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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담화가 있은지 한달만에 왕첩삼은 반우투쟁에 얻어맞았다.
동해감(董海戡.1907ㅡ1980) 절강온주사람. 로신은 1928년 5월 2일 일기에 그가 자기를 방문왔다고 기록했다. 동향친구 김명약(金溟若)이 <<반역자>>를 번역했지만 그것을 찍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하니 동해감이 그를 데리고 자기를 찾아왔다는것이였다. 로신은 그 번역고를 <<분류>>에 련재하게 했다. 1931년말, 동해감은 3막극 <
지금세대는 세상에 그런일도 있을가고 하지만 중국의 “반우”때는 확실히 그러했던것이다. 그때 없는 우파를 일부러 만들어내는것이 보편화로 되었는데 여기에 총정치부문화부창작실(원래명칭은 중국인민해방군총정치부 문학미술창작실) 하나만을 례로 든다. 려백(黎白)이 쓴 글이다.
서광요(徐光耀)와 나를 적발비판한 동시에 공류(公劉)는 여러차례나 비판받았는데 그의 “죄상”을 우파로 정하는건 복잡한 일이 아니였다.
첫째, “명방”회의에서 그는 총정문화부 련화지(蓮花池)숙반에 비평의견을 제출했던것이다. 나도 그 회의에 참가했길래 잘 아는건데 그가 전국의 “숙반운동”을 공격한건 절대 아니였다.
둘째, 그가 전에 발표한 몇수의 고체시를 정치계선에다 무한히 끓어 올려놓고는 사회주의조국을 악독하게 공격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론리인 것이다.
셋째, 이미 조직상 결론을 다 지은 그의 지나간 력사문제를 새삼스례 다시 끄집어내여 정하는것은 맞지 않은것이다.
단른 한 사람 심묵군(沈黙君)에 대해서는 세차례 회의를 열고 비판 했다. 그는 “명방”회의때면 말한마디 하지 않았길래 그의 공격언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평상시 그의 작품과 품질을 봐서 우파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마땅히 우파가 돼야한다고 결정지은것이다. 나는 그래도 뭣도 모르고 “명방”을 반우운동이라 말을 해서 걸렸다지만 한마디 말도 없은 그를 우파로 만드는건 아무리봐야 괴상한것이다.
중국의 광범한 지식분자에 대한 모택동의 예견과 판단은 어떠했고 내린 결론은 어떠했는가? 1957년 7월 9일 그가 상해간부회의에서 한 강화를 후에 모택동선집 제5권에 수록했는데 글의 제목은 <<자산계급우파의 진공을 물리치자>>는 것이다. 그 문장에 이런 단락이 있다.
“껍지가 없으면 털은 붙을 자리가 없는데 지난날 지식분자라는 이 ‘털’은 다섯장 껍지에 붙어있으면서 바로 그 다섯장껍지의 밥을 먹고 산것이다. 첫 장은 제국주의소유제. 두 번째장은 봉건주의소유제. 세 번째장은 관료자본주의소유제다. 민주혁명이 세개의 큰산을 뒤엎지 않았는가? 바로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타도한것말이다. 네 번째장은 민족자본주의소유제. 다섯 번째장은 소생산소유제. 곧바로 농민과 수공업자의 개체소유제다. 지난날 지식분자는 앞쪽 석장의 껍지에 붙거나 아니면 뒤의 두장껍지에 붙어 밥을 먹었다. 지금 그 다섯장 껍지가 있는가없는가? 그 껍지들은 다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 결론은 그가 1957년에 말한것이니 건국이 된지 8년만인것이다. 모택동은 전 중국의 모든 지식분자를 가리킨것이다. 그들은 다가 그 다섯장껍지에 붙는것이라니 지식분자가 나라를 사랑하고 당을 사랑하며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것을 그는 모조리 부정해버린것이다. 그러한즉 모택동이 말하듯이 명방을 하여 뱀을 굴에서 끌어내고 깊이 유인하였다가 일거에 때려엎는것을 리해하기는 어려운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당정풍을 방조하라는 당중앙의 호소에 적극향응하여 만강의 열성으로 “명방”에 뛰여든 것인데 눈깜짝사이에 당과 사회주의를 악독하게 공격한 것으로 되고말았다. 어떤 사람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자극적인 말은 하지도 않았거니와 어떤 사람은 심지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우파로 획분되였으니 세상에 그래 이같이 괴이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파로 획분되지 않았다해도 지식분자는 모조리 사상개조를 해야 하고 립장을 철저히 개변해야한다고 했다. 모택동이 그같은 견해를 갖고 반우파운동을 하지 않아도 중국의 지식분자들은 자기의 가치와 위치를 갖고있음이 명명백백한 사실인것이다. 하건만 문화혁명에 이르러서는 지식분자를 지어는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분자” 다음에다 놓아 “고린내나는 아홉째”라고 딱지를 붙이까지 한 것이다. 력대봉건왕조시대에 “아래아홉째”라 한것보다도 새중국지식분자는 신세가 그보다 더 험악했던 것이다.
이런 “좌”적인 착오가 국가의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생활에 이르기까지에 끼친 엄중한 후과는 이루헤아릴 수 없다.
당은 11기3중전회에서 틀린것을 바로잡기시작했다.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은 실천인것이다. “兩个凡是”와 “좌”의 착오를 규정하기 시작했는바 력사가 남긴 허다한 원안과 가짜안건, 틀린안건을 평판하였다. 개별적인 몇사람을 내놓고는 대부분 우파분자가 규정을 받은것이다. 지식분자의 지위와 대우도 많이 제고되였다. 그렇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하는것이 있다. 지식분자에 대한 “좌”적인 정책은 오랜 력사근원이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숙청하는 일은 일조일석에 완성하는것이 아니라는 그것!
2005년11월13일, 산동대학교의 퇴직교수 사약평(史若平) 등의 주도하에 여러우파인사와 가족은 련명으로 인대(人大)와 국무원에 공개신을 보내여 중공은 당년에 박해받은 지식분에게 명확히 반성하고 잘못을 빌며 해를 입은자와 가족에게 공평합리한 배상을 해줄것을 호소하였는데 석달사이에 1,500여명이 이에 향응하여 나섰던것이다. 2007년에 반우운동 50주년을 맞이하면서 북경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61명 우파분자가 련명으로 공개서한을 보내여 중앙은 우파를 철저히 평판하라, 잘못을 공개적으로 빌라, 반우운동은 “착오”였다면서도 “확대화”했다는 것으로 반우운동은 필요했다는 유론은 틀린것임을 선포하라면서 우파분자의 정신손해를 배상하라, 언론금구를 풀어놓으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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