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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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19)
2011년 03월 22일 00시 00분  조회:2494  추천:14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19)
 
(1)모택동에게 상서올린 팽덕회 “우파”되여 일생을...(2)양상곤 폭로: 모택동이 팽덕회를 비판한 진상
(3)팽덕회 북경떠나기전 주은래와 한 마지막담화

모택동에게 상서올린 팽덕회 “우파”되여 일생을 비장하게
팽덕회가 아래에 내려가 조사해 본 결과 량식이 밭에서 썩고 토법으로 제련해 낸 강철은 근본 쓰지도 못할 페물이였기에 가슴아파 만언서를 써  올린것인데 중앙정치국위원인 그의 그 의견서를 반당집단선언서라 하였고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달한 총참모장 황극성(黃克誠)대장, 중앙서기처서기 장문천(張聞天), 중앙위원 주소주(周小舟) 등을 역시 조직이 있고 계획이 있고 준비가 있으며 목적이 있는 반당군사구락부로 몰았던것이다. 팽덕회는 자기 하나의 영예와 치욕은 제쳐놓더라도 옹군 공산당에서 한 사람도 일어나 실속말은 하지 않고 우물에 빠진 전우에게 돌덩이를 던지니 원통하였다. 그는 붕괴되고말았던것이다.

팽덕회는 가난한 집자식으로 태여나 어려서부터 밥을 빌어먹으며 자랐기에 배곯는 사람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로산회의전 그가 농촌을 시찰할 적에 한 농민이 그한테 글쓴 쪽지를 주었던것이다.    
“곡식은 밭에 널렸고 고구마는 썩건만 청장년은 철제련을 떠나 밭일은 부녀자들이 해야하니 래년에는 어떻게 살란말인가? 인민위해 하소를 해주소서!”


그 쪽지의 글이 팽덕회의 가슴에 못처럼 박히였다. 하여 그는 상서를 올리지 않으면안되였던것이다. 그는 농민들이 배곯는 문제와 인민공사화가 가져온 페단들을 모택동에게 여실히 알려주어 적중한 방도를 찾으려고 한것이다. 그런데 그는 로산회의기간에 종시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 회의를 10여일간하면서 “반좌, 반좌”하고 토론했어도 당은 적당한 해결방책을 내오지 못하자 팽덕회는 조급해났던것이다.
 
“왕덕회, 장덕회, 다 되지만 팽덕회만은 편지를 써선 안돼”

팽덕회는 자기가 친히 시찰을 다닌 과정에 도처에서 강철을 제련하느라 볶대기치는것을 보았고 그러다보니 농사를 짖고도 곡식을 걷어들이지 않아 농민이 배를 곯는 현상이 생긴것을 보았고 대약진에 농촌이 망태기되고 온 나라가 망태기로 되어가는것을 보았던것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국민경제를 발전시킨단말인가? 국민이 모두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였기에 그는 부득불 근 만여자에 이르는 편지를 써올리게 되었던것이다.

그는 그래도 편지에다 대약진중의 어떤 성적은 긍정하고 공작경험을 총결했으며 첫머리에다 “의견을 썼으니 참고하라, 합당치않은것은 지적해주기바란다”는 말까지 달아 보낸것이다. 그가 이 편지를 쓸 때는 모택동과 사이거리가 불과 200여메터밖에 안되였다. 모택동은 받아보고 “팽덕회의 의견서”라는 머리글까지 달아 찍어서 매인에게 한부씩 나눠주라 지시했다.

이렇게 되어 본래는 “좌를 규정”하느라 열었던 로산회의가 일순간에 “반우경”폭풍으로 돌변하고말았다. 회의는 팽덕회의 편지를 “우경기회주의강령”이라 규정하고는 팽덕회를 위수로 한 “반당집단”이 창끝을 직접 당중앙과 모주석의 총로선에 돌린것이라 했다. 팽덕회는 회의에서 검토를 받고나서 비행기를 타고 조용히 북경으로 돌아오고말았다.

다른때같으면 자리를 함께 하려는 사람이 많으련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련루될까봐 겁이 나서 경계했던 것이다. 그래도 장애평이 대담히  나서서 그를 배동했다. 훗날 장애평이 군위의 총참모와 얘기한것인데 그때 다른 비행기에는 사람이 만원이 되어 더러는 부득불 내려야했지만도 팽덕회의 비행기에 타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장애평이 “내가 가겠어. 내가 팽총과 같이가겠어.” 했다는것이다.

북경에 돌아온 팽덕회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목석같이 말한마디 없었다. 포안수(蒲安修)가 집안에 발을 들여놓자 ‘와!“ 하고 울음을 텃치면서 팽덕회의 조카보고 너의 큰아버지는 큰일을 저질렀다고 알려주었다.     팽덕회는 해방전쟁 때 담배를 끊었다. 그랬다가 조선전쟁에 나가서 다시피우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 돌아와서는 담배를 끊었다. 그랫던것이 로산회의에 비판을 받고나서부너 또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 한가치에 불을 달아 둬모금피우고는 비벼끄고 그랬다가는 다시 새가치에 피여 물고.... 그래서 재떨이에는 피우다 만 담배꽁초가 무득했다. 그의 불안한 심정을 누가 다 알랴?

팽덕회는 대바르고 곧은 사람이였다. 황극성은 그를 좀금도 나무랄것 없다면서 말했던것이다.
    
“왕덕회, 장덕회 다 되지만 팽덕회만은 편지를 써선 안돼.”
 
억울한 루명이 밝혀지기 전의 팽덕회인생은 “사면초가”

당과 국가를 위해 반생을 군인생활로 보낸 팽덕회는 정치조사기간 일시 한가해져 많은 시간을 제 친척들과 함께 보내게되였던 것이다.

그는 여덟조카들을 제 친자식같이 귀하게 여겨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력서장에다 매 조카들의 생일은 물론 양녀 둘의 생일도 일일이 다 표기해놓는 그 날이 돌아오면 꼭 축하해주군했다. 그같이 세심하고 인정깊은 분이였기에 그들 모두의 가슴속에는 친부모와 꼭같은 정이 깊이깊이 슴배였던것이다.

자기는 죽어도 그들을 품에 안고 저 세상까지 가고싶고했다니 그들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는것이다. 그는 조선전쟁판으로 나가면서 매사람앞으로 골고루 돈 100원씩 저금해주었다. 그의 조카 팽매괴(彭梅魁)가 회상하는것을 들어보면 그가 자기의 봉금을 모였다가 그같이 저금해해주는 뜻은 아주명백했다는것이다.    
“전쟁이니 죽음이 있는거다. 내가 조선전쟁에 나가갔다가 이제 살아돌아오겠는지는 장담못하겠구나. 그렇지만 너희들은 자라는거니 아무튼 장차 시집장가를 가게 될게 아니냐. 그렇지? 그때 가서 이 돈을 꺼내 쓰거라. 이 큰아버지가 너희들에게 주는 결혼례물이라 여기고말이다. 매인이 한몫씩인데 네가 대신책임지고 저금통장을 건사하거라.”

로산회의까 끝나서 2개월후에 팽덕회는 국방부장직에서 나떨어졌다.  중남해에도 있지 못하게 하여 나왔다.    
그는 북경서북교구에 자리잡고 농민으로 되었다. 
 팽덕회는 자기가 분여받은 땅에다 실험전을 꾸리고는 손수 곡식을 심었다. 그의 실험은 “사람이 담이 얼마크면 땅은 얼마의 높은 산량을 내다”는건 진짜 얼토당토않는 거짓말이거니와 착오면서 불어대는 허풍이라는것을 증명했다.

팽덕회는 질녀 팽매괴보고 말했던것이다.    
“나는 그날이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릴테다. 이제 어느날 그가 나를 찾아 문을 떼고 들어서면서 웨칠것이다. ‘팽가야, 인제는 납득이 되는구나, 내가 네 의견을 접수하겠다.’하면서. 그 사람은 다른 누군게 아니라 바로 모택동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를 종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오직 주덕 한 사람뿐이였다. 그는 팽덕회를 찾아와서는 마주앉아 묵묵히 장기만두다 돌아가군했다. 무엇을 말하랴. 로산회의 때 주덕은 태도가 온유하게 둬마디 팽덕회를 비평했던것이다. 그
랬다하여 모택동은 발을 들어 손가락으로 신바닥을 긁어 보이였다. “격화소양(隔靴搔痒)”이라고 비꼬았던것이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야에 팽덕회는 서남제3선건설의 부총지휘로 임명되여 가게 되였는데 모택동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진리는 가능하게 네쪽에 있다고 사실이 증명한다고 말한바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니 북경의 반란파들은 팽덕회를 잡아내여 투쟁하면서 그보고 심문기록에다 싸인하라고 핍박했다. 팽덕회는 “조선정전협정에 서명하고는 나는 남이 쓴 글귀에 싸인하는 법이 없다.”고 퇘박을 놓았다. 의지를 굽히지 않은 그한테 혹심한 박대가 가해졌다. 강생(康生), 강청(江靑)따위들의 교사로말미암아 팽덕회장군은 만인대회에서 무지막지한 폭도들의 손에 매를 맞아 갈비뼈가 여러대나 부러졌다. 
   
그때로부터 그는 8년간이나 령어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종래로 자신의 안위를 바라고 다른사람을 적발하는 일이 없었다. 전안조가 끝임없이 심문을 들이대는 외에는 그를 찾아 한담을 나누는 사람이 없었거니와 그한테 그 어떠한 결론도 내려주지 않으니 복장터질 일이였다.


 때문에 그는 림종에 이르럿을 때 까지도 도무지 달통되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았다.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겠노라했다. 전안조가 그보고 암세포가 확산되는만큼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으리라했다. 그래도 그는 죽으면죽었지 하면서 모택동을 만나게해달라했다. 그러기전에에는 절대 수술을 받지 않겠다면서 수술대에서 내렸다. 신을 신고 부덕부덕 나가려했다. 하여 301병원은 원장까지 출면하여 그를 달래야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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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그의 병은 말기에 이르었기에 아픔이 극심했다. 그는 고통을 참아낼 재간이 없어서 소리쳤다. 차라리 나를 총살하라, 내 몸에 총을 놓아라, 한방만 갈겨달라, 나는 못견디겠다며 매일 웨쳐댔다. 후에는 입에 넣은 의료관마저 잡아뽑아버렸다. 생명을 잇구느라 약과 음식물을 그 관으로 주입했던것이다.


 1973년 11월 29일오후, 직장암에 걸린 팽덕회는 입과 코로 피를 내흘리면서 숨을 거두었다. 옆에 한사람의 친인도 없었다. 병원측은 유체에다 왕천(王川)이란 가명을 달아 남이 모르게 화장해버렷다. 1978년 12월, 중공11기3중전회에서 팽덕회에게 내렸던 착오적인 결론을 규정하여 세월이 오랜 억울한 원안을 풀었다. 12월 24일에 국가는 그의 추도회를 열었다. 그때에야 비로서 잃어졌다던 골회도 친척의 손에 돌이왔던것이다.      
중공부주석 진운이 당년에 명언 한마디를 남긴바있다. “팽덕회는 사람이지 귀신이 아니다. 강생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모택동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중국은 문화혁명을 철저히 부정해버렸다. 한생을 당내투쟁으로 살다 죽은 강생은 결국 력사에 치욕을 남겼지만 팽덕회는 명예가 부활됐다. 대중앞에 자기의 사진을 내거는것을 원치 않았으면서 말을 적게 하고 일을 많이 한 그는 중화의 훌륭한 남아로 력사에 영생할것이다.
 
             양상곤이 폭로: 로산회의에서          
            모택동이 팽덕회를 비판한 진상

1959년여름의 로산회의는 당력사상에 심원한 영향을 일으켰기에 중공반공청의 어떤 동지들은 <<양상곤회억록>>의 첫장에 넣어줄것을 건의했다. 양상곤은 동의했다. 1996년 12월, 1997년 3월, 5월, 양상곤은 세번 로산회의정황을 말했다. 그는 자기를 놓고 보면 로산회의의 정식성원이였거니와 더욱히는 회무공작을 맡은 총책이였기에 그번의 회의에 대해서 응당  몇마디를 해야겠다고 했다.
 
             한차례의 늦어진 중앙공작회의

다가 아는바와 같이 로산회의는 본래 “좌”를 규정하느라 연것이였는데  모택동이 <<의견서>>를 올린 팽덕회를 엄하게 비판하다보니 반우경으로 방향이 급변하고만것이다. 양상곤도 그때 이에 대처할 그 어떤 사상준비도 없었거니와 팽덕회의 <<의견서>>가 없었다하더라도 처음의 심원대로 로산회의가 “좌”를 규정하기는 힘들것이였다.

1958년 11월 제1차정주회의 후, 모택동은 여러가지 회의를 열고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중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연구하고  해결하려했다.  1959년 6월 4일과 5일에 중앙서기처는 련속 이틀간 회의를 열고 당년의 공업생산지표를 토론했다. 회의 후 모택동은 나를 불러 회보하게했는데 그는 당시의 형세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말하고는 중앙이 농촌과 시장방면에 모두 지시를 했으니 아래에서 그것을 관철하고 락실하려면 일정한 시간이 수요될것이라 했다. 원래 6월에 열기로했던 중앙공작회의도 7월로 미룰수 있다고했다. 그는 그사이 정황을 알아보면 머릿속에 수자가 있을것이라했다. 6월 13일에 모택동은 이년당(頤年堂)에서 중앙정치국회의를 열고 계획은 반드시 실제에 맞게 락실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종합평형에 주의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1958년에 “대약진”을 일으켜서 성적이 많다면서 지금 일부문제들이 생긴건 큰일이 아니다. 못에 부닥치지 않으면야 돌아서 가지 않을것이라고 했다. 1956년의 착오는 응당 공개적으로 “반모진”을 하지 말아야하는것을 한것이였다.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농촌식당을 잘꾸릴것인가하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6월의 중앙공작회의를 열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20일 그는 남경을 떠나 이틑날에 정주에 도착했다. 그날밤에  모택동의 비서 고지(高智)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모주석이 로산에서 각 성, 시, 자치구당위서기좌담회를 열것을 제의하면서 나보고 중앙상위의 각 동지들의 의견이 어떤지를  들어보라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즉시 류소기에게 보고했다. 련일밤 회의를 해온 류소기도 중앙상위도 일치하게 모택동의 의견에 동의했다는것이였다. 하여 로산에서 회의를 열만한 조건이 되겠는지 알아보고 준비를 해야겠기에 나는 먼저 거기에 가보기로했던것이다.
어느덧 22일새벽이 되었다. 오전에 나는 유관인원들을 소집하여 로산회의의 회무공작에 대한 포치를 간단히 했다. 그리고는 23일 나는 곧추 남창으로 날아가 강서성위의 동지를 만나본 후 즉시 로산으로 갔다.
그곳에 당도하니 밤9시가 넘었다. 이때 나는 모택동이 소산으로 돌아가기에 회의를 7월 1일로 미룬다는 통지를 받은것이다.

회의를 열자마자 모택동은 호남성위에서 제출한 “성적은 위대하고 문제가 적지 않으며 전도는 광명하다”는 세마디를 빌어 회의의 지도사상으로 삼았다.
당시 회의에 온 사람들은 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 이 “세푹의 붉은기”에 대해서 커다란 분기가 있었던것이다. 
모택동은 “대약진”, 인민공사운동중에 발생한 문제는 정주회의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사이 이미 초보적으로 해결되였다, 전국을 놓고 보면 손가락9개와 1개의 문제인것이다 라고 말했다. 즉 성적이 9고 결함이 1이라는거다.
이에 류소기는 성적은 그만큼 말했으면 됐으니 결점을 투철히 말해야한다고 했다.
어떤 동지는 “대약진”의 성적은 긍정해야 하지만 존재하는 결점과 착오가 가져오는 후과가 생각보다 더 엄중하니 응당 참답게 경험과 교훈을 총결하고 사상상의 실책을 승인하고 실제적인 규정조치를 채취해야한다고 했다.
어떤 동지는 또한 결점과 교훈을 많이 말하는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무의중에 다른사람이 문제를 적발하고 의견을 제출하는것을 압제했다.
토론이 점점 깊어가면서 “세폭의 붉은기”를 비평하는 의견들이 점점 많아졌다. 특히는 7월 16일에 모택동이 <<팽덕회동지의 의견서>>라는 제목의 글을 찍어 사람마다보게 한 후 “세폭의 붉은기를 견지한는가 아니면 부정하는가를 놓고 분기가 선명하고 돌출해졌는데 팽덕회가 쓴 <<의견서>>관점을 기본상 찬성하는 사람이 다수였다.
이 기간 리예도 주은래에게 팽덕회의 <<의견서>>를 어떻게 보는가고 물으니 주은래는 ”거야 말할것 없잖은가.“고 대답했다.

7월 8일. 주은래는 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토론된 어느 문제를 문건으로 작성하면 좋겠는가를 상담했다. 회의에 참가한 동지들은 일치하게 회의에서 토론된 문제가 아직은 많은것이 성숙되지 않은것만큼 문건으로 만들기는 어려우니 회의를 되도록 빨리끝내자고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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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일 모택동은 나와 호교목, 진백달, 오랭서, 전가영 등으로 5인소조를 만들어 이번회의에서 토론된 문제에 기초하여 <<기록>>을 하도록 책임지웠다. 13일에 륙정일(陸定一), 담진림(潭震林), 도로가(陶魯茄), 리예(李銳), 증희성(曾希聖)주소주(周小舟) 등 여섯사람이 증가되여 모두 11사람이 한소조가 되어 2일내에 초고를 끝내 14일에는 찍어서 그에게 보내내기로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기초소조는 즉시 회의를 열고 “수재”들에게 각각 제목을 떼맡기였다. 호교목이 모두를 책임지고 나는 조직련계를 책임졌던것이다. 당일밤부터 “수재”들이 정리해 바친 것들이 즉시 인쇄에 들어갔다. 14일 새벽에 교료지(校了紙)가 나와 각 소조는 한조목 한글짜 따져가면서 토론하는 한편 수개하여 14일 밤에는 모택동에게 한부보내고 중앙상위와 각조동지들의 손에도 하부씩 들어갔다.
15일 각 소조는 회의를 열고 옹근 하루동안 <<기록>>을 놓고 토론했다. 그날 하루는 분초를 다투듯 시간을 바싹 틀어쥐였기에 회의가 당장 끝날것만같은 분위였다.
 
7월 15일, 각 소조는 <<기록>>을 토론하는 한편 모택동은 북경에서 사람이 더 와서 며칠남지 않은 회의에 참가시키는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16일, 모택동은 팽덕회의 <<의견서>>를 인쇄하도록 비준한 동시에 로산회의 분조방법을 개변할 것을 제출했다. 구체적으로 말할것 같으면 북경에서 온 동지가 아래의 다른 조에 넘어가는 것이다. 원래 화동조에 있었는데 래일부터는 화동조회의에 참가하지 않고 다른 조에 가는것이다.
모택동이 말했던것이다.
   
 “이렇게 하면 듣고 해박해져 좋은 점이 많을것이다.”


 <<기록>>에 대한 각 조의 의견은 대부분이 “형세와 임무에 관하여”부분에 집중되였다. 그것은 실제상 “세폭의 붉은기”를 여하히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한시기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비평의견이 많고 팽덕회의 <<의견서>>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았았던데다가 최후로 이루어진 정식문건역시 한 글자 한 구절을 세심히 퇴고한 것이였다. 어떤 사람은 <<기록>>이 “대약진”이 취득한 위대한 성적과 풍부한 경험에 대한 서술이 충분하지 못하고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구체적이여서 군중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했고 어떤 사람은 <<기록>>이 결함에 대해서 너무 과중하게 보고있으니 화풀이문건이라했다. 7월 23일이후에 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기록>>과 <<의견서>>는 한곡조를 분다고까지 지적했던것이다.
이는 당시 많은 동지들이 급히 서둘러 만들어놓은 지도사상이 사회주의건설사업에 위태로움을 가져다주기에 “좌”를 규정할것을 요구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의 머릿속에 이미 구축한 급진적이고도 초조한 정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것이였다. 이런 정황에서 로산회의는 “좌”를 규정하려한 처음의 심원을 이루기 힘들었던것이다.


7월 18일, 팽진(彭眞)이 로산에 왔다. 22일, 팽진의 장악하에 중앙서기처는 회의를 열고 <<기록(제2고)>>을 여하히 수개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했는데 의견은 여전히 “형세와 임무에 관하여”부분에 집중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23일에 모택동이 돌연히 대회에서 팽덕회의 <<의견서>>를 엄하게 비평하면서 풍운은 돌변하고말았다.
하지만 이 시각에도 류소기는 의연히 기초소조에 <<기록(제3고)>>을 빨리 고칠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회의에 넘겨 통과하고는 정식문건으로 만들어 아래에 내려보낼 생각이였던것이다.
24일, 모택동은 큰구역책임자모임에서 <<기록>>을 벌써 세 번째 고치였는데 실제에 부합되고 단결에도 좋은것이다. 기초과정에 첫고는 퇴자를 놓은것이고 두 번째고는 작자본인이 불만족해한것이며 세 번째고가 이제야  발표비준된거다. 그러나 회의는 반우경이 부단히 승급하니 <<기록>>문제는 더 언급할 필요도 없는것이다고 말했다. 
   
7월 29일,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열고 중앙이 8기8중전회를 열데 관한 결의를 선포했다.  회의 의제는 두가지였다. 
   
(1) 경제건설지표문제.
(2) 총로선문제. 
  
 8월 2일에 중공8기8중전회가 개막되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습관상 이 회의도 다른때의 중앙공작회의(정치국확대회의)와 마찬가지로 통칭 로산회의라 불렀다.
 
양상곤은 일생에 두가지 본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 하나는 1978년 11월 28일, 사업을 빨리하려는데서 본의아니게 꼬리가 있는 심사결론에 서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산회의때 본의아니면서도 팽덕회를 비판한 그것이였다.    
7월 23일, 모택동은 대회에서 팽덕회가 쓴 <<의견서>>를 내놓고 강화하면서 조목별로 그의 관점을  하나하나 비평했던것이다. 그는 낯빛이 달라지고 큰소리를 쳐가면서 노발대발했다. 10가지 일을 했다면 9가지는 말짱 나쁜것이라느니 신문에다 다 내면 꼭 멸망하고 말리나느니 응당 망해야 한다느니 했고 내가 갈것이다, 농촌으로 갈것이다, 농민을 일으켜 유격전으로 반란을 할것이다 라느니 했고 너의 해방군이 나를 따르나 안따르나  어디보자, 내보게는 아마 다 따를것같다고 했다. 모택동이 문제를 그같이 엄중하게 보니 회의기분은 몹시 긴장해졌던것이다. 
   
7월 26일, 모택동은 <<한통의 편지를 평론함>>이란 제목으로 자기에게 보낸, 동북협작구반공청간부 리운중(李云仲)의 편지를 찍게했다. 근 만여자에 달하는 길다란 이 편지에는 얼마간 중대한 문제를 반영했는바 우경보수사상을 반대하는 동시에 “좌”경모험주의 침습을 홀시하고있다는것, 공농관계문제 그리고 계획공작중에 주관주의가 존재한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포장랑비하는 기풍이 엄중하다는 것 등이였다. 모택동은 그 편지를 보고나서 작자가 성적방면의 자료는 수집하지 않고 전문 결점방면의 자료만 수집하였기에 근본 흥취를 자아내지 못다면서 2500자되는 평론을 달아 질책했다. 그는 “지금 당내외에는 일종의 신사물이 출현하였는바 그것인즉 우경정서, 우경사상, 우경활동이 이미 자라나 창궐하게 진공하고있는것이다.”고 여겼던것이다. 
      
이날 각소조에다 모택동의 몇마디말을 또 전달했다. 
   
“일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일을 대하는건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계선을 갈라야 하고 문제느 명백히 밝혀야지 흐리멍텅해서는 안된다.”
     
몇마디 말이 아니였지만 분량은 매우 무거운것이였다. 하나의 문자평론, 한마디의 말, 뜻은 명백힜으니 그것인 즉 “팽덕회와 계선을 가르고 ‘우’를 반격하라!”였다.        
   
7월 30일, 당시 형세의 핍박에 못이겨 양상곤역시 소조회의에서 팽덕회에게 내키지 않은 비판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것이다.
    
“<<의견서>>의 정치방향은 바로 건설시기의 총로선과 1958년이래의 ‘대약진’, 인민공사화운동을 반대한것이다.” 
   
7월 31일과 8월 1일, 중앙정치국상위는 두차례 회의를 열고 작은범위내에서 팽덕회의 력사총장부와 사상근원을 청산했다. 그렇지만 회의정황을 즉시 각소조에 전달하였기에 그것이  팽덕회를 광범위하게 투쟁하도록 추동했던것이다.
   
8월 2일, 중공8기8중전회가 개막되였다. 모택동은 강화에서 팽덕회를 로선투쟁의 높이에까지 끌어 올려놓고 로선시비문제로 토론할것을 요구했다. 같은날 모택동은 장문천에게 편지로 “너는 어느 군사구락부에 빠져들었는가” 하면서 팽덕회와 장문천은 “문무배합이고 의기상투”라 하면서 “군사구락부는 어떻게 된건가? ” 하고 캐물었다. 회의기간에 누군가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가 팽덕회거처로 놀러간것을 보고는 고자질했던것이다. 그것은 본래 동무지간의 정상적인 왕래였건만 그 어떤 사람은 자기가 팽덕회와는 계선을 가른다는것을 보여주느라 물어먹은 것이다. 모택동은 그들이 군사구락부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는데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기실 장문천이나 주소주는 다가 군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문외한인것이다. 그리고 팽덕회는 군위사업을 장악하고 있으며 황극성은 총참모장이니 그들지간에 래왕이 밀접헌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였던것이다. 
   
 팽덕회에게 여러가지 모자를 들씌웠다. 그의 <<의견서>>는 “군중을 쟁취하려는 것이다.”, “대오를 조직하는 것이다.”, “조직이 있고 계획이 있고 준비가 있게 총로선을 반대하고 당중앙을 반대하며 모주석의 활동을 반대한것이다.” , “ 우경기회주의를 대표하여 당을 향해 진공한 강령” 이라면서 팽덕회는 “그믈에서 빠진 고요반당집단의 주요성원”이라느니 “외국과 내통”하고 “쏘련수정주의의 반화와 호응”한다느니 했다. 팽덕회는 큰 국면을 돌보아 내키지도 않는 검토를 반복적으로 하여 “객관적으로 ‘세폭의 붉은기’를 반대하는 작용을 했다.”고 승인하면서 “후과가 엄중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시종 “고요반당집단성원”이라는것과 “외국과 내통”한다는것은 승인하지 않았던것이다.
    
황극성은 7월 17일에야 로산에 왔다. 19일, 황극성은 소조회의에서 발언했는데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견해가 팽덕회와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 하여 어떤 사람은 그를 속히웠다고 비평했다. 그날밤 그는 양상곤한테로 달려와 그보고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었다. 양상곤은 그한테 전 한단락의 회의정황을 간단히 소개했다. 황극성은 듣고나서 나는 관계치않는다, 어떤 말은 꼭 해야겠다고 했다. 23일, 모택동이 강화를 한 후 황극성도 다른사람과 마찬가지로 달통되지 않았다. 저녁에 양상곤은 주소주, 주혜, 리예와 함께 황극성이 들어있는 곳으로 가서 모택동의 말을 의론했다. 주소주가 몇가지 격한 말을 했다. 
  
 “모택동은 쓰딸린의 만년을 닮아가는게 아닌가?”
    
황극성은 의견이 있으면 주석을 찾아가 당면에서 말하고 뒤에서 의론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그에게 권고했다. 이 일이 후에 밖에 전해져 도리여 그들이 배후에서 반당활동을 한 “죄증”으로 만들어지고말았다. 
   
7월 21일, 장문천은 소조회의에서 3시간이달하는 계통적인 발언을 했다. 착전에 호교목은 장문천이 발언할 준비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특별히 전화로 그에게 “형세에 주의하여 걸점을 적게 말하라”고 귀띔했다.
    
그런데도 장문천은 자기가 발언하려는 요강대로 발언했던것이다. 그는 먼저 “대약진”의 성적을 긍정해놓고 중요하게는 결점을 말했는데 결점의 후과와 결점이 나오게 된 원인을 밝혔던것이다. 그는 팽덕회의 <<의견서>>를 긍정하면서 “이 <<의견서>>는 하나의 문제를 제출했는데 중심내용이 경험을 총결 할 것을 희망한것이니 본의는 아주좋은것이다. 그런데 여러방면에서 반영되는것을 보면 적잖은 동지들이 팽덕회동지의 출발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것 같다. 편지의 어떤 구체적인 설법에만 주의하는데 기실은 성적을 긍정했다는것을 알아야한다. 그가 말했다. ‘성적은 기본적으로 여러사람이 말하는것과 같은것이다.’라고. 오로지 개별적인 설법에 어떤것은 크고 어떻것은 작은데 그것을 관계할게 아니다.” 장문천은 강조했다. “지금의 문제는 교오자만과 경계심을 늦추고 소홀히 하는 정서가 나타나는것을 방지하는것이며 존재하는 문제의 일면을 더많이 보아내는 것이다.” 그는 지적햇던것이다. “경험을 총결할 때 경험이 부족하다는 소리로 만족해하지 말고 의례 사상관점으로부터 방법, 작풍에 이르기까지 깊이 검토해야한다.” 장문천의 발언은 자료가 상세하고 확실하며 관점이 선명하고 론설리유와 근거가 있어서 반응이 매우컸다. 후에 장문천의 이 강화는 팽덕회의 <<의견서>>를 “전면 계통적으로 작용을 발휘”하게 하는 것으로 몰아 문제삼았다.
    

다른 또 하나의 다른 삽곡이 있다. 관례대로 하면 무릇 회의에 참가한 사람이 소조에서 발언한 것은 모두 회의 <<간보>>올리는것이다. 그날 장문천이 발언한 요점을 <<간보>>에 내려고 방금 인쇄에 넘길 준비를 하고있는데 그가 전화를 걸어와 철회를 요구한 것이다. 나는 곧 류소기를 찾아가 청시했다. 류소기가 말했다. 
   
“본인이 자기것을 되돌려달라면 돌려주오.”
    
이는 장문천이 사상상 역시 고려가 있었음을 설명하는것이였다. 그는 회의에서 “대약진”의 결점은 모험이 너무도 큰것이라 평했던것이다. 그가 자기의 발언고를 돌려달라니 나는 매우 딱했다. 만약 내가 류소기한테 청시도 하지 않고 돌려준다면 내가 “교도주의와 어울린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주소주는 젊은 패기가 있거니와 한때 모택동의 비서질을 했길래 모택동앞에서는 별로 구속받지 않고 할말을 했다. 로산회의가 시작되였을 때 그는 매우 활약적이였다. 7월 11일 밤, 모택동은 주소주, 주혜, 리예를 불러 담화했는데 주소주가 “대약진”을 하면서 기층간부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우에서 듣기좋아하니 아래는 자연히 심하기마련”이라했다. 모택동은 듣고나서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거니와 기분이 홀가분해서 웃기까지 했던것이다. 그번의 담화후에 주소주는 모택동이 반“좌”를 할것이라는 소문을 내서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주은래가 의론을 듣고 양상곤보고 어디서 나온 소문인가고 물었다. 양상곤은 그한테 주소주의 입에서 나온것이라 알려주었다. 주은래는 그더러 주소주가 다시는 그런 소문을 내지 않게끔 타이르라했다. 
   
그런데 주소주는 모택동 자기와 몇을 불러 담화한 정황을 팽덕회에게 알려주면서 팽덕회도 모택동을 찾아가 담화해보라고 든장질했다. 팽덕회는 당면에서 말는것이 좋을 것 같지 않아서 7월 14일에 모택동에게 준 그 편지를 쓰게됐던것이다. 16일, 팽덕회의 편지를 인쇄발포하자 주소주는 소조회의에서 팽덕회의 주장에 찬동을 표시했다. 23일, 모택도의 지명에 의하여 주소주는 중점비판대상으로 되고말았던 것이다. 
   
8월 30일, 소조회의에서 누군가 주소주가 7월 23일 모택동이 강화한 당날밤에 황극성을 찾아가 “모택동이 쓰딸린의 만년과 같다”고 말한것을 적발했다. 그로하여 전체회장은 들썽했다. 또 누군가 적발하기를 리예가 주소주에게 전가영한테서 들은 소리를 알려주었는데 전가영이 말하기를 자기가 장차 중남해를 떠나게 되면 모택동에게 세가지 의견을 드릴것이다. 첫째는 천하를 다스릴줄을 알아도 좌우를 다스릴줄을 모른다. 둘째는 백년후에 자기를 의론아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셋째는 비평을 들으려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은 진언하기 어려운것이다. 
   
리예는 당장에서 잘라말했다. “이 말은 전가영이 한것이 아니다. 내가 한것이다.”라고.     
   
회의는 리예를 비판하는데로 방향이 돌아졌다. 류소기는 그
것을 제지했다. 그는 리예가 중앙위원이 아니니 그의 문제는 달리처리하리라했다.
    
로산회의가 “좌”를 규정하던데로부터 반“우”로 방향이 돌아졌는데 그렇게 된 도화선은 팽덕회의 <<의견서>>였다. 보건대 그것이 우연한것 같지만 기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회의전에 사람들의 사상이 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형세에 대한 평가에 줄곧 분기가 있었고 어떤 부동한 의견은 압제를 받았던것이다. 모택동의 생각에는 팽덕회의 <<의견서>>를 찍어 나눠주면 그것을 보고서 모두들 반대하고 비평할줄로 알았는데 생각과는 영 다르게 적잖은 사람들이 동정하고 지지하는것이였다. 모택동은 누가 당내에서 바람을 일으킨게 아닌가고 의심했다. 좌파인물중에서도 “세폭의 붉은기”를 비평하는 자가 점점 많아지니 울분이 터질 일이였다. “좌”파대오가 보루를 지켜낼것 같지 않아 근심되였다. 어떤 사람은 모택동을 찾아가 고자질하면서 그가 나와서 강화할것을 요구했다. 이와동시에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세폭의 붉은기”에대한 첨예한 비평이 많아갔거니와 국외에서는 흐루쇼브를 비롯한 동구라파의 수령들이 중국의 “대약진”과 인민공사화를 비평하는 문장을 련속발표했다. 이 모든 것이 모택동으로 하여금 형세의 엄중성을 느끼게 하였거니와 이를 꼭 반격해야겠다고 그를 마음을 도슬려먹게 만든것이다.
    
“좌”를 규정하려던 회의가 주앙정치국상위의 토론도 걸치지 않고 반우로 방향이 홱 돌아졌다.  류소기는 반우를 하는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보류되였다. 그는 호교목을 찾아와 팽덕회의 <<의견서>>에 대해서는 작은 범위내에서 비판할 수 있다, 총적인 부서는 의연히 “좌”를 규정하는 것으로 해야한다, <<기록>>은 계속 내보내여 아래에서 계속 “좌”를 규정하게 이끌어야한다고 했다. 그는 또 호교목더러 모택동을 찾아가 이의견을 반영하라했다. 호교목은 이미 불가능하게되였다고 말했다. 
       
주은래는 팽덕회가 돌연적으로 쏟아지는 엄한 비판을 받아내지 못할것 같아서 양상곤보고 그의 안해 포안수(浦安修)를 오라해서 팽덕회의 생활을 돌보도록하라했다. 
  
 8월 1일, 주덕은 중앙정치국상위회의에서 태도가 온유하게 팽덕회의 <<의견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둬마디 말했는데 모택동은 채 들을 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중둥자르고는 신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면서 “격화소양(隔靴搔痒)”이라 비꼬았다. 
  
림표가 목청을 높혀가면서 팽덕회를 힐난했다.
   
“이번에 온건 말을 사고 병사를 모집하려는것이다.”, “영웅이 돼볼려구하는 짓이다.”, “야심가, 음모가, 위군자.”
      
이렇게 해재꼈으니 팽덕회의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았다. 당이 분렬될 흠집과 경제의 말안장식의 형상이 출현하는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여겼다.
   
림표의 말은 모택동에게 아주 감미롭게 받아졌을 것이다. 
  

등소평과 진운은 병때문에 북경에 남다보니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8월 16일, 8기8중전회가 개막되였다. 회의는 “당의 총로선
을 보위하고 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여 투쟁하자.” 는 결의를 내옴과 동시에 “팽덕회동지를 위수로 한 반당집단의 착오적결의에 관하여”라는 것을 통과하였다.    회의후 중앙으로부터 기층에 이르기까지 반우경투쟁을 전면적으로 벌려 수많은 공산당원과 간부를 비판하고 처분했으니 그것은 큰 착오였다!
   
“수재”를 보호하여 관을 넘게했다. 
               
로산회의기간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 오랭서, 리예 등 “수재”들은 다가 기본상 팽덕회의 <<의견서>>를 찬성했거니와 비공식적으로 “세폭의 붉은기”에 대해 질의했다. 하여 그들도 비판에 말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맨먼저 팽진이 제의하고 몇몇 중앙위원이 동의하여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과 오랭서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로산회의과정에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 오랭서, 리예 등 “수재”들은 1958년이래의 형세에 대해 한바탕 의론이 있었다. “수재”들은 말을 조금도 꺼림없이 했지만 사상상 “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약진”이 가져다 주는 엄중한 후과를 면전에 놓고 보게되니 “세폭의 붉은기”에 대해 질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 회의가 열린지 오라지 않아서 “수재”들은 로산회의기록임무를 맡았는데 모두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대약진”의 경험교훈을 잘 총결지을것인가를 궁리하면서 계속하여 “좌”의 문제를 규정하는데 진력했다. 당시 전가영은 자기가 사천을 조사하는 과정에 반영된 허풍치는 문제에 관한 자료를 모택동에게 보내여 그가 참고로 읽게했는데 그 일이 사천성위책임자의 불만을 야기시켰던것이다. 하여 전가영은 소조회의에서 발언할 때 지어는 사천성위의 그 책임자와 말다툼까지 했던것이다. 
  
 팽덕회의 <<의견서>>를 찍어 나눠준 후 “수재”들은 모두 괜찮게 썼다고 평하면서 자기들이 초안을 잡은 “기록”과 기본관점이 같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조에서는 팽덕회의 <<의견서>>에 비평을 제출하길래 전가영과 오랭서는 해석공작을 했던것이다.  
   
7월 23일, 모택동이 강화를 하자 풍운이 돌변한건데 그것이 “수재”들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전가영은 사천문제를 반영하는 형식으로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공격했다고 비평했다. 어떤 사람은 오랭서는 팽덕회와 한코구멍으로 숨을 쉬니 “로선착오를 범한것이다”라고 했다. “수재”들이 제일 근심스러워한것은 자기가 제멋대로 “뒷소리”내친 그것이였다. 그것들이 새여나가기만 하면 불필요한 시끄러움이 생기는것이다. 한데 아니나다를가, 바람이 새지 않는 벽이 없다고 회의도 아닌 “뒷소리”가 그래도 새여나가고만것이다.
    

그때는 회의에서 팽덕회, 장문천 등 사람에게 화력이 집중된 외에 그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돌려져 비판범위는 진일보 확대되는 형세에 접어들었다. 팽덕회는 양상곤을 찾아와 “수재”들을 보호해야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양상곤은 팽진, 박일파와 같이 리예를 찾아가 그만큼 하고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말라고 권고했다. 양상곤은 류소기, 주은래와 모택동을 찾아가 자기의 의사를 말했다. 그들도 동의를 표시했다. 모택동은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과 담화하면서 전계단에는 표현이 그리좋지 않았는데 그건 방향이 잘못됐기때문이다, 너무 긴장해 할 필요는 없으니 꼬리를 사리고 사람이 되라했다. 그러고는 이틀후에 “정전령”을 내려 “수재”들에게는 “면전패(免戰牌)를 달아주었다. 
   
양상곤은 “수재”들을 찾아가 알려주었다. 
   
“주석이 각 조의 조장들을 불러 이제부터는 정력을 8중전회에 돌리라했소. ‘수재’들의 일은 다시거들지 말라했으니 시름들 놓소.”     
   

8월 11일, 모택동은 8중전회에서 장편강화를 했는데 팽덕회등 동지들을 계통적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수재”를 보호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군사구락부의 사람들이 수재를 파가려다 파가지 못한것이라 말했고 “수재”는 우리 사람이지 너희들의 사람이 아니다고했다. 그는 또 “리예는 수재가 아니고 그는 구락부사람이다.” 고 했다. 이렇게 하여 정식으로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과 오랭서는 보호를 받게되였던것이다. 
   
그러나 로산회의후 중앙은 로산회의에서 “수재”들을 적발한 자료에 근거하여 의연히 그들을 립안 심사하기로 결정했다. 10월에 팽진은 두차례 “수재”들과 담하하여 자료를 핵실했다. “수재”몇은 중앙에 서면 검토와 변명을 했다. 10월 17일, 모택동은 4명“수재”와 담화를 하였는데 그는 너희들은 로산회의에서 표현이 좋지 않았지만 적대분자나 우경기회주의분자에는 속하지 않는다고했으며 총로선을 기본상 옹호하나 착오관점과 우경사상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로서 그 일은 결속을 선고했던것이다. 
   

로산회의후의 팽덕회
    
로산회의후에 팽덕회의 군대내의 직무를 철소하였지만 중앙위원과 중앙정치국위원의 직무는 의연히 남기였다. 당내문건은 여전히 발급했고 중앙정치국회의에 여전히 참가했다. 예전대로 청가를 받아야했다. 모택동의 건의에 따라 팽덕회가 어떤 일이 있을 시에는 모두 주임인 양상곤이 장악하고있는 반공청을 통해 중앙에 반영하여야했다.    
   

1959년 국경절전날, 팽덕회는 중해를 나와 오가화원에 이주했다. 10월 21일, 모택동은 팽덕회를 찾아 담화했는데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소평, 팽진, 화룡, 진의 등 동지들과 함께 양상곤도 자리를 같이했다. 모택동은 팽덕회가 9월 9일에 편지로 학습과 생산로동에 참가할것을 요구한데 대해서 긍정하는 한편 몇 년간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맑스주의철학을 배우고 정치경제학을 배워야한다고 했다. 담화분위기는 좋았고 그것이 끝나서는 오찬을 같이했다. 
   
팽덕회가 떠나간 후 모택동은 양상곤보고 이후 자주 팽덕회를 찾아가보라했다. 매월적어서 두차례, 주요하게 그의 사상동태를 료해하고 학습과 생활면에서 방조하라는것이였다. 11월 9일 양상곤은 팽진과 함께 팽덕회가 있는 곳에 가서 고급당교다위상위회를 소집하였다. 양헌진(楊獻珍). 애사기(艾思奇), 범약우(范若愚) 등 동지들이 다 왔다. 당장에서 팽덕회가 당교에 가서 학습하는 문제를 안배하였거니와 팽덕회는 모택동이 비준하여 당교에 들어가 학습하는것 만큼 전문인원이 보도를 책임지며 문제가 있으면 양헌진이나 팽덕회와 직접련계하도록했다. 
  
후에 모택동은 여러번이나 팽덕회가 나와서 일을 해줄것을 제출했다. 한번은 그가 양상곤보고 팽덕회를 농간부부장(農墾部部長)을 시킬 예산인데 가서 그의 의향을 물어보라했다. 빤했다. 만약 팽덕회가 동의한다면 다음의 보취는 왕진(王震)이 농건부부장직을 내놓게해야하는것이다. 한편  그때는 팽덕회가 기분이 아주좋지 않은 때여서 선듯이 나와 사업하려하지 않을게 빤하기에 양상곤은 줄곧 팽덕회와 담화를 하지 않았던것이다. 한번은 모택동이 또 양상곤보고 진의, 섭영진과 함께 셋이 팽덕회를 나와 사업하게끔 공작해보라면서 주요는 팽덕회를 설복하여 착오를 승인하는 표시를 보이는것이라 했다. 한데 팽덕회는 속으로 불복하면서 줄곧 맛서는 태도였기에 그 세사람은 입을 열지 못했다. 양상곤은 모택동을 찾아 말했다. 우리 세사람보고 팽덕회에 대한 공작을 하라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방침을 내놓으라 그러면 가보리라했다. 모택동은 그들의 난처를 알고는 웃으면서 정 그렇다면 그만두라했다. 
   

1961년 9월 19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농촌에 가 조사연구를 하겠다고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먼저 호남의 고향에 가 석달있으면서 농촌의 정황을 료해하고 명년봄에는 산서태항에 가겠으니 중앙에서 허락해달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외지에 나가 조사하는것을 허락한다면 가기전에 우선 모택동을 한번 만나보겠다고했던것이다. 양상곤은 팽덕회의 편지를 인차 모택동에게 주었다. 모택동은 며칠지나 비준했다.
    
“팽덕회가 어디에 가든 다 된다. 반년이라도 된다.”
        

10월 23일에 양상곤은 팽덕회를 찾아가서 모택동이 그가 조사를 내려가는것을 허락했다고 알려주었다. 25일밤에 팽덕회가 양상곤을 찾아와서 호남에 가서 조사할 제강을 내놓으면서 중앙반공청에서 림시비서를 주어 데리고 가게끔해달라했다. 조사자료정리를 방조하게끔 해달라는것이였다.
    
이틑날 양상곤은 김석(金石)을 불러다놓고 말했다.
    
“팽덕회가 요즘 호남고향에 돌아가 보면서 농촌조사를 하겠다오. 그런데 로산회의후에 팽덕회의 원래 비서들은 다 군위로 돌아가고 없는 정황이요. 우리보고 이번에 재료정리를 할 사람을 달라기에 생각해봤는데 당신이 적합할것 같아 그러오.”
    
김석이 좀 긴장해하니 양상곤이 말했다.
    
“팽덕회는 지금도 의연히 정치국위원이니만큼 당신은 그를 여전히 존경해야하오. 당신은 그를 도와 재료를 정리하는것이니 그가 어떻게 쓰라면 당신은 어떻게 쓰면되는거요. 착오가 생기면 그가 책임질것이니 당신하고는 관계없는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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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팽덕회는 북경을 떠나 호남으로 갔다. 그가 장사에 이르자 호남성위서기 호계종(胡繼宗)은 그에게 유관정황을 소개했다. 상담에 이르러서는 상담지위서기 화국봉(華國鋒)이 그를 접대했다. 11월 3일, 팽덕회는 상담현에 있는 자기의 고향인 위민생산대의 팽가위자촌에 당도했다. 
   

한달후에 팽덕회는 화국봉으로부터 중앙에서 중앙국, 성, 지구, 현위와 대의 창광기업의 1급책임자가 참가하는 중앙공작확대회의를 여는데 회의가 주요하게는 1958년에 “대약진”ga가 불러온 경험교훈을 총결하는것이니 몹시 중요한것만큼 호남조사를 즉시 결속짓고 북경으로 돌아가야한다는것을 알게되였다. 
   
팽덕회는 호남에 가있은 50여일기간에 조사보고를 5편이나 썼는데 그것을 김석에게 주어 그가 양상곤에게 갔다주게했다. 편지한장을 동봉했는데 다음과 같이 씌여있었다. 
   
“이 자료들은 모두가 이미 성, 지구, 현위의 동지들과 의견을 교환해본 것으로서 다른 의견이 크게 없는것이다. 착오가 있다면 전부의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양상곤은 팽덕회의 그 호남성조사보고자료를 모택동에게 보냈다. 이는 사전에 모택동의 비준을 받은것이고 사후에 또 모택동에게 회보하는것이니 사업순서나 조직원칙상에서나 아무런 흠잡을데도 없는것이였다. 
   
팽덕회가 북경에 돌아와서였다. 그는 1962년 1월 중앙공작확대회의(즉 7천인대회)의 문건을 보았다. 류소기의 서면보고였는데 1958년이래의 경험교훈을 비교적 실사구시적으로 총결하였기에 마음들었다. 그러나 보고에 로산회의의 반우경투쟁을 재차긍정하였으니 평판받을 여지가 없었다. 1월 27일, 류소기는 대회강화에서 이렇게 말했던것이다. 
   

“팽덕회의 착오는 그 편지를 쓴것때문만이 아닌것이다. 정치국위원으로서 주석에게 편지로 의견을 말했으니 착오로 볼수 없는것이다.” “로산회의에서 팽덕회동지의 반당집단을 반대하여 투쟁한 것은 팽덕회동지가 장시기 당내에 소집단을 갖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강, 요수석의 반당집단에 참가하였다.” “더 중요한것은 고강이 팽덕회를 리용한것이 아니라 팽덕회가 고강을 리용한 것이며 그들 두사람 다 국제배경을 갖고있는것이다.  그들의 반당활동은 어떤 외국인이 중국에서 전복활동을 하는것과 관계된다.” 때문에 “소유의 사람을 다 평판할 수 있어도 팽덕회만은 평판할 수 없다.” 
  
 팽덕회는 몹시 화나서 그 자리에서 양상곤에게 전화를 했다.     
   
“주석과 류소기에게 전해주오. 그런일이 없음을 정중이 성명한다고.”
    
이 일이있은 후 팽덕회는 다른사람과도 류소기의 강화가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다고했다. 책을 볼 수 없고 잠도 오지 않는다고했다. 팽덕회는 본래 춘절후에는 태항산 로해방구에 다시가보고 조사연구를 해볼 생각이였는데 지금 이 모양으로는 갈 수 없었던것이다.
    
7천명대회가 끝나자 팽덕회는 인차 손써서 시비곡직을 가르면서 자기의 일생경력을 상세하게 서면자료로 써서 중앙주면서 심사해줄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나온 이른바 팽덕회의 번안이라는 <<8만언서>>인것이다. 6월 16일, 팽덕회는 중남해에 가서 이 자료를 손수 양상곤에게 주었다. 양상곤은 그의 요구대로 인쇄하여 모택동과 중앙정치국 그리고 서기처 매 사람들에게까지 한부씩 보냈다. 신중하게 하느라 <<8만언서>>의 찍어낸 교료지를 사람을 파견하여 팽덕회에게 가져다주어 본인이 교열한 후에 정식으로 다시금 인발하려했다. 
   
그가 말했다.
    
“안보겠소. 중앙반공청을 믿으니까 인발하오.”
    
당년 7월에 모택동은 북대하에서 중앙공작회의를 열고는 회의에서 팽덕회가 번안한다고 한바탕 질책하고는 “번안풍, 흑암풍, 단간풍을 비판할 것을 제출했던것이다. 
   
9월, 북경에서 열리는 8기10중전회와 그 후에 잇따른 국경13주년활동에는 팽덕회에게 참가하라는 통지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 전회에서 모택동은 명백하게 태도를 표시했다. 자기는 팽덕회란 이 인물에 대해서 너무나 잘아니 평판하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지어 전회에서는 “팽덕회전안심사위원회”까지 내와서 그에 대해 전면심사를 하도록 결정했던것이다.
    
그후였다. 팽덕회전안심사위원회는 사람을 호남에 파견하여 1961년에 팽덕회가 고향농촌에 돌아가 조사한 정황을 “추종조사(追踪調査)”했다. 원래는 팽덕회가 호남조사결속후에 호남성위에서는 팽덕회가 호남에 있는 기간에 표현이 놓았다고 정식으로 보고를 중앙에 올리리라했다. 그러던것이 또 이랬다저랬다 앞뒤가 모순되고 신의가 없는 짓이 생기였다. 그들은 중앙에 보고하기를 팽덕회는 당시에 “반당언행”이 있었다는것이다. 이번의 전안조사위원회역시 전문 반면자료만 수집했으며 단장취의(斷章取義)라 문장의 일부를 끊어 팽덕회의 본의와는 달리 제멋대로 사용했고 마음대로 외곡하면서 <<팽덕회동지가 1961년 상담에 돌아간 정황에 관한 조사보고>>를 만들어 팽덕회의 그번 귀향조사는 “다른 심보가 있고”“속에 불만이 가득해서” 일련의 “반당언론”을 산포했다고 했다. 양상곤은 이 보고를 받아 인발하려다가 <<보고>>에 팽덕회를 수행하여 호남에 갔던 사업인원들의 이름도 집어넣은것을 발견하고 놀랬다. 그는 당장 전화로 전안심사위원회책임자를 찾아 그 몇사람 수행인원은 모두 조직에서 파견하여 구체적인 사업을 하게한것이니 그들의 이름은 써넣지 말라고 했다. 이리하여 한차례 또 발생 할 수 있었던 새련루안건을 피면하였던것이다.
   

1965년 9월 11일, 모택동은 팽진더러 당중앙을 대표하여 팽덕회를 찾아가 그보고 이것은 당중앙의 결정이다 너를 서남3선건설위원회부총지휘로 임명하니 서남에 가 사업하라고 말하라했다.
팽덕회는 나는 공산당원이니 응당 당조직의 분배에 복종해야한다. 그러나 착오를 범한 사람이니  누가 내 말을 듣자고하겠는가, 공업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니 차라리 농촌조사를 하는것이 희망이라고 표시했다.
23일, 모택동은 친히 팽덕회를 찾아 담화했다. 그 자리에 류소기, 등소평, 팽진도 있었다. 
   
모택동이 말했다. 
   
“팽덕회를 서남에 보내는건 당의 정책인거요. 누가 부동의한다면 내가 그하고 얘기할테요. 내가 전에는 팽덕회를 반대하는데 적극적이였다면 지금은 지지하는데 진심성의인것이요.” “로팽을 응당 이분법으로 보아야지,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모택동은 팽덕회보고 또 말했다. 
   
“진리가 당신쪽에 있을수도 있소.”    
   
10월 19일, 팽덕회는 양상곤을 불러 자기가 서남으로 부임하는데 봉착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도와달라했다. 양상곤은 당장에서 그러리라 대답했다. 이틑날 양상곤은 중판경위국(中辦警衛局) 부국장 전주(田疇), 중판기요실(中辦機要室) 부주임 뢰규(賴奎)를 파견하여 팽덕회의 일을 일일히 해결해주도록했다.
11월 28일에 팽덕회는 기차편으로 북경을 떠나 성도로 갔는데 양상곤은 이때 이미 중앙판공실주임을 그만두었기에 사사로이 그를 배웅하기도 딱하여 작별인사를 못했다. 유감스러웠다. 그보다 더 유감스러운건 그의 마지막영결마저도 보지 못한 그것이였다. 


양상곤은 일생에 두가지 본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 하나는 1978년 11월 28일, 사업을 빨리하려는데서 본의아니게 꼬리가 있는 심사결론에 서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산회의때 본의아니면서도 팽덕회를 비판한 것이였다.   

7월 23일, 모택동은 대회에서 팽덕회가 쓴 <<의견서>>를 내놓고 강화하면서 조목별로 그의 관점을  하나하나 비평했던것이다. 그는 낯빛이 달라지고 큰소리를 쳐가면서 노발대발했다. 10가지 일을 했다면 9가지는 말짱 나쁜것이라느니 신문에다 다 내면 꼭 멸망하고 말거라니 응당 망해야 한다느니다느 했고, 내가 갈것이다, 농촌으로 갈것이다, 농민을 일으켜 유격전으로 반란을 할것이다 라느니 했고 너의 해방군이 나를 따르나 안따르나  어디보자, 내보게는 아마 다 따를것같다고 했다. 모택동이 문제를 그같이 엄중하게 보니 회의기분은 몹시 긴장해졌던것이다. 
   

7월 26일, 모택동은 <<한통의 편지를 평론함>>이란 제목으로 자기에게 보낸, 동북협작구반공청간부 리운중(李云仲)의 편지를 찍게했다. 근 만여자에 달하는 길다란 이 편지에는 얼마간 중대한 문제를 반영했는바 우경보수사상을 반대하는 동시에 “좌”경모험주의 침습을 홀시하고있다는것, 공농관계문제 그리고 계획공작중에 주관주의가 존재한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포장랑비하는 기풍이 엄중하다는 것 등이였다. 모택동은 그 편지를 보고나서 작자가 성적방면의 자료는 수집하지 않고 전문 결점방면의 자료만 수집하였기에 근본 흥취를 자아내지 못다면서 2,500자되는 평론을 달아 질책했다. 그는 “지금 당내외에는 일종의 새사물이 출현하였는바 그것인즉 우경정서, 우경사상, 우경활동이 이미 자라나 창궐하게 진공하고있는것이다.”고 여긴것이다. 
      

이날 각 소조에다 모택동의 몇마디말을 또 전달했다. 
  
“일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일을 대하는건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계선을 갈라야 하고 문제는 명백히 밝혀야지 흐리터분해서는 안된다.”
     

몇마디 말이 아니였지만 분량은 매우 무거운것이였다. 하나의 문자평론, 한마디의 말, 뜻은 명백힜으니 그것인 즉 “팽덕회와 계선을 가르고 ‘우’를 반격하라!”는 것이였다.    
   

7월 30일, 당시 형세의 핍박에 못이겨 양상곤역시 소조회의에서 팽덕회에게 내키지 않은 비판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것이다.
    
“<<의견서>>의 정치방향은 바로 건설시기의 총로선과 1958년이래의 ‘대약진’, 인민공사화운동을 반대한것이다.” 
   
7월 31일과 8월 1일, 중앙정치국상위는 두차례 회의를 열고 작은범위내에서 팽덕회의 력사총장부와 사상근원을 청산하느라 했다.  회의정황을 즉시 각소조에 전달되였다. 그것이  팽덕회를 광범위하게 투쟁하도록 추동했던것이다.
   

8월 2일, 중공8기8중전회가 개막되였다. 모택동은 강화에서 팽덕회를 로선투쟁의 높이에까지 끌어 올려놓고 로선시비문제로 토론할것을 요구했다. 같은날 모택동은 장문천에게 편지로 “너는 어느 군사구락부에 빠져들었는가” 하면서 팽덕회와 장문천은 “문무배합이고 의기상투”라 하면서 “군사구락부는 어떻게 된건가? ” 하고 캐물었다. 회의기간에 누군가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가 팽덕회거처로 놀러간것을 보고는 고자질했던것이다. 그것은 본래 동무지간의 정상적인 왕래였건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팽덕회와는 계선을 가른다는것을 보여주느라 물어먹는  짓이였던것이다.

모택동은 그들이 군사구락부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는데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기실 장문천이나 주소주는 다가 군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문외한인것이다. 그리고 팽덕회는 군위사업을 장악하고 있으며 황극성은 총참모장이니 그들지간에 래왕이 밀접헌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였던것이다. 
    

팽덕회에게 여러가지 모자를 들씌웠다. 그의 <<의견서>>는 “군중을 쟁취하려는 것이다.”, “대오를 조직하는 것이다.”, “조직이 있고 계획이 있고 준비가 있게 총로선을 반대하고 당중앙을 반대하며 모주석의 활동을 반대한것이다.” , “ 우경기회주의를 대표하여 당을 향해 진공한 강령” 이라면서 팽덕회는 “그믈에서 빠진 고요반당집단의 주요성원”이라느니 “외국과 내통”하고 “쏘련수정주의의 반화와 호응”한다느니 했다.
이에 팽덕회는 큰 국면을 돌보아 내키지도 않는 검토를 반복적으로 하여 “객관적으로 ‘세폭의 붉은기’를 반대하는 작용을 했다.”고 승인하면서 “후과가 엄중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시종 “고요반당집단성원”이라는것과 “외국과 내통”한다는것은 승인하지 않았던것이다.
  

 황극성은 7월 17일에야 로산에 왔다. 19일, 황극성은 소조회의에서 발언했는데 “세폭의 붉은기”에 대한 견해가 팽덕회와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 하여 어떤 사람은 그를 속히웠다고 비평했다. 그날밤 그는 양상곤한테로 달려와 그보고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었다. 양상곤은 그한테 전 한단락의 회의정황을 간단히 소개했다. 황극성은 듣고나서 나는 관계치않는다, 어떤 말은 꼭 해야겠다고 했다.
23일, 모택동이 강화를 한 후 황극성도 다른사람과 마찬가지로 달통되지 않았다. 저녁에 양상곤은 주소주, 주혜, 리예와 함께 황극성이 들어있는 곳으로 가서 모택동의 말을 의론했다. 주소주가 몇가지 격한 말을 했다. 
  
“모택동은 쓰딸린의 만년을 닮아가는게 아닌가?”
    
황극성은 의견이 있으면 주석을 찾아가 당면에서 말하고 뒤에서 의론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그에게 권고했다. 이 일이 후에 밖에 전해져 도리여 그들이 배후에서 반당활동을 한 “죄증”으로 만들어지고말았다. 
  

 7월 21일, 장문천은 소조회의에서 3시간이달하는 계통적인 발언을 했다. 착전에 호교목은 장문천이 발언할 준비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특별히 전화로 그에게 “형세에 주의하여 결점을 적게 말하라”고 귀띔했다.
 
그런데도 장문천은 자기가 발언하려는 요강대로 발언했던것이다. 그는 먼저 “대약진”의 성적을 긍정해놓고 중요하게는 결점을 말했는데 결점의 후과와 결점이 나오게 된 원인을 밝혔던것이다. 그는 팽덕회의 <<의견서>>를 긍정하면서 “이 <<의견서>>는 하나의 문제를 제출했는데 중심내용이 경험을 총결 할 것을 희망한것이니 본의는 아주좋은것이다. 그런데 여러방면에서 반영되는것을 보면 적잖은 동지들이 팽덕회동지의 출발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것 같다. 편지의 어떤 구체적인 설법에만 주의하는데 기실은 성적을 긍정했다는것을 알아야한다. 그가 말했다. ‘성적은 기본적으로 여러사람이 말하는것과 같은것이다.’라고. 오로지 개별적인 설법에 어떤것은 크고 어떻것은 작은데 그것을 관계할게 아니다.” 장문천은 강조했다. “지금의 문제는 교오자만과 경계심을 늦추고 소홀히 하는 정서가 나타나는것을 방지하는것이며 존재하는 문제의 일면을 더많이 보아내는 것이다.” 그는 지적햇던것이다. “경험을 총결할 때 경험이 부족하다는 소리로 만족해하지 말고 의례 사상관점으로부터 방법, 작풍에 이르기까지 깊이 검토해야한다.” 장문천의 발언은 자료가 상세하고 확실하며 관점이 선명하고 론설리유와 근거가 있어서 반응이 매우컸다. 후에 장문천의 이 강화는 팽덕회의 <<의견서>>를 “전면 계통적으로 작용을 발휘”하게 하는 것으로 몰아 문제삼았다.    
다른 또 하나의 다른 삽곡이 있다. 관례대로 하면 무릇 회의에 참가한 사람이 소조에서 발언한 것은 모두 회의 <<간보>>에 올리는것이다. 그날 장문천이 발언한 요점을 <<간보>>에 내려고 방금 인쇄에 넘길 준비를 하고있는데 그가 전화를 걸어와 철회를 요구한 것이다. 나는 곧 류소기를 찾아가 청시했다.
류소기가 말했다. 
   
“본인이 자기것을 되돌려달라면 돌려주오.”
 

이는 장문천이 사상상 역시 고려가 있었음을 설명하는것이였다. 그는 회의에서 “대약진”의 결점은 모험이 너무도 큰것이라 평했던것이다. 그가 자기의 발언고를 돌려달라니 나는 매우 딱했다. 만약 내가 류소기한테 청시도 하지 않고 돌려준다면 내가 “교도주의와 어울린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주소주는 젊은 패기가 있거니와 한때 모택동의 비서질을 했길래 모택동앞에서는 별로 구속받지 않고 할말을 했다. 로산회의가 시작되였을 때 그는 매우 활약적이였다. 7월 11일 밤, 모택동은 주소주, 주혜, 리예를 불러 담화했는데 주소주가 “대약진”을 하면서 기층간부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우에서 듣기좋아하니 아래는 자연히 심하기마련”이라했다. 모택동은 듣고나서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거니와 기분이 홀가분해서 웃기까지 했던것이다. 그번의 담화후에 주소주는 모택동이 반“좌”를 할것이라는 소문을 내서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주은래가 의론을 듣고 양상곤보고 어디서 나온 소문인가고 물었다. 양상곤은 그한테 주소주의 입에서 나온것이라 알려주었다. 주은래는 그더러 주소주가 다시는 그런 소문을 내지 않게끔 타이르라했다. 
   
그런데 주소주는 모택동이 자기와 몇을 불러 담화한 정황을 팽덕회에게 알려주면서 팽덕회도 모택동을 찾아가 담화해보라고 든장질했다. 팽덕회는 당면에서 말는것이 좋을 것 같지 않아서 7월 14일에 모택동에게 준 그 편지를 쓰게됐던것이다.
16일, 팽덕회의 편지를 인쇄발포하자 주소주는 소조회의에서 팽덕회의 주장에 찬동을 표시했다.
23일, 모택도의 지명에 의하여 주소주는 중점비판대상으로 되고말았던 것이다.
   

8월 30일, 소조회의에서 누군가 주소주가 7월 23일 모택동이 강화한 당날밤에 황극성을 찾아가 “모택동이 쓰딸린의 만년과 같다”고 말한것을 적발했다. 그로하여 전체회장은 들썽했다. 또 누군가 적발하기를 리예가 주소주에게 전가영한테서 들은 소리를 알려주었는데 전가영이 말하기를 자기가 장차 중남해를 떠나게 되면 모택동에게 세가지 의견을 드릴것이다. 첫째는 천하를 다스릴줄을 알아도 좌우를 다스릴줄을 모른다. 둘째는 백년후에 자기를 의론아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셋째는 비평을 들으려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은 진언하기 어려운것이다. 
   
리예는 당장에서 잘라말했다. “이 말은 전가영이 한것이 아니다. 내가 한것이다.”라고.     
   

회의는 리예를 비판하는데로 방향이 돌아졌다. 류소기는 그것을 제지했다. 그는 리예가 중앙위원이 아니니 그의 문제는 달리처리하리라했다.
    
로산회의가 “좌”를 규정하던데로부터 반“우”로 방향이 돌아졌는데 그렇게 된 도화선은 팽덕회의 <<의견서>>였다. 보건대 그것이 우연한것 같지만 기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회의전에 사람들의 사상이 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형세에 대한 평가에 줄곧 분기가 있었고 어떤 부동한 의견은 압제를 받았던것이다. 모택동의 생각에는 팽덕회의 <<의견서>>를 찍어 나눠주면 그것을 보고서 모두들 반대하고 비평할줄로 알았는데 생각과는 영 다르게 적잖은 사람들이 동정하고 지지하는것이였다. 모택동은 누가 당내에서 바람을 일으킨게 아닌가고 의심했다. 좌파인물중에서도 “세폭의 붉은기”를 비평하는 자가 점점 많아지니 울분이 터질 일이였다. “좌”파대오가 보루를 지켜낼것 같지 않아 근심되였다. 어떤 사람은 모택동을 찾아가 고자질하면서 그가 나와서 강화할것을 요구했다. 이와동시에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세폭의 붉은기”에대한 첨예한 비평이 많아갔거니와 국외에서는 흐루쇼브를 비롯한 동구라파의 수령들이 중국의 “대약진”과 인민공사화를 비평하는 문장을 련속발표했던것이다.
이 모든 것이 모택동으로 하여금 형세의 엄중성을 느끼게 하였거니와 이를 꼭 반격해야겠다고 그를 마음을 도슬려먹게 만든것이다.
    
“좌”를 규정하려던 회의가 주앙정치국상위의 토론도 걸치지 않고 반우로 방향이 홱 돌아졌다. 
류소기는 반우를 하는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보류되였다. 그는 호교목을 찾아와 팽덕회의 <<의견서>>에 대해서는 작은 범위내에서 비판할 수 있다, 총적인 부서는 의연히 “좌”를 규정하는 것으로 해야한다, <<기록>>은 계속 내보내여 아래에서 계속 “좌”를 규정하게 이끌어야한다고 했다. 그는 또 호교목더러 모택동을 찾아가 이 의견을 반영하라고했다. 이에 호교목은 이미 불가능하게되였다고 말했다. 
    
   
주은래는 팽덕회가 돌연적으로 쏟아지는 엄한 비판을 받아내지 못할것 같아서 양상곤보고 그의 안해 포안수(浦安修)를 오라해서 팽덕회의 생활을 돌보도록하라했다.
   
8월 1일, 주덕은 중앙정치국상위회의에서 태도가 온유하게 팽덕회의 <<의견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둬마디 말했는데 모택동은 채 들을 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중둥자르고는 신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면서 “격화소양(隔靴搔痒)”이라 비꼬았다. 
  

림표가 목청을 높혀가면서 팽덕회를 힐난했다.
   “이번에 온섯은 말을 사고 병사를 모집하려는것이다.”, “영웅이 돼볼려구하는 짓이다.”, “야심가, 음모가, 위군자.”   
이렇게 해재꼈으니 팽덕회의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았다. 당이 분렬될 흠집과 경제의 말안장식의 형상이 출현하는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여겼다.  림표의 말은 모택동에게 아주 감미롭게 받아졌을 것이다.   
등소평과 진운은 병때문에 북경에 남다보니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8월 16일, 8기8중전회가 개막되였다. 회의는 “당의 총로선을 보위하고 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여 투쟁하자.” 는 결의를 내옴과 동시에 “팽덕회동지를 위수로 한 반당집단의 착오적결의에 관하여”라는 것을 통과하였다.    회의후 중앙으로부터 기층에 이르기까지 반우경투쟁을 전면적으로 벌려 수많은 공산당원과 간부를 비판하고 처분했으니 그것은 큰 착오였다!
   
“수재”를 보호하여 관을 넘게했다.
  로산회의기간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 오랭서, 리예 등 “수재”들은 다가 기본상 팽덕회의 <<의견서>>를 찬성했거니와 비공식적으로 “세폭의 붉은기”에 대해 질의했다. 하여 그들도 비판에 말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맨먼저 팽진이 제의하고 몇몇 중앙위원이 동의하여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과 오랭서는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은것이다.        

로산회의과정에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 오랭서, 리예 등 “수재”들은 1958년이래의 형세에 대해 한바탕 의론이 있었다. “수재”들은 말을 조금도 꺼림없이 했지만 사상상 “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약진”이 가져다 주는 엄중한 후과를 면전에 놓고 보게되니 “세폭의 붉은기”에 대해 질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것이다. 회의가 열린지 오라지 않아서 “수재”들은 로산회의기록임무를 맡았는데 모두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대약진”의 경험교훈을 잘 총결지을것인가를 궁리하면서 계속하여 “좌”의 문제를 규정하는데 진력했다. 당시 전가영은 자기가 사천을 조사하는 과정에 반영된 허풍치는 문제에 관한 자료를 모택동에게 보내여 그가 참고로 읽게했는데 그 일이 사천성위책임자의 불만을 야기시켰던것이다. 하여 전가영은 소조회의에서 발언할 때 지어는 사천성위의 그 책임자와 말다툼까지 했던것이다. 
   
팽덕회의 <<의견서>>를 찍어 나눠준 후 “수재”들은 모두 괜찮게 썼다고 평하면서 자기들이 초안을 잡은 “기록”과 기본관점이 같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조에서는 팽덕회의 <<의견서>>에 비평을 제출하길래 전가영과 오랭서는 해석공작을 했던것이다.  
   

7월 23일, 모택동이 강화를 하자 풍운이 돌변한건데 그것이 “수재”들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전가영은 사천문제를 반영하는 형식으로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공격했다고 비평했다. 어떤 사람은 오랭서는 팽덕회와 한코구멍으로 숨을 쉬니 “로선착오를 범한것이다”라고 했다.
“수재”들이 제일 근심스러워한것은 자기가 제멋대로 “뒷소리”내친 그것이였다. 그것들이 새여나가기만 하면 불필요한 시끄러움이 생기는것이다. 한데 아니나다를가, 바람이 새지 않는 벽이 없다고 회의도 아닌 “뒷소리”가 그래도 새여나가고만것이다.
    

그때는 회의에서 팽덕회, 장문천 등 사람에게 화력이 집중된 외에 그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돌려져 비판범위는 진일보 확대되는 형세에 접어들었다. 팽덕회는 양상곤을 찾아와 “수재”들을 보호해야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양상곤은 팽진, 박일파와 같이 리예를 찾아가 그만큼 하고 일을 더 크게 만들지 말라고 권고했다.
양상곤은 류소기, 주은래와 모택동을 찾아가 자기의 의사를 말했다. 그들도 동의를 표시했다. 모택동은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과 담화하면서 전계단에는 표현이 그리좋지 않았는데 그건 방향이 잘못됐기때문이다, 너무 긴장해 할 필요는 없으니 꼬리를 사리고 사람이 되라했다. 그러고는 이틀후에 “정전령”을 내려 “수재”들에게는 “면전패(免戰牌)를 달아주었던것이다. 
   

양상곤은 “수재”들을 찾아가 알려주었다. 
  
“주석이 각 조의 조장들을 불러 이제부터는 정력을 8중전회에 돌리라했소. ‘수재’들의 일은 다시거들지 말라했으니 시름들 놓소.”    
   
8월 11일, 모택동은 8중전회에서 장편강화를 했는데 팽덕회등 동지들을 계통적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수재”를 보호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군사구락부의 사람들이 수재를 파가려다 파가지 못한것이라 말했고 “수재”는 우리 사람이지 너희들의 사람이 아니다고했다. 그는 또 “리예는 수재가 아니고 그는 구락부사람이다.” 고 했다. 이렇게 하여 정식으로 진백달, 호교목, 전가영과 오랭서는 보호를 받게되였던것이다.
   
그러나 로산회의후 중앙은 로산회의에서 “수재”들을 적발한 자료에 근거하여 의연히 그들을 립안 심사하기로 결정했다. 10월에 팽진은 두차례 “수재”들과 담하하여 자료를 핵실했다. “수재”몇은 중앙에 서면 검토와 변명을 했다.
10월 17일, 모택동은 4명“수재”와 담화를 하였는데 그는 너희들은 로산회의에서 표현이 좋지 않았지만 적대분자나 우경기회주의분자에는 속하지 않는다고했으며 총로선을 기본상 옹호하나 착오관점과 우경사상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로서 그 일은 결속을 선고했던것이다.
   

로산회의후의 팽덕회
    

로산회의후에 팽덕회의 군대내의 직무를 철소하였지만 중앙위원과 중앙정치국위원의 직무는 의연히 남기였다. 당내문건은 여전히 발급했고 중앙정치국회의에 여전히 참가했다. 예전대로 청가를 받아야했다. 모택동의 건의에 따라 팽덕회가 어떤 일이 있을 시에는 모두 주임인 양상곤이 장악하고있는 반공청을 통해 중앙에 반영하여야했다.   
   

1959년 국경절전날, 팽덕회는 중남해를 나와 오가화원에 이주했다.
10월 21일, 모택동은 팽덕회를 찾아 담화했는데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소평, 팽진, 화룡, 진의 등 동지들과 함께 양상곤도 자리를 같이했다. 모택동은 팽덕회가 9월 9일에 편지로 학습과 생산로동에 참가할것을 요구한데 대해서 긍정하는 한편 몇 년간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맑스주의철학을 배우고 정치경제학을 배워야한다고 했다.
담화분위기는 좋았고 그것이 끝나서는 오찬을 같이했다. 
   

팽덕회가 떠나간 후 모택동은 양상곤보고 이후 자주 팽덕회를 찾아가보라했다. 매월적어서 두차례, 주요하게 그의 사상동태를 료해하고 학습과 생활면에서 방조하라는것이였다.
11월 9일 양상곤은 팽진과 함께 팽덕회가 있는 곳에 가서 고급당교당위상위회를 소집하였다. 양헌진(楊獻珍). 애사기(艾思奇), 범약우(范若愚) 등 동지들이 다 왔다. 당장에서 팽덕회가 당교에 가서 학습하는 문제를 안배하였거니와 팽덕회는 모택동이 비준하여 당교에 들어가 학습하는것 만큼 전문인원이 보도를 책임지며 문제가 있으면 양헌진이나 팽덕회와 직접련계하도록했다. 
  

후에 모택동은 여러번이나 팽덕회가 나와서 일을 해줄것을 제출했다. 한번은 그가 양상곤보고 팽덕회를 농간부부장(農墾部部長)을 시킬 예산인데 가서 그의 의향을 물어보라했다. 빤했다. 만약 팽덕회가 동의한다면 다음의 보취는 왕진(王震)이 농건부부장직을 내놓게해야하는것이다. 한편  그때는 팽덕회가 기분이 아주좋지 않은 때여서 선듯이 나와 사업하려하지 않을게 빤하기에 양상곤은 줄곧 팽덕회와 담화를 하지 않았던것이다. 한번은 모택동이 또 양상곤보고 진의, 섭영진과 함께 셋이 팽덕회를 나와 사업하게끔 공작해보라면서 주요는 팽덕회를 설복하여 착오를 승인하는 표시를 보이는것이라 했다.
한데 팽덕회는 속으로 불복하면서 줄곧 맛서는 태도였기에 그 세사람은 입을 열지 못했다. 양상곤은 모택동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 세사람보고 팽덕회에 대한 공작을 하라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방침을 내놓으라 그러면 가보리라했다. 모택동은 그들의 난처를 알고는 웃으면서 정 그렇다면 그만두라했다. 
   
1961년 9월 19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농촌에 가 조사연구를 하겠다고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먼저 호남의 고향에 가 석달있으면서 농촌의 정황을 료해하고 명년봄에는 산서태항에 가겠으니 중앙에서 허락해달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외지에 나가 조사하는것을 허락한다면 가기전에 우선 모택동을 한번 만나보겠다고했던것이다. 양상곤은 팽덕회의 편지를 인차 모택동에게 주었다. 모택동은 며칠지나 비준했다.
   
 “팽덕회가 어디에 가든 다 된다. 반년이라도 된다.”
       

10월 23일에 양상곤은 팽덕회를 찾아가서 모택동이 그가 조사를 내려가는것을 허락했다고 알려주었다. 25일밤에 팽덕회가 양상곤을 찾아와서 호남에 가서 조사할 제강을 내놓으면서 중앙반공청에서 림시비서를 주어 데리고 가게끔해달라했다. 조사자료정리를 방조하게끔 해달라는것이였다.
    
이틑날 양상곤은 김석(金石)을 불러다놓고 말했다.
   
 “팽덕회가 요즘 호남고향에 돌아가 보면서 농촌조사를 하겠다오. 그런데 로산회의후에 팽덕회의 원래 비서들은 다 군위로 돌아가고 없는 정황이요. 우리보고 이번에 재료정리를 할 사람을 달라기에 생각해봤는데 당신이 적합할것 같아 그러오.”
   
 김석이 좀 긴장해하니 양상곤이 말했다.
    
“팽덕회는 지금도 의연히 정치국위원이니만큼 당신은 그를 여전히 존경해야하오. 당신은 그를 도와 재료를 정리하는것이니 그가 어떻게 쓰라면 당신은 어떻게 쓰면되는거요. 착오가 생기면 그가 책임질것이니 당신하고는 관계없는것이요.”
    
10월 30일, 팽덕회는 북경을 떠나 호남으로 갔다. 그가 장사에 이르자 호남성위서기 호계종(胡繼宗)은 그에게 유관정황을 소개했다.
상담에 이르러서는 상담지위서기 화국봉(華國鋒)이 그를 접대했다. 11월 3일, 팽덕회는 상담현에 있는 자기의 고향인 위민생산대의 팽가위자촌에 당도했다. 
   
한달후에 팽덕회는 화국봉으로부터 중앙에서 중앙국, 성, 지구, 현위와 대의 창광기업의 1급책임자가 참가하는 중앙공작확대회의를 여는데 회의가 주요하게는 1958년에 “대약진”이 불러온 경험교훈을 총결하는것이니 몹시 중요한것만큼 호남조사를 즉시 결속짓고 북경으로 돌아가야한다는것을 알게되였다.
   
팽덕회는 호남에 가있은 50여일기간에 조사보고를 5편이나 썼는데 그것을 김석에게 주어 그가 양상곤에게 갔다주게했다. 편지한장을 동봉했는데 다음과 같이 씌여있었다. 
  
 “이 자료들은 모두가 이미 성, 지구, 현위의 동지들과 의견을 교환해본 것으로서 다른 의견이 크게 없는것이다. 착오가 있다면 전부의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양상곤은 팽덕회의 그 호남성조사보고자료를 모택동에게 보냈다. 이는 사전에 모택동의 비준을 받은것이고 사후에 또 모택동에게 회보하는것이니 사업순서나 조직원칙상에서나 아무런 흠잡을데도 없는것이였다. 
  
팽덕회가 북경에 돌아와서였다. 그는 1962년 1월 중앙공작확대회의(즉 7천인대회)의 문건을 보았다. 류소기의 서면보고였는데 1958년이래의 경험교훈을 비교적 실사구시적으로 총결하였기에 마음들었다. 그러나 보고에 로산회의의 반우경투쟁을 재차긍정하였으니 평판받을 여지가 없었다.
1월 27일, 류소기는 대회강화에서 이렇게 말했던것이다. 
   
“팽덕회의 착오는 그 편지를 쓴것때문만이 아닌것이다. 정치국위원으로서 주석에게 편지로 의견을 말했으니 착오로 볼수 없는것이다.” “로산회의에서 팽덕회동지의 반당집단을 반대하여 투쟁한 것은 팽덕회동지가 장시기 당내에 소집단을 갖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강, 요수석의 반당집단에 참가하였다.” “더 중요한것은 고강이 팽덕회를 리용한것이 아니라 팽덕회가 고강을 리용한 것이며 그들 두사람 다 국제배경을 갖고있는것이다.  그들의 반당활동은 어떤 외국인이 중국에서 전복활동을 하는것과 관계된다.” 때문에 “소유의 사람을 다 평판할 수 있어도 팽덕회만은 평판할 수 없다.” 
   
팽덕회는 몹시 화나서 그 자리에서 양상곤에게 전화를 했다.     
   
“주석과 류소기에게 전해주오. 그런일이 없음을 정중이 성명한다고.”
    
이 일이있은 후 팽덕회는 다른사람과도 류소기의 강화가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다고했다. 책을 볼 수 없고 잠도 오지 않는다고했다. 팽덕회는 본래 춘절후에는 태항산 로해방구에 다시가보고 조사연구를 해볼 생각이였는데 지금 이 모양으로는 갈 수 없었던것이다.
    
7천명대회가 끝나자 팽덕회는 인차 손써서 시비곡직을 가르면서 자기의 일생경력을 상세하게 서면자료로 써서 중앙주면서 심사해줄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나온 이른바 팽덕회의 번안이라는 <<8만언서>>인것이다. 6월 16일, 팽덕회는 중남해에 가서 이 자료를 손수 양상곤에게 주었다. 양상곤은 그의 요구대로 인쇄하여 모택동과 중앙정치국 그리고 서기처 매 사람들에게까지 한부씩 보냈다. 신중하게 하느라 <<8만언서>>의 찍어낸 교료지를 사람을 파견하여 팽덕회에게 가져다주어 본인이 교열한 후에 정식으로 다시금 인발하려했다. 
   
그가 말했다.
    
“안보겠소. 중앙반공청을 믿으니까 인발하오.”
    

당년 7월에 모택동은 북대하에서 중앙공작회의를 열고는 회의에서 팽덕회가 번안한다고 한바탕 질책하고는 “번안풍, 흑암풍, 단간풍을 비판할 것을 제출했던것이다. 
   
9월, 북경에서 열리는 8기10중전회와 그 후에 잇따른 국경13주년활동에는 팽덕회에게 참가하라는 통지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 전회에서 모택동은 명백하게 태도를 표시했다. 자기는 팽덕회란 이 인물에 대해서 너무나 잘아니 평판하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지어 전회에서는 “팽덕회전안심사위원회”까지 내와서 그에 대해 전면심사를 하도록 결정했던것이다.
    
그후였다. 팽덕회전안심사위원회는 사람을 호남에 파견하여 1961년에 팽덕회가 고향농촌에 돌아가 조사한 정황을 “추종조사(追踪調査)”했다. 원래는 팽덕회가 호남조사결속후에 호남성위에서는 팽덕회가 호남에 있는 기간에 표현이 놓았다고 정식으로 보고를 중앙에 올리리라했다. 그러던것이 또 이랬다저랬다 앞뒤가 모순되고 신의가 없는 짓이 생기였다. 그들은 중앙에 보고하기를 팽덕회는 당시에 “반당언행”이 있었다는것이다. 이번의 전안조사위원회역시 전문 반면자료만 수집했으며 단장취의(斷章取義)라 문장의 일부를 끊어 팽덕회의 본의와는 달리 제멋대로 사용했고 마음대로 외곡하면서 <<팽덕회동지가 1961년 상담에 돌아간 정황에 관한 조사보고>>를 만들어 팽덕회의 그번 귀향조사는 “다른 심보가 있고”“속에 불만이 가득해서” 일련의 “반당언론”을 산포했다고 했다.
양상곤은 이 보고를 받아 인발하려다가 <<보고>>에 팽덕회를 수행하여 호남에 갔던 사업인원들의 이름도 집어넣은것을 발견하고 놀랬다. 그는 당장 전화로 전안심사위원회책임자를 찾아 그 몇사람 수행인원은 모두 조직에서 파견하여 구체적인 사업을 하게한것이니 그들의 이름은 써넣지 말라고 했다. 이리하여 한차례 또 발생 할 수 있었던 새련루안건을 피면하였던것이다. 
   
1965년 9월 11일, 모택동은 팽진더러 당중앙을 대표하여 팽덕회를 찾아가 그보고 이것은 당중앙의 결정이다 너를 서남3선건설위원회부총지휘로 임명하니 서남에 가 사업하라고 말하라했다. 팽덕회는 나는 공산당원이니 응당 당조직의 분배에 복종해야한다 그러나 착오를 범한 사람이니  누가 내 말을 듣자고하겠는가, 공업에 대해서도 외항이니 차라리 농촌조사를 하는것이 희망이라고 표시했다.
23일, 모택동은 친히 팽덕회를 찾아 담화했다. 그 자리에 류소기, 등소평, 팽진도 있었다. 
   
모택동이 말했다. 
   
“팽덕회를 서남에 보내는건 당의 정책인거요. 누가 부동의한다면 내가 그하고 얘기할테요. 내가 전에는 팽덕회를 반대하는데 적극적이였다면 지금은 지지하는데 진심성의인것이요.” “로팽을 응당 이분법으로 보아야지,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모택동은 팽덕회보고 또 말했다. 
   
“진리가 당신쪽에 있을수도 있소.”    
   

10월 19일, 팽덕회는 양상곤을 불러 자기가 서남으로 부임하는데 봉착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도와달라했다. 양상곤은 당장에서 그러리라 대답했다.
이틑날 양상곤은 중판경위국(中辦警衛局) 부국장 전주(田疇), 중판기요실(中辦機要室) 부주임 뢰규(賴奎)를 파견하여 팽덕회의 일을 일일히 해결주도록했다.
11월 28일에 팽덕회는 기차편으로 북경을 떠나 성도로 갔는데 양상곤은 이때 이미 중앙판공실주임을 그만두었기에 사사로이 그를 배웅하기도 딱하여 작별인사를 못했다. 유감스러웠다. 그보다 더 유감스러운건 그의 마지막영결마저도 보지 못한 그것이였다. 
   

양상곤은 팽덕회와 우의가 두터웠으니 마치 손발과도 같이 친근했다. 1998년초,  그는 주은래와 류소기를 기념하는 두 문장을 각각 한편씩 쓰면서 피로를무릅쓰고 팽덕회탄신백주년기념문장도 겸하여 썼던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팽덕회의 가장 돌출한 특점에다 력점을 두었다. 당의 리익을 시시각각 중히 여면서 대공무사했던 팽덕회는 일생을 당과 인민을 위한 투쟁에 바치였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것이다. 억울하게 당하기만하는 그런 역경속에서도 생명이 끝나가는 그 시각까지 혁명의지가 견정했으니 진정 고상한 인간의 모범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던것이다.  
   
<<팽대장군을 追念하여>>는 양상곤이 병상에서 쓴 마지막문장이다.









   양상곤은 팽덕회와 우의가 두터웠으니 마치 손발과도 같이 친근했다. 1998년초,  그는 주은래와 류소기를 기념하는 두 문장을 각각 한편씩 쓰면서 피로를무릅쓰고 팽덕회탄신백주년기념문장도 겸하여 썼던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팽덕회의 가장 돌출한 특점에다 력점을 두었다. 당의 리익을 시시각각 중히 여면서 대공무사했던 팽덕회는 일생을 당과 인민을 위한 투쟁에 바치였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것이다. 억울하게 당하기만하는 그런 역경속에서도 생명이 끝나가는 그 시각까지 혁명의지가 견정했으니 진정 고상한 인간의 전범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던것이다. 


   <<팽대장군을 追念하여>>는 양상곤이 병상에서 쓴 마지막문장이다.




 

 
 


 



 
 
 
 



개국공신 팽덕회(彭德懷)는 전공이 혁혁하여 칭송이 자자한 인격높은 군자였다. 그는 1955년에 중국공산당의 원수항렬에서 두 번째지위에 오르자 침식마저 잃어가면서 국방현대화건설에 몸을 내맡기였다. 한편 모택동은 15년내에 영국을 초과하고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몽상에 잠겨 “대약진”을 설계하여 발동하고는 5억농민을 인민공사화하하여 한데묵고 8천만에 이르는 인력을 강철생산에 내몰아 국민경제에 엄중한 실조를 빚어냈던것이다. 1959년 7월에 중공중앙은 로산(盧山)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모택동은 국내형세를 성적은 위대하고 문제가 적지 않으며 전도는 광명하다고 개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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