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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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28)
2014년 03월 30일 07시 48분  조회:2812  추천:1  작성자: 김송죽
 

 

28.

이때는 해가 방금 동산에 솟아오른 아침이였다.

<<저놈이다! 상실이다!>>

누군가 허겁지겁 줄행랑을 놓고있는 흉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개보다 못한 놈! 저놈을 붙잡아 각을 찢어놓고말테다!>>
한 독립군전사가 
격분되여 부르짖으며 연자방아 찧는 말을 풀어 타고 흉수가 도망쳤다는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산시마을을 기민하게 빠져나와 신안진쪽으로 줄행랑을 놓고있던 흉수ㅡ박상실(朴尙實)은 독립군이 말타고 자기를 추격하고있음을 발견하고는 얼른 길옆 늪가의 갈풀숲에 몸을 숨기였다가 저격하여 그를 사살했다.

때마침 신안진쪽에서 산시로 오고있던 조선농민 둘이 이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중 한사람은 얼른엎드려 몸을 숨겼으나 다른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선채 놀라 허둥지둥하다가 역시 박상실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박상실은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람목숨 셋이나 앗아내고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이쪽에서는 나팔수의 나팔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웬 영문인지 모르고 모였다.

얼마간 늦어서야 비보를 받은 김종진 등 몇사람은 신안진에서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때까지도 백야장군은 옆꾸리에 권총을 찬채 조난지에서 그대로 굳어가고있었다.

이외의 흉변을 당하고보니 사람들은 망연자실하여 손발이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난국을 꾸준히 헤쳐오던 거인이 갑작스레 거꾸러지니 북만주의 독립운동진영은 마치 키를 잃은 배와도 같이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사태의 수습을 위하여 한족총련합회는 권화산부위원장의 장악하에 정신, 황학수 등 중진들이 즉시로 간부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암살흉수를 붙잡고 이번의 훙변을 조작한 원인을 규명해야했다. 회의는 또한 이 일로 하여 일어난 불안한 기분을 빨리 가라앉히기 위해 각지에 파견되였던 조직선전대원들을 소환하기로했다.

한편 군사위원장 리붕해는 림시치안대를 긴급조직하여 중동로의 독립군진영을 수비방어함과 동시에 흉수를 잡기 위해서 지방의 중국치안당국에 의뢰하면서 즉시 수사에 달라붙었다.

도주자와 꼭 련계가 있는 다른한자가 있을것이였다.

치안대의 일부는 그날밤으로 해림으로 달려가 그곳 역전근처에 있는,지난해 이미 국제공산당으로부터 해산을 선고받고서도 종파활동을 중지하지 않고있는 조공만주총국산하의 한 잔존기관(화요파)을 돌연습격하여 김봉환 일명 김일성(金一星)외 한명을 잡음과 동시에 문건들을 압수했다.

그 압수해낸 문건에서 예측한바와 같이 이번의 흉계는 그네들이 꾸미였고 권총을 직접 쏜 흉수 박상실은 김봉환의 사주를 받아서 한짓이라는것이 밝혀졌다.

박상범(朴尙範) 혹은 김신준(金信俊)이라고도 부르는 박상실은 임무를 맡은후 팔리고개(산시)에 와 근 반년가량이나 족제비잡이를 하면서 혹은 신을 사서 주는 등 수단으로 독립군과 가까이했고 백야장군주위의 경호와 배치 등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그짓을 한것이다. 그런데 그자식이 죄악적인 피비린 반역을 하고는 어디로 도망쳤는지 당장 붙잡을 재간이 없었다.

그를 시킨 김봉환은 본래 통도사(通度寺)의 중으로서 일찍이 김성숙(金星淑, 림정 국무위원)과 함께 북경에서 공산당에 들었는데 입당후 임무를 맡고 북만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애인인 강경애와 같이 해림에 있으면서 독립군과 잘 어울려 한때 인간적로 좋은 인물로 평을 받은자다. 그런자가 <<신민보>>사건으로 할빈의 일본령사관원에게 체포되였던거고 마쯔모도의 흉계에 넘어가 량심을 바꿔넣고 풀려나온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만약 공산당이 알았어도 가만두진 않았을 것이다.

심문해서 알아낸 것인데 그자는 김좌진이 맑스주의자인 자기들이 제일 미워하는 무정부주의자와 결탁했기에 증오감이 생겨 죽이였다는거다. 모든 악과를 그 한사람에게 집중시키면서 흉모를 꾸미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자가 공산당간판을 걸고 살해의 리유를 정당화하려는 궤변에 불과한것이지 기실은 할빈일본령사관의 사촉에 배기지 못해 밀약을 최후로 집행하여 반역자의 흉심을 드러낸것이다.

독립군은 수일간 엄한 조사 끝에 체포한 두사람을 처단해버렸다.

그랬다해서 화근이 제거된것은 아니였고 문제가 해결된건 더구나아니였다. 그자의 본심을 모르는 그의 일당이 남아있어서 다음번의 암살대상은 누구라느니 하는 위협공갈의 풍설이 돌았고 이로인해서 인심은 의연히 황황했다.

그래서 치안대는 경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좌진이 조난당한 소식을 석두하자에 계시는 그의 로모께 알리였더니 이 녀걸다운 체구에 헌거한 로파는 하도 기막히여 락루하면서 한을 품었다.

<<이눔아! 이눔아! 집재산 다 털어 광복바라고 싸우던 네가 어쩌면 이렇게 죽는단말인고?... 일본놈하고 싸우다 죽으면 몰라도 제 민족 제 동포손에 죽다니 웬 말이냐?... 원통하구나!>>

독립군에서는 호위병셋이나 있었건만 장군의 인신안전을 책임지지 못했고 전반적인 치안도 홀시되였던것을 몹시 후회했다.
1월 27일경. 만주의 유지 95명이 산시에 모여 장의주비회의를 열고 백야장군을 사회장으로 할것을 결의한후 장의식날자와 장비(葬費) 등 구체적인 문제를 토론했다. 다소의 의논이 있은 후 장의주비회에서는 지금은 한창 북만의 엄동계절이라 광중(壙中)을 제대로 짓기 어려우니 우선 초빈(初殯)을 하였다가 해동이되면 정식장례를 거행하기로 결정짓고는 이 일을 원만히 집행해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보통통신처와 서류통신처를 각각 내왔으니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普通通信處ㅡ 中東線 山市站 韓人學校

             全明源(리을규라고도 함)

書留通信處ㅡ 中東線 海林站 韓人學校

             李元山

 

독립진영의 신문은 물론 적의 신문들도 이를 널리 보도했다.

 

<<그의 가족은 지금 전부 그의 근거지던 길림성 모처에 있다는데 그의 칠십로모와 그의 안해며 그의 아우되는 김동한씨를 합하여 세식구가 있다하며 김동한씨의 아들로 씨의 양자가 된 김문한씨는 목하 안성읍내(安城邑內)그의 외조모 오씨집에 류하고있으며 씨의 백씨인 고김경진씨의 가정은 지금 시내 린건동 이백칠십팔번지에 있는데 김경진씨도 수년전에 별세하고 그 장남 김칠한(金弼漢)씨의 가족이 산다하며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 한사람이 있을뿐이라는데 만주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의지할곳도 없게 되었다한다.>>

 

이상은 <<동아일보>>가 1930년 2월 13일자에 장비주비정황을 알리면서 함께 실은 보도였다.

이웃의 중국사람들은 묵은해에 온갖 괴로움을 다 잊어버린다는 랍월(臘月)의 망년(忘年)을 보내고나서 이제는 구정(舊正)이라 새해맞이 기분에 잠겨서 떠들썩하건만 상가의 비통한 기분에 잠긴 한족총련합회는 긴장한 나날을 보냈다. 고강산(高崗山)이 복수를 단행코저 독립군모험대를 조직하고 나섰다. 중광단이 조직되였던 그때로부터 대한군정회, 북로군정서를 거쳐 시종김좌진을 적극돕고 따르던 이 대종교도는 구천에 간 장군의 원혼을 부르면서 원쑤를 갚고야말리라 맹세했다.

해동이 되고 따스해진 4월중순이 되자 독립군은 서둘러 김장군의 장례를 거행하게되였다. 묘소는 풍수를 아는 권화산과 오지영을 비롯한 로인 여럿이 세패로 나뉘여 여러곳을 돌아보고나서 잡았는데 결국 산시에서 가까운 칠가툰 북산기슭이였다. 량켠에 산이 둘러있어서 아늑한 느낌인데 앞에는 마치도 고인된 장군의 활달한 흉금이런듯 평야가 탁 틔여 시원하니 북만주에서는 과연 다시 더 찾아보기 어려울 명소였다.

장례날 만주각지와 관내는 물론, 국경너머의 머나먼 곳에서 까지 모여온 조객은 수천명의 인해를 이루었다.

통한은 눈물로 되어 흘렀다.

황지툰에서 사는 리동춘이라는 농민은 백야장군이 생전에 자기네집으로 자주 다니였고 믿어주면서 태극기 100폭을 맏겨서 건사하도록하였거니와 식솔들이 헐벗은것을 보고 옷을 해입혀주던 일을 회상하고는 백골난망이라면서 자진하여 심산에 들어가 솔가지를 꺾어왔고 그것으로 하관전에 광내를 깨끗이 쓸면서 울었다. 유곽에 팔려갔다가 독립군손에 해방받은 일이 있었던 녀인마저 이날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 애도의 눈물을 흘리였다.

이날, 방방곡곡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서 울부짖는 망곡이 장천에 울렸다.

그런데 이같은 비통속에서 장례를 지내고나니 또 새로운 위험이 련달아 덮쳐들었다. 장례를 치른지 며칠안되여 할빈의 령사관에서 중국관헌을 협박하여 앞세워가지고 장군의 묘소를 돌아보았고 산시에 있는 고인의 저택까지 발칵 뒤지면서 수색했던것이다.

그래서 당지의 주민들은 공포에 싸이는판인데 불난집에 키질하듯 5월 1일에는 신안진에 있는 한족총련합회의 산하기관마저 시위군중의 습격을 받아 그만 들려나고말았다.

이때는 리립삼이 <<좌>>경로선을 실시해서 중국의 허다한곳들에서 폭동바람이 일어나면서 사뭇 들끓고있는 복잡한 판이였다.

5월달은 <<붉은오월>>이라면서 투쟁의 달이라했다.

그래서 북만주에 사는 적잖은 조선동포들도 이 선풍에 휘말려들었는데 그네들의 용감한 기세가 과연 놀랄지경이였다.

아성현의 조선농민들은 꼬박 두달동안 지주와 경영지주의 가혹한 착취를 반대하여 감조감식투쟁을 견지한 끝에 끝내 승리했다.

할빈시 황산저자(荒山狙子)의 100여명 조선농민들은 헤제도전공사(惠濟稻田公司)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반대하여 할동황산저자농민조합쟁의단(哈東荒山狙子農民組合爭議團)을 조직하고 <<선언>>을 바표하여 혜제도전공사의 죄행을 폭로, 성토했고 4월 30일저녁에는 할빈시에 있는 헤제도전공사(惠濟稻田公司)를 포위하였다가 할빈시의 <<5.1시위>>에 끼여들어 행진했다. 그들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군벌을 타도하자!>>

<<일본의 만몽침략을 반대한다!>>

등등의 프랑카트를 들고 구호를 웨치면서 경찰의 탄압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령사관으로 가 령사관의 유리창들을 돌로 깨고 삐라를 뿌리였다.

같은 날 목단강부근의 철령하에서도 200여명 조선군중이 저마다 손에 기발을 들고 <<중국공산당을 옹호하자!>>, <<중조인민은 단결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를 단행했다.

그리고 목릉현에서도 300여명 군중이 경찰의 탄압을 받아가면서 시위투쟁을 했다.

바로 이러한 형세에 발을 맞추어서 녕안현의 동포시위군중들은 신안진에 있는 한족총련합회의 산하 기관을 습격했다. 리유는 한족총련합회가 <<반동군벌과 결탁했다>>는거다.

모르는 객관에서 그렇게 볼수도 있을법한것은 한족총련합회는 자신이 중국땅에서 생존하자면 오로지 지방당국의 미움을 사지 말아야지 엇선다면 좋은 점이 없으리라는것을 알고 의연히 좋게만지내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어는 자신의 안전까지도 이 무능하고 량면적인 군벌정부에 의탁하는 형편이였다. 그런다고 결탁은 절대 아니였다. 하건만 극좌의 기분에 들떠서 반동군벌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쳐대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휩쓸려 합심을 하지않는 독립군을 곱게 볼리 만무였다.

이런 소란이 있은지 3일만에 김기철로인의 집으로 30대의 중국군인 하나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김로인 집에계시는지요?>>

<<저사람 왜 찾아왔나?>>

김기철은 집안에서 그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중국인이 누군가를 알아맞히엇다.

이때 집안에는 해림에서 온 정해식을 비롯해서 리달문, 리덕수 등 <<8로>>여럿이 모여앉아 복잡해진 시국을 놓고 한창 담론하고있는 중이였다.

김기철은 경계심을 풀면서 찾아온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 중국군인은 이곳 산시역전을 지키고있는 동북호로군 제28려 64퇀 2영 7련 1패의 중사반장 손상거(孫常擧)였다. 손상거는 한고장에 살고있는 김기철로인과 면목이 익은 사람이다. 그는 김좌진이 살았을적에 그를 몹시 숭경하는 마음에서 한부대내에 있는 친구를 데리고 일부러 인사하러 찾아왔다가 그 기회에 우연히 김기철로인까지 알게 된 후로는 만나면 그저지나지 않고 인사를 꼭 하면서 지내는터였다.

김기철은 그가 진작부터 독립군에 대해서 남다른 호감을 갖고있음을 알고있다. 그래서 반겨맞으면서 그에게 방안에있는 분들은 모두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놀음친구들이라며 인사시켰다.

이 호로군중사반장이 딴마음먹고 정탐하러온것 같지는 않은지라 모두들 화기롭게 대해주면서 그보고 호로군생활하기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니 손상거는 세상멋적은것이 아마 호로군노릇하는것 같다면서 자기는 고향이 산동인데 차라리 집에 돌아가 농사나 짓든지 아니면 장사를 다니고싶노라했다.

오죽하면 일개 군인의 입에서 그따위 말이 나오랴.

10월혁명후 레닌은 집정하게되자 쏘련홍군이 독립국경내에 주둔하는것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것이 못되며 국제공법에도 부합되지 않으므로 자동철거하고 동성철로(東省鐵路) 전부의 호로권(護路權)을 중국에다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중동로역시 중국호로군이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호로군이라는건 널려있는데다 임무는 번쇄하기만했다. 마적들의 소란을 막고 철로의 안전을 보호해야하는데 그들의 재간으로는 과연 힘들었다. 적을 어느때 만난단말인가? 마적이 얼마며 어디로부터 덤벼들지도 모를 일이니 어느때나 피동에 처해있었다. 게다가 군사기술훈련같은것을 조직하거나 지도검사하는 사람도 없이 제멋대로니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손상거는 지어 영장1급을 군인출신이 아닌 사람이 담임하고있는데야 더 말할것 있느냐고 개탄하면서 내부사정을 그대로 폭로했다. 그러고나서 자기는 한가지 일을 알려주려고 왔다면서 요즘 시위소동에 이 마을에서는 누가 보안단(保安團)에 붙잡혀갔느냐 물었다. 김기철로인이 한족총련합회측 사람은 잡혀간게 없는데 그건 왜 묻느냐고 하니 손상거의 말이 보안퇀에서는 신안진에 들어와 소란피우던 시위자 몇을 붙잡아 가두었는데 심문할 때 너희들은 왜 제 동포의 기관을 습격하느냐 물으니까 그중 한사람이 한족총련합회는 좋은 기관이 아니길래 습격했노라했고 또 한사람은 두목 김좌진이 일본령사관과 결탁한 친일배였노라 하더라는 것이다.

<<개자식들!...>>

듣는 사람들은 다가 치를 떨었다.

<<한심하지 어쩜 그따위루 무함을 지어낼까? 죽은이가 들어도 관을 차고 일어날 일이지. 나는 그런말 곧이듣지 않아요. 김장군은 절대 그럴사람아닙니다.>>

손상거의 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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