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하나되는 자유” 장자(莊子)
‘세상을 다르게 보기’
철학은 우리에게 돈 버는 기술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거래를 훌륭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철학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유용한 학문이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 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좁은 관심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거절당하면 삶의 실패자가 된 것처럼 실망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삶의 의욕을 잃을 정도로 좌절한다. 그러나 집착에서 벗어나 좀더 멀리 넓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본다면 지금까지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긴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사실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철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세상을 자신의 욕심과 관심에 맞추어 너무 좁게 바라보고 있지 않는지 묻는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문제는 없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보다 정확하고 바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그리고 이에 따라 제대로 된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지시해 주는 것이다.
철학의 유용함을 이렇듯 ‘다르게 보기’에서 찾는다면 장자만큼 우리에게 유용한 사상가는 없다. 장자는 세속적인 야망과 출세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진정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자신만의 우물에서 기어 나와 보다 높고 멀리 올라가,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진정 행복한 삶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 이런 점에서 장자의 철학은 우리의 삶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타락해 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정신적 백신’이라고 할 만하다.
“어찌 메추라기가 대붕(大鵬)의 뜻을 알리오.”
장자(莊子:B.C.369?~286?)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고대 중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믿을 만한 자료라고 하는 사마천(司馬遷)의 ꡔ사기(史記)ꡕ에서조차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다.’ 수준의 간단한 기록만이 나올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장자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그 자신과 후계자들이 쓴 ꡔ장자ꡕ라는 책을 통해 재구성해 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중국 산둥성(山東省)과 허난성(河南省) 중간에 위치했던 작은 국가인 송나라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몽현(蒙縣)이라는 동네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이 곳은 산 좋고 물 좋은 둘러싸인 시골 마을이었던 듯 싶다. 삭막한 도시의 아파트 숲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보다는 푸근한 자연과 벗하며 생활하는 시골 아이들이 더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양자강 이남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자라고 생활했던 장자는 사람들 사이의 짜증나는 일상에 매이지 않고 모든 일을 넓고 크게 생각할 수 있는 감수성과 포용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런 그의 성격은 "장자"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대붕(大鵬)이야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북쪽 깊은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다. 이 물고기는 매우 커서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그 새는 등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크다...이 새가 한번 기운을 모아 남쪽 깊은 바다로 날아가면, 파도가 일어 삼천리 밖까지 퍼지며...여섯 달 동안 구만리를 날고 나서야 비로소 내려와 쉰다
...이런 대붕을 보고 메추라기가 밑에서 비웃는다. ‘저 새는 저렇게 날아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는 한껏 뛰어올라 봐야 곧 내려앉고 말아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갈 뿐인데, 도대체 대붕은 (무엇 하러 쓸데없이) 저렇듯 높이 날아올라 멀리 가려고 하는 것일까?...“
거대한 스케일의 ‘중국식 허풍’이 느껴지는 이 우화(寓話)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메추라기가 일상에 소소한 문제들을 고민하느라 넓고 크게 세상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라면 붕은 곧 장자라고 할 수 있다. 높고 넓은 정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번잡한 일들이 모두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법이다. 반대로, 일상인들의 눈에 이런 ‘도사(道師)’같은 이들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물정 모르고 어리숙하여 속 터지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일뿐이다.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삶이란 자연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은 주어진 모습 그대로 그냥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이를 장자는 ‘도(道)’라고 한다.) 우리 삶은 자연 전체로 보았을 때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사탕을 놓고 벌이는 아이들끼리의 신경전은 어른의 눈으로 볼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들인 것처럼, 돈과 명성을 얻으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대자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모두 쓸데없는 고민과 고통만 낳는 무모한 노력들일 수 있다. 따라서, 장자는 무엇을 억지로 이루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자연에 따라 순리대로 살아가는 살아가라고 주장한다. 그의 삶은 이러한 철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장자의 공식적인 경력은 칠원(漆園)에서 말단 관리를 지낸 것밖에 없다. 그러나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는 매우 공부를 많이 하고 박식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중국 대륙이 수 십 개로 쪼개져서 제후(諸侯)들은 저마다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던 전국시대(戰國時代), 각 나라들은 좋은 인재를 끌어 모으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런 ‘스카웃 경쟁’ 속에서 장자같이 유능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나 장자는 세속에는 뜻이 없는 사람, 초(楚)나라 왕이 ‘최고 연봉’에다가 재상(宰相) 자리를 제안했을 때에도 “나는 제사 때 제물이 되기 위해 잘 대접받으며 비단 옷을 입은 소가 되기보다는 비쩍 말랐더라도 자유로이 들판을 노니는 소가 되겠다”라는 한 마디로 거절해 버린다.
그는 요새 식으로 말한다면, 비판적 지식인이라 할 만하다. 그는 주변에서 주는 모욕을 능숙한 언변으로 잠재우는 비웃기의 천재였다. 한번은, 짚신 짜기 등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장자에게 양식이 떨어져서 어떤 귀족에서 빌리러 간 적이 있었다. 평소 냉소적인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 귀족에게는 장자를 골탕먹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셈이다. 그래서 귀족은 당장 오늘 먹은 양식이 급한 장자에게 “당연히 빌려드리지만, 며칠 후 지방에서 세금이 들어오니 그 때 삼 백 냥을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은근히 약을 올렸다. 그러자 장자는 태연하게 다음과 같이 맞받아 친다.
“...내가 오다가 보니, 차바퀴에 패인 길가 웅덩이 속에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나를 부르고 있었소...‘나는 동해의 수족(水族)인데, 목이 말라 그러니 물 조금 갖다 주시지 않겠소?’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좋소, 내가 지금 오월(吳越) 임금을 설득하여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라고 했더니, 글쎄 이 미꾸라지가 화를 내며, ‘나는 지금 물 한 모금이 없어 말라죽을 지경인데, 당신 말대로라면 바다를 통째로 가져온다고 해도 나는 이미 건어물 시장에서 몸매를 자랑하고 있을 꺼요.’라고 짜증을 부리더군..."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놀리려 했던 귀족의 당황한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게다가 그가 남긴 수많은 비웃음 뒤에는 날카로운 현실 분석과 비판이 숨어 있었다. 장자가 비록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백수처럼 지내는 그를 주변 사람들이 마냥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한번은 그의 친구 혜시(惠施)가 진(秦)나라에서 마차를 100대나 얻어왔다. 친구가 우쭐해서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그와 비교해서 할 일 없이 지내는 장자를 비난하자,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소문에 듣자니 진나라 왕이 등창이 났다며? 곪은 곳을 째서 치료해 주면 마차 1대, 치질을 혀로 빨아주면 5대, 많이 빨면 빨수록 마차를 더 많이 준다고 하더군. 자네는 얼마나 열심히 빨았기에 마차를 100대나 얻을 수 있었겠는가? 잘했군, 어서 가보게...”
이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혜시를 비웃으며 흩어져 버렸다. 장자는 이 말을 통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사회적 출세를 이루기 위해서는 온갖 추잡하고 비열한 행동들을 해야 했음을 넌지시 암시했던 것이다.
또, 이런 적도 있다. 친구 혜시가 양(梁) 나라 재상을 지낼 때 일이다. 세상을 떠돌며 여행하던 장자가 출세한 친구가 보고 싶어 양 나라를 방문하자, 혜시에게 아부하고 싶었던 부하 관리가 장자가 자신의 뛰어난 학식으로 친구의 자리를 뺐으러 양나라로 넘어온 것이라고 거짓으로 고자질을 하였다. 놀란 혜시는 사람을 풀어 급히 장자를 잡아들였다. 기가 막힌 장자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 원추라는 새를 아는가? 이 새는 남해에서 북해로 날아가는 그 긴 여행길 중에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약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지. 그런데 원추가 유유히 날아갈 때, 마침 땅 위에 올빼미 한 마리가 있었네. 올빼미는 썩은 쥐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창공을 날아가는 원추가 자기 고기를 나꿔채는 줄 알고 고개를 젖히고 사납게 ‘꺼억’ 하고 소리를 질렀다네. 자네도 지금 나에게 ‘꺼억 꺼억’ 하고 있는 겐가? ”
이 이야기 속에서 장자는 인위적인 통치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다. 다스리는 이들은 사람들과 사회를 도덕적이고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통제와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혼란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들은 썩은 쥐를 차지하려는 올빼미들처럼 통치를 통해 백성을 착취하고 자신들의 배만 불렸을 뿐이다.
모든 것은 제각기 타고난 본성이 있다. 자연이 준 천성대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면 모든 것은 평화롭게 도리에 맞게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도덕과 정의라는 잣대에 따라 모든 것들을 인위적으로 맞추려 한다. 그 결과 원래의 본성은 흐려지고 억압과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학의 다리가 길고 오리 다리가 짧다고 해서 굳이 이 둘의 길이를 똑 같이 맞출 필요는 없다. 갯벌 속에서 먹이를 찾는 학은 진흙에 빠지지 않는 긴 다리가 필요하고 얕은 물위를 헤엄치면서 먹이를 구하는 오리에게는 짧은 다리가 어울린다. 이와 같이 대자연, 즉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는 더 나은 것도 더 못한 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이에게는 각자에게 알 맞는 천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고 어떤 것을 옳고 좋은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은 그르고 나쁜 것으로 여겨서 다른 이들에게 자기들의 본성에 맞지 않는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을 버리고 자연에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차별하지 않는 정신의 자유’에 도달할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세상의 모든 것을 화해시킨다’는 뜻의 유명한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이다.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
모든 일을 자연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본 장자에게는 죽음조차도 두려워 할 것이 못 되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다. 죽음이란 일시적으로 있었을 뿐인 ‘내’가 사라져서 다시 영원히 진행되고 있는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장자는 자신의 부인이 죽었을 때에조차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항아리를 두드리며 즐거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기막혀 하는 절친한 친구 혜시에게 장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담담하게 말한다.
“...집사람이 막 죽었을 때는 사실 나도 슬펐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더군. 집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형체도 없었다가 어떻게 하여 모습을 갖추어 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라네. 그러다 때가 되어 시체가 되었고, 그나마도 이제 세월이 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겠지. 결국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이게 자연의 이치인데 그것을 슬퍼하고 저주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이렇듯 우리의 생명도 돌고 도는 것일세...이런 생각이 미치니 내가 방금 통곡을 하고 운 것이 우스워 지더군. 그래서 웃음 나온 김에 노래 한 곡 뽑고 있었던 것이네...”
이렇게 세상을 초월하여 그 자신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버린 경지를 장자는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 한다. 물론 이런 경지는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자는 우리에게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이라는 수행 방법을 제시한다. 심재란 ‘마음을 비우는 것’을 말하며, 좌망이란 ‘모든 존재를 잊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수행을 통해 이제 높은 경지에 다다른 사람, 즉 ‘지인(至人)’에게는 세상의 어떤 슬픔과 기쁨도 담담하게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도 명성도 공적도 다 필요 없다.’ 절대적인 충만과 행복 속에서 그저 세상을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고 있을 뿐(소요유: 逍遙遊)’이다.
“장자라는 독(毒)?”
장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층보다는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에게서 더 환영과 사랑을 받았다. 장자의 사상은 원하는 대로 세상일이 풀리지 않아 불만에 차 있는 좌절한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는 철학이다. 자신이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모든 것들, 자신을 실패자라고 비웃으며 조롱하는 모든 비난들이 자연,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한갓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이들은 얼마나 큰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장자의 사상은 ‘가난한 이들의 아편’으로 비난을 받아왔다. 부조리하고 어두운 현실의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하고 벗어나게 하기는커녕, 잊어버리고 도피하고 만듦으로써 사회 발전을 더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물론, 장자 철학에 이러한 현실 도피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전문화되어 감에 따라 길고 넓은 안목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일밖에는 바라볼 수 없게 된 현대인들에게 있어 장자는 오히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진정한 참여’를 일깨우는 철학자이다. 장자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우물에서 벗어나 잡다한 일상사에서 멀리 떨어져서, 높이 날아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는 대붕(大鵬)처럼 전체적으로 삶을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너무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빠른 사회 발전에 쫓겨 조급해진 나머지 가까운 장래만을 바라보고 사는 ‘정신적 근시’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장자는 통크고 넓게 생각하여 진정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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