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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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62)
2011년 04월 04일 09시 56분  조회:5553  추천:27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62)       
    
            (1) 송경령이 여러차 중공중앙에 보낸 편지 
          
            (2) 백화가 쓴 "나와 '모택동'의 정결"  
 
송경령이 여러차 중공중앙에 보낸 편지

1994년 11월, 중앙서기처는 당사편위회(黨史編委會)에서 송경령(宋慶齡)이 건국후 32년간의 자료를 정리해낸것을 심사통과했다.
등소평의 비준지시: 진짜를 남기도 사실에 맞지 않는것은 대담히 고쳐야한다.
진운의 비준지시: 송경령은 고귀한 품질을 갖추었는바 신앙이 시종여일했다. 나라를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평화를 사랑한것이다. 량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고 량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 점을 존중해야한다.

내용제요:

송경령은 1950년 3월에 당중앙에 편지로 입당을 요구했고 1952년에 재차 모택동에게 편지로 요구를 제출한것이다.
모택동은 송경령과 말했다.
"그대는 정치상 완전한 자격을 갖추었지. 이미 혁명전쟁세월에 당의 우수한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였습니다. 이후에도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어떤일은 우리가 해내기 어려우니 그대가 하는게 적합합니다. 나는 말했던겁니다. 당의 고급간부들은 혁명에 견정한 그대를 따라배우라고말입니다. 신중국혁명에 공헌한것을 보면 그대의 작용이 리제심(李濟深)보다도 크고 심로(沈老ㅡ심균유)보다도 큰것입니다. 그런것만큼 그래도 당외에 그냥 남아있는게 좋겠습니다."

1955년 11월, 송경령은 모택동에게 편지를 썼다.
"공상업에 대한 개조를 제출하니 나는 정말 리해되지 않습니다. 공산당은 일찍이 공상계는 장기적으로 공존할것이며 공상업자의 리익은 보호해준다고 낙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놓고는 이렇게 한다면 식언이 되지 않는가? 자본가는 벌써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두려움을 갖고있으며 적잖은 이들이 후회와 원망을 품고있습니다."
이에 모택동은 서면표시를 했다.
"송부위원장은 의견을 갖고있는데 자본가를 대표해서 말을한다."

1957년에 송경령은 또한번 당중앙에 편지를 썼다.
"당중앙에서 대병대방을 호소해놓고는 왜 또 걷어들이는가? 공산당은 국민당의 8백만대군이 무섭지 않고 미제국주의가 무섭지 않다고해놓고서는 왜서 인민이 당이 령도하는 인민정부를 뒤엎을가봐 겁나하는가? 공산당은 각계인사의 비평을 과감히 접수한다고하지 않았는가. 비평하는 인사는 대부분이 나라를 사랑하고 당을 사랑하는것이다. 어떤 민주인사들은 새중국의 해방을 위하여 가정을 바치고 개인의 명리를 희생시킨것이다. 이제 2, 30살이 되는 지식분자가 어쩌면 하루새에 반당반사회주의 지식분자로 변해버리고만단말인가? 나는 이 운동을 도무지 리해할 수 없다. 두달너머 생각했지만 아직도 달통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당내외의 순순한 사람들이 공산당과 인민의 대립면에 섯다고 하다니? 그들이 그래 공산당을 뒤엎자고한단말인가?"

1958년부터 송경령은 병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인대상위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중앙에서 류소기, 주은래, 동필무를 보내여 권고해서야 송경령은 할수없이 계속참가했다.

1959년 4월, 송경령은 인대의 추천을 받아 국가부주석으로 되었다. 송경령은 두 번이나 사퇴하려고했다.
"나는 락오한 사람이길래 사상이 따라못가 이름을 걸어놓고 빛만보이는건 국가에 불리하다고봅니다."
하면서 그는 리부춘(李富春)이나 우란부(烏蘭夫)가 맡는것이 좋겠다고제의했다.
송경령을 국가부주석으로 임명하는게 좋겠다고 제의한 사람은 류소기, 동필무, 림백거, 리부춘이였는데 21명 정치위원이 토론할적에 18명이 찬성하고 3명이 반대했던것이다. 그 세사람은 모택동, 림표, 강생이였다.
그때 모택동은 이렇게 발언했다.
"송경령이 우리의 민주혁명시기에는 한길을 걸었지만 사회주의혁명시기에 와서는 그와 우리는 함께 갈 수 없게되였다. 우리의 방침로선을 찬성하지 않던데로부터 우리의 방침로선을 반대하는것이다. 그는 우리와 다른 계급이다."

"문혁"시기에 송경령은 "문혁"에 대해 도무지 리해할 수 없어 반감이 생겼거니와 공산당에 대해서 실망하였기에 모택동과 당중앙에다 선후 편지를 7통이나 썼던것이다.
1967년 8월, 1969년 11월, 1976년 6월, 송경령은 세 번이나 염세(厭世)사상이 생겼는바 편지에서나 자기를 보러 온 령도와 나눈 담화에서나 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원망하면서 말못할 고민에 쌓여있음을 드러낸것이다.
그는 7통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문화를 모른다. 소설믈 모두 정치라하면서 다가 독초라니 나는 어리뻥뻥해난다. 하루밤사이에 나와 함께 사업해온 사람들이 다 주자파, 반당집단, 야심가, 요물잡귀로 변해버렸다. 중앙에서는 나보고학습하고 류소기를 적발비판하라는데 나는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다. 류소기주석은 당중앙에서 3,40년간이나 사업해왔는데 오늘 반역자, 내부간첩이라니! 나는 믿지 않는다. 반역자고 내부간첩인 사람이면 어떻게 7년간이나 나라주석질을 했겠는가. 지금 그래 헌법이 효력이 있는가? 왜서 사람을 제마음대로 붙잡고 제마음대로 투쟁하여 죽게까지 만드는가? 당중앙에서 나와 말해보라. 이같이 무법천지로 제사람이 제 동지를 해치고 인민을 해치게 만드는건 죄행이다. 국민당과 싸워 살아난 우리의 우수한 간부들이 왜서 제 대오에 죽어야한단말인가?"

1970년 3월, 모택동은 주은래와 말했다.
"그가 오늘의 변화를 보기싫어하는 것 같으니 가히 해협건너로 갈 수 있소. 향항에 가던지 외국으로 가던지 내가 만류하지 않겠으니까."
뿐만아니라 주은래, 리선념을 시켜 이 말을 송경령에게 전달하게했다.
그 두 사람은 이렇게 전달했다.
"주석께서 그대를 매우 관심합니다. 심정이 좋지 않음을 알고 밖에 나가 기분을 바꾸면서 휴식을 하랍니다."
이에 송경령은 말했다.
"내가 살아있는게 싫어서 그러는건 아니겠지? 내 일생은 그래도 이 땅에서 마지막 몇걸음을 보낼거얘요."
그는 병을 칭탈하고 일체 명절활동과 초대모임에 참가하지 않기로 맘먹으면서 말했던것이다.
"회의에 가봤자 마음만상하니 차라리 가지않는게 낫지. 참가하기만하면 돌아와서는 병원에 가야하니. 그리고 나역시 정치상 돋보이게하곤싶지 않은거얘요."
1980년 11월, 송경령은 당중아에다 일생 마지막되는 편지를 보냈다.
"1, 국가는 진흥하고 원기를 회복해야합니다. 지금이 좋은 기회인겁니다. 2, 건국이래 정치운동이 국가와 인민에게 준 상처를 잘 총결지어야합니다. 3, 나와 국보(國父)를 한데다놓지 말것을 바랍니다. 나는 자격이 모자라니까요."

1981년 5월, 호요방과 리선념은 병원에 가서 송경령에게 정치국에서 그를 정식당원으로 받아주었음을 알리였다.
송경령은 듣고 미소지었다.
"억지는 아니겠지! 서른한해였어요. 내 가슴은 얼었어요. 이젠 인생길을 다 걸었어요."
호요방과 리선념이 그보고 또 무슨 요구가 있는가고 물으니 송경령은 두가지를 말했다.
"내가 죽으면 상해에 돌아가 안식하게 해줘요. 그리고 저축을 좀 해놓은것이 있는데 그것을 복리기금으로 해줘요."

◎ 송경령은 말을 아주잘했다. 만약 모택동이 살아서 허심하여 그같은 바른 말을 귀담아들어줄줄을 알았다면 새중국의 려정에 암흑한 시대는 생겨나지도않았을 것이다. 
◎림표의 가장 큰 죄악은 한때 개인숭배를 고취하여 중국의 수억만 백성들을 우롱하고 우매하게 만든 그것이다. 

                백화가 쓴 <<나와 모택동의 정결>>    

래일 9월 9일이니 모택동이 서거한지 32주년이 된다. 인터넷을 보면 많은 동호인들이 모택동에 대한 문장을 써내고있다. 나도 뭐든 좀 서야할게 아닌가 생각하다가 그래도 이미 썻던것이 좋을것 같아서 다시내놓아 벗들과 교류를 하고자 하니 천박한 점은 고쳐주기바란다.                 
                                              ㅡ백화

인터넷을 보면 많은 젊은이들이 모택동을 그리워하고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편면적인 것 같다. 모택동을 죽어라고 욕하는것도 있는데 기분이 언잖다. 나는 그네들과 속심을 나누고싶다.
글을 배우면서부터 나는 “모주석”이란 세글자를 익히였다. 노래도 “동방홍”을 불렀다. 셈이 들면서부터 모택동이 바로 “중국의 대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점점 “제고”되였다. 모택동사상은 사해를 뒤덮는 진리며 중국혁명사업에 유일정확한 지도사상이라 알았다. 이러한 신념은 “문화대혁명”에 이르러 전에는 있어본적이 없는 “고도”에로 올랐다. 나는 일찍이 모든 “홍위병”들과 마찬가지로 량보일간(兩報一刊)에서 질책하는 반동적이고 부패하고 몰락한, 봉건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권위와 리론을 극도로 미워하면서 그것들을 반드시 타도해야한다고 여겼고 그러면 속이 시원할것 같았다. 하였기에 나는 종래로 내가 극도로 미워하는 권위와 리론의 원본과 원문을 아예 보지도않았던것이다! 그런 “독초”는 볼수도없었다. 당과 국가에서는 “독초”로 나와 나의 동포들을 물들게하는것을 용허하지 않았던것이다. 볼수있다는것이 오직 “량보인간”의 비판문장에 응용된 “장”이나 “절”의 구절들이였는데 그러한 “악독한” 글만으로도 사람들은 일체 “반동파”를 뼈에 사무치게 무서워할 수 있었다. 하기에 “량보일간”에 실리는 문장들이 정치학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레주의서적과 <<모택동선집>>을 내놓고는 거의 유일한 교재나답지 않았던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모택동을 숭배하는 것이 신앙에까지 이르어서 “모택동사상은 당대의 가장위대한 맑스레닌주의”라면서 사해를 뒤덮으니 의심할바없다고했다. 그때는 개인숭배가 미칠지경에 이르럿다고 하면 지금의 지금의 젊은이들은 리해ㅘ지 못하는것이다.

나는 한때 나를 무척 의혹스럽게 만들었던 (번개같은 순간적이긴하지만) 한가지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것은 “문혁”때였는데 모택동이 책상앞에 앉아 글을 쓰고있는 매우 권위적인 사진이였다. 그의 오른손켠에 책이 무져있는데 사진이 작아 책이름이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후에 큰사진을 보고 발견했다. 무져있는 책들은 <<자치통감>>이였다!
나는 은연중 깜짝놀라고말았다. 아니, 왜 마레주의저작이 아닌가? 이러고나서 나는 스스로 수긍했다. 수령이 아닌가, 아무렴 우리하고야 같을수가있는가? 의례 고전들을 섭렵해야지! 지금 생각나는데 나는 그당시 모택동에 대한 숭배와 믿음이 그가 없으면 하늘이 당장 무너질것만 같이 여길지경 그한테 미련을 가졌던것이다. 나는 걱정했던것이다. 모주석이 별세하면 중국은 끝장나지 않을가!
당연한 일이다. 모택동역시 사람이니 “만세”할수 없어서 1976년에 죽고만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끝장난게 아니고 지구는 그냥돌아갔다. 해도 동쪽에서 뜨고있다. 한데 중국은 그가 죽으니 많이 변해졌다.
오늘 곰곰이 생각해보면 개혁 30년간에 가장 큰 개변이 “문혁”때비해 매우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때는 제 속심의 맘대로 털어보였다가는 끝장보기가 일쑤였다. 그때는 공산당과 모주석의 령도에 조금이라도 의문갖거나 “반대”뜻을 가지면 <<공안8조>>규정에 의해 판결받았다.
그런“죄”로 걸려 판결받는것을 내가 친히 본것만도 얼만지 모른다. 그때는 외국의 방송을 들어도 검거되여 “적의 방송을 들었다”고 처리했던것이다. 하향한 두 친구는 그렇게 되어 8년간이나 옥살이를했던것이다.

오늘와서는 그때 하지 못하게 했던 말을 해도 되는것이다. 확실히 이전만은 많이 “자유”로와진것이다. 이러한 “자유”가있길래 나는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책을 보고 바깥소식도 알게되며 그 년대에는 상상할래야 상상할수도 없었었던 “토론”도 하는것이다. 바로이러하길래 당년에 “로홍위병”이였던 나는 비로서 감히 “모택동”을 연구하는 것이다.
(나는 말하고싶다, 이것이 개혁개방의 가장 큰 “성적”이라고.)
모택동의 시사를 보면 심금을 울린다. 모택동의 서법은 룡이 날고 봉황이 춤추듯하니 드밖에 따를자가 더 있는것같지 않다. 더욱히는 모택동의 군사지휘예술은 “절세”라하겠다. 3년해방전쟁에 후방에서 전략전술을 세우고 일사천리로 내달려 승리를 걷우었으니 20세기에 그와 어깨를 겨룰만한 군사가가 어디에 더 있으랴싶다! 이같은것을 보면 대단히 감복되여 지고무상의 숭배가 생기게되는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택동이 걸은 길을 한줄에 꿰여 살펴보면 그의 사상이 실상은 손중산이나 미국의 워싱톤과 같은 자산계급민주혁명가보가 높지 못하다는것을 발견하게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 그가 앞사람을 초월한것으로만 여긴것은 그의 리론이 맑스레닌주의를 발전시킨데서 온 것이라는 것, 따라서 “주의”역시 세상에서 가장 유일정확한 방법론이고 세게관이라고 여기기만했기 때문이다. 기타의 “학설”, “리론”은 전부가 비뚤고 틀린것인줄로 알았던 것이다!
“신해혁명”후 손중산은 “림시총통”으로 추천받았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원세깨(袁世凱)가 야심이 있는데다 손중산은 무장을 갖추지 않았거니와 원세개가 “공화”를 추진하겠다고 승낙하니 그것을 믿었기에 “림시총통”자리를 내놨던것이다. 여기서 알수있는바, 손중산은 권력을 탐내지 않았던것이다. 워싱톤은 전쟁이 결속되자 모든 사람들이 집정하여 국가를 다스리라했지만 그를 완곡히 사절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며 권리를 인민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국공량당의 22년간 싸움 끝에 모택동은?

1956년, 모택동이 제기한 “백화제방, 백가쟁명”은 발단이였다. 허다한 지식분자들은 (당연히 대다수가 구시대에서 넘어온 지식분자였다) 고맙게 여기고 공산당이 국가를 온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마음에 배합하느라 호소에 향응하여 “명방”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명대방”때 곧이곧대로 당내에 존재하는 “관료주의”, “맹탕지휘”등을 비평했고 어떤 사람은 “전민의 민주선거”를 하여 누가 선거되면 누가 국가를 장악하게하자고 했다. 그것이 바로 후에는 당문건에까지 올라 가장 엄한 질책을 받은 “번갈아앉기론”인것이다.            

“문화혁명”이 일어난 후에 <<건국이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의 결의>>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던것이다.
“정풍중에 극소수의 자산계급우파분자들은 ”대명대방“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당의 신생하는 사회주의제도를 비웃으면서 진공을 발동했고 공산당의 령도를 없애려고 꿈꾸었다. 그랬으니 이런 진공을 견결히 반격하는것은 완전히 정확하고 필요한것이다.”
기실 당의 “정풍”을 방조하라고 호소한것은 공산당이였다. 사람들이 의겨늘 제기하게했는데 어떤것은 첨예할수도있는것이다. 례를 들면 돌아가며해보자는고 “고취”한것 역시 사상상의 언론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들은 폭람을 일으키자는 조직이 없는것이고 “방송국을 공점”하자는 생각도 없었던것이다. 한데 왜 대적이나만난것 처럼 그런사람들을 죽을지경에 까지 몰아넣어야 속시원해하였는가? 텔레비극 <<량검(亮劍)>>에 나오는 주인공 리운룡이 대표성적인 진속말을 한것이다.
“젠장 공산당이 천하를 얻으니 네녀석들이 올라앉자구? 뒤집어버린다!”
공산당이 올라앉아야한다. 모택동이 수령이니 그가 와 앉아야한다. 그 누구든 올라앉으려니 생각말아야한다. 그런다면 “인민이 주인이 된 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되고마니 절대가만둘 수 없다. 이로보아 왜서 국가주석마저도 <<헌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는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모택동이 처음에는 “충고”를 받아줄줄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정권을 잡는 과정일때였다. 정권을 잡고나서부터는 점점 자기와 같지 않은 의견은 받아주려하지 않았고 “개인독재작풍과 개인숭배현상이 점점 발전”했던것이다. 기실 그것은 모택동개인문제로만 볼것이 아니다. “왕위”에 올라앉은 필연적인 결과로서 당종송조(唐宗宋祖)와는 본질상 다른것이다. 내가 단언하고싶은것은 만약 다른 그 누가 그 자리에 올라앉아도 그모양을 면치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자치통감>>의 정수가 바로 수천년간 중국의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운용에 정화한것이다.
모택동은 백성을 민생고에서 구제하려했다. 그역시 민생이 어려움을 겪고있음에 가슴을 앓은것이다. 하길래 국민은 그를 감사하게 여기는것이다. 모택동역시 검약했다. 그가 림종할 때 입은 잠옷은 기운것이였다. 묻노니, 지금 이런 수령이 어디에 있는가. 모택동은 제 혈육을 여섯이나 전쟁판에서 잃었다. 그는 그야말로 전에는 있어본적이 없는 재질이 넘치고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였다고말할 수 있는것이다.
의심할것 없다.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구하기위해 제한몸을 바치 호매로운 장사가 력사에 많은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3천년간이나 봉건전제에 침습되고 물들어서 대중이거나 수령본신이거나를 막론하고 다가 “반란파”에서 “성공파”로 그 다음에는 “군림천하(君臨天下)”로 가는 력사숙명은 면치못하는것이다.

감정상에 말하면 인터넷에서 모택동을 욕하는것을 볼때면 나는 가슴아프고 견디기 어려우면서도 “반격”할 도리는 찾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집정해서부터 확실히 많은 착오와 곤난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고 그가 바란것처럼 잘된것을 찾기는 어렵다. 이는 “력사의 국한성”이였다. 나는 “회충”같이 그의 내심세계를 파고들수는 없지만 알수있는것이다.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확실히 중국에서는 오로지 자기만이 능히 인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수있다고 여긴것이고 중국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사람들이 수천년간의 봉건전제사상과 문화에 물젖고 침습되였기에, “명구, 청관(明君, 淸官)”사상이 머릿속에 뿌리박아 동요없이 그를 받든것이다. 이런바탕에 모택동은 제 전우들과 더불어 “인민이 주인”이 된다는 아주 새로운 명의로 권좌에 오른것인데 그것이 실제상에는 도처에 봉건락인이 찍힌 “사회주의공화국”이였던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모택동은 그때 정말 부패를 반대했지만 지금은 가짜라고 말한다. 그때의 관리들이 비교적 청렴한것많은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억만인민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귀한 천자인 모택동마저 홍소육(紅燒肉)을 먹는건 사치라면서 절제했다니 백성이 경앙하지 않아서야되겠는가. 아랫사람이 감히 떠벌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주은래 하면 그가 인민대회당시설공지에 갔다가 식사할 때 만투쪼각으로 접시에 붙은 채까지 모아 말끔히 먹어버리는 것을 보고는 감동을 금치못했다고한다. 그래 공동의 것을 제것으로 만들고 돈과 재산을 수탈해야만 부패한 것으로 되는가?
“대약진”을 해서 밀이 무당에 1만근산량을 낸다고 떠벌렸지만 아래에서 백성들이 굶어죽었다. 한데도 “인민공사는 좋다”고 가송하게했다. 사상으로부터 능히 “반혁명”을 파내여 청결할 수 있다면서 심지어는 “최후해결”이라했다! 이것이 그래 무엇보다 크고 더 무섭고 후과도 더 엄중한 “부패”가 아니고 뭔가?
경제전선에서 모택동과 그의 전우들은 건국하여 49년에는 “대생산”, 53년에는 “사회주의공업화”, 62년에는 “공업화개조” 등을 전개하여 하나하나 거대한 성적을 이룩하여 중국의 경제발전을 앞으로 떠밀었던것이다. 유감스러운것은 매차마다 성공한 뒤에는 하나하나 무서운 착오가 바싹따른 그것이였다! 합작호, 반우파, 팽덕회를 비판하고는 뒤를 이어 재난을 극에 이르게 한 “문화대혁명”.
모택동은 미런한가? 아니다. 모택동은 더없이 총명하다. 지어 전무후무(前無後無)라 사람이 있을지경이다. .... 그의 몸에서 생긴 착오는 시대의 착오였다!

한 개 세계가 완전히 변하는 시대에서 인구가 대단히 많은 나라에서, 국토가 상대적으로 극빈하고 문화보급이 불평형을 이루고 락후한 나라에서 “공화(共和)”의 대도리를 떠나서 “명군(明君)”, “청관(淸官)”의 통치를 세우고 태평성대하여 만민이 봉락을 누리는 “대중화(大中華)를 세우려한 것이다! 이를 건설하는 과정에 모택동은 그 지고지상(至高至上)의 묘당에 앉아서 처음에는 남의 권고와 비판을 잘 접수했으나 점차 충언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불통의 ”영명한 군주“로 되고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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