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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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24)
2011년 03월 23일 15시 34분  조회:3101  추천:25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둗힌 비밀(24)
 
(1)1962년,6만 신강사람 쏘련에 도망간 내막       
(2)흐루쇼브 중국방문때 중국사람 100만을 요구
   
(3)중소관계에 있은 일 작은 사건이 큰 영향을

      1962년,6만 신강사람 쏘련에 도망간 내막 

핵심제시 :

아얼태로부터 타청, 부얼타라, 이리에 이르는 4개지구, 20여개 현의 3000km넘는 중쏘변경의 몇 개 중요한 변경출입구는 밤낮3일간이나 사람물결이 마치 조수마냥 끊임없이 흘렀다. 퍼런 대낮이였건만 쏘련당국은 커다란 고성의 스피카로 방향을 알려주었고 밤이면 탐조등을 비춰 길을 밝혔다. 이같이 하여 쏘련으로 도망한것이 6만 7천여명에 달했는데 2개현은 지어 몇백명밖에 남지 않았던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래 처음으로 발생한 한차례의 국제간 변경주민탈주사건이였다. 이로하여 기나긴 변경이 자못 긴장해졌으니 이는 두나라지간에 충돌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던것이다.    
1962년, 계절은 드팀없이 찾아와 중국신강의 굳게 얼어붙은 우르무치의 동토에도 봄바람이 불어 두터운 적설을 녹이기 시작했고 양지쪽에서는 푸르른 새싹이 돋아났다.
    

4월초의 어느 하루였다. 날이 희붐히 밝아오는데 웬 찦차의 동음이 우르무치군구뜨락의 정막을 깨뜨렸다. 수직실에서 당직을 서고있던 군구보위과장 악요례(岳耀禮)는 밖에서 나는 기적소리를 듣자 밖으로 달려나갔다.
    
찦차는 문가까이에 이르러 멎고 있었다. 
   
“이리일찍이 어디로 가는거야?”
    
“조룽태예브부참모장이 차를 쓰겠다해서.... 긴급임무가 있어서 이리에 간다는구만.”
    
악요례가 묻는 말에 운전사가 하는 말이였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 한손에 가죽트렁크를 든 조룽태예브가 판공루에서 총총히 나오고 있었다. 악요례과장은 그를 향해 인사차림했다.
   
 “수장, 혼자 이리로가십니까?”
    
“왜, 내혼자는 안되나?”
    
“아, 아님니가, 전 수장의 안전이 념려돼서 그럽니다. 경위를 불러드릴가요?”
   
 “필요없어.”
    
조룽태예브의 랭랭한 응대였다. 
   
군구뜨락을 벗어나 달리는 찦차의 뒷모습을 여겨보면서 악요례과장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로씨야족인 조룽태예브는 중등키에 코날이 일어선 급발사나이였는데  만면에는 언제나 윤기가 흘렀다. 이쪽은 견장을 단 어깨가 일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그가 운전사더러 차를 빨리몰라 독촉한다고 직감했다. 


이 순간, 조룽태예브는 초조불안했다. 1944년 9월, 신강의 이리, 타청, 아리친 세지구에서는 인민무장폭동이 대규모로 폭발하여 상술한 세지구를 완전점령하고는 신강민족군을 건립했던것이다. 그것이 력사에 이름을 남긴  “3구혁명”인 것이다. 조룽태예브는 조기의 민족군성원인것이다. 

   
1949년 8월, 당중앙은 민족군총사령 이스하크베크, 제1부사령원 다리리한, 수클바예브 등을 청하여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석시키고저 요청하였는데 8월 22일에 그들을 태운 비행기가 쏘련을 거쳐 북경으로 오다가 중도에서 비행기사고로 모두 조난당하고 만것이다. 
       
949년 12월에 민족군은 중국인민해방군 제5군으로 편입되였고 조룽태예브는 중국인민해방군의 고급지휘원으로 발탁한 것이다.... 

앞쪽에서 다른 한 찦차가 마주왔다. 조룽태예브는 그것이 군용차임을 알아보고 운전사더러 차를 세우라했다. 차는 삑ㅡ 소리를 내면서 달리던것을 멈추었다. 마주오던 차도 섯다. 조룽태예브는 차에서 내려 그리로 향했다. 마즌켠 찦차에서 내린 사람은 이리군분구사령원 말꼬브소장이였는데 그역시 로씨야족이였다. 두사람은 만나자 악수했다. 그러고도 치절이 뜨겁지 못하다고 여기는지 둘은 서로 부등켜안았다. 

“사령, 오늘 어디에 가렵니까?”    
“유민현에 가자구, 내가 쏘교협회와 말해놨소.”
         
한 대는 앞서고 한 대는 뒷따르면서 두 찦나는 함께 유민현을 향해 달리였다. 연도에는 인가가 희소했다. 드문히 양떼를 모는 목민이 보일 뿐이다. 초원을 뒤덮고있던 눈은 아직 채 녹지 않았다.    
   

두 찦차는 한 마을로 들어갔다.
    
“변방군수장이 왔다!”
    
사람들이 반가와 하면서 달려나왔다. 어떤 사람은 손에 륙현금을 들고 나왔고 어떤 사람은 “바양”을 들고 나와 켰다. 

  
“여러분, 춤을 춥시다! 노래부르시오! 즐겁게 놀아봅시다!”
    
조룽태예브가 높은 목청으로 부르짓고는 춤을 먼저췄다. 로씨야 기병춤이였다..... 
   
말꼬브소장도 춤을 췄다. 모두들 함께 음악에 맞추고 박자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췄다.
        
드디여 춤판이 끝났다. 하지만 조룽태예브도 말꼬브도 인차돌아갈 궁리는 아니였다. 그 둘은 타고 온 찦차에서 배갈과 양고기를 내놓았다. 목민들은 “와!ㅡ ”하고 함성을 올리면서 좋아했다. 그들도 저미끔 건사했던 술과 다들 즐기는 골바싸를 내놓았다. 워드까도 뵈였다. 그 술은 분명 밀매한 것이였다. 이런것들이 당시의 형편에서는 그야말로 희긔한 진품이나 다름없었던것이다. 그런것을 좀씩 맛보면서 저마다 생각에 잠기였다. 


이때라 생각한 조룽태예브가 말꼬브에게 눈짓을 보냈다. 
  말꼬브소장은 이 자리에 당정기관의 간부가 없음을 확인하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어떤가? 모두들 배불리 먹었는가?”
    
모두 묵묵했다. 
   
그러니 말꼬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를 곯고야 어떻게 산단말인가?... 내가 방법을 대지.”
    
여럿이 입을 열어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무슨 방법이 인단말인가? ....”
    
“빨리 말해보시구려.....”
   
 “이거 참, 답답해서..... ”
    
입가진 사람마다 이러니 저러니 떠들었다.
    
말꼬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길은 하나뿐이요, 쏘련으로 가버리는 것!”
    
모두들 적이 놀랬다.
    
“아니 쏘련에 가다니, 그러면 국가배반자로 되는거아닌가?”
    
“참, 원! 겁나할거 뭐요, 중국이 사회주의고 쏘련도 사회주의아닌가. 이건 큰집으로 가는건데!” 
   
“다른건 무섭잖은데 그네들이 우릴 받아줄것 같잖아서.”
    
이렇게 되자 조룽태예브가 정색하여 참견했다.
    
"누구든지 가고싶어 쏘련에 간다면 쏘교협회에서 교민증을 내주게 할 것이요. 교민증이 있으면야 쏘련사람과 마찬가지지, 않그런가? 그러니 쏘련에 가는건 합법적이 된다는 말이요.“ 
   
이렇게 되어 사람들은 움직이에 되었다. 쏘련교민증을 만든다, 친척방문을 하다.... 비밀리에 음모가 꾸며젔으니 여기에 가께베가 참여했던 것이다. 
  
1962년 4월 22일, “이타반혁명폭란사건”은 거의 아무런 증조도 없다가 돌연히 폭발한 사건이였다.  
이녕시에서 멀지 않은 허얼커스 변경출입구는 중쏘변경에서 한갈래 개방된 통로였다. 허얼커스산맥의 아래쪽에 한갈래의 협곡이 있는데 비가 많이 쏟아지는 우기가 되면 파도굽이치는 하류로 변해버린다. 량안에서는 하나뿐인 쎄멘트다리를 통로로 쓰는데 중간에 붉은 선을 그어 남쪽은 중국 북쪽은 쏘련 이렇게 국경분계선으로 표시해놓고 사용하는 것이다.    
중쏘관계가 악화되기 전에는 허얼커스국경출입구대안에서는 시간을 정해놓고 중쏘국제공공차가 오갔다. 그러다가 1960년후로는 중쏘관계가 긴장해지면서 쌍방에서 차를 움직이는 것이 뜸해지기 시작 것이다.      


4월 22일 이른새벽, 손에 짐을 든 10여명의 변계평민녀인들이 애들을 이끌면서 허얼커스국경출입구에 나타나 국제공공자동차를 타고 쏘련으로 가게해달라고 졸랐다. 변방검사참을 지키는 한 당직인원이 그들에게 오늘은 건너가는 차가 없다고 다시알려줬다. 한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욕지걸이가 터져나왔다. 당직과 변방군전사가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없었다. 국경을 넘겠다고 온 사람이 어느새 백명도 더 되였다.
  건너가려는 사람은 눈깜짝새에 더 많이 불었는데 희한하게도 그들의 손에는 모두 “쏘교증”이 쥐여있는것이였다.    
“우리는 고향에 가겠다!”
    
“우리는 쏘련에 가겠다!”
    “
아니, 당신들이 여기서 그런 증건은 어떻게 얻었소?”
    
변방당직이 의아해 하면서 증명서를 검사하고 있는 사이 또 천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허얼커스국경출입구는 어느덧 구호소리 욕지걸가 한데범벅이 되어 오구탕을 놓았다.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당직은 막부득한지라 급히 전화를 걸어 주위(州委)에서 차를 보내줄것을 청구했다.  
그랬더니 답복이 왔다.
연구해볼테니 좀 기다리라는것이였다. 
   

한데 주위령도를 포함해 사태가 이같이 엄중하게 번져질 줄은 몰랐다. 주위령도가 좀기다리라했다는 말을 듣자 심보가 다른 사람이 변방주민들을 선동했던것이다.
    
“가자, 그 한족우두머리를 찾아가자!”
    
한무리의 사람들이 발길을 돌려 이녕시(伊寧市)로 욱 쓸어갔다. 

이녕시주위의 지도자는 허얼커스변방참에서 걸어오는 긴급전화를 받은지 몇분안되여 이녕지위나저 비정상적인 사태에 빠지는지라 이 모든 것은 어떤 자들이 사전에 꾸민 행동이라는것을 알아챘다. 이리시에는 쓰딸린대가가 있는데 길 북쪽에 이리군분구가 있고 마즌켠에는 당위, 동쪽켠에는 주위가 있었다. 이 세단위의 사이거리는 그리멀지 않았다.    
아침9시경, 쓰딸린대가에는 차와 사람들이 다녔고 질서가 정연했다. 교통경찰이 지휘봉을 들고 시내교통을 지휘했고 상점들은 제때에 문을 열었다. 


그런데 큰길에 돌연히 젊은것들이 한패나타났다.  그들은 저마끔 손에다  몽둥이와 멜대를 들고는 걸으면서 웨쳐댔다.
    
“한인들을 때려죽이라!” 
   
“한인들을 때려죽이라!” 
    
기세사나왔다. 그들은 길가는 한인을 만나면 그가 누구건간에 가리지 많고 몽둥이로 마구때리고 주먹질 발길질했다. 그들은 그러면서 곧추 주위로 갔다. 문을 지키던 경위전사는 그들을 들어못가게 막으려다가 몽둥이에 맞아 쓰러졌다. 그 한무리는 벌떼마냥 주위뜨락으로 짓쳐들어갔다. 

 곤봉, 벽돌, 돌멩이가 우박치듯 날아들어 망루를 들부시고 전달실의 문을 마수었다. 주위에서 사업하는 간부 하나는 외지에 일보러 가느라 찦차에 올랐다가 노한 사람들에게 겹겹이 쌓이고말았다.    
“마사버려라!”
    
누군가 웨쳐댔다.
    
찦차는 순식간에 창이 깨지고 뒤번져졌다.
    
상처를 입은 간부 하나가 간신히 차안에서 기여나왔다. 
       
“차를 태워버리자! 태워버려..... ”
 
   
찦차는 기름통이 터져 기름이 흘러 나왔다. 누군가 불을 달려했다.... 이 다급한 순간에 경위전사와 주위간부 하나가 일체를 불구하고 달려들어 차안의 동지를 구원했다. 
   휘발유에 불이 달리자 불길이 세차게 일면서 연기가 타래쳐 올랐다.    
한편 적어도 3천여명에 달하는 무리가 주위의 뜨락을 공점했는데 적잖은 자가 손에 토총과 화통 쥐고 주위판공루를 공격했다. 
   
“땅.... 땅..... ”   
   
총성이 멎지 않았고 깨진 창문으로는 화통이 날아들었다. 

주위판공루는 토황색나는 괴테식건축물이였는데 모두 4층으로 되어있었다. 루내에 갇힌 1백명넘는 간부는 의자로 문을 막고 제 강위를 지키는 한편 심스레 퇴각했다. 첫층을 빼앗기자 그들 중 일부간부는 후원으로 조심스레 철퇴하여 주위와 멀지 않은 구당위의 뜨락으로 갔고 일부간부는 지붕꼭대기로 올라갔다. 사단을 일으킨 이 한무리의 사람들은 당안과 비밀문건들을 빼앗았고 판공실을 들부시였다. 주위간부 일부는 지붕우 테라스에 몰리였다. 아래에서는 몇 번이나 시도해도 올라가지 못하게 되니 씩씩거렸다. 쌍방은 그 누구도 양보하려하지 않고 팽팽히 맛섰다.            
몇사간 후에 한무리의 군중이 주위에서 멀지 않은 구당위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중의 어떤 자는 반동구호를 부르면서 군중들을 때리고부수고 빼앗으라고 선동했다. 당시 우르무치군구부정위 조다네브는 마침 공작조를 데리고 이리에서 사업을 검사하고있었는데 소식을 듣자 군분구에서 구당위로 급히 왔다. 조다네브는 개인의 안전도 불구하고 원내문전의 높은데 서서 높은 목소리로 권고했다. 
   
“여러분들, 남의 나쁜 얼림에 들지 마시오. 당기관을 충격하는것은 위법이니 그런줄을 알고 무슨 요구가 있으면 정당히 반영해야지 이렇게....”
    
“저따위말은 듣지도 말라, 저 사람은 한인과 꼭같은 공산당이다!”
    
“때려라, 돌격하자! 저따위 반한인은 때려죽여야한다!”
    
이런 웨침소리와 함께 그들은 대문을 향해 돌격해왔다.
조다네브와 군당위의 간부들은 판공루앞까지 물러갔다. 사람무리는 철란간을 넘어뜨리면서 원내로 짓쳐 들어왔다. 이때 이리한분구경위련전사가 도착했다. 그들은 팔에 팔을 걸고 사람담장을 이루어 충격하는 군중을 막았다. 하지만 몇분안되여 사람무리가 다시금 사납게 달려들기에 경위련은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때에 신강자치구정부와 우르무치군구는 다 타청, 아얼태, 부얼타라와 이리에서 보낸 긴급전화와 전보를 받았는데 당지정부와 군영은 모두 충격받고 포위되였으니 빨리 부대를 파견하여 지원해달라는것이였다. 그러나 상급의 답복은 부대가 없으니 각지에서는 자기의 힘으로 사태의 확대를 방지하라는것이였다. 
   
허얼커스산어구에 사람떼가 점점 더 많이 몰려들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다리를 지키는 변방전사를 둘러싸고 공격했는데 한무리는 높다란 깃대를 번저뜨리고는 오성붉은기를 찢어놓은 후 허얼커스교두로 돌격했다..... 이때 쏘련경내에서 아라무투방향으로 길다란 차대가 왔는데 객차도 있고 찦차도 있었다..... 누군가 웨치였다. 
   
“우리를 고향에 실어다주자고 마중온거다, 쏘련에 갈 사람은 다리를 건너가자.”
사람떼는 미친듯이 다리쪽으로 밀려갔다.....
 
   “땅..... 땅..... ”    
변방전사가 공중에 대고 총을 쐇다가 인츰빼앗기고 밀리였다. 그는 넘어갔다. 사람떼는 그의 몸을 가로채면서 물흐르듯 쏘련경내로 들어갔다. 
   

한편 주위판공루우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과단성있게 포위를 뚫고나가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몇자루안되는 총으로 아래를 향해 갈기였다. 총상을 입는 사람이 생기였다. 그제야 사람들은 무서워 동요하면서 물러나기시작했다. 이 기회에 주위간부들은 기세를 보이면서 뛸쳐나왔다. 
   
한데 구당위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사람떼는 조금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거니와 대청문앞까지 바싹죄여갔다. 
   
경위련장이 길복판에다 줄을 그어놓고 선포했다.
    
“이제 누가 이 선만 넘으면 내가 총을 쏘라 명령할 테다!”
    
그 누구도 그따위 말은 개방구모양으로 듣는 척 하지도 않았거니와 그가 입을 다물기바쁘게 고함을 질러냈다. 
   
“충, 충..... 저애가 감히 총을 못쏴, 못쏜단말이다!”
    
앞쪽으로 떠밀린 사람들이 그 선을 넘어섯다. 
   
련장은 이를 악물고 손을 획 저었다. 
   
전사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총을 갈겼다. 
  사람들은 멍청해졌다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전사들은 이번에는 땅에다 대고 갈겼다. 몇이 다리를 맞고 꼭그라졌다. 어떤 사람은 밀려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저절로 엎어지고.....   
“총을 쏘는구나! 정말이구나..... ”
    
사람무리는 물러가기시작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쏘련으로 건너가는 변경출입구로 향한 큰길은 과연조잡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자동차엔징이내는 우르릉소리, 뜨락또르의 철궤가 굴러가는 소리..... 혼합된 검스레한 사람떼가 흐르고 있었다. 소몰고 양몰고 외나무바퀴차에 이사짐을 꿍쳐 싣고 오로지 한방향으로만 가고 있었다. 


낮에 국경을 넘어갔던 사람들이 다시건너와 각가지 소문을 퍼뜨렸다. 
   
“저쪽변경에서는 벌써부터 우유와 빵을 준비해놓고 기다린다. 우유도 골바싸도 쌔쿠버렸다. 돈을 받지 않는다. 마음대로 배껏 먹을 수 있고 가져가도 된다! 말짱 공산주의다!”
    
“집과 풍막도 해놓았다. 얼마오래들어있어도 내쫓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뻐서 환성을 올렸다. 
   
그러나 이때 하니얼이란 촌간부가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길복판에 드러누우면서 눈물코물 짜가면서 곡진히 충고했다. 
   
“친구들, 제발가지 말기오. 우리가 세세대대 중국에서 살았으니 인젠 중국사람이 아닌가. 아무리 궁리해두 건너갔다가는 후회할거같은데.... ”
    
그 누구도 듣는척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드러누운 그를 가로타고 갈길을 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달려오던 자동차가 그의 앞에 멈추더니 운전사가 그를 길에 널려있는 개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길을 비키라했다. 그래도 안되니 청년 둘이 차에서 뛰여내렸다. 그들은 마치 무슨 물건이나 다루듯 그를 들어 차우에 올리였다. 하니얼은 자기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면서 차에서 뛰여 내려 길가에 딩굴었다. 

   
아얼태로부터 타청, 부얼타라, 이리에 이르는 4개지구, 20여개현의  3,000km넘는 중쏘국경선에 있는 몇 개 중요한 변경출입구는 밤낮3일간이나 사람물결이 마치도 조수마냥 끊임없이 흘렀다. 퍼런 대낮이였건만 쏘련당국은 커다란 고성의 스피카로 방향을 알려주었고 밤이면 탐조등을 비춰 길을 밝혔다. 이같이하여 쏘련으로 도망한것이 6만 7천여명에 달했는데 2개현은 지어 몇백명밖에 남지 않았던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래 처음으로 발생한 한차례의 국제간 변경주민탈주사건이였다. 이로하여 기나긴 변경이 자못 긴장해졌으니 이는 두나라지간에 충돌을 일이키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조룽태예브와 말꼬브소장은 신강군구례당에서 나오자 곧추 자기들을 보내는 찦차에 올랐다. 그들뿐이 아니였다. 그 둘을 따라 쏘련으로 가는 위급이상 군관이 40여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쏘련에 갔다오겠다고 보고를 올리니 이번의 소란스러운 도주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을 알게 된 중앙에서는 모택동의 말 처럼 가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말려둘 필요없다고 여겨 요구를 수락한 것이다. 
   

방금있은 환송회의에서 신강군구의 주요책임자들 중 누구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적잖은 이들이 그들을 곱게 쏘련으로 보내는데 대해 마음상 달통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게 놔둘뿐만아니라 환송하라는 중앙의 지시가 있으니 그대로 집행하는 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들은 가족까지 다 데리고 우르무치를 나와 중쏘변경을 향해 달리렸다. 
   
어언간 30년 세월이 흘러갔다. 얼어붙었던 중쏘관계는 해동이 되었고 온셰계가 온화해졌다. 
   
1991년 12월 26일, 쏘련은 해체되고말았다. 예리친은 1992년 1월 2일에 물가를 전면개방한다고 선포했다. 하여 각 공화국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물가를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하루밤새에 깨끗이 가난해진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굶주림이 엄습하는 기나긴 겨울을 보내면서 30년전에 도망쳐 쏘련에 갔던 사람들은 드디여 중국을 다시금 그리게 되었다. 


모쓰크바로부터 뻬뜨로그라드로부터 알마아따로부터.... 비행기로, 기차로, 자동차로 이리와 타청으로 오느라고.... 허얼커스국경출구의 국제자동차들은 사람을 실어나르느라 몸살을 앓았다. 허얼커스변방참의 오성붉은게는 자랑스레 휘날리고 있다. 장엄한 국기아래서 총가목을 잡고 국토를 지키는 변방전사들의 모습은 씩씩하고 의젓하다. 
       
쏘련에서 건너온 이들은 거개가 30년전의 그때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중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였다!  음식점마다 상우에 차려지는 풍성한 요리들,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 거리마다 생기가 넘쳐 흐르고있었다. 그들은 상점의 매대마다에 그득한 가지각색의 상품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이 변하리라구야 언제 상상이나 했으랴, 그지간 개혁개방의 물결을 탄 중국은 발전이 너무나 현란했던것이다. 
   

허다한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고 남아있으려했다. 리유는 간단했다ㅡ 우리는 본래 중국사람이니까. 하여 관방을 찾아갔더니 완곡히 사절하는것이였다, 이미 중국국적을 긁어버렸다고 하면서. 
       
30년 전 길바닥에 누우면서까지 가지말라고 충고하던 촌간부 하니얼은 아주 보편적인 진리를 말했던것이다. “양무리를 떠난 양이 살지 못하듯 조국을 떠난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고.  

               1954년  흐루쇼브 중국방문때  
      백만중국사람을 쏘련에 보내줄것을 요구.

1954년 9월 29일, 쏘련의 지도자  흐루쇼브는 대표단을 령솔하여 북경에 와서 중화인민공화국성립5주년경축에 참가했다. 방문기간에 그는 중국의 지도자에게 쏘련은 씨비리지구에 로동력이 적으니 중국에서 공인을 100만 보내여 씨비리구를 개발하게 하는게 어떤가고 제기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줄곧 명확한 태도표시가 없었던것이다. 
   
다른 한차례의 회답중에 흐루쑈브는 모택동과 말했던것이다. 

“모동지, 우리는 결코 당신들에게 어려움을 끼칠생각이 아니며 우리의 건의를 견지하자는것도 아닙니다. 만약 당신들이 이 일이 중국인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제기하지 않은 셈치고 속에 두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제 사람갖고도 해낼 수 있으니까요.”
        
쏘련지도자의 재차되는 요구를 감안하여 중국정부는 공인을 쏘련에 보내는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연구했다.
 

1954년 10월 12일, 중쏘량국은 합작협의에 서명했다. 협의규정에는 중국정부가 공인을 쏘련에 파견하여 일을 하게 하며 쏘련측에서 관리를 협조한다, 쏘련정부는 중국공인에게 상응한 보수와 복리대우를 한다, 중국공인은 쏘련에서 일하는 기간에 로임총액의 10%를 중국에 보낼 권리가 있으며 쏘련에서 3년간 일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는 1000루블이내의 로임과 쏘련에서 자기의 로임으로 산 물품들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등등 으로 되여있었다. 

   
1955년초, 중국국무원에서는 “중국공인을 쏘련공산주의건설에 파견하는 회의”를 열고 공인이 출국하는 구체적인 사항들을 놓고 토론했다. 회의는 출국하는 공인을 8만명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중 만명이 넘는 복원군인이외의 공인은 주요하게 하북, 산동, 하남 등 북방성들에 명액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중쏘쌍방은 다가 출국하는 공인의 신체건강상황을 검사하는 것과 집결지점 등 문제를 해결했다. 회의에 참가한 철도부문에다 공인들이 출국시에 리용할 전용차를 준비할 임무도 맡기였다. 


중국측에서 바로 이 일을 참답게 대하고 있을 때에 쏘련측에서 그만 탈이 생기였다. 아마 흐루쇼브가 일시 제 기분에 말을 꺼냈던모양인지 아니면 쏘공중앙의 연구토론도 걸치지 않았던모양인지 그는 후회했던것이다.  흐루쇼브의 회억록을 보면 지어 이렇게 쓴 구절이 있는것이다. 
   

“그들은(중국사람) 칼날에 피한방울도 묻히지 않고 씨비리를 점하려하였다. 그들은 씨비리에 침투하여 경제를 접관하려고 했다. 그들은 씨비리에 정착한 중국사람이 그곳 로씨아인과 기타 쏘련사람보다 더 많게 할 잡도리였다. 요컨대 그들은 씨비리는 로시아사람의것이 아니라 저들 중국사람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허나 그것은 어쨌든 그 자신이 주동적으로 제기한 것이라 후르쇼브는 식언을 공개하지 않은 채 수하관원에게 방법을 대여 그 계획을 내쳐두라고 지시했던것이다. 
1955년 4월 29일, 중국에 와있는 쏘련대사 유진이 류소기를 배알하여 중국에서는 공인을 쏘련에 보내지 말것을 완곡히 제출했다. 하지만 중국측에서는 쏘련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한채 의연히 계획대로 쏘련측에 원조할 준비를 했던것이다. 류소기는 좋기는 일후 많은 사람이 건너갈 준비로서 먼저 몇백명 혹은 천여명만 쏘련에 보내여 경험을 얻게 하자고 했다. 쏘련에서는 결국 중국에서 1,000명공인을 먼저 파견하는데 동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중국공인 천명이 쏘련으로 갔다. 
       
1955년 여름, 하북성 청원현의 첫패 1,000명 공인과 3명 관리간부가 쏘련으로 가는 머나먼 려정에 올랐다. 쏘련측에서는 그들을 이르꾸쯔크동방중공업건축에 400명, 몰로또브건축관리국에 302명, 치따련합기업에 298명을 배치했다.
 
  
 7월 7일, 기차를 타고 보정역에서 출발한 첫패의 공인들은 만주리를 거쳐 쏘련으로 건너갔다. 쏘련측은 그들에게 쇠고기통졸임, 콩통졸임, 빵과 닭걀, 사탕 등 식품을 내주었다. 한데 이쪽측은 그런 음식에 습관되지 않았던 탓에 적잖은 사람들이 반남아먹고는 승무원에게 주거나 아니면 던져버리고말았다. 그들에게는 이제 공지에 간 후에는 어떻게 벗티여 나갈지 하는 일종의 두려움이 갈마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정서는 연기마냥 인츰사라지고말았다. 중국공인들이 탄 전용차가 목적지에 이르자 그곳 당정부문과 그들을 접수하는 기업에서는 환영대회를 열고 뜨겁게 맞아주었던것이다. 쏘련공인과 그네들의 가족, 아동들은 다가 열정적이고 우호적이였거니와 각 기업들에서는 그들을 목욕시키고 영화를 관람시키며 공원을 유람시키는 등 활동을 조직해서 중국공인들로 하여금 감격을 금치못하게 했던것이다.  

며칠간 휴식한 다음 중국공인들은 충만된 열의로 쏘련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중국공인들은 보통 보조성적인 성질을 띈 수공업로동 이를테면 목공, 제분공, 벽돌쌓기 아니면 미장일이여서 그런 기술을 집어치우고 새 기술을 배우자니 맞지 않아 자연히 불만정서가 생기였다. 일을 분배 할 때 허다한 사람들이 서로 목공일을 하겠다고 나섯다. 그리하여 어떤 소대에서는 지어 일부분을 뽑아 검사하는 방법으로 목공문제를 해결했던거다.        
공작초기, 일에 숙련되지 않았거니와 허다한 공인들이 나이 어린데다  체질이 약한 탓에 생산정액을 완성하는 률이 그리 높지 못했다. 하지만 차츰 말을 알아듣고 일에 숙련해지니 생산정액을 완성하는 률이 높아지기 시작해서 쏘련측에서는 중국공인들에 대해 차츰 만족하게 되었다. 한시기를  지내보니 중국공인들이 기술을 제대로 배워내거니와 일솜씨도 괜찮은지라  쏘련사람들은 그들을 알아주고 지어 칭찬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숙사에는 수음기가 있고 신문간행물열람실도 꾸렸다. 대부분 사람이 서양음식에 습관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그들은 중국공인중에서 사람을 물색하여 취사를 책임지움으로써 제민족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짓도록 조치를 취했던것이다. 그 외에도 쏘련측의 당과 공회의 책임자들은 자주 생활구에 와서 의식주문제를 검사하고는 의견을 청취하면서 극력 편리를 도모하게끔 힘썼다. 거주방면에도 마찬가지였다. 쏘련측에서는 중국공인 모두가 두층짜리 층집에 들게 하였는데 방하나에 4ㅡ6명, 방바닥에는 페인트칠을 했고 스팀(暖氣)이 있었다. 중국공인들의 이불과 침대의 시트(床單), 베개는 한주일에 한번씩 깨끗한 것으로 갈아주었다. 매층마다에 주방이 두개있어서 작식을 제손으로 할 수도 있었다. 목욕실 두 개, 양수관이 달린 변기위생칸 그리고도 젖은 옷을 말리우는 건조실까지 있었다. 이르꾸쯔크와 치따기업에서는 매개 중국공인의 침상앞에다는 지어 융단을 폇고 몰로또브기업에서는 매 숙사에 전열주전자까지 가춰주던것이다. 
   
중국공인숙사아빠트는 동마다에 홍각(紅角)이라 이름지은 열람실이 있었는데 실내에 탁상, 의자, 쏘파며 악기, 괘도, 장기류 등이 구전했거니와 중국의 <<인민일보>>, <<공인보>>, <<중쏘우호보>> 등 신문, 잡지등의  간행물이 있어서 볼 수 있었다. 쏘련측에서는 또한 매 사람에게 수음기 한대씩 주어 업여시간을 심심하게 보내지 않도록했다.  그 외에도 매 공지에는 병원과 영화관, 구락부, 상점, 우전국, 신수리부 등을 갖추었다. 생활조건이 이러하였기에 중국공인들은 다가 아주 만족해하였던 것이다. 

    
             중국젊은이들이 이국련정에 빠졌다.    

각 기업들의 숙사며 식당이며 상점의 복무원과 영업원들은 다가 녀성이였다. 지어 공지에도 녀공이 적지 않았다. 하여 차츰 서로알게 되었는데 중국공인들의 근로하고 소박한 성품이 적잖은 쏘련녀성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하여 애정이 끓어오른 젊은 여성들은 주동적으로 진공을 들이대여 애정경주를 벌리였다. 치따에서만도 중국공인 8명 쏘련녀성과 연정에 빠져 헤매였다. 

   
이르꾸쯔크경우 쏘련녀공들은 늘 밥먹는 시간을 리용하여 중국공인들에게 접근했는데 그들은 중국청년을 숙사로 끌고 가서 함께 술을 마시거나 다른 수작질을 했다. 쏘련측의 녀번역원이 적극적으로 대상을 소개해주는 뚜쟁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언어소통이 잘 안되니 어떤 녀성은 자기가 좋아하는 중국공인의 번호를 암암리에 기억했다가는 번역에게 물어 그의 이름을 알아냈다. 쏘련녀공 하나는 중국공인에게 매일 “호란삼”궐연 한갑씩 사주었거니와 그가 다른 곳으로 조동해 간 후에는 십리길이 넘는데를  도보로 만나보군했다. 

이국연정에 대한 쏘련관원과 기업령도의 태도는 아주 명랑한 편이였다. 그들은 중국공인에게 알려주었다. 결혼을 원칙상 허락한다, 하지만 비준을 받아야 한다. 그 원인인즉은 어떤 부녀들은 공지에서 내놓고 죄되는 짓을 하기때문이다. 중국공인들은 맡은 일을 뛰여나게 완성하기에 이르꾸쯔크동방중공업건축 도라스총경리 이브리크는 지어 절반우스개소리로 이런말까지 했던것이다.    
“나는 우리 여기 공인들은 돌아가지 못하게 할참요. 방법을 다해서 어떻게하나 여기서 결혼해 눌러앉게 만들 생각이라니까.”         


맨 첫패의 공인이 쏘련에 옴과 거의같은 시각에 8명으로 구성된 중국단판소조도 모쓰크바에 도착했던것이다. 쏘련측과 계획한대로 공인을 계속 파견할 문제와 쏘련의 사회주의건설을 도와줄 일을 토론하려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들을 접견한 쏘련로동후비총국국장은 쏘련측에서는 아직 중국공인을 계속모집 할 계획이 없다고 알리는것이였다. 하여 중국측의 소조책임자 호명(胡明)은 돌아와 정황을 회보 할 때 자못 경아해서 “이 모양을 보니 우리가 원래 계획이 어딘가 많이 잘못된것 같다.”고 말했다.  

그후로부터 중쏘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쌍방에서 협상했던 항목들은 점차 걷어치우게 되었고 쏘련에 공인을 더 보내려던 계획도 소리없이 사그라지고말았다.


                중쏘관계력사에 있은 일 
       작은사건이큰 영향을                           

이것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고를 불러일으킨다. 중쏘지간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정리해도 여전히 어지럽기만하다. 그것은 란세의 알륵으로서 피차 도박을 하고 바둑을 두듯이 선명한 겨룸이였건만 또한 오리무중에 빠진것 같이 흐릿해서 갈피잡기 어려운것이다. 맑스레닌주의, 홍색쏘베트를 내놓고 중국에서 얻은것이 무엇이였는가? 쏘련로씨아와 중국공산당지간에 그 사이 중국의 운명에 관계되였던 란세의 알륵에 대해 구경 여하히 결론을 내릴것인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채 숨겨있는 비밀은 얼마나 되는지?  빛을 뿌리였던 “큰사건”중에 사람들이 무의식간에 홀시하여 점차 잊어가고있는 사건들은 또한 얼마나 되는지?.....  

국공합작에 종지부호를 찍고 만 5월지시.        

공산국제(모쓰크바가 령도하는 제3국제)는 중국에 보낸 “5월지시”에서 토지혁명을 전개하고 농민을 발동하여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며 더 많은 공농령수들을 흡수해 국민당중앙에 들여보내여 그 상층을 혁신하도록 하며 2만명의 공산당원과 량호(당시 공산당령도를 받았음)의 혁명공농 5만명으로 신군(新軍) 몇개를 편성하라고 요구했다. 이런요구는 말할 것 없이 범깝지모양으로 보기 무서운 허세뿐 실현되지도 않을 일이였다. 
       
계계(桂系)의 명장 황소(黃紹)가 자기보고 장개석을 반대하여 토제개혁을 하라고 권고하는 한 공산당원에게 바른 말을 했던 것이다. 토개정책은 지주와 자경농의 반대를 받을것이다. 군대병사들 가운데는 출신이 세전농인 사람도 있고 자경농인 사람도 있으며 군관 9/10가 집에 땅이 있는 소지주자식들이거니와 나머지 1/10도 군관노릇을 하는것이 땅을 얻자는 것이 목적인데 토개를 한다면 그건 그네들의 생활기초를 허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자고 하겠는가? 당시의 정치현실을 놓고 보면 황소의 분석이 공산당의 판단보다도 실제에 더 부합되는것이였다. 
   
하건만 모쓰크바에서 파견되여 온 공산국제대표단 단장 루이는 제마음대로 모쓰크바에서 온 전보를 왕정위(汪精衛)에게 보이여 점차 실행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왕정위는 모쓰크바의 지시를 당내고층인물들에게 공개하였으니 결과가 어떠하리란건 불보듯 빤했다. 7월 15일, 무한국민당중앙은 최종적으로 공산당과 결렬하기로 결정지었다. 하여 공산국제는 제가 극력 이루어 놓았던 국공량당 제1차합작에 종지부호를 찍고말았던것이다. 
        
   
중쏘밀월이 시작된것은 중공 6차대표대회부터
        

1928년초, 모쓰크바는 무척 애를 써서 몇백명에 이르는 중공의 대표들을 비밀리에 중국각지로부터 국경을 넘게 했던것이다. 소부분이 상해에서 배를 타고 울라지보스또크로 간외 대부분이 동북의 철로편을 빌어 대련, 할빈을 거쳐 만주리에서 국경을 넘어 모쓰크바에 갔다. 이 길이 공산주의를 전파하는데 적잖은 편리를 주었기에 “홍색비단길”이라 불렀다. 
 
이같은 대표대회에서 작성된 소유의 문건들은 더 말할 것 없이 다가 쏘련사람이 초안을 잡거나 혹은 방조하는 형식으로 작성되였던것이다. 중공중앙의 령도를 선거하는 것을 포함해서 다가 쏘련사람의 뜻에 따라서 엄격히 일을 절차를 밟아 나갔던 것이다. 중공은 초기에 몇사람이 아니던것이 발전하여 수만명으로 되였고 곡절도 겪었으며 여러방면으로 쏘련의 가지가지 원조도 받았다. 그랬기에 중국공산당은 구중국의 그같이 극단적이고 복잡하며 위험한 속에서도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더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1944년에 쓰딸린은 미국에 주재하고있던 쏘련대사 하리만에게 중공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서 “인조황유(人造黃油)”식의 공산당이라했다. 만약 그가 내심상 그 어떤 실망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그가 단결이 제일 좋고 밀접했던 시절인 1928년ㅡ1936년간을 그리워 했을 것이고 그의 사전에 적혀진 “단결”이란 함의는 달랐을 것이다. 그 기간에 쏘련은 공개적으로 공산당사람들이 일으킨 광주폭동을 견결히 지지하면서 중공도 쏘련식대로 쏘베트혁명을 발동할것을 바랐던 것이다. 그들은 정치방침으로부터 구체적인 문건, 지어는 중공령도를 선거하는데 이르기까지 대표를 쏘베트구역에 파견하여 거의 도맡다싶히 사업을 지도하고 작전을 지휘했던것이다. 그러나 모쓰크바가 많은 인력과 물력으로 정성껏 방조하느라한것이  결국은 홍군을 험난한 장정의 길로 몰아넣고말았던것이다. 
       

“九. 一 八”사변의 참고ㅡ 중동로사건
                 

동북이 깃발을 바꾼 후 젊고 패기가 있는 장학량(張學良)은 줄곧 중동철로의 관리권을 걷어들이려했다. 1929년 5월 25일, 그는 쏘련이 협의를 위반하고 동북에서 공산주위를 선양한다고 질책하면서 쏘련령사관을 수색했다. 7월 10일에는 쏘련측의 중동철로국장, 부국장 등 59명을 구축하여 출경하게 하였으며 쏘련측의 유관 단위들을 동시에 봉쇄해버렸던것이다.     
   
그로인하여 쏘련군대와 동북군은 무장충돌이 생겼고 장개석국민정부역시 쏘련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투는 주로 만주리와 자뢰놀지구에서 벌어졌다. 7월말부터 시작하여 11월에 이르는 기간 줄곧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차나했는데 쏘련군은 선후하여 자뢰놀, 만주리, 해라얼을 점령했것이다. 중국군대는 사상과 포로 9,000여 명을 냈다. (사망 2,000여명, 포로 7,000여명.) 그러나 쏘련측의 통계를 보면 쏘련은 사망한것이 143명, 실종 4명, 부상자 665명밖에 되지 않았다. 12월 20일에 장학량은 대표를 파견하여 <<하바롭스크조약>>을 맺는 수 밖에 없었다. 중국측은 쏘련이 제출한 요구에 따라 원상대로 중쏘가 공동히 중동철로의 관리권을 행사하고 쌍방이 포로를 교환하는 것으로써 전쟁이 결속되였음을 선고했던것이다. 
   

이 사건이 중국으로 놓고 보면 자신의 권익을 찾자는 행동이였건만 남원북철(南轅北撤)이라 결과가 의도와는 맞지 않게 반대로 되고말았던 것이다. 장병을 잃고 패전했거니와 백성이 재난받았으니 본래 황페하던 국가가 더 형편없이 되였고 동북군은 무능한 제 실력을 수치스레 폭로하고 만것이다. 더욱히는 국제사회에 동북문제를 간섭할 기회를 지어 준 것이다. 두해만에 일본관동군이 공공연히 “9.18사변”을 일으켜 침략을 감행한 것이 바로 그를 립증하는것이다.
    

중동철로사건에 대해서 공산국제원동국은 처음부터 중공중앙에 “무장으로 쏘련을 보위한다”는 구호를 명확하게 제줄했다. 1929년 9월에는 다시한번 명령했던것이다. “그 누가 충성스레, 진정으로, 견정하게, 뿐만아니라 조금도 남김없이 무장을 잡고 떨쳐나 쏘련을 보위한다면 그가 바로 혁명자이고 국제주의자인 것이다.” 
       
중공중앙은 조금치도 주저함이 없이 이에 적극향응해나섰다. 
   
하지만 이에 반하여 령도강위를 떠난 진독수(陳獨秀)는 중공중앙에 공개신을 보내여 이런 때에 편면적으로 “쏘련을 옹호”하는것은 “우리에게 불리”하니 간단하게 “광범한 군중이 다가 쏘련은 중국을 해방시키는 친구라고 여기게해서는 절때안된다”고 했다. 이 일로 하여 진독수 등은 현유의 정권을 근본 반대한다고 지적받았다. 중공중앙은 인차 그를 비롯한 몇사람을 정식출당시키기로  결정지었던것이다. 
       

모쓰크바는 전보로 서안사변을 개변한다고
         

영락하여 류랑하면서 고생스레 장정생활을 해온 홍군은 193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숨을 좀 돌려 쉴 수 있게 되었는데 이때는 홍군이 “항일반장(抗日反蔣)” 기치를 높이추켜들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다가 서안사변이 생긴 후에는 그 구호가 “련장항일(聯蔣抗日)”로 바뀌여버렸다. 내막이 밝혀진 쏘련당안을 보면 이런 형세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모쓰크바에서 보낸 전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12월 16일이였는데 그 전보를 일명 “모쓰크바회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보에는 중국공산당은 반드시 현실정황을 고려하여 견결히 화평적으로 사변을 해결할것을 주장하기 바란다고 했던것이다.         
                  

쓰딸린이 보낸 전보두통이 모택동이 담판에 나서게 된 뒷심이었다.
 
쓰딸린은 중화민국정부외교부장 왕세걸(王世杰)의 요구에 응하여 8월 20일과 22일에 두통의 전보를 연안에 친건데 내용은 모택동이 중경에 가서 장개석과 “긴급회견”을 하라는 것이였다. 전보에 말하기를 “일본이 투항하고나면 공화국쌍방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고려하여 이번 회견은 중요한 것이다.”전보는 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내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중화민족의 존재가 위해로울 것이다. 그것은 국제사회와 중국인민은 화평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택동은 장개석의 요구에 응해 중경단판을 해야한다.”    
모택동은 쓰딸린의 요구대로 중경에 가서 장개석과 담판하는 방법을 쓰게 된 것인데 당시로 놓고 보면 대국을 중히 여긴데서 울분을 참으면서 감히 아무말도 못하고 참았거니와 당내의 기타 지도자들에게 해석공작까지 해야했던것이다. 하지만 속에서는 분기가 그냥 올리밀었다. 모택동은  늘 원망을 삭이지 못하고있다가 1956년에 쏘련대사 유진이앞에서 제 심중을 털어놓고말았던 것이다. 
   
“쓰딸린은 중국의 형세와 중국혁명발전가능성에 대해 불정확한 예측을 했었다. 특히는 1945년에 중공중앙은 무엇때문인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아공(俄共ㅡ볼세비크)의 명이로 보낸 밀전을 받았는데 밀전에는 모택동은 중경에 가서 장개석과 담판을 견지하라는것이였다. 중공중앙은 언영부터  중경에 가는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것은 장개석쪽에서 도발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쓰딸린이 우겼으니까.” 
   
후에 쓰딸린은 쏘련방문을 간 류소기를 만나 말했다.
   
“중경으로 간것이 모택동을 놓고 보면 매우 위험한 노릇이였다고 할 수 있다. 살해될 수도 있었으니까.”이어서 그는 마음속 가책을 느끼는지 미안해하는 어투로 말했던 것이다. “승리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거요. 승리에 속하는건 다가 옳은것이니까..... 만일 우리가 착오를 범했다면 당신들은 잘한것이라 할 것이고 우리는 주의하고 개정해야한다고 해야 할 것이요.”
    

쏘공20차당대회는 “긴고주(緊箍咒)"를 벗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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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브는 쏘공 20차당대회에서 “비쓰딸힌화”정책을 실시하면서 비밀보고를 했는데 그는 "쓰딸린은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당을 훼멸하였고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든 신성한 것들을 사라지게 하면서 모든 사람을 자기의 의지에 굴종하게끔 만든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모택동에게는 "비쓰딸린화"가 긴고주(손오공이 머리에 썼던 둥근 테)를 어떻게 벗어버리는가 하는것이 연구거리였다. 이 점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중시하지 않은건 아니였다. 
   
쓰딸린은 공산국제의 전파를 통해 중국혁명을 원격조종했는데 그 태도가 과연 오만했다. 중쏘지도자가 만나 회담할 때면 종래로 중국측에서 기록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다년간 모순이 쌓이고 원한이 생기게 된 것이다. 지금은 쓰딸린이 살아있지 않는다. 쏘련은 쓰딸린이 사용했던 "긴고주"를 벗어버렸다. 그들 자신이 없애치운것이다. 각국의 공산당들은 제가끔 자기의 사유대로 움직이게 되였으니 모택동역시 당연히 기일이였다. 하여 그는 흐루쇼브의 공적을 충분히 긍정해주었던것이다.
    
"쓰딸린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을 응당 승인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당내를 포함해서 각국공산당의 형세를 크게 개선하게 한 것이다. 쓰딸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이 마치도 우리 당을 위해 뚜껑을 열게한것 같기도하다. 그 누가 우리들에게 이같이 용이하고도 정확하게 개인숭배를 인식하게 했는가? 바로  흐루쇼브동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한편 모택동은 쓰딸린을 비판하는데 대해서 당연히 불만이 생기기도했다. 쏘련이 개인숭배문제를 제출할적에 중국의 광대한 기층간부와 군중들은 자연히 국내문제를 련상하게되였던 것이다. 하북성의 기관당원간부는 "지난날 쓰딸린을 가송한것이 개인숭배라는데 그렇다면 우리 지금 ‘동방홍’을 널리부르는건 그래 개인숭배가 아닌가?" 했고 광주시 부분적공상계의 사람들은 "쏘련이 이같이 결함을 폭로하고 비판하는것이야말로 민주정신을 발양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던것이다. 
   
"우리는 어떤때는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축복한다!' 고 빌었으니 봉건주의 색채가 짙은 것이다. 이역시 개인숭배인것으로서 당의 집중령도의 힘은 잊고있는 것이다." 
      
왜서 이렇게 되여가는가?
   
모택동은 이같은 자료들을 보고 다시금 고려하는 점이 있게 되였던것이다.   
  

 중쏘관계가 파렬된 도화선은 금문도포격
        

중쏘관계가 파렬된 도화선이 “장거리전파방송”과 “련합함대사건”이 실은 도화선인것이 아니라 “금문도포격”이 지짜도화선인 것이다. 1958년 8월 23일오후, 당시 시계바늘은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택동의 한마디 명령에 따라 복건의 하문ㅡ천주 1선 30km해안선의 해방군포병은 일시에 대만금문해협의 금문도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60일간의 “금문도포격”사건이 발생된 것이다. 
   
이는 대만해협량안의 군민모두에게 이외의 커다란 진동을 가져다주엇다. 금문도를 격렬하게 포격하는 시각에 장경국(蔣經國)은 금문도에 파견되여 포격을 지켜보았다. 장개석은 그한테 말했던 것이다. 
  
“금문도를 꼭 걱정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곳일을 처리하지 않고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금문도포격”이 방금 시작되자 미국정부는 반응이 인차 강렬해졌다. 
 며칠후에 대만해협부근에 항공모함 6척이 집결했고(당시 미국에는 모두 12척밖에 없었다.), 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 잠수함 1척과 10여척이 되는 후근보급선이 집결했던것이다.  애선후윌은 모택동을 보고 이런 때에 대규족인 표격을 발동하는건 뇌즙을 짜는게 아닌가고 했다. 그는 혹시 뒤에서 쏘련이 추기고있지나 않는가고 의심했다.

허나 그 생각은 틀렸다. 금문도포격사건이 생기니  흐루쇼브는 대단히 노여워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전혀 모르고 있은 것이다. 중국은 사전에 “큰형님”에게 언녕부너 그 음모를 갖고있은것을 귀띰조차하지 않은것이다.
당시 중국
은 한창 인민공사화를 하는 때여서 공산국제에는  차츰 이런 말이 나돌았던 것이다.
“전 세계의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리론가, 정치가는 오직 한 사람뿐인데 그가 바로  모택동이다. 흐루쇼브는 하나의 실농꾼이다, 강냉이를 심을줄아는 실농꾼이다. 흐루쇼브는 중국은 억센 날개를 갖고있다는사실을 부득불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흐루쇼브
의 눈에는 모택동이 일부러 중국은 독립행사를 할만한 지위능력을 갖고있다는것을 과시하는 것 같이 보이였다. 금문도에 대한 포격행동본체가  흐루쇼브가 제창하는 “3화”로선에 반대곡을 부는 것으로서 모택동은 중국이 “전쟁변원정책”으로 국제긴장을 조성하여 미국을 불리하게 만들자는 것이라 여기였다. 
   
대만해협위기는 중쏘가 대외정책에서 중대한 분기가 있다는것을 반영하기에 흐루쇼브는 용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금문도폭격효과를 진진하게 흠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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