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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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29)
2011년 03월 25일 12시 07분  조회:2620  추천:12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29)

                             “문혁”의 최후도화선    

1965년, <<신편력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함>>을 놓고 팽진(彭眞)과 강청(江靑)사이에는 일장의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팽진은 한발짝 한발짝 바싹 다가드는 “제1부인”과 맛서서 완강히 투쟁했다. 따라서 이 투쟁은 헛수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늘땅을 놀래우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에 이르었던 것이다. 

            
“이동초병”이 <<해서의 파직>>에 자물쇠를 놓았다. 

1964년 7월, 중공중앙은 팽진을 조장으로 한 “중공중앙문화혁명5인조”를 성립하였다. 팽진은 이 임무는 고되거니와 제대로 해내기 어려우리라는것을 감촉했다.          

   
1963년 12월 12일, 모택동은 한 보고서에 이런 비준지시를 했던거다. 
   
“각종예술을 모두 죽은 사람이 통치하고있다. 연극부문에 문제가 제일크다....허다한 공산당원들이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예술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예술은 열심히 제창하지 않으니 이 어찌 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1964년 6월 27일, 그는 또 다른 하나의 비준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런 협회와 그들이 장악하고있는 간물의 대부분(소수는 좋은것), 15년래 기본상(모든 사람아니다) 당의 정책을 집행하지 않고 관리어른질이나 하면서 공농병과 접촉하지 않고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반영하지 않고 있으니 최근 몇 년사이에 수정주의변두리에 엎어지고 만 것이다.” 

   
팽진은 그것이 모택동의 판단이라해서 분별없이 맞장구를 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관철해야 하니 아닌게 아니라 딱한 일이였다. 게다가 팽진의 머리를 더 아프게 하는건 당시 당내외에 일자반급도 하지 않은 강청이 제 특수한 신분을 턱대고 모택동의 그 두가지 비준지시를 상방보검
(尙方寶劍ㅡ중대한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도록 부여한 권한)인양 쩍하면 모자를 씌우고 몽둥이질하면서 오늘은 이 사람을 비평했다 래일은 저 사람을 욕했다 하면서 문화계를 쥐고 흔들자 들거니와 지어는 의식형태령역에까지 뒤죽박죽이 되게 만들자고 들면서 사람들을 마음놓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였다. 
강청이 자기는 작디작은 “이동초병”이라 자칭하면서 경극 <<해서의 파직>>은 자기가 1962년 7월 6일에 발견한 “엄중한 정치착오가 있는 대독초”라 했다! 그녀는 유관부문의 책임자를 찾아가 <<해서의 파직>>을 비판할 것을 제출했다가 거절당했다. 후에 그녀는 또 북경에 있는 일부 “문인”들을 찾아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팽진이 방금 5인소조조장이 되자 강청이 찾아와 팽진보고 <<해서의 파직>>을 비판하라면서 오함을 포함한 한패의 이른바 “나쁜사람”이라는 명단을 내놓으면서 함께 비판하라는 것이였다. 

 “내가 보기에는 <<해서의 파직>>이 문제있는 것 같지 않소. 오함은 내가 잘 알고있지.  그는 정치상에 믿을만한 사람이요.”    
팽진은 이러면서 단마디로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팽진이 <<해서의 파직>>을 떳떳이 긍정한 것은 모택동이 전에 <<해서의 정신>>을 제창했기 때문이다. 
   
1959년 4월, 모택동은 상해에서 중앙공작회의를 연 기간에 전당동지들에게 바른말을 하라고 호소하면서 명조때의 재상 해서(海瑞)가 황제에게 직언을 한 것을 례로 들면서 그의 정신을 따라배우라했던것이다. 후에 모택동의 비서 호교목은 오함(吳晗)을 찾아와 이건 모택동의 뜻이라면서 오함보고 해서를 쓰라고 고무격려했다. 하여 오함은 재빨리 <<해서가 황제를 욕하다>>라는 문장을 썼던 것이다. 
  
그해의 하반년에 오함은 해서의 이야기를 력사극 <<해서의 파직>>으로 고쳐썼다. 이 극을 북경경극단에서 1961년에 첫공연을 했다. 
   
해서에 유관되는 문장과 경극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독자와 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해서의 정신”을 제창했던 모택동도 경극을 보고서는 좋다고 했다. 


1964년 9월, 팽진은 항주에 와 모택동에게 당전 학술계의 정황을 회보하면서 “강청은 경극개혁에 성과가있습니다만 그는 문화계, 학술게와 력사계에 대한 견해가 너무도 과격합니다. 오함은 정치상 우리 당을 바싹따르는 사람이길래 그한테 그 어떤 문제가 있는걸 발견못했습니다. 모두들 강청은 좀 좌적이거니와 남을 강요하기 좋아한다고 공론합니다.”
 
모택동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가 입에서 나오는대로 거침없이 지껄이는것을 찬성하지 않소. 그는 그고 나는 나지, 그가 날 대표할 수는 없는거요.”
    
마지막에 모택동은 학술비판문제를 놓고 팽진과 말했다. 
   
“이건 당신이 맡은 범위내의 일이니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오.”
 

모택동이 이같이 말하니 팽진은 가슴을 짓누르고있던 돌을 들어 낸것같이 거뿐한 기분이였다. 그는 북경에 돌아오자 신속히 조치를 취해 학술비판을 마음대로 정치화하고 마음대로 지명비판하는 것을 억제했다. 그랬더니 한때 긴장하던 공기가 온화하게 풀리였다. 

   
한데 뜻밖에도 강청은 북경에서 손발을 놀리지 못하게 되자 남쪽 상해에 옮겨가 전술을 부리기 시작할줄이야.   
       

팽진의 <<2월제강>>이 나왔다.
         
   
1965년 2월부터 강청은 북경과 상해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비밀리에 <<해서의 파직>>을 비판하는 문장을 조직했는데 목적은 북경시위를 때려 팽진으로 하여금 미처 손쓸새없게 만들자는 것이였다. 


오함이 1959년에 해서에 관한 유관문장들을 쓸 때는 1961년에 “단깐풍”이 생기고 1962년에 억울한 “번안풍”이 생길줄은 몰랐다. 

강청 등은 8달동안에 10번이나 문장을 뜯어 고쳐가면서 열심스레 “중형작탄”인 <<력사극 <해서의 파직> 평>>(이하 ‘평’이라 함)을 제작하여 1965년 11월 10일 상해 “기지”에서 발사했는데 그것이 직방 북경을 놀라게 만들었던 것이다. 
   
<<평(評)>>이 발표되자 즉시 큰 풍파를 일으켰는데 먼저는 화동의 6개 성 1개 도시, 후에는 전국의 기타성시의 당보들이 분분히 문장을 실었다. 이러다보니 사상문화계는 전에 없던 혼란에 빠지고말았다. 

   
지방신문이 공개적으로 북경시부시장을 비판한 것을 팽진이 먼저알았을 뿐 중앙1선을 장악하고 있었던 정치국상위의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 등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것이다. 
  
팽진은 장춘교를 엄하게 꾸짖었다.
    
“상해시는 당성이 어디로 갔는가?”
         
1967년 4월 12일, 전국성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한 강청은 한차례의 공개적인 강화에서 득의양양하여 자기가 상해에서 <<해서의 파직>>비판을 조직한 내막을 토로했다. 
   
“당시 팽진이 목숨을 내걸고 오함을 보호한다는 것을 주석은 빤히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문장을 감히 조직한 건 주석께서 윤허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7,8개월이나 비밀에 붙여왔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알기만 하면 목을 죄여 이 문장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 며칠간 팽진은 앉으나 서나 불안하여 련속 좌담회를 열고 의견을 들었고 실정을 알아보느라 뒤를 캐기도했다. 팽진이 내린 결론은 <<평(評)>>이 인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였다. 그는 명령했다.
    
“북경의 각 신문들은 일률로 요문원(姚文元)의 문장을 싣지 못한다!”
 
   
북경의 여러 신문들은 18일동안이나 완강히 벗티였다. 그러다 팽진은 갑작스레 걸어오는 주은래의 전화를 받았다. 북경의 각 신문들은 즉시 요문원의 문장을 실으라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평(評)>>이 공개적으로 발표된 후에도 북경은 까딱 동정이 없으니 노발대발 하면서 단행본으로 찍어서 전국에 발행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팽진은 이 소리를 듣자 가슴이 “쿵” 뛰였다. 과연 그렇구나, 믿는데가 있으니 두려움을 모르고 덤벼들었구나 하면서 그는 강청을 떠올리면서 머리를 주억거렸다.
 
   
1965년 11월, 29일과 30일에 북경의 각 신문들은 선후하여 요문원의 문장을 련재했다. 27일, 거대한 압력과 팽진의 권고로 오함은 내키지 안은대로 << <해서의 파직>에 관한 자아비평>>을 써서 <<북경일보>>의 현저한 면에다 냈다. 
   
강청이 제작한 “중형작탄”이 마침내 북경에도 터져 “전면에 꽃이 핀 것이다”. 강청의 끈질긴 고동에 의하여 전국 각지에서 “비평가”들이 뛸쳐나와 그녀의 지휘를 바싹따랐고 모택동은 팽진보고 상해의 동지들을 따라배워 <<해서의 파직>>에 대한 비판투쟁을 한걸음 깊게 하라고 요구했다. 


   
   또 어디로 끌자는 건가? 

1965년 12월 22일, 모택동은 항주에 와 사업정황을 회보하는 팽진에게 한가지 “비밀”을 알려주었다. 
   
“요문원의 문장이 좋은 점은 이름을 찍은 거다. 그런데 요해처는 맞히지 못했다. 요해처는 ‘파직’이다. 가정황제가 해서의 관직을 파면시켰고 1959년에 내가 팽덕회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팽덕회 역시 해서인거다.”
 
   
팽진은 들으면 들을 수록 엄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여 그는 모택동을 향해 정중히 말했던 것이다. 조사해보니 오함과 팽덕회는 아무런 련계도 없다. <<해서의 파직>>이 로산회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것이다.     이에 모택동은 오함의 문제는 두달후에 결론을 내릴것이라 했다. 


1966년 2월 3일, 팽진은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의 의견에 따라 북경에서 문화혁명5인소조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팽진은 강생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금후에는 학술비판에 로산회의를 거들지 않고 <<해서의 파직>>을 정치문제로 말하지 않는다. 학술비판은 너무지나치지 말고 심중해야 한다. 팽진의 의견은 기타동지들의 일치한 찬동을 받았다. 회의는 <<문화혁명5인소조의 당전학술토론회보제강에 관하여>> 를 만들어냈다. 이를 <<2월제강>>아라고도 한다.   

   
모택동은 <<2월제강>>을 보고나서 부동한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2월 12일, 북경의 정치국상위의 토론을 거쳐 <<2월제강>>이 중앙의 명의로 아래에, 전당에 전달되였던것이다. 

   
아주 선명한 바 <<2월제강>>은 이번의 대비판을 되도록 제한하여 엄중한 정치투쟁이 발생하는 것을 피면하자는 것이였거니와 그로 인하여 더 큰 사회혼란이 생기는 것을 피면하자는 것이였다. 

 <<2월제강>>이 나온 후 문화학술계인사들은 숨을 좀 내쉬였다. 전국의 대비판열조는 즉시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팽진은 조금도 태만하지 않고 2월중순에는 만사가 감겨드는 북경을 잠시떠나 사천에 시찰을 갔던 것이다. 
   
팽덕회는 팽진의 요구를 완곡히 들어주지 않았다
             

1966년 2월중순, 팽진이 성도 영흥항7호에 나타났다. 여기에 “파면”당한 전중공중앙정치국위원이면서 국방부장인 당대의 “해서” 팽덕회가 있었던 것이다. 

1962년 당중앙은 참답게 경험교훈을 총결짓고 1959년 반우경이래의 착오를 비판했으며 타격한 간부와 군중을 평판했다. 그러나 팽덕회는 평판받지 못했거니와 되려 7천명대회에서 재차 비판받았던 것이다. 
   
에 불만이 가득찬 팽덕회는 비분을 가라앉이기 어려웠지만 부득불 1962년 6월 16일과 8월 22일 두차례 길다란 신소신을 써올려 중앙에서 자기가 범한 착오에 대해 전면적인 검사를 해줄것을 요구했다. 

팽덕회의 편지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였거니와 되려 모택동을 격노시킨데다 강청 등이 일부러 남을 놀래우는 과격한 말로 부채질을 해서 팽덕회에 대한 모택동의 오해느 더 가심해졌다. 그러다보니 오함이 <<해서의 파직>>을 쓴 동기도 더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팽덕회의 강직한 성격을 잘 알고있는 팽진은 그가 <<평>>의 자극을 받아내지 못해 새로운 어떤 거조를 일으킬까봐 걱정되면서 요행 완화된 기회에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데서 천리길을 멀다하지 않고 성도로 찾아온 것이다.  

팽진은 팽덕회에게 오함의 정황을 알려주었다. 그러고나서 팽덕회에게 정중히 말했던 것이다.    
“지금은 오함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며 당신 한 사람만의 문제도 아니요. 많고많은 사람에게 련루되고있는거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건데 당신이 배합해달라는 거요. 첫째는, 제 삼선의 부총지휘직무를 내놓고 실내의 연구공작에만 몰두하면서 다시나타나지 말아달라는거요. 이러면 목표를 감소시켜 사람들의 주의를 덜 일으키게 될거요. 둘째는, 당신한테 권고하는데 편지를 다시써서 당신의 신소서를 거둬들이라는 거요. 자기에 대한 공과 시비는 후세사람들이 하게 맏기고 당신은 당의 결의에 복종만 해달란말이요. 셋째는, 당신이 중앙에 보고서를 써서 실사구시로 당신과 오함의 관계를 밝혀 우리가 당신과 그와의 관계에서 해탈하게끔 방조해달라는 거요.”
 
팽진의 건의를 곰곰이 듣고난 팽덕회는 격정에 잠겨 말했다.    
“팽서기, 나는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아가는 사람이요. 그리구 자기 의견을 굽히면서라도 일이 되게끔하자는 사상준비도 하고있는 사람이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싶이 다른 사람이 나를 타도하자해도 나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거요. 세번째 건의를 접수하오. 내가 무고한 오함동지를 련루되게 해서야 안되지. 첫째와 둘째, 나는 내 립장을 견지할테요!”
 
팽진은 인제야 그와 모택동의 오해는 력사가 깊다는것을 깨달았다.    

팽진이 사천에 와 시찰하는 사이 북경에서 “나쁜소식”이 끊지 않고 날아왔다. 오함이 이미 북경교구의 사회주의교육운동에 갔다느니, <<2월제강>>이 문제있는 독초라느니..... 요며칠사이 신문에서나 방송에서 대비판어투가 점점 격렬해지고 어조가 점점 높아지는것을 련상한 팽진은 일종의 불상지조가 나타나고있음을 감촉했다. 

    
   팽진의 실각이 10년 문화혁명을 야기했다. 

  1966년 3월 6일, 머리에 근심걱정이 쌓인 팽진은 북경에  돌아오자마자 인차 모택동이 가있는 무한에다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걸렸다가는 인차 끊어지고마는 것이였다. 몇 번 반복했건만 여전히 그모양이였다. 전에는 종래로 이런 일이 없었던것이다.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전화사건”이 또 그에게 일격을 가했다. 

   
3월 11일, 북경의 동향을 제대로 알아내기위해서 장춘교가 파견한 상해시위선전부장 양영직(陽永直)이 북경에 와 바로 <<2월제강>>중의 어떤 문제들을 알아보려고 중선부의 부부장 허립군(許立郡)을 찾아갔는데 허립군은 당장에서 전화로 팽진에게 청시하고는 기록을 한 것이다. 
   

허: 양영직이 직접물은것이다. 학벌에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팽: 학벌에 구체적으로 무엇이라는게 없다. 아Q를 보라, 누가머리에 허물이 있으면 누가 아Q인 거다.
    
허: 양영직이 물은 것이다. 상해에서는 일부 나쁜영화를 비평하고있다, <<녀수영선수>>를 포함하여. 그래도 되는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데. 
   
팽: 돌아가 장춘교한테 물어보라. 양영직, 그들은 유영을 해봤는가?
    
허: 양영직의 물음이였다. 중요한 학술비판문장을 중선부에 보내여 심사를 받아야하는가?
    
팽: 전에 상해에서는 요문원의 문장을 발표하면서 지어 말조차 없었다. 상해시위의 당성은 어디로 갔는가? 

   
이틑날 허립군은 팽진이 답복한 전화기록을 양영직에게 알려주었다. 한창 상해에서 “좌담회”를 열고있던 강청은 이 소식을 듣자 인차 모택동에게 보고했다. 모택동은 녀편네의 보고를 듣고서 대노했다. 
   
3월 28일, 29일, 30일, 모택동은 항주에서 강생. 강청 등과 담화하면서 북경시위와 중선부는 나쁜사람을 감싸준다고 엄하게 비평했거니와  “<<2월제강>>은 계급계선을 뒤섞고 시비를 가르지 않으니 착오다, 북경시는 바늘을 찔러도 들어가지 않고 물을 부어도 들어가지 않으니 북경시위를 해산시켜야겠다, 오함은 학벌인데 우에는 또 그를 감싸주는 큰 당벌이 있는 것이다! 팽진이 ‘전화사건’을 빚어냈으니 중공상해시위에 빌게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4월 16일, 모택동은 항주에서 정치국상위확대회의를 열고 팽진의 문제를 토론했고 원래의 “문화혁명5인소조”를 철소하기로 결정했으며 새로 “문화혁명소조”를 다시설립했다. 


4월 28일, 29일, 모택동은 다시 팽진과 북경시위를 엄하게 비평했다. 

   
1966년의 천안문 “5.1”경축전례에는 전에 전례를 집행해오던 팽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강청이 일로순풍이라 득의만면하여 노래부르면서 맹진한다.        
 
2월달이래 팽진과 강청을 둘러싸고 학술계에서는 비판과 투쟁이 백열화되였던 것이다. 
 
966년 2월 3일, 팽진의 5인소조가 <<2월제강>>을 긴급제정할 때에 강청은 상해에서 공개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여론을 요란하게 일으키느라 “좌담회”를 열어 <<2월제강>>에 대립되는 것들을 조작한것이다. 

   
강청이 조직한 좌담회는 보기드믄것이였다. 그녀는 군대의 구조를 간청하여 림표가 출두하게 한것이다. 강청은 핌표의 명성과 위엄을 빌자는 것이고 림표로놓고보면 이는 매우 얻기 어려운 기회였는지라 둘은 배합이 맞았다. 강청이 좌담회는 활기롭게 한다는건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면서 말하고 말하다가는 끊고 끊었다가는 말하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질질 끌다보니 장장 18일간이나 걸렸다!
 
   
2월 20일, 좌담회에 초청받아 온 군인 4명은 그동안 강청이 주어댄 많은 말들을 추려 <<회보제강>>이라고 만들었는데 강청은 보고서 매우 불만했다. 그녀는 진백달, 장춘교, 요문원 세 사람에게 맡겨 수개를 충실히 하게하느라 전후 8번이나 뜯어 고치면서 3천자이던 것을 1만여자로 만들어 냈다. 
       
모택동은 강청이 만든 “회보제강”을 편애하여 보태느라 친히 3차나 수개했다. 그런후에는 림표손에 넘어가 그것이 <<림표동지가 강청동지에게 위탁하여 한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로 이름을 달고 세상에 태여났다.
 
   
3월 23일, 활자인쇄로 된 이 글, 즉 “모주석이 친히 수개”하고 “림표동지가 강청동지에게 위탁”하여 만든 <<기요>>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팽진은 <<2월제강>>은 요절되고말았다는것을 깨달았다. 

   
4월 10일, 처지가 어렵게 된 팽진은 중공중앙서기처상무서기의 직책을 다하느라 모택동의 의견에 근거하여 <<기요>>를 중공중앙의 붉은문건으로 전당에 인발했다. 

 <<기요>>가 나옴과 함께 <<2월제강>>은 죽고말았다. 그 누군들 꿈엔들  생각이나 했으랴, <<2월제강>>을 철소한다는 통지를 내면서 중국에는  하늘땅을 놀래우는 대동란의 시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까지,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는 팽진에 대해 전면적이면서 계통적인 비판을 진행했거니와 원중공중앙판공청주임 양상곤(陽尙昆ㅡ인른바 “도청기안건” 루명), 비판받은지 오라지 않은 해방군총참모장 라서경(羅瑞卿), 중선부부장 륙정일(陸定一)이 함께 비판받았는데 이들을 “팽라륙양반당집단”이라 했다. 
   
이 회의의 상징성을 가장 갖춘 “성과”가 바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지>>, 즉 저명한 <<五.一六통지>>가 생겨난 그것이다. 
이 통지는 진백달(陳伯達), 강생(康生), 강청(江靑),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등 10여명으로 조성된 문건기초소조에서 기초하고 모택동이 친히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은 원고였다. <<통지>>는 전국에 선포되였다. 중국공산당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시작한다는 것이였다. 

통지가 하달된 후 팽진은 직권을 머추었고 3개월만에 철직당했다.
 
철직당한 후 팽진은 13년간이나 령어의 몸이 되었다가 당의 13기 3중전회후인 1979년에야 비로서 인신자유를 되찾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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