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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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21)
2011년 03월 22일 13시 05분  조회:4364  추천:10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21)       

    (1) 모택동: “약진”구호발명자는 첫 박사라고
   
(2)인민공사력사를 정확히 인식하자         

  1958년 2월 2일, 중공중앙 대약진구호 정식제출
    

1958년 2월 2일, <<인민일보>>는 <<우리의 행동구호ㅡ 랑비반대, 근검건국!>>이라는 사론을 발표했다. 사론은 남녕회의정신에 따라 국민경제의 “전국대약진”구호를 제출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지금바로 전국대약진형세에 직면하였는바 공업건설과 공업생산이 대약진을 해야하고 농업생산이 대약진을 해야하며 교육위생, 부업역시 대약진을 해야한다.”고 했다. 
   

하늘에 옥황이 없고 땅에 룡왕이 없도다.
    
내가 바로 옥황이고, 내가 바로 룡왕이로다!
    
삼산오악아 길을 내라, 내가 왔노라! 
    

대강남북에 울려퍼진 섬서의 이 “새민가”가 1958년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물질상에서나 정신상에서나를 막론하고 랑만적인 기분이 충만된 한해였다. 3월, 모택동은 성도회의에서 민가(民歌)에 대해 “중국시의 출로는 첫째가 민가고 둘째가 고전.”이라 평했다. 그는 또 우리는 혁명적현실주의와 혁명적랑만주의 이 “두가지를 결합”하는 창작방법을 창도해야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그해에 “새민가운동”이 발발하게 일어나 농촌이나  도시를 물론하고, 정치와 경제를 물론하고, 모든 문화면에서 “시감”이 충만된 정열이 끓어번지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그해의 랑만이라는것이 현실기초는 적고 리상주의가 많은것이였다. 1956년에 생산자료의 사회주의개조를 기본상 완성하였고 1957년에는 정치사상상에 사회주의혁명을 했거니와 이 한해에는 전해의 혁명을 계속완성하면서 경제령역의 기술혁명을 동시에 전개했던것이다. 1957년 11월, 모택동은 모쓰크바에서 열린 10월혁명40주년기념행사에 참가하였는데 흐루쇼브는 쏘련은 공농업의 가장중요한 산품산량방면에서 15년내에 미국을 따라잡거나 초과하리라 표시했다. 이에 모택동은 중국은 15년내에 영국을 따라잡거나 초과할 것이라 선포했다. 
   

1월 11일부터 22일까지 있은 남녕회의에서 모택동은 류소기, 주은래 등이 1956년에 반모진(反冒進)을 주장한것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군중의 의기를 저락시키고 찬물을 끼얹어 풀이 죽게 만들었다고했다. 이어서 3월의 성도회의, 4월의 무한회의, 광주회의에서도 계속 “반모진”을 반대할것을 강조하면서 “약진”으로 “모진”을 대체해야한다고 제출했다. “열의를 다내여 앞장서기에 힘쓰며 더 많이 좋게 절약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총로선이 이미 기본상 형성되였다”는것이다. “약진”이란 단어가 제일먼저 출현한것은 1957년 <<인민일보>>였다. 10월 27일자 그 신문에 실린 <<사회주의농촌건설의 위대한 강령>>에서 “12년내에 하나의 거대한 대약진을 실현한다.” 했고 11월 13일자 면은 <<전민을 발동하여 40조요강을 토론하며 농업생산의 새고조를 일으키자>>는 글을 실어 “어떤 사람은 우경보수를 범하는 병집이 있어서 달팽이모양으로 굼뜨게 기여가고있다. 그들은 농업합작화이후 우리는 조건이 있거니와 생산전선에서 대약진을 할 필요가 있다는것을 료해가지 못하고있는것이다.”라고 힐난했다. 모택동은 “약진”이란 단어를 사용한 사람을 “공이 우공만못지 않다”고 칭찬하면서 박사칭호를 준다면 ‘약진“이란 이 위대한 구호를 발명한(혹은 여러사람) 과학가에게 주어야한다고 과장해 말하기까지한 것이다. 
   

6월 7일, 신화사주재하남분사의 기자 방황(方徨)은 차아산에 달려가 그곳 농업사에서 밀을 무당 2,105근생산하여 “위성”을 올린 보도를 썼다. 그녀는 금자탑같이 쌓아올린 밀무지와 그것을 마대에 넣어 가리는것을 보고 놀라 부르짖었다. “아! 두무밭에서 이렇게 많이 거둘수있나요?”
    
“왜 믿지 못하겠단말이지?”
    
“아닙니다. 밎지못해그러는게 아니라 너무도 흥분돼서 그래요.”
    
탈곡이 끝나 달아보니 무당 3,500근이 넘었다. 
   
6월 12일, <<인민일보>>는 “위성농업사 두 번째위성을 올렸다”는 표제로 신문의 첫면에 방황이 채방한 문장을 실으면서 정식으로 높은 산량을 “위성”이라 칭했다.     
   

6월에 전학삼(錢學森)은 <<량식을 무당에 얼마낼수있는가?>>라는 글을 “과학지”에 실으면서 론증하기를 “사람이 담이 얼마크면 땅은 얼마만큼 높은 산량을 낸다”고 하면서 식물은 태양광능의 30%면 공기중의 이산화탄소와 수분으로 제조된 영양료를 만들 수 있는데 그중의 1/5은 사람이 먹는 량식이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력학을 잘만 리용하면 벼, 밀같은 작물은 무당에 2천근이 아니라 2천근의 20배가 되게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벼알이 콩알만큼 크고 콩알이 감자만큼 클것이요, 깨알이 강냉이알만하고 강냉이이삭은 사람만큼 클것이다. 락화생이 고구마같이 클것이요, 고구마가 동과만큼 클것이니 수수키가 하늘을 찌를것이다.”
       
성이 계씨인 사람이 그때의 일을 회억했다.
    
“‘사람이 담이 얼마크면 땅은 얼마만큼 높은 산량을 낸다’는 말을 나는 딱 곧이들었다. 그래서 ‘사상이 해방되지 않은 사람’을 속으로 ‘겁쟁이’라 비웃은것이다.” 
   
복단대학의 장가성을 가진 사람도 회억했다.
    
“체육에도 위성을 올리려야겠다면서 집체표준을 내왔던것이다. 100m경주를 하는데 지형을 선택했는데 높은데더 경사진 아래로 냅다뛰여 전부가 기록을 창조했던것이다. 그 결과 모두가 우수한 성적이요 사람마다 위성을 올렸던것이다.”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되였던 북대하회의에서는 <<전당전민은 강철 1070만톤을 생산하기 위해 분투하자>>는 공보를 통과하였다. 영국과 미국을 따라잡고 초과함에 중요관건은 강철산량에 있었기에 도처에 “일체는 1070만톤에 길을 내주자”는 표어와 선전화들이 나붙었다. 
   
수천만의 농촌로동력이 뽑혀나와 강철을 제련하다보니 가을철이 되었어도 다 된 곡식을 밭에서 걷어들이지 못해 그대로 썩어갔다. 년말통계를 보면 전국에서 강철제련에 동원된 사람이 9,000만에 달하고 토용광로가 100만개도 넘었다. 
   

하늘에 별이 얼마더냐?
   
애들은 세여 볼 재간없다네.
    
전민이 일떠세운 용광로 
   
신선인들 세여낼가.
    

11월상순에 모택동은 제1차 정주회의에서 인민공사가 너무급히 전민소유제로 과도하고 공산주의로 과도하는것은 착오라면서 “너무급히 앞으로 내지르지 말라”고 일깨워주었다.
    
“1958년 우리 나라의 공농업생산과 과학문화교육사업 각 방면의 대약진, 인민군중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각오의 대단한 제고, 그리고 금년 여름에 출현한 인민공사화고조는 당의 사회주의건설총로선의 위대한 승리를...... ” 
   

이해희 마지막날 <<인민일보>>는 고사기(高士其)의 <<1958년을 보내며>>와 황염배(黃炎培)의 <<1959년 원단을 맞으며>>를 각각 실었다.
        

마지막 일력장을 번지게 되었으니
   
1958년여, 너는 우리와 고별하게 되었구나
   
네 력사의 무대에서 뒤로 물러났어도 
   
너의 광휘는 영원히 우리의 앞길을 비추리.
    
새 중국은 온통 휘황찬란하여라!
    
이는 또 하나의 기쁨에 들끓는 원단.
    
세계의 광명이요 전 인류의 새봄이여라.
                                                           

                 인민공사화의 꿈
  

<<붉은기>>가 먼저 “인민공사”명칭을 제출했다
  

1958년 7월 1일 <<붉은기>>잡지는 진백달(陳伯達)의 문장 <<전신의 사회 전신의 사람(全新的社會全新的人)>>을 실으면서 처음으로 “인민공사”의 개념을 제출했다. 
   
8월상순, 모택동은 하북, 하남, 산동 등지에 가서 시찰하고는 말하기를 보건대 “인민공사”는 좋은이름같다면서 생산을 관리하고 생활을 관리하고 정권을 관리하니 “말하자면 크고 집단적”인것이라고했다.
    
산동에 있을적에 당지의 책임자가 “큰사”의 이름을 무엇이라 달면 좋겠는가고 청시하자 모택동은 그래도 인민공사라고하는것이 좋겠다면서 그것의 좋은점은 공농병상(工農兵商)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서 령도하기 편리한것이라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인민공사를 대규모적으로 건립하기시작한것이다. 
   
당시 국무원의 한 부총리도 하남에서 인민공사의 좋은점을 다은과 같이 말했다. 그는 우선 좋은 음식이 있어야지 배만 불러 되는게 아니라면서 때마다 고기, 닭, 물고기, 닭걀을 먹어야 하거니와 또한 정미한 음식품 이를테면 후두(猴頭), 연와(燕窩), 해미(海味)등도 먹게되니 수요를 공급해야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입는 옷문제인데 능히 만족을 주게 될 것이다. 푸른옷만입지 않고 각가지 색깔나는 옷을 입을 입을 수 있게될것이다. 그때가서는 푸른색옷은 작업복으로나 되어 일이 끝나 퇴근 할 때면 벗고 가죽옷이나 모직물이나 양털제복을 갈아입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인민공사마다 여우를 사양해서 사람마다가 여우털외투를 갖추게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집은 모두가 현대도시의 표준에 도달할 것이다. 현대식이란 무엇인가, 이민공사는 아파트를 지을것이니 높다란 층집에 들수도 있는것이다. 집안 북켠에는 난방시설을 하고 남켠에는 랭기설비를 해놓을것이다.  전등, 전화, 수돗물은 말할 것 없고 무선전, 텔레비도 갖추고 살 것이다. 네 번째는 뛸내기운동선수를 내놓고서는 사람마다 교통공구가 있을것이며 매 성마다 비행장을 닦아놓을것이니 지방마다 이제 비행기제조공장을 세우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는 사람마다 고등교육을 받을것이다.
       

 대체 이것이 그래 과학적인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공상적인 사회주의인가? 그 많은 물질이 그래 어디서 온단말인가? 리론권위였던 강생은 이런 글(對聯)을 썼다. 
   
“공산주의는 천당, 인민공사는 다리.” 
  
 
한데 이 다리라는것이 대체 어떤것인였는가? 
   
중국의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건립된 인민공사는 진사합일(鎭社合一)이며 기본핵산은 생산대였다. 한데 농업생산은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계획하고 산품을 통일수구하면서 통구통소(統購統銷)를 하거니와 농민들이 일을 해도 공출이 많고 수입에는 구별이 없는 평균주의니 로동효률은 내려가 좋은 세월이 길지못했다. 가치규률과 시장규률건설을 불구하였으니 징벌이 필연적이였다. 인민공사의 형편없이 낮은 생산률과 큰가마밥지간의 모순은 재빨리 공산주의로 가는 다리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는바 이런 후과는 1959년겨울에 이르러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던것이다. 왜 이런 후과를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해내지 못하는것보다 생각하지 못하는게 더 무서운것이다.
    

1958년에 대체 어느정도로 열광적이였는가를 보면 알수 있는것이다. 중앙에서는 강철생산산량목표를 1070으로부터 1150만톤으로 잡았는데 실제상에는 이해 8개월간 생산한 강철은 450만톤밖에 안되였다. 임무를 완성하기위해서 전국적으로 전례없는 대규모의 “전민이 강철을 제련하는 대운동”을 벌리였던것이다. 모택동은 친히 강철을 제련하는 현장에 나가 지도하면서 강철을 제련하는 동시에 사람을 제련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공장, 학교, 기관은 물론 농촌, 지어는 중남해에 까지도 강철을 제련하는 토가마(土灶)가 생겨날 지경이였으니 도처에 검은 연기가 하늘에 타래쳐 올랐다. 사람들은 제집의 가마를 뚜드려 녹이기까지 했고 땔 나무를 장만하느라 람벌하니 적잖은 삼림들이 훼멸되였다. 제일 기묘한것은 어느 한 수공업사의 판사처가 중약으로 강철제련실험을 하기까지 한 그것이였다. 그렇게 해서 만든 강철이 합격되기나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빤한건데 지어는농민이 원자탄을 제조하는데 드는 필수품인 우라늄을 만들어내겠다고 덤벼들었다. 그들은 나무통에다 우라늄광석을 넣고는 거기에다 질산암모늄과 류산을 부어넣어 그것을 불구었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한 다음 두부를 할 때 쓰는 베로 만든 포대에 그것들을 넣어 려과하였다. 이럴 때 쇠가마는 반응기작용을 하는것이다. 포대에 넣어 짜낸 물을 쇠가마에 넣어 달려내면 우라늄이 된다는것이였다. 민간에서 두부를 안는식으로 제조하는것인데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기관이 아니였겠는가!. 
   

1958년이 막가는 날, 석경산강철공장에서 마지막 한가마의 강철을 성공적으로 제련해냈다. 그때 이런 민가가 나왔다.
“1958년에는 돈 안내고 밥먹었네 배뚜드리며 먹었으니 눈앞에 공산주의가 보였다네”
그 한해에 공공식당에서 밥먹는 농민이 90%이상이였으니 5억중국농민은 명실공히 큰가마밥으로 산것이다.    
하북성 서수현은 공사식당을 크게 꾸린 한폭의 붉은기로서 먼저 “돈안내고 밥을 먹는다”는 구호를 앞에 내걸었던것이다. 전현에 6.4만호가 넘었는데 인구는 32만이고 248개 농업사가 있었다. “대약진”을 하면서 전현에 모두 1777개가 되는 공공식당을 꾸렸는데 28.5만명이 식당에서 밥을 먹음으로 하여 전현식당화를 실현했던것이다. 부동한 사업에 적응하기위해서, 임무의 수요에 따라 야외이동식당까지 1410개나 꾸리였고 유아식당 129개, 로인식당 248개를 꾸리였다. 가가호호모두가 자기가 먹자고 저축했던 량식들을 무상으로 식당에 들여놓았다. 후에는 인민공사라는 이 다리가 960만평방킬로의 면적을 가진 이 대국의 그 어디에나 공공식당이 피여나게되였던것이다.    
   

적지 않은 식당이 전문 배부르게 먹고 잘먹는것을 목표로 하여 꾸리였는바 밥먹는 량을 제한하지 않았거니와 심지어는 채마저 같은것은 한주일이상 먹지 않고 새로 바꾸었다. 배불리 먹는데다 마음껏 마시기까지 했다. 군인, 공인, 학생들이 격정이 부풀어 시를 지었다. 문예계에는 지어 한개현에 곽말약(郭沫若)이 하나나와야 하고 1년내에 30만의 곽란영(郭蘭英)을 배양해야한다는 설법까지 나왔다. 중공중앙문교조부조장이였던 강생은 북경농업대학을 시찰하면서 학교에 적어도 패쪽을 5개는 걸어야한다고 했다. 제1학교, 제2공장, 제3농장, 제4연구소, 제5농림국. 만약 열몇가지 패쪽을 달수있으면 더더욱좋으리라했다. 교수를 평함에 무당 1000근밖에 생산못하면 그저 무급교수고 2,000근내면 4급이다. 그 비례에 따라서 5,000근이면 1급교수가 된다. 강생의 론리대로 하면 학식이 얕은 주임은 아래로 내리먹어 일자리를 새로 찾게해야 하고 대신 건장한 젊은이가 교수로 될 수 있고 원사로도 될 수 있다는것이였다.
    

중공중앙정치국은 1958년 8월에 북대하에서 확대회의를 열었는데 회의후에 중국에서 전민이 동원하여 강철을 제련하고 농촌에다는 인민공사를 세우는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 “대약진”운동에서 바로 각종 기이한 일, 이를 테면 공사식당에서 후두(원숭이 골)를 먹고 연와(제비둥지)를 먹으며 강철을 제련하는데 중약을 넣는 등 온갖 기문이 생겨났던것이다. 
   
1958년 8월 5일, 모택동은 하북고찰을 끝맺고 인차 하남으로 가려했다. 그러던것이 생각밖에 스케줄이 바뀌였다.
    
오전 11시, 신향지구의 사업을 한창검사하고있던 하남성위제1서기 오지포(吳芝圃)는 돌련히 비서장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았는데 “주석께서 오셔서 신향에 가 시찰하시겠답니다.”하는것이였다. 
   
저녁 9시, 오지포는 신향지위서기 경기창(耿起昌)을 데리고 곧추 신향으로 갔다. 
   
당안에 기재된것을 보면 “5일밤 11시, 주석은 전용렬차로 신향에 이르러 760공장의 전용철로에 멈추었다. 모주석은 렬차에서 오지포와 경기창의 회보를 받았는데 그는 신향현 칠리영에 전현에서 첫 번째로 되는 인민공사가 일어섯다는 소리를 듣고는 흥취가 생겨 친히 가보기로 작정했다.” 고 씌여있다. 
   
6일날 오전에 신향에는 련며칠내리고있는 비가 그냥 멎지 않고있었다. 하남성과 신향지위령도는 천기가 나쁜데다 신향에서 칠리영까지 가자면 24리길이여서 가기힘드니 스케줄을 바꾸어서 교구에 있는 목야농업사와 신향면직공장에 가보는게 어떠냐고 모택동에게 청시했다. 이 일에 대해서 당안에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주석은 창밖에 패연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손을 힘있게 저으며 견정하게 말했다. ‘아무데도 안갈테다. 그래도 칠리영에 가봐야지......’ ”  
 

11월 25일, 모택동은 <<선교동태>>(宣敎動態) 제145기에 실린 운남성위에서 쓴  글을 보았다. 그것은 일부지방에서 발생한 부종병(浮腫病)문제에 대한 자료로서 <<하나의 교훈>>이라는 표제를 단 문장이였는데 이는 거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제출하면서 우리가 사업임무를 너무 과중하게 맏긴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과중한 부담이 내리누르니 현과 향의 간부는 방법없이 억지로 하는건데 조금만 덜하면 “우경”아라 하여 이제는 편면에 흐르는 정도가 된것이니 문제는 생산만 생각하고 생활은 잊은데 있다면서 임무를 너무 과중하게 떠맡기지 말고 생산과 생활을 같이 틀어쥐어야한다고 했다. 
   
이어서 1958년 11월 28일부터 12월 10일사이 중공8기6중전회가 무창에서 열리였다. 회의는 <<인민공사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의>>를 내오고 현계단의 인민공사는 사회주의집체소유제라고 제출하였다. 그것이 전민소유제로 과도하자면 한계단 상당히 긴 시간을 거쳐야 하고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하자면 더욱더 긴 시간을 경과해야 하는것이다. 근거없이 인민공사는 곧 전민소유제를 실행한다거나 지어 공산주의로 들어갓다고 하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1959년 2월 27일부터 3월 5일사이에 열린 제2차정주회의에서 모택동은 1958년가을 공사성립후의 가난과 부유를 평형잡고 루적이 너무많고 의무로동이 너무많으며 “공(共)”과 각종 “산(産)”의 “공산풍”문제가 있다면서 일부분 사람이 무상으로 남의 로동성과를 차지하는 경향을 규정해야한다고 했다....
    
사정은 마치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것이 1959년 여름 로산회의에 이르러서는 팽덕회가 비판을 받으면서 풍운이 돌변하여 형세는 온통 급전하고말았다.         
   
괴상한가? 모든 것이 그같이 예측키 어렵고 파악하기 어려웠건만 도리에 머물르고 있은것이다.   
   
게다가 소생산이 마치 바다같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세계를 박람하는 커다란 리상에 잠겨 그것을 발광적으로 추구하고 있었으니 도대체 얼마나 큰 자발력량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가? 당시 국제와 국내의 정치, 경제환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모택동 본신의 사상이 그언제면 모순에 빠지지 않은적이 있었던가. 인민공사문제도 그렇다.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들뜬 리상에 빨려들고 말았던것이다. 
   
바로 1958년 10월 28일이였다. 모택동이 진백달에게 편지로 수평(遂平)과 그 린근현, 수무와 칠리영 등에 있는 인민공사들의 정황을 조사해내라고 지시한 같은 날에 바로 산동의 범현현위에서는 전현의 공산주의적극분자대회를 열고 범현은 3년내에 공산주의로 과도하는 계획을 내왔던것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생활정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사람마다 새락원에 들어가지요, 먹고 마시고 입는데 돈을 안낸다네.
닭고기, 오리고기, 물고기 맛이 참 좋지요. 때때마다 네가지 반찬이 상에 오른다네. 매일 과실을 먹을 수 있고 각가지 옷 다 입어내지 못하지요. 사람마다 천당이 좋다하지만 천당이 어찌 락원보다 더 좋으랴.”     
11월 6일 정주회의기간, 모택동은 이 계획을 공문으로 비준하면서 비어(批語)에 명확한 긍정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비평이 있었다하더라도 역시 따뜻한 감정이 넘쳐흘렀을 것이고 의미심장하여 자세히 음미할 가치가 있을것이다. 그 문건은 과연 뜻이 있는것이였다. 한수의 시같아 읊어도 되는것이였다. 한데 시간이 오래가지 못했다. 3년간밖에 안되였으니까. 회의후 그는 특별히 진백달, 장춘교, 리우구 세 사람을 그곳에 가보게했다. 마치도 그가 인민군중의 충천하는 열의를 조심스레 보호하는것만 같았다. 이 한해에 그는 리달(李達)과 한차례의 담화에서 군중의 혁명열정을 꼭 애호하고 보호해야한다, 그러나 령도간부에 대해서는 꼭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하니 그래 모순이 아닌가? 기실 모택동의 몸에서 이런 “대립통일”현상을 찾아보기는 그리 힘들지 않은것이다. 
   
모택동은 종래로 자기가 확정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의 대방향을 의심한적이 없었거니와 존재한 문제를 승인하면서도 그것은 아홉손가락과 한손가락 대비와 같다고했다. 손가락 하나 문제를 같고 어떻게 손가락 아홉 개의 성적을 부인할 수 있는가 하는 그것이였다.
    
여러해가 지나서 어떤 사람은 수평현의 한토막력사의 허울을 벗겨냈다. 1958년도 차아산공사의 밀 무당 실제산량은 3,821근인것이 아니라 140근이였던것이다. 결과 1959년겨울에 차아산인민공사는 식량이 모자라 숱한 사람이 굶어죽은것이다. 이같은 정경이 전국에 어디 차아공사 하나뿐이였가?
    
인민공화국은 더없니 곤난한 경지에 이르고말았다. 모택동은 자기의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1962년 1월, 7천인대회에서 그는 교훈을 총결했다. 첫 번째 잘못은 우선 중앙에 책임이 있는데 중앙에서도 내가 먼저책임져야한다. 두 번째 잘못은 성위, 시위, 자치구에 책임이 있다. 세 번째 잘못은 지위1급에 책임이 있다. 네 번째 잘못은 현1급에 책임이 있다. 다섯 번째 잘못은 기업단위, 공사당위가 책임이 있다.
회의참가자들은 모택동의 이 강화를 놓고 열열히 토론하였는데 중앙과 중앙의 각 부와 성1급에 비평의견을 제출한 동시에 분분히 자아비평을 했던것이다.        
모택동은 이와같이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고 거대한 대가를 지불한 인민에게 태도를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게되였다. 이는 그의 침통한 심정을 보아낼 수 있는 일면이겠다. 

         인민공사력사를 정확히 인식하자

“인민공사흥기의 력사를 여하히 조명하고 반성할 것인가?” 개혁개방이 30년이 지난 오늘 이런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는가?  당중앙은 <<건국이래 약간의 력사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에 관하여>>에서 일찍이 인민공사에 대해 준확히 평가하고 결론지은게 아닌가? 하지만 필자는 최근에 <<50년전 모택동은 칠리영을 시할하면서 인민공사선봉을 “발굴”하셨다>>는 문장을 읽어보고 이 문제를 의연히 제기할 필요성을 느낀것이다.


이 문장은 소위 “해밀당안 (解密檔案) ”으로 찍어서 돌린것인데 글에는 일부 당안에 기재된 글귀를 응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권위적인 믿음을 주려고 꾀했다. 하남성 신향의 칠리영은 전국 제일첫번째 인민공사발원지로서 인민공사의 얼굴을 보인것이다. 모택동이 1958년 8월 6일에 칠리영을 시찰하면서 “인민공사는 좋다”고 긍정한 것이고 그후로는 인민공사운동이 신속이 전국에 파급된 것이다. 문제는 당시정경에 대해 어느 세절묘사가 준확한가 준확하지 않는가 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인민공사흥기력사의 배경을 여하히 정확히 파악하고 반영하는가 하는것이며 인민공사라는 이 한단락의 력사를 여하히 정확히 평가하고 반성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데 그 문장은 바로 상술한 중요문제를 인식함에 오차가 있는것이다. 개인미신의 음영이 사라지지 않았거니와 “곧은 말로 기록하는 필법(史筆)”을 쓰지 않고 인민공사를 처음세울 때의 발원사를 그리면서 미화했다. 문장의 결말에다는 칠리영진당지부서기의 말을 인용했다.  
  
 “올해는 모주석께서 칠리영을 시찰한 50주년이며 또한 개혁개방을 한지 30주년이 되기에 우리는  일련의 기념활동을 온양하고있는 바 이 두가지 기념은 우리로 놓고 말하면 의의가 비범한 사건인것이다.”
그리고는 선포한 것이다.
“목전에 이 진에서는 한창 ‘毛主席視察七里營紀念館’을 수건하고있는데 년말에 개관할 예정이다.”
    
모택동이 칠리영을 시찰하고 인민공사를 추천한것과 개혁개방 30주년은 방향, 로선의 성질이 완전히 다른 같지 않은 일인것이다. 어떻게 한데뒤섞어놓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문자의 용법과 사구(辭句)의 배치가 부당하거니와 중대한 력사사건에 대한 평가가 부당하고 자리매김이 부당한 것이다.   
   
중국에서 1958년에 흥기한 농촌의 인민공사화운동은 엄중한 후과를 조성했는바 이 방면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연구성과를 올린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그저 <<건국이래 약간의 력사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에 관하여>> 를 인용하련다.  인민공사에 대한 일단의 평가와 론술은 이러하다.
    
“사회주의건설경험이 부족함으로 하여, 더욱히는 모택동, 중앙과 지방의 적잖은 지도자들이 승리앞에서 교오자만정서가 자라나 서둘러 성공을 추구하면서 주관주의와 주관노력의 작용을 과장했고 참다운 조사연구와 시점을 걸치지 않았으며 총로선을 제출한 후 경솔히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을 발동하였는바 높은 지표, 맹탕지휘, 불어대기풍과 ‘공산풍’ 등을 주요표지로 한 ‘좌’경착오가 엄중히 범람하기시작한것이다”   
  
인민공사는 지난세기 50년대중기 “좌”경착오의 산물이다. 모택동은 칠리영을 시찰하고 인민공사를 긍정한 후 인차뒷이어서 1958년 8월에 북대하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는 회의에서 <<농촌에서 인민공사를 세울데 대한 문제의 결의>>를 통과하였던것이다. 
   
결의는 다음과 같이 제출했다.
    
“인민공사는 장차 사회주의를 세우고 점차 공산주의를 향해 과도하는 가장좋은 조직형식인바 그것은 장차 미래의 공산주의사회의 기층단위로 발전할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공산주의실현은 이미 그 무슨 먼 장래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응당 인민공사형식을 적극응용하여 공산주의의 구체적인 도경을 더듬어내야한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인민공사제도가 농민의 생산자료권을 박탈하였기에 농민들은 토지자유권을 철저히 잃었거니와 지어는 최저한도의 인신자유마저도 잃었던것이다. 하기에 농민이 집체화를 옹호하던 인신기초마저도 와해되고말았던것이다.  
   
인민공사가 제마음대로 사원과 생산로동력, 자금, 토지와 재산을 무상으로 이동하여 쓰고 자류지를 취소한데서 안로분배원칙은 파괴되였고 평균주의 “큰가마밥”이 범람한데서 농민의 생산적극성을  엄중히 상해하여 농업생산은 곤경에 빠지고말았던것이다. 
   
인민공사가 공산주의로 가는 “금다리”로 되지도 않았다. 1959ㅡ1961년기간의 전국성적인 대기황은 엄중한 비정상적인 사망을 빚어내여 수천만 무고한 백성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그중 대부분이 농사지어 알곡을 생산하는 농민이였으니 참중한 대가를 치른것이 아닌가! 그번의 재난을 어찌 “자연재해”라 몰아부칠건가? 그것은 철두철미한  “인재”였다!
   
당의 11기3중전회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을 회복하였고 실천은 진리를 검험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리론은 사람들의 사상을 해방한 것이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은 거대한 정치매력으로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두가지 무릇(兩個凡是)”을 타파하여 농촌에서 전면청부제를 실시함으로써 과감히 인민공사제고를 결속지었거니와 농촌의 생산력을 최대한도로 해방하여 중국을 개혁개방의 새시기에 들어서게한것이다. 이는 력사의 진보이거니와 인민의 승리인것이다. 력사가 표명하다싶이 그 어떠한 정치, 경제, 문화제도의 설계와 제출이든 모두가 광대한 인민의 리익을 들어주고 꼭 존중해야 하거니와 인민군중의 리익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 한단락의 력사가 사람에게 남긴 교훈은 너무도 심각하고 너무도 가슴아픈것이다. 그 한닥락의 력사는 반성하는것 뿐 “기념”할 마무런 가치도 없는것이다. 한데도 젊은이들은 그 력사를 모르고있이니 우리는  응당 그들에게 력사의 진상을 알려주어 사실을 되는대로 외곡하여 독자를 해치는 이른바 “력사당안”에 정신차리게해야한다.
지난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교훈이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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