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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6월 21일 ~ 1938년 5월 12일[1])
한국의 시인이다. 문학평론가,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아호는 용아(龍兒).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수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 시인 김영랑과 교류하며 1930년 《시문학》을 함께 창간해 문학에 입문하였다. 1931년 《월간문학》, 1934년 《문학》을 창간하여 순수문학 계열에서 활동했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가련다"로 시작되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 등 시작품은 초기에 많이 발표했고, 이후로는 주로 극예술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해외 시와 희곡을 번역하고 평론을 발표하는 방향으로 관심을 돌렸다.
1938년 결핵으로 요절하여 자신의 작품집은 생전에 내보지 못했다. 박용철이 사망하고 1년 뒤에 《박용철전집》이 시문학사에서 간행되었다. 전집의 전체 내용 중 번역이 차지하는 부분이 절반이 넘어, 박용철의 번역 문학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괴테, 하이네, 릴케 등 독일 시인의 시를 많이 번역했다. 번역 희곡으로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입센의 《인형의 집》 등이 있다.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번역한 작품들이다.
박용철은 1930년대 문단에서 임화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으로 대표되는 경향파 리얼리즘 문학, 김기림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문학과 대립하여 순수문학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끌었다. 김영랑,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등이 박용철과 함께 순수시를 옹호하는 시문학파 시인들이다. 박용철의 시는 대체로 김영랑이나 정지용의 시에 비하면 시어가 맑지도 밝지도 못한 결함이 있지만, 그의 서정시의 밑바닥에는 사상성이나 민족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어, 그 점이 김영랑, 정지용의 시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색이라는 평가가 있다.[2]
광주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고 광주공원에는 〈떠나가는 배〉가 새겨진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사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세워진 시비>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고향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대
저녁 까마귀 가을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 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눈은 내리네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희망과 절망은
어느 해와 달에 끄을림이뇨
내 가슴에 밀려드는 밀물 밀물
둥시한 수면은 기름같이 솟아올라
두어마리 갈매기 어긋저 서로 날고
돛폭은 바람가득 먹음어
만리길 떠날 차비한다
그러나 이순간을 스치는 한쪽 구름
가슴 폭 내려앉고 깃발은 꺾어지며
험한 바위 도로 다 제 얼굴 나타내고
검정 뻘은 죽엄의 손짓조차 없다
남은 웅덩이에 파닥거리는 고기들
기다림도 없이 몸을 내던진 해초들
우연은 머리칼처럼 헝클어지도 않았거니
너는 무슨 낙시를 오히려 드리우노
희망과 절망의 두 등처기 사이를
시계추같이 건네질하는 마음씨야
시의 날랜 날개로도 따를 수 없는
걸음빠른 술레잡기야 이 어리석음이야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1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 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비인 듯한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2
밖을 내어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도 설으렷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비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렷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렷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렷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3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같이 어둠을
헤쳐나가는 너.
약한 정 뿌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아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4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머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아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 보리라.
싸늘한 이마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 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 한 즐거움이냐.
이대로 가랴마는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파란 하늘에 사라져 버리는 구름 쪽같이
조그만 열로 지금 숫더리는 피가 멈추고
가늘은 숨결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ㅡ
아, 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 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나리네.
밤
마음아 너는 더 어질어지렴아
너는 다만 헛되이
아 ㅡ 진실로 헛되지 아니하냐
남국의 어리석은 풀잎은
속임수 많은 겨울날 하로 빛에 고개를 들거니
가문 하늘에 한 조각 뜬구름을 바랐고
팔을 벌려 불타오르는 나뭇가지같이
오 ㅡ 밤길의 이상한 나그네야
산기슭 외딴집의 그물어가는 촛불로
네 희망조차 헛되이 날뀌려느냐 아 ㅡ
그 현명의 노끈으로 그 희망의 목을 잘라
걸으라 걸으라 무거운 짐 곤한 다리로
걸으라 걸으라 가도 갈 길 없는 너의 길을
걸으라 걸으라 불 꺼진 숯을 가슴에 안아
새벽 돌아옴 없는 밤을 걸으라 걸으라 걸으라
朴龍喆의 초기시
박용철의 초기시를 검토해 보면 그가 생전에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이 더욱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다. 애초부터 격조 있는 서정시를 지향한 점에서는 朴龍喆이 다른 詩文學 동인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해석에 있어서 그는 다른 동인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 준다.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떠나가는 배>, <고향> 등이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무로야 보낼겨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 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ㅅ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회살짓는다
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 <떠나가는 배> 전문
고향은 찾어 무얼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흐너진데
저녁 가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도 넷자리 바뀌었을라.
어릴 때 꿈을 엄마 무덤 우에
남겨 두고 떠도는 구름따라
멈추는듯 불려온지 여나무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하리.
하날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닢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게 앗긴
옛사랑의 생각같은 쓰린 심사여라.
─ <고향> 전문
이들 작품은 그 말씨부터가 金永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金永郞은 감정을 정서의 상태로 바꾸는 데 역점을 두면서 말을 썼다. 그리하여 그 말들은 의미 내용을 갖는 게 아니라 그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도록 쓰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朴龍喆의 詩는 그와 달라서 상당히 사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이다. 그 결과 그의 말들은 감각의 상태에 그치기보다 다소간 서술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게 되었다. 또 하나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상실감정이라든가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따지고 본다면 상실의 감정은 金永郞에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경우 상실의 느낌은 내면화되기 이전의 가벼운 감상에 그쳐 있다. 말하자면 마음 밑바닥에 닿는 내면적 깊이나 무게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朴龍喆의 경우에는 사정이 그와 다르다. 그의 우수나 상실감정 속에는 대개 思辨的 속성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범박하게 보면 이것은 호흡 영역의 확장 시도인 동시에 정신의 깊이를 수용하려는 노력에 해당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 나름의 논거가 마련된 자취도 검출된다.
넓은 의미에서 창작활동이란 제 목소리를 지니며 제 설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런데 시문학파가 발족한 뒤 그 영역은 아주 제한되어 있었다. 詩文學 동인 가운데 한 사람인 金永郞은 이미 짧은 형식 속에 해맑은 가락을 담은 詩를 발표했다. 그리고 鄭芝溶은 독특한 말씨로 선명한 심상의 詩를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감각이나 정서만으로는 朴龍喆이 새로 기를 꽂을 여지가 없었던 게 당시의 우리 시단 상황이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 나머지 이루어진 게 朴龍喆의 사변적 공간 개발 시도가 되는 셈이다. 아울러 그 말씨가 길어진 까닭도 바로 이런 데 있다. 이것은 분명히 朴龍喆이 그 나름의 설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시도에 해당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도가 시도로 끝날 수 없었던 데 있었다. 되풀이되지만 朴龍喆이 노린 것은 질적으로 정상에 속하는 서정시의 제작이었다. 그런데 그를 위해 사변적인 내용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였다. 물론 하잘 것 없는 제재나 옅은 내용을 바닥에 깐 작품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유의성을 가진다거나 철학적 깊이를 다룬 詩가 묵직하게 보일 공산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詩를 위한 여러 소인들이지 그 자체가 詩는 아닌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 근대시에 나타난 여러 사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입증된다. 가령 개항기에 六堂이나 孤舟는 즐겨 문명․개화를 노래했다. 그런 내용은 당시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우리를 긴장케 하는 제재들이었다. 또한 신경향파와 카프의 경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목적의식을 내세운 그들의 詩는 어떻든 현실에 입각한 작품의 제작을 외친 나머지 씌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개화․계몽을 노래한 詩나 대지에 발을 붙이기를 기한 프로시 가운데 좋은 詩로 손꼽힐 수 있는 것은 아주 드물었다. 朴龍喆은 우리 근대시사가 이런 단계를 거친 다음에 그의 활동을 시작한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독자에게 즐겨 읊조려지는 詩를 쓰고 싶었던 시인이다. 그런데 실제 그의 詩는 그런 목표에 넉넉히 도달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의욕과 실제의 거리를 의식한 순간, 그는 또 다른 시도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좋은 서정시 제작에 걸어버린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김경수 /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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