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 묻힌 비밀(57) (1)류아루장군이 주석의 죽음을 말하다 (2)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너와 나의 이름을 적을것이다 류아루장군이 주석의 죽음을 말하다
(이미 작고한 류아루선생은 리선념의 좋은 사위로서 공군정치부선전부부부장이였다. 류아루장군을 방문하고 쓴 본문의 작자는 중앙판공청비서국에서 40여년간 사업한 사람이다) 우리가 이제 박해받아 사망한 당원을 놓고 새삼스례 말하는건 너그럽지 못한 짓인것 같지만 당원의 몸인 그는 확시실히 자기가 갈아놓은 칼에 죽고만 것이다. 그의 부인은 다시금 자유를 찾은 후 오조광(吳祖光)의 부인 신봉하(新鳳霞)와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모택동의 좋은 학생인거얘요” 신봉하녀사는 코를 비쭉거리면서 그녀가 아직도 칼을 잡은 그 사람을 그리워하니 우리가 글쎄 그를 어떻게 동정해준단말인가? 했다. (“개방잡지”ㅡ 朱學淵)
력사가 끊어지는가 하면 끊어지지 않고 통사가 불통하는 것이다. 사학가란 태반이 제2류의 문학가고 제3류가 사상가인 것이다. 이같이 무서운 규률을 그네들이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중국의 관리사회를 놓고보면 “둘째책임자‘의 운명은 종래로 비참한 것이였다. 중국의 통사를 아무리 뒤져봐야 승상(丞相) 거의가 좋은 끝장이 없었던 것이다. 군주를 동반하는건 범을 동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피로 바꾸어 온 이 보귀한 경험은 많은 승상들이 목숨으로바꾸어 총결해 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는 그들의 피눈물의 공소인 것이다. 력사가 발전하여 20세기에 들어섯고 중국공산당의 손에서 이 규률은 더더욱 절대 뒤엎을 수도 없는 진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나는 오늘 다른사람을 말하려 하지 않고 류소기를 말하련다. 그는 “둘째책임자”의 좋은 본보기였다. 장국도가 혁명을 배반한 후 향항에 피해가 공산당의 수령들을 한바탕 욕지걸이했는데 류소기를 욕할 때는 그가 “류소기는 모택동의 공신개”라했다. 그가 말한게 틀리지 않는다. 모택동이 오늘까지 있게된데는 그의 공로가 제일 큰 것이다. 홍군이 장정하여 연안에 이른 후의 일이다. 한번은 극을 보게되였는데 당승이 경을 구하는 내용이였다. 모택동이 제 옆에 앉은 민주인사와 말을 건늬였던 것이다. “당승이 서천에 가서 경을 구하는데 누가 제일 견정한 것 같소?” “당승이지.” “누가 제일 동요했소?” “저팔개.” 모택동은 이어서 제 왼쪽켠에 동안뜨게 앉아있는 장국도를 가리켰다. “장정길에서는 저 사람이 저팔개였소.” 장국도는 그 말을 듣자 대노하여 밝칵 일어나 극장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 욕을 던졌던 것이다. “무치하다.” 모택동은 씁쓸하여 낯색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 벌컥 일어나는 소리나길래 내가 보니 키가 헌칠한 류소기였다. 그는 장국도를 향해 엄하게 내질렀다. “입을 다물라!” 모택동이 칼을 뽑지 않았는데 그가 사뭇 강개해서 칼을 뽑는 격이였다. 그날저녁의 일이 내가 보건대는 류소기가 좀 과분한 것 같았다. 한긴 장국도가 욕한것많은 사실이였다. 하지만 모택동도 남을 욕했거니와 먼저욕한 것이다. 장국도의 입이 종이까풀같이얇지만 모택동의 입은 그보다 더 얇은건데 류소기가 중간에 뛰여들어 그의 편을 들건 뭔가? 류소기의 전적인지원에 큰 힘을 입은 모택동은 본때스레 장국도를 이겼던 것이다. 장국도는 형세가 좋지않은지라 그만 꼬리를 빼고말았다. 과연 총명했다. 하기는 80고령에 카나다의 토론토료양원에서 중병을 앓다가 죽기는 했지만 어쨌든 류소기보다는 멋좋게 죽은거요 인정스레 죽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류소기보다 10년을 더 살았고. 류소기의 가장 큰 공로는 한가지를 발명창조한 것인데 그것인즉은 “모택동사상”이라는 것이였다. 1945년에 당중앙은 연안에서 “7대”를 열었는데 류소기가 회의에서 모택동을 그야말로 확끈하게 과장했던 것이다. 그는 볓번이나 보고를 했는데 번마다 입에 꽃이라도 핀것 같았다. 어느 한차례의 보고에서 그는 모택동의 이름을 105차나 씹었다. 이건 내가 통계를 낸 것이다. 그때 나는 무대아래에 앉아있었는데 수령들의 얼굴색을 주의해서 살펴봤다. 그들은 거개가 머리를 끄덕이였다. 주은래, 임필시가 가볍게 끄덕였다. 령수로서 알맞은 거동이겠지만 림표는 충동이 격렬한지 마치 병아리가 모이를 쫏듯 부지런히 까댁였다. 내가 괴이하게 여긴것은 지어 모택동 자신마저 머리를 끄덕이는 그것이였다. 그는 만면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그믈그믈 피여올리기까지 했다. 그는 방임자류하면거 남이 자기를 노래부르는것을 들었던 것이다. 류소기가 당장수개보고를 했다. 모택동은 그가 처주는 말에 백번은 넘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거기다 모택동사상이라는 말을 가첨했다면 고개를 얼마나 더 끄덕였을지 그야말로 부지기일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보고를 떠나 어느 구절이 새로 첨가되였는가를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럴때마다 그의 음성은 8℃로 오르군했다. 높이 읽을 때면 말을 조금 더듬었지만 그래도 물흐르듯 거침없었다. 자못 격동 된 표정이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후에는 수만차를 반복하였던 그 구절을 뇌일 때는 그의 음성마저 찢어지듯 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수령 모택동은 이미 자기의 사상으로 우리들 전민족의 사상을 전에는 없었던 높이에로 끌어 올리였다. 그것이 바로 모택동사상인 것이다!” 박수소리가 우레마냥 터졌는바 마치도 양가령의 례당을 뒤집어엎는 것만 같았다. “모택동사상”은 류소기라는 이 어머니가 낳은 것이다. 이 신생아이는 태여나자부터 만세하게 된 것이다. 오늘은 모택동이 말을 못하게 됐고 류소기도 말을 더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사상은 조금도 쉬지 않고 뇌여지고있다. 우리는 그것으로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남과 싸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것을 리용하여 우리를 투쟁하는 것이다. 그 누가 무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는 그것을 장악했다고 선포하고 누가 무대에서 나떨어지면 다른사람들은 그가 그것을 배반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마치도 차바퀴가 돌아가듯 빙글빙글 돌면서 홀로 드팀없이 우뚝 서있는것이다. 모택동은 응당 제일먼저 류소기에게 감가를 드려야 한다. 하긴 그렇게도했다. 그는 한두번만 말한게 아니다. “나는 연안정풍을 걸치면서 몇몇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류소기, 진백달, 호교목, 고강, 륙정일, 팽진이다. 그리고 또 있는데 주양이다.” 류소기가 떳떳이 앞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류소기는 모택동을 위해서 대공을 세웠다. 모택동은 그가 세운 공에 상을 후하게 내렸다. 모택동은 이 국가를 그한테 넘겨주려했던 것이다. 언젠가 영국수상 멍거마리(蒙哥馬利)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누가 계승자인가고 물으니 모탣동이 말했던것이다. “거야 류소기라는게 명백하지요. 그는 우리 당의 부주석이니 내가 죽으면 그가 될것입니다.” 류소기는 오라잖으면 국가를 갖게 될 것이니 자연히 득의만면했다. 무척기뻣다. 그는 공로가 있다고 자처했다. 공로를 자처하는 사람은 기염이 몹시 오르게 된다. 나는 여러 장소에서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봤다. “7대이전에는 모택동의 절대권위를 세우지 못했으니 필사적으로 세웠다. 그러나 7대후에는 제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기에 구태여 수립하느라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런 신성한 사명이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수립하기싶으면 수립하고 수립하지 않으면 수립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공로를 자처하면야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세울려면 끝까지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막다른 골목에서 퇴로란 없는 것이다. 60년대후기에 류소기는 의기를 발양할수록 앙양되였다. 특히는 모택동이 대약진을 발동하였다가 실패하여 제2선으로 물러나 공화국주석자리를 넘겨받아서부터 그는 하나의 훈훈한 태양으로 변해가기 시작한것이다. 그가 주석으로 된 이틑날 나는 붉은글씨를 박은 <<인민일보>>를 보았다. 그와 모택동의 사진이 첫면에 가지런히 났던 것이다. 그는 지어 모택동과 꼭깥은 미소를 지었다. 제왕의 그것과도 같은 존귀한 뭇음이였다. 나는 저절로 탄식이 나갔다. 이런 시각에는 낯색을 굳히는 편이 더 낳았을 것이였다. 속에 노기가 있다해도 억지로라도 엄숙해야 겸허하고도 심중해 보일 것이다. 한데 어쩌면 그리도 빨리 군주식의 웃음을 짓는가? 그는 공로에 머리가 뜨거워져 머리가 혼미해 진 것이다. “공이 높으면 군주를 놀래운다.”는 격언을 그는 홀시한 것이다. 한편 모택동은 어찌하여 도처에서 자기를 못살게 하는 “둘째책임자”를 제 곁에서 잠자게 그냥 내처둘 수 있으랴. 그는 류소기에 대한 태도가 변하고말았다. 1965년도 여름에 드골이 특사 마얼루를 파견하여 중국을 방문하게 하면소 모택동을 만나 후계자문제를 알아보게 했다. 모택동이 말했다. “드골이나 나같은 사람은 계승자가 없다.”(海納百川) 회견할적에 그 장소에 내가 없었다. 하지만 담화기록을 먼저 비서국에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의 말을 보고 전투신호가 올랐음을 감촉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가, 몇 달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져 류소기를 죽음에로 몰아간 것이다. 그는 어쩌는 수 없이 넘어지고말았다. 모택동이 자기를 묘준하고있다는 것을 그는 감감 모르고있었던 것이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나는 파견되여 류소기문제를 전문심사하는 특별소조에 가서 사업하게 되었는데 그가 죽어서야 원단위에 돌아갔다. 그랬으니 그의 심태에 대해서는 손금보듯이 환한 것이다. 맨첫나날들에는 류소기 혼자서 모택동저택근처를 왔다갔다 배회했다. 그가 모택동을 만나기싶어하는게 확연했다. 모택동은 일부러 피하고 만나주지 않은것이다. 모택동은 분명히 도리에 어긋나고 있었다. 안그러면 왜서 범을 피하듯 하겠는가? 나는 류소기가 모택동을 만나서는 무슨말을 할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후에 그는 과연 모택동을 한번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맨처음 내밷은 말이 “난 <<모택동선집편위주임직무를 잃었다.....”는 것이였다.
모택동은 머리를 수굿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틑날, 근 만여명에 달하는 꼬마맹장들이 살기등등하여 중남해를 들이치고는 류소기를 붙잡아내여 투쟁했다. 그들은 류소기를 때렸다. 투쟁이 거의결속되여 갈 때 억세게 생긴 사내애 몇이 강박적으로 류소기를 새까많게 모인 군중앞에다 꿇어앉히였다. 그는 맞아 땅에서 딩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자유를 잃고말았다. 그사이에 그는 한가지 일을 해야했는데 그것인즉은 <<모태동선집>을 학습하는 것이였다. 그는 밤났으로 그 책을 받들고 보는 것이였다. 그가 이전에는 이 책을 읽을 때면 마음이 흡족하게 내키여 읽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심정이였다. 밸이 꼬여 죽을것 같이 아팠고 마음을 평형잡지 못해 백발은 까마귀둥지모양으로 되어 버렸고 가습놀이 세차게 들뛰였다. 책장을 번질 때면 손이 심하게 떨리였다. 나는 그가 읽는 것을 여러번보았는데 그는 읽을때마다 두눈에 눈물이 그들먹히 고인군했다. 눈물은 코물과 함께 땅에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닦을 념을 하지 않았다. 눈물코물이 책장에 떨어져 책장을 어지렵혔다. 그후부터 비판은 승급했는데 그는 매를 맞아 온 몸이 성한데가없었다. 꼬마맹장들은 그를 밀고 닥치고 했는데 마치 죽은 개를 다루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머리는 숙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꿋꿋하게 벗티게 하는 그의 강잉한 기개를 알아보았다. 그가 어찌 굽어들 수 있단말인가? 그가 하늘같이 쌓은 공적이 이제와서는 하늘같은 죄악으로 되고말았으니 이것이야 말로 천고의 억울한 일이 아니고 뭔가? 하지만 그는 끊내 그것을 참고 넘기였다. 1968년 10월 5일, 투쟁받고 돌아오던 그가 땅에 쓰러지고말았는데 숨이 간들간들했다. 그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때였다. 그가 내보고 말하는 것이였다. “나를 대신해 모주석께 좀 알려주오.... 나는 북경을 떠나 처와 애들을 데리고 연안에 가 농사질을 하겠다한다고, 고향에 돌아가도 되오.... 보통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거요..... ” 오, 당신은 과연 숨을 돌려쉬게 되었소. 사정하고 빌었지. 당신은 그야말로 오산해서 틀린것이였소. 당신은 끝내 투항하고 만 것이지. 이제와서는 목숨을 건지는 길밖에 뭐가 더 있겠는가. 불행은 그대를 유치하게 만든 것이였소. 당신이 어찌 알기나했겠소, 병을 얻어 일찌기 죽으리라고는. 치료도 해주지 않다가 8기 12중전화가 열리니 사람을 보내여 치료하여 인차죽지 않게 만들었지. “전회에서 그대를 산 목표”로 만드느라그런것이였지 뭔가? 당신이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했으랴, 12중전회가 이미 열려서 20일만에 당적을 긁어버린 것을. 그리고 지지 기다렸다가 일부러 11월 24일 당신이 70살 나는 생일날에 “휘황스러운 승리”로 그것을 세상에 공포할줄을 어찌 생각이나했으랴? 이 모든 것은 그대를 죽이자는 하나의 목적밖에 없은 것이다. 한데도 고향가 농사질을 하겠노라 애걸하였으니 어리석었지, 960만평방킬로메터의 널다란 조국 땅 그 어디면 당신을 받아주려할가? 아, 공신이여, 나는 속으로 탄사를 뿜어내고야말았다. 천고의 죄를 뒤집어 써야 하는 공신, 무의무탁하는 신세로 돼버린 공신, 고독하고 처량한 공신, 그대는 손빈(孫賓), 오자서(伍子胥)가 이미 놀았던 인생극비극을 논 것이다. 사람들은 다가 성공한 황제에 감동을 하고있다. 돌이 성공할 수는 있어도 사람은 안되는 것이다. 그는 일체를 박탈당했다. 죽어도 알몸으로 죽었다. 속옷 하나도 입지 못한채. 남이 아들로 가장해 화장터 령수증에다 이렇게 써놓았던 것이다. 姓名; 劉衛黃. 職業: 無. 死因: 病死.
이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너와 나의 이름을 적을 것이다
류소기는 격동되 음성으로 모택동과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당신과 나의 이름을 써넣을것이요. 사람이 서로 고기를 먹었다고 책에다 쓸 거요!”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엄중한 “좌”경착오에다 1959년부터 우리 나라에서 련속된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당과 인민은 건국이래 가장 엄중한 경제곤난에 처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풀것인가를 놓고 당중앙의 고위층에서는 의견분기가 생겼던 것이다. 1958년이래 3년간 “대약진”이 조성한 곤난과 경제형세에 대해 평가함에 당내에는 의견이 같지 않았다. 류소기, 주은래, 진운, 등소평 등을 대표로 하는 사람들은 줄곧 직접 국민경제 제1선을 대하고 있었기에 형세를 보는것이 진실에 가까웠던 것이다. 류소기가 제일 전형이였다. 류소기는 당내에서 곤난이 이루어진 엄중성에 대해서 그리고 곤난이 생기게 된 진정한 원인을 그 누구보다 잘알고있은 지도자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형세를 보는 것이 그 무슨 손가락 1나와 9개관계인것 아니고 손가락 3개와 7개의 관계로 따질것도 아니라면서 자연재해가 3이고 인재가 7이였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1962년의 재정예산에 적자가 30억원에 달한 것을 보고 그는 더욱 첨예하게 지적 한 것이다. “중앙공작회의(즉 ‘7천명대회’)는 곤난한 정황에 대해 투철히 보지 못했거니와 흑칠을 할까봐 무서워 있는 문제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것이 본래의 면모인데 왜서 무서워들 하는가? 온통 검게 만들면 사람들이 비관 할 수 있지만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난관을 물리칠 용기를 낼 수도 있게 하지 않는가!” 그는 잇따라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무서울게 뭔가? 오늘밝혀지지 않으면 내일밝혀질 것이고 네 자신이 밝히지 않으면 다른사람이 밝힐 것이다. 살았은 때 밝히지 않으면 죽은 다음 아래세대가 밝힐 것이다.” “세폭의 붉은기를 사람들이 몇 년두고 의심할 것이다.” 류소는 또 자기의 자식들과도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혁명하는 목적이 인민들이 먹는것, 입는 것과 집문제를 해결하자는 건데 이같이 고생스레 살아가니 근심하지 않을수있는가!” 류소기의 태도가 이같이 변하니 다른 지도자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일으켰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이 형세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경제사업의 제1선에서 책임을 맡아 온 주은래가 가장 잘 알것이였다. 1960년 말 주은래는 농업방면에서 무당산량을 높이 매기는 문제를 놓고 말한바있다. “이 반년사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국성적인 기황에 직면하자 주은래와 진운은 정치위험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량식을 들여와 국민을 살구려 했다. 1961년 5월에 중앙공작회의에서 주은래는 총결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때는 혁명을 한다면서 심사숙고도 하지 않고 랭정하지도 않았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것을 몰랐고 걸리면 되게 넘어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말에 류소기가 게끼였다. “너무 급히 서둘렀기에 되게 넘어져 결국은 늦게 되었다. 사회주의를 하자면 도덕이 좋고 감정이 좋고 열의만 좋아서 되는게 아니라 객관규률에 적응되여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넘어졌는데 아프면 아플수록 좋은것이다. 아파보지 않고는 감수가 깊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넘어졌는데도 아프지 않다고하는 것이다.” 주은래가 말했다. “나는 아픔을 느꼈소.” 그는 사업상 이같이 결점과 착오가 생긴데 대해서는 중앙이 응당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하기에 그는 영국의 륙군원수 멍거마리(蒙哥馬利)가 중국의 엄중한 곤난에 대해 말했을 때 개관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공정한 판단에 탄복합니다. 당신이 보아낸 것은 당연히 좋은 일면일 뿐 우리들의 사업에는 결점이 있습니다. 이 점을 당신은 말을 하지 않을 수도 혹은 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쏘공22차대회가 끝나 흐루쇼브와 갈라질 때 주은래가 그와 말했다. “목전 우리 국내는 아직 매우 곤난합니다. 지난해에 그같이 큰 재황이 들었지, 이 일년간에 내 머리가 더 희여졌습니다. 난 빨리 돌아가봐야겠습니다.” 7천명대회기간에 주은래는 복건조의 토론에 참가했다. 허다한 지방간부들이 강박명령을 하고 불어대고 거짓말을 하며 당과 군중관계는 긴장하다고 반영했다. 주은래는 그들의 발언을 “모두 매우 건강한 것이다”라고 충분히 긍정하면서 “모두 존중한다”고 했다. 그는 말했던 것이다. “당신들은 많은것을 얘기했는데 주요하게는 성위에 대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이 중앙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잘 알고있습니다.” 그가 진짜말을 하면 힘을 낼 수 있고 사실대로 하면 실효를 낼 수 있다면서 시대적인 병페를 정확히 지적하였기에 모두 탄복했던 것이다. 서쪽동에서 회의할적에도 주은래는 형세에 대한 류소기의 견해와 분석을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목전 재정경제의 곤난이 상당히 엄중한 것이다. 하건만 어떤 것은 우리가 미처보아내지 못하고 예측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또 진운의 의견에 대해서도 몹시찬성했다. 진운이 말했다. “제가 하는 말이 ‘좌’나 ‘우’로 될까봐 겁나말라. 만약 그누가 너를 ‘우’라고 하면 내가 책임질테다. 너의 당적을 긁어버리겠다면 나를 찾으라”. “이번 대회는 아주 큰 성적을 거두었다. 절대로 낮게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중앙의 결점과 착오에 대해서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중앙과 성위는 다가 각기 자기의 장부가 있지만 허다한 책임은 중앙에 있는 것이다.” 그는 담화에서 민주를 발양할 문제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난 몇년간 우리 당내이 민주생활은 정상적이 되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면 말은 조심스레하고 마음속을 보이지 말라’ 이런 현상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중앙정치국위원이며 중앙서기처서기며 국무원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주임인 리부춘은 하남, 호북 등지의 사업을 검사하면서 천리대지 중원은 재해가 엄중하다는것을 보아냈던것이다. 군중들은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배를 곯고있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여지듯 무거워 그는 말했던 것이다. “불어대기 바람이 인민에게 이같이 큰 재난을 들씌우게 만들었으니 우리는 그야말로 인민앞에 미안하다!” 모택동은 형세분석에 대한 제1선 지도자들과 의견을 달리하면서 맛섰다. 그는 한면으로 객관규률을 위반하였다고 하면서 “최근3년간 큰 벌을 받았다”, “골을 부닥쳐 피를 흘린 것이다”, “사회주의건설에 우리는 매우 큰 맹목성이 있은것이다. 우리로 놓고 보면 사회주의경제는 아직 많이 알아야 할 필연의 왕국인 것이다”고 하면서 자기의 착오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9년 로산회의때 모택동은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실패한게 있다. 손오공이 복숭아를 도적질하는게 이런 방법이였다, 로산회의같은것 말이다. 지난때는 경제관리가 복잡하다는 것을 모른것이다. 혁명은 소란스럽고 적은 틈탈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책임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책임이 리부춘에게 있고 책임이 왕학수에게도 있으며 기타 부장들도 다다소소 조금씩 있는것이다. 농업부에 책임이 있는데 담로반이 질 것이다. 주요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지난때는 남을 나무렸건만 지금와서는 남들이 나를 나무리는데 사실 많은 것을 해내지 못한 것이다.” 1960년 11월 25일, 감숙성위에서 중앙에 보고를 써올렸는데 “공산풍”이 다시일어난 근원을 검사하면서 의례 성위부터 사업을 지도하는 과정의 결점과 착오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모택동은 그 보고들 두 번이보고서도 다시 더 보면서 경험교훈을 섭취해야 한다면서 검토를 했다. “그것은 착오를 고치자고 하는 모든 동지들의 호흡이자 꼭 같은 운명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가 착오를 범했다면 받드시 고쳐야 하는 것이다.” 7천명대회에서 모택동은 또 말했던 것이다. “무릇 중앙에서 범한 착오라면 책임이 내한테 돌아오기마련인데 나도 한몫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주석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자는게 아니다. 기타의 다른 동지들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제일먼저 책임져야 할 것은 내다.” 다른한편 모택동은 곤난이 그리크지 않고 형세는 의연히 좋다고 하면서 “세폭의 붉은기”를 꼭 견지해야한다고 부르짖었다. 로산회의에서 모택동은 말하기를 “총로선에 문제있고 대약진에 문제있고 인민공사에 문제있다고 비평을 제출했는데 내보기에는 그들이 제기하는 것이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문제들이다. 나는 말한다, 그네들은 들린다고.” “그렇게 대단할 건 없다. 문제를 찾아내자고 들면 몇천 몇백가지 라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총적인 추세를 보면 그래도 손가락 아홉 개에 한 개인 것이다.” 량식이 긴장하고 “비정상사망”이 온 국토를 휩쓸고있건만 모택동의 태도는 “지금의 형세는 대단히 좋은 것이다. 결점과 착오는 부분적이다”는 것이였다. 1961년 로산의 사업회의에서 주은래가 발언할 때 모택동이 중간에 께끼였다. “착오라해봤자 그것뿐인데 그리 대단할 것 없다.” 하면서 그는 또다시 형상적인 말로 나날이 향상한다고 락관했다. 그는 회의가 끝나자 지어는 당대시인 리백의 시를 뽄따서 시까지 한 수 지어 중앙상위의 각 동지들에게 증송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형세를 적극적인 면에서 보아야 한다. 곤난이 있으면 방법을 대여 그것을 전승해야한다. 결점이 아무리 많다해도 그것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랬동안 누워있었으니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된 것이다.“ 1961년에 이르러 마음이 좀 기뻐지게 되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60조>>를 관철하고 공업에서 <<70조>>를 관철했으며 “3급소유제”를 기초로 하는 구체적인 정책들이 효력을 냈기 때문이였다. 그러하니 모택동은 류소기 등이 형세를 평가함에 매우 불만스러워 한 것이다. 1962년 여름, 모택동은 중남해의 수영장에서 류소기를 앞에 놓고 비평했던 것이다. “그리 급해할거 뭐여? 왜 막아내지 못했어? ” “서쪽동에서 온통 암흑이라 했다지, 급한게 뭐였나? ” “세폭의 붉은기를 부정하고 땅까지 나누는데도 막아내지 못해? 내가 죽은 다음에는 그래 어떻게 할건가!” 류소기는 격하여 내뱉앗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당신과 나의 이름을 적을 거요.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고 책에다 쓸거요!”
뒷이어 열린 중앙공작회의와 8기 10중전회에서 모택동은 1선령도들이 형세를 어둡게 보았으니 “흑암풍”이라면서 비평했다. 그는 지적했다. “내가 전국을 한고패 돌아봤다. 중남해로부터 서남, 각 대구의 동지들을 찾아 담화해봤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다가 매개성이 다 지난해보다 낳아졌다고 한다. 금년이 작년에 비해 낫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그렇게 온통 검은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형세를 너무나 검게 보는것이다.” “이 두해동안 곤난을 암흑으로 말하는게 합법이고 광명으로 말하는건 불합법이라한다.” “농업이 회복되려면 5년 8년이 걸려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을 그렇게 늘게 잡는건 희망이 없는 것이다. ” 그는 또 리부춘과 국가계획위원회를 비평했던 것이다. “우는 중앙과 련계하지 않고 아래는 군중과 련계하지 않았다. 사전에 청시하지 않고 사후에 보고하지 않으며 4시4절 강박서명하게 했다. 나는 1년 더 두고봐서 되지 않으면 바꾸리라했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기다릴게 뭔가고 권했다. 지금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가정단위 도급생산문제였다. 그것은 농업생산 청부제의 하나로서 토지소유권은 집단에 있고 경영권은 개인이 가지는 것이였는데 모택동은 그것이 결국은 어쨌든 자본주의길로서 자본주의농촌을 복벽하려고 기도하는 것이고 실제상 반당 반인민적인 자산계급사상이 당내에서의 반영이라했다. 3년간 엄중한 경제곤난을 겪으면서 안휘성위는 군중들이 호도거리책임제를 실시하자는 의견에다 변통을 가하여 “정액산량을 밭에 맡기고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책임제 즉 “책인전”을 실험하기로 하여 “가히 실험할 수 있다”는 모택동의 심중한 동의를 얻었다. 이와 동시에 중앙과 지방의 허다한 지도자들도 다가 산량을 호에 맡기는것을 지지했다. 당시 농촌사업을 책임졌던 등자회(鄧子恢)는 광범한 조사연구를 거쳐 안휘성위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그는 지적했다. “어떤 지구 특별히는 재해를 입은 지구와 산구의 분산지구에서 만약 산량을 호에 맡기는 것이 적합하다면 농민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것이 좋다”. 1961년에 주덕은 절강을 시찰할적에 신변의 사업인원에게 그것이 좋다고 했고 진운(陳云)도 안휘의 책임전에 관한 자료를 보고 말했다. “이는 비상시기의 비상적인 방법이다. 밭을 호에다 떼여 맡기건 산량을 호에 맡기건 다 좋다. 총적으로 국가가 그같이 커다란 천재와 인재를 받았을 때는 꼭 농민군중을 발동하여 <<국제가>>에 나오는 것 처럼 ‘우리자신에 의지하여’ 살길을 찾고 생산을 재빨리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6춸 하순부터 7월 초, 진운은 밭을 떼맡기는 방식으로 농민의 생산적극성을 불러 일으키면 농업산량을 회복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좋다는 자기의 의견을 북경에 있는 류소기, 주은래, 림표, 등소평에게 보냄으로서 그들의 견해역시 기본상 일치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때 바로 중남국서기를 맡고있던 도주역시 여러번이나 “변원지구와 산구에서는 산량을 호에 맡기는 것이 좋다, 검은 고양이건 흰고양이건 쥐를 잡는 고양이면 좋은 고양아다” 라고했던 것이다. 1962년 4월, 그는 하남에 가서 사업을 검사하면서 땅을 농민에게 빌려주어 농민이 자기절로 다루게 하는게 좋겠다고 제출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면 자본주의로 되는게 아닌가고했다. 도주는 대답했다. “이렇게 하는것이 자본주의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자본주의를 요구할테다, 굶어죽지 않게!” 모택동의 비서 전가영은 본래 호도거리를 찬성하지 않았는데 호남의 농촌들을 시찰하면서 당전에는 호도거리가 우월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찰을 끝마친 그는 상해에 가 모택동에게 사실을 회보했는데 모택동은 랭담했을뿐만아니라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군중의 길을 걸으려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군중의 말을 완전히 들을건 아니다. 말하자면 산량을 호에 맡기는 청부제 같은건 듣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진운은 “관점이 선명”하게 찬성했고 류소기도 좋다고 한 것이다. 양상곤도 북경에서 전가영에게 전화를 쳤던 것이다. “총리가 당신에게 물어보라했소. 농촌의 사유부분을 완화시킬 수 없는가고?” 전가영은 북경에 돌아오자 곧 류소기를 찾아가 회보했다. 회보를 금방 시작하자 류소기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지금 어떤 정황이란건 명백해졌소.” 이어서 그는 농촌에서는 호도거리생산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한데 류소기와는 달리 뜻밖에도 모택동은 산량을 호에다 맡기자는 도급제주장을 동의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전가영 등을 엄하게 비평했던 것이다. “북경에 돌아와 <<농업60조>>나 수개할게지 호도거리가 다 뭐야, 밭을 나눠 개인으로 하자구.” 하면서 그는 전가영에게 캐물었다. “너 개인의 의견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보탠거냐?” 전가영은 중앙지도층에 분렬이 생길 것 같아서 자기 개인의견이라 대답했다. 진운이 회억하는 것을 들어보면 “담화후에 모택동은 몹시 성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택동은 류소기의 사업에 대해 불만을 품고 왜 호도거리를 막지 않는가고 질책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 잇따라 열린 북대하회의에서 모택동이 비평적이 말을 했다. “1960년이래 한쪼각의 광명도 말하지 않고 어두운 일면을 말하거나 아니면 온통 어두운 것 같이 말했다. 사상이 혼란해져서 임무가 제기된건데 혹자가 개인으로 하는 가 아니면 대부분이 개인으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듣자니 그렇게 해야만 중산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농업은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40%에다 산량을 맡긴다하자 그러면 개인과 집체사이 경쟁이 생길게 아닌가. ....개인세력은 꼭 량극분화를 일으킬 것이니 2년이 아나라 1년도 못가서 분화가 생기고 말 것이다”, “흐루쇼브도 아직 공개적으로 집체농장을 해체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동지들은 바람이 풀을 좀만 건드려도 동요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에 정신준비가 없는 것이고 혹자는 맑스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고서는 중앙이 농촌사업에 자본주의를 실시 한다고 비평하면서 등자회는 “자본주의농업전문가”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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