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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상해의 대한민국림시정부는 탄생을 선고한 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발휘하기 위해서 국내에다 자체의 기본조직인 련통부(聯通府)와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하고 해외동포들 사이에는 거류민단(居留民團) 혹은 그에 준하는 기구들을 설치하였다.
한편 만주에서는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적극적인 활약으로 새로운 동립단체들이 륙속나오고있었다. 1919년 10월 안도현에서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11월에는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련합회(大韓靑年聯合會)가 결성되였고 김원봉 등은 길림에서 의렬단(義烈團)을 조직했다. 그리고 해를 넘겨 1920년 2월 관전현에서 광복군사령부가 조직되였고 흥경현에서도 광한단이 조직되였다.
서간도지방에서 독립군단체가 생겨난것만도 한민호(부민단)와 서로군정서(군정부)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 대한청년련합의용대, 광복군총영, 대한독립군비퇀, 광복단, 의성단, 천마대, 태극단, 소년단, 대진단, 향약단, 백산무사단, 의용단...
나아가세 조선나라 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 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기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사 락엽같이 쓰러지리라
보느냐 반만년 피로 지킨 땅
오랑캐 말발굽에 밟히는 모양
듣느냐 이천만의 단조의 혈손
월쑤의 칼아래서 우짖는 소리...
만주의 넓은 산야에서는 <<독립군가>>의 우렁찬 노래소리 메아리쳤다.
림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년 2월 17일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론하여 독립전쟁의 결행을 경축하면서 그 승리를 기원했다.
<<2천의 독립군의 승첩은 동아의 대혁명의 개시를 <宣>하는 경종이라 하노라. 이미 불은 당기였도다. 독립전쟁의 제1기는 림박하였도다. 폭풍우의 선구자 지평선을 스치고 가도다. <충용한 대한의 남아여, 혈전의 시 광복의 추가 來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라, 정의를 위하야 민족을 위하야 총과 혈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군무부포고) 독립전쟁의 제1보에 우리에게 돌아온 이 승리는 즉 독립전쟁의 전도를 하는 승리요, 동아혁명의 성공을 祝하는 승리로다. 승리를 축할자는 나오라. 승리를 향하야 돌진할자는 나오라.>>
각 독립군들에서 훈련을 다그쳤다.
왕청현 서대파에 있는 대한군정서 사관련성소와 명월구에 있는 대한국민회사관학교에서는 매일 5시간이상 창격훈련과 배낭에 5관의 흑모래를 넣어 메고 군총으로 완전무장하여 산야 어느곳에서나 구보 혹은 도보행진을 했다. 그것은 실로 고된 군사교련이였다.
김좌진은 기타 독립군의 수뇌들과 협의하여 <<오늘 한곳을 공격하고는 후퇴하고 래일 한곳을 공격하고는 후퇴하며 지구전으로써 적에게 손실을 주어야한다.....한사람을 죽이고 한사람의 무기를 빼앗고 한곳을 습격하여 한곳의 무기를 빼앗아야 한다. 우리의 전쟁비결은 지구전으로 적의 사기를 저락시키며 경제적으로 부담을 가중하게 하는데 있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런 유격전의 성격을 띤 장기적인 지구전은 강적인 일제와의 싸움에서 그야말로 창조적인 것이였다.
여러 독립군에서도 이 전략을 본받아 일제침략군을 건드려 계속 괴롭히였다.
3월에도 항일무장군은 온성지방에서 일본경찰과 교전이 있었다.
만주땅에서 독립군력량이 이같이 일취월장해가자 일본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해의 5월상순, 소위 <<조선총독부>> 제3대총독 사이또의 지령을 받고 중국의 봉천, 길림지방으로 출장나온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 아까지는 현지에서 일본령사관 령사 및 길림성, 봉천성 독군고문으로 있는 사또, 마찌노 등과 협의하고 동삼성순렬사 장작림에게 봉천, 길림 각지에서 조선인 반일무장단체에 대한 련합수사를 요구하여 허락을 얻었다.
얼마후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9사단보병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독립군이 주둔하고있는 삼툰자(三屯子)를 공격했다. 허지만 일제는 6월 4일, 5일에 두차례 있었던 삼툰자전투에서 도독부(都督府)의 독립군사령관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독립군에 120여명을 잃고 대패하고말았다. 그리고 또 6월 7일에는 지형에 어두운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했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부대의 유인술에 걸려 사상자 157명과 중상자 200여명을 내는 대참패를 거듭하였다. 삼툰자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의 일본군의 대패는 독립군의 사기만 높혀주었다. 그리하여 절치부심하게 된 일제는 6월에 만주의 중국인 마적단(馬賊團)을 돈으로 매수하여 훈춘을 공격하여 그곳에 있던 저희들의 일본령사관 본관과 직원들을 사살, 방화하게 하였다. 그래놓고는 만주에 거류하고있는 일본사람을 보호해야겠다고 떠들었다. 그것은 구실을 달아 독립군을 <<토벌>>할 부대를 출병시키자는 수작이였다.
<<삼척동자나 속이겠는지. 왜놈은 본성이 간교해서 약은 꾀를 잘쓰니 경각성 늦춰서는 안됩니다.>>
좌진은 늘 이렇게 주의를 주면서 군사훈련을 틀어쥐였다. 그리고 그는 필요하다면 일제와 최후의 결전도 벌릴 각오를 가지고 독립군을 독려하였다.
일본은 7월 16일에 또 일본의 조선주둔군 참모장 오노, 관동군참모장대리 스기 등 군, 경 및 령사관의 고위급관원들이 모인 제3차 <<봉천회담>>에서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 초토(剿討)계획>>을 작성하고 다시 중국측에 2개조항을 제기했다.
1. 강안(江岸)일대 접경지방에서는 중,일합동수사를 수시로 진행할것.
2. 필요한 시기에는 일정한 기간에 중국군대와 협동하는 이름으로 일본군대로 소탕할것.
일제는 이렇게해놓고 다시 씨베리에 출동하였던 대병력을 되돌려 <<토벌>>작전을 감행하면서 패전에 대한 이른바 <<보복조치>>로서 간도에 살던 조선인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인면수심의 일본살인귀들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조선사람이면 모조리 잡아다 쏘아죽이고 때려죽이고 불태워죽이다못해 지어는 산사람의 눈알을 도려내고 사지를 찢어죽이며 생매장을 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이해의 7월중순부터 말까지만하여도 학살당한 조선사람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공포속에 대지는 떨었다!
복수하자!
이때의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 교련장은 사뭇 들끓고있었다.
창격련습하는 젊은이들이 교관의 구령에 맞추어 이따금 내지르군하는 맵짜고도 짤막한 웨침소리는 그윽한 산간의 맑은 대기를 흔들어놓았다. 나라위해 목숨을 터럭같이 여기고 싸웠던 양만춘, 을지문덕의 피를 이어받은 젊은이들이였고 리순신, 임경업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이였기에 그네들은 모두가 조선의 남아답고 용장답게 씩씩했다. 날랜 칼을 휘둘러 현해탄 푸른물을 피빚이 되게 만들고 부사산 솟은 봉도 단칼에 베여버릴 듯 그 기세가 자못 도도했다.
그러다가 휴식을 알리는 나팔소리 울리면 긴장을 풀어놓는 전사들의 이야기와 노래소리에 산간은 환락으로 기분을 바꾸었다.
좌진은 교관들과 더불어 하루도 여기를 떠나지 않았다.
7월의 어느날, 흐르는 땀을 랭천에 씻고 돌아오던 좌진은 무성한 잣나무 그늘아래서 전사 여럿이 이야기장단을 벌리고있는 것을 보고 그리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무슨 얘긴데 나 좀 들어볼가?>>
전사들은 사령을 보자 웃었다.
<<우린 지금 의친왕의 얘기를 합니다. 장군께서는 그가 상해로 도망가려다 실패한 일 기억나시겠지요?>>
<<기억나다말다. 그게 지난해말의 일이 아닌가. 신문에 보도가 났더랬지. 그래서?>>
<<여기 그 신문 보관돼있습니다. 그걸 보니 생각이 새로워 우린.... >>
올해 나이 17살, 사관생중에서 제일어린 강위(姜渭)가 손에 쥐고있던 신문을 장군에게 뵈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것은 지난해, 즉 1919년 12월 4일 <<時報 >>였다. 그건 상해에서 출간하는 중국신문이다.
의친왕은 리강(李綱)의 봉명이다. 의친왕은 고종의 5남으로서 호는 만오(晩悟)인데 지난해 말에 조선을 탈출해 림시정부로 가다가 안동에서 발각되여 송환되였다. 일본으로부터 도일(渡日)을 강요당했던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배일사상을 고수하고있는 것이다.
상해의 <<時報>>는 그의 탈출리유를 다음과같이 잘 보도하고 있었다.
(1) 1895년에 일인이 어떻게 나의 모친을 살해했으며 전 한국황제인 부친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세계인에 설명하기 위해.
(2) 전세계 인류에게 1919년의 <<3.1운동>>에서 일인이 한인을 어떻게 학살하였으며 일인이 어떤 방법을 리용하여 한인의 자유에 대한 요구를 압제하였음을 알리고 세계인류에게 한인은 결코 일인과 동화되지 않을것임을 알리기 위해.
(3) 일본과 조선의 합병조약에서 조약의 인장은 사사로이 사용된것이라하여 한국황제와 인민은 결단코반대하였으며 이 때문에 한국황제는 죽음에 이르게되였다.
(4) 나는 자유로운 고려의 공민으로 일황의 정부를 원하지 않고있음을 알리고 또한 고려림시정부를 도와 고려독립의 목적에 도달하도록 할것을 알리고자한다.
<<똑똑한 인간이로군! 밑그루같건만 왜 이리도 다를가! 제형보다 백배도 낫군!>>
좌진은 의병투쟁을 그만두라고 돌아다녔던 순종 척(拓)을 념두에 두고 비하면서 의친왕을 칭찬했다.
이때 전령병이 달려와 서로군정서에서 손님이 왔다고 알리기에 좌진은 곧 사령부로 향했다.
좌진이 사령부에 이르러 보니 과연 서로군정서에서 파견한 손님이 와 기다리고있었다. 손님은 좌진사령을 보자 인사를 하고는 갖고 온 편지를 꺼내놓았다. 서로군정서의 반일무장대오는 형세부득한 사정에 의해 오랜 근거지인 통화, 류하현을 떠나 안도현 내두산으로 이동하였다. 서로군정서의 독판 리상룡과 부독판 려준은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에게 친서를 보내여 이 사연을 알리고 협동작전행동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때는 서일이 심리평에 있지 않았다. 지난 6월에 200여명의 운반대를 거느리고 무기구입하러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로 간것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조성된 형세는 긴박감과 조급증을 가져다주고있었다.
편지를 가지고왔던 사람이 돌아가자 뒤이어 서로군정서의 참모장 김동삼(金東三)이 북로군정서본서와 사령부에 찾아와 1주일간이나 체류하면서 선후대책을 상의했다. 일본은 대부대를 간도의 주위에 집결시킴과 동시에 전투에 유리한 요새와 기지로부터 독립군을 철퇴시킬것을 중국군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자칫잘못하면 중일전쟁이 재다시 일어날 가능성까지 있는지라 중국측은 곤경에 빠져 일본의 말을 들어주는 형편이였다.
한데 북간도지방에서는 서간도지방과는 달리 독립군에 대한 중일합동수색작전이 처음부터 행하여질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서정림(徐鼎林) 길림성장이 일본측의 강요에 대하여 <<불령선인(독립군)이라 하는자는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서는 이를 토벌할 리유가 없다. .... 특히 여기에 대한 취체는 이미 규정을 만들어 도윤이하의 관헌들도 실시하고있다.>>고 명백히 거부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종당에는 수색이 있기마련이여서 북간도의 독립군은 연길도윤 장세전(張世銓), 중국군려단장 맹부덕(孟富德)등과 교섭을 벌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타협을 보았다.
1). 중국군은 일본군의 간도침입의 구실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 독립군토벌을 위한 출동을 하지 않을수 없으므로 독립군은 이같은 중국측의 립장을 고려하여 그 대책을 세워 상호타협, 행동한다.
2). 그리하여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상에서 군인의 복장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동함으로써 중국측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3). 중국군은 토벌을 위한 출동전에 독립군에게 그 내용을 사전에 통보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이동에 필요한 준비와 시간을 갖게 한다.
4). 중국인과 독립군은 서로 피전을 약정하고 중국군이 출동해도 독립군은 공격하지 않고 중국군은 동립군의 이동과 삼림지대 등지에서 새 기지건설 등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타협이 있은 후 여러 독립군부대는 8월하순부터 일제토벌군의 간도침략을 사전에 막고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장정을 시작했다.
왕청현에 자리잡고있는 북로군정서는 서대파에 병영이 있고 십리평에 7동(1동은 폭 20척, 길이 60척)에 달하는 사관련성소 병사가 있었다.
사실말이지 좌진은 이처럼 알심들여 건설해놓은 기지를 버리고 다른데로 가자니 아까왔다. 그리고 이 일은 어쨌든 총재인 서일이 있어야했다. 그래서 속을 끓이는판인데 8월이 되자 마침 무기를 구입하러갔던 서일과 그의 수하인원들인 재무부장 계화, 기계국장 량현, 제1중대장 리교성, 제2중대장 리백린, 제3중대장 리완 등이 숱한 무기와 탄약을 운반하여가지고 돌아왔다. 연해주에 와있던 체스꼬병들이 마침 본국으로 철거하면서 무기와 군복들을 팔았던 것이다. 전력이 한층 강화되자 김좌진은 사생을 비롯한 전체 독립군전사들에 대한 훈련을 다그쳤다.
계절이 바뀌여 이젠 가을절기의 기분이 완연했다. 동삼성(東三省)당국은 마침내 왕청현 서대파구에 자리잡고있는 이 북로군정서와 그의 사관련성소에 대해서도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을 더 깊은 삼림지대로 퇴각할것을 권고하여왔다.
그러더니 며칠안되여 9월 6일에 중국파견군의 혼성려단장 맹부덕이 부하 200명을 거느리고 직접 서대파구에 나타났다.
<<이거, 참 보깨는걸!>>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좌진은 조급해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까짓 200명 끌고와서는 대체 어쩔셈인가고 웃었다.
그러나 맹부덕은 약속대로 완력으로 독립군을 쫓으려 온것이 아니라 일제측에게는 <<토벌>>을 내세우면서 내면적으로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를 조속히 이동시킬것을 간청하러 온 것이다.
그리하여 좌진은 여러 요인들과 상론하고 소와 돼지를 잡아서 그의 병사들을 호궤(犒饋)하면서 협상했다.
립장이 딱함을 변명하던 맹부덕은 술잔을 들면서 거듭거듭 미안해하였다.
<<이것은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요. 그러나 중국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장군은 우리들의 이 권고를 리해하실거요. 참으로 딱한 청이오만은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약속을 리행시키기 위해서, 그냥 얼마쯤 물러나주십시오. 안도의 수풀속이든지 어디든지 밀림지대로.... 그리고 다시싸워주시오. 장군! 일본이 우리들의 공동의 적일진대 중국과 조선의 수호관계만은 언제까지나 의심하지 마시오!>>
<<고마운 말씀이요.>>
그와 마주앉아 잔을 드는 백야 김좌진사령은 이렇게 가벼이 응수하는수밖에 달리는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협상결과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져 맹부덕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음날 퇴각했다.
이때는 일본군의 대거침입정보를 수집한 홍범도장군으로부터 안무(安武) 등 국민회부대와 함께 장백산밀림지대로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일대격전을 하자는 서신이 날아왔다. 서일총재와 김좌진장군은 홍범도장군의 제의를 쾌히 접수하여 사관련성소에서 6개월간 훈련해온 298명의 사관련성생의 수련을 다그쳐 끝내고 9월 9일 제1회졸업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후 좌진은 9월 12일까지 졸업사관을 중심으로 하는 려행단(교성대)과 150명가량의 사관으로 사령부경비대와 북로군정서군의 본대를 편성하고 장정준비를 마무리하였다.
드디여 9월 17일과 18일에 가족을 포함한 1,800여명 인원은 80여대의 운송마차에 무기와 짐을 적재하고 서대파의 본영을 떠나 서남쪽의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靑山裏)로 진군했다.
그러나 북로군정서는 이미 중국군과의 약속이 있었으므로 국도 대로를 통과할수 없었고 지어는 평야의 농로마저 맘대로 리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악조건하에서 그들은 주로 야음을 타서 대황구(大荒溝)를 거쳐 왕청현이북으로 수십리 떨어진 험산준령을 지나 연길현 의란구의 깊은 산길을 따라 행군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로투구령(老頭溝嶺)을 넘은후 서구(西溝)앞으로 내려가 장인강(長仁崗), 이도구(二道溝)를 도는 약 450리 험로를 행군한 끝에 목적지인 청산리일대에 이르렀다.
때는 출발한지 한달만인 10월 12일과 13일사이였다.
김좌진사령관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장군이 인솔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등의 련합부대가 이같이 서남쪽에, 백두산록이 자리잡은 안도현과 삼도구방면의 험준한 밀림지대로 집중한것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기 편리한 백두산록에다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려는데서였다. 안도현의 백두산록지방은 지세가 험준한데다 삼림이 울창해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항전하기 유리했고 또한 독립군본영으로 삼기 좋은 요새가 많았다. 더욱이 이 지역으로놓고 볼 때 동북3성중 봉천성과 길림성의 접경지역이 되었기에 일제의 사촉에 못이겨 길림성군이 공격하여 올 경우에는 그 군의 관할밖인 봉천성으로 독립군이 피할수 있고 반대로 봉천성군이 공격해올 경우에는 길림성지역으로 얼마든 이동할수 있는 지리적요충지였다.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에로 출병할 구실을 만든 일제는 10월 2일 경험을 쌓은 지휘관들을 배치하여 보병, 포병, 기병 등 갖가지의 병력을 풀어 곧 독립군 <<토벌>>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계획을 보면 이소무라륙군소장이 보병 제19사단 제38려단 사령부, 보병 제75련대, 보병 제76련대, 기병 27련대, 야포 제25련대 등을 령솔하여 훈춘방면 토벌을 맡고 쏘련에 출병하였다가 귀로에 오른 제14사단의 일부 부대와 합세하여 공동히 작전하기로 했다.
기무라륙군보병대좌의 휘하에 있는 보병 76련대의 일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는 조선 온성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왕청방면으로 진격해서 서대포(西大蒲),십리포(十里蒲)대감자(大坎子), 백초구(百草溝), 하마탕 일대의 독립군을 토벌하기로했다.
아쯔마 마사히꼬 륙군소장은 보병 제37려단 사령부, 보병 제73련대, 보병 제74련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야포 제25련대, 공병 제19대대 일부를 령솔하여 룡정방면에서 진출, 일본군 제20사단의 제77련대와 협동작전하여 안도와 돈화방면으로 이동하는 독립군부대를 막기로 했다.
그리고 아베소장은 쏘련의 포세트만을 침공했던 일본군 제14사단의 제28려단을 쯔지가도시지대, 하네이리지대, 야스니시지대로 편성하여 동녕현쪽으로부터 남하하면서 각 지대를 혹은 분산 혹은 집중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했다.
이상의 <<토벌대>>총지휘는 제19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였다. 그는 총지휘부를 룡정에다 잡고 수하에 보병 제74련대, 비행기반, 천상전신반과 비둘기통신반을 두고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남만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관동군은 철령의 스기야마대좌의 보병 제19련대로 무순, 흥경, 통화, 환인, 관전 등지를 토벌하기로했고 공주령의 구니중좌가 령솔하는 기병 제20련대가 공주령, 삼원포, 통화, 흥경, 영액성, 상가대, 개원 등 지방을 토벌하기로 했다.
이밖에 장작림의 군경으로 두 개의 <<조사반>>을 무어 압록강이북 각지에서 활동하고있는 독립군들을 교란하고 견제하기에 동원했다.
2만여명 적가운데서 청산리지역으로 친입한것이 5,000여명으로 추계, 이를 상대로하여 김좌진은 새 근거지를 창설코저 장백산으로 가던 도중 청사에 길이빛날 청산리회전을 총지휘했다.
그때의 독립군의 병력을 종합하면 북로군정서 참전인원 약 600명, 대한독립군 약 300명,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약 250명, 의군부 약 150명, 한민회 약 200명, 광복단 200명, 의민단 약 100명, 신민단 약 200명으로서 도합 2,000여명밖에 안되였다.
일제 <<토벌군>>이 삼도구 상촌에 도착하기 전날인 10월 10일 묘령(廟嶺)에서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의 수뇌들은 회의를 열고 간도에 진입한 일제토벌군과의 회전 등을 론의했다.
군정서간부로 위장침투하여 활동했던 한 일본군첩자는 이 회의내용과 결말을 탐지하여 다음과 같이 상부에 보고했다.
<<일본군대가 삼도구 충신장 상촌에 도착하기 전일 제2차로 묘령에서 현천묵, 계화, 리범석, 안무, 리학근, 박녕희 등 군정서측 및 홍범도측의 수뇌가 회합하여 일본군 대응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전투할것인가 회피할것인가 량파의 의논이 백출하였으나 결국 현천묵 등이 주장하는 다음의 론지에 기초하여 당분간 일본의 공세를 회피할것을 결의하였다. 훈춘사변에 의하여 드디여 일본군대가 출동하여 아작전(我作戰)에 장애를 가져온것이 심대하다. 이에 간도에서 일본군대와 교전하면 그 승패는 미지수에 속할지라도 그 때문에 지나측의 감정을 해하고 일본측은 다대의 병원을 증파하기에 이를것이다. 아단체는 실로 내외독립의 과아(瓜牙 )로서 역시 광복의 명아이다. 분전의 호기는 멀지 않았다. 시하 자중을 요한다.>>
그런데 독립군의 피전책은 내외정세를 감안하여 세우는 전략이였지 결코 독립전쟁을 늦추거나 포기하려는것은 아니였다.
10월 12일과 13일에 북로군정서의 600여명의 정예병력과 100명가량의 보충대병력은 청산리부근에 도착하여 포진하고있었다.
일본군은 그들이 기관총 4정, 신식군총 500정, 수류탄 1,000여개 그리고 우마차 약 20량 분량의 탄환을 갖추고있음을 탐지하고있었다.
김좌진은 병력이 려행대장 라중소와 중대장 리범석이 인솔한 사관졸업생 중심의 약 300명의 려행단과 자기가 직접인솔하는 본대로 나뉘여졋던것을 회전직전에 다음과같이 그 편제를 개편하여 격전을 치르게되였다.
사령부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라중소
부관: 박녕희
련성대장: 리범석
종군장교: 리민화, 김 훈,백종렬, 한건원.
대리장서리(제2중대장): 홍충희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
제2중대장: 홍충희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대대부관: 김옥현
소대장: 신희경, 강승경, 채 춘, 김병하, 리허구, 정명수, 김동변.
소대장서리: 리운강
기관총대 소대장서리: 김덕선, 최린걸
제1중대 특무정사: 라상원
제2중대 특무정사: 권중행
즉 김좌진이 사령관으로 참모부와 련성대를 거느리는 사령부를 두고 그밑에 홍충희를 대장서리로 하는 1개 대대로 재편성했다. 그리고 그 대대를 4개중대와 1개 기관총소대로 편성하였던 것이다.
<<백만발의 탄환을 쓸 때는 인제야 돌아왔다! 원한과 치욕을 씻자!>>
가슴속에서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고있는 전사들은 앙양된 투지로 격전을 맞을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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