약 2,000명이 나타났습니다. 그자들은 지금 이쪽을 향하여 행진중! 대렬의 길이는 약 한키로 반쯤 되며, 선두에는 기병이 섯습니다.>>
<<뭣? 리대장에게는 알렸는가?>>
<<넷! 오는길에 보고했습니다.>>
<<음. 알았다.>>
척후병이 경례하고 물러가기도전에 장군은 왼편에 있는 제일높은 닭볏바위에 올라가 휘뿌연 새벽빛속에 잠긴 백운평쪽을 바라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거기로부터 꿈틀거리면서 이 산협을 향해 박근하고있는 길다란 적군대렬이 눈에 띄였다.
장군은 바위에서 뛰여내리면서 웨치였다.
<<주의!>>
독립군들은 일제히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총을 거머쥐였다.
한편 가까이로 온 적의 척후병은 가끔 허리굽히여 말똥의 온도를 재보면서 종적을 감춰버린 독립군의 행방을 탐지하였다.
적전위의 지휘자가 나타났다. 중성 한알을 박은 야스가와소좌였다. 종개수염을 기른 그는 노루가죽장갑을 낀 오른손에 망원경을 쥐였고 왼손으로는 군도자루를 잡고 있었다. 적토마를 탄 그는 가슴을 오만스레 내밀기는했어도 어떤 예감이 들었는지 조심스레 전진했다. 적들이 입은 군복은 독립군이 입은것과 거의비슷한 밤색이였다. 그래서 야스가와가 이끄는 이 전위부대는 흡사 한 마리의 거대한 독사같아 보이였다.
1분, 2분, 3분, 4분....
적군의 길다란 행렬은 마침내 독립군이 매복하고있는 ㄷ자모양의 매복권내에 완전히 들어오고야말았다.
<<땅!>>
리범석대장이 쏜 신호총소리가 울리자 사격개시를 알리는 나팔소리 새벽고요를 깨뜨렸다.
원쑤를 잔뜩 노리고있던 소총, 기관총, 박격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 요란한 작렬소리는 심곡을 메우면서 일대 수라장을 만들어놓았다.
야스가와소좌는 첫방에 고꾸라져버렸다. 지휘자를 잃은 적대렬은 단통 혼란에 빠지였다. 공포에 광란하는 말들의 울부짖음소리와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뒤엉키여 아비규환의 지옥같이 떨고있는 골짜기로 복수의 명중탄이 우박같이 쏟아졌다. 이리하여 불과 반시간이 되나마나하는 사이 멋모르고 기여들었던 적의 제73련대의 선발대 200명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몽땅 전멸되고말았다.
독립군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뛰여나가 전리품을 수습해가지고 제자리에 돌아왔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시간이 채 안되여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다가왔다. 허나 적은 전위부대가 몰살된 꼴을 보고는 분별없이 막 뛰여들지 않았다.
적들은 병력우세를 믿고 매개 중대를 밀집종대로 무어 계단식돌격을 하면서 기관총과 박격포로 맹사격을 해댔다.
전투가 한창 치렬하게 벌어지고있을 때 총지휘로부터 세가지 명령이 전해왔다.
(1) 봉오구로부터 우회하던 적이 약 한시간후에 백운평에 도착하게 된다. 본군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성이 있으니 즉시 이도구방면으로 철거할 것.
(2) 제2대는 여전히 원진지에서 저항하되 제1대가 포위선을 벗어난 다음 기회를 보아 철거할 것.
(3) 제2대는 래일새벽 2시전까지 이곳에서 160리 떨어진 갑산촌에 반드시 도착할 것.
이때가 바로 정오경이였는데 섬멸전으로부터 방어전으로 넘어간 제2대는 기를 쓰고 달려드는 적과 점점 힘겹게 싸우고있었다. 그러다가 이윽해서 마침내 제1대가 이미 청산리를 벗어났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그래서 제2대도 한근원의 한 개 중대만 남아 계속 엄호하도록하고 그 외는 모두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들은 이런줄을 모르고 계속 부대를 동원해 남북 량측으로부터 백운평을 향해 진공해왔다.
어느덧 늦가을의 짧은해가 얼굴을 감춰버렸다. 그러자 수목이 우거진 골안은 어둠이 잠기기 시작했다. 엄호를 책임졌던 한근원의 중대는 남과 북 량측의 적이 서로 접전할수있는 거리까지 진격해오자 저희들끼리 맛불질하도록 불을 달아놓고 감쪽같이 철거해버렸다. 청산리골안에서는 총소리, 포소리에 진감했다. 적아도 가리지 못한 일본군은 저희들끼리 결사적으로 싸워댔다. 그래서 또한 사상자가 많이 생겨났으니 이날이 바로 10월 21일이였다.
<<승리만세!>>
<<승리만세!>>
첫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북로군정서독립군은 이어서 26일까지 6일간에 와룡구어랑천전투와 천수평, 밀봉구, 고동하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에서 홍범도의 련합부대와 함께 승전의 만세소리를 거듭올리였다.
한편 련속 참패만 거듭한 일본군은 전사자의 시체마저 미처 처리못해 목만 잘라가는 형편이였으니 그 참상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랴.
상해림시정부는 <<독립신문>> 제91호, 1921년 1월 21일지에는 <<김좌진부하 600여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여명은 대소전투 10여회에 왜병을 격살한자 1,200명중 적이 자상한자 400명>>이라고 청산리대첩을 기술했다.
<<독립신문>>은 이어서 1921년 2월 25일자에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상해림시정부에 보낸 일본침략군의 참패와 독립군부대의 승전원인을 분석한 글을 실었다.
적의 실패리유
(1), 병가에서 제일꺼리는것은 적을 경시하는 것인데 심산협곡을 별로 수색도 없이, 경계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陷沒)을 당함이며
(2), 국지전(局地戰)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중에서 종종 자상(自傷)충돌을 당함이며
(3), 그들 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逃生)하는 비겁심이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법(射法)이 부정(不精)하여 1발의 효과가 없는 란사(亂射)를 행할뿐이다.
아군의 전승(全勝)리유
(1), 생명을 불구하고 분용(憤湧)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를 압도함이요.
(2), 량호한 진지를 선점(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을 극도 발휘함이요.
(3). 응기수변(應機隨變)의 전술과 예민(銳敏),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意表0에 출함이다.
전반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은 련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전사자와 부상자가 무려 3,300여명인데 비하여 독립군측은 전사다 60명과 부상자 90여명에 달하였다.
이번의 청산리회전에서 나어린전사 강위도 희생되였다. 독립군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귀한 청춘과 생명을 바친 렬사들을 추모하여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청산리회전소식은 재빨리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에까지 퍼졌다. 일본신문들에서까지도 커다란 편폭으로 청산리회전에 대한 보도를 실었다. 일본군사당국도 참패를 승인하면서 훗날 청산리골에다 <<招魂碑>>를 세웠다.
그 <<초혼비>>에 새겨진 글은 이러했다.
<<대정 9년 10월 일본군이 조선인부랑배를 토벌하였던 전역에서 전몰한 영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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