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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대표작시
2015년 01월 31일 12시 53분  조회:2496  추천:0  작성자: 죽림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

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

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

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

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

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

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주검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복 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

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행 복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발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존재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고적한 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참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은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꺽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손을 마주잡고,

눈물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

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만해 선생 연보> 

1879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 韓應俊의 차남으로 출생, 속명은 貞玉,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884 ~1897 향리에서 한학 수학  
1892 천안 전씨와 결혼  
1899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  
1904 귀향하여 향리에서 수개월간 머물다  
1905 백담사 김연곡 스님에게서 득도. 김영제 스님에 의하여 수계. 이후 이학암 스님으로부터 <기신론>, <능업경>, <원각경> 등을 사사받음  
1908 4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下關 등지를 순유하고 동경의 曹洞宗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함. 10월경 귀국  
1910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1913년 불교서관에서 간행)  
1912 불교경전 대중화의 일환으로 <불교대전>을 편찬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의 고려 대장경을 열람함  
1913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 등과 함께 불교 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불교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1914, 홍법원)  
1918 월간 교양지 <惟心>을 발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됨  
1919 1월경 최린, 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에 대해 의논함.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였으며 <공약 3장>을 추가함.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됨. 7월 10일 <조선독립의 개요> 제출  
1926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하다  
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부장에 피선됨  
1931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승려비밀결사인 卍黨의 영수로 추대됨  
1933 유숙원과 재혼. 벽산 스님, 방응모, 박광 등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尋牛莊을 짓다. 여기에서 소설 <흑풍>, <죽음>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4 6월 29일 심우장에서 이적.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다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重章이 수여되다  
1967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됨  

1973 <한용운 전집>(전 6권)이 신구문화사에서 간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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