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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가 - 마르크 샤갈
2015년 03월 21일 23시 26분  조회:3434  추천:0  작성자: 죽림

[그림읽기] 마르크 샤갈[Marc Chagal](1887 - 1985)의 그림이야기


1887.7.7 ∼ 1985.3.28. 프랑스의 화가.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출생.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 드 파리 최대의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7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미술학교에 다닌 후,

10년 파리로 나와 A.모딜리아니와 F.레제 등을 배출한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큐비즘기법을 익혔다.

11년 앙데팡당전(展)에 첫 출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화가와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1년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성공한 후 그 해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으나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잇달아 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모국에 머물면서 미술단체의 요직을 맡았다.

고향에 미술학교를 열고, 19년 모스크바의 국립유대 극장의 벽화장식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22년 베를린, 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화상(畵商) 폴라즈의 의뢰에 따라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쉬르레알리슴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

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展)에서 판화상을 받았으며,

유화 ·판화 ·벽화등 ·스테인드 글라스 조각 ·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 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 현대미술의 거장_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샤갈은

피카소나 미로 등의 거장들에 비해 뚜렷한 미술사적 보루가 없다.

그러면서도 샤갈은 20세기 인류에게 가장 풍부한

신성의 영감과 상상력의 창조성을 선물한 대예술가로 추앙 받는다.

온갖 이념과 경향들의 각축장인 지난 20세기의 미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위치에 있는 이가 바로 샤갈이다.

현재까지 어린 아이부터 노인층까지 가장 많은 애호가를 확보하고 있는 샤갈은

어떤 발명가로서의 예술가이기보다, 神 혹은 자연과 인간의 영적 매개자로서의

 예술가로 회자된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 비테프스크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 왕실미술학교와 즈반체바 미술학교를 거치면서

  화업의 토대를 일군 그는 탁월한 데생의 소유자가 된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다 자유로운 그림을 위해 러시아를 떠난 샤갈은

 베를린을 거쳐 파리에 정착한다.

41년부터 48년까지 한동안 나치를 피해 미국에 체류하기도 했지만,

그는 주로 파리를 무대로 활동을 하게 된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거대 화상으로 유명한 볼라르를 만나 인정을 받았으며,

  뉴욕에서 돌아왔을 때는 에메 매그에 의해 발탁이 된 것과,

  1950년 방스에 정착한 것이 전기가 되어 그의 그림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20세기 초 많은 경향이나 사조들과 열린 교류를 가지면서

그 장점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고

아울러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창출해내는 데서 샤갈의 천재성이 입증된다.

1차대전 후 샤갈이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는

  유럽에 아방가르드라는 전위운동이 한참이었을 때였다.

  어떤 면에서는 그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했던 작가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초월하기도 한 작가이다.

초창기 그의 작품은 반 고흐의 표현주의적 화풍에서 모종의 영감을 받고,

 아울러 큐비즘에 강한 영향을 받아 분할적인 대상의 표현이 많이 시도되곤 하였다.

상상적인 도상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의 그림을 초현실주의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의 정서가 궁극적으로 무의식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초자아의 영계에 닿아 있는 것 같은 다름을 드러내고도 있다.

20세기의 많은 미술사가들이나 비평가들이 샤갈을 논할 때 의례적으로 행하는

어떤 양식적 구분을 통해 기술하기를 포기하고 온전히

그 작품 내면으로 진입하여 기술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테프스크 - "슬프고도 즐거운 나의 도시여!"
 

VITEBSK/ 10세기, 비트바 강과 드비나 강의 합류점에 세워진 비테프스크는

가장 오래된 러시아 도시들 중 한 곳이다.

19세기 말 이 상업도시의 인구는 약 7만 명을 헤아렸다. 그 규모가 굉장히 컸던

유대인 공동체는 하시디즘 신비주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슬프고도 즐거운 나의 도시여! 어렸을 적에 난 널 유심히 관찰하곤 했었지 … .

주의에는 성당, 수도원, 가게, 조토의 벽화에 나오는 건물들처럼

소박하면서도 영원한 유대 예배당이 있었어 … ." <나의 삶>

비테프스크는 또한 랍비들과 청소부들, 바이올리니스트들, 가족,

축제, 의식을 의미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폴에 이르기까지 샤갈은 늘 자신의 고향 도시를 언급했다.

처음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멀어졌던 이 도시는 꿈의 세계에서 뒤집힌다.

그러고 나서 1914년 고향으로 돌아간 샤갈은

다시 약국과 성당, 거지들을 더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이때 그는 홀로코스트가 집어삼키게 될 동유럽의 유대인 마을을 비통한 심정으로

후손들에게 그려서 보여준다.

1920년 모스크바로 떠날 당시 샤갈은 자기가 비테프스크를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계의 은유이고

그의 정체성에 대한 강박적 추억인 이 러시아 마을은

그의 그림속에 끊임없이 다시 나타난다.

1973년 소련에 초빙된 샤갈은 자신의 탄생지에 가기를 거부했다.

"그곳에 가서 뭘 보든 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내 그림을 살리는 요소들 중

하나를 구성하는 것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난 너무나 고통스러우리라 … ."

샤갈은 아주 오래 전 "내 유일한 고향은 내 영혼 속에 있는

고향"이라고 배웠던 것이다.

 

 

 

 

 

 

도시 위에서
 

샤갈은 1914년 몇 달 예정으로 파리에서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그곳에 발이 묶이고 만다.

 

1915년 7월 25일, 샤갈은 6년 전에 만났던 벨라와 결혼한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에 불기 시작한,

러시아 제정의 차별 조처들로부터 그들을 풀어준

자유의 바람에 특히 민감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샤갈은 비테프스크로 돌아가 그곳 미술학교 교장에 임명된다.

1917년에서 1918년 사이 겨울에 그는 <산책>이라든가

<포도주잔을 든 두 사람의 초상화>처럼 신혼 시절 벨라와의

행복을 기념하는 대작들을 그린다.

샤갈은 <도시 위에서>를 두 장 그렸는데 거의 똑같다. 꼭 껴안은

두 사람이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무중력은 이 신혼부부의 행복감을 표현한다.

샤갈은 아방가르드적 경향의 작품들에서 우세하게 나타났던

상징표현들을 단순화시켜 여전히 몽상적이기는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

읽힐 수 있고 보다 '자연주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림 아래쪽의 비테프스크는 또렷이 알아볼 수가 있다.

전경이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서 멀리 보이는 경치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고

수평 구도도 강조된다.

 

더구나 연인들이 옆으로 날고 있어서 이 구도는 한층 더 두드러져 보인다.

샤갈은 집들과 지붕들의 기본적인 질량감을 강조한다.

 

그는 마치 조각을 하듯 서로 대비를 이루는 빛과 어둠을 벨라의 옷에 새겨넣었다.

 트레타코프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시 위에서>는 견고하게 구조화되고

색깔들도 더 금속성이어서 큐비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더 많이 담고 있다.

그런데 베엘레르 화랑에 걸려 있는 또 다른 그림에서는 선도 부드러워지고

질감도 더 있어 보인다.

 

지면은 따뜻한 색조가 주조를 이루는 반면 하늘을 나는 두 부부는

격리와 꿈의 색깔이라 할 수 있는 차가운 색조의 초록색과 푸른색 옷을 입고 있다.

 

이 젊은 여인이 환희의 표시로 손을 벌려 내밀고 있어서 두 사람은

한층 더 큰 반경을 그리며 비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당의 둥근 돔이 조심스럽게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긴 하지만,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종교적인 주제는 더 공상적인 주제들로 바뀌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샤갈에게 있어 사랑은 또한 성(聖)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Marc Chagal - 한 여름 밤의 꿈


 Newlyweds with Eiffel Towel in the Background. 1982-83. Oil on canvas. 61x50. Private collection. Newlyweds with Paris in the Background. 1980. Oil on canvas. 116 x 89. Private collection. Couple on a Red Background. 1983. Oil on canvas. 81 x 65.5 cm. Private collection. Artist and His Wife. 1969. Oil on canvas. 92 x 65. Private collection. Artist and His Bride. 1980. Oil on canvas. 116 x 89. Private collection. Lovers over Sant-Paul. 1970-71. Oil on canvas. 145 x 130. Private collection. Laid Table with View of Saint-Paul de Vance. 1968. Oil on canvas. 100 x 73. Private collection. Fisherman's Family. 1968. Oil on canvas. 92 x 64. Private collection. Newlyweds and Violinist. 1956. Oil on canvas. 100 x 81 . Private collection. Le Champ de Mars. 1954/55. Oil on canvas. 149/5 x 105 cm. Museum Folkwang, Essen, Germany. Midsummer Night's Dream (Songe d'une nuit d'été). 1939. Oil on canvas. 117.1 x 88.6 cm. Musée de Peinture The Three Candles. 1938-40. Oil on canvas. 127.5 x 96.5 cm. Private collection. Bride with Blue Face. 1932-1960. Oil on canvas. 100 x 81. Private collection. Equestrienne (L'écuyère). 1931. Oil on canvas. 100 x 80.8. Stedelijk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Lovers in the Lilacs. 1930. Oil on canvas. 128 x 87 cm. Private collection. "Blue" Lovers. 1914. Oil on cardboard. 49 x 44. Private collection. "Green" Lovers. Gouache, oil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48 x 45.5. Private collection. "Grey" Lovers. 1917. Oil on canvas. 69 x 49. Private collection. Wedding. 1918. Oil on canvas. 100 x 119.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Birthday. 1915. Oil on cardboard. 80.5 x 99.5 cm.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NY, USA.

 

 

 

 The Grand Parade. 1979/80 

Oil on canvas.

119 x 132 cm.

Private collection.

 

 Couple on a Red Background. 1983.

Oil on canvas.

81 x 65.5 cm.

Private collection.

 

 The Three Candles. 1938-40.

Oil on canvas.

127.5 x 96.5 cm.

Private collection.

 

 White Crucifixion. 1938.

Oil on canvas.

155 x 140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 USA.

 

The Painter: To the Moon. 1917.

Gouache and water-color on paper.

32 x 30 cm.

Private collection. 

 

 I and the Village. 1911.

Oil on canvas.

191 x 150.5 cm.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NY, USA.

 

 

 

 

작품명 : <아가 1> (Song of Songs)
크기 : 148 X 172cm (1960)
소재지 : 프랑스 니스(Nice) 국립 미술관


이 작품은 작가가 <아가>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 다섯개 중 첫 번 것이며, 이 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샤갈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살펴야겠다.

위에 언급한대로 그는 성서에 몰두하게 되면서 유대인의 좁은 삶의 테두리를 허물고 많은 친구들과의 아름다운 우정을

키우면서 작품 활동의 폭 역시 넓어지게 되자 새로운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야수파 작가인 앙리 마티스 (H. Matisse: 1869- 1954)가 방스의 도미니꼬 수도회 소속 로자리오 경당을 위한 작품을

만든 것처럼, 자기도 성당을 위한 작품을 제작키로 하고 이것을 남길 수 있는 성당을 찾던 중 같은 도시에 있던 가르멜

수도원 소속 성당으로 폐쇄된 상태에 있던 아름다운 성당을 찾아 그곳에 자기의 작품을 남기고자 결심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 위에 감상한<인간의 창조>를 위시해서<에덴 동산>,<낙원에서의 추방>,<노아의 방주>,<노아의 무지개>,

<세 명의 천사와 아브라람>,<이삭의 제헌>,<야곱의 꿈>,<천사와 씨름하는 야곱>,<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선 모세>,

<므리바의 바위를 치는 모세>,<십계명을 받는 모세>와 여기 소개하는<아가를 주제로 한 작품 5점>을 완성해서

그의 성서적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다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제동이 걸리게 된다.

즉 그곳 교구장이신 주교님께서 여기 소개하는 이 작품과 아가를 주제로 한 다른 4점이 너무 에로틱해서 성당에

전시하기는 부적당하다는 판결을 하시자, 망연자실 하던 중 예술과 문화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감각을 지녔으며

문화부 장관으로 프랑스를 명실상부한 문화 대국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한 앙드레 말로 (Andre Malraux)의

도움으로 이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단독 미술관을 짓게 되면서, 성당용으로 만든 성미술 작품들이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미술관용으로 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론적으로는 막힘이 없으면서 실재 표현에 있어선 너무 막힌 곳이 많은 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된다.

미망(迷妄)의 중생들을 인도하기 위해 항상 앞선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든 우리 교회는 역사 안에서 앞서

중생들을 인도해야 할 어떤 순간엔 그 복잡한 제도와 아무런 현실적 합리성이나 타당성도 없는 법과 전통이라는

덫에 걸려 뒷북도 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행착오를 자주 범했으며 이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외설에 대한 의혹으로 교구장님의 심려를 끼친 이 뜨거운 작품을 보자.

외설 시비는 그만두고라도 확실히 이 작품은 다른 성미술 작품과는 달리 뜨거운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솔로몬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혼례식 만남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성(性)에 대한 부정적인 염려가 대단했던 교회는 여기에서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성적인 표현의 진의(眞意)를

찾기보다 성적인 표현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교회의 가르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것을 숨기기 위해

우의적(寓意的) 해석을 해서 아가서에 나타나고 있는 신부는 교회요, 신랑은 바로 야훼 하느님으로 해석했으며

특히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1090- 1153)는 <아가서 강론: Sermones in Cantica>에서 여기에 나타나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하느님과 신자, 교회와 하느님의 관계라는 철저히 영성적인 관계임을 강조했다.

17세기 까지 이런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샤갈은 이 그림을 통해 시원하게 그 본래성, 즉 하느님이 원하신

성(性)과 사랑의 진면목을 마치 오래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문화재를 발굴해서 새롭게 단장하듯이 이 작품을 통해

산뜻하고 생기있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성서적 사랑은 연인의 사랑처럼 뜨거운 것이기에 그의 작품 역시 아무 부담이나 망설임 없이 자연스럽게

뜨거움을 표현하게 되었다.

전통 안에서 교회가 전전 긍긍하며 분리시킨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구분, 거룩한 사랑(聖)과 속된 사랑(俗)의

구분이 샤갈에게는 애초부터 큰 의미가 없을 만큼 그는 성서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에 이 작품은 성애(性愛)의

열기로 뜨거운 신혼부부 신방의 색깔처럼 온통 붉은 색으로 단장되어 있다.

다음 아가의 구절을 음미하며 이 그림을 보자.


“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 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 임의 향내, 
그지없이 싱그러운 임의 이름, 
따라 놓은 향수 같아 
아가씨들이 사랑한다오
아무렴 사랑하고 말고요.
임을 따라 달음질치고 싶어라 
나의 임금님, 
어서 임의 방으로 데려 가 주셔요.” (아가서1: 1-4)

 

과거 교회가 했던 신비적 해석, 아가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해 가졌던 사랑의 관계라는 신비적 해석에서

떠나 그는 철저히 남녀의 사랑으로 묘사했고 이것은 작가의 성서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자기의 부부생활의 체험을

통해 완성된 것이었다.

그의 결혼생활은 어느 부부도 따르지 못할 만큼 뜨거운 사랑의 연속이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벨라와의 사랑은

참으로 대단했고, 그녀가 죽었을 때 너무 상심해서 9개월간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다시 재혼하면서 이 상처를 내딛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것처럼 성애(性愛)로 표현되는 부부생활은 그의 작품 활동에

엄청난 창조적 에너지를 가져다주었기에, 그의 결혼, 사별(死別), 재혼(再婚)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사랑의 아픔과 슬픔, 회복을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성서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그가 추구하고픈 최고의 이상과 부부

생활이라는 가장 만족스러운 자기 현실이 어우러진 멋진 아름다운 아가서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다.

아가서는 여러 동물들을 통해 많은 상징적인 묘사를 하고 있는데, 가령<들판에 뛰노는 노루>,<비둘기>,

<샤론의 수선화>,<그대의 젖가슴은 새끼 사슴 한 쌍>,<그대 입술에는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괴어

있구나> 등인데 이런 표현은 작가의 인생관과 너무 어울리기에 그는 아무 부담이나 주저 없이 담대하고 시원하게,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 에로틱해서 성당에 걸기엔 좀 뭣하다는 이런 염려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 미술관이 개관된 후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대하면서, 신비적 해석으로 일관했던 교회가 주지 못했던

강렬하고 건강한 성서의 감동을 받고 있기에,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이유로든지 군덕지가 붙은 것이나,

복잡 미묘 아리숭한 것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도 시원하고 통쾌하게 사랑의 복음 선포를 하고 있다.

어리석고 부질없는 상상인가?

만일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시대의 표징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혜안과 용기가 있어 작가가 의도했던 대로,

성당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은 단순한 인간적 감동만이 아니라, 그동안 무심히 살아온, 더 나아가서

속된 것으로 여겨온 성애(性愛)로 표현되는 인간 사랑을 하느님 안에 통합된 고귀한 것으로 바라보는 감동이 훨씬

더 커서 “말로나 혀끝에 붙은 사랑이나” (요한 1서 3:18) 머릿속을 맴도는 그런 사랑이 아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마르 12: 30- 32)는 하느님 말씀의 이해에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았겠느냐는 상상을 하게 되면서,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복음 선포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제도적인 교회가

자신의 한계점 때문에 미진했던 면을 보완해 준 <살아있는 현대인의 언어로 표현된 새롭고 진실한 사랑의 복음서>,

<사랑의 제5복음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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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추억거리 몇점 2015-03-17 0 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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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작다 크다... 2015-03-12 0 1912
60 최룡관 시비를 찾아서... 2015-03-11 0 1792
59 랑만, 사실, 상징주의 2015-03-07 0 2972
58 화가 - 한락연 2015-03-05 0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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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명화가 - 달리 2015-03-04 0 2989
54 청산리대첩 기념비 2015-03-04 0 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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