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시’는 ‘신시(新詩)’라는 명칭과 함께 통용되어왔으며, 다 같이 그 전대의 고시가(古詩歌)나 애국가 유형(愛國歌類型), 개화가사(開化歌辭) 및 창가(唱歌)에 대한 새로움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신시가(新詩歌) 또는 신체시가(新體詩歌)라고도 불린다. 1908년 11월 ≪소년 少年≫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崔南善)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기점으로, 1919년 ≪창조 創造≫ 창간호에 실린 주요한(朱耀翰)의 <불노리> 이전의 ≪학지광 學之光≫·≪청춘 靑春≫·≪태서문예신보 泰西文藝新報≫ 등의 잡지나 그밖에 발표된 이광수(李光洙)·현상윤(玄相允)·최승구(崔承九)·김여제(金輿濟)·김억(金億)·황석우(黃錫禹) 등의 초기 시들이 ‘신체시’ 또는 ‘신시’의 범주에 든다 하겠다.
신체시라는 용어는 일본의 ≪신체시초 新體詩抄≫(메이지 15)에서 메이지시가(明治詩歌)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용어를 그대로 차용(借用)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조격수의(調格隨意), 즉 ‘어수(語數)와 구수(句數)와 제목은 수의(隨意)’라는 장르 개념을 의식한 ≪소년≫지의 ‘신체시가대모집(新體詩歌大募集)’ 광고와 ≪청춘≫지의 ‘현상문예모집’ 광고에서 ‘신체시가’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신시’라는 용어는 최남선이 <구작삼편 舊作三篇>(소년, 1909.4.)의 창작 동기를 밝힌 후기(後記)에서 ‘신시의 형식을 시험하던 시초’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두 용어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는바, 일설은 일본의 신체시와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신시’로 하자는 것이고, 또 다른 이견(異見)은 신시라는 범칭(汎稱)보다는 장르 의식이 바탕이 되어 있는 ‘신체시’라는 용어가 보다 적합하다는 것이다.
신체시의 기점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잡는 것이 통설이다. 여기에 몇 가지 이설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아직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인 이설들로는 우선 조지훈(趙芝薰)의 경우에, <구작삼편>이 실린 ≪소년≫의 ‘후기’에 <구작삼편>이 1907년의 작품이라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최초의 신체시로 <구작삼편>을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바이런(Byron,G.G.)의 <대양 The Ocean> 사이의 영향 관계를 탐색하여 그 유사성의 추출을 근거로 이 작품을 최초의 신체시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즉, 최남선 스스로가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자신의 창작시라고 자처한 적도 없으며, ‘신체시’나 ‘신시’라고 명명한 적도 없고, 다만 권두시로 제시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대양>의 번안시(飜案詩)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신체시의 기점을 1909년 4월호에 실린 <구작삼편>과 <두고>에 두기도 한다. 신체시는 근대 정신의 소산으로 전통과 인습을 타파하고 서구 문화를 수용하려는 근대화운동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전통시가와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을 바탕으로 한다.
이 때에 이질적인 요소라 함은 형태적인 면에서는 정형적인 율문성에서 일탈한 산문성을 뜻한다. 한 마디로 자유율화한 산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시 이전까지의 고시가·애국가 유형·창가 등이 가창을 전제로 한 율조라면, 신체시는 산문화한 자유시(自由詩)로 이행되는 과도기적인 시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애국가 유형과 개화가사가 3·4조, 4·4조의 음수율을 지키고 있고, 창가가 각 행간의 음수율을 7·5, 8·5, 6·5조로 일치시키고 있는 데 비해서, 초기의 신체시는 분련체(分聯體)로서 각 연 대응행에서만 음수율의 일치를 보인다.
신체시가 고시가의 율문적인 정형성에서 벗어나 ‘새로움’의 자유율화한 시가 형태인 산문적인 속성으로 변하는 과정은 근대시사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물론 이 경우의 신체시의 산문성은 ‘근대(近代)’라는 시대적 특수성에 비추어볼 때 그렇다는 것이며, 실제로 그 산문성의 한계는 매우 모호하다.
엄밀한 의미로 볼 때 <해에게서 소년에게>나 <구작삼편> 등 일련의 신체시들이 지닌 산문성은 극히 불안정하며, 창가의 율문성을 무의식적으로 답습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하여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산문성의 이면에는 부분적으로 애국가 유형이나 창가의 율격(律格)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구작삼편>에서도 ‘그러나’와 ‘우리는’ 등의 삽입구를 제외하면 7·5조라는 창가의 음수율과 일치한다. 또한 이들 시의 분절법이나 후렴성도 거의 ‘창가적인 정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창가의 율문성과 자유시의 산문성의 과도기적인 혼합 양상은 신체시의 대표적인 형태적 특성으로, 조연현(趙演鉉)의 “엄격한 율문이나 정형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자유가 너무 강하며, 완전한 산문으로 보기에는 율문적인 정형성이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채 있다.”는 지적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율문적이고 반산문적인 또는 이들 양자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신체시는 그 형태에서만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정한모(鄭漢模)는 최남선이 장르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여 “시의식에 선행하는 민족의식이나 사회의식으로 말미암아 모처럼 시도된 형태적인 ‘새로움’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시 자체가 생명으로 삼아야 할 시정신(poesie)의 무자각 상태야말로 신체시가 근대시로 발전함에 있어서 그 형태면에서 보다 큰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남선의 신체시는 자아의 각성이나 탐구를 지향하기에 앞서 작자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에만 역점을 두고 있다.
각 연 대응행에서 음수의 일치를 꾀하고 같은 연의 시행간에서는 음수의 변화를 보이는 신체시로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구작삼편>이 있다. 이외에도 최남선의 <신대한소년 新大韓少年>·<두고>가 있으며, 이광수의 <말듣거라>와 현상윤의 <웅커리로서> 등이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각 연 1·7행의 반복구(反復句)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튜르릉, 콱, 7행)를 제외한 나머지 행에서는 각 행간의 음수가 완전히 일치된 것은 아니지만 2·4·6행은 3·3·5의 11음수로 이루어져 있고, 3·5행에서 각 행연간의 규칙적인 율격에서 몇 군데 변조를 보일 뿐이다.
이러한 각 행과 연간의 음수율은 <구작삼편>·<신대한소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두고>는 총 2연으로 외견상 그 정형률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시인 듯하지만, 면밀히 검토해보면 각 연 대응행의 음수율이 보다 철저히 지켜져 있다.
그러나 각 행과 연간의 동음(同音)이나 유음(類音)의 배치법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그 시적 형상력도 뛰어나 최남선의 초기 시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남선의 초기 시가 근대시에 이르는 한 과정으로서 서구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면, 이광수의 초기 시는 그 한 측면의 변모를 시도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최남선이 거의 외형적인 음수율에만 치우쳐 직설적인 토로에 머물렀다면, 이광수는 음수율의 변화뿐만 아니라 대상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에 기법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말듣거라>에서도 ‘님’의 이미지는 역사의식이 보다 상징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현상윤의 <웅커리로서>도 신체시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러한 감정이 전혀 겉으로 표출되지 않은 채, 내적인 갈등으로 심화되어 형상화된 점이 특색이다.
요컨대, 현상윤에 이르러 시적 기교가 최남선이나 이광수에 비하여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전개되어갔다고 할 수 있으며, 1915년을 전후하여 김억·최승구·김여제·돌샘(石泉) 등에 이르면 자유시의 유형에 훨씬 가까운 산문시형이 시도되고 있다.
또한 개아(個我)의 서정성에다 발상법을 두고 있어 근대시에 이르는 전환기에 중요한 시적 변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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