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世界 색점선
처음 눈에 띄는 그림은 모나리자입니다. 모나리자만큼 비밀이 많은 그림도 드물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빈치<곳 이름>의 레오나르도 라는 뜻의 이름입니다.)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이 워낙 비밀스러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그림입니다. 자, 그럼 먼저 모나리자를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루부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의 실제 크기는 77cm x 55cm 의 크기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큰 그림이 아닙니다. 원래는 그림의 양쪽에 기둥을 설치해서 걸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17세기 초 액자로 만들기 위해서 당시 무지한 표구업자가 가로, 세로를 어느 정도 잘라 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잠시 이 작품의 이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나리자라는 이름은 영어 이름입니다 (Mona Lisa). 프랑스어로는 ‘라 조콩드’, 이태리어로는 ‘ 라 조콘다’ 입니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마돈나 (Madonna)의 준말 몬나(Monna)인데 이태리어로 부인이라는 뜻입니다. 모나(mona)는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게 옳다면 제목이 흉칙스럽습니다.
정리해보면 모나리자는 리자부인 정도가 되겠지요. 그러면 ‘ 라 조콩드’ 나 ‘라 조콘다’는 조콩드의 아내, 조콘다의 아내 정도가 됩니다.
모나라자의 작품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는 모나라자의 모델이 누구인지 아직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유력한 모델의 이름은 피렌체의 비단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디 바르톨로메 디 자노비 델 조콘다의 부인 리자 게라르다니 입니다.
당시부터 누구의 초상화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꽤 있었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혹시 모델이 여러 명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나리자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비로웠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로 모델의 건강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미소는 천식을 앓고 있었기때문이라는 사람, 매독을 앓고 있어서 수은을 약으로 복용 중이었을 거라는 사람, 스트레스로 인해 잠을 잘 때는 이를 갈았을 거라는 사람, 한쪽 근육 마비를 앓고 있었을 거라는 사람 등 참으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에는한 사람을 그렸지만 나중에는 여러 사람을 섞어서 그렸을 것이라는 가설도 등장했습니다. 1992년 컴퓨터그래픽 전문가 릴리안 슈워츠라는 사람이 모나리지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화를 컴퓨터로 합성한 결과, 두 사람의 얼굴이 거의 일치 한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모나리자의 모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신이었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아마 아래 같은 모습으로 확인했을 것입니다.
좀 무섭죠?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의 선이 참 많이 닮았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편에는 모나리자를 도둑 맞았다가 되 찾은 이야기와 모나리자가 미술의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무게에 대해서 소개를 해 보겠습니다.
= 한때 도독 맞았던 모나리자 였습니다.=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은 작품이 만들어진 당대부터 높았습니다. 모나리자는 처음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의 소유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프랑스와 1세의 궁정 화가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모나리자는 여러 작품들과 함께 욕실에 걸려 있었습니다.
당연히 습도가 높아지자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후에 덫 칠을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검은 색 옷 부분이 반짝거리는 이유가 덫 칠 때문이라고 합니다. 뒤늦게 높은 습도로 그림이 망가진다는 걸 알고 루브르 궁전으로 옮겼습니다.
얼마 후 프랑스 시민 혁명이 일어나고 왕정이 무너지자 왕의 재산은 국가의 재산이 됩니다. 좀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나폴레옹은 자기 침실에 모나리자를 걸어두고 ‘마담 리자’ 라고 부르면서 2년 정도 가지고 있다가 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18세기,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그림은 모나리자였습니다.
수 많은 문학가와 화가들이 모나리자에 대한 감탄의 말을 남겼습니다. 화가 중 장 밥티스 코로는 ‘진주의 여인’이라는 작품을 모나리자와 비슷한 구도로 그려 대 선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아래 그림입니다. 잠깐 보시면,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이 나지 않습니까?
이런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도난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태리 남자 3명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유명한 작품에 해코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유명한 작품에 유리를 씌우는 작업을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도 역시 1910년에 그 작업을 했고 아까 모나리자 앞에 있던 이태리 남자 중 한 명은 그 작업을 직접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모나리자를 훔치기로 한 계획을 세운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계획은 모나리자 복제품 여섯 개를 만든 다음 모나지라 진품을 훔치고 복제품을 진품인 것 처럼 미국과 남미에서 비싼 값에 파는 것이었습니다.
월요일은 박물관이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모나리자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고 막대한 현상금과 포상금이 걸리고 점성술사가 동원되었지만 모나리자의 행방은 찾을 수 가 없었습니다. 당시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 옆 허름한 집, 트렁크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도난범으로 몰린 유명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피카소였고 또 한 사람은 아폴리네르였습니다.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 내린다 –‘라는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쓴 시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이기 때문에 언제고 한 번 미라보 다리를 가지고 글을 써 볼 생각입니다.
어찌 되었건 나중에 두 사람의 의혹은 벗겨지지만 시간은 점차 흘러 사람들이 모나리자를 잊어 갈 때가 된 2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나리자를 훔친 도둑 중 한 명이 시간이 지나도 약속된 돈이 도착하지 않자 모나리자를 가지고 이태리로 가서 이태리 경찰에 신고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태리 사람이니까 당연히 모나리자도 이태리의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이태리로 가지고 왔다고 주장하여 죄를 피 해보고자 했고 실제로 감방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빨리 모나리자를 돌려 달라고 아우성이었고 이태리는 전국 순회 전시회를 열어서 이태리 사람들에게 모나리자를 관람할 기회를 줍니다.
처음부터 이태리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줄 생각이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만 애가 탔던거죠. 미국 전시회때 사진을 보았더니 모나리자 앞에 미군 해병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더군요. 참으로 파란만장한 모나리자 입니다.
= 모나리자의 미소을 띄게 하는 기법 =
모나리자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하기 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역사가 한, 두 명의 영웅에 의해서 움직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그런 저의 생각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율리우스 시이저가 그렇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렇습니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은 어떤 하나의 장르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부문에서 눈부신 업적을 나타냈다는 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과학자, 해부학자 등 , 어느 한 분야에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업적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 날에도 신비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유행했던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의 주요 소재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였습니다.
이제 모나리자 이야기를 정리 해 보겠습니다.
모나리자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스푸마토 (sfumato) 기법입니다. 모나리자가 오늘날까지도 신비스러움을 간직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에 스푸마토 기법이 쓰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잠깐 스푸마토 기법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스푸마토 기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처음 사용한 기법이라고 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먼 곳을 바라보면 먼 곳에 있는 사물은 색깔도 흐릿하고 선도 흐릿합니다. 물론 가까이 있는 것은 선도 선명하고 색상도 진하죠. 이 것을 그림 그릴 때 적용한 것이 스푸마토 기법입니다.
스푸마토라는 말은 ‘안개처럼 사라지다’ 라는 스푸마레 (sfumare)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푸마토 기법을 우리나라 말로는 안개 마감법 또는 공기원근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수 많은 붓 질을 통해 어두운 색부터 밝은 색으로 덧칠하면서 경계를 나타내는 선을 없애는 것입니다. 잠시 모나리자의 입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확인 된 사실이지만 아주 작은 붓으로 미소를 띈 입 부분만 30겹 이상의 붓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입술의 선이 없습니다. 다음 사진은 모나리자의 뒤 배경입니다.
역시 선을 의도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모나리자의 얼굴이 훨씬 도드라져 보입니다. 혹시 위의 그림에서 이상한 곳 2곳을 찾으셨는지요?
다시 한 번 보시죠.
첫째, 눈썹이 없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이마를 넓어 보이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한 방법이었고 합니다. 가끔 눈썹을 단 모나리자 페러디를 보게 되는데 정말 이상합니다. 눈썹이 없어서 더욱 신비로운 여자는 모나리자 뿐일겁니다. 둘째, 어깨 위의 오른쪽 배경과 왼쪽 배경의 높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왼쪽은 구불 구불 길이 보이는데 오른쪽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 나마 높이도 맞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그렸는지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더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려진 ‘성 요한’을 보시겠습니다. 기법도 기법이려니와 남성과 여성을 섞어 놓은 듯한 얼굴 역시 모나리자 만큼 신비스럽습니다. 혹시 모나리자를 다시 만나시거든 그녀처럼 웃어 주시기 바랍니다.
|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을 아시나요? 아마 세계적으로 제일 유명하고 그 미스터리를 둘러싼 논쟁과 연구가 된 그림을 말하자면 모나리자일 것입니다.
모나리자의 원본은 루브르박물관에서 두꺼운 방탄유리에 사람들의 접근도 6m만 허용되고 있습니다. 한해 약 800만 명 이상이 그 앞에, 그것도 10분을 선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위키백과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이렇게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린 모나리자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감을 주고 그 감흥도 무척 오래간다고 합니다. 모나리자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요? 아는 분들도 많으시니 간단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완성한 이후 이 그림은 보존을 위해 세정도 하고 광택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먼지도 쌓여 변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과학기술자인 “파스칼 코테”는 2004년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모나리자의 실사촬영을 허가받아 2억 4천만 화소의 고화질 멀티스펙트럼 HD카메라로 3년여에 걸쳐 모나리자의 비밀에 연구하였습니다.
먼저 눈썹 이야기를 해보죠. 아주 예전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는 줄 알았는데 500년전에는 있었답니다. 왜 지금은 볼 수 없는 걸까요. 3가지 가설이 존재하는데 흙과 기름을 섞어 미세하게 그린 눈썹이 밑바닥 물감에 스며든 것, 시간이 흐르면서 기름이 색소와 함께 투명해진 것, 속눈썹을 그릴 때 사용된 광택제를 완벽하게 닦아내지 못해 눈썹이 사라진 것 중 하나랍니다.
두번째 미소의 신비입니다. 모나리자의 눈가와 입가 등에 산화망간 성분의 얇은 막을 최대 30겹까지 입혔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난 ‘스푸마토 기법’은 여러 겹의 물감과 광택제를 덧칠해 사물의 윤곽선을 안개에 싸인 것처럼 흐릿하게 처리하여 깊이감과 그림자의 효과를 만들어내 깊이감과 온화한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더 강하고 뚜렷했으며 입 꼬리 부분을 검정색으로 처리한 ‘명암법’으로 미소가 더욱 크게 보였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원래 머리모양은 지금과 달리 쪽진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윽한 신비의 미소도 알려진 것처럼 평온한 모습만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는데 작품 속 주인공의 손 모양이 편안한 자세가 아니라 주먹을 꼭 쥐고 있다고 합니다.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자세를 그리려다 다 빈치가 마음을 바꿔 지금과 같은 그림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TIP 몇가지만 이야기하렵니다.
1. 모나리자의 25가지 비밀 -코테가 찍은 '모나리자' 적외선 분석사진, 다빈치의 발명품들.
2. 모나리자는 캠퍼스가 아니라 포퓰러 나무 화판에 그려졌고 누군가는 잘라졌다는 주장도 했지만 화판은 온전하게 남아있다고 합니다. 아마 그림의 크기가 우리 상상보다 작아서 그런 주장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크기가 어느 정도냐고요. 77×53CM 정도입니다.
3. 모나리자의 인기는 그림이 완성된 때부터 높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프랑스와 1세의 궁정 화가였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처음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의 소유였습니다. 모나리자는 여러 작품들과 함께 욕실에 걸렸는데 습도가 높아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덫 칠을 하였다고 하는데 검은 색 옷 부분이 반짝거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높은 습도로 그림이 망가진다는 걸 알고 루브르 궁전으로 옮겼는데 프랑스 혁명 후 이 그림은 국가소유가 됩니다. 좀 황당한 이야기로 나폴레옹은 침실에 모나리자를 걸어두고 ‘마담 리자’ 라고 부르면서 2년 정도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18세기, 19세기에도 유럽에서는 가장 유명한 그림은 모나리자였고 많은 화가와 작가들이 모나리자에 대한 찬사의 말을 남겼습니다. 장 밥티스 코로는 ‘진주의 여인’이라는 작품을 모나리자와 비슷한 구도로 선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아래 그림입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4. 마지막으로 모나리자의 모델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그림과 다빈치의 초상을 반반으로 하여 비교하고 자화상이라는 주장까지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유해를 발굴하여 비교하려는 발상까지 했습니다.
기록 등을 확인한 정설로는 리자 게라르디니라는 여성이랍니다. 게라르디니는 1479년 피렌체에서 출생하여 16세에 부유한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의 두번째 부인이 되어 다섯 자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모나리자가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1506년 게라르디니의 나이 24세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뒤 피렌체의 산토르솔라 수녀원에 들어가 4년동안 지내다 1542년 7월15일 사망에서 사망했고 시신은 수녀원 경내 묻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극이 숨어 있습니다. 이 수녀원은 이후 수백년 동안 담배 공장, 대학 시설로 쓰이다가 1980년대부터 이탈리아 재무경찰의 막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극은 당시 공사를 하면서 이곳에 '모나리자'의 모델이 묻혀 있는 것을 알지 못했고, 2007년 지하 주차장 공사를 하면서 무덤들의 부서진 잔해와 더불어 수녀원의 기초가 발굴됐고 이 쓰레기들은 피렌체 교외 쓰레기 매립장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30년간 리자 케라르디니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기록과 온갖 연구를 한 다빈치 전문가 쥬세페 팔란티는 게라르디니의 유해가 지금은 약 30m 높이의 풀로 덮인 언덕으로 변한 쓰레기 매립지에 파묻혔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늦게나마 피렌체 시가 이 수녀원 터에 예술센터를 짓고 그녀의 유해도 발굴할 예정이라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