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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 시모음
박형준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가구의 힘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 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나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1991) -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꽃파도가 인다
- 제10회 현대시학 작품상-
폭풍의 날개
날개가 있어야 하리
버드나무 가지가 물 아래 잠겨 있다 잎사귀가 물속까지 피어 있다
날개짓을 하며 요동치고 있다
물 밖에 떨어진 잎사귀 그게 나다 도망은 끝난 지 오래다 물을 움켜쥘 어떤 발톱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심연 속에 가득한 날개가 모래와 자갈을 헤치며 물속을 뒤엎을 때 흐린 잎맥의 기억으로 폭풍을 예감할 뿐
묘비명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기억이란 끔찍한 물건이다
앞발이 들린 채 끌려가는
낡고 허름한 가옥들 사이로 난 길에 러닝셔츠를 배까지
방주
그것은 다라이에 붙어 있었다.
우동을 파는 고단한 어미의 잠에 떠밀려
저 곳
空中이라는 말
그대와
空中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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