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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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12)
2011년 03월 18일 22시 47분  조회:2758  추천:17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12)


(1) 대약진

(2) 모택동의 강국몽과 대약진  
(3)
모택동이 금문도를 포격한 본심과 우려

(4) 흐루쇼브와 모택동의 반목은 인민공사로 인한 것


                                              대약진


“대약진”은 모택동이 1956년의 반모진(反冒進)은 틀린다는 지적을 들은 기초상에서 1957년에 민주인사를 비롯한 300만이 넘는 지식분자의 꼭대기를 눌러놓는 반우파운동을 종결짓고는 1958년부터 1960년기간 전국범위내에서 벌리였던 “극좌로선”이 낳은 또 다른 하나의 운동인것이다.


1957년 11월 13일자 <<인민일보>>는 <<전민이 발동하여 40조요강을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라는 사론을 발표하였다. 이로부터 대약진운동은 발동된것이다


대약진운동중에 실력없는 높은표준, 맹탕지휘에다 거짓보고풍, 불어대기풍, 공산풍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지에서는 분분히 실제에 맞지도 않는 공업대약진과 농업대약진목표를 세우고는 공농업생산과 건설의 고속도를 편면적으로 추구하면서 대폭도의 제고와 수개계획지표를 내왔던것이다. 농업방면에서는 “농업을 벼리로해야한다(以粮爲鋼)”면서 “고산위성(高産衛星)”과 “사람이 많으면 담이 커지고, 땅이 많으면 산량을 많이낼 수 있다”는 선전을 요란스레 하면서 무당산량을 층층이 올라가면서 높이였거니와 공업방면에서는 년간 강철산량지표를 1,070만톤으로 내와서 전민이 일떠나 “강철을 제련하는 운동”을 하게하면서 “강철생산을 벼리”로 기타 항업의 “대약진”을 이끌게 하려했던것이다. 
그결과 "대약진”은 국민의 경제질서를 헝클어놓았을뿐만아니라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랑비함으로 하여 공농업비례에 엄중한 실조를 빚어내게 한것이다. 1958년 11월부터 시작하여 중공중앙은 “대약진”중에 나타난 문제들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중앙은 여러차례나 경제지표를 조절하면서 경제사업중에 나타난 문제들을 틀어쥐고 해결하려했다. 1960년겨울에 이르러 중공중앙이 농촌에서 성행하는 “좌경”착오를 규정하면서 “대약진”운동은 마침내 멎게되였다.   
제2차세계대전에 죽은 사람보다도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최소한 3~4천만! 
하건만 모택동은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면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6억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난것이다.
 
                           모택동의 강국몽과 대약진

사람들은 개혁개방을 기꺼히 말하고있지만 지난날의 그 황당하기 짝이 없었던 “대약진”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린듯 말하지 않고있다. 아마 그것은 생각만해도 고통스러운데 원인이 있으리라.  오늘에 이르러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약진이 정치에 끼친 후과는 물론 자연에 대한 파괴와 사람에게 준 해가 너무나도 크고 엄중해서 일구난설이다. 그렇다 해서 지나간 일이라고 묵새겨버리면 연구심은 희박해지고마는 것이다. 우선 경험교훈을 제대로 섭취하기 위해서라도 연구는 끊지 말아야 한다.    
대약진운동에 대한 고찰이 다 된것이 아아라 아직도 부족한 것이다. 말하자면 깊이 연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력사를 연구하여 근근히 과정이나 밝혀내는 것으로 그쳐서는  되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한 근원을 깊이 파내야  유익한  경험교훈을 섭취 할 수 있는것이다.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이 생기게 된 것이 지도자의 지식이 짧은데만  원인이 있은게 아니다.  대약진운동이  생긴 주요원은 두가지였다.  한가지는 강렬한 민족비정의식(民族悲情意識)이고  다른 한가지는 집권이 고도로  집중된  정치체제에 문제가 있는것이다. 여기에다 이미 이룩한 성공경험에 대한 지나친 자신심에만  의뢰하다보니  규률을 포함한 자연과학과  현대경제상식에 대한 료해가 부족하면서도  바라는바를 급속히 이룩하려한 그것이였다. “사람이 하늘을 이긴다”  느니 “사람이 많으면 담이 커지고 땅이 많으면 산량을 많이낸다” 느니 하는 따위의 로맨틱한 기분과 환상이 대약진과 같은 모험을 불러온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찍어 말할것 같으면 대약진이 기실은   모택동의 “강국몽”에서 온 것이다. 애국이 틀리지 않고 강국몽도 꾸어야 하겠지만 무엇때문이 충동이 그같이 강렬하고 정서가 광열적이였던가? 그것은 모택동으로부터  많은 국민에 이르기까지 가슴심처에는 수천년의  중화문화와  력사에 대한 자호감이 자리잡고있는 반면에 다른 한 면에는 수백년의  빈궁과 락후로 인하여 남한테서 받은 멸시와 비감이 시종 자리잡고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중국이 성립되자 모택동은 “중화인민은 지금부터 일어섯다!”고 부르짖어 세상에 선고했던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중국사람이 진정으로 국제사회에서 허리를 펼만한 기력은 없었던 것이다. 모택동이 일으킨 대약진은  바로 이러한 정서와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엄격히 말해 중국근대의 정치령도는 다가 강한 민족주의정서를 같고있었다. 량게초, 손중산, 장개석의 문장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43년에  장개석이  <<중국의 운명>>이라는 소책자를 내놓았는데 구라파문화에 뒤지는것이 뭐냐면서 민족문화의 전통을 자존자숭(自尊自崇)하는 민족주의 심태를 발로했다.  모택동이  그와  다른것은 웅심이 더 발발하여 자기 심목중의 중국을 세계의 모범력량으로 변하게 하리라는 그것이였다. 
한편 미국의 적대시정책은 모택동의 심리를 강하게 자극했다. 
1949년 새중국이 성립되기 두주일전에 모택동은 전문 미국국무경 애치슨을 반박하는 문장 한편을 발표했다.   그에 앞서  미국무원은  중미관계백피서와  애치슨이 미국총통   투르맨에게 보내는 편지 한통을 발표하면서  한면으로는 미국의 대화정책이   엄중하게 좌절되였음을 승인하였거니와 단른한면으로는 애치슨의  편지를  통과하여 애치슨이 쓴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인구가  너무많고 토지는 적으니 “인민이 밥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이때는 모택동은  “좁쌀에 보총”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고있는 국민당을 패배시키고 당장 새중국을  세우려는  때라서   의기분 발하였기에  자연히 미국정부의 태도에 극단적인 경멸과 반감을 품었던것이다.  흥분을  못이긴  그는 열 며칠사이에 풍자와 욕설이  담긴  평론문장을  4편이나  거침없이  써내여 승리자의 교오와 자신심을 보여주었던것이다. 

모택동은  애치슨이  오만스레  높이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태에  분노하여  중국은  그래 미국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줄을  아느냐고 반박하고 나서 신심만만하게 썼던것이다.   
“중국이 인구가 많은건 한낫 좋은 일이다. 이제 몇배 더 늘어난다해도 방법이 있을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중 사람이 제일 보귀한것이다. 공산당의 령도하에 오직 사람만있다면 그 어떠한 인간기적도 만들어낼 것이다.... 사람이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생활이 유족하고 문화가 창성하는 새 중국이  이제 오라잖아 올것이니 모든 비관론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것이다.”
    
이 한단락 말에서 우리는 얼마든 1958년에 대약진을 벌리게 된 모택동의 호기를 맡아낼 수 있는것이다.
 

1956년, 중국은 사회주의소유제개조가 기본상끝났음을 선포했다. 쏘련은 12년이 걸려서야 경제를 회복했고 또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회주의소유제개조를 완성할 수 있었지만  중국은  3년내에  경제를 회복하고 3년이 채 걸리지 않아서  사회주의개조를 끝낸것이다. 이같은 속도에다 전에 중국혁명과정에 창조한 여러가지 기적들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날이갈수록 쏘련의 경험에 따라 처사하려는 주은래등을 아니꼽게 보았다.  그는  중국은  경제건설에서도 기적을 창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은이다. 

이해 중공8차대회에서 대다수 중앙위원이 건설속도를 빨리자는 자기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니 모택동은 중국이 반드시 미국을 초과해야하는 리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것이다.   
“미국은 인구가 1억7천만밖에 안되지만 우리는 인구가 그들의 몇배되고 자원도 풍부하며 기후조건도 비슷하니..... 응당 따라잡아야 하는가 따라잡지 말아야 하는가? 응당 따라잡아야 한다.”  “이 많은 사람이 있고, 이 큰 땅이 있으면서, 자원이 이같이 풍부하겠다, 사회주의를 한다면서, 우월성이 있다면서도 5, 6십년이 가도록 미국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그게 그래 무슨꼴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차라니 지구에서 호적을 긁어버리고말아야한다!”
 
이리하여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초과하자는 시간표는 갈수록 죄여들었다. 

1955년 가을에 모택동이 처음 미국을 따라잡고 초과할 문제를 내놨을 때만도 100년이 걸릴것을 75년으로 계획잡았던것이다. 1956년 8차대회때는 5,6십년에 미국을 따라잡고 초과해야한다고 명확히 제출했다.  그러다 가 1958년 <<인민일보>>원단사론에는 또 변하여 15년좌우에 영국을 따라 잡고 다시 20년 혹은 30년을 더 들이여 미국을 따라잡아야한다고 했다. 여기서 모택동이 내심 몹시 긴박해 함을 엿볼수 있는것이다.

그가 대약진을 발동한데는 두가지 동기가 또 있는것이다. 1957년도에 쏘련이 15년좌우면 경제상에서 미국을 따라잡으리라는 계획을 내놨는데 그것이 어쩌면 제 생각과도 맞는것이여서 모택동은 인차 15년내에 영국을 따라잡을 계획을 내놓고는 그 겨를에 미국을 따라잡거나 초과할 생각도 따라붙게 되었던것이다.

1958년 상반년,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대약진을 앞으로 내밀던 모택동은 일계렬의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첫째, 대약진운동을 전면적으로 내밀고 배치한다."나는 밎지 않는다, 아무렴 그래 건설하는게 싸우기보다 더 어렵단말인가?!”    
그가 공공연히 내친 말이다.
  그는 각지에서 신속히 대약진에 뛰여들어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초과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 화평공처를  주장하던 외교방침을 개변한다.  다년간 그 방침을 집행하여 온 주은래의 외장직무를 철수하며 지난때의 외교정책의 성질을 우경보수로 규정하여 내부에서 비판한다. 
  
셋째, 세번째 엄중경고를 내려 15일내에 미국이 중지했던 담판을 회복하게끔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로 인하여 빚어지는 후과를 미국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모택동은 군방에 령을 내려 금문도를 포격할 준비를 하게했다.

     대약진운동이 시작된지 몇달안되여 여름알곡산량이 “위성”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각처에서 무당산량이 몇십배 백배로 올랐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이에  고무된 모택동은 공업에서도 기적을 창조하라고 호소했다.  
   그리하여 9,000만명이 들끓는 열정으로 강철을 제련하는 운동에 뛰여들게되였다. 각지에서 첩보가 올라왔다. 강철산량은 올라갔다. 1958년 5월, 중공이 8대2차회의를 열었을 때 모택동은 년초에 세웠던 계획을 조정하여 7년에 영국을 따라잡고 거기다 8년을 더 가해서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했다. 또 한 달이 지나서 첩보가 그냥 들어오기에 그는 따라잡는 계획을 다시금 고치였다.  조선업, 자동차제조업, 전력등 몇가지 항목을 내놓고는 명년이면 영국을 따라잡으리라했다. 그는 9월에 들어와서는 이미 영국을 주의하지 않았다. 5년간에 미국에 접근하고 7년을 더해서는 미국을 초과하는 목표에 도달하기위해서 분투하라했다.

모택동은 자기의 백주몽에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여 무등기뻐한것이다.

말그대로 몽상이였지 그것은 과연 현실이 아니였다. 아무리 영명하고 위대하여도 그는 속히우고 있었던 것이다. 왜서일가?   
두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첫째, 지방간부는 왜서 층층이 허위날조하는가? 그들은 그것이 발각 되는 날이면 처분받으리라는것을 그래 모르고있단말인가?
   
둘째, 모택동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쉽사리 각지에서 올라오는 허위 날조를 믿었는가? 그 당시 그도 각지로 다니면서 직접 제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답: 그것은 옹군집체의 문제였다. 중국은 집권이 고도로 집중된 정치체제하에서 간부가 일을 해내는데 간부의 지위가 오르는가 못오르는가를 포함하여 운명이라는건 직접 한 상급과 관계되는것이다. 지어는 자녀의 사회지위 복리대우마저도 권리를 쥐고있는 그 자기 머리우에 앉아있는 한사람의 태도와 관계되는 때도 있는것이다. 때문에 “말을 곰상히 듣는 하급”질을 해야지 그러지를 않으면 나떨어지고마는 판이였다. 절대다수가 그러하니 다른 선택이란 없었다. 좀 더 쉽게 말할것 같으면 하급의 운명은 웃사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인데  웃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한 고찰은 올리바치는 업적인 수자보고에  근거했던것이다. 거기에다 “좌”가 되여야지 “우”로는 절대되지 말아야한다는것이 이제는 공산당내의 전통으로 돼버린것이다. 하급은 상급이 맏겨준 임무라면 넘쳐해야지 조금이라도 적게해서는 안되였다. 그 결과로 바치라는 돼지가 없으면 하다못해 상여 패물모양의 종이돼지라도 만들어 바치는 형국이 되듯이 날이 갈수록 가짜가 성행하게 되였던 것이다.   하급이 하는 그따위 가짜짓을 상급이 발견하지 못할리 없는것이다.  그런들 무슨 방법이 있는가, 자기도 우에서 강압적으로 내리먹이니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는데.  보고된 가짜수자라도  의거(依據)가 되니 큰 문제는 작게,  작은문제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판이다.  그래도 그것을 나서서 추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모 령도가 모 지방에 부빈(扶貧)항목을 시찰하러 내려갔는데 그 모 지방에서는 층층이 내려가면서 시찰을 내려오는 어른을 영접할 준비를 사전에 해놓은것이다. 전촌에 있는 닭, 오리, 게사니와 돼지를 시찰을 오면 뵈여드리자고 한 두 집에다 집중시켰다. 그래놓고 보니 돼지는 그래도 제것을 가려낼만한데 닭, 오리와 게사니는 가려내기힘들어 저마끔 천오리를 다리아니면 날개죽지에 매놓았던것이다. 그래서 촌에서는 사전에 몇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답할 말을 련습시켰고 시찰을 내려온 어른은 그런말을 곧이듣고는 대단히 만족스러워했으니 결국은 눈뜬 소경이 되고만것이다. 어느 지방의 간부인들 그런 “령통”한 방법을 쓰지 않으려하랴? 더구나 당년에 모택동이 시찰을 나가는 목적이 기적이 나타 나는것을 친히 목격하자는 것이고 가슴은 내내 희망에 부풀어서 제 구미에 맞는 말만 듣기좋아하는 심태였음에야. 지방간부들이 그의 이러한 허점을 알고 알심들여 꾸민 현장을 아무리 영명한 모택동인들 보고서 속히우지 않을리가 있겠는가? 그것은 그 자신이 자초한 심한 우롱이였다!
 
             모택동이 금문도를 포격한 본심과 우려

우에서 아래에다 지표를 내리면 아래에서는 가짜완성표를 올리바친다. 그러면 상급은 거기에 미혹되여 지표를 좀 더 높혀놓는다. 하급은 호소에 바싹따르느라 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듯 응하니 그 결과는 자연히 엄중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 

이러한 대약진형태가 모택동을 자극해서 지어 외교정책에 영향까지 미쳤던 것이다. 

모택동은 1958년에 우선 주은래를 면직시키면서 화평공처를 주장해 온 외교정책을 페지한 것이다. 그러자 그에 대한 반응으로 뒷따라서 대외사무에는 세가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것이다. 

하나는 4월 3일에 일본의 우익분자가 나가사끼전람회의 회장에다 걸어놓은 중국국기를 찢어버린것이고 일본정부는 중일량국간에는 외교관계가 없다는 리유를 대면서 중국측에 사과를 절대하지 않은것이다. 이로하여 중국측은 립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5월중순에 일본과의 무역왕래와 문화교류마저도 전면단절한것이다. 

다른 하나는 7월 21일에 모택동이 중국에 와있는 쏘련대사의 보고를  들었는데  쏘련대사는 보고에서 쏘공중앙정치국은  중국, 월남과  련합하여 3국련합잠정함대를 조직하여갖고 중국과 월남 두 나라의 해안선을 리용하여   미국의 태평양해역에서의  패권을 공동히  제지하련다고 했다.  이에 모택동은  즉각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인즉 이는 로씨야사람이 중국사람을 깔보는것이고 기술을 중국에 배워주지 않으려는 것이며 중국을 손발을 쓰지못하게 공제하려는것이라는것이였다. 이러면서 모택동은 자존심이 크게 상하여 이틑날 쏘련대사를 불러 한바탕 훈계 했다.   
쏘공령도자 흐루쇼브는 대사의 보고를 받자 급히 북경에 와서 모택동에게 해석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 일은 후에 두나라가 서로 반목하게 된 도화선이 되고말았다.
 

또 다른하나는 8월 23일, 중국측에서 미국을 훈계하느라 금문도를 대거포격하여 대만해협에다 두 번째 긴장국세를 만들어놓은것이다. 모택동은 공개적으로 말한것이다, 자기는 긴장한것을 좋아한다고.

얼마후 모택동이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다. 모택동은 1956년에 흐루쇼브가 쏘공20차대표대회에서 쓰달린을 비판하는 비밀보고를 해서부터 흐루쇼브를 깔보면서 쏘련의 경험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큰형님으로 보아온 쏘련공산당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던것이다. 더욱히는 흐루쇼브의 화평과도, 화평공처와 화평경색 등 주장에 대해서 불만을 품어 온 것이다. 그는 흐루쇼브가 쓰딸린을 반대하는것은 혁명을 무서워 하기때문이라 여겼다. 1958년에 대약진성과가 나타나는것 같으니 그는 그를 더 깔보기시작했다. 그런데 중동사건이후 혁명을 하지 않을것 같던 흐루쇼브가 중동혁명을 성원하는 깃발을 내든것이다. 그리고는 또 미국과 영국이 아랍지구에 출병하는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거니와 군사연습으로 미국과 영국에 시위를 했던것이다. 흐루쇼브의 이같은 행동에 모택동은 스스로 곤혹에 빠지고 말았다.
     흐루쇼브와 모택동의 반목은 인민공사로  인한것

흐루쇼브, 1894년 4월 17일 꾸르스크성에서 출생. 1918년 공산당에 가입. 1929년 모스크바공업대학원에 입학하여 학습시작. 졸업후 모스크바구위서기, 시위서기를 지낸바있음.  1938년에 우크라이나당중앙제1서기, 이듬해에 쏘공(볼세비크)중앙정치국위원, 위국전쟁기간 쓰딸린의 임명을 받아 쓰딸린그라드방면군, 우크라이나제1방면군의 군사위원이 됨. 1949년중앙서기 겸 모쓰크바시위제1서기로 되였음.
쓰딸린이 죽은 후, 흐루쇼브는 베리야집단숙청을 주모하였고 1953년 9월 3일에 당중앙제1서기로 당선되였다. 1958년 쏘련부장회의주석을 겸임. 1956년에 그는 쏘공20차대회를 소집하여 쓰딸린을 근본상 부정하고 지난날의 안건들에 대한 재다시조사와 평판사업을 조직했다. 1961년 쏘공제22차대표대회에서 “전민국가”, “전민당”을 고취하였고 1980년에 공산주의기본건설을 완성할 목표를 제출하였다. 경제방면에서 그는 물질자극원칙을 널리시행하고 농산품수구가격을 제고하였으며 세금임무교수제를 취소하고 뜨락또르기게참을 개조하였으며 황지를 새로일구는 등 일들을 했다. 대외관계에서 흐루쇼브는 두가지 사회경제체계와 화평공처, 화평경색원칙을 제출했던것이다.

로씨야의 당안에 기재되여있는것을 보면 1954년 9월에 흐루쇼브는 중국을 첫방문하기전에 쏘공중앙주석단회의를 열고 중국에 대폭적인 지원물자를 례물로 주기로 결정했던것이다. 브로실로브는 쏘련경제로는 받아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흐루쇼브는 그렇다고 중국인민이 우의를 느끼지 않게 해서야 되느냐고 했다. 과연 그번의 중화인민공화국성립5주년을 경축하는 기간에 흐루쇼브는 지난때 쓰딸린이 써온 대국주의작법을 버리였거니와 중쏘지간에 존재했던 불평등약정이나 의정을 철페하고 려순항의 군대를 철수하여 기지를 되돌려주었던것이다. 일반무기제공에 관해서도 쓰딸린이 도태한 낡은 무기만 주던 작법을 고쳐 현역신식장비 견본과 생산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던것이다.

1954년 11월부터 쏘련은 중국에 미그ㅡ17견본과 자료를 제공하였는바 중국은 1956년에 방제에 성공한 그 비행기를 섬ㅡ5섬격기라 이름지었다. 1955년 1월이후, 쏘련은 중국에 AKㅡ47자동총, Cㅡ41반자동보총, 첵코까레브경기관총자료를 넘겨주었다.  중국은 이듬해에 방제품  56식충봉총(응당 자동보총이라해야한다ㅡ역자), 56식반자동보총과 56식경기관 총을 생산했다. 쏘련은 또 현역의 Tㅡ54A탕크와 각종 화포의 견본설계도를 제공하였는바 중국은 방제에 성공한 후  59식탕크와 첫글자 “5”를 붙인 각종화포를 생산해냈다. 중국의 군공업수평은 50년대말에 한차례 비약하여 상규장비령역에서 이미 당시 세계선진수평에 이르렀던것이다.
 
흐루쇼브시대에 중국에 제공한 가장중요한 원조는 핵폭탄제조, 탄도생산기업과 상응한 기술이였다.

1957년 9월, 섭영진(聶榮臻)이 거느린 중국대표단이 쏘련을 방문하였는데 흐루쇼브는 모택동이 쏘련을 방문하리라는 소식을 확인하고는 중쏘국방신기술협정을 맺는데 동의하였다. 그해의 11월에 모택동은 모쓰크바에 가서 61개국 공산당, 공인당회의에 참가하였는데 그는 회의발언에서 흐루쇼브가 “반당집단”을 전승한데 지지를 표시했거니와 동시에 쏘련이 사회주의진영에서의 “우두머리”지위를 옹호했다.   
그해의 말부터 시작하여 쏘련은 협의를 리행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제공한 Pㅡ2탄도는 중국의 탄도사업이 발걸음을 떼는데 맨처음의 견본이였던것이다. 이듬해에 쏘련은 또 중국에 핵공업에 수요되는 설비들을 제공했는바 근 천여명에 이르는 전문가를 파견하여 호남과 강서의 우라늄광, 포두핵연료봉공장 그리고 주천연제기지를 세웠고 신강에다 핵실험장을 세움으로써 중국은 정식으로 핵공업건설과 핵무기를 연구제작 하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되였던것이다.


1958년 여름날, 중쏘지간에는 “長波電臺”와 “련합(潛艇)함대”사건이 발생하여 다투었는데 다음해의 6월에 흐루쇼브가 중국에다 원자탄견본과 제조기술을 제공하던것을 “잠시 2년간유예한다”고 통지해왔다. 1960년 7월, 쏘련은 중국핵공업과 군공부문의 전문가들을 철회함으로서 이 령역에서의 협정을 리행하지 않은것이다.

근년에 심지화(沈志華) 등 교수가 연구한 결과를 보면 모택동이 대약진운동을 발동한 것은 쏘련과 경쟁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령도권을 쟁탈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볼가리야가 중국의 영향을 깊이받아 신문에다 중국의 “대약진”에 관한 문장을 련속발표했거니와 집체농장이 믿지 못할지경 큰 규모여서 기적이라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되였던 흐루쇼브는 공개적으로 쏘련의 20년대가 검증하는바 당시 쏘련은 공사(꼴호즈, 쏩호즈)를 세웠길래 도리여 기황을 초래했으니 그것은 착오였다고 지적했다.   흐루쇼브의 이런 강화에 모택동은 매우 분노하여 중쏘지간에 론쟁이 벌어졌고 마침내는 분렬되여 서로미워하기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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