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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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실존주의 시인으로, 20세기 최고의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섬세하고 세련된 시어와 감수성으로 언어의 거장, 시인 중의 시인으로 불린다. 근대 사회의 모순, 번뇌, 고독, 불안, 죽음, 사랑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토대로 명상적, 신비적 시를 많이 썼다. 또한 유일한 장편소설인 《말테의 수기》는 현대 모더니즘 소설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20세기 세계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875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 제국령이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정식 세례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이다. 아버지 요제프 릴케는 군인 출신의 지방 철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 피아 엔츠-킨젤베르거는 오스트리아 참의회 의원을 지낸 아버지를 둔 프라하의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이었다. 릴케가 태어나기 전해에 태어난 딸이 얼마 못 살고 죽자 피아는 릴케가 여자아이이길 바랐다. 때문에 릴케에게 여자아이의 옷을 입혀 키우다가 일곱 살 때에야 처음으로 남자아이의 옷을 입혔다고 한다. 그녀는 전형적인 귀족 부인으로 허영심이 강했고, 따라서 남편이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생활이 부유하지도 않은 데 불만족스러워했다. 또한 광신적일 정도의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릴케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시간인 한밤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릴케를 '마리아의 아이'로 부를 정도였다. 9세 때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릴케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런 어머니의 태도 때문에 고독하고도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

릴케의 부모 요제프와 피아
릴케의 부모 요제프와 피아

7세 때 프라하 가톨릭 재단의 피아리스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독일인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11세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장크트푈텐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소년에게 육군학교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느낀 불안감과 좌절, 고통은 이후 릴케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유년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고등실업학교에 진학했으며, 이후 린츠의 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 반 만에 그만두었다.

18세 때 릴케는 법과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사촌누나의 소개로 만난 발레리 폰 다피트-론펠트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졌는데, 릴케가 발레리에게 시와 편지로 사랑 고백을 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발레리의 외삼촌은 체코에 유럽 상징주의를 소개한 신낭만주의 시인 율리우스 제이에르였으며, 발레리 역시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릴케는 여러 문학잡지에 시를 써서 보냈으며, 이듬해에는 발레리의 후원으로 첫 번째 시집 《삶과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20세 때 프라하 대학에 입학해 문학사, 예술사, 철학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뮌헨 대학으로 옮겨 예술사, 미학, 진화론 등을 공부하다가 베를린 대학에 들어가 수학했다. 릴케는 프라하 대학에 입학한 해부터 본격적으로 시 활동을 했으며, 그해 보헤미아의 민간 설화를 모티프로 한 두 번째 시집 《가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펴내고, 정기 간행물 〈치커리-민중에게 바치는 노래〉를 약 1년간 펴냈다.

뮌헨 대학 시절에 릴케는 인생과 작품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여인을 만난다. 14세 연상의 유부녀였던 러시아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이다. 루 살로메는 저명한 에세이스트로, 릴케는 그녀를 알기 전부터 그녀의 에세이에 감명을 받고 익명으로 수 통의 편지를 쓴 바 있었다. 그녀와 젊은 시인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며, 점차 루는 릴케에게 연인이자 어머니이며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평생 소울 메이트의 관계를 유지했다. 릴케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 '라이너'라는 독일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우아하고 유려한 루의 필체를 따라 그때까지 흘려 쓰던 필체를 고쳤다. 그녀와의 관계 덕분에 릴케의 시 세계는 더욱 완숙해졌다. 1898년에는 베를린, 이탈리아, 피렌체 등지를 여행하면서 예술 일반론 격인 《피렌체 일기》와 많은 시를 썼다. 이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한 시도였다. 또한 1899년과 1900년 두 차례 루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다녀오면서 러시아의 예술과 역사, 언어를 공부하고 러시아를 영혼의 고향으로 삼게 된다. 이때 톨스토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루와의 만남과 여행에서 얻은 영감으로 초기 대표작 《기도 시집》, 《형상 시집》 등이 탄생했고, 릴케 문학의 본격적인 궤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릴케의 정신적 지주였던 루 살로메
릴케의 정신적 지주였던 루 살로메

두 번째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후 릴케는 친구 하인리히 포겔러를 찾아 독일 북부의 화가촌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를 알게 된다. 이듬해 릴케는 클라라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외동딸 루트 릴케가 태어났다. 릴케는 클라라와의 결혼으로 그때까지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던 듯하다.

그러나 릴케의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았다. 1902년, 릴케는 로댕의 전기 《로댕론》을 쓰고자 파리로 갔고, 이후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다가 이따금씩 함께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한다. 릴케는 약 4년간 로댕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의 비서를 했는데, 이때 로댕, 세잔 등의 조형미술 작품의 영향을 받아 그때까지의 명상적이고 낭만적이던 시 쓰기에서 탈피해 '사물시'라는 새로운 창작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물시란 주관적인 감정을 읊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해석하여 언어를 통해 조형화하는 창작 기법인데, 이를 통해 존재하는 대상에 내재된 궁극적인 형태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기법으로 쓰인 시들은 후일 《신시집》으로 출간된다.

또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도 이 시기에 구상하였다. 탐미주의적 성향을 지닌 덴마크의 젊은 귀족 시인 말테가 파리의 고독한 생활을 쓴 수기 형식의 소설로, 몽타주 기법, 수기, 소설 기법 등 다양한 산문 기법이 혼합되어 있다. 단선적 줄거리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 소설에서 탈피해 다수의 주제를 평행적으로 진행시키고 있어 줄거리와 주제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이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다.

1906년, 릴케는 로댕과 갈등을 겪고 로댕의 집에서 나왔다. 그는 주로 파리에 체류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고 글을 썼다. 로마 체류 중에는 요절한 시인 볼프 그라프 폰 칼크로이트를 위한 〈진혼곡〉과 여류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를 위한 〈진혼곡〉을 썼으며, 1912년에는 두이노에 머물면서 《두이노의 비가》를 썼다. 1913년에는 루와 함께 뮌헨에서 프로이트를 만나고, 정신분석학회에 참여했다(루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실험 사진에 등장하기도 한다).

1921년, 베르너 라인하르트가 스위스 론 계곡의 뮈조트 성을 제공하여 그곳에 정착하고 작업실을 꾸며 여생을 보냈다. 이 무렵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1923년경부터는 백혈병 증세가 나타나 요양소와 뮈조트 성을 오가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시 쓰기를 계속하여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 《과수원》 등을 썼는데, 특히 《과수원》은 프랑스어로 쓴 시라는 데서 새로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발레리의 시와 산문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1926년 12월 29일,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으며, 유언에 따라 라롱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정원에서 장미를 꺾다가 장미 가시에 찔리는 바람에 패혈증에 걸려 죽었다는 시적인 일화가 있으나 이것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묘비에는 그가 직접 쓴 시가 새겨졌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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