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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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9))
2014년 03월 06일 18시 59분  조회:2952  추천:2  작성자: 김송죽
 

9.

 

참화를 입은 조선!

왜놈은 네땅으로 물러가고 내나라는 내놓으라는 절규와 혈안이 되어 날뛰는 귀신들의 수파람소리에 아름답던 삼천리강산은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는데 국왕 순종은 마치도 쇠사슬에 매인 개처럼 일본사람의 손에 끌려나왔다.

1909년도를 잡자 그는 1월 7일 서울을 떠나 대구, 부산, 마산 등 남부조선일대를 돌아다니였고 그후에도 계속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평양, 신의주, 개성등지를 돌아다니였다. 반일의병투쟁을 그만두라 권고하느라고.

일본은 반일의병들의 머릿속에는 본건적인 충의충군사상이 박혀있다는것을 알고 그같이 묘한 회유책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해의 7월에 내각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처리방침>>이라는 새로운 결정을 채택한바있었다. 주되는 내용은 첫째로 조선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그에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는것이였으며, 둘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왕태자 리척(李拓)을 국왕의 자리에 올려놓자는것이였다.

그것은 그가 제애비고종보다 더 주대없고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정신적불구자와 같아 앞잡이로 쉽게 리용할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시급히 실현코저 1907년 7월 12일 통감 이또에게 <<한국처리방침>>을 곧 집행할것을 명령했다. 이또는 바로 그 명령에 좇아 7월 20일 고종을 왕의자리에서 정식 내쫓고 그의 아들인 리척을 왕의 자리에 앉히였다. (7월 18일에 고종퇴위를 결정하고 정식양위는 20일에 진행하였음)

이리하여 500년돈안 내려오던 리조왕조는 사실상 그 존재를 끝마치게 되엿고 고종의 퇴위를 계기로 리조봉건왕까지 완전히 저희들의 조선침략에 리용케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뒤이어 7월 24일 괴뢰정부에 조약을 강요하자 리완용을 비롯한 매국친일주구들은 <<지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동의했고 왕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였다. 그 조약이 1907년(정미)에 맺어지고 7개의 조항으로 되었기에 <<정미7조약>>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일본은 그 조약에 의하여 통감으로하여금 조선의 립법권, 내정권, 관리임명 및 파면권, 일본인관리임명권, 외국인고용의 금지권 등 여러가지 권리를 틀어쥐게되였다. 그리고 일본관리들을 리조정부와 지방관청(도감영) 각 부의 차관으로 들어앉히는 <<차관정치>>도 조작감행하게되였던 것이다.

(저 인제는 낯가죽가려운줄도 모르고 왜놈의 개가 돼서 괴뢰구실을 착실하게 하는 정부를 어떻게 내부로부터 고쳐놓지는 못할가.)

그 일이 막연하긴했지만 어찌보면 될듯싶기도 해서 좌진은 로백린과 짜고서 내각소장파(內閣小壯派)들을 선동해보았다. 그러나 일본인차관들이 이미 구석구석 들어가 박히여 실권을 잡았거니와 감시가 어찌나 심한지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뜻을 이루지 못한 좌진은 이번에는 학생이 수백명되는 오성학교의 교감직을 맡았다. 그러면서 전해에 안창호와 같이 조직했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책임까지 겸해 맡았다. 그것은 무실(務實), 력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 등 네가지를 정신으로 삼고 청년들의 인격수양과 단체생활의 련마, 일인일기(一人一技) 교육으로써 직업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청년운동단체였다.  

 

이무렵 반일의병대에서는 보부상들을 서울시내에 자주 들여보내여 적정을 정탐하게하는 한편 애국운동단체들과 련계지으면서 무기를 구입했다.

좌진은 자신의 직무상 편리를 리용하여 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서 비밀리에 내보내군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3월 25일 지면에 의병장 김수민이 서울에 들어가 비밀리에 많은 무기와 기타 물품들을 구해가지고 장단지방으로 갔다고 보도했다.

한편으로 일제의 조선병탄계획은 최후단계로 들어갔다.

리완용괴뢰정권의 존속은 대내외적으로 조선을 명색상 <<독립국>>으로 부르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려면 이 괴뢰정권마저 완전히 없애버려야 했다. 그래서 바로 이해의 3월달에 일본은 저희들의 외무성 정무국장인 소찌 네쯔기찌로하여금 <<조선병합안>>을 만들게했고 4월 10일에는 가쯔라, 고무라, 이또 세 우두머리가 도꾜에 모여 <<레이난자까 3두비밀회의>>를 열고 <<한일합방>>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기에 이르었다.

그러다가 두달지나 반일의병투쟁이 이젠 기본상 탄압되였다고 여겨지자 7월 6일 일본내각은 <<한국합병에 관한 결정>>을 채택, 그것을 일본정부의 <<대한정책>>으로 확정하였다.

일본은 이 결정에서 <<한국합병을 단행할 것, 한국을 병합하여 제국반도의 일부로하는 것은 반도에서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외교문서>>(일본) 제42권)

바로 이달에 또한 조선의 사법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말았다,

<<통탄할 일이구나! 우리 조선은 무엇이 남았느냐? 속은 다 털리워서 이젠 껍데기만 달랑 남은 게딱지로 되고말았구나!>>

좌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그의 눈에 조선은 마치도 잔명마저도 끊으려드는 맹수의 피묻은 발톱아래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떨고있는 한 마리의 가련한 토끼와도 같았다.

경주에서 왔던 박상진(朴相鎭)은 이날 좌진이와 함께 오래도록 울쩍한 기분속에서 나라운명을 걱정하다가 쓰라린 가슴을 안고 돌아갔다. 하나의 우국지심은 이들을 차츰 떨어지기 어려운 막역지우로되게 하였다.

그후 며칠안돼서 좌진은 또 로백린을 통해 <<한성신보>>의 리창봉을 면목알게되여 한동안 그와 거래하게 되었다.

리창봉이 간부를 지내고있는 <<한성신보>>는 처음 일본사람이 일문(日文)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독립신문>>보다 한해 앞서서 1895년1월 22일부터 조선말판을 발행하기 시작한 어용신문이였다. 일찍이 서울에 와있던 재일(在日)신문의 특파원들과 <<한성신보>>의 기자들은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조고구락부(操觚俱樂部)>>라는것을 조직한바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명색이 문필을 위하는 구락부였지 기실은 취재나 순순한 기자로서의 친목단체라기보다는 일본의 관리와 군인들이 모여들어 입방아를 찧는 정치적사교장소였던 것이다.

<<리선생! 듣자니 신문을 보고나서 마음이 동해 의병에 나선 사람이 적잖다는군요. 내가 보건대는 황성신문이 제일 괜찮습니다. 그게 비록 면이 작긴해두 볼만한 글을 많이내고있으니깐.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아아, 국가의 운명이 불행하여 나라의 형편은 닭알을 쌓아놓은것과 같은 위험속에 놓여있고 인민들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동포들아, 한마음한뜻으로 자주자강하여 외국의 모욕을 받지 말게하자.> 얼마나좋습니까.>>

<<그거야 몇해전 <대한매일신보>에서 낸 글이 아닙니까?>>

<<아마 그럴겁니다. 난 이건 거기서 보고 기억해둔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그 신문도 황성신문처럼 좋은 깃발을 들었단말입니다. 리선생님도 좀 그렇게 하면 안되겟습니까?>>

좌진은 무문곡필(舞文曲筆)하면서 비루해가는 이 언론기구를 한번 바로잡아보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아름다운 념원일뿐이였다.

이때의 통감부가 지악스러운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만들어내여 조선판도내에 있는 모든 신문을 비롯한 일체의 언론기구에 대한 감독과 통제가 아주 심했던것이다. 그러한즉 그 자신이 설사 리사(理事)나 신문장이 된다한들 무슨 뾰죽한 수가 있겠는가.

<<신문지법>>이란 1907년(광무11년) 7월 24일 법률제1호로 공포되였다가 1908년(륭희2년) 4월 20일에 개정공포된 이른바 <<광무신문지법>>을 말하는 것으로 21조에는 아래와같이 되어있었다.

 

<<내부대신은 신문지가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한다고 인정할 때에는 발매 발포를 금지하여 압수하며 또는 발행을 정지 혹은 금지할수 있다. >>

 

여기서 말하는 금지는 페간, 정지는 정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 <<신문지법>>을 내오기전부터 벌써 배일적인 론조를 거리낌없이 퍼뜨려 저희들의 침략정책수행에 가장 큰 방해로 여겨왔던 <<대한매일신보>>의 기염을 꺾어버릴 복적으로 전에 <<독립신문>>을 탄압하기 위해 서재필을 추방했던 방법을 적용하여 영국인경영자 배설(T.E.Betbell)과 주필 량기탁에 대한 탄압을 계획적으로 획책했는바 법놀음 끝에 량기탁은 무죄로 풀리였으나 배설은 끝내 잘못되였던 것이다. 통감부의 고소로 하여 그는 지난해인 1908년 6월에 주한(駐韓)영국총령사관에서 내린 3주간의 금고형과 당국의 소환에 응한다는 보증금을 내고 유죄로 판결받아 상해로 송치되였다가 형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는데 일본의 끈질긴 탄압으로하여 치른 옥고가 풀리지 않아 약 2개월전이 되는 5월 1일에 37살의 젊은나이에 숨지고말았던 것이다.

<<보시오.감히 간섭하기 어려운 신문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우리 사람들이 꾸리는 신문에 대해서야 더 말할것 있습니까?>>

리창봉은 <<대한매일신보>>가 당했던 필화(筆禍)를 구구히 말한 끝에 <<제국신문>>도 얼마전에 정간처분을 당했노라면서 자기는 속수무책임을 표명했다.

일본은 갑작스레 입만 벌리면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며>>,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하여 통감정치를 실시한다고 떠벌리던 이또를 해임시켜 추밀원의장으로 임명하고 부통감으로 있었던 소네아라스께를 그의 자리에 올라앉히였다. 환갑이 다된 소네는 자국에서는 이름있는 관료파의 수령이였다.

좌진이는 개구리가 궁둥이를 땅에 붙일때는 뛰자는건데 이건 또 어쩌자는 수작일가고 일제의 변덕스러운 처사를 수상쩍게 여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거다.

 

란국(亂國)에 가환(加患)이라, 9월에는 콜레라가 발생해 온나라에 만연되는통에 더구나 주검을 쓸어낼 지경이 되었다.

어느날 좌진의 부인 오씨는 집에 붙어있을사이없이 나돌고있는 남편의 축간 몰골을 보고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당신도?....>>

그러건만 좌진은 너무나 무감각하게 웃어넘기는 것이였다.

<<근심마오, 옥제님은 날보구서 <좌진아, 넌 아직두 해야할 일이 쌔쿠버렸으니 더 살아야 하겠구나.>했다우. 난 쉽게 죽지 않을게요. 시름놓으라니까.>>

아닌게아니라 나라와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것을 보고 총 한번 원쑤의 숨통을 못 겨누어보고 너절한 병 때문에 죽는다는것은 너무나도 원통한 일이였다. 겉으로는 꿈만해하는것 같아도 기실은 사정없는 이 무서운 전염병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있는 좌진이였다.

소름끼치는 9월이 지나가고 10월을 잡는 어느날 저녁켠에 채기두가 서울에 다시 나타나서 좌진이한테 한가지 일을 알려주었다.

<<안계훈이 죽었소!>>

<<뭐랍니까? 저 담사리의병장말이지요? 아니 그도 그눔의 몹쓸병을 했단말인가요?>>

<<아니요, 그래죽잖구서 왜놈의 손에 잡혀 죽었소. 지난달 스므닷새날 광주서.>>

<<체포돼서?!... >>

<<그렇소. 담사리의병대에서도 놈들의 회유에 걸려 대오를 버리고 나가는자가 많이 생기게됐다오. 그래서 내부가 혼란해졌는데 그 사람은 그걸 수습해보려다가 끝내 어쩌지도 못했다누만. 그레서 에라모르겠다 숨이나 좀 돌리고봐야겠다며 집에 와 숨었다가 그만 붇들리고말았다나, 제길헐. 어느놈이 밀고를 했는지 륙시를 해치워야지.>>

<<변절자는 잡아치워야합니다. 그분의 원쑤는 살아있는 우리가 갚아줍시다.>>

좌진은 얼굴에 침통한 기색을 지었다. 그는 두해전에 채기두를 통해서 담사리의병장 안계훈을 좀 면목알게 된거다.

전라도지방에서는 머슴군을 <<담사리>>라했다. 그리하여 그들로 조직된 반일의병대를 담사리의병대라불렀다.

안계훈은 보성군 봉덕면 법화리에서 살던 머슴군(담사리)이였데 다른 지방에서 반일의병투쟁이 일어난것과 때를 같이하여 보성지방의 농민 황두일과 남평군 농민 권녕희 등과 손잡고 머슴군의병대를 조직했었다.

그들은 적들의 탄압이 극심한 조건하에서도 광양군 백운산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본침략군과 민족반역자, 악질적인 지주들을 처단하였고 적이 설치한 기관들을 파괴해버렸다. 담사리의병대오에는 농민외에 어민들도 많았기에 륙지로부터 해상까지 활동범위가 넓었다.

지난 4월경에 <<대한매일신보>>는 담사리의병 40여명이 일본침략군 와다다로가 대마도에서 여러 가지 상품을 배에 싣고 경상도 통영으로 가는것을 습격소탕하고 상품을 모조리 빼앗은 일과 초도와 렬도에서 일본어선을 습격한 일들을 보도한바 있었다.

용감했던 담사리의병들이다.

좌진은 담사리의병들이 <<일진회원>>들에게 일본침략자 한놈 죽이면 과거의 죄과를 용서하고 두놈 죽이면 상금 1백원 주겠다고 통고했던 일을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그네들의 실패를 가슴아파했다.

반일의병대가 북부국경의 회령읍을 점령해보려고 들이쳤다가 도리여 대패하여 형체마저 없어지고말았다는 불쾌한 소문이 난지도 어언 4개월. 계절이 바뀌여 날씨가 차가와지고있는 10월말의 어느날, 대구에 갔다가 방금 돌아온 좌진은 그길로 동지들을 만날일이 있어서 태극서관(太極書館)으로 가다가 길에서 이또가 안중근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였다.

이또는 일본과 로씨야간의 관계를 조절하러갔다가 할빈역에서 목숨이 끝장난 것이다. 명치유신이래 헌법작성에 성공하고 또한 수상으로 되었던 그는 일본에서는 다시구하기 힘든 정치가였고 공신이였지만 2천만조선인민에게는 철천지원쑤였던 것이다.

좌진은 그의 죽음이 속시원했다. 그러면서 원쑤에게 응당한 징벌을 안긴 안중근이 고마웠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처사에 격분하여 애국문화운동을 해오다가 조선군대강제해산책동을 계기로 서울에서 일어난 시민과 군인들의 반일폭동에 충격받아 1907년말부터 반일의병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산간지대인 강원도지방에 가 의병투쟁을 확대발전시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는 연해주로 건너가 거기서 1908년 리범윤, 최재형 등과 함께 300명가량되는 의병대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리남기가 있는 노랑포수대와 더불어 전전하다가 이듬해인 1909년 6월에 이르러 다시 두만강을 건너 경흥습격전을 단행, 적군 50여명을 섬멸해버리는 승전을 하고는 그 기세로 모험적인 회령공략전을 벌렸다가 예상밖으로 다른 의병대의 후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니 그만 대패하여 병사를 거의잃고 그자신은 몇 명안되는 부하와 함께 겨우살아남았던 것이다.

한가슴 가득 복수심이 불타고있었던 그는 동지 몇 명과 함께 공모하여 복수를 오래도록 기도하다가 10월 26일에야 비로서 절호의 기회를 만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를 할빈역에서 처단해버렸던 것이다.

조국은 지금 의사들의 성결한 죽음을 얼마나바라고있는가!

그의와 같은 열혈투사가 많아야 했다. 좌진의 가슴속에 안중근의 형상은 민족영웅으로 우렷이 부각되였다. 하여 그는 안해앞에서 자기도 어느때든 안중근이와 같은 공을 세우기 위해 몸을 바치리라 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려는 좌진이였다.

좌진은 채기두로부터 어떤 곳에서는 의병을 조직하려 해도 손에 잡을 무기가 없어 행동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돈이 있어야했다. 돈이 있어야 무기를 구입할수 있지 안은가. 돈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 좌진은 돈을 벌기 위해서 관철동 대관원자리에다 야창양행(冶昌洋行)이란 물감가계 하나와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꾸리였다. 그것은 실로 좌충우돌하는 박투의 생애였다.

좌진은 이 두곳을 련락점으로 삼고 동지규합에 힘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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