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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맑스주의자로 위장된 살인악마
김 송 죽
현실의 내막과 역사의 진실을 알면 인식이 명확해져 비교와 판단을 하고 평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맑스가 태여났던 19세기초는 경제의 자본주의적 축적단계였기에 그가 자본주의의 변화와 발전을 예측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초기의 계급투쟁, 폭력혁명, 무산계급전정리론은 성숙되지 않은 리론이였다. 그러니 맑스의 저작에 대해서도 역시 하나를 둘로 나누어 보면서 그 본질을 받아들이고 찌꺼기는 버려야 한다.
1895년6월, 엥겔스는 <<프랑스의 계급투쟁소개>>라는 글에 있는 맑스주의 이론의 전체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수정했다. 그는 1848년의<<공산당선언>>에 있는 폭력혁명과 공상적인 공산주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이로부터 볼수있는바 그가 번스타인(1850—1932)인 것이 아니라 그는 맑스주의의 폭력적혁명리론을 “수정”하여 평화적인 과도기리론으로 내놓았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번스타인은 그저 엥겔스와 맑스가 함께 창건한 민주사회주의리론을 계승하고 그것을 발전시켰을 뿐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로년기에 이르어서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되였다. 맑스가 젊었을 때의 폭력혁명, 무산계급전정, 계급투쟁, 공상적인 공산주의리론은 1894년에 출판된 <<자본론>>제3권에서 이미 다 뒤집혀진 것이다. <<자본론>>제3권은 맑스와 엘겔스가 몇10년간 가난속에서 지내면서 마침내 연구하여 낸 정수(精髓)인 것이다. 어느것을 믿을것인가?
20세기 초, 국제공산주의운동중에서 무산계급정당이 정권을 탈취하는데 대해서, 집정후에는 어느길로 나아가야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강렬한 쟁론과 분기가 생겼던바 나중에는 레닌을 위수로 한 폭력적 혁명, 계급투쟁, 무산계급전정하의 제3국제의 정당인 볼세비크정당과 번스타인, 카우츠키를 위수로 한 제2의회를 통하여 합법적인 투쟁으로 집정지위를 얻자는 사회민주당 이렇게 두파로 갈라진 것이다.
번스타인, 카우츠키를 위수로 한 사회민주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자본가를 인정하거니와 지식분자가 선진생산력과 선진문화를 대표하며 평화적인 수단으로 3대차별을 소멸하는 제2인터내셔널을 주장한 것이다.
실천이 증명하다십히,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당의 길이 옳았고 레닌이 지도한 제3국제의 길은 틀린것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에서 공산당집정이 붕괴되고 만 그것이 바로 가장 유력한 증거로 되고있다.
민주사회주의 이념은 북유럽의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그리고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무려 13개에 이르는 국가들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의 집권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국가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와 시골, 체력로동과 뇌력로동의 차이를 졻히였고 정부관원과 사회민주당 당원의 특권을 없애버렸거니와 수입이 많을수록 국가에 바치는 세금도 많게끔 만들었다. 의료비용과 교육비용은 아주 낮거니와 지어는 무료인데도 있는 것이다. 그 나라들에서는 높은 임금에다 높은 복리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례를 하나만 들어도 알수 있다. 스웨덴의 일반 근로자의 로임이 루마니아 시장의 월로임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하기에 우리 중국의 한 국가 지도자 왕진(王震)은 스웨덴을 방문하면서 감개하여 “이게 바로 우리가 늘 바라고있는 사회주의가 아닌가!”고 그 즉석에서 감격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스웨덴을 국사방문하고 돌아와서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을 보면 그같이 큰 변경과 전환속에서도 집정당의 지위는 전혀 손실되지 않았다고 감개하여 말했다고 한다. 하여 모택동이 사망하자 등소평은 서둘러 개혁개방 정책을 인차내놓은 것이다.
맑수주의학설은 인류가 다 같이 아름다운 사회를 추구하고 그를 구현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고 볼 때 민주사회주의가 바로 맑스주의의 정수(精髓)로 되는 것이다. 맑스의 리상은 소련이나 중국에서가 아니라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그 13개 국가들에서 먼저 이루어지고있는 것이다.
<<공산당선언>>에 보면 “계급과 계급대립이 존재하는 자산계급사회에서, 즉 그러한 컨소시엄(一个联合体)에서는 사람마다 자유적인 발전과 조건이 주어진다.”고 했다. 엥겔스의 그 말인즉 바로 <<공산당선언>>의 기본사상으로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 한 후에는 원유의 민주와 자유를 유지 할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자유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자본주의사회보다도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같은 조건에서 “모든 사람이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클래스(阶级)는 최종적으로 폐지 될 것이며 전인류는 해방되고 따라서 세계대동(世界大同)은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런데 관건은 국가와 국민을 다스리는 자의 행위가 어떠한가에 있는 것이다. 스탈린은 1917년에 무장혁명에 의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 하여 사회주의로 자본주의를 대체한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시대의 소련을 보면 모든 사람의 “자유적인 발전공간”이 있기는 고사하고 실상은 아예 거의 없어지나 다름이 없었다. “자유적인 발전공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스탈린 그 혼자였을 것이다. 그를 내놓고는 백성은 물론 지어는 대부분의 고위층 지도자들 마저도 자유란 운운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목숨마저도 그 한 사람의 손에 쥐여있었으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소련은 형상 그대로 큰 캠프(대집중영)였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련은 레닌이 새로운 경제 정책을 구현함으로 하여 사회주의의기본단계에 들어섯다. 그러다가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하니 지도권을 찬탈한 스탈린은 레닌이 내놓은 새로운 경제정책을 폐지했거니와 계급투쟁이라는 명의로 당내에서 피비린 대숙청을 벌리였던 것이다. 공산당사람이 제 공산당사람을 죽이게 한 것이다. 그는 선후하여 레닌시기의 정치국상임위원이였던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톰 샤란스키, 푸처럼, 부하린 등을 살해하였다. 피에 굶주린 그 독재자폭군은 정치국 상임위원회 카메네프의 가족에게 까지 살인마수를 뻗히였는데 지어는 카메네프의 17살 난 아들과 보모까지도 살려두지 않은 것이다.
이미 공개된 사료에 보면, “10월혁명”때의 중앙위원 중 14명이 스탈린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리고도 군사장령 60명 중 54 명이나 살해 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제1계 인민위원회에 위원이 모두 15명이였는데 스탈린은 그들 중 9명이나 혁명이라는 명의로 처형 한 것이다.
1934년 소련공산당 “17대회의” 중앙위원회의 선거 때 270명의 대표가 스탈린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투표결과를 보면 레닌그라드의 서기 키로프에게 투표 한 것이 스탈린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키로프는 얼마못가서 암살되였거니와 그를 죽인 흉수역시 피살되고 만 것이다.
희한스레 조작된 비극이였다.
이때로부터 스탈린은 저항세력에 대한 대규모적인 숙청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1,108명을 체포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감옥에서 죽고말았다. 그때 중앙위원으로 선거된 것이 139명이였는데 98명이나 스탈린의 손에 총살 된 것이다.
옛 소련 정치국 성원이였던 미코얀의 회억에 보면 1935년1월부터 1941년6월에 이르는 기간에 2,000만이 박해를 받았는데 그 중 700만이 총살되였다고 했다. 그러고도 입을 막느라고 자기가 부려먹었던 2만명이 넘는 특공인원(特工人员)들 마저 전부 죽여버렸다고 했다.
스탈린과 한고향이거니와 가까운 친구였던 오르조니키는 그보고 사람을 너무 죽이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의 타이름을 받아주지 않았다. 부하린의 부인과 몹시 가까운 치구간이였던 스탈린의 처는 살인악마로 변해버린 제 남편이 사람을 너무죽이니 그만 정신병에 걸려 나돌다가 자살아고 말았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12통을 썼는데 그는 제 아버지를 “사람인게 아니라 지독한 살인악마”라고 폭로했다.
스탈린은 정권을 잡자 ,레닌때의 경제정책을 폐지하였거니와 도시의 자산계급을 없애고 농업집단화를 한다면서 부농은 남기지 않고 육체를 소멸했거니와 그들의 자녀에 대해서까지 추방정책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이들이 적절한 조치도 없는 시베리아에 쫓겨가 그곳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만 것이다. 농업집단화는 생산력을 파괴하였다. 그럼으로 하여 전국성적인 대기황을 몰아와 수백만이 굶어죽고 얼어죽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스탈리은 집정기간에 고발자를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례를 들면 12살먹은 퍼프 무바라크란 애아 제 아버지 카스트피모를 계급의 적이라 고발하게 하여 진압한 대의멸친(大義滅親)사건같은 것인데 그 사건은 전형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카스트피모는 스탈린을 숭배하는 자들의 손에 피살되였거니와 그의 형 말리크 역시 그같이 살해 된 것이다. 그리고도 그에 련루되여 친척 여럿이나 아무런 죄도 없이 당국에 의해 처형되였다. 정치선전수요에 의하여 소련정부는 제 아버지를 고발한 소년 퍼프 무바라크를 소년영웅으로 부각시키켰다. 그리하여 도처에다 그의 동상을 해 세웠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가도, 학교, 집체농장 지어는 하늘에 나는 비행기와 강물에 떠있는 륜선에마저 그 애의 이름을 달았거니와 그 애를 찬미하는 노래를 지었고 그림과 책이 나왔으며 영화로 각색되였거니와 지어는 우표와 성냥갑에마저도 그 애의 얼굴을 그려넣을 지경이였던 것이다.
스탈린은 그같이 밀고바람을 일으키면서 전국적인 숙반운동을 확대했는데 기관, 학교, 군대, 정부의 각 부문들에서 고백을 협박하고 비밀처형하고 죄없이 무차별 살해함으로 하여 억울한 가짜안건들이 기수부지로 나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2000년도 10월혁명절 저녘에 야코블레프가 기자를 회견했을 때 토로한 것을 보면 스탈린시기 그의 진압에 의해 피해입은 자가 2,000만이 넘으리라는 것이다. 야코블레프는 그러면서 자기는 러시아 대통령에게 각 부문들에다 희생자조사위원회를 내올것을 제의했노라고 말했다.
미국의 전임총통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큰 가출과 혼란>>이라는 책에서 피해자가 2,000만이라는 설법을 인정했다. 그는 그러면서 계속해 쓰기를 “스탈린의 손에 살해된 정확한 수자는 영원히 알아 낼 재간이 없다. 2,000만 내지 2,500만이라 해도 과장되는 수자가 아니이다. 스탈린시대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살해 된 것이다. 그한테 박해받은 사람이 하도 많아 그 수가 2,000만이 아니라 4,000만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다른 한 자료에 보면 “스탈린시대에 총살된 사람이 짜리통치 30년간의 1.600배가 된다”고 했다. (《斯大林密闻》,《莫洛托夫回忆录》,《苏联亡国的原因》)
스탈린의 극좌로선은 소련공산당과 소련인민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과 재난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뚜렷이 남은것은 오로지 고통과 증오뿐이였다.
스탈린은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스탈린은 맑스주의자로 위장된 잔인한 살인악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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