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 묻힌 비(27)
(1)진짜가짜 : 공개된 비밀당안에서 본
중쏘관계의 중대사사(重大史事)
(2)당내민주의 결여와 중공8대로선중단
(3)황소당안
중쏘관계의 중대사사(重大史事)
중쏘관계사는 줄곧 현대사나 당대사연구에서 열점이자 난점이기도하다. 인민출판사에서 방금 출판한 <<중쏘관계의 중대한 사건진술>>은 새로 공개된 허다한 비밀당안에 의거하여 엮어진 문헌자료로서 이왕의 맞지 않게 오도된 력사사건들을 바로잡아주고있다.
중쏘관계사연구는 현대사연구중의 열점이자 난점이다.
쏘련과 중국은 다가 20세기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발생한 국가인 것이다. 두 대국의 력사에 대한 연구를 보면 줄곧 현대 당대사령역이 열점이자 난점으로 되고있었는데 더욱히는 량국관계의 연구가 더더욱 열점이자 남점으로 되고있는 것이다. 왜서 이렇게 되는가?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성립초기를 보면 두나라가 형제같은 우의를 갖고 지냈지만 후에는 쌍방이 론쟁을 하기 시작했고 서로 낯을 붉히던데로부터 나중에는 류혈적인 대항을 하기에 이르었으니 변화가 하도 극심하고 너무도 희극적이기 때문이다. 한데 한시기 대부분의 유관자료들이 보밀상태인데다 의식형태방면에서도 같지 않아 많이 꺼리다보니 이 령역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변화무쌍한 두나라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진실한 내막을 잘 모르기에 그저 억측이나 짐작으로 얼떨떨히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때는 내막을 아는 것을 많이 “불허”했지만 지금은 당안이 공개되고 새롭게 연구되면서 기왕에 알고있던것과는 다르게 “틀린것”과 “가짜”가 너무도 많았다는 것이 드러나고있는것이다.
조선전쟁에 관하여
조선전쟁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귀에 익을 정도로 하도 여러 번 들어 자세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정작 자세히 따지고 들면 허다한 것이 그런것 같기도 하고 비슷한것 같기도 하고 해서 딱 찍어 긍정적인 대답을 못하니 인식상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폭발했다. 북조선군대는 신속히 38선을 넘어 남으로 밀고나가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조선전쟁은 북방정부가 먼저발동했거니와 알심들여 계획한 후에 발동한 것이라는건 이제는 학계가 다 공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허다한 사람들이 진상을 잘 모르고있다. 사람들의 고유한 관념이라면 “남방정부가 부단히 전쟁도발을 했기에 북방은 반격한 것이다.”라고 하거나 혹자는 “남방에서 기여히 무력통일을 하자고 들길래 북방은 필요한 준비를 한것이다.”라고 하면서 결과 조선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사실이 과연 그러하다면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즉 남방정부가 부단히 확군하고 싸울 준비를 하면서 “북진”하겠다고 믿을 만한 성실한 맹세를 했다면 왜서 전쟁이 금방 시작되자 대규모의 공세를 들이댄것은 북조선군대였는가하는 것이다.
새로 공개된 로씨야당안을 보면 그때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혀놓았다.
1950년 1월이래, 북방정부와 쏘련지도자는 밀접히 접촉하고 협상했는데 쓰딸린은 “조선령도가 국세를 분석하고 군사방식으로 국가통일을 준비하는것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 외에 북방정부가 쓰딸린의 동의를 얻어내고는 어떻게 쏘련의 무기원조를 받아 조선전쟁을 일으켰는가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면서 과정까지 세세히 밝혀낸 저작들도나온것이다. 학자들이 연구해낸 결실을 말하는 것이지 작가의 손에서 허구로 꾸며진 이야기를 포함해 말하는건 아니다.
모택동은 처음에 림표를 조선에 내보내여 지원군을 지휘하게 할 생각이였다. 그러나 림표가 병을 칭탈하고 다른 사람에게 총지휘를 맡기라고 떠밀었다. 기실은 속으로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전쟁이 지속될시 미군이 개입할 것이며 그와 맛서서는 이길 승산이 없기에 그는 이 전쟁에 중국이 개입하는 것도 반대한것이다. 그의 주장이 도리가 없는건 아니였다.
중공중앙과 중앙군위는 어느 원수를 조선에 내보낼것인가를 놓고 고려할 때 맨처음 짚은것이 속유(粟裕)와 림표(林彪)였던 것이다. 속유도 신체가 좋지 않으니 결국은 팽덕회가 나가게 된 것이다.
“장거리전파방송”에 대한 새 력사지식
1956년 쏘공20차대표대회 후 중쏘량국간에는 쟁론이 빈번하고 마찰이 가심해지면서 두나라간의 분기는 파렬로 줄달음쳤다. 1958년 여름, 중쏘지간에는 “장거리전파방송”과 “련합함대”사건이 엄중한 말다툼을 일으켰던것이다. 오랬동안 사람들은 그 충돌이 중쏘관계를 파렬에로 몰고간 도화선이라 여겼는데 그 원인인즉은 쏘련의 작법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했고 흐루쇼브는 중국을 공제하려고 기도했다고 보편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장거리전파방송”에 대한 쏘련의 태도표시는 이러했다.
“소유권은 긍정적으로 중국에 있다. 그러나 쏘련이 사용하는 것 만큼 돈을 더러내는 것이 응당한 것이다. 가히 대부하는 형식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방면에서 이렇게 견지했던것이다.
“중국은 대부가 수요되지 않는다. 만약 쏘련에서 꼭 돈을 내겠다면 중국은 그만두겠다.”
련합함대문제에 들어가 흐루쇼브는 말하기를 자기 본인은 쏘공중앙주석단이 이 문제를 토론할 때 이미 말한바와 같이 “종래로 중국동지들이 생각한 것 처럼 그렇게 중국함대를 공동히 지휘하자고 생각하지 않았거니와 종래로 두 나라가 공유하자고 생각해본적도 없는 것이다.”, “모쓰크바의 생각은 미국에 맛서자는 것이지 중국을 공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두나라간의 분기가 기실은 주요하게 군사동맹을 움직여 나가는 방식상 래해가 같지 않은데서 생긴 것이였다. 흐루쇼브의 요구는 공동행동이였지만 모택동이 이때 바란것은것은 오로지 원조를 받자는 한가지 뿐이였던 것이다.
진석련(陳錫聯)이 폭로한 진보도충돌의 세절
그후 또 금문도포격사건, 원자탄문제, 인민공사문제, 중인변계충돌, 쏘련저문가철거, 중쏘공개론전, 변계를 가르는 등등 일계렬의 중대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중쏘량측은 다 의식적으로 모순을 삮이고 관계를 원상태대로 회복하자고 했지만 새로운 분쟁이 계속일어나 결국은 수화상극이 되고만것이다.
1966년 3월, 중공중앙은 쏘공23차대표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량당관계도 중단되였다. 중국은 “쏘련의 당과 국가의 령도를 지금은 수정주의가 찬탈했다.”고 성질을 규정지음과 동시에 이를 전당에 알리였던것이다.
한편 쏘련은 이에 대응하여 중쏘변경에다 백만에 이르는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면서 몽고에 20만이 진주했고 원동에다는 핵공격장비를 갖춘 수백대의 폭격기를 배치했다. 1964년 10월 15일부터 1969년 3월 15일이전까지 쏘련측은 4189건에 달하는 변경사건을 련속일으키다가 나중에는 진보도(珍寶島)사건을 발생시키고야만것이다.
진보도는 흑룡강성 호림현경내에 있는데 우쑤리강흐름길 주항도이내의 중국측에 있으며 면적은 0.7평방킬로밖에 안되는 강복판의 자그마한 섬이다. 1968년말에 우쑤리강이 얼어붙자 진보도는 중쏘가 충돌하는 초점으로 되었던것이다. 쏘련변방군은 무장을 들고 진보도에 올라 진보도에 있는 중국변방순라대를 가로막고 때렸거니와 지어는 총까지 쏘아대면서 도발했다. 1969년초, 중국측은 반격하기로 결정했다. 3월 2일, 중쏘는 진보도에서 첫 번째로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30분넘게 맛불질을 했는데 쌍방은 모두 수십명 상망을 냈고 쏘련군은 진보도에서 물러갔다.
당시 심양군구사령원이였던 진석련(陳錫聯)은 이같이 회억했다.
“그번의 진보도자위반격전은 확실히 중앙의 비준을 받고 일찍부터 준비한 것이였다. 그때는 한창 9차대회를 준비하고있었길래 대군구수장들은 다 북경에 모이였다. 그리하여 중앙군위는 경서호텔의 방 하나를 전문내여 전용선을 가설하고는 나를 책임지게 했다. 나는 전선과 직접련락했고 외교부부장 교관화(喬冠華)가 국제방면의 정보를 장악하여 수시로 주은래에게 보고하여 최후로 결심을 내리게 했던것이다. 첫전투를 잘해내기위해서 우리는 석달동안 준비했다. 세 개 군에서 세 개 정찰련을 뽑았는데 한 개련에 2ㅡ3백명, 작전경험이 있는 참모인원이 대오를 이끌고 훈련시켰는데 아예 시원스레 해내도록 했다.”
오늘와보면 진보도사건은 쌍중의의를 띄고있다. 중쏘관계가 이미 전쟁변구리에 이르럿는데 그것은 바로 두나라관계를 이제는 돌려세울 수 없다는 표시였고 한편으로는 중국에다 중미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준것이다. 중국의 일관적이였던 반미립장은 신속한 변화가 생기였거니와 미국도 이에 적극적으로 나왔기에 중미는 신속히 접촉하여 대화를 하기에 이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당시 허다한 사람들은 리해가 되지 않아했다. 알바니아당은 지어 중국을 우경이라 비평했다. 모택동은 아랑곳하지 않고 떳떳이 대꾸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경이다, 그런들 어떻단말인가? 기실은 간단한 도리였다. 당시 중국의 실력으로 쏘련을 당해내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 남의 힘을 끌어당겨야 했다. 하여 쏘련은 중국을 감히 때리지 못했던 것이다.
력사란 이같이 희극이 충만된 것이요 꾸며만든 각본은 아무 때든 진실앞에 색이 바래지고마는 것이다.
당내민주의 결여와 중공8대로선중단
〔핵심제시〕
1956년9월에 열린 중공8차대표대회는 당이 전국을 집정해서는 처음으로 개최한 전국성적인 당대표대회였거니와 또한 처음으로 열어보는 민주의 성회(盛會)이기도 했다. 민주를 제창하였기에 8차당대표대회는 정확한 로선을 제정하여 당의 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의 방향을 밝힐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58년 5월 8대2차회의후에는 “개혁개방로선의 전주곡”이라 부르던 8차당대표대회의 로선이 그만 중단되고말았다. 하여 중국사회의 발전은 근 20년간이나 전진을 멈추고 만 것이다. 왜서 발전할 기회가 옆을 스쳐가고말았는가? 오늘 우리가 이 한단락의 곡절적인 력사를 회고해 보면 당내민주의 결여가 8차당대표대회의 로선을 중지한 주요한 원인이였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8대후 당내민주결여의 표현과 그 영향.
당내민주는 당의 생명이다. 이는 당이 80여년간의 력사경험을 총결하면서 찾아낸 과학적인 결론인 것이다. 당내민주는 8차대표대회후 한시기 매우오랜기간 엄중히 파괴되였는데 그것은 아래의 3개방면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一) 중대한 문제를 개인이 결정하고 개인이 조직을 릉가하는 가장제형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건국이후 당과 국가가 취득한 일련의 승리앞에서 당내의 부분적 동지, 모택동을 포함하여 그 본인부터 교오자만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이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고 개인이 독단하며 부동한 의견은 듣지 않는 가장제작풍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의 의견이 모두 위원회의 집체토론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잘된것이 아니였다. 모택동은 당력사에서 여러차되는 정확한 로선을 대표하는 것으로 되였거니와 건국후 개인위망이 날따라 높아간데서 그가 결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옳다고 찬동하는 집체버릇이 생긴것이다. 하여 부동한 의견이 있는 사람은 그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아야 했다.
박일파가 회억한것과 같이
“모주석은 위망이 높았기에 모두 그를 존경했고 그가 어떻게 하라면 모두 어떻게 따라했던 것이다.”
이는 모택동과 중앙정치국지간의 관계지만 실상은 상하급관계로만 돼버리고 만 것이다.
이같이 “겉보기에 집체령도같은 허울이 개인독단을 가리워”준데서 상반적으로 모택동을 자기 개인의 의지면 진리라고 여기는 고질된 버릇을 갖게 만들어 날이 가면 갈수록 “좌”의 길을 걸어 반모진을 반대하고 “대약진”을 발동하고 지어는 “문화대혁명”까지 일으켜 국민에게 막대한 재난을 들씌우면서도 자기는 맑스주의를 보호한다고 여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二) 당내의 부동한 의견은 정치적원칙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비판했기에 당원 내지 중요령도의 민주권리는 침해를 받은것이다. 일찍이 1955년에 열렸던 7기 6중전회에서 모택동은 등자회(鄧子恢)가 농업합작화를 온보전진으로 발전시키자고 의견을 제기하였다하여 그를 “우경보수”라고 틀리게 비판했다. 이때로부터 건국후 당내에서 부동한 의견과 정상적인 쟁론마저도 로선투쟁을 벼리로 해야 한다면서 문제로 삼았으니 모택동자신이 제출했던 당내부동한 의견에 대해서는 꼬리를 잡지 않고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으며 모자를 씌우지 않는다던 “3불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하기에 당내정치생활과 사회경제발전에 소극적인 영향을 가져다준 것이다. 8기 3중전회가 끝나 페막식을 하는 그날에 모택동은 반모진(反冒進)을 “우경” “퇴보”라 했다. 그는 남녕회의에서 또 중앙의 일부령도가 실사구시적으로 조급하게 모진하는 경향을 규정하자고 하였다하여 그러면 “착오”라면서 첨예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우파가 진공하더니 어떤 동지는 그쪽으로 쏠려 거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우파와 거리가 멀지 않다, 50m나 될것이다.”
모택동이 한 말이다.
성도회의에서도 모택동은 모진(冒進ㅡ모험적인 전진)은 맑스주의고 반모진(모진을 반대)은 반맑스주의라고 판단했다.
모택동은 당내의 부동한 의견은 오직 사리를 밝혀가며 설득하고 리치에 맞게 설복해야 한다는 민주원칙을 스스로 위반한 것이다.
이 시기 중앙의 기타 다른 령도들은 모택동의 의견과 어긋나거나 일치하지 않을때면 혹은 형세에 지장을 줄것 같아서, 혹은 당내단결을 유지하고 보호하자는데서, 당령수의 위망을 고려하여 왕왕 자기비판을 하고 자아검토를 했던것이다.
(三) 민주집중제가 차츰 침식되여 집체령도원칙이 파괴된것이다. 50년대 중후기 당내의 민주생활은 점차 정상적이던것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되여버려 민주집중제가 차츰 침식되였던것이다. 우리는 “모진”과 “반모진”간의 갈등으로부터 당의 집체령도원칙이 어떻게 한발짝 한발짝씩 파괴되고 8차당대표회의 주요로선의 하나인 경제건설방침이 어떻게 종지부를 찍어버렸는가를 료해할 수 있는 것이다.
1955년 년말부터 1958년 상반년까지 중앙령도들은 건설속도문제를 놓고 두가지 현저히 다른 주장으로 분기가 있었다. 즉 모택동을 대표로 한 속도를 빨리여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면서 사회주의건설을 빨리 성공하자는 사상과 주은래, 진운 등을 대표로 한 온보전진을 주장하면서 균형발전하자는 사상이였다.
이 분기는 모진ㅡ 반모진ㅡ 반반모진 쟁론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쟁론에서 전반(前半) 즉 1955년 말부터 1957년 8기 3중전회 기간에는 집체의지가 체현되였다. 주은래 등이 제출한 “경제공작은 실사구시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모진”을 반대하는 사상과 작법이 맹목모진하는 세력을 눌러놓아 중국의 경제는 1956년, 1957년에 계속적인 발전을 보장한것이다. 반모진이 당내에서 대다수령도의 긍정을 받은것이다. 이때의 반모진은 당이 집체령도와 집체지혜에 거하였기에 가능하게 출현할 수 있었던 중대한 실책을 피면할수있었으니 당사책에 응당 올라야 한다.
모택동이 반모진을 반대했지만 그때 그가 어쨌든 중앙정치국의 대다수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니 그때 당내의 민주생활은 정상이였다는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 정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7년 하반년이후 모택동은 반모진을 비판하기 시작했던것이다. 8기3중전회가 페막되던 그날에 모택동은 반모진에 대해서 실정을 알아보는 식으로 공평한 비평을 하느라했다. 그가 반모진은 ‘우경’이고 ‘퇴보’라 했다.
그러고도 모택동은 일련의 회의를 열고 ‘반모진”을 철저히 비판했다. 1958년 1월의 남녕회의에서 모택동은 끊지 않고 련이어서 얼굴까지 붉혀가면서 반모진을 엄하게 비평했다. 그래서 회의분위기는 몹시 긴장해졌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서 2월에 열린 정치국확대회의에서는 반모진을 주장했던 중앙령도들인 진운(陳云), 리선념(李先念) 등이 다가 자아비평을 했고 각자는 반모진중에서 범한 “착오”에 대해 책임을 졌다. 3월의 성도회의에서 모택동은 계속하여 “반모진은 유물론을 존경하지 않거니와 변증법도 역시 존중하지 않는다. 전면이 못되고 본질과 주류를 틀어잡지 못했다”고 비평했다.
남녕회의와 성도회의가 반모진 그리고 당중앙을 대표하여 반모진을 주장한 중앙령도들을 비판한 것은 실제상에서 당중앙령도의 집체적 경험과 지혜를 부정한 것이며 또한 실제상에서 당중앙의 집체령도원칙과 민주집중제를 파괴한 행위인것이다. 그러면서 상반대로 개인독단과 개인숭배를 조장(助長)했다. 이와함께 1958년 모택동은 또 여러차나 이후에는 반우경 반보수를 할 뿐 반모진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정치규정이 당내의 민주를 더욱더 억눌러 결국은 해로운 “좌”적 기염이 전국에 만연되게 만들었던것이다.
반년넘어 반모진을 비평하다보니 모택동은 자기가 창도했던 당내의 부동한 의견에 대해서는 도리로 사람을 설복하고 수긍하게 해야지 세력으로 눌러 복종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고말았던것이다. 그가 한 비평들은 적잖은 것이 사실이 불충분한데다 론거가 부족한곳이 있거니와 비평하는 어투가 지나치게 과격하고 쩍하면 정치로선의 높이에다 무한히 끌어올리군 해서 그를 제외한 기타 다른 중앙령도들은 변명조차 하기 어렵게 만든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당내생활이 그 한 사람의 말뿐인 “일언당(一言堂)‘이 되고만 것이다.
당내민주가 유린당한 표현이다.
〔黃巢檔案〕
당조(唐朝) 농민기의령수. 생년월일은 력사에 기재없다. 조주원구(曹州寃句ㅡ오늘의 산동저택)사람. 과거에 낙제하니 875년에 수천명을 휘동하여 조주에서 기의하여 878년에 왕선지(王仙芝)가 죽자 수령으로 추천되여 충천대장군이 되였다. 881년에 장안을 공점하여 제정권(齊政權)을 세웠다. 그후 전패하여 장안에서 쫓겨나 산동일대를 전전하다가 패하게 되니 살해된 것이다.
량계초(梁啓超)가“중국력사상의 농민기의는 야심이 있는 혁명이지만 자위를 모르는 혁명이였다.”고 말한적이 있다. 농민수령들의 언론이 “야심혁명”이였다는 웅변적인 증거로 되는것이다. 진승은 입신출세하기 전에 남의 머슴살이를 하면서 “조금만 잘살아봣으면 얼마나 좋으랴.”했고 류방은 진시황을 만나보고는 “아, 대장부로 태여났으면 저렇게는 돼야하는건데!”하고 개탄했으며 황우는 진시황의 호화로운 차대를 보고는 “저놈의 걸 내가 가졋으면”했다. 황건장군들의 구호는 “창천이 무너지면 황천이 떠받치리라”는 것이였다. 지어 민간에서는 “황제노릇을 륜번으로 한다면 명년에는 내차례일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러니 과거에 락방한 당조의 수재 황소의 필끝에서 “내 꽃이 피여 날 때면 백화를 죽여버리리라.”는 영탄곡이 나온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에서 피비린내 나는 그의 야심을 어렵지 않게 보아내게되는 것이다.
9월 8일 가을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내 꽃이 피여나면 백화를 죽여버리.
충천에 날리는 향기 장안을 덮을제
성안에 그득한 황금 내것이 되리라.
이 시에서 사람들은 피비린 살육을 가슴속에 한가득품고있는 황소가 왜 “충천에 날리는 향기 장안을 덮을”것리라고 랑만적으로 부르짖었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기의목적이 기껏 잘살아보자는 것이였다. 그러니 잔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원 875년, 하남일대에 력사이래 보기드믄 기황이 들자 복양(濮陽)사람 왕선지(王仙芝)가 기의를 일으켰다. 그가 조주를 료략질 할 때 소금밀매상 황소가 수천명을 데리고 와서 왕선지군에 가담했다. 이때 당희종(唐僖宗)은 나이가 13살이였는데 환관들의 부축을 받아 황위에 올라 황제로 되었다. 이 철부지 소황제는 근본 국가의 정사를 모르거니와 하루종일 말타고 뽈치기유희나 놀았다. 하기에 그 재능은 늘어서 전국시합에 관군이 됐다. 나라의 군정대권은 모두가 환관들의 손에 들어가 왕선지군을 복멸할 재간이 없었다. 이때 왕선지는 하남에 있었지만 산동일대에서도 성을 들이쳐 진지를 뽑아버리자는 구호가 나돌았고 심지어 동쪽서울인 락양을 직접위협해서 당조의 통치는 매우 위태롭게 되였던것이다.
량계초는 농민기의군은 서방혁명과는달랐다고 일찍이 말한적이 있는데 그 특점이라면 진영내부에 다툼이 늘 있었다는 그것이다. 왕선지의 의군역시 례외가 아니다. 조정은 그를 이기지 못하겠으니 늘 써온 방법대로 무마하여 귀순기키자고 했다. 왕선지를 귀순만 하면 좌신책군압아(左神策軍押衙)를 시킨다고 했다. 왕선지는 그 소리를 듣고 대단히 기뻐했다. 하지만 황소는 분개하면서 툴툴거다. 그 원인즉 자기한테는 일자반급도 벼슬을 주지 않기 때문이였다. 그는 왕선지를 질책했다.
“의군이 투항하면 너 혼자만 벼슬을 하고 이 많은 사람은 차례지는게 뭔가? 너혼자 조정에 가 벼슬하고 이들은 내한테 달라!”
하면서 그는 돌연히 왕선지와 맛섯던 것이다. 왕선지는 감히 작위를 받지 못했거니와 의군은 분렬되고말았다.
3년후 왕선지는 조정에 향해 투항하겠노라했다. 당군은 그래라고 승낙하는 한편 부장상군장(副將尙君長)을 잡아죽이였거니와 이어서 왕선지를 대패시키고는 그의 목을 잘라버렸다.
이리하여 의군의 잔여무리는 황소를 왕으로 받들어 올리고는 호를 “충천대장군”이라 했다. 이 칭호는 물론 황소자신이 정한것이였다. “충천에 날리는 향기 장안을 덮을 제”라고 호언장담했으니 그 첫 실천이 “충천대장군”이 되어 권력을 잡은것이였다.
그후 황소는 의군을 끌고 회하남북을 종횡했고 또는 장강을 건너 남하하여 교주(交州), 광주(廣州)를 공점하기도 했다. 그 기간에 황소는 두번이나 조정에 투항을 자원했다. 절강서쪽에서 한번싸움에 황소는 상망이 참중하여 하는 수 없이 당천평군(唐天平軍)에 투항하겠노라 빌었던 것이다. 조정은 황소에게 우위장군(右衛將軍)직을 주었다. 시세를 다시 잘 살핀 황소는 번진(藩鎭ㅡ 당대중기에 변경과 중요지역에서 그 지방의 軍政을 관장하던 절도사)이 자기를 보위하자는 것뿐이지 호령이 다름을 눈치채고는 곧다시 반변하여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면서 싸우다가 절강동쪽으로 갔다. 남하하여 광주를 진공 할 때 절도사 리초(李迢)에게 천평절도(天平節度)를 시킨다면 투항하겠다고 했다가 거절받았다. 그리고나서도 안남도호(安南都護)를 시켜달라, 광주절도사를 시켜달라 했다가 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조의 우부사(右仆射ㅡ 官名. 군주좌우의 작은 신하) 우종(于琮)이 상서를 올려 반대했다.
“남해시는 선박무역이 번성하기에 황소를 일단 안남도호나 광주절도사로 봉한다면 황소의 부대는 더 강해질 것이요 그로하여 국고는 줄어들 것이며 황소가 만일 또 반변한다면 그때는 더 억제하기 힘들것이오이다.”
그리하여 조정은 황소에게 관청을 지키는 관직을 주었다. 황소는 조서를 받고보니 관직이 너무도 작은지라 대노하여 광주를 인차들이쳐 리초를 붙잡고는 자칭 “의군도통(義軍都統)”이라 선포했다.
880년, 황소는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회하를 건너 직방 동쪽서울인 략양으로 향했다. 황소의 “충천대장군”이라던 칭호는 “솔상대장군(率上大將軍)”으로 바뀌였다. “보천지하, 막비왕상 : 솔상지병, 막비왕신(천하에 설마 왕보다 높은 자 있을소냐, 병사를 거느림은 왕신의 직책이도다)”그는 략양을 인차 들이쳐 먹어버렸다.
황소는 계속 부대를 휘동하여 서쪽으로 장안의 문호인 동관(潼關ㅡ략양에서 장안으로 들어가는 요지. 지금의 섬서성 동관현의 동남쪽에 있음)을 들이쳐 서울을 진동시켰다.
조정에서는 당희종(唐僖宗)을 보내여 “아부‘의 환관(아버지의 환관) 전령자(田令孜)에게 신책(神策), 박야(博野) 10만금군으로 동관을 수위하라고 직접 어명을 내리게끔 했다. 그런데 벼슬아치의 자식들은 다가 평시에 말타고 수레타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존귀하게 자라다보니 싸움이란 한번도 해보지 않은지라 전쟁을 하자니 가슴떨리면서 눈앞이 캄캄해났다. 지어는 애비아들이 부등켜 안고 통곡하는 추태까지 생겼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가지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데 그것인즉 바로 거액을 내서라도 시장에서 사람을 사서 대신 금군졸병으로 내보내는 것이였다. 그 대상은 물론 가난한 집의 자식들이였다.
이런 금군졸병들이 집중되여 출정을 한단말이지? 방관자들의 눈에 안겨드는건 오로지 무기도 바로잡을 줄을 모르는 그들이 싸우면 죽기마련이라 무서워 부들부를 떠는 게잘사한 꼴이였다. 그런꼴로 동관을 지켜겠는지 도무지 신심이 보이지 않았다.
동관북쪽에 한갈래의 깊은 계곡이 있는데 장사꾼들이 세금을 물지 않으려고 관문을 에돌아 거기로 밀출입을 했길래 평시에 통행을 엄하게 단속해왔다. 하여 이곳을 “금곡(禁谷)”이라 불렀다.
전령자는 일개 환관이였지 군사는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러니 어떻게 진영을 지켜낼 방도를 찾을가? 그는 동관을 지킴에 중요한 금곡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황소는 금곡으로 선발대를 들여보내여 내외에서 동관을 협공했다. 조정은 동관을 제꺽잃고말았다.
당희종은 장안교외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면서 통곡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령자는 500여명 신책군으로 당희종을 호위하여 함양(咸陽)으로 철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당군을 눌러 기세가 오른 황소군은 략탈해낸 비단옷들을 떨쳐 입고 치중차에 앉아 락양으로부터 장안에 이르는 구간에 길게 이어졌다. 세상에 부귀하기 짝이 없는 군대였다. 그들은 장안에 쳐들어 온 후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마치 은덕을 베푸는 양 히떠운 소리를 했다. 황소의 부장 상양(尙讓)은 장안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승낙했던 것이다.
“황왕은 천하의 려민백성을 위해 기의한 것이니 당왕실같이 그렇게 백성을 무혈할줄을 모르는게 아니다. 모두들 집에 들어 앉아 까딱말라. 보증코 편안해 질 것이다.”
황소부대가 장안으로 들어갈 때의 모양을 보면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황소 본신은 황금가마에 앉았고 시위들은 다가 포자(袍子ㅡ소매가 길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중국고유의 긴 옷.)를 입었고 저가끔 머리에다는 천하게 울긋불긋한 두건을 쳤다. 부장들은 동으로 만든 가마에 앉아 따라갔다.
황소는 등극하자 국호를 대제(大齊)라 했다. 새 조정이 정해지자 대제는 부호의 땅을 나누는 일부터 착수했다. 전의 관원들의 말일이 닥쳐 온 것이다. 그리고는 뒷따라 몇참가지 않아 군민이 같이 이룩했던 밀월도 인차끝장나 상양이 했던 대답은 텅 빈 말이 되고말았다. 보통백성의 것이건 상가부호의 재산이건 모두가 그들이 약탈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강산을 세운 이 승리자들은 뜻이 이루어져 득이연하여 “싹쓸이”를 하리라 했다. 그들의 눈에는 모든 재물이 원주인이 없어보였던 것이다. 일정한 근거지를 갖지 않는 황소군대는 미친듯이 떠돌이 도적본성이 크게 발작하여 “싹쓸이”이를 곱잡아웨치면서 장안성을 략탈했다. 그리고는 미녀들을 빼앗고 자유시장과 점포에 불을 지르면서 제멋대로 살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여 장안성은 골목마다 구석마다 처절한 아우성과 비명이였다.
황소가 번화한 장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이 성도로 달아난 당왕조는 숨을 돌려 쉬면서 전국의 병력을 끌어 모았다. 왕실을 구원할 수 있는 보귀한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882년, 당왕조는 장안을 일시 공점하게 되였다. 황소는 이것은 백성들이 당군과 내통했기 때문이라 여기고는 분김에 8만여명이나 마구살해했다. 장안성은 피못에 잠기였다.
이듬해 당나라장군 리극(李克)이 다시들이쳐 서울인 장안을 수복하면서 황소는 관동으로 쫓겨갔다. 근근히 2년만에 황소가 세웠던 대제국은 이렇게 멸망을 선고하고말았다. 황소는 계속 동쪽으로 밀려갔는데 진주를 포위공격 할 때는 수년간 전란을 겪은 관동에 이미 기황이 들어 백성들은 벾에 기대여 길을 걸을 수도 없게 된 형편이였다. 황소군대에는 량향(粮餉ㅡ옛날 軍糧과 급료)이 없었다. 그들은 몇백개의 거대한 맷돌을 만들었다. 이름이 춘마채(春磨砦)라는 것이였다. 그들은 미친듯이 사처에서 백성을 붙잡아다 춘마채에 넣어 뼈채로 갈아서 군량으로 했다.
사람을 먹는 이런 거대한 물건이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먹어버렸는지는 력사에 똑똑한 기재가 없지만 지금까지 알고있는것이라면 하루에 수천명이 춘마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황소군대가 진주를 1백날 포위하고있었으니 이 날자를 가지고 계산해봐도 먹어버린 사람인수가 십몇만에 달하는 것이다! 하남으로부터 산동에 이르는 수십주의 백성이 다가 황소군의 군량으로 되었으니 의군의군, 소위의군이란 듣기좋은 이름뿐이였지 그야말로 사람을 뼈도 남기지 않고 먹어버리는 떠돌이 악마도적떼였다!
그후 전문 사람을 잡아먹는 이 군인도적떼는 목표를 철저히 잃은채 하남중부일대를 떠돌았다. 궁지에 빠진 황소는 수하대장들이 자기를 잡아먹자고 하지나 않는가고 의심하기시작해서 그 눈치를 차린 적잖은 대장들이 분분히 당군에 투항했다. 이같이 제손으로 대오를 허물어버린 황소는 싸움마다 패하면서 산동일대로 도망했다.
884년 6월, 태산으로 도망친 황소의 신변에는 겨우 1천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제 형제와 외조카를 포함한 친신들이였다. 전성기에 60만명의 규모로 까지 발전하여 동관(潼關)을 공격할 때 당장군 장승범(張承范)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농민폭동군은 군중을 리탈하였기에 전부 와해되여 황소눈 제왕이란 이름뿐 제 가족만 거느리는 신세로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은 제 외조카의 손에 살해되고말았다. 〔
비판적인 평론〕
황소의 군대가 사람잡아먹는 악례(惡例)를 창시한 것이 아니지만 확실히 중국력사에서는 규모가 제일 크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치게 하는 사람잡아먹은 사건을 빚어낸 것만은 사실이다.
수조말년(隋朝末年)에 주걸(朱傑)이 도적을 모집하여 무리를 짖더니 그것이 어느덧 20만이 되는 란군(亂軍)으로 자라나 안휘, 호북일대를 돌면서 제멋대로 마구략탈했다. 주걸은 사람을 먹는 력사에서 3가지 큰 발명창조를 한 것이다.
(1), 첫발명이란 것이 세금을 돈과 량식으로 받지 않고 “작고 약한 남녀”를 받아들이는 것이였다.
(2), 사람을 먹는것도 미학적인 높이로 올리여 그것을 일종의 예술적인 향수로 여겼다. 주걸의 명언은 “인육을 맛보지 않고서야 어찌 미식가라 하랴? 내먹을 건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없다!”는 것이였다.
(3), “도마채(搗磨寨)를 발명하여 사람을 산채로 집어넣어 갈아죽이는 것이였다.
“안사의 란”에 이르러 장순이 수위하고있던 수양성(하남성에 있음)이옹근 10달동안이나 포위되니 량식이 다 떨어져 먼저는 말을 잡아먹고 그것이 없으니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했는데 모두 3만명이나 잡아먹었다. 그래서 성이 공략될 때 살아 남은것이란 4백명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북송말년에 송, 금 두나라가 년년이 교전(交戰)했는데 산동, 회남일대는 거의 다가 막힌데다 관병으로부터 도적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먹이”로 여기고 서로 다투어 잡아먹었다. 당시 사람고기값이 개, 돼지값보다도 더 쌋던것이다. 무엇때문에? 사람의 수자가 개, 돼지보다 썩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고기가 싸기가 어느정도였는가? 비만증이 있는 고기 한근값이 15전, 그것을 튀겨 볶은다음 소금절이를 해서 말리운것이야했다. 남자는 늙을수록 여윌수록 고기값이 더 갔다. 이런 사람을 “요파화(饒把火)”라 했다. 뜻인즉 쉽게 썩지 않으니 다시끓인다하더라도 귀한 석냥가치를 헛쓰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녀인을 “불흠양(不羨羊)”이라 불렀다. 양고기마냥 불길이 좀만 세면 쉽게 문드러진다는데서 생긴 이름이다. 더욱더 무서운것은 키가 1.1ㅡ1.4m이하의 아동이였다. “뼈가 무른 두다리 양”라 불렀으니 그건 먹기좋다는 소리였던것이다.
원조말에 주원장(朱元璋)의 회우군(淮右軍)은 “기식인(嗜食人)”이라, 사람고기를 즐겼다는 말이니 상상외로 그들은 사람고기먹는 것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여겻던 것이다.
게다가 먹히우는 사람을 세등분으로 나누기가지 했던 것이다. 첫등급에 가는것이 어린애고 그 다음은 여자고 그것의 다음에 가는 것이 남자였다. 뿐만아니라 사람을 먹는 방법 또한 많이 발명창조되였으니.....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력조력대 소유의 사람고기먹는 짓이 모두 황소와는 비기지 못했다. 황소는 고금중외 천자제1호에가는 식인마왕이였다. 그는 주걸이 발명한 “도마채(搗磨寨)”를 “춘마채(春磨砦)”로 개조했는데 근근히 “搗”자를 “春”로 바꾸고 “寨”를 “砦”로 바꾸었지만 효률은 썩 높았던 것이다. 한데 황소군대가 사람을 대규모로 잡아먹긴해도 적군은 잡아먹을 수 없어서 나중에는 제 군관까지 잡아먹는 미치광이로 되고만 것이다.....
독재환각(獨裁幻覺)은 일종의 비슷한 지랄병증상으로서 소유의 농민령수의 몸에서는 그것이 신통히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은 반역을 일으키는 지랄인격증으로 모양을 갖추는것인데 순리롭건 어렵건, 이겼건 졌건간에 돌연간에 손에 중병을 틀어주고나서는 다가 단기적이면서 반복적으로 발작하는 기괴하고 허황한 증상인 것이다. 호칭 “틈왕을 맞으면 량식을 바치지 않는다”던 리자성(李自成)이 반란초기에 생겨났던 떠돌이도적습관이 고쳐지지 않고 살인을 도락으로 삼았다가 리암(李岩)의 권설을 듣고서야 살육을 적게했고 장헌충(張獻忠)은 사천에서 지랄병이 더 발작해서 도살을 마구했던 것이다.
리국문(李國文)선생은 <<唐末食人考>>에서 황소를 이렇게 평가했다.
一), 문재로 되려했지만 시종 급격하지 못한 수재였다.
二) , 무(武)에는 열중하지 않고 3백일 사람잡아먹는 짓만 열중했다.
三), 흥정으로 귀순을 하려했지만 종시 조건을 합치지 못햇다.
四), 황제가 돼보려고 장안에 들어갔지만 자리를 온정히 잡기전에 떠돌이도적떼의 본성을 드러내고 말앗다.
아무런 것도 이루지 못하고 방법조차도 몰랐으니 사람들이 특점이나 장점을 말하기 힘든 반거충이다.
리국문선생의 이러한 관점은 틀려도 대단히 틀린 것이다. 황소가 종래로 좋은일을 한것이란 없는 반거충인것만은 사실인데 말할만한 특점은 있는 것이다. 무엇이겠는가? 사람을 잡아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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