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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연수(延壽)의 가신구는 해림쪽에 비하면 한심한 오지였다. 그래서 여기가 조용하고 안전하리라 생각했는데 되려 보슬비를 피하려다 우박맞는 격이 되고말았다. 여기서도 토지개혁이 한창이였다. 해림처럼 큰바람(刮大风) 군중투쟁으로 반간청산(反奸淸算)을 했고 뒤이어서 성분획분, 그러면서 도끼로 찍고 파내는(砍挖) 투쟁을 했다. 이것은 지주를 투쟁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여지껏 기생충생활을 해온 자들의 경제기초를 끊어버림으로써 다시는 농민을 압박착취를 못하게하자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것이 대중적인 운동이다보니 인식부족으로 한심하게 잘못 나간곳이 있었다. 강석이네 집은 우선 성분부터 잘못 획분받았다. 부농이라는 것이다. 제 땅도 없고 농군도 두지 않았고 남을 착취한적도 없는데 부농이라니 웬 말인가? 그래도 그곳 빈농회의 운동자가 성분을 그렇게 매기니 방법없었다. 호주였던 김기철이 사망했어도 조선에 있을적에 잘살았을게 아니냐 그래서 대학공부까지 한게 아니겠느냐 하는것이 리유였다. 그래서 강석이 역시 지주와 같이 청산대상이 되고말았던 것이다.
연수골은 북만치고 두 번째가라면 서러워할 지경 빈궁하기 짝이 없는 곳이였다. 그런 곳에 성분이 빈한 인간들의 계급각오란건 외려 말할수없이 더 높은것만 같았다.
1947년 늦은봄의 어느날, 이 마을 투쟁대상 다섯호는 온 식솔들이 말끔히 끌려나와 투쟁대에 올랐다. 강석이와 양모도 그 장면을 면치 못했다.
(내가 어쩜 인민의 원쑤되나? 내가 대체 무슨죄있다구?)
강석이는 아무리생각해봐야 억울하기만 할 뿐 일호반접도 접수되지 않았다. 무엇이 계급이고 무엇이 압박이고 무엇이 착취라는건 지금 적극분자라며 나서서 우쭐대는 사람보다도 썩 일찍부터 알게되였던 강석이다. 위만때 벌써 <<불평등가>>를 부르면서 압박이 없고 착취가 없고 누구나 평등하게 살아야하는 사회를 동경해온 강석이가 아니였던가. 그러던것이 이렇게 졸지에 인민의 원쑤로 몰려 투쟁대에 오를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했으랴? 과연 알고도 모를게 인간세상이였다.
감독대상에 대해서는 <<피빨아먹은 거마리>>요 <<요물잡귀>>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근본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
<<난 거마리아니다! 난 요물잡귀도 아니다! 빌어먹을것들가, 나를 내놔라! 나를 내놔라!>>
강석이는 히스테리모양으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광기를 부렸다.
<<주둥아리살아 아직두 악다구질이냐? 요 빌어먹을 년!>>
감독하고있던 사나이가 울라초방치로 그녀의 머리를 까놓았다.
강석이는 정신이 아찔했다. 꼭뒤가 터져 단통 피가 흘러내렸다.
그를 때린 사나이는 쓰러진 그를 내쳐두고 가버렸다.
이틑날 원렬이가 누나보러왔다가 누나의 터진 머리를 보고 눈물이 그렁했다. 강석이는 자기가 잘못넘어져서 머리를 상했노라 오랍동생을 속히였다. 그리곤 그가 아침도 못먹고 굶었다길래 누룽지를 훔쳐서 쥐여보냈다.
며칠후 공작대가 오자 사정을 말해 강석이는 빈농회에 빼앗겼던 옷을 되찾고 강제로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워낙 그는 그러한 벌을 당할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강석이는 살림살이 잘할줄아는 근면한 처녀로 자라났다. 겨울에 신을 양말, 버선이 없으니 삼실을 내여 손수 집사람들이 신을 양말을 뜨고 삼베길쌈도했다. 그리고 베개수놓이를 해서 딸시집보내는 집에 주고는 그대신 땔나무 한발구씩 받았다.
이렇게 하자 마을에는 그의 본을 받아서 근면해지는 녀인들이 있게 되었다.
강석이는 무정하고 랭혹한 정치대우로 하여 가해지고있는 타격과 그때문에 한겹두겹 쌓여지는 고뇌에서 해탈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서로가 척진일 없거니와 원한품을 하등의 리유도 없으면서 경계하고 소원하는 사람들과 되도록 가까이하면서 그들에게 자기가 그처럼 잘알고있었던 혁명노래를 배워주어 부르게 했다. 그래서 차츰 친구가 있게되였고 마침내는 군중의 <<량해>>와 <<관대>>를 받아 선전대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선전대에서 사실은 골간의 역할을 한 그녀는 수차의 공연대회에서 환영과 절찬을 받았다.
그런데 양모 김분희는 투쟁받을 때 놀래여 심장병이 나 드러눕고는 일어도 못나고 원하품은채 저세상으로 가고말았다.
1948년, 그해의 11월에 전 동북이 완전히 해방됨과 함께 동북각지에서 특히는 조선인마을들에서 전선을 지원하여 전국을 해방하자는 힘찬 구호밑에 집집마다 앞다투어 참군하는 경상이 나타났다. 이때 원렬이도 열조에 잠겨 용약 탄원해나섰는데 아버지를 닮아 사나이답게 의젓해서 15살의 소년이였지만 뽑혀나갔다.
언니 영조는 언녕 시집간 때였다. 원렬이마거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해 전선으로 나가고보니 외롭게 남은 강석이도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했다. 하여 이듬해 20살나이를 먹자 강석이는 들어오는 청혼을 받았다. 당자는 위정구(魏正久)라는 지식있는 청년이였다. 그의 외삼촌이 사망한 강석의 양부와 숙친한 사이였고 그 역시 독립군이였는데 둘을 맛세웠던 것이다.
강석이는 위정구와 결혼하고 인차 연수를 떠나 북조선으로 가 함흥근처의 어느 한 마을에 자리잡았으니 때는 바로 1950년 2월경이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냥 살자니 배고프고 쪼들려 살멋이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돌아오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석이는 어느날 계책을 써 남편몰래 홀몸으로 먼저 두만강을 헤염쳐 건너오고말았다. 그러고는 편지로 알리여 남편도 어서 건너오라했다.
그런데 남편은 건너오지도 못하고 조선전쟁이 일어나니 총동원령에 의하여 총을 메고 전선으로 나갔다. 이것이 영결이 될줄이야! 위정구는 조선전쟁이 끝났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간염으로 앓다가 1954년에 그만 거기서 사망하고말았던 것이다.
강석이는 중국으로 되돌아온 그해의 12월 24일에 귀동녀를 낳았고 그 딸을 애지중지 기르면서 여지껏 함께 살아왔다. 딸은 그의 기둥이자 희망이였다.
한데 딸을 기르면서, 그녀가 살아오면서 치른 경난역시 눈물겨웠다.
어디에 갈가? 한마디로 말해 연수는 원한만이 있을 뿐 정은 꼬물만큼도 없는 곳이였다. 그래도 정든 곳은 해림이였다. 두문이오빠가 횡사를 당했어도 두생이오빠가 미쳐죽었어도 양부가 횡래지액으로 타계의 사람이 되었어도 그리고 지금도 의연히 암해분자의 마수가 뻗치고있다해도 그는 그곳이 좋았다. 그곳은 강석이가 태여난 곳이거니와 독립군의 발자국이 수없이 찍힌 곳이였고 산하에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고 노래소리 슴배인 곳이였다. 더구나 그곳에는 날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그리워지게 되는 생부 김장군의 구광(舊壙)이 있는 곳이였다. 제정의 삼엄한 경계속에서도 살아있는 독립군들이 년년이 참배를 끊지 않아 적성(赤誠)이 쌓이고 구슬픈 회억이 묻혀진 곳이거늘 강석이가 거기를 버리고 그래 어디에 가 몸과 마음의 안녕을 찾는단말인가?
해림의 산시에는 김좌진장군 생전의 호위병이였고 강석이 출생때 안아왔던 강익선일가가 아직 그대로 눌러있을 뿐 그 외로는 독립군가정이란 더 찾아볼수 없었다. 그리고 칠가툰에는 김장군이 생전에 양아들로 삼은 중국사람 손진청(孫振靑)이 아직도 살고있었다.
여러해만에 다시나타난 강석이는 그들을 찾아 만나보았고 함께 구광에 가 제도 지냈다. 그러면서 강석의 정체를 어디까지나 숨겨주고 서로간에 인신을 보호해주자는 밀약도 단단히 있었다.
최후로 남아있던 비밀결사의 독립군들은 싹 흩어졌다. 조선이 광복되여 남북으로 갈라진 이때에 중국에서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싸운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자들을 타국인으로 인정하게 되었기에 항일공훈자로 취급받지 못할뿐만아니라 오히려 력사적원인으로 하여 반공분자, 변절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받게되였다. 이런 환경에서 여생이나 무난히 지내다가 인세(人世)를 하직하고자 은신처를 찾아서 어떤이는 심양으로, 어떤이는 관내로, 어떤이는 연변으로, 어떤이는 내몽골로 제 가고푼데로 가버렸다.
강석이는 1953년도에 호구(호적부)를 연수에서 산시가 가까운 목단강으로 옮겨왔다. 인해속에 묻혀 살면 인신이 퍽 안전하리라는 생각에서 움직인 명지한 처사였다. 그런데 아이달린 녀성의 몸에 의식주해결이 난제였다. 어떤때는 정식공모집이 있었지만 성분과 력사를 캐니 기회를 잃고말았다. 장기계약공질도 몇해간밖에 못했다. 그녀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능력과 힘이 당하는 일이라면 가릴것없이 닥치는대로 해야만했다. 남새장사, 과일장사, 파지줏기, 길닦기, 벽돌운반... 무슨일이면 안했으랴. 어떤 때는 양부가 생전에 좀 배워준 믿천으로 한족마을을 돌면서 수의질도 해보았다. 그랬어도 빈궁은 종시 떠날줄을 모르고 그녀를 지꿎게 괴롭히였다. 어떤때는 아이가 앓아도 약 한봉지 사먹일 푼전마저 없어서 눈물이 났다. 그래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사고 통사정해서 의사의 동정을 받기도했다. 그랬은즉 그녀에겐 생이란 그야말로 지겨운 박투였던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이 대상자를 구해줄터이니 과부로 늙지 말고 재가하라고 권도했다. 아주 영 맘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내내 숨어 살아야만했던 그녀의 처지에서는 그렇게 할수도 없어서 아예 영 단념해버리고말았다. 남들과 같은 부부지락이란건 바라지도않았다. 환멸과 지리한 고독은 그녀로 하여금 날이 갈수록 우렷해지는 추억속에 묻히여 눈물겨운 생을 영위하는 강의한 녀인으로 만들었다.
해방군에 나가있는 원렬이가 누님을 생각해서 몇푼안되는 생활금을 받아서는 아껴쓰며 모았다가 부쳐보내군 했다.
한번은 그한테서 제대하여 직장을 찾으려해도 성분 때문에 애먹으리라는 편지가 와서 강석이는 신바닥 닳도록 뛰여다닌 끝에 성분을 부농에서 중농으로 재평받았다.
그런데 제대하여 치치할(齊齊哈爾)강철공장에 배치받아 거기서 일을 하게되였던 원렬이는 1958년 여름에 강에서 목욕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 불행히 죽고말았다. 양부의 대는 이렇게 끊어지고말았다.
<<아아, 어쩌면?....>>
정신적의탁이 부러진 강석이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양모한테는 하나뿐이던 오랍동생은 어디로 갔을가? 풍문에 들으려니 1933년 북만에서 한국독립군이 해체될 그때도 동지들과 함께 상해로 이동하여 군관학교를 다녔고 <<7.7사변>>이 나서는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여 국민당의 6개전구 13개성을 돌아다니다가 1941년 봄에 북상항일을 하고저 태항산으로 갔다고한다. 그의 모색이 어떤지 강석이는 기억이 없다. 그래도 인연은 있었다.
60년대에 중국대지에서 흉년이 들어 가장 어려울 때 강석이는 몇축 생활에 보태쓰라면서 보내는 꽤 많은 액수의 돈을 받았다. 바로 그 사람_ 양모의 오랍동생이 보낸것이였다. 그걸 전해주는 사람은 이전에 독립군에 있었다는 50대의 사나이였는데 강석이한테 그저 그가 북경 어느 대학에서 사업하고있고 무사히지낸다는것만 알려줄 뿐 이름도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다. 억울하게도 김좌진이 친일파라는 헙악하게 날조된 말이 나도는 세월이였기에 김강석이와 거래라도 있게되면 혹시 영향이 있을가봐 그러는 모양이였다.
강석이는 더욱 고독감을 느꼈다.
독립군출신의 사람들이 해림일대에서 마지막 흩어질 때 김좌진장군의 구광주위 네면을 관내, 연변, 북만, 내몰골 이렇게 네구역으로 정해놓고 살아있을 때까지 와서 제를 지내기로 약속한바있다. 그리고 <<○○○郵甁>>이라 이름지은 유리병을 고정지점에다 파묻어 쪽지를 넣어두는 방법으로 서로간에 련락을 하기로했다. 그래서 유해도 없는 장군의 구광으로는 여전히 의로운이들의 발길이 닿고있었는데 제를 지내러 오는이마다 갖고 온 술잔, 술병과 접시같은 제구들은 구광주위의 분토에 묻어놓고 돌아갔다. 그래서 오는이마다 그것을 파보고는 서로의 생사여부를 알군 했던거다.
리달문이 강석이가 목단강에 온것을 알게 된 후에 서로 련락이 생겨 그후부터는 오가는이마다 들리게 되었다. 만나서는 눈물짓지 않는이가 없었다. 강석이한테는 그들이 바로 육친으로 여겨졌다.
그한테는 양부께서 물려준 귀중한 유물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김장군이 1921년말에 상해림정으로 갔을적에 8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였다. 시국이 좀 안정되자 강석이는 어느해 화가에게 그 사진을 주어 작업비를 지불하고 생부의 초상만 한 장 크게 그리였다. 그는 그것을 액틀에 넣었다. 그러나 감히 벽에다 걸지는 못했다.
강석이가 목단강에 자리잡은 그해 리달문이 다른 로인 네분과 함께 왓을 때의 일이다. 그때 강석이는 꽃술잔을 갖고 산소로 갔다가 하마터면 경칠번했다.
<<이눔아, 네가 그따위건 왜 갖고 왔느냐?>>
리달문이 때리겠다고 주먹든것을 옆에서 말리였다.
<<걔가 법모르구 그러니께 관두라구.>>
너하고 말하는건 그눔아(장군)하고 말하는것 같구나 하던 로인, 83세의 허리꼬부라진 리달문할아버지는 그렇게 성질은 변함이 없었던거다. 그는 그번이 마지막걸음이였다.
한 독립군 늙은이는 왔다가 시내사람의 적바른 식량을 자기가 축내는게 미안해서
<<석아, 궈테(강낭떡)찌면 모자란다. 시래기넣고 쪄먹자.>>면서 장군딸이 가난에 쪼들리는것을 보고는 눈물지었다.
한번은 독립군 셋이 누룽지를 주머니에 넣어 자시면서 먼데서 찾아와 제를 지냈다. 그때 강석이는 벽돌공장에서 막일을 해서 돈푼이 있었다. 그래서 이밥에 된장국을 해서 대접했고 그네들이 돌아가며 자시게 될 누룽지를 잘 볶아드리였다.
심양에서 온 독립군 늙은이 한분은 본바탕이 알아보기 어려울지경으로 깁고 또 기운 옷을 입고서도 술 한병 사들고 제지내러 오시였다. 그 정상에 목이 메여 강석이는 울었다. 참말로 자기의 뼈라도 뽑아서 감사드리고싶었다.
내몽골에서 왔던 늙은이 한분은 장군묘를 참배하고나서 목단강에 들렸는데 려비가 없어 걸어서 가려했다. 그러는것을 눈치챈 강석이는 이웃 권동한씨 집에다 장독을 팔아 그 돈으로 려비를 마련해드리였다. 그리고도 밀가루를 볶아드려서 귀로에 잡수시게했다.
로인은 목메여 락루했다.
<<와서 너를 보니 반갑구나. 안 올라니 보고십고. 보면 시름지우고....>>
그 독립군로인 역시 그번이 마지막이였다. 어디에서 잠드셨는지?
오는이마다 태극기 감춘 베개와 장군의 초상화를 놓고 감구지회에 잠겨 회한의 눈물을 흘리였다.
잠을 자야 꿈을 꾸지
꿈을 꿔야
안중근과 김좌진을 만나보지
장군님이 말하시기를
너희들은 남북통일 통지서를 가지고
염라대왕을 거쳐 오라고 하셨지
이라이라 이 일을 어이할가
살자하니 년령이 제한있고
죽자하니 장군님의 대렬에
가서지를 못한다지
이라이라 이 일을 어히할가
천지아득 하늘땅이 캄캄하도다
이것은 내몽골에 가 눈을 감은 정해식로인이 1950년에 장군의 뫼자리에서 지은 노래인데 참배하러 오는 다른 늙은이들도 불었다.
독립군들은 년년이 참배하러오다가 1967년후로는 발길이 끊어졌다. 아마 모두 이젠 타계로 가버린 모양이다.
에 필 로 그
장군의 옛 구광은 아직도 모양 그대로 남아있다.
60년대초에 장군의 이 구광가까이에는 봉분도 없이 자그마한 콩크리트비석 하나가 일어섰다.
묘비는 간단했다.
<<함북도 온성군사람 조공지묘>>
별세한 날자는 1961년 10월인데 이듬해의 청명절에 그의 아들이 세운것이다. 따져보니 고인은 장군보다 한 살손우. 분명 장군의 수하에 있었던 독립군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으면야 왜 하필 남의 뫼자리곁에 와 묻히랴. 저승가서라도 장군을 만나뵈고푼 소원 이루고저 평토장을 해서라도 그렇게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게 아닌가.
한데 정녕 그러하다면 그 독립군의 아들은 아버지의 비석을 세울수 있건만 이 강석이는 왜 아버지의 비석 하나도 맘대로 세울수 없단말인가?
전에 참배하러 찾아오던 독립군들은 나무토막과 판자로 장군의 묘비를 만들어 참배때면 그것을 세워놓군 했었다.
강석이는 그 묘비를 비닐박막으로 정히 싸서 구광에 묻어 여지껏 건사해왔다. 그러면서 딸 련홍이가 8살되여서부터 손목이끌고 함께 다니였다. 그러기를 이제는 수십년, 허지만 여직 남한테 들킨적이라곤 한번도 없었다.
비석은 일어서지 못했어도 여기는 거룩한 넋이 남아서 침묵을 지키는 곳이다! 독립군들이 뫼자리앞을 닦고 떠다놓은 잔디풀과 그녀가 심어놓은 코스모스는 해해년년 묘소를 장식하고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냐, 고인된 장군은 구천에서 내려다보고 웃음짓는다.
오, 이젠 새날이 밝는다고 산새는 우짓는구나!
김송죽
쟈므스에서
199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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