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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후 당내고층 간부들의 회억록열조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래원:북경일보. 작자:리해문(李海文ㅡ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연구원)
번역글
핵심제시:“사인방”을 분쇄한 후,특히 당11계3중전회이후,우리 당은 사상을 해방하면서 실사구시하는 사상로선의 추진으로 인하여 당사연구방면에서, 특히는 문혁시기 극좌로선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궤도에서 연구하게 되었는바 당내의 고층령도중에서 회고록을 쓰는 붐을 이루었던 것이다.
20세기 80년대 대표작:리유한(李维汉)의《회억과 사고》
리유한은 모택동과 동창인바 신민학회성원이였고 근공검학으로 유학을 했다. 건당이래 중국혁명을 몸소 겪었다. 1979년, 86세의 고령에 이르어 그는 당내중요직무를 내놓고 중앙통전부고문이란 이름만 걸어놓고는 당사연구에 전력했던 것이다. 회억록의 준확성을 기하여 그는 라장룡(罗章龙)을 전국전협위원으로 배치하여 북경혁명박물관에서 사업하게끔 하여 그와 함께 력사연구자들과 여러차의 모임을 가졌거니와 중앙당교 등 단위들의 전문인원이 나서서 자기가 구술하는 것들을 상세히 정리하게끔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온것이《회억과 사고》였다. 이 책은 회억록이면서 또한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저작으로도 되고있다.
그가 이 책을 쓰는데 세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첫째는 집체를 위주로 하면서 개인과 적당히 련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실사구시적으로 력사의 진짜면모를 써내는 것이며, 셋째는 경험총결을 중시하는 것이였다. 그는 이 회억록에 1918년부터 1964년기간에 겪은 주요한 큰 사건들을 엮었다. 한데 리유한(李维汉)이 1984년에 병으로 불행히 돌아가는 통에 그만 계획대로 책을 다 쓰지 못한것이다. 종교와 민족사업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생전에 완성한 부분만을 묶어 1986년에 <<회억과 사고>>라는 이름으로 출판 된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 80년대 가장 대표성을 띈 당내 고위층 지도자의 회고록이다. 그외에 <<섭영진회억록>>과 <<서향전회억록>>도 나와서 역시 전국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13차 당대회이후 당내고위층 인물들이 그같이 붐을 이룬 회억록출판은 당의 세력을 과시한것과 다름이 없다.
1,박일파(薄一波)의 《약간의 중대한 결책과 사건회고>>.
1987년 당의 13대후, 대량의 젊은이들이 당중앙의 령도직무를 맡게되자 박일파는 어깨가 가벼워졌다. 하여 그는 1988년4월부터 중앙에서 비준한대로 《약간의 중대한 결책과 사건회고>>를 쓰기시작했던 것이다. 이 책은 1949년부터 1966년기간, 1991년, 1993년으로 나눠서 상하 두권으로 나왔다. 박일파(薄一波)는 당의 8대정치국위원으로서 장기간 국무원의 부총리직에 있었다. 하였기에 그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당안들을 볼수 있거니와 중요한 사실들을 많이 알수있게 된 것이다.
2、양상곤(杨尚昆)、황극성(黄克诚)、호교목(胡乔木)、리설봉(李雪峰) 등 8대중앙서기처 성원들의 회억록.
당의 8대후에 성립된 서기처에 대해서 모택동은 그것은 당중앙의 판사기구라고 강조하면서 무슨일이나 다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중앙의 일은 그들이 하고 중앙의 명의로 문건을 내릴수도있다”고 했다. 서기처의 지위와 작용은 그같이 중요했는바 무릇 당,정,군 각 방면에서 중앙상위에다 올리는 보고와 문건은 우선먼저 서기처에다 올려야 했다. 서기처는 일반문제들을 토론결정하며 즉시 하달하여 아래에서 그를 집행하도록해야했다.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서기처는 우선 의견을 중앙상위에 올려 토론 결정하도록해야 했다. 중앙정치국위원 다가 북경에 있는것도 아니고 지방사업을 주재하길래 중요한 회이가 아니고는 일반적으로 북경에 오지 않는 것이다. 하기에 정치국은 전체회의를 소집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여 서기처가 많은 사업들을 하게 된 것인데 매주 회의를 3,4차 하다보니 모택동의 음성을 많이 듣으면서 집접적인 령도를 받게되었던 것이다. 지어는 중앙의 결책같은것을 정치국의 어떤 사람보다도 더 빠르게 알때가 있기도했다.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황극성대장(黄克诚大将)의 회억록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 황극성대장의 회억록을 보면 반성이 솔직하거니와 기개가 강경하다.
양상곤(杨尚昆)은 1995년에 회억록을 쓰기시작했는데 후에는 중앙문헌연구실 동지들의 방조를 받아 그것을 완성할 수 이었다. 그는 1998년에 서거했다. 중앙문헌출판사에서 그가 쓴 책의 이름을 <<양상곤회억록>>라 지어 출판했다. 그 책 말고도 후에 <<양상곤일기>>가 또 나왔는데 그것은 1949년부터 1965년 12월까지의 일기들을 묶은것이다. 그 두책은 서로 맛물린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혁”때부터 사업을 다시금 시작했던 1978년까지의 부분이 빠졌다. 근년에 소유민(苏维民)이 <<양상곤이 신중국약간의 력사문제를 말하다>>를 펴냈길래 그나마 유감을 덜수있게됐다. 양상곤은 1948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기간에 중앙판공청주임을 지냈고 1954년에 당중앙부비서장, 8대후에는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로 있었기에 그의 회억록에는 허다한 사료들이 계시되고있는 것이다. 그의 일기는 중요한 력사문헌으로서 다가 사학연구자들의 필독서로 되고있는 것이다.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리설봉(李雪峰)의 회억문은 몇편밖에 안되지만 그는 신분이 특수함으로 하여 “문혁”초기에 쓴 두편의 회억문장은 광범위한 사학공작자들의 참고로 되고있다. 그들은 다가 그의 회억록도 출판되기를 바라고있다.
호교목(胡乔木)은 장기간 모택동의 신변에서 사업했던 사람이다. 지난 몇십년간 그는 <<모택동선집>>편집과 출판을 맡아왔기에 그의 회억록은 모택동의 생평과 사상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참고작품들인 것이다.
3. 당내의 수재, 번역가들의 회억록과 자술.
1988년, 리열(李說)의 <<로산회의실록>>이 회억의 전례가 되어 학자들로 하여금 시스템을 작성하는 전례가 되었거니와 큰 파티가 이루어지게끔 이끈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서 오랭서(吴冷西), 우광원(于光远)역시 회억록을 썼다. <<로산회의실록(庐山会议实录)>>에는 많은 원시적인 자료와 당안들이 채용됐다. (1), 리열이 손수 쓴 당년의 필기들. (2),호교목의 특별승인을 받고 리열이 중앙당안관에 가서 찾아 본 당안들.
1991년, 사철(师哲)이 구술하고 리해문이 정리해낸 <<력사거인신변에서ㅡ 사철회억록>>은 당내에서 회고록번역 시스템을 구축함에 시범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리월연(李越然), 기조주(冀朝铸), 염명복(阎明复) 등이 이어서 회억문장을 쓰거나 출판한 것이다.
이미 작고한 당사대가 공육지(龚育之)는 수재, 번역가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지도자 옆에서 업무를 본 경험있기에 그들은 지도자의 추억을 보충할 수 있었다. 지도자 혼자서는 못써내는 것의 부족점을 그들이 보충한다, 지도자들의 시각과 선비, 번역가들의 시각이 다르다. 그래서 보완이 되는 것이다.”
4. 성급령도간부, 장군이 쓴 회억록들.
성의 부급령도를 책임졌던 이들은 중앙령도와 관계가 밀접했더랬다. 그들의 회억록은 자주 전당의 큰일들과 관계된다. 례를 들면 강소성제1서기를 지냈던 강위청(江渭清)의 회고록 같은것은 1964년 류소기가 남경에 왔던 정황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근년에 해방군출판사에서는 수십명의 개국상장들이 회억록을 써냈다. 그들뿐이 나니라 적잖은 개국중장, 소장들도 여러방법으로 회고록들을 출판한 것이다. 지어는 쓰기 팀이 전문나와서 회억록을 만들어낸데도 있다. 그런 회억록들에서도 믿을만한 당안, 일기, 회의기록같은 원시자료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영도자 인물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은 적고 기록하지 않은것이 더 많았던 것이다.
역사는 대중에 의해 창조될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활동에 의해서도 창조되는데 사고 방식과 행동, 규칙과 습관은 위대한 인물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과정이다.
당내고위층인물들의 회억록, 구술력사는 당사와 국사를 연구함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记)>>가 민간수집가들에 의하여 전해진 자료인 것이다.
회억록의 가치를 알고 읽어보노라면 모르던 력사를 알게되여 좋고 배우는 점이 많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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