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06월 30일 08시 08분 ]
이란 인도 태국에서 찾아낸 한국어의 흔적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10 여년 전 UN에 근무하면서 짬이 날 때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곳의 언어자료를 비롯해 민속, 음악, 역사 및 고고학 자료, 설화 등을 수집해왔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외부에서 확인해보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한국인으로서의 나를 존재케 한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한반도의 주도 세력이 북방 출신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그 북방 어딘가에 지금도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며 말도 비슷하게 구사할 것이었다.
나는 특히 언어학적 측면에서 우리 말과 비슷한 언어를 추적하는 일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우리는 한반도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 그러니까 한국인인 나를 존재케 한 이 민족의 원류가 북방에서 남하한 알타이어족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당연히 알타이어족의 주류를 이루는 몽골, 터키 그리고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언어학적으로 우리 민족과 한 뿌리에서 태어난 형제들일 것이다.
우리말과 너무나도 다른 알타이어
그래서 필자는 먼저 그들과 우리의 관계를 확인해보기 위해 한국어와 알타이어의 유사성, 특히 두 언어의 기본 어휘(원시 어휘)를 비교 조사해보았다. 이 조사는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까마득한 옛날 옛적의 사람들도 사용했음직한 원시 어휘를 주로 비교 대상으로 선택했다.
언어학자들은 지구상에 사는 어느 부족이나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기본적인 낱말(하늘, 해, 달, 나, 너, 꽃 등)이 있으며 이 낱말은 270개 가량 된다고 한다. 인류학에서는 이 기본 낱말들을 일컬어 ‘스와디시 차트(Swardish Chart)’ 라고 부르는데, 이 스와디시 차트에 속하는 낱말들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좀처럼 변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1000년 동안 겨우 14% 정도 변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알타이어계인 터키나 몽골 사람들과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면 분명 많은 수의 기본 낱말이 같거나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상 외로 알타이어와 우리의 원시어휘들 사이에는 유사성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은 알타이어계인 터키어의 원시 어휘(괄호 안)와 우리말의 어휘를 비교한 것이다.
해(기네쉬), 햇빛(귀네쉬으쉬으), 달(아이), 별(열더스), 하늘(그억유수), 바람(뤼스갸르), 구름(부르트), 날(균), 밤(기제), 아침(사바), 비(야므르), 땅(예르), 흙(톱브라크), 돌(타쉬), 눈(雪 카르), 물(수; 중국어 水와 같음), 바다(데니스), 꽃(치채키), 나무(아치), 나(벤), 너(센), 새(구쉬), 곰(아이어)…
다음은 어법(語法). 터키어는 토씨(助詞)가 있는 교착어라는 점에서는 우리말과 유사했지만(세계 언어의 절반 이상은 교착어다), 다른 어법은 우리말과 상당히 달라서 도저히 같은 계통의 언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터키어는 우리말과는 달리 명사의 토씨가 격변화를 하고, 동사도 격에 따라 어미가 달라진다.
다음은 동사의 경우다. 가다(gitmek)의 단수형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참고로 500개가 넘는 터키의 기본 낱말 중에서 어렵게 찾아낸, 우리말과 비슷한 것들을 두 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후 필자는 위에 예로 든 ‘이른’이나 ‘새벽’이란 낱말도 오직 터키어와만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알타이어가 아닌 아리안어(Arian)에서 찾아낸 말도 우리 낱말과 비슷함을 발견했다. 우리말의 ‘이른’은 아리안계 영어인 ‘얼리(early)’와 발음과 뜻이 비슷하며, 우리말 ‘새벽’은 아리안계 아랍어인 ‘사바하’와 유사하다.
실제로 터키족은 옛날 옛적 이웃나라에 가서 용병(傭兵) 노릇을 많이 했기에 오늘날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의 60% 이상이 아리안어족의 나라에서 차용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말과 유사한 터키어 낱말이 과연 터키족 고유의 말인지는 검증해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 말과 몽골어의 경우
이렇게 터키에서 우리 조상들의 언어적 흔적을 찾지 못한 필자는 몇 년 후 알타이어의 종주국 격인 몽골을 찾아가서 조사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필자에게 참담한 실망만 안겨주었다.
몽골 말은 우선 터키어처럼 발음부터가 생소했다. 목구멍에서 토해내듯 하는 독특한 발음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배우는 것은 세계 어느나라 말을 배우는 것보다 몇 곱절 더 힘들 것이다. 필자는 수십 번 반복해서 연습했지만 어떤 발음은 끝내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또 기본 낱말을 비교하여 보아도 후세, 특히 고려말 10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차용했으리라고 생각되는 보통 어휘 이외에는 도무지 유사한 기본 어휘가 없었다. 만약 몽골족이 우리 민족과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면 발음이 달라도 그렇게 다르고 또 어휘와 어법이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상식 선에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엉덩이에서 보이는 ‘몽골반점’을 들어 우리 민족과 몽골 등 북방계 민족의 인종적 공통성을 말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일본 중국 베트남 태국 등 동부아시아 종족에서도 일반적으로 몽골반점이 있다.
여하간 몽골어 중 어렵게 찾아낸, 우리 말과 비슷한 어휘(기본어휘) 몇 개를 골라 여기에 소개해 본다 (그러나 이 어휘의 유사성도 완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말과 비슷한 몽골 어법은 겨우 4∼5개다. 이를테면 토씨가 있고, 모음조화 현상이 있으며, 관계대명사가 없다는 것 등인데, 이런 특징은 동양계 언어로는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몽골 말을 우리 말과 같은 계통의 언어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다.
아직도 우리나라 일부 학계에서는 토씨가 있는 교착어적 어법이 마치 우랄-알타이어의 특징이고 우리말도 교착어기 때문에 알타이어족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상의 언어 중 50% 이상이 토씨가 있는 교착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고 알타이어족이 아니라는 미얀마어, 네팔어, 티베트어, 남부 인도어, 스리랑카어, 파키스탄어, 아프가니스탄어 모두 토씨를 가지고 있다. 거기다가 그들의 일부 토씨는 알타이어보다 훨씬 우리의 것과 유사하다.
중요한 어법(語法)만 따져보아도 그렇다. 일본어, 길약어, 라후어 등은 20개 이상이 우리말과 같고 심지어 인도의 드라비다어마저도 10개 정도가 같다. 이런 마당에 유사한 것이 겨우 4∼5개밖에 발견되지 않는 알타이어족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들이라니!
그 동안 우리나라의 몇몇 학자들이 “한국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고 주장한 핀우그루학회(핀란드 헬싱키)의 알타이어학자 람스태트(Ramstat)의 초기 가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비판 없이 정설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알타이어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필자는 훗날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까지 찾아가 조사했지만 우리 조상들이 남겼을 언어적 흔적은 아무 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과연 우리 민족의 언어적인 유사성은 어디를 찾아가야 만날 수 있을까?
‘불’이란 낱말을 추적하라
나는 지금까지의 가설을 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조사해보기로 했다. 먼저 기본어휘 가운데서도 가장 원시어휘라 할 수 있는 ‘불’이란 낱말을 가지고 추적을 해보았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만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인간은 불을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다른 동물과 차별화될 수 있었을 만큼, 불은 인류역사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고대인들은 불로 인해 비로소 추위를 면하고, 음식을 구워 먹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가장 먼저 사용했던 말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당연히 ‘불‘이라는 낱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과연 한반도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불’을 오늘날의 우리처럼 ‘불’이라고 발음했을까 하는 문제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오늘날의 불과 비슷하게 불, 벌, 부리, 비리라고 불렀을 개연성이 발견되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전인 원삼국(原三國) 시대의 지명이 대개 불(火)을 의미하는 ‘비리’(학계 일부에서는 평야를 지칭한다고 주장함)로 불렸고, 그 이후 삼국시대에도 ‘부리’나 ‘벌’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후대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옛 지명이나 인명, 관명 등 가운데 상당수가 ‘불’이란 낱말과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예를 들어보자.
●부리(夫里): 우리나라 옛 마을이나 지방의 이름
●해부루: 고구려의 주몽 전설에 나오는 부여국의 왕 이름
●불리지: 기원전 5,6세기경 북중국에 있었다는 ‘불리지국’의 건국자
●발해(渤海): ‘발(渤)’도 ‘불’로 읽어야 한다.
●평양(平壤): 옛날에는 ‘펴라’로 발음했다.
불을 나타내는 말 '풀', '푸르', '푸르', '푸라'등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된다.
●낙랑(樂浪): 역시 ‘퍼라’로 발음했다.
●패수(貝水): 이 또한 ‘펴라’로 읽었다. 대동강의 옛 이름
●부여(扶餘): 우리 민족이 세웠다는 나라이름. 지금의 만주 땅에 있었다.
●패리: 여진족의 벼슬 이름
●비리: 지금의 시베리아 동남쪽에 있었던 나라. 길리약족 거주지로 추정
이외에 불을 뜻하는 또다른 말로 ‘아’도 있었다. 아궁이(불구멍), 아오지(불붙는 흙, 오지는 흙을 의미함)에서 보듯이 우리의 일부 조상들은 불을 ‘아’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런 작업을 마치고 지구상에서 ‘불’이란 낱말을 죄 찾아보았다.
불가사의하게도 우리말 ‘불’은 알타이어인 몽골어와는 전혀 유사하지 않은 반면 인도-아리안어와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친근 관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 ‘불’ 또는 ‘아’라는 말은 알타이계 언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인도-아리인계 언어에서 깊은 인연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불’이란 낱말은 유럽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이란, 아프가니스탄의 서남아시아, 그리고 인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대관절 어디에 사는 누구였을까?
‘나’와 ‘너’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나’와 ‘너’라는 인칭대명사도 아주 오래 전부터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였을 것이다. 즉 우리 조상들이 처음 말이라는 것을 사용했을 때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본 낱말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낱말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도 사용하는 ‘나’와 ‘너’라는 낱말은 과연 이 세상 어느 민족의것과 유사할까? 우리가 사용하는 말 ‘나’와 ‘너’는 첫째 드라비다어 및 라후어와 귀신이 곡할 정도로 일치하고 다음 미얀마어와도 아주 유사하다.
참고로 세계의 언어학자들은 미얀마어를 시노-티베트어로 분류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인도-아리안어로 분류하는 것이 합리적일 듯하다. 왜냐하면 미얀마 어법은 시노-티베트어와 기본적으로 유사하지 않고, 오히려 고대 인도의 팔리어를 기층으로 하고 거기다가 일부 힌디어를 차용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어의 ‘니’와 우리말 ‘너(니)’도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말 ‘나’ 및 ‘너(니)’와 모두 일치하는 것은 라후어, 드라비다어, 미얀마어, 아카어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드라비다어와 라후어에는 시노-티베트어, 인도-아리안 계통의 언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조사의 활용마저 우리말과 똑같은데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드라비다어 ‘누’는 우리말의 주제격 보조사 ‘는’과 일치하고, 라후어의 주제격 보조사 ‘래’는 지금도 북한지방에서 사용하고 있다. 또 라후어의 목적격 조사 ‘타’는 우리의 여격조사 ‘한(테)’, 그리고 아이누어의 목적격 조사 ‘타’와 일치한다.
알타이어에도 조사가 있지만 우리말과 유사한 것은 오직 향진격 조사 ‘-로’와 여격 조사 ‘-에’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많은 언어들은 조사가 없기 때문에 대명사, 목적어 또는 보어 앞 뒤에 붙는 동사가 이 역할을 하든지 따로 전치사를 써서 말이 통하는 문장 형식을 취한다. 특히 터키어나 태국어의 소유격은 수식하는 명사의 순서를 뒤바꿔 놓아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한편 라후어의 인칭 복수형 나흐(우리들), 너흐(너희들)는 우리말 복수형과도 맥이 통한다. 라후족은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니 언어의 일치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칭대명사에 관한 더욱 놀라운 발견은 지정학적으로 인도와 우리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위치에 있는 미얀마의 말에 있다.
우리나라 말과 미얀마어, 라후어, 드라비다어와의 유사점은 인칭대명사 뿐만이 아니다. 서울대 언어학과 이현복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 말의 음성학적인 특징인 음운의 삼중 대립현상(音韻 三中對立 現象)이 미얀마어, 라후어, 아카어, 태국어 등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는데, 이 점도 그들의 말이 우리말과 한 갈래였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것이다
예) 달(月) 탈(假面) 딸(女息)
일본의 몇몇 언어학자들은 우리말과 인도 드라비다어의 유사점을 들어 두 민족 사이에 혈연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주장은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면도 없지 않다.
드라비다족은 시베리아 중남부에서 남하해서 인도대륙에 흩어져 살던 종족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아리안어족이 인도대륙으로 침입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오히려 최초의 우리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 집단이 인도 대륙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통과할 때 이미 그곳으로 내려와 정착해서 살고 있던 드라비다족과 오랫동안 가깝게 접촉할 수 있었으며, 이때 부르기 쉬운 단음절의 ‘너’와 ‘나’라는 낱말을 그들로부터 차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 왜냐하면 우리말의 기본 어휘 중 상당수가 드라비다어보다는 오히려 소아시아 지방의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가설은 우리 조상들이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던 인도대륙에 도달하기 전에 만났으리라 생각되는 아리안어계의 다리어(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에서 우리의 것과 닮은 문장 형태가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필자가 조사한 다리어, 드라비다어, 미얀마어, 라후어 등의 문장 순서는 우리 것과 아주 유사한 것이 확실한데, 과연 우리 주변 다른 민족들의 말도 그럴까? 그러나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나 태국어는 우리와 문장구조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주어-술어-목적어(또는 보어)의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어와 유사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나’와 ‘너’라는 낱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흑해나 카스피해 부근에서 출발하여 인도 대륙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와 ‘너’를 어떻게 불렀겠느냐는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다만 가능성이 있는 추측은 ‘나’를 영어에서는 ‘아이’, 아랍어에서는 ‘아나’라 부르고, ‘너’를 고대영어에서는 ‘디’, 아랍어에서는 ‘안따’라고 호칭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발음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금도 남도 사투리로는 ‘너’를 호칭할 때 ‘지’라고 부른다. 고대영어의 ‘너’라는 말 ‘디’와 우리말 ‘지’는 발음과 음절이 아주 흡사하다.
(2) 우리 민족과 가장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일본족의 말 중 이인칭 ‘너’에 해당되는 ‘안따’와 ‘너’를 가리키는 아랍어 ‘안따’는 서로 언어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즉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드라비다어족으로부터 차용한 말(차용어)을 고정시켜버린 반면 일본열도로 들어간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나뉘어갈 때까지도 함께 사용하던 ‘너’와 ‘안따’중 ‘안따’가 일반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 ‘너’ 이외에 서남쪽에서 온 또 다른 원시어휘는 없을까?
우리말 수사(數詞)의 고향을 찾아서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태어나서 젖 떨어지기가 무섭게 배우는 말 ‘하나’ ‘둘’ ‘셋’을 추적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사냥한 동물이나 물고기를 헤아릴 필요가 있었고, 또 들이나 산에서 채취한 열매를 부족원들에게 공평히 나누어주기 위해서도 수사(數詞)인 하나, 둘, 셋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 둘, 셋은 옛날 그 옛날에도 가장 기본이 되는 원시어휘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 말 ‘둘’과 ‘셋’은 아리안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고, ‘하나’도 그리스어 ‘에나’, 다리어 ‘액’, 산스크리트어 ‘엑카’ 등과 어원이 같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의 전(前)단계라고 할 수 있는 ‘애’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첫, 처음, 어린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예; 애기, 애당초, 논애벌매기, 애벌빨래 등)
우연의 일치라고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보았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면, 어느 때인가 우리 조상들은 흑해 또는 카스피해 근처에서 살던 코카시안족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처음 코카서스 지방에서 살았을 때, 우리 조상들은 그리스어와 같이 ‘에나’‘디오’하고 하나, 둘을 세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동쪽으로 옮겨 지금의 다리어 지역인 이란, 아프가니스탄의 중앙 아시아지역을 거치면서 그곳에 먼저 와 살던 또 다른 아리안 계통의 사람들에게서 둘과 셋을 차용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가 없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 셈법(數詞)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 천년 전 우리 조상의 시초를 짐작케 하는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둘(2)이란 숫자에 있다. 이 둘이란 숫자를 가지고 우리의 조상들이 지나왔으리라고 생각되는 길을 먼 곳에서부터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
―→ 이탈리아어 두에 ―→ 영어투
―→ 그리스어 디오
―→ 이란, 아프가니스탄의 다리어 두 → 파키스탄의 우루두어 두
한국어 둘,두 ← 인도네시아어두아 ←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드바 ←
거기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 둘(2)에서 파생되어 나왔으리라고 생각되는 낱말의 뜻도 한국어와 아리안어가 똑같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 선조들과는 혈연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민족들의 둘(2)에 관한 호칭을 적어본다. 중국과 몽골 민족들은 우리와 이웃해 살고 있지만, 그들의 셈법은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
핀란드어깍씨 ← 터키·우즈베크어이키 ← 몽고어하여르 … 우랄-알타이어
태국어송 ← 중국어알 … 시노-티베트어
그러나 셈법에 있어 우리말의 넷부터는 그 근원이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이 먼 소아시아 지방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수만km를 이동했을 당시, 기층민에게 넷 이상의 숫자 개념이 생활화되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아리안 어족끼리도 하나부터 셋까지는 대개 유사한데 넷부터는 상당히 다른 점으로 보아도 이와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또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선 오늘날 파푸아-뉴기니, 수마트라, 태국 북부에 사는 어떤 부족들은 셋 이상의 숫자를 셈할 줄 모른다니 지금으로부터 수 천년 전의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다음 넷부터 열까지의 숫자를 언어별로 조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보듯이, ‘넷’부터 ‘열’까지는 우리말과 비슷한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넷은 핀란드어의 ‘넬리아’나 타미르어(인도 남부 드라비다어의 일종)의 ‘나러’와 비슷하고, 여섯은 그리스어 ‘엑시’에, 열을 가리키는 고구려어 ‘더’가 다리어 ‘다’나 일본어 ‘도’에 근원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되지만 확실치 않다. 다만 이 가운데서 고구려어 ‘더’는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다리어, 영어, 일본어 등과 근원이 같다고 본다.
수사의 어원에 대하여
다음은 가설 단계지만, ‘하나’에서 ‘넷’까지의 어원(語源)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처음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이 생성되고 그로 인해 시작된다는 의미거나 혹은 초기적인 단계나 상태를 나타낸다.
‘둘’은 하나에 또 ‘하나’를 더한다는 뜻이다. 즉 영어의 더블(double)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셋’은 ‘하나’에 또 하나의 ‘하나’를 더하면 ‘새로워’진다거나 또는 ‘새로운’ 것이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넷’은 ‘셋’에서 나왔다는 생각, 즉 ‘셋’으로부터 ‘내렸다’는 발상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부터는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후 독자적으로 만들어졌을 개연성이 크므로 처음 ‘하나’에서 ‘넷’까지의 어원과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어린아이들은 종종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수를 헤아린다. 아마도 지능이 덜 발달되었을 우리 조상들도 손가락을 가지고 셈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다섯’부터는 수를 헤아리는 낱말이 손가락의 동작과 형태 등에 관련돼 있다는 가정 하에서 출발하여야 된다.
‘다섯’은 ‘하나’를 헤아릴 때부터 오므리기 시작한 손가락이 다섯을 셀 때는 마지막 새끼손가락까지 다 오므려져서 이젠 더 이상 오므릴 손가락이 남아 있지 않다는 데서 온 낱말일 것이다. 즉 손가락 다섯 개를 ‘다 썼다’는 뜻에서 ‘다섯’이 되지 않았을까?
‘여섯’은 ‘다섯’을 셀 때까지 다 오므린 손가락을 다시 펴는 데(여는 데)서 나온 말인데 즉 손가락이 ‘열’려서 곧바로 ‘서’ 있는 모양이 되었다는 뜻에서 생겨난 낱말이라고 생각된다. 즉 ‘열려서 서 있다’가 ‘여섯’이 된 것이다.
다음 ‘일곱’은 먼저 ‘여섯’을 셀 때 손가락 한 개를 열고 곧바로 세웠는데 그 다음 ‘일곱’을 셀 때는 또 다른 손가락 한 개를 더 일으켜 세웠다는 뜻이다. 즉 손가락이 먼저 ‘여섯’을 셀 때 세워졌던 손가락과 더불어 곱으로(두 개로) 일으켜 세워진 모양을 보고 만들어진 낱말이다. 즉 ‘일’어서서 ‘곱’으로 세워졌다.
‘여덟’부터는 그 당시에 연이어 일어선 세 개나 네 개의 손가락 모양을 나타내기에 적당한 말이 없었으므로 생각을 조금 바꾸어서 수를 구별하려고 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운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조상들이 한반도에 정착할 당시에는 ‘열’이라는 숫자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가장 큰 숫자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리키는 낱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손가락을 사용하여 수를 세어보아도 ‘열’ 이상은 더 펼 수 있는 손가락이 남아 있지 않아 ‘열’은 우리의 먼 조상들이 셈할 수 있는 마지막 숫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부터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셈을 세어가다가 ‘여덟’쯤 셀 때는 이제 마지막 숫자인 ‘열’이 거의 다 되어간다. 즉 ‘여물어간다(여덟)’는 생각에 근원을 하고 있는 낱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아홉’은? 역시 지혜로운 발상에서 나온 단어다. 즉 인도-아리안 언어에서 ‘아’는 부정을 나타내는 의미로 ‘아니다’ ‘부족하다’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아홉’은 마지막 숫자인 ‘열이 아니다’나 혹은 ‘열’이 되기에는 ‘아’직도 ‘흡’족한 상태가 아니다(아홉)에서 나온 낱말일 것이다.
그런데 ‘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열’은 다섯 손가락이 다 ‘열’린 모양을 보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낱말이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열’이란 낱말은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후 상당한 세월이 지난 다음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고 그 이전, 즉 한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할 당시에는 아마도 ‘열’이란 낱말 대신 이 세상 모든 것, 전부를 뜻하는 의미로 ‘다’와 비슷한 낱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 조상들이 지나온 중앙아시아의 다리어지역인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금도 ‘열’을 ‘다’라고 부르며 우리 조상의 일부가 건너가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일본에서도 현재 ‘열’을 ‘도’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어서 전부를 의미하는 뜻의 ‘다’, 즉 ‘다 함께’ ‘모두 다’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면 그 옛날 10이 가장 큰 숫자였던 우리 조상들이 초기에 ‘열’을 ‘다’라고 불렀음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三國史記 地理志)에 나오는 옛 지명들을 해석해보면, 고구려 시대까지만 해도 열(10)을 ‘다’와 비슷한 ‘더’나 ‘덕(德)’으로 불렀음이 확실해 보인다.
“십곡현(신라)은 덕돈홀(고구려)이라고 불렀다(十谷縣一云德頓忽).”
한편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하고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 모든 것, 전부를 의미한 말로 ‘온’ 이란 낱말을 사용하게 된다. 오늘날도 이와 관련해서 ‘온누리’ ‘온갖 것’ 등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 ‘온’은 100을 나타내던 우리의 옛 말인데, 아마도 10을 나타내는 알타이어(터키어)의 ‘온’에서 차용했거나 혹은 1을 나타내는 영어의 ‘원’또는 타미르어의 ‘온루’에서 빌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온’이란 낱말을 터키어, 영어 혹은 드라비다어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차용경로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즉 한반도 및 만주대륙에서 살고 있던 지배계층에서는 한반도로 들어올 당시 벌써 100 이상의 숫자개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겨우 손가락으로 열(10)정도밖에 셈할 줄 몰랐을 것이며 그후 100까지 셈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소아시아지방에서 가지고 온 낱말 ‘온’을 ‘백’이란 숫자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게 되었다. 또 1000을 가리키는 옛말 ‘즈믄’은 인도-아리안 계통의 다리어에서 같은 숫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즈르’에서 온 말일 것이다.
이상의 설명이 다소 무리한 가설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으며 현재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 ‘둘’ ‘셋’의 기본적인 낱말들은 알타이어계통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옛날 인도-아리안계통의 종족들이 사용했던 것과 독자적으로 만든 말이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그런데 우랄-알타이어 학자들은 노심초사 끝에 판이한 우랄-알타이어 셈법과 우리 고유의 셈법을 접목시켜 더욱 무리한 가설을 내놓았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조금도 닮은 점이 없는데도 우리말 ‘다섯’의 근원(祖語)이 알타이어 ‘퇴르트’(tort, dorben, dugin)에 대응한다고 이해도 되지 않는 주장을 한다.(로이 앤드루 밀러의 일본어 기원 참조)
알타이어 학자들은(람스테트, 포페 등 핀우그르학회) 과학적인 접근 방법이라 하여 서구식 음운대응(音韻對應) 방법을 사용했지만, 알타이어와 우리말에서는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고 유사점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이 찾았다는 유사 어휘들마저 상당수가 부정확한 것이었고, 그나마 거의 전부가 고려말 몽골의 지배를 받을 때 차용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어휘들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의 비교언어학적 탐색은 기본부터 신빙성이 의심되었다. 동양의 언어는 인도-아리안어의 경우처럼 라틴어나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모어(母語)가 없어 음운대응 방식의 정확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공통어인 ‘어머니’와 ‘아버지’
인도양상의 조그만 섬나라 스리랑카에도 우리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들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어 필자를 놀라게 했다. 즉 스리랑카 인구의 약 65%를 차지하고 있는 싱할리족은 아쇼카대왕 때 인도의 중북부에서 배를 타고 스리랑카 섬까지 내려와 살고 있는 아리안어계 민족인데 이들의 말과 우리 말 중에 서로 일치하는 것들이 있었다.
가끔 우리 나라의 잡지나 신문에 게재되는 세계 여행기를 보면 ‘어느 나라엘 가보았더니 그곳 사람들이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더라. 그러니 우리 나라와 그들 사이에 민족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등의 얘기가 나오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린아이 때 쉽게 할 수 있는 발음이 ‘어’ ‘아’ ‘마’ 등이어서 부모를 ‘엄마’ ‘어머’ ‘마마’ ‘파파’ ‘타타’ 등으로 부르는 것은 세계 어느 민족을 가릴 것 없이 공통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여러 민족이 사용하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말을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표 참조)
여기서 스리랑카의 ‘아뻐지’(캔디지방)와 우리 민족의 ‘아버지’는 3음절로 구성된 어휘이므로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는 없고 언어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그 옛날 어느 시점에 두 민족이 접촉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쌀은 어디서 왔을까?
또 우리나라의 쌀(한국)과 스리랑카의 할(혹은 사할: 스리랑카, 인도), 그리고 그 쌀로 만드는 밥(한국)과 밧(스리랑카, 인도)을 비교하면 두 언어의 정확한 일치성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혹시나 우리의 먼 조상들이 소아시아로부터 한반도로 이동하는 과정에 인도대륙에서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 마침 주변에 살고 있던 인도 사람들(특히 드라비다 족)의 조상에게서 벼농사 짓는 것과 쌀을 볼 수 있었고, 그 쌀로 지은 밥을 먹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그들이 쓰는 쌀과 밥에 대한 낱말들을 한반도에까지 가지고 온 것은 아닐까?
아직도 우리 민족학계 일부에서는 쌀 농사를 중국을 통해서 받아들였다고 주장을 하나 그들의 쌀과 밥에 대한 낱말들은 우리가 쓰는 말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음을 본다.
다음 보리를 보자.
또 밀은 이렇다.
언어학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3대 농작물인 쌀, 보리, 밀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 뿌리를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쌀은 인도에서 왔고 밀과 보리는 소아시아 지방으로부터 이란, 아프가니스탄의 남쪽과 인도대륙을 거쳐온 것이다.
최초로 한반도에 곡식 종자를 가져와 논과 밭을 만들고 정착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조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아시아 대륙의 한쪽 귀퉁이에 있어 소아시아나 중앙아시아처럼 인류 이동이 빈번했던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가 먼 서역에서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 조상들에게 곡식 종자를 갖다주고 되돌아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시, 아사, 아침, 아사달
지금으로부터 4000∼5000년 전, 그리스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지구가 넓고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자기네들의 바로 동쪽에 있는 터키 지방을 해가 돋는 땅이라 하여 ‘아시아’라고 불렀다. 즉 ‘아시’는 당시 ‘해가 돋는 아침’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 후 터키 지방이 동쪽 끝이 아니고 터키 너머에 더욱 넓은 땅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지금의 터키 지방을 작다는 ‘소(小)’자를 붙여 ‘소아시아’라고 불러 자기네 잘못을 고쳤다.
우리 조상들이라고 생각되는 일단의 부족들은 흑해와 카스피해가 있는 그 소아시아에서 한반도까지 오면서 그 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해가 돋은 후의 2∼3시간을 ‘아침’이라고 부르며 이웃 일본에서는 ‘아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지나왔으리라고 생각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아침을 우리말 ‘새벽’과 비슷하게 발음하고 있다. 즉 아랍어의 ‘사바흐’, 스리랑카 싱할리어의 ‘수바’, 터키어의 ‘사바’, 다리어의 ‘사하르’ 등이다. 그러나 힌디어만큼은 우리나라의 ‘새벽’을 ‘수바하’ 또는 ‘사베라’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새벽과 아침의 시간상 구분에서 오는 다소간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말 ‘새벽’과 ‘아침’이 모두 서쪽으로부터 온 인도-아리안 계통의 언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편찬한 ‘계림유사’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새벽을 힌디어의 ‘수바하’와 유사한 ‘시바’로 불렀던 것이다.
다음은 우리 조상이 지나왔으리라고 생각되는 지역의 아침(또는 새벽)을 일컫는 말을 먼 곳으로부터 순서대로 적어본 것이다.
아시(그리스) → 사바(터키) → 사바흐(아랍) → 사하르(이란·아프가니스탄)→ 수바하(또는 사베르·인도) → 아룬(태국) → 아침, 새벽(한국) → 아시(일본)
*터키어 ‘수바’(새벽)는 아랍어 ‘사바흐’(아침) 혹은 힌디어 ‘수바하’의 차용일 개연성이 크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 할아버지가 세운 나라의 도읍터도 ‘아침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아사달’로, 인도-아리안어에서 온 말임이 확실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사달을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했다는데, 혹시 궁홀은 다리어에서 산을 가리키는 ‘쿠흐’와 관련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인은 태양족(太陽族)의 후예
오늘날 우리가 ‘해’라고 부르는 낱말은 원시어휘 가운데서도 아주 일찍부터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어휘다. 우리 민족의 ‘해’라는 어휘는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 과정을 겪었을까?
고구려 고분벽화를 본 세계인들은 황홀해 하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생동하는 모습을 보며 곧잘 감동에 젖는다.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무사들, 고취대를 선두로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병사들, 고래등같이 크고 화려한 가옥에서 생활하는 고구려인들을 보면 마치 2000년이라는 시간이 단절되지 않고 아직도 살아서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 많은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한 장 있다. 그 벽화는 바로 오괴 4호분 천장에 그려진 것으로 신선(神仙)이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 작업 광경. 지금까지 민족학계에서는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 신선’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천한 수레바퀴나 만들고 있는 신선이 어디 있을까. 하늘에서 살고 있는 지고지순한 신선들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바로 이 한 장의 벽화 속에 고구려인의 뿌리를 밝힐 수 있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수레바퀴는 바로 태양(太陽)의 상징. 신선은 천한 수레바퀴가 아니라 위대한 태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하루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그날의 태양이 사멸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태양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면 그들에게는 무척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고분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네들의 신선이 밤새도록 새로운 태양을 만들어서 다음날 보내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그럼 고구려 시대에 수레바퀴는 과연 태양을 상징했던가. 후대인 고려시대까지도 태양의 날인 단오(端午)절에 백성들이 수레바퀴 닮은 수치떡을 해 먹은 것을 보면 일단 그렇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확실한 것은 고대 인도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처럼 수레바퀴로 태양을 상징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의 태양 사원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닮은 커다란 수레바퀴가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태양을 ‘라’라고 불렀는데 옛적 삼국시대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도 태양을 ‘라’라고 불렀다.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處容歌)에 아직도 그때의 말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신라성대 소성대(新羅聖代 紹盛代) 태평성대 라후덕(太平聖代 羅侯德) 처용아비야.’
그러면 당시 고구려 사람들도 정녕 태양 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 지금까지 역사의 베일속에 감춰져 있던 불가사의를 한꺼풀 벗겨보자. 확실히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족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는 과정에 추격자가 급하게 따라붙는 판국인데 하필이면 큰 강을 만난다. 이때 주몽은 강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나는 태양의 아들이며 하백(河伯, 물의 신)의 외손이다.”(魏書 高句麗傳)
과연 태양족답게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당시 태양을 숭배한 우리 민족은 고구려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신라 사람들도 고구려인 못지않은 태양 숭배자였다.
“매달 초하루에는 서로 하례하는 예를 갖추고… 왕이 연회를 베풀어 모든 관리를 불러모아 해와 달의 신주에 절을 한다.”(北史 新羅傳)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에서 태양을 가리키는 ‘하’에서 온 말이고(우리나라 중세 기록인 계림유사, 조선관역어 모두 ‘하’), 태양의 파생어 새(빛; 청산별곡, 북새;저녁놀 등)는 아랍어 힌디어 솔 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수리’라는 말은 어디서 왔나
마지막으로 태양(太陽)이라는 낱말은 근세에 중국에서 차용한 것이니 논외로 한다. 결론적으로 옛 우리 조상들이 태양을 일컫던 말 수리, 라, 해 등은 모두 북방과는 관련이 없고 태양숭배 신앙과 함께 소아시아, 중동 및 인도 방향에서 한국인의 남서통로를 거쳐 온 말이다.
또 태양숭배 신앙은 오늘날까지도 흔적으로 남아 있어서 할머니들은 물을 떠놓고 해님을 향해 절을 하며 소원을 성취해달라고 빌었고, 일반인들도 가끔은 태양의 신통력에 호소하기도 했다.
“수리 수리 마하 수리(해님 해님 위대한 해님 … 소원 좀 들어주세요).”
삼국시대 사람들이 해를 ‘라’라고 불렀던 반면, 고려시대 사람들은 해를 ‘수리’라고 불렀다. 고려의 대표적인 가요 ‘동동’을 보자.
‘5월5일 수리날(端午日)에 먹을 약은 천년을 장수하실 약으로 바치나이다…’
곧 5월 단오(端午)는 해의 축제 날이고 ‘수리 날’이다. 이것말고도 신라향가에서 수로부인, 가락국의 수로왕 등의 뜻은 모두 해 부인, 해 왕이란 뜻이다. 특히 수로왕의 경우는 김해에 남아 있는 김수로왕 능의 태양문양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럼 고려 시대에 ‘해’를 가리켰던 말 ‘수리’는 이 지구상 어느 곳의 언어와 유사할까?
고려 시대의 ‘수리’는 소아시아에서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를 거쳐 온 말인 반면, 터키와 몽골 등 알타이어는 해(日)와 같이 중요한 낱말도 우리말과 같은 것이 없다.
조사의 세계
이제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을 우리 말의 대표적 어법이라고 할 수 있는 조사(助詞)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말과의 친족관계를 설정하는 데는 확실성이 부족하므로 필자는 아예 음성학적으로 우리의 조사(助詞)와 유사한 것들을 찾아나섰다. 만약 찾아낸다면, 우리 고대사의 불가사의 하나가 비로소 역사적인 사실로 실체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의 어법 중 가장 유별난 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조사(助詞) 10개를 가지고 어느 민족의 언어가 우리와 비슷한가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세계의 언어 중에 주격 조사가 있는 언어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주격조사의 존재는 우리 말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주격 조사는 우리 말을 제외하면 일본어와 라후어, 길약어에서만 발견되었다. 또 호격 조사도 주격 조사처럼 대단히 드물다. 오직 한국어, 드라비다어, 라후어, 길약어에서만 유사한 호격 조사가 발견되었다.
이상과 같이 우리 말의 주요한 어법과 유사한 언어를 찾아보면 우리말과 거의 일치하는 언어는 라후어다. 라후어를 제외하면, 유사성이 대개 인도-아리안어계와 드라비다어, 길약어에서 발견된다.
알타이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말의 조사와 유사한 것은 오직 향진격 조사(-로;몽골어)와 여격조사(-에;터키어) 뿐이다. 또 알타이어는 우리 말에 있는 주격조사, 호격 조사가 없어 비교대상으로 삼은 라후어, 다리어, 드라비다어, 길약어, 라후어, 일본어보다 우리 말과 훨씬 소원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조사를 이용해서 문장을 만들어 비교해보자. 그러면 드라비다어, 라후어 등이 우리말과 얼마나 유사한지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나누 닝가룸 서울 완돔(인도 드라비다어 타미르방언)
(나는 너랑 서울에 왔다)
나래 서울로 까이요(라후어)
(나는 서울로 가요)
드라비다어에는 우리말과 유사한 어휘가 1000개 이상 발견되고, 또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 우리 조상들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支石墓)이 무수하게 널려 있다.
또 라후족의 어법은 우리와 70% 이상이 같다. 라후족의 역사를 조사해보면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망했을 때 당나라로 붙잡혀 간 우리 민족일 수밖에 없으니 역사는 또 한번의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라후어에 대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너흐래 나게 라웨요
(너희는 나에게 와요)
‘흐’라는 복수형, …게는 여격, …요 하는 문장의 종지부마저도 똑같다. 실은 ‘같다’라는 말도 라후족은 ‘같수이’하는데 오늘날도 함경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순 우리말이다. 중국으로 붙잡혀간 지 1300년이 되었는데도 라후족은 아직도 우리 고유의 김치를 담가먹고, 씨름을 하고, 색동옷을 입고, 강원도 정선아리랑 가락을 부르는 것을 보면 문득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다만 옛일을 오늘에 되살려 그 까닭을 밝혀줄 사람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말 어법(語法)의 고향을 찾아서
필자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우기 쉬운 말은 ‘일본어’ ‘라후어’ ‘길약어’ ‘미얀마어’ ‘드라비다어’ ‘싱할리어’ 등일 것이다. 물론 배우기 쉽다는 것은 그들의 말과 우리말 사이의 어법 및 발음 등에 유사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라후어, 미얀마어, 드라비다어, 싱할리어의 문장형태는 일본어처럼 우리말과 거의 같으며 각 낱말의 격변화도 우리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인칭대명사를 예로 들어보자.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알려진 라후어의 인칭대명사 격변화는 우리말과 똑같고, 일본어 및 싱할리어의 변화 모양도 우리말과 일치한다.
그러나 시노-티베트어계인 중국어나 태국어, 그리고 알타이어계인 터키어 등은 격(格)이 달라지는데 따른 조사가 붙지 않거나 인칭대명사의 명칭이 바뀌어버린다(터키어; 1인칭 주격 - 벤, 1인칭 소유격과 여격 - 비 ). 우리와 번지수가 다른 것이다.
알타이어에는 주격조사(主格助詞)가 없는 대신 우리말에는 있다. 우리말에는 소유와 술어적 대명사 접미사가 없는데 비해 알타이어에는 있다. 성, 복수, 지시대명사, 형용사, 동사의 명령형, 사역형 등도 서로 다르다. 우리말과 알타이어는 뿌리가 같다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언어다.
알타이어 학자들은 우리말이 알타이어에서 아주 오래 전에 분화돼 나와 그렇다는 옹색한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논리는 지구상 어느 언어와 비교할 때도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논리라서 설득력이 없다. 알타이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말과 유사한 언어가 많은데도 왜 후세의 차용이 명백한 몇 개의 어휘를 가지고 우리말을 구태여 알타이어에 소속시키려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견해는 비단 필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알타이어족 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몇몇 있는 것도 현실이지만, 우리나라 언어학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서울대 김방한 교수, 충남대 강길운 교수 같은 석학들은 평생을 알타이어 연구를 한 끝에 우리말이 알타이어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북한 학자들도 남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우리말의 알타이어 소속설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무시하는 실정이다. 뒤늦기는 했지만 우리말의 알타이어족설을 주장한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트와 포페의 가설을 혹시나 정설로 믿어버린 나머지 너무 무리해버린 것이 아닌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말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제까지 필자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태국,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이란, 이라크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는 수만 km의 현장을 답사하여 우리와 유사한 기본 낱말을 찾아내고, 분석을 하고, 고증을 했다. 그러나 결론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우리말의 기본 어휘들이 어떻게 한반도에까지 이동해왔는가. 즉 우리말의 생성과정을 밝혀 보기로 하겠다.
지난 1세기 동안 수많은 민족학 관련 학자들이 우리말의 형성 문제를 연구하였으나 아직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언어와 연관된 민족의 기원 문제마저도 확실한 것이 없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한국어, 일본어를 포함한 일부 아시아계 언어는 서구식 음운대응(音韻對應) 방법으로 동질성을 확인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첫째 인종과 역사적 배경이 다양하고, 둘째 인도-아리안어에서 보는 것처럼 라틴어나 산스크리트어와같이 공통조어(共通祖語)를 확인할 수 있는 모어(母語)가 없어 음운대응의 확실성을 기할 수 없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 서구식의 음운대응 방법으로 밝힐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필자는 대안으로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우리 말의 이동관계를 추적하여 보았다. 우리말의 모든 어휘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규명된다는 주장이 아니고,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발상전환의 보기를 든 것에 불과하다. 이 글은 우리 민족의 기원과 관련이 있으므로 여기서 선택한 어휘는 가급적 스와디시 차트 범주에 드는 원시어휘를 택했고, 필자가 제안한 한국인의 남서 통로에서 지리적으로 한국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가까운 장소의 순서로 우리말의 이동경로를 추적한 것이다.
아랍어와 다리어의 접미음 ㄹ이나 ㅎ이 인도나 미얀마 등지에서 1차 변화 과정을 겪고, 한반도에 이르면 2차 변화를 겪었다. 이것이 현대어에 이르면 ㄹ이나 ㅎ이 아주 탈락해서 준말이 되거나 격음화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몇몇 예를 들어 우리말의 기원을 찾는 새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쳤지만, 만약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심도 있게 조사를 한다면 상당한 양의 우리말 어원이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말의 기본이 중동과 인도 등지의 남서 통로를 거쳐 온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어떤 말들은 소아시아 지방에, 또 다른 말은 한반도에서 좀더 가까운 인도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면 우리 조상들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고, 마치 물결처럼 시차적으로 이동해 왔다고 생각된다. 한반도의 선주민인 부여, 고구려, 백제어는 인도어와, 그리고 그 이후 이동해 왔다고 추측되는 신라의 말은 소아시아어와 유사점이 더 많은 것이 그와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끝으로 이 글은 우리 말의 소속이 알타이어이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의 골격을 만든 조상들이 북방에서 이동해 온 민족이었는가 다시 한번 검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이제는 우리의 학문적 영역을 북방 일변도의 시각에서 탈피하여 전 세계로 넓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 차원에서 쓴 것이다.
한국에서 태국,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이란, 이라크를 거쳐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수만km 현장을 답사하면서 각국의 원시언어를 수집해 우리말과 비교한 김병호박사의 결론은 “우리말은 알타이어가 아니라 오히려 인도-아리안계 언어에 가깝다”는 것이다.
●김병관·문화탐험가·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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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똥 오줌에 관련된 단어들에 대한 조사는 빠졌나봅니다.
"쉬" 라는 배변에 관련된 음절이, "엄마, 아빠" 라는 단어와 함께 언어의 원류추적에
주요 단서로 언급되는데, 엄마, 아빠, 쉬(만약, 우리말에서 이것이 단순히 의성어가
아니라면) 만을 고려한다면 한국말은 오히려 그 뿌리를 영어권의 원류와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지요.
또한 언어를 가르는 중요한 방법으로는 문장 속의 주어와 목적어 위치를 고려하는데
세계의 모든 언어는 딱 2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답니다.
즉, 우리말과 영어 등 대부분의 언어처럼 "주어"가 문장 처음에 오는 언어.
또 다른 하나는 "주어"가 우리말에서는 "목적어"의 자리에 위치하는 언어.
그리고 단어 온통을 들어서 어원을 찾아내지는 않습니다. 음절, 음소의 단위까지
세분화해서 연구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한국말이 우랄알타이어계라는 설은 이제 신빙성을 잃었지요.
지금도 서울대 언어학과나 또 외국의 많은 언어학자들이 열심히 연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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