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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민부에는 혁명원로들로 구성된 참의원을 내놓고도 이전부터 생사를 같이하면서 김좌진을 보좌해온 명사호걸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정해식(鄭海植), 리동호(李東浩), 리달문(李達文), 김기석(金基石), 리덕수(李德洙), 장사학(張師學), 김기철(金基哲), 장기덕(張基德) 여덟인이였다. <<8로>>라 불러오는 그들은 모두가 년세많은이들로서 조선이 <<한일합방>>이 되자 망해버린 나라를 되찾아보려는 일념으로 처자를 거느리거나 아니면 홀몸으로 중국에 망명온 우국지사들로서 경력과 신분은 같지 않았다. 어떤이는 명문세가의 후손이거나 벼슬살이를 해보았던 망국대부였고 어떤이는 량반부호였으며 어떤이는 량반도 부호도 아니지만 대단한 박식가였고 어떤이는 풍상을 겪은 지모있는 의병장이였다. 꼭같은 점 한가지는 이네들 모두가 대종교도였다. 역경속에서 시련을 겪어낸 <<8로>>는 독립군에서 후근부이자 참모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있었으니 참으로 귀중한 존재였다.
이러한 그네들에게 지금 와서 한가지 공통한 심려가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김장군의 사생활을 조직해주는 문제였다.
어느날.
<<안되겠네. 걔가 이젠 서른아홉살이야. 색시얻어줘야 할게 아니여?>>
<<글쎄말이네. 산 홀애비로 멀쩡하게 늙어버리게 만들수야 없지.>>
그들은 이러면서 늙은것들이 무관심했다가는 죄를 짓고말겠다고했다.
<<남아의 한번 실수에 몸 붙일 곳이 없게 되었으나 다른날 때가 오기를 기다림이라.>>는 간단한 글귀를 고국땅에 남겨놓고 훌쩍 떠나왔던 김좌진이였다. 그가 늙은이로 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온지도 어언 10년철. 언제면 고향땅을 다시밟겠는지 앞길이 묘연했다. 부인 오씨는 전해에 딸 옥남이가 죽자 조선 고향에 돌아간 후론 다시 만주로 돌아오지 않고있다. 필경은 고생이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좌진이는 홀애비로 살아가게 됐다.
김좌진에게는 만주로 들어오기전에 계동의 김계월이를 만나 그한테서 본 서자 하나와 아우인 시정 김동진(時旌 金東鎭)의 아들을 양자로 삼은 문한(文漢)이가 지금 조선 안성읍내(安城邑內)의 외조모집에 있을 뿐 더는 없다. 본처 오숙은이 만주로 돌아오지 않으니 집간도 없어서 70고령의 어머님을 지금 석두하자에 있는 동생에게 맡겨 모시고있다. 이런 형편에 <<8로>>들은 일곱 번이나 편지를 해 오숙근이더러 북만에 들어와 살림살이를 다시하라고 권유했건만 헛수고였다. 본인이 한사코 들어오지 않으려하는데야 무슨 방법이 있는가.
그러면 어째야 하는가? 모면키 어려운 액운과 요사가 빈번한데 대를 이어줄 자식 하나라도 더 보게 해야 할게 아니냐 하는것이 장로들의 생각이였다. 그래서 수차의 의논 끝에 여기서 맞춤한 색시감 하나를 구해 백야를 재혼시키자는 것으로 의견이 둥글러졌는데 때마침 림정의 만주대표였던 김대지(金大池)도 해림에 왔다가 이 일을 알게되여 후일은 자기가 책임지마고 하면서 이를 동의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비준해도 구경은 본인에게 달리였다.
외출했던 백야 김좌진이 돌아오고있었다. 구척의 키, 거기에 걸맞게 실팍할사한 몸집, 숱많은 짙은 눈섶아래 정기도는 눈, 맑지고 우렁우렁한 목소리ㅡ 그는 과연 소문과 같이 보기드믄 미남의 장군이였다.....
중동로(中東路)는 중구과 로씨야가 공동히 일본을 대적하려는 목적에서 놓은 철도였다.
청나라정부는 1858년에 짜리로씨야와 <<애훈조약>>을 맺은 후 이어서 1860년에는 <<북경조약>>, 1881년에는 <<이리조약>>을 맺어 북방의 많은 령토를 로씨야에 떼주었다. 그리고 1896년 니꼴라이2세의 면례(冕禮)가 모스크바에서 있게되자 부패무능한 청나라정부는 리홍장을 특사로 파견하여 그 기회에 짜리로씨야와 굴욕적인 <<중로비밀조약>>을 맺음으로써 로씨야의 힘을 빌어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려했고 갑오전쟁실패후 처처에서 일본의 통제를 받고있던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어리석은 궁리를했던 것이다.
중동철도공사가 성립된 후 세금은 전부 화아도승은행(華俄道勝銀行)에서 대신해서 받아들이였는바 행정은 비록 할빈시 동사회(董事會)에서 장악했지만 요원은 거의가 로씨야인이였다. 모든일에 동삼성정부는 참견할 권리가 없었으니 결국 주객이 뒤바뀌운 우스운 꼴이 되고말았다.
해림과 석두하자사이에 있는 산시(山市ㅡ해림과의 거리44리)는 팔리강(八理崗), 팔리고개, 상석하(上石河)라고도 하는데 중동로선상의 한 개 보잘나위없는 산촌역이다. 철도의 북켠은 높낮은 산들이 련이어있고 남쪽켠은 좀 개활한 평지를 지나 멀리에 산들이 보인다.
산시는 로씨야인들이 철로를 놓을 때 곁달아 설계하고 지은 벽돌과 석재로 만든 원통형의 높다란 급수탑 하나가 철남의 역가까이에 있어서 유표할 뿐 다른 특점은 더 없었다.
이러한 정거장에 련달아서 이남이 곧 마을이다. 남북향으로 곧게 대통로를 빼고 초가집들이 둘러앉았는데 이 마을이 곧바로 력사에 이름을 길게 전해야 할 둔전양병(屯田養兵)하는 독립군의 본영이였다.
1927년의 봄도 예나 다름없이 빨간 진달래로 뒷산을 곱게 물들이였다.
立春大吉 建陽多慶
雨順風調 時和年風
집집의 대문들에는 이러루한 립춘서례가 나붙고 일손들은 농사차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날씨 명랑한 어느날 정오.
논판의 뚝막이일을 끝내고 돌아오던 백야 김좌진장군은 마을안 타작마당가의 조이(谷子)를 찧던 연자방아가 쉬고있는 것이 눈에 띄여 그리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놓았다.
이 연자방아는 독립군이 여기로 오면서 만들어놓은 것인데 널다란 연자판우에 놓여있는 대종교의 표기ㅡ 원방각을 새긴 원통의 커다란 연자매는 말이나 소를 메우지 않고는 굴리기 힘든 것이였다.
조는 찧다만채로였다.
김장군은 자기가 찧어보리라며 연자매를 당겼다. 그런데 연자매판을 따라 돌지 않고 너무 힘주어서 곧추 당긴통에 그만 연자판기둥이 뚝 불러지면서 연자매가 두루루 굴러 아래로 뚝 떨어지고말았다.
<<저런! 하하하....>>
모두들 보고는 장군이 일감을 더 만들었다며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일감을 더 만들어놓았다. 목수는 연자판기둥을 새로깎아세워야했다.
그런데 연자판기둥을 해넣고보니 연자매를 들어올릴 일이 더 걱정됐다.
젊은축들이 여럿 달려들었건만 연자매가 워낙 무거운지라 끄떡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옥신각신인데
<<내 좀 보기요!>>하면서 나서는이가 있었다. 백야 김장군이였다.
김장군은 웃동을 벗더니 마치도 력기선수마냥 자세를 하고는 두팔을 벌려 연자매를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는 <<응ㅡ>>소리와 같이 연자매를 번쩍들어서 연자판에 올려놨다.
모두들 <<야!>> 하고 입을 딱 벌리였다. 하도 끔찍스런일이라 놀란 눈으로 보고 또 보면서 장군은 차력군이 아니냐 하면서 찬탄이 대단했다. 그들은 그가 남다른 용력을 갖고있음을 오늘에야 똑똑히 알았던 것이다.
고향 홍성 갈산 그의 집문앞에는 지금도 장정 7.8명이 함께해야 들만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김좌진은 나이 17. 18살 때 벌써 그것을 맘대로 들군했었다. 그래서 그 바위를 김장군바위(김장군암)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의 맏형(伯兄) 김경진의 집에 있는 놋두명역시 얼마나 무거웠던지 7.8명 장정이 들어야 움직이는 것을 좌진은 물 반독 들어있는채로 닁큼닁큼 들군하였던 것이다. 본래 이러한 힘장사였거니 오늘 그깟 연자매쯤 들어올리는거야 무슨 대단한 일이랴.
사람들은 그저 탄사만 올리였다.
이 일이 있은 날 저녁켠, 정해식로인이 장군을 조용히 불렀다. <<8로>>중 년장자인 그는 백야의 선친과 동갑이며 또한 서당동창생이다. 한문(漢文)은 물론 로어까지 능란한 이 수재는 여직까지 김장군을 제 친아들같이 여기면서 아껴왔다. 그러한 정로인이 오늘따라 자애로움보다 엄숙하고도 집요한 투로 말머리를 떼는 것이였다.
<<한가지 긴요한일루 자넬 불렀는데 장군은 고집말고 들어주게.>>
<<무슨일이시온데요? 옳은분부라면야 의례 들어야지요.>>
<<음. 그래야지.>>
정로인은 이러면서 형편이 막부득해서 달리는 방법없으니 이젠 홀몸으로 지내지 말고 재혼하라는 것, 색시감은 이미 정해놓았다는 것, 이렇게 권도하는건 자기 혼자의 주장이 아니라 늙은이 모두가 심려하는것이라는걸 말했다.
헌데 백야의 대답은 시원치 않았다. 두고보자는것이였다. 그래서 <<8로>>들은 좀 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은 사실 자기 일신의 문제를 놓고 속을 썩힐 여가라곤 없었다. 부진상태에 있는 어떤일들은 명망높은 그의 힘을 바라고있기에 그는 늘 분망히 보내야하는 형편이였다.
전해의 11월에 개최되였던 총회때 신민부는 실업의 확장과 개선을 결의하고 그 집행을 실업부에 맡겼는데 사업이 그닥 활기롭지 못했다. 책임자인 리일세는 김돈(金潡)이나 송상하(宋尙夏)같은 사람들과 패가 되어 놀아대면서 주장이 점점 달라가고있었다.
독립운동자는 하나의 통일된 진영을 이룩해야한다는 깨달음이 날따라 굳어감에 따라 만주에서의 유일당운동은 한걸음 추진되여가고있었다.
김동삼, 리광민, 김원식 등의 적극적이고도 헌신적인 노력으로 1927년 4월 15일, 길림시 근처인 영길현(永吉縣) 삼구 은가촌내의 신안에서 유일당조직을 위한 제1회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였다. 정의부가 주도적역할을 한 이 회의에는 정의부의 중앙위원 11명과 정의부내 군사부측의 대표 12명외에 남만청년총동맹측의 대표 11명, 한족로동당(韓族勞動黨)대표 1명이 참가하였고 활동가 안창호와 신민부의 리세일도 참석했다.
그런데 이 제1회 대표자회의는 기대와는 달리 첫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하였다. 한족로동당의 대표이던 김응섭이 회의 첫날부터 이번 회의에는 독립운동단체의 대표들이 모두 모이지 않았으므로 회의가 성립될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섯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하여 히의는 4일째에 이르러 탈퇴하는 대표들이 나타났기에 더 진행할수 없었다.
허지만 이같이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당초에 목적했던바의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결심에서 노력은 계속되여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라는 유일당조직 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선출된 위원 5명중에 리세일도 들어있었다.
한편 전해에 발족된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에 이어 4월 10일, 상해에서 민족주의계(民族主義系)의 홍진과 공산주의계(共産主義系)의 홍남표의 명의로서 전민족독립당결성(全民族獨立黨結成)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틑날인 11일 상해의 삼일당(三一黨)에서 40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가지였다.
그리고 북경과 상해에 뒤이어 광동, 무한, 남경 등지에서도 각기 민족유일당운동이 발랄하게 진행되였는바 5월에 광동에서는 의렬단원과 혁명동지회성원이 주축이 된 광동촉성회가 나왔다.
물론 좋은일인데 김좌진은 지난해말에 손문의 <<삼민주의>>를 모방하여 <<民生會>>를 조직하려다가 실패하고보니 주장이 저마끔인 사람들을 하나의 리념에 결속시킨다는건 정말 간단치 않다는것을 절감하면서 저마다 주비회니 촉성회니 하는것을 내세우면서 발생하는 모순은 어떻게 해결해나갈가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복잡하면서 생각이 잘 나지 않는 일이였다.
그는 신민부의 농자금이 부족해서 나서서 달아다녀봐야했다.
그가 외출하고 없는데 하루는 웬 초면의 몸맵시 우아하고 나젊은 중국인 미녀가 산시(山市)에 나타났다. <<8로>>는 그녀한테 대체 누군데 무슨일에 왔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의 대답인즉 자기는 일면파(一面坡)에 집이 있는 곡아무개인데 김장군을 단독으로 만나볼 일이 있다는것이였다.
<<8로>>는 그녀가 혹시 일본령사관의 첩자가 아닌지 의심이 되어 알아보았더니 그녀는 다른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곳의 손꼽는 부호의 마님이였다. 장군이 그런 녀인과 거래있단말인가? 무슨필요있길래?
훗날 녀인이 다시오자 <<8로>>는 장군을 산시동쪽 철길북 칠가툰(七家屯)에 보내여 대면시키지 않았다. 그러면서 더 조사해보니 김장군이 농자금구하러 부자집에 몇 번 드나들었을 뿐 그녀와 사업관계를 버무른 것은 없었다. 대학공부까지 한 그 미녀는 김장군을 대하고보니 자기 남편은 무대랑같아뵈였던지 정을 싹 이쪽에 옮겨놓고 그러는 판이였다.
이성간의 정사만큼 남의 눈에 잘 발각되는것이 없다. 이와전와(以訛傳訛)라 방임했다가는 공연히 애매한 관계가 우습게 번져져 그것이 풍설로 되는 날이면 후과가 어떻게 될런지 모른다. 그래서 <<8로>>는 정신차리고 계획한대로 장군의 혼사를 서두르게됐다.
그네들이 물색해놓았다는 색시감은 해림에 살고있었는데 성명은 김영숙(金英淑)이고 인물이 좋았거니와 마음씨역시 좋았다. 몸이 호리호리하나 키가 커서 김장군과 짝이 맞을듯했다. 나이 24살인 그녀는 본관이 김해이고 고향은 김좌진이처러 충청도다. 그녀의 아버지는 <<3.1운동>>때 고향에서 있었던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곤봉에 머리를 맞아 골병들어 사망했고 어머니는 산후풍으로 죽었다 한다. 그래서 집에는 오빠 영기(永基)와 오랍동생 영욱(永旭)에 그까지 셋뿐이였다.
그때 서울에서 한창 중학을 다니고있었던 그녀는 량부모를 다 잃자 하는수없이 고향에 돌아갔다. 그러고보니 일제의 계속적인 수사탄압과 기아에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18살나던해인 1921년 그들 세오누이는 정든 고향을 버리고 두만강을 가만히 건너 이 북만주에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그런데 적수공권인 그네들이 여기로 올 때 려비로 꾼 빚을 달리는 갚아낼 방법이 없어 그녀가 자진 중국지주집에 하녀로 팔려가고말았다. 그때로부터 꽃나이의 그녀는 청춘도 사랑도 다 빼앗기는 혹사와 릉욕을 당해야 하는 불우한 신세로 되었다가 독립군이 해림에 와서야 해방받은 것이다.
김영숙은 처지가 이러한즉 자기가 만약 은인이고 만민이 우러르는 장군의 부인으로 된다면 그것은 기쁜일인데 조선에 아직은 본처가 살아있다니 량심에 걸리여 단정못하고있다가 마침내는 자신이 먼저 한번 오숙근에게 편지를 해보았다. 그랬더니 성품이 워낙 시원시원했던 오숙근에게서 인츰 그녀더러 자기는 막지 않을테니 대신 김장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답신이 왔거니와 장군앞으로도 파란많은 이 세월에 안해된 자기가 남편을 제대로 붙쫓지않아 미안하기 그지없다는 사과의 내용과 더불어 하루라도 빨리 재처를 해서 고생을 덜라는 편지를 해왔다.
김장군이 석두하자에 계시는 로모를 찾아가 재처를 하고싶다는 자기의 의사를 내비치였더니 어머님은 사내녀석이 족두리를 한번쓰지 두 번다시 쓰는법이 어디있느냐며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김장군이 다시금 우유부단하자 정로인은 더는 참지 못해 결을 냈다.
<<이눔아, 로모의 뜻을 거역않는다고 그게 효도질하는거냐? 종사(宗嗣)를 제대로 잇는게 바로 효도야!>>
장로들은 다가 말이 그러했다. 그네들은 석두하자에 가 장군의 로모를 설복하는 한편 장군이야 동의하든말든 준비를 서둘렀다.
장로들은 해림에 있는 정해식의 집북쪽구들에 간벽을 막고 신방을 꾸리였고 부인네들은 이불을 꾸민다 식기를 사들인다 옷견지들을 내놓는다... 새살림일절을 준비했다. 그래놓고는 새색시의 머리를 얹은후 돌연히 김장군을 불러다 한방에 가두어버렸다.
좀 희극적이긴 하지만 백야는 이렇게 별다른 례식도 없이 작수성례했으니 때는 바로 1927년 6월 1일(음력 5월 2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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