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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공감의 문제
이숭원(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1. 시의 원초적 형태
현재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작품을 보면 한 번 읽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고급 독자들이 선호하는 문학계간지의 경우는 난해성의 수준과 빈도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현대시의 난해성이 거론될 때마다 소통과 공감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면 독자와 소통하고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거나 시가 지켜야 할 기본사항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 문제는 간단히 답변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의 원초적 형태와 통시적 전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은 서사 양식에 속하고 시는 서정 양식에 속한다. 서사는 사건을 서술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건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 비해 서정은 감정을 드러내는 양식이기 때문에 감정표출의 내용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서 자신의 감정을 발설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의 원초적 형태는 한 순간의 감정의 표출, 일종의 가벼운 탄식이나 감탄의 어사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독자(청자)가 필요 없는 독백의 형식에서 시가 싹텄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남아 전하는 우리 쪽의 고대 시가는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公無渡河歌」 의 경우, 우리의 작품이냐 중국의 것이냐 하는 논란을 떠나서, 그 노래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서 시의 발생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조선 나루터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강가에서 배를 손질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흰 미친 사람(白首狂夫)이 술병을 들고 강으로 달려들었다. 그 뒤에 그의 아내가 울부짖으며 쫓아와 말렸으나 결국 남편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아내는 구슬픈 노래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 후 남편을 따라 물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 노래의 내용은 ‘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오. 기어이 그대는 물을 건넜네. 물에 빠져 죽어버렸으니, 그대를 어찌할거나.’로 되어 있다. 이 장면을 목격한 곽리자고는 집에 돌아와 아내인 여옥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여옥은 감격하여 공후를 끌어안고 그 노래를 불렀고 이웃의 친구에게도 노래를 전했다고 한다.
백수광부의 아내는 남편을 잃은 비탄의 심정을 스스로 노래했다. 어쩌면 그 노래는 처절한 절규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 노래를 하는 순간에는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남편을 잃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넋두리처럼 노래로 펼쳐낸 것이다. 곽리자고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 노래를 들었으며,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사건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슬픈 사연을 전해들은 여옥은 마치 자신이 백수광부의 아내가 된 듯 공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고, 그것을 이웃의 친구에게 가르첬다.
여기서 백수광부의 아내는 남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 원초적 서정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독백하듯 노래했고 곽리자고는 그것을 엿들었다. 곽리자고가 그의 아내에게 그 사연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서사적 행위를 한 것이다. 서사는 반드시 이야기를 듣는 대상이 필요한데, 여옥이 청자가 되어 곽리자고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그 사연을 듣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지어 부른 여옥은 백수광부 아내의 모습을 대신 보여준 연희자(배우)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서사나 극은 반드시 이야기를 듣거나 어떤 행동을 보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시는 그러한 대상 없이 말하는 사람 혼자만으로 존재한다. 백수광부의 아내는 저 혼자의 감성을 스스로 노래한 것이다. 이처럼 시의 원초적 형태는 어느 한 순간의 감정을 혼자서 토로하는 것이었다. 시가 문자로 정착되어 사람들에게 대량으로 정파될 때까지 그러한 시의 속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노래로 전하는 「청산별곡」의 다음 구절을 보면 한 순간의 감정을 혼자 토로하는 독백의 성격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낮은 지내왔지만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 하리오.
어디에 던지던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 돌에) 맞아서 울며 지내노라.
- 「청산별곡」 4연과 5연
4연에는 현실을 떠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온 사람이 겪게 되는 외로움이, 5연에는 사람과 격리되어 혼자 사는데도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삶의 괴로움이 표현되어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과 괴로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출되어 노래로 불려진 것이다. 이 노래를 누가 들어주건 말건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 노래를 듣고 노래를 부른 사람에게 당신의 사연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그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는 서사 양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서정 양식에 속하는 시의 경우에는, 듣는 사람이 없어도, 다시 말해서 청자(독자)에 대한 소통이나 공감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감정이 언어로 표출될 수 있는 것이다.
2. 시와 독자의 문제
모든 서정 양식이 다 청자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주술적인 고대 가요나 민요의 경우에는 청자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다. 같은 서정 양식에 속하는 다음과 같은 시조의 경우에도 분명 청자(독자)가 설정되어 있고 소통과 공감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나서 옳지곧 못하면 미소를 갓 고깔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 할꼬 어와 저 아자바 옷 없이 어찌 할꼬 머흔 일 다 일러사라 돌보고자 하노라.
- 정철 「훈민가」, 8수와 11수
이러한 유형의 시조는 단순한 서정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앞선 것이어서 소통과 공감을 창작의 전제로 삼고 있다. 이렇게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려는 의도에서 창작되는 시 양식이 비단 시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화기의 우국저항적인 시가나 일제강점기의 카프 계열의 시, 목적성을 앞세운 현대시에도 이런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가 그러하고 1980년대의 민중시 계열에도 그러한 경향의 시가 많다. 그러나 목적의식을 앞세운 문학의 경우, 정철이나 개화기 우국인사들처럼 시대가 추구하는 방향이 정해져 있을 때에는 문학작품을 통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시대 조류가 다양해질수록 문학의 목적성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시대에도 문학이 현실을 개혁하는 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던 문학운동가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문학이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학에는 그런 능력이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러한 목적성이 창작의 전제가 될 때에는 정작 그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정해진 선행의식 없이 창작의 절정을 향해 작가가 전력투구할 때 자연스럽게 그런 능력이 획득된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시는 목적성과 거의 결별하다시피하면서 개별 작품의 독자적 미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거대담론의 엄숙함보다 소수담론의 발랄함이 의미 있는 덕목으로 제시되었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독자적 미학의 추구는 환상적 일탈과 엽기적 몽상으로 강화되어 나타났다. 소위 미래파로 호칭되던 시편들은 이미지의 현란한 변주를 넘어서서 돌발적이고 비약적인 자유 연상과 엽기적 위악성이 결합되면서 기존 시에 익숙한 사람들에 의해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때 문단에 소통의 단절이라는 주제가 하나의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경향을 대변한 황병승이나 김민정의 시가 상당히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들의 시집의 판매부수가 다른 시들보다 높은데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소통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선호하는 독자층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이들의 시가 독자와의 공감에도 성공했다는 설명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물론 그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문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과정을 시어의 측면에서 설명해 볼 수도 있다. 언어 사용의 일차적인 목적은 의사 전달이다. 우리는 자기의 뜻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때 자기가 아는 지식을 남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경우가 있고 자기가 느낀 감정을 남도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을 전달하려는 경우가 있다.
시의 경우 언어 사용은 당연히 후자 쪽이다.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때 감정 자체가 모호하고 다층적인 것이므로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방향으로 언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다. 체험이나 감정의 양태가 일상적인 것과는 아주 다른 경우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시의 언어는 한정된 의미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한정된 의미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의미의 층을 거느리려 할 때 시의 애매성이 발생하고 애매성이 극대화될수록 대중과의 소통은 어려워진다. 삶의 영역이 복잡해지고 우리의 체험이 다양해질수록 정서적 반응이나 표현 양상도 복잡하고 다양해진다. 더군다나 그 체험이 가시적 현실의 일면성을 넘어 환상의 다층적 세계로 확대될 때 시의 언어와 표현은 기존의 안정된 울타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 시의 언어나 표현이 소통이나 공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3. 공감의 층위
우리 주위에는 복잡한 체험을 다층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쉽게 이해되면서 깊고 넓은 공감을 주는 시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시들도 처음부터 공감을 예상하고 창작된 것은 아니다. 시인은 고립의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펼쳐내는 데 주력한 것인데, 독자들이 그 시의 의미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시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또 어떤 시들이 소수의 전문 독자층에게 공간을 일으키는가? 구체적인 작품을 대상으로 공감의 영역이 넓은 작품에서 출발해서 공감이 제한된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공감의 층위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 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 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앖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맘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 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은 저 넘치는 울음을 받아줄 수 없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돌아오는 터미널에서 저기 앳되고 앳된 한 여인이 울고 있다
- 이홍섭, 「터미널 2」 전문 (『터미널』 , 문학동네, 2011)
이 시는 버스 터미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을 평담한 시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앳된 여인’이 ‘앳되고 앳된’‘ 곤히 잠든 아이’를 안고 운다는 설정이 가슴을 짠하게 하고 ‘누가 볼세라 기역 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는 설정도 상황의 사실성을 높여주면서 감정의 강도를 상승시킨다. ‘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는 감상적인 예감도 이 시의 공감대를 넓히는 요소가 된다. 그런 대중적 감상성이 있어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이 전파된다. ‘기역 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은/ 저 넘치는 울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하여 세상의 무정함을 내비치는 것도 감상적 공감의 폭을 넓히는 구실을 하며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돌아오는 터미널에서/저기 앳되고 앳된 여인이 울고 있다’고 한 것은 개인의 슬픔을 인간의 보편적 비애로 확대하는 구실을 하여 공감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다. 대중적 감상성과 인간사의 보편성이 결합될 때 시적 공감이 영역이 가장 넓어질 수 있음을 확인케 하는 사례다.
어머니가 들려보낸 수박을 해마다 외할머니는 툇마루 청술레 그늘에서 갈랐다
수박을 앞에 둔 외할머니의 부엌칼은 슥, 평지봉투 뜯는 도구처럼 지나갔다
수박은 외할머니의 갑골 胛骨이었다 칼이 지나가는 소리와 빛깔의 청탁
갈라진 수박을 앞에 놓고 딱 한번 물으셨다 - 에미가 한번 안 온다더냐? - 할망구가 노망이 났등갑다 어머니의 말끝이 벼랑처럼 깊었다
그 해 가을 외삼촌이 편지를 보내왔다 아버지가 안채에 들이지 않고 문간의 고비 가녘에 다시 꽂았다
집 안팍 먼지 두루 닦아내시고 마을 공동 우물가에서 걸레를 헹궈 꼬옥 비틀어 짜던 그 동작에서
숨을 거두셨다 했다 그 동작 그대로 기울어지셨다 했다
외할머니의 임종은 아영면 월산리 구지내기쪽 노을이 했다
- 장철문, 「편지」 전문 (『서정시학』, 2012, 봄호)
이 시에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청술레, 갑골, 고비, 가녘, 아영면 월산리 구지내기 등에 대한 사전적, 지리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사전을 찾아보고 알 수 있는 사실적 차원의 이해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시에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암시만 되어 있는 사항에 대한 상상적 이해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왜 직접 들르지 않고 아들을 시켜 수박만 보냈는가? 외할머니는 자식이 있는데도 왜 아영면 워란리에서 혼자 사시다가 임종도 없이 돌아가셨는가? 외삼촌의 편지를 아버지는 왜 안채에 들이지 않고 문간의 고비 가녘에 꽂아두었는가? 이러한 전후 사정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문맥의 이면을 추측해 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 정보와 상상적 추정을 통해 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데 그러한 이해의 과정이 시 읽는 재미를 안겨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의 과정이 없다고 해서 공감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전후의 문맥을 통해 우리는 할머니의 정갈하고 의연한 삶과 침묵 속에 오고가는 인정의 갈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에 제시된 독특한 시어와 상황들이 공감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요소인가 하는 점이다.
‘툇마루 청술레’라는 말은 외할머니의 삶을 효괴적으로 떠올려주는 소도구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할머니의 방 앞에는 덧붙여진 작은 툇마루가 있고 그 바깥쪽에는 청술레 나무가 있어 툇마루 쪽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의 더위를 피해 바람이 솔솔 부는 툇마루 청실배나무 그늘에서 수박을 갈랐을 것이다. 지금은 점점 사라져 가는 청실배나무를 통해 남원의 토속적 정취를 함게 드러내는 효과도 있다.
수박을 할머니의 어깨뼈로 비유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칼이 지나는 소리와/ 빛깔의 청탁’에서 연상되는 빠른 손동작의 속도감과 경쾌한 음감, 순식간에 드러나는 수박의 붉은 속살과 푸른 외형을 함게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리라.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외할머니는 ‘딱 한 번’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셨고, 그것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은 ‘벼랑처럼 깊었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한 사연을 잘 아는 아버지인지라 외삼촌의 편지를 잠시 문간 고비 가녘에 꽂아 두었을 것이다.
그 편지에 담긴 내용이 마지막 세 연에 서술된 그 내요이리라. 언제나 꼬장꼬장하시던 할머니는 평소처럼 의연하고 정갈한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으신 것이다. 이 장면에서 다시 할머니의 갑골과 송연한 손짓과 소리와 빛깔의 청탁이 떠오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정연한 짜임새 속에 한 편의 시가 구성되었고 그러한 시적 결구를 우리는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랫목에 여자 둘이다 웃는데, 서로의 등짝을 때려가면서다 30분 거리 슈퍼에 가 투게더 한 통을 사서는 아이스크림에 숟가락 3개를 꽂아올 때까지 웃는데, 서로의 허벅다리를 꼬집어가면서다 순간 나 터졌어 하며 일어서는 여자 아래 콧물인 줄 알고 문질렀을 때의 코피 같은 피다 너 아직도 하냐? 징글징글도 하다 야 한 여자가 흰 양말을 벗어 쓱쓱 방바닥을 닦으며 웃는데, 피 묻은 두 짝의 그것을 돌돌 말아가면서다 친구다
- 김민정,「민정엄마 학이엄마」 전문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문학과 지성사 2009)
‘ ~다’로 끝나는 이 시의 방관적인 어미는 인상적이다. 너저분한 것은 제쳐놓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겠다는 어투다. 이것은 배제의 어조이자 자유의 어법이다. ‘아랫목에 여자 둘이다’로 시작해서 ‘친구다’로 끝나는 단호한 화법의 울타리 안에는 허용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친군데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같은 중년의 여자끼린데 무슨 말을 감추겠는가? 친근하게 다 말해 놓는 천진한 어법이 이 시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공감의 물결을 일으킨다. 50대의 갱년기 여자들이 등짝을 때려가며 웃고, 허벅다리를 꼬집으며 웃는데, 그 즐거운 장난은 동네 슈퍼에 가 아이스크림을 사 오는 30분 동안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터진 코피 같은 피, 시인이 여성이기 때문에 정확히 묘사했다. ‘콧물인 줄 알고 문질렀을 때의 코피같은 피다.’ 오랜 동안 친구로 지냈으니 거리낄 것이 없다. 그 자리에서 ‘흰 양말을 벗어 쓱쓱’ 닦는다. 그러고는 그것도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 피 묻은 양말 두 짝을 돌돌 말아가며 웃는다. 이래야 진짜 친구라 할 수 있으리라. 대명 천지에 웃음꽃을 피우는 이 부러운 친화의 장면 앞에 덧붙일 사설은 필요 없다. 이 이상 가는 공감은 다른 시에서 본 적이 없다. 이런 시로 한 묶음의 시집을 엮어내니 많은 독자들이 달려들 수밖에 없다.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었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사가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받고 있는가 알기나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 야 야 됐어’ 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을 왜 차려주나
그런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 황병승,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전문 (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 지성사, 2007 )
김민정의 시보다는 대상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약하고 좀 더 드라이한, 그만큼 빈정대는 어조가 전면에 나서 있는, 이 시는 우리 삶의 실상을 리얼하게 잘 드러낸다. 젊은 부부의 싸움소리가 크다. 싸움의 횟수도 많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것 같다. 그렇게 싸움을 하면서도 붙어사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싸우면서도 한 가족으로 지내는 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집을 늘리려 한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시인은 정확히 파악했다. 그렇게 싸움을 벌이면서도 그들이 싫어하는 상대는 한 번도 집안에 들인 적이 없다. 아군과 적군을 명확히 판별하는 선천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생을 조금 더 산 중년 부부들은 싸우면서 정이 드는 거라고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듯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위로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해와 위로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저마다 자기의 울타리에 갇혀 자기 재산과 식량에 집착하여 하루하루를 살고, 그렇게 늙어갈 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저마다 춤추는 사람들이다. 어찌 언니뿐이겠는가? 모두들 시류에 맞추어 그렇게 춤추며 늙어갈 수밖에.
이렇게 해석하면 이 시는 삶의 실상을 제법 리얼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시구 사이에 감추어진 내용만 재구해 내면 어려울 것이 없는 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시다. 이 공감의 요소와 감추어진 것을 찾아 읽는 재미 때문에 다수의 독자들을 끌어들여 현제 10쇄를 돌파했다.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자면 자신이 받아들인 서적과 영화와 음악의 단편들을 조악하게 엮어놓은 황병승의 시보다 진실한 체험을 솔직하게 표현한 김민정의 시가 더 윗길에 놓이지만, 『여장남자 시코쿠』 로 알려진 황병승이란 이름이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물론 김민정과 황병승의 시집에는 이보다 어려운 시도 많다. 그러나 그 시들이 소통 불가해한 작품은 아니다. 조금 더 정성을 기울여서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동원하여 읽으면, 닫혀 보이던 문을 열어주는 작품들이다. 시인들이 공감의 문턱을 높이고 그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들어 놓은 거은 자신의 체험과 감정이 예사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특별한, 기묘하고 애매한 체험과 감정을 표현하려 할 때는 그만큼 일상의 어법에서 멀어지게 된다.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은 긴밀하게 결합되는 법이기에 복잡 미묘한 체험과 감정이 단순하게 표현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소통과 공감을 내세워 쉽게 쓰라고 주문하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쓸 수 밖에 없는 필연적 동인과 근거가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들의 시를 이해하고 싶다면 독자쪽에서 지성과 감성을 넓히는 수밖에 없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 젖과 좆이 공평하게 공존하는 세계’, ‘두 짝의 젖통과 두 쪽의 불알이 나란히 누워 있는 세계’(김민정, 젖이라는 이름의 좆」)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sick fuck sick fuck 하고 돌아가는 회전목마’(황병승,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에 동승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그럴 마음이 없다면, 굳이 소통이나 공감을 거론하지 말고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시에 다가가 마음을 터놓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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