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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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26)
2014년 03월 28일 17시 53분  조회:2484  추천:1  작성자: 김송죽
 

26. 

1929년 2월초순의 어느날.

이날은 밝은 해빛아래 백설덮힌 산야가 유난히 눈부시게 아름답고 숭엄해보였다. 아직은 겨울철이건만 바람한점 불지 않고 그리 매짜지도않은 날씨였다.

김좌진이 문밖을 나서니 어디선가 노래소리 청량하게 들려오고있었다.

 

백두산아 넓고넓은 만주뜨락은

구국영웅 우리들의 운동장일세

걸음걸음 떼를 지어 앞만 향하여

활발발 나아감이 엄숙하도다

 

한양성에 자유종이 떵떵 울리고

삼천리에 독립기를 펄펄 날리세

자유의 새정부를 건설하고서

무궁화 동산에서 만세부르세.

 

김좌진은 그 노래소리에 맞추어 속으로 흥얼거리면서 곧추 북으로 가 정거장에서 철길을 건너 방향을 동쪽으로 꺾었다. 호위병 한명만 데리고 나섰다. 칠가툰 중국사람 손씨가 9살난아들 손진청(孫鎭靑)을 보내여 그를 청한거다.

중국사람 손씨는 김좌진이 3년전에 땅을 구하느라 이곳에 왔을적에 맨처음으로 사귄 그 마을의 농민인데 그때 빨랑거리는 진청이가 하도 귀하여 김장군은 그 애를 양아들로 삼았다. 이 일로해서 손씨는 그후부터 이 명성있는 독립군장군을 더 친절스레 대해주면서 진정으로 무척 좋아했다.

이날은 설돼지를 잡아놓고 청한것이다.

철길을 건너 동으로 얼마 가면 산기슭에 절간이 외롭게 하나있다. 그 절간에는 화상이 몇이 안되는데 수도하여 득도하는 그네들이 목탁동냥을 다니여서 김좌진이도 그네들을 면목알고있었다. 부처님같이 마음어진 그네들을 볼때면, 그리고 또 이 절당앞을 지날때면 김좌진은 어릴때 삼불산에 전춘놀이를 갔다가 자기가 칠성각의 라한님을 훔쳐내다가 마슨일을 생각하군했다. 라한님을 다시만들어 놓았는지? 하나 좋게 만들어주면 속죄도 되련만 고국떠나 이국 풍설속에 흘러보낸 세월이 어언 12년! 그사이 고향땅 한번 밟아볼수도 없었다. 아아, 언제면 광복이 되겠는지!

호위병 강익선은 칠가툰에 오기만하면 동포인 리동호댁에 들리거나 아니면 곧추 산동에서 온 중국사람 리씨집을 찾아가 자기가 피나무껍질띠를 만들어 안아와 살려낸 계집아이의 형편을 알아보는걸 잊지 않았다.

김좌진은 음력설이 돌아오니 걔가 이젠 컷겠구나 하면서도 딸의 생일만은 기억에 아리숭했다. 되도록 그 불행했던 날을 기억해두지 말자고하니 그러했다. 그리고 한번 시원히 가서 자기 눈으로 자기 딸을 보고싶기도했지만 이미 남한테 준 자식이라 대방이 달리 생각할가봐 단념했다. 운명이 하도나 기구한 딸인데 부디 가탈없이 잘크거라. 크면 자주 볼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본래 대식가인 김좌진은 손씨네집에서 대접을 잘 받았다. 손씨네는 늘 바삐도는 이 장군을 오래 만류하지는 않았다.

산시로 돌아오고있던 김좌진은 절간앞을 지나다가 뜻밖의 일에 봉착했다. 일면파에 있는 중국녀인 곡씨가 거기에서 나왔던 것이다.

<<전 여기서 기다리고있었어요.>>

곡씨녀인의 목소리는 애수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흰 양털머리수건을 머리에 두르고있는 그 미모의 곡씨녀인의 얼굴은 눈에 띄일지경 축갔다.

곡씨녀인은 그간 의연히 김장군에게 미련을 두고있었다. 그런데 산시 장군의 거처에는 벌써 다른 녀인이 안주인으로 들어앉아있었다.

<<전 한발 늦었어요!>>

이렇게 탄식하면서 곡씨녀인은 눈물을 쏟았고 그러다가 전에 자기가 오면 김장군을 만나지 못하게 수작을 꾸미던 로인들을 원망했다.

자곡지심이 철석같은 사나이의 가슴을 허물었다. 김좌진은 그녀의 애정이 이토록 진심스럽고 절절할줄은 몰랐다....

3월이 돌아왔다. 김종진은 길림에 간지 두달만에 무정부주의자 둘을 만나 데리고 북만으로 돌아왔다. 서로 련락하고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장차 함께 지낼 사람들이요, 북만이 첫걸음이라는 초면의 그네들을 만나고저 김좌진은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 주인의 례모를 차려 해림으로 갔다.

그네들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보러 온 무정부주의자들이 벌써 적지 않았다.

백야 김좌진장군은 거기서 인사를 나누었다. 방금도착한 이들로는 리을규(李乙奎)와 류화영(柳和榮)이였다. 백야는 재종제의 지기인 그네들을 반기여 뜨겁게 악수해주면서 먼길에 로고가 많았겠다고 인사의 말을 하고는 해림소학교에다 보기드믄 잔치까지 차리여 환영을 표시했다.

화기로운 분위기속에서 모두들 장래를 위하여 술한잔 나눈것도 물론이거니와 그날부터 여러날을 품놓고 독립운동전반을 놓고 기본문제와 난제에 대해 토론을 진지하게 벌리였다.

이는 백야가 의식적으로 조직한 것이였는데 그는 차츰 토론의 중점을 김종진이 이전에 작성해 바쳤던 그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계획안>>으로 옮겨놓았다. 물론 김종진은 만주전반의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진영의 구체적인상황을 아직 투철히 모르거니와 또 알수도 없는 정황하에서 자기의 리념으로 작성한 <<계획안>>이여서 현실을 리탈하는 부족점들이 있는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참신하며 대담한 구성이여서 찬동을 받았다.

그런데 <<적대분자>>를 대처해야한다는 문제를 무정부측에서 내놓음으로써 갑론을박으로 시비가 생겨 결론을 보기가 어려웠다. 방금 온 무정부주의자 류화영이 사상은 오로지 사상으로야 막을수 있으니 공산주의를 반대하려면 그보다 한걸음앞선 무정부주의로야 된다는 주장이였다. 백야장군은 그의 이러한 주장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두사람사이에는 격론이 벌어지기까지했다.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었건만 아직도 그냥 제가끔 주의를 내세우면서 맛서기만해서야 되겠는가? 주의는 주의로 대항할수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으나 그래서야 안되지. 주의가 궁극의 목적이야 아니지. 누구나 다 항일을 하여 하루속히 광복을 맞아오자는 것이 지상의 념원인 이상에야 모든 것은 그 목적을 이루는데 바쳐져야 한다고 보네. 보게나, 지금은 전체운동자들의 합심을 절박히 요하는 때가 아닌가. 이러한 처지에서 오로지 안정과 단결에 알맞고 리로운 리론을 내세워야지 그냥 주의다툼을 필요할건 뭔가?>>

이랬어도 대방은 설득되지 않아서 계속 변론해보려했다. 류화영은 공산당에 대해 지나친 편견을 갖고있었거니와 너무나 극단적으로 증오하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고있었다.

김종진과 리을규가 끼여들어 량자를 화해시키려 했다.

김좌진은 론쟁을 그만두었다. 이런문제는 일반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자못커서 자칫하면 운동자들 자체내부에 파탄을 야기시킬수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심각히 디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이 문제는 영구과제로 보류한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안되여 류화영은 길림으로 되돌아가고말았다. 아마 자기의 주장을 세우지 못하고 보니 재미가 적었던 모양이다.

<<소견머리 짧은 사람이였군!>>

김좌진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김좌진 역시 공산당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있는 사람은 아니였다. 특히 <<자유시사변>>을 겪고나서 그 역시 공산당을 혐오하면서 증오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그로써 공산주의자 전반에 대한 부정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너무나 일면적이며 착오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바가 있었던것이다. 공산주의자들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고있는게 아닌가. 이 한점만으로도 공동한 목적과 지향이 있음은 충분히 긍정되는 것이였다. 하여 그는 되도록 호상간의 모순을 제거하면서 관용하고 포섭하는것이 유익한 방도라고 여기게 되었고 그러는 기초상에서 단합하여 공동히 대적하자고 주장해온 것이다.

김좌진과 그의 혁명동지들이 애써 세운 혁신의회는 김동삼 등 주요간부들이 체포, 구금되였음으로하여 집행해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길림에서 3부통합회의가 결렬된 후 정의부를 비롯하여 신민부의 민정파측과 참의부의 심룡준 등의 협의회측 역시 통일된 자치정부의 구성과 유일당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3월에는 다시 길림성내에서 정의부대표인 리동림, 현익철, 고이허, 고할신, 최동욱, 리택. 참의부 대표인 심룡준, 림병무, 류광흘. 신민부대표인 리교원 등이 회합하여 제2차 3부통합회의를 개최하였다. 비록 촉성회측의 전반적인 참석은 없었으나 3부통합은 만주지역 민족운동의 절대 명제였던터이므로 거듭된 토론 끝에 4월 1일 새로 통합된 군정부로 국민부(國民府)를 건립하였다. 이 국민부는 책진회에 대항하면서 3부를 계승하여 만주의 독립운동과 자치행정을 담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쪽 혁신회는 군정부를 1년내에 조직하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5월에 그만 해체되고말았으며 대당촉성(大黨促成)을 위해 결성되였던 민족유일당재만촉진회 역시 따라서 해체되고말았다. 이것은 혁신의회와 대립하고있던 전민족유일당협의회측에서 3월에 국민부를 조직한데서 영향을 받았기때문이기도 했다.


5월에 이르러 만주는 한차례전란에 잠기게되였다. <<중도로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쏘련과 중국이 중동로문제를 놓고 벌어진 한차례의 무장충돌이였다. 그런데 일본은 무슨 태도였는가?

이에 썩 앞서서 중화민국 원년7월, 일본군벌 가쯔라 다로는 로씨야를 방문하고 거기서 <<장춘이남 만주와 내몽골(동몽고)는은 일본의 소유로 하고 장춘이북의 북만과 기타 몽골지역은 로씨야의 소유로 한다>>는 소위 제2차 일로밀약을 맺은바있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빼앗기 위한 일제와 로씨야간의 이같은 결탁과 분할과 암투는 줄곧 멈추지 않고 계속되였다.

특히 일제의 바다같이 깊은 탐욕은 도저히 메울수 없었다. 침략적인 대륙정책(大陸政策)을 실현코저 그자들은 천방백계를 다하여 마수를 먼저 북만주에다 뻗히였다.

1918년 7월에 할빈의 일본령사관에서는 로권(路權), 경권(警權), 량권(糧權), 실업권(實業權), 화페권(貨幣權) 5개항의 중요한 요구를 로씨야령사관에 제출한바있다.

일본의 침략활동은 바로 이상의 몇 개 방면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지난해 즉, 1928년도에 일본정부는 암암리에 조선사람들을 모아 <<만주개발대>>라는것을 조직하고는 매호마다에 총 한자루씩 나누어주었다. 이 할빈개발대의 대장은 정립동(鄭立東)인데 그가 친일배로서는 제일먼저 파견받은 사람이였다. 개발대에는 사무소가 있었는데 그 사무소는 농경지를 사들이고 세를 맡는 방법으로 무장이주민을 만주에다 안착시켰다. 일본은 만주에서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지간 분기가 생길시에는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병력을 투입할 궁리였다. 그러한즉 이 역시 일제가 만주침략을 위한 하나의 보취였음은 불보듯하다.

김좌진은 이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그는 일제의 교활성을 력사로서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좌진은 <<중동로사건>>이 생기자 그것의 발생원인을 캐고 성질을 캐면서 각별히 조심스레 이를 대했다.

1920년 5월 30일, 세미노브가 조직한 원동정부의 정강 제6조에는 앞으로 로씨야가 전에 체결한바있는 중, 로, 몽조약과 중동철로의 일체권리는 일본에 넘겨준다고 규정되여있다.

그해의 11월 24일, 일본 관동도독(關東都督)이면서 륙군대장인 다찌바나는 할빈에 가서 할빈과 중동로연선에 있는 일본군파견대를 관동도독관할내에 넣는 한편 할빈, 해림 등지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거듭 군사연습시켜 저희들의 무력을 과시케했다. 언녕부터 중동로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어볼 야심이였던 일제는 그렇게 무력시위를 하는 한편 토비와 결탁하였다. 일본군은 토비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고 무기와 돈을 대주면서 할빈을 중심으로 동서 두 개선의 중동로를 부단히 소란하고 주민들을 살해하게 함으로써 객관에서 보면 중국정부는 철도를 하나 보호할 능력도 없이 무능하다고 인정케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과격파>>가 만주에 침입하는것을 막아야한다느니 조선사람과 일본교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는것은 밀어버릴수 없는 책임이라느니 하면서 군대를 만주땅에 진입시킬 구실을 달았다. 그리고 대량의 특무와 간첩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한간을 매수하며 내란을 조직하고 내정을 간섭했다. 씨비리에 출병한 기간 할빈에 있는 일본군사령부는 특무국을 설치하여 전문 중동로 각 역전의 군경부담, 배치와 씨비리의 군사정황과 조선사람들이 할빈 등지에서의 활동정황을 탐지하게끔 했다.


1922년11월 17일부터, 할빈에서 발간하는 로씨야문의 신문은 <<원동로씨야정부선언>>을 실었는데 거기에는 중동철로연선의 구역은 로씨야령토범위에 속한다고 밝혀놓았다. (<<黑龍江省長公署檔案>>)


쏘련정부가 중동철로를 중국에다 무조건 돌려주지 않은 이것은 결국 짜리로씨야가 중국을 침략할 때 만들어놓은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지 않은 것으로 되었기에 결과적으로 중쏘량국간에는 분기와 충돌이 끊을새없게 되었다.

이해 1929년 5월 27일, 장개석정부의 사촉하에 동북군벌은 쏘련이 적화(赤化)한다는 구실을 대고 할빈에 있는 쏘련령사관을 수색했을뿐만아니라 중동로의 쏘련공작인원들을 체포, 구축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중쏘쌍방은 교섭하고 담판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끝내 군사충돌이 일어나고만 것이다.

그래서 온 만주땅, 특히는 중동로가 있는 북만이 끓어번지였다.

<<이번 사건은 쏘련과 중국 량구간 철도귀환을 놓고 벌어진 충돌인것만큼 우리는 관게없는 일에 참견말아야한다. 그리고 경각성을 높이라. 교활한 왜놈들이 이제 또 구실을 대고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김좌진은 이러면서 독립군은 물론 신민부관할내에 있는 조선동포들은 자중하면서 어지러운 와중에 말려들지 말라고 했다. 그는 이럴때에 참혹했던 <<경신년토벌>>을 상기했던 것이다. 그때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훈춘사변>>을 조작하지 않았던가. 2만명좌우의 일본군과 7천명 넘는 장작림군대가 몇갈래로 나뉘여서 반일무장을 포위토벌했다. 우라지보스또크에 가있던 일본군은 방향을 돌려 동녕현 삼차구, 녕안, 류수천, 왕청등지의 반일부장에 대해 <<토벌>>을 감행했고 씨베리에 출병했던 일본군은 여기 중동로선의 목릉, 해림 등지에서 반일무장이 북쪽으로 전이하는것을 막았고 장작림군대는 일면파에서 일본군을 협조하여 <<토벌>>을 감행했던것이다.

김좌진의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과연 일제는 남의 집에 불난 틈에 도적질하듯 7월상순에 군대와 경찰, 만철수비대, 헌병 2,500여명을 중동로연선에 이동시켰다.

한편 <<중동로사건>>이 벌어지자 중공만주성위(中共滿洲省委)와 공청단성위(共靑團省委)는 로동자, 농민, 병사와 모든 로고대중은 한결같이 뭉치여 동북당국의 중동로강점과 반쏘행위를 반대하고 일본의 동북침략을 반대하라고 호소했다.

이번의 <<중동로사건>>에서 동북당국은 부금현에서 무고한 조선농민 130여명을 살해하고 동녕현에서도 30여명이나 살해하였다. 이같은 야수적인 살인만행은 동북인민 특히는 조선동포들의 지대한 분노를 야기시켜 동북당국을 성토하고 반일운동을 더 일으킬 대중적인 투쟁분기를 팽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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