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대하여
[올해 들어 하동에 사는 친구 집을 몇 번 오가면서, 섬진강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오지게 바라보면서 여러 상념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제각각인 듯하다. …^^ 꽃은 꽃으로 바라보면 되는 것을,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으로 고운 꽃들을 저만치 버려두고 홀로 다른 꽃들을 감상하는 것이니… ㅜ.ㅜ . 오래 전에 써 둔 글을 다시 꺼내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보낸다. 지루한 글 즐겨 읽어 보시길.^^;]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億)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주지하다시피, ‘꽃을 위한 서시'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제재로 한 많은 시편의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사물에 내제되어 있는 의미(본질)를 ‘인식'하기 위해 고뇌하는 철학적, 사색적인 성격의 작품이지요.(사실, 나는 인식론(認識論)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인식론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일진데, 이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철학적 관점이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고전적 진리론의 관점에서는 내가 아는 것이 실재와 일치할 때 나의 앎은 진리라고 봅니다. 항상 상식을 옹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있는 것에 대해서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에 대해서 없다고 말하면 그 말이 진리이다.(형이상학)' 이 말에서 우리는 인식 내용이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는 경우에 이를 진리라고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을 ‘진리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이라 합니다. 이 대응설은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진리관이지요. 이를테면 ‘눈은 희다'라는 나의 지식은 실제로 창문을 열고 내리는 눈을 확인했을 때 그 눈이 희다면, 그것은 진리인 것이지요.
그러나 고전적인 진리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실재를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응설에서는, 우리 눈앞에 있는 한 송이 꽃이 원통의 줄기와 푸른 잎과 빨간 꽃잎을 가졌다고 할 때, 우리의 시각으로 파악된 표상 또는 관념(원통형, 푸르다, 빨갛다)은 앞에 있는 대상(꽃)이 ‘사실상 지니고 있는 성질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관념과 대상의 일치 내지 대응을 확인하려면 우리는 그 꽃을 다시 보아야 하는데, 이때 우리는 그 꽃에 대한 또 하나의 관념을 받아들일 뿐, 정작 꽃 자체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 의 ‘원통형, 푸르다, 빨갛다'는 다시 보는 ‘원통형, 푸르다, 빨갛다'와 서로 다른 관념인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대상의 실재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언어적인 관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인 진리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실재를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 ‘진리 정합론자'들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지식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외의 다른 주장들의 진리성을 ‘자명한 진리와의 일치 여부'를 근거로 판단합니다. 수학이나 기하학에는 젬병인 관계로, 다른 예를 들어보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주장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런 교조주의적 태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어떤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마르크스나 레닌, 모택동 등의 권위자들의 말과 합치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판단하는 식이지요.
이러한 ‘진리 정합설(coherence theory of truth)'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사실과의 일치 여부에 진리성이 구애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정합의 기준이 되는 기성 판단을 계속 소급하여 올라간, 체계내의 최초 판단의 진리성은 정합 여부를 가려줄 더 이상의 판단을 갖지 않으므로, 정합설로 설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정합설의 이러한 한계는 결국 진리 기준의 이중성이라는 또 다른 한계를 드러내 줍니다. 왜냐하면 정합설은 최초의 상위 판단의 진리성을 보장해 줄 정합설적 기준 이외의 ‘다른 기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있습니다. 만약 서로 모순되는 최초 판단을 갖는 상이한 두 개 이상의 체계가 있고, 그 최초 판단 중 어느 것이 진리인가가 확정되지 않았을 경우, 어떤 판단은 두 체계와의 각각의 정합 여부에 따라 진리인 동시에 진리가 아니기도 하는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기존의 논리 체계와 논리적으로 정합하는 체계를 ‘상상'에 의해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과연 오직 정합성만을 진리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사실상 정합설적 진리가 진리로서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정합의 기준이 되는 체계내의 맨 위의 판단은 반드시 ‘사실 과학적 진리'로 확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최초 판단이 진리로 확정되지 않는 한, 아무리 그것에 정합된 판단이라도 그 판단들 역시 진리로 확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정합설은 어떤 판단이 참이라면 그 판단에 모순이 되는 판단은 결코 참일 수 없다는 논리학의 기본법칙 가운데 하나인 ‘모순율'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순율 자체가 정합설로 진위가 판정되지 않은 것입니다! 모순율은 사고 작용이 그 성립을 위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진리로 요청된 사고의 전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에 대한 공부를 한 지 십 수년이나 지난 오랜 일이라서, 이런 설명이 적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합론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어서, 드디어 ‘진리 실용론'이 그 세를 넓혀갑니다. ‘진리 실용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미국에서 영향력을 넓힌 실용주의의 진리설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란 용어는 퍼어스(C.S.Peirce)가 의미(意味)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면서 미국의 철학에 끌어들였는데, 이 말은 그의 친구인 제임스(W. James)에 의해 19세기말 대중강연에서 자주 사용되어 처음으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쉴러(F.C.Schiller)와 미국의 듀이(J.Dewey)도 실용주의와 유사한 논리를 주장하였는데, 우리나라 조선후기 실학파의 실사구시(實事求是)와도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실용주의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본다는 것, 잘 아실 것입니다. 실용설에서는 지식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거나 실제로 유용할 때 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고 보면, 실용주의라는 것이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실험 과학의 방법을 논리적 사고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시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험 과학의 명제는 이론적으로 아무리 문제가 없더라도 실험의 결과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즉, 실험이라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명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지요.
제임스는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하다.”라는 진술과 “그것은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이다.”라는 진술을 비교하고, 두 진술은 같은 의미라고 말합니다. 유용한 관념은 참다운 것이요, 무용한 관념은 거짓에 불과한 것이므로, 진리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것이며, 때문에 만들어짐으로써 확인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있다.(데스카)'
이 말은 진리일까요? 진리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을 해 보고, 그 결과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주장은 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념은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끼치며, 행위의 지침을 마련해 주고, 행위자에게 그가 의도하는 목표로 나아가는 수단을 제시합니다. 만약 우리의 행위에 대한 신념이 이와 같이 영향을 끼쳐 행위를 효과적으로 만든다면 우리의 신념은 옳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랑을 했더라도, 나중에 그 사랑이 비극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위의 주장은 진리가 아닙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진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때로 집안에 화를 당한 사람이 점을 보거나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고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을 종종 봅니다. 실용주의적 진리관에 따르면 점이나 굿 같은 미신도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유용하므로 진리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였다면, 그 거짓말도 유용하였으므로 진리가 됩니다. 그것 참!
이렇게 유용성이란 것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매우 주관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진리관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 됩니다. 이 입장도 정합론처럼 진리가 인간의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인식의 임무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완전히 올바른 객관적 진리'는 ‘절대적 진리'라는 명칭을 부여받습니다. 이와 반대로 ‘일정한 범위에서만 올바른 진리'를 ‘상대적 진리'라 합니다. 절대적 진리란 완전히 올바른 지식이기 때문에 장래의 과학 및 실천의 진보에 의해 번복되지 않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적 진리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간직한 채, 작년, 2004년 11월에 작고하신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로 다시 돌아 갑니다. ‘꽃을 위한 서시'는 우리의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진리, 앎)에 도달하고자 하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不可知論)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꽃'은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본질 혹은 본질적 의미(진리)로 해석됩니다. ‘나'는 그것에 접근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인식의 주체입니다. ‘나'를 ‘위험한 짐승이다'라 한 것은 사물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한 존재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일상적 행위를 통하여 ‘너(꽃)'의 참된 의미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그 대상이 되는 사물의 본질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은 허무일 수도 있고, 무(無)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나'는 사물의 참모습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본질은 흔들리는, 불안정한, 가지 끝의 꽃처럼 나의 인식에 잡히지 않고 그저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집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命名)은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행위가 있어야 가능한데, 존재의 참모습으로서의 꽃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이름도 없이 머무르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적 화자는 추구의 노력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다가가고자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처럼 인간은 거역할 수 없는 진리에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3연과 4연은 규명되지 않는 본질로 인한 슬픔과 함께,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가열찬 노력이 나타납니다.
3연의 ‘무명의 어둠'이란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세계의 상황을 간결하게 압축한 구절입니다. 우리 세계의 무질서와 혼란은 그 깊은 어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꽃보다 열매가 먼저 열리고(무화과, 김지하),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는(공자의 생활난, 김수영), 이 무저(無低)한 전도(顚倒)와 작란(作亂)의 세계는, 빛(진리)이 어둠에 묻혀있음입니다. 눈물이 젖어들듯, 젖어오는 어둠은 눈시울을 가리어, 카오스(chaos)는 ‘입을 벌리고(chainein)', ‘캄캄한 텅빈 공간'으로 내려 앉습니다.
그 속에서도 ‘나'는 알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지난 삶의 모든, 그러나 하찮은, 경험과 지식들을 동원하여 끝없이, 끝없이 추구합니다..... 이 행간은 긴 휴지(休止)를 필요로 합니다. 화자는 길고 오랜 시간동안 그 노력을 계속했을 것이고, 그 노력은 숱한 방황의 연속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느니라.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파우스트)'...... 그렇지만, 그 노력은 차츰 돌개바람으로 변하여 ‘탑(규명되지 않은 사물의 본질)'을 흔들게 되고, 탑의 내부까지 파고 들어가 돌, 어쩌면 ‘돌(사물의 본질)'에까지 스밀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돌에까지 스미면...'이 가언적(假言的) 진술임을 확인할 때, 이미 불가지(不可知)는 예정됩니다. 그래서 ‘추구의 노력'만큼은, ‘금(金)과도 같은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서둘러 선언해버립니다! 작품은 모두 끝납니다. 이로써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모두 표현한 것이지요. 마지막, 널리 회자되는 마지막 구절은, 사실 의미상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합니다. 이미 앞에서 선언한 것의 확인,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현론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물의 본질은 얼굴을 가린 신부와 같다'라는 이 은유는 과히 감동의 도가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돌에까지 스미면...'이 가언적(假言的) 진술이라는 것은, 인간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스미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진술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불가지(不可知)의 상황이며, 무지의 상태이며, 위험한 짐승의 처지입니다. 다만, 인간의 그 지난(至難)한 ‘추구의 노력'만큼은, ‘금(金)과도 같은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아픔에 위안을 얹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간절한 욕구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본질은 결코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물의 본질은 언제나 인식의 가능성 저편에 있으며, 마치 영원히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와 같이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1행으로 독립시킨 5연은, 결국 ‘미지의 상태로 남는 본질'과 화자의 안타까움이 표현된 것이지요. 이 마지막 연에 대한 김재혁(고려대) 교수의 글을 잠깐 옮겨보면,
이 시의 가장 큰 묘미는 마지막 행의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라는 구절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물을 ‘여인'으로 파악하는 릴케의 사고에다가, ‘얼굴을 가리운'이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드러난다. 이 ‘가리운' ‘얼굴'을 펼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시인 자신이 ‘금'으로 화한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적 형상화의 문제와 직결된다. (시적 변용의 문제: 릴케와 김춘수)
‘금'에 대한 생각이 나와는 사뭇 다르지만 - 위 논문은 비교문학적 측면에서 김춘수와 릴케의 작품을 고찰한 듯한데, 아시다시피 내 글은 학문적으로 책임질 일은 추호도 없는 심심파적 잡글인 관계로, 김재혁 교수의 학술논문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이 논문처럼 “시인 자신이 ‘금'으로 화한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은, 주장도, 사실은 한 학자의 개인적 견해일 뿐, 많은 평론가들의 일치된 견해가 아니라는 것, 또 일치될 수도 없다는 것, 아시죠? - ‘얼굴을 가리운'이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드러난다는 주장은 마음에, 내 마음에 아주 쏙 드네요!
아무튼, 이렇게 인식론적 관점에서 ‘꽃을 위한 서시'를 읽었을 때, 우리의 인식은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시는 추구의 ‘결과'가 아니라 추구의 ‘과정'을 표현한 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쯤에서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잘 알려진, 별로 난해하지 않은 듯싶은, 이 시는 사랑의 시로 읽히기도 합니다. 내가 사랑하게 됨으로써 ‘너'는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고,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나도 너로부터 영원히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랑의 열망을 상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인들 사이에 이 시가 회자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가 연시(戀詩)가 아니라는 것도, 역시 잘 아실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과 진실성은 시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믿는 시인은 이 작품에서 ‘꽃'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존재(存在)라는 인식을 토대로 사물을 존재의 밝음 속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데, 이런 시를 존재론적인 시라고 부릅니다. 감정이나 정서를 중시한 연시와 달리, 지성과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주지시 계열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를 짧게 검토해 봅시다. 꽃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만하고 아름다우며, 실존하는 모든 가치 있는 존재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꽃'이라고 불러주기(命名) 전에는 그는 많은 사물 중 하나로 무의미한 대상(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명명 행위(命名行爲) 이전 -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에는 그는 무(無)와 다름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즉 대상을 인식하기 전의 사물은 부재하는 존재와 마찬가지이므로 나와는 전혀 무관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즉 상대방을 인지하고 존재 이유를 긍정하고 그것에 실체를 부여했을 때, 그는 혼돈과 부재(不在)의 상태, 곧 존재의 은폐성(隱蔽性)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고서, 하나의 뚜렷한 의미 있는 존재로 나에게 다가 옵니다. 이제 ‘나'와 ‘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은 존재의 집이다. 만물은 본질에 따라 이름지으며, 시인의 사명은 성(聖)스러운 것을 이름짓는 데 있다'고 한 말을 상기시켜 주기도 합니다. 여기서 ‘꽃'은 존재의 참모습, 의미 있는 존재의 상징물로서 찬연히 부활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소망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나의 이름을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정말로 누군가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를 부재(不在)에서 이끌어 준다면 그에게로 가서 나도 ‘꽃'이 되고 싶습니다. 그 ‘무엇'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마지막 연은 ‘나'가 1인칭 복수 ‘우리'로 변하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로 그 범위를 넓혀 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냥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 의해 진정한 가치가 인식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김춘수 시인은 ‘꽃'이 지녀온 관습적인 언어의 질감을 지우고 관념화된 꽃을 통해 존재의 현현과 실존의 체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 대한 숱한 해설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 시는 결국 존재의 본질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많은 평자들이 ‘빛깔과 향기'를 존재의 본질이라고 해석하지만, 사실 ‘빛깔과 향기' 역시 또 하나의 개념일진데, 도대체 ‘빛깔'과 ‘향기'의 본질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국 은유와 상징의 세계일 뿐, 손에 잡히는 그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합니다! 나는 이 시의 행간에 묻혀 있는 무량 없는 슬픔을 슬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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