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위에 나무 둥치에 가을 하늘에 바람의 흔들림에 춤추는 물줄기 위에 네 이름을 쓴다.
작은 이슬 하나에 소국 한 묶음에 풀벌레 울음에 가을비 가닥에 마른 잔디풀 위에 네 이름을 쓴다, 친구야. (신새별·아동문학가, 1969-)
+ 비 오는 날
둥지 없는 작은 새들은 이런 날 어떻게 지낼까? 나비들은, 잠자리, 풍뎅이, 쇠똥구리들은 이런 날 어떻게 지낼까? 맨드라미, 나팔꽃, 채송화...... 그리고 이름 모를 풀꽃들은 어떻게 지낼까? 그칠 줄 모르고 이렇게 하염없이 비가 오는 날에는 죽도록 사랑하다가 문득 헤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양성우·시인, 1943-)
+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박성룡·시인, 1932-2002)
+ 좋은 이름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겐 하늘이다.
우리는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새들이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겐 보금자리다.
우리는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새들이다. (엄기원·아동문학가, 1937-)
+ 해같이 달같이만 어머니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하고 불러 보면 금시로 따스해 오는 내 마음.
아버지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하고 불러 보면 "오오-" 하고 들려 오는 듯 목소리.
참말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름들.
바위도 오래 되면 깎여지는데 해같이 달같이 오랠 엄마 아빠의 이름. (이주홍·소설가이며 아동문학가, 1906-1987)
+ 하나
바다에 다다르면
한강도 바다로 낙동강도 바다로 섬진강도 바다로 압록강도 바다로 두만강도 바다로
이름을 바다로 바꾼다.
몸짓도 목소리도 바꾼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엄마 이름
친해 보이는데도 엄마들은 왜 서로 이름을 안 부를까?
앞집 아줌마는 언니라 하고 내 친구 엄마는 미나 엄마, 슈퍼마켓 아줌마는 엄마를 천사호라 부른다.
내 이름 속에 우리 집 1004호 뒤에 숨은 엄마 이름
낯선 사람이 부른다, 시원시원하게 "유은경 씨, 택배요!" (유은경·아동문학가)
+ 새 이름
나는 김치 항아리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얻은 이름이지요 김치냉장고에게 할 일을 빼앗기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앵두꽃잎이 놀러오고 햇살과 비도 들렀다 가고 할머니 발소리 언저리만 맴돌아도 무엇을 채울까 잊은 적 없지요 이가 빠지고 금이 가 감나무 밑으로 버려질 때 놀라 튀어오른 귀뚜라미를 이때다, 꿀꺽 삼켰지요 입을 크게 벌려 귀뚤귀뚤귀뚜르 나는 -노래 항아리 새 이름을 얻었지요. (조영수·아동문학가)
+ 참된 친구
나의 노트에 너의 이름을 쓴다.
'참된 친구' 이것이 너의 이름이다.
이건 내가 지은 이름이지만 내가 지은 이름만은 아니다. 너를 처음 볼 때 이 이름의 주인이 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손수건 하나를 사도 '나의 것'이라 하지 않고 '우리의 것'이라 말하며 산다.
세상에 좋은 일만 있으라 너의 활짝 핀 웃음을 보게 세상엔 아름다운 일만 있으라
'참된 친구' 이것이 너의 이름이다.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울고 싶은 일이 일어나도 마음처럼 말을 못하는 바보 마음을 알아주는 참된 친구 있으니 내 옆은 이제 허전하지 않으리
너의 깨끗한 손을 다오 너의 손에도 참된 친구라고 쓰고 싶다. 그리고 나도 참된 친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신달자·시인, 1943-)
+ 농촌 아이의 달력
1월은 유리창에 낀 성에 긁는 달 2월은 저수지 얼음장 위에 돌 던지는 달 3월은 학교 담장 밑에서 햇볕 쬐는 달 4월은 앞산 진달래꽃 따먹는 달 5월은 올챙이 뒷다리 나오는 것 지켜보는 달 6월은 아버지 종아리에 거머리가 붙는 달 7월은 매미 잡으러 감나무에 오르는 달 8월은 고추밭에 가기 싫은 달 9월은 풀숲 방아깨비 허리 통통해지는 달 10월은 감나무 밑에서 홍시 조심해야 하는 달 11월은 엄마가 장롱에서 털장갑 꺼내는 달 12월은 눈사람 만들어 놓고 발로 한 번 차 보는 달 (안도현·시인, 1961-)
+ 내가 지은 열두 달 이름
1월, 세뱃돈 받아 좋은 달 2월, 겨울이 떠나기 싫어하는 달 3월, 입학하여 설레는 달 4월, 나비하고 친구 하는 달 5월, 선물 많이 받아 좋은 달 6월, 에어컨 처음 트는 달 7월, 아이스크림 많이 먹는 달 8월, 머리가 뜨거운 달 9월, 나무가 예뻐지는 달 10월, 하늘이 파래서 운동하기 좋은 달 11월, 나뭇잎이 떨어지는 달 12월, 하얀 눈을 기다리는 달 (김진영·경남 창원 남양 초등학교 1학년, 2002년)
+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이기철·시인,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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