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기간에 나는 모택동의 겸직비서로 있으면서 세통의 편지를 썼다. 그 세통의 편지는 모두 내가 “대약진”을 보는 감상이였던것이다. 모택동은 그 편지를 보고는 자기의 견해를 말하였는데 어떤것은 작은 범위내의 즉흥적인 평가였고 어떤것은 대중이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의론이였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인상이 깊거니와 감개무량할 때도있다.
모택동은 내가 그의 호언장담이였던 “황하에 이르지 않고는 마음을 돌리지 않으리라.“말을 번지면 개의치않았거니와 웃음을 텃치기까지 했다.
1958년 6월 상순, 모택동이 나를 찾기에 갔더니 년간 강철생산량을 배로 올릴 타산을 하고있었다. 6월중순부터 7월상순사이 나는 상해에 가서 화동구전력계통하방회의를 했고 이어서 화동구계획회의에 참가했다. 이러한 회의들이 실상은 5월에 열렸던 8대2차회의에서 사회주의건설총로선을 정식통과 하고나서 바삐바삐 대약진의 중요한 안배를 하느라 한바탕 여론을 크게 일으키는 하나의 보취였던것이다.
회의가 끝나 상해를 떠난 첫날밤(7월 7일)에 나는 모택동에게 공작성질을 띈 편지 한통을 보냈다. 나의 그 편지는1959년도의 600만톤강철생산계획이 기계공업에 가져다주는 엄중한 곤난과 더욱히는 발전설비를 고속도로 증장케 하는 곤난을 가져오고 있음을 완곡하게 반영한 것이였다. 나는 공업이 전면적으로 약진하는 형세에 전력공급이 엄청나게 부족한것이니 이런 상황은 단시일내에 개변하기 어려운것이라 여겼던것이다. 나는 편지의 말미에 “어떤일에는 ‘패만’(호남방언인바 란폭하거나 무지막지함을 가리킨다.)이 수요된다지만 어떤일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것이다.” “사람들은 다가 열의를 내고있건만 계획에는 ‘여지’를 두지 않고있다.” “ 사람들은 곤난이란 말같은건 듣기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를 쓸가봐 입밖에 뇌이지 않는것이다.” (이편지는 초고를 남겼음)
이 편지를 보낸지 얼마안되여 8월달에 북대하회의가 열렸던것이다. 북대하회의에서 강철산량을 배로 늘구고는 이 고지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민을 발동하여 강철을 제련하게 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인민공사결의를 내오면서 전국의 농촌들에서 공사화를 실현할 것을 호소했다. 그 회의는 사실상 당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을 앞으로 내미는 최고조를 표시하는것이였다.
나의 그 편지는 이같은 광열적인 기분과는 조화되지 않고 되려 찬물을 끼엊은 것이였다. 당시 모택동은 “대약진”에 흥분되여있다보니 나의 그 편지같은건 중시하지도 않았던것이다. 온 북대하회의기간에 그는 나를 불러 담화도 하지 않았거니와 그 후에도 만나주지 않았다.
1958 11월의 무창회의에 이르러 정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대약진”초기의 광열은 지났고 혼란과 문제들이 적잖게 나타나 중앙은 온도를 낮추기시작했다. 모택동은 그번 회의첫날에 공기를 압축할것을 제기했던것이다. 나의 그 편지를 상기한 것 같았다. 회의첫날밤에 나는 통지를 받고 그가 들어있는 동호초대소에 갔다. 서기는 면목이 익숙한 곳이였다. 모교인 무한대학이 부근에 있었다. 1952년 호남에서 북경에 조동해오기직전의 여름날에 나는 중남국조직부와 담화 할 때 이 초대소에 며칠들어있으바있다. 그 초대소는 불규칙적인 줄행랑식의 단층집이였는데 바로 동호가에 있었다. 모택동은 나를 만나자 그 편지는 “관점이 그닥지 명랑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나는 해석하지 않고 속으로 “그렇지만 나쁘지는 않을거야.”했다. 담화는 약 한시간가량 있었는데 주요하게 세가지 일을 론했던것이다.
첫재는 강철제련에 대한것이였다. “토용광로”말이 나와서 나는 수천만이 산에 올라간다해서 문제가 해결될건가, 그렇게 하는건 장구지계가 아닌거요 철을 제련해낸다해도 질을 보장못하는거니 그것을 쓰는데서 영향을 받기마련이며 우선 기계항업에서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라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황하에 이르지 않고는 마음이 죽지 않지요.” 귀맛이 드는지 모택동은 웃었다.
둘째로 나는 강철을 제련하느라 람벌하여 삼림을 회멸하고있으니 그것의 악과를 생각해야할게 아니냐, 수토류실이 엄중하다고 했다. 이 문제를 놓고 심중하게 담화했다.
셋째는 량식생산에서 “위성”을 올리는 문제였다. 나는 그한테 캐듯이 물었던것이다. 주석께서는 농촌에서 태여나 농촌에서 자났는데 량식을 무당 얼마가랸량 낼 수 있다는것도 모르십니까? 아무렴 어떻게 무당 몇만근을 낼 수있단말입니까? 이 질문에 그는 자기는 전학삼의 글을 보고 과학을 믿었다는것이였다. 전학삼은 력학으로 리론을 낸 것이였다. 원래는 1958년 농업이 “위성”을 올리 때 전학삼이 신문에다 문장 하나를 발표했던것이다. “태양능을 대체 얼마나 리용할 수 있는가, 과학적인 론증은 한무에 량식을 능히 몇만근 낼 수 있는것이다.” 모택동은 이 글을 읽고나서 머리가 걷잡지 못할지경돌아간것이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농사를 지어봤다는 사람이 아무렴 군중의 열의만 믿고 현실도 아닌 사이비한 과학적추리를 딱 곧이닏고 책임을 지지도 못할 결책을 내린단말인가? 게다가 그는 1958년의 량식산량이 7,500억근이라는 숫자를 딱 믿었던것이다. 비례를 따지면 그것은 전해의 두배에 달하는 숫자였던것이다. 그는 만족스러워했다. (후에 핵실했는데 실지는 총산량이 4,000억근이였다.) 모택동이 비평한 나의 두 번째편지는 뼈만 있지 살은 없었다. 나의 어떤 말은 모택동의 심태를 건드린 것이다.
1959년 봄이 되니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형세가 이전만 좀 누그러들었다. 농촌에서는 공사를 정돈했고 공업도 어떤 지표는 내려갔다. 그러나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없었던것이다. 인민공사정돈과정에 전에는 찾아보지 못했던 일련의 정책성문제들이 튀여나왔다. 공업방면의 문제들이 더 많았다. 이미 내린 지표라해도 실제 도달할 수 있는 산량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1959년도지표를 완성해보자고 재료며 설비며 자금같은것을 다투고있었던던것이다. 하기에 나는 문제가 점점 더 많아짐을 느낌과 동시에 아직들어나지 않은 모순도 많다는것을 감촉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1959년의 강철생산지표를 완성할 것 같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것도 해결하기 어려워 전반국면에 영향이 미치게되는건 사실이였다. 1차회의 때 우연히 계획위원회의 료게립(廖季立)을 만났다. 그는 계획위원겸 종합국국장이였던것이다. 우리는 연안에서 “긴급구원운동”때 알게된 사이였다.나는 그를 만나자 직방대고 그래 강철 2,000만톤을 완성할 수 있는가 없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역시 솔직하게 그건 완성할 수 없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정황이 이러하였기에 나는 2말 3월초기간에 문제를 반영하는 두 번째의 편짔를 써 올리였던것이다. 나는 편지에 1959년도 강철생산지표를 꼭 낯추어야 하거니와 락실해야한다, 그래야만 전면에 미치는 영향을 피면할 수 있는것이다라고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기계부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게되리라 력점을 찍었다. 기계부의 주요산품들은 강철수량에, 특히는 질량에 의거하는것인데 전력마저 보증키 어려운 상황이였다. 하길래 나는 그것도 반영했다. 편지의 말미에 레닌의 말 한마디를 인용했다. “적게 하더라도 잘하라.” 편지를 다 쓰고나서 공교롭게도 주태화를 만났다. 그는 진운(陳云)의 비서였는데 나와는 연안때부터 잘아는 사이였다. 진운이 편지를 보고 그와 하는 말이 편지에 반영되는 문제들이 적잖게 계위(計委)와 관계되는것이니 리부춘(李富春)동지한테도 보이는게 좋겠다하더라는것이였다. 하여 나는 편지를 한부 베끼여 주고 원본은 모택동에게 올리였던것이다. 1959년 3월에 열린 상해회의에서는 주요하게 1959년의 국민경제계획과 농촌인민공사정돈문제를 놓고 토론했다. 회의가 시작된지 3일만에 통지를 받고 모택동을 찾아가 담화를 했다. 그는 널직한 화원이 딸린 서양옥상에 있었다. 객실에 들어서니 호교목도 쏘파에 앉아있었다. 내가 방금 자리를 잡고 앉자 모택동이 호교목에게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는 것이였다. “이 사람은 강도질을 하지 못할 사람이요.”
정식으로 강철지표를 놓고 토론하면서 계위의 사업에 대하여 의견이 많아 할 때에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되였던것이다. 방금 그가 한 말의 함의인즉 내가 자기한테 하는 편지를 왜서 리부춘에게는 보이는거냐, 담이 작아도 이만저만 아니라는거였다. 모택동은 나의 편지를 놓고 말했다. 왜서 뼈만있고 살은 없느냐였다. 나의 두 번째편지는 간요했다. (그것은 무창에서 그가 나의 첫편지를 “관점이 명랑하지 못하다”고 한것과 관계되였던것이다.) 주지는 1959년 강철생산지표를 긍정적으로 완성할 수 없는 리유가 무엇이며 즉시 락실하지 않았다가는 후과가 좋지않게 되리라는 것 등이였다. 보아하니 이 편지의 내용을 접수한 것이였다. 안그러면 담화가 그같이 풍취가 있을리 없는것이다. 거기를 나올 때 호교목이 나와 지난해 흐루쇼브가 북경에 와서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했을적에 모택동이 쏘련에서는 량식이 없을 때가 많으면 어찌하느냐 물으니 흐루쇼브가 대답하기를 쏘련은 그런 경험이 없다고 대답하기에 자기는 듣고서 그럴수는 없다고 생각되더라 말했다. 나는 모택동과 담화가 있은 후 전보다 어느정도 고무를 받았기에 인차 세 번째 편지를 썻다. 그 편지의 초고는 지금까지 보존하고있다. 남녕회의로부터 상해회의에 이르는 1년 3개월사이에 나는 자기의 수전업무(水電業務)사업외에 절반시간은 각종회의에 참가하여 계획과 지표를 조절하는 일에 몰두했기에 “종이장을 놓고 병사를 지휘”하고 “그림의 떡으로 기아를 달래는 격”의 체험이 심각했다. 한편 또한 중앙과 지방고층의 결책순서와 모택동의 령도방식 그리고 그의 성격특점 등도 알아냈던것이다. 이 한해의 계획에 파동이 생긴것을 보면 어떤것은 사상문제인것이다, 그것은 문제가 있어도 대담히 제기하지 않으니. 나는 우리는 응당 쏘련,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국가 특히는 쏘련의 약진경험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이라했거늘 타인의 권고와 충고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던것이다. 모택동은 해서(海瑞)를 따라배우라고 호소했다. 호교목(胡喬木)은 과연 해서를 따라배워야 하는건가고 나에게 귀띰했다. 상해회의가 끝나자 긴급히 소집한 8기7중전회때 회의마직날에 모택동은 온근 3시간이나 강화했다. 그는 자기의 강화에서 1년간해본 대약진과정을 회고하고는 16가지문제를 제출하면서 옛날을 평하고 오늘을 론했으며 혹은 길게 혹은 짧게 당내상층조직간에 알륵과 분쟁이 있었던 력사를 말했던것이다. 화가 나서 말을 격하게 하면서 얼굴이 꽛꽛이 굳어지기까지 했으니 과연 깊은 정서였다. 그가 14번째의 문제를 끄집어 낼 때는 자기가 비서 몇을 부르겠다는것이였다. “나는 통신원 몇을 불러야겠다. 비서를 말이다. 삼위(計,經,建委)부터 시작해서 이부(야금, 기계)를 부르겠다. 각 부에 하나씩, 찾는건 내가 찾고. 마레주의를 좀 아는 사람, 머리가 령활한 사람, 이 기회를 빌어 당신들과는 반대곡을 부는 사람을 찾을테다. 그리고는 몇 개부를 더 부를것이다. 앞거부기가 바라오르는 길을 뒷거부기가 바라오르지 못할가, 당신들이 찾는 통신원을 내가 왜 찾지 못할가? 당신들이 막을 수 있는가? 난 리예를 찾았어, 그는 장강수리문제를 놓고 림일산(林一山)이와는 다르게 반대곡을 부른거야. 나는 그가 쓴 편지를 세통받아봤는데 괜찮은 사람이더군, 머리가 좀 있으니까, 한데 담이 작아서 내한테 줄 편지를 먼저 리부춘께 뵈였단말이요, 제 꼭대기의 상급은 무서워하면서도 나는 무서워하지 않는단말이요. 여기서 나는 정총통이 못되고 끼여든 꿩털이란말이요.” 모택동은 이같이 말해놓고 높은 어성으로 물었던것이다. “리예가 왔는가?” 나는 맨뒤쪽줄에 앉아있었는데 일어나는 수 밖에 없었다. 모택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뒤에 앉아있는가? 여기 앞에 나와 앉아있어야지! 자네가 쓴 편지는 ‘뼉다구’만있고 ‘고기’는 없잖은가, 날 고기좀 먹게 해야지! 내한테 보낸 편지 세통이 나를 많이 방조했으니 감사를 드리지, 공산당이 공산당에 감한거야.” 열두번째 즉 사상을 해방할 문제를 말할 때 그는 또 나를 지명하고는 말했던것이다. “리열은 겁쟁이니 고쳐야해. 사상을 해방하자면 겁쟁이로 되지 말아야지. 지금 우리 동지들가운데 일종의 건강치 못한 공기가 있는데 그것은 혼날까봐 무서워하는거란말이요. 언제 자기를 족칠지 몰라 너무나 신중하다보니 소심하기까지 한단말이요.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원칙적으로 처리하는건데 두려울게 뭔가? 머리가 떨어지지 않으면 되는거야. 그 외는 다 되는거요. 기회주의모자, 기과처분, 철직, 철당, 녀편네와 리혼하고. “이몸이 죽더라도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라” 하잖았는가. 왕희봉은 세상을 다스릴줄을 아는 대신이자 란세의 간웅이 아니였던가. 머리가 날아날까봐 최후의 결심을 내리지 못했던거지. 악비는 머리가 날아나지 않고도 마음을 빼돌린게 아닌가? 명조의 정장제(廷杖制)는 황제와 맛서기만 하면 때리였지, 때려죽인것이 몇백명이 되였던거요. 목을 잘라 우문에 걸어놓은것이 더 많았지. 그때의 사람들은 다가 감히 말할줄을 알았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했던거요. 우리 공산당의 고급간부들은 용감하지 못해서 날카로운 말은 못하고있잖은가말이요. 작은 신을 신을까봐 무서워하지 않으면 직을 떼울까봐 무서워하고 당선표를 떼울까봐 무서워한단말이요. 그런 심리를 왜 모르겠는가. 나는 강생하고 말한거요. 당신이 감히 말하려하지 않는건 당선표를 떼울가봐 그러는거라고. 봉건시대 인물도 이러지는 않았지.”
열여섯번째 문제인 당내비평에 대해 언급 할 때 모택동은 해서(海瑞)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한 력사이야기를 거들었다. 모택동은 말했다. “지금 모두들 나의 결점은 크게 비평하지 않고있소. 하다못해 변죽을 울리는 방법으로 비평해도 될게 아닌가. 내가 <<명사. 해서전>>을 줘서 팽덕회동지가 보았지. 당신도 봤지만 해서는 얼마나 첨예한가말이요. 그가 황제에게 올린 편지를 보면 조금치도 양보란건 모른단말이요, 모르구말구. 황제는 그 편지를 보다가 던졋던거요. 그리구는 다시쥐여 읽어보고는 던졌지. 그랬다가 또 다시 쥐여 읽어보고는 또 던져버렸구.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사람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 생각됐지. 그러면서도 결국은 잡아서 반방(班房)에다 가뒀지. 반방이란 뭔가? 감옥이란말이요. 명백한 일이지. 미워서 죽여버리자고 한거지. 가정황제(嘉靖皇帝)는 도가(道家)의 장생불로 하리라는말을 믿고 단약(丹藥)을 먹으면서 수도를 하느라고 40여일이나 멍청하게 꿇어앉아봤자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채 어느날 그만 죽고말았던거요. 그가 죽으니 반방직이가 해서에게 알려줬던거요. 축하를 한다, 네가 이제는 반방을 나가 높은 벼슬에 오르게됐으니 하고. 그런데 해서는 그것이 거짓말인줄로 알고 인생마지막 배나 불려본다고 밥과 고기를 배껏 먹고는 이제 목이 날아나기를 기다렸지. 반방직이가 알려줬던거요. 너를 죽이는게 아니야, 황제가 죽었다는 말이야 하고. 해서는 그만 와ㅡ 하고 통곡하면서 먹었던걸 다 토해버리고만거요. 지금 우리 동지들 가운에 해서같이 용감한 사람이 있기나한가?..... <<삼녀념패(三女捻牌)>>라는 극이 있는데 거기에 해서가 등장하오. 나는 이 <<명사(明史)>>를 팽덕회한테 뵈일예산이요. 당신(주은래)도 보오. 그 극을 봤소? ”
주은래는 단마디응대를 했다. “봣소.” 나는 내가 그같이 과장된 칭찬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너야 앞에 나와 앉아야지.”, “공산당이 공산당에 감사해야지.” 하는 따위의 어조와 표정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남녕회의에서 삼협의 발전(發電)문제를 토론할적에도 “리예같은 수재를 배양해야지.” 라고했는데 그때는 작은 범위내에서 한말이지만 이번에는 사람이 많이 모인 대회에서 칭찬한것이다. 그도 기분좋게면 몰라도 속에 불만이 가득해 화를 를 내면서. 그러다보니 나는 또 뭇사람의 입끝에 오르게 되었던것이다. 어떤 사람은 “뼈만 있고 살은 없다”는게 무슨 말이냐했고 어떤 사람은 놀림쪼로 “넌 빨갛다못해 자색이 나는구나”했다. 그날밤에 나는 전가영(田家英)을 만났는데 내처럼 자기와 호교목이도 모택동의 그같은 설법은 돌연적이고 난해한걸로 여긴다고했다. 전가영은 지어 모택동이 전날밤에 수면제를 너무많이 먹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면서 해서에 대해서 담론하는게 우리더러 해서를 따라배워 과감히 진언하라고 고무하는 것 같지만 실속은 그런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는 호교목은 모택동이 해서에 대해서 한두번만 말한게 아니다, 입으로는 해서를 따라배우라고 하지만 기실은 해서가 나오는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 알려주었다. 호교목은 그 누구보다도 모택동을 잘알고있었던것이다. (오함이 해서를 론하는 문장을 썼는데 로산회의후에 <<인민일보>>에 발표할 때 호교목이 꼬리말을 달았던것이다.)
내가 그같이 다시금 특별한 영예를 얻고보니 자연히 일종의 안위를 받게되는건 사실이지만 두려움역시 없지 않았다. 내가 일후에는 “비서”노릇을 어떻게 할건가? 그냥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보내야하는가? 전가영과 이 일을 말했더니 그는 웃었다. 그는 그래도 내보다는 락관적이였다. 이틑날 조이륙(기계공업부부장)이 나를 찾아와 담화를 했다. 주요하게는 그들 부와 야금부의 관계에 대한것이였다. 기계산품이란건 일발적으로 주기가 비교적 긴데 수량과 품종과 질량 삼자가 모두 야금부에서 제공하는 원재료를 떠날 수 없다, 서로 의뢰하고 상호제약하는것이다, 그런데 1년되는 사이에 계획이 여러차나 바뀌여 중점임무는 변하였다, 돌격적인 소용광로가 생겨나면서 돌격압연기를 비롯한 숱한 반성품들이 나왔다, 더욱히는 철함류량이 높아서 쓸수도 없으니 문제인것이다, 등등.
그는 당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중앙에다 전면보고를 하리라했다.... 1958년 6월의 화동회의때 나는 기계부의 문제에 접촉했다. 부장조리가 나와 야금부와의 모순을 얘기했던것이다. 대형전기제조에 들어가 주기와 조립용부품지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서는 나도 얼마간 알고있는것이다. 하길래 나는 나를 찾아 곤난한 문제를 말한 조이륙을 몹시동정한것이다. 지금도 기억되는데 로산회의가 있다니 조이륙은 쓰지 못할 생철표본을 준비하여 물증으로 내놓아 보이려했던것이다. 그런데 형세가 변하는 바람에 그는 그것들을 내놓지 못하고 말았다. 제1차정주회의이후 무창회의가 있었고 제2차정주회의후에는 상해회의가 있었던것이다. 그때로부터 줄곧 1959년 로산회의전기까지만도 현실앞에 착오를 규정하느라 했기에 대약진운동은 차츰 후퇴하기시작했고 온도도 내려갔던것이다. 그러한 취세는 좋은것이였다. 그런데 풍운의 불측함을 누가 알았으랴, 국세는 돌변하여 로산회의후기에는 내렸던 “좌”의 기온이 되올라 전국은 그보다 더한 “극좌경”의 광란에 매몰되고말았던것이다. 내가 20년간겪은 풍파야 보잘것 없지만 당과 국가가 당한 재난은 그야말로 가슴아픈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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