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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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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9
2015년 02월 09일 13시 45분  조회:1977  추천:0  작성자: 죽림

 

81□나는 독을 가졌네□안정옥, 세계사시인선 60, 세계사, 1995

  소재가 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일관된 소재가 나타나면 그 소재를 통해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미지에 실어야 한다. 한 마디로, 소재를 극복하여 그것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데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재가 물고기와 낚시라는 통일된 내용에 머물러있지만, 그것이 내 말을 하는데 이용되지 못하고 나열되었다. 소재에 집착하느라 정작 내가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 소재를 통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시는 나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결국 수필로 다루었어야 할 내용이라는 뜻이다.★☆☆☆☆[4336. 11. 12.]

 

82□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박찬일, 세계사시인선 63, 세계사, 1995

  무섭다고 시에다 썼을 때 무섭다는 말이 공포를 나타내면 그건 시의 언어가 아니다. 시의 언어는 그것이 직접 지시하는 것 외에 그것이 환기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정서이기도 하고 상징이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데 이 시집에 쓰인 대부분의 시들이 다른 것을 환기하지 못하고 시인의 말을 직접 전달하는 기능으로 쓰이고 있다. 행과 연 구분이 되어있지만, 시가  지닌 그런 기능으로 작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말의 순서를 바꾼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4336. 11. 12.]

 

83□검은, 소나기떼□김상미, 세계사시인선 73, 세계사, 1997

  시들이 거의 이야기 차원에 머물러있다. 시가 특별한 장치를 갖추지 않고 이야기에 머물러 있으려면 그렇게 해도 되는 시의 커다란 틀이 다시 마련돼야 한다. 그냥 말을 해도 시가 되는 그런 장치 말이다. 그 중에서 좋은 방법은 생각을 특별한 곳에 집중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그 생각의 단련이나 집중이 그대로 시가 될 만한 빛나는 정수를 낳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들이다. 그대로 두면 시라고 하기에 어려울 만큼 집중이나 단련이 늘어져있다.★☆☆☆☆[4336. 11. 12.]

 

84□하느님의 야구장 입장권□이만식, 세계사시인선 72, 세계사, 1997

  일상을 요약하는 일은 쉽지만 그것이 시가 되는 것은 어렵다. 그 요약에 대한 성찰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일상의 작은 일에 감동하고 반응하지만, 그것이 남들이 다 느끼는 그런 것이라면 시라는 양식으로 담아봤자 아무런 울림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일기장에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이나 주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인만의 각성과 느낌이 있어야 한다.★☆☆☆☆[4336. 11. 12.]

 

85□자작나무 내 인생□정끝별, 세계사시인선 64, 세계사, 1996

  초점이 맞지 않는 환등기에 필름을 넣으면 영상 역시 뿌옇게 나타난다. 아무리 좋은 깨달음을 넣어도 나타나는 건 뿌연 환영이다. 따라서 어떻게 어떤 내용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이 초점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한 번 더 걸러내고, 그것을 어느 이미지에 맞추어서 꿰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한자도 그런 군더더기 중의 하나이다.★☆☆☆☆[4336. 11. 12.]

 

86□텅 빈 극장□김정환, 세계사시인선 57, 세계사, 1995

  시가 짧아진다고 해서 이미지나 이야기까지 짧아지지는 않는다. 이 시인은 시에서 어디까지 말을 하고 어디쯤에서 생각을 멈추어야 할지 그것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시안에 담아야 할 내용물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고, 중간 중간에서 끊어놓는다. 끊긴 내용물을 읽는 이가 연결시켜서 읽어야 하지만, 그 연결 작업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굳이 그런 작업을 할 의무를 독자에게 떠넘길 자격이 시인에게는 없다. 한자는 이미지간의 단절을 더욱 크게 만든다.★☆☆☆☆[4336. 11. 12.]

 

87□세상의 밥상에서□김은자, 세계사시인선 69, 세계사, 1999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수준과 일정한 화법을 갖추었다. 시로 말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정해졌으며 그것을 시로 나타내는 방법까지 확립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쉽게 쓰는 것 같지만, 이미지에 자신의 생각을 적당히 실어서 보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내용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시의 적절하게 동원시키고 마무리까지 잘 해낸다. 인식과 형상이 아주 자연스럽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인식의 깊이가 문제인데,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본래의 모습과 삶의 고민을 좀 더 깊이 파고든다면 정말 좋은 시가 나올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한자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4336. 11. 12.]

 

88□한 바이올린 주자의 절망□마종하, 세계사시인선 55, 세계사, 1995

  ‘두 길’ 연작은 빼어난 작품이다. 특별한 수사법을 동원하지 않았어도 적당한 긴장과 알맞은 호흡이 시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다른 시들의 수준이 들쭉날쭉이다. 시가 긴장을 잃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서 할 말만 하고 마는 그런 위험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말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말을 절약하거나, 아니면 말하는 방법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할 말이 많아지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시를 망친다. 시에서는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시에서 할 말이 아니거든 수필로 할 일이다.★★☆☆☆[4336. 11. 13.]

 

89□개 같은 날들의 기록□김신용, 세계사시인선 9, 세계사, 1990

  체험의 강도가 격렬하면 그 때문에 자제력을 잃고 과장을 일삼게 되는데, 여기서는 체험의 강도와 딱 알맞은 말들이 동원되어 형상과 인식이 정확히 맞물리고 있다. 흥분하지 않은 그 차분함이 돋보인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에서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혼자서 하고 있기에 시의 광채는 더욱 빛난다. 그러나 머지 않아 큰 벽을 만날 것이다. 파헤친 곳에 지어 올릴 것을 발견하는 일은 파헤치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그런 어려움을 예고하는 전주곡이다.★★★★☆[4336. 11. 13.]

 

90□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서림, 세계사시인선 78, 세계사, 1997

  관찰은 날카롭되 생기가 없다. 이것은 이미 주제를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 것들만 현실에서 골라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이리저리 바꾸고 색깔을 덧칠해보지만 그것이 근원으로부터 올라오는 느낌이 없고 마치 조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지식으로 시를 쓸 때오는 함정이다. 한자는 그런 덫 중의 하나이다.★★☆☆☆[4336.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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