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 시학詩學은 시를 이론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이다. 가끔 시를 읽고 싶어져서 시를 읽으려고 하면 보통 시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시를 읽다가 머리를 싸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냥 시만이 있는 시집이 아니라 시를 해석하고 해설하는 책을 찾았는데 보통 시와 그 시만을 해석하는 책은 따로 없고 이렇게 시론이나 시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책들만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시의 이론과 함께 시 해설이 덧붙여있는 시론과 시학을 읽기로 하고 책을 고르다가 이 책을 골라서 읽게 되었다. 여러 시론, 시학 중에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고등학교 때부터 익히 배워왔던 근대시보다는 시대적으로 비교적 현재와 가까운 현대시를 이론에 대한 예로 들면서 해설을 한 것을 읽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에서는 근대시보다는 현대시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고 또 예로서 비교적 많은 수의 시를 책에 싣고 있다.
이 책을 다 읽는데 시간이 비교적 오래 걸렸다. 이 책은 분량이 많기도 하지만(687P) 많은 수의 시(대략 200편 정도가 넘는)와 그 시의 해설을 한 번 읽고서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이해하려고 여러 번을 읽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학의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등단한 시인이다. 강단에 있으면서 기존의 시학이 변화하고 변모하고 있는 현재의 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이 책의 집필동기라고 밝히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을 구상한지 8년, 조금씩 써 내려간 지 5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읽음의 즐거움도 있었고 또 이 책을 읽음으로 시에 관한 이해력이 확실히 예전보다는 넓어진 것 같다고 느낀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시학의 기본적 토대에 관한 내용으로 주체(화자), 대상, 언술, 서정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시학의 여러 영역에 대한 탐색으로 거리, 이중화(반어와 역설), 비유, 비교(은유), 체계(제유와 환유), 좌표(상징과 알레고리), 역피라미드, 음악, 소리-뜻, 인용(인유와 패러디), 감각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보론적 성격의 장으로 환상, 추醜, 전위(아방가드르), 변화(최근 시의 수사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많은 각각의 개별적 내용을 여기에 다 정리할 수는 없겠고 2부에서의 시학의 주요 기법에 대한 것 몇 가지를 추려서 간단히 한 번 정리해볼까 한다.
어조의 기본 형식
ⓛ풍자/ A가 B를 비판하다, 우스꽝스럽게 하다
②예찬/ A가 B를 칭찬하다(주체가 대상보다 열등하다)
③연민/ A가 B를 동정하다(주체가 대상보다 우월하다)
④반성/ A가 A를 생각하다
⑤해학/ B가 B를 우스꽝스럽게 하다
역설(paradox)/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이중화, 이 이중화 장치가 수평적 언어에 구현(비교가능성) A가 B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칭찬하다(A+B, A≠B)
반어(irony)/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이중화, 이 이중화 장치가 수직적 언어에 구현(체계성) A가 겉으로는 B를 칭찬(비판)하면서 속으로는 비판(칭찬)하다(A/B, A≠B)
(+ : 두 요소가 공존, / : 두 요소가 배리, ≠ : 두 요소가 상반됨)
은유(metaphor)/ 어떤 사물에다가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유사성, 수평적 이동 ex)내 마음은 호수(마음=호수, 마음과 호수는 청명함을 공통요소로 연결)
환유(metonomy)/ 은유와 비슷하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지만 둘 사이에 의미적인 공통부분이 없고 실용적이고 사회적 문맥에 근거하여 교환됨, 인접성, 수직적 이동 ex) 꽃다발을 받다 → 축하를 받다, 그는 펜을 꺽었다 → 글을 쓰지 않다, 그는 김소월을 읽고 있다 → 김소월이 지은 시
제유(synecdoche)/ 부분으로 전체를 전체로 부분을 종種을 유類로 유를 종으로 나타냄, 상위/하위 관계, 포괄성(종속성) ex) ‘오십 척의 배’대신 ‘오십 개의 닻’(전체대신 부분), ‘봄’대신 ‘미소짓는 해’(부분대신 전체), ‘암살자’대신 ‘살인자’(종대신 유), ‘인간’대신 ‘피조물’(유대신 종)
은유, 환유, 제유를 벤다이어그램으로 포함관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상징(symbol)/ 비교의 차원에서 생성되어서 체계의 차원으로 올라선 것, 체계화된 은유,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여럿 대 하나이며 하나의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을 거느리는 은유적 병렬의 역상逆像
알레고리(allegory)/ 체계의 차원에서 생성되어서 비교의 차원으로 내려온 것, 작품 바깥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작품에 개입되며 대개 교훈적 의미를 갖음, 원관념 대 보조관념이 하나 대 하나이며 표면의 의미가 이면의 의미와 상반되는 반어의 역상
마지막으로 은유, 환유, 제유, 상징, 알레고리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위 도표에서와 같이 은유-제유-환유의 삼각형, 상징-알레고리-환유의 삼각형, 은유-알레고리-제유의 삼각형, 제유-상징-환유의 삼각형, 4개의 삼각형이 만들어짐, 각 삼각형에서 환유는 나머지 둘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함.
그러면 위와 같은 수사학의 몇 가지 이론들의 예가 되는 2개의 시와 그 해설을 적어본다.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
하루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
꾸루룩거리는 배에는 푸른색도 흰색도 적(敵)이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성(性)도 윤리(倫理)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
여름이 끝난 벽(壁) 저쪽에 서 있는 낯선 얼굴
가을이 설사를 하려고 약을 먹는다
성과 윤리의 약을 먹는다 꽃을 거두어 들인다
문명(文明)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규제(規制)로 시를 쓰고 있다 타의(他意)의 규제(規制)
아슬아슬한 설사다
언어(言語)가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성의 윤리와 윤리의 윤리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履行)이다 우리의 행동(行動)
이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김수영, <설사의 알리바이>
(중략)
(P317~ P320)
자작나무 숲에서
최초의 사랑이 있었다
장미의 벼락 속에서
바다와 사막을 지나
여섯 시에 온 여자
모래의 여자
너를 본 순간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악마의 침
오, 행복한 날들
멀리 있는 죽음
하얀 거짓말
뜨겁고 바람 한 점 없는 밤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파괴된 사나이
*소개된 16권의 책의 저자들: 맨 위로부터 밀란 쿤데라, 세르게이 예세닌, 스테판 츠바이크, 잉게보르그 바하만, 앙리 미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베 고보, 이승훈, 준 비에브 브리작, 훌리오 코스타사르, 사무엘 베케트,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 폴 테로, 훌리오 라몬 리베이로, 사가구치 안고, 알프레드 베스터
―함기석, <생은 다른 곳에>
“이것은 전면적인 패러디의 예이다. 시를 이루는 제목과 행이 모두 다른 저자의 책 제목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이어 붙였더니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모자이크화 같은 것이다. 인용만으로 전언을 완성했는데, 그 전언은 인용된 각 행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자작나무 숲에서 태초에 사랑이 싹텄다. 숲은 여성성이고 신비이며 시원이다. 그곳은 사랑의 대상이고, 해명되지 않는 사랑의 힘이며, 최초로 사랑이 발원한 바로 그곳이다. 장미의 벼락은 그 사랑의 만개를 뜻한다. 벼락 치듯 사랑이 꽃을 피웠다.그러나 그 사랑은 바다와 사막을 지나야 한다. 바다와 사막은 사랑의 아픔(바닷물처럼 쓰리게 울다)과 소멸(눈물이 사막처럼 말라버리다)을 대신하는 상징이다. 그곳을 지나 한 여자가 내게로 왔다. 밤과 낮의 경계, 빛과 어둠을 가르는 미명(未明)이거나 박명(薄明)의 시간에 그 여자는 모래의 여자, 곧 석녀(石女)다. 바다와 사막을 거쳤으니 그 여자가 푸석푸석한 몸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만하다. 여자 앞에 선 사나이의 말은 직접화법으로 바뀐다. “너를 본 순간/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식음을 전폐하게 만드는 힘 역시 사랑의 힘이다. 그런 탐닉을 악마의 침이라 부른다. 탐닉의 극한은 늘 악마적이다. 그녀와의 키스는 악마의 침처럼―타액이거나 바늘이었을테니―달콤했고 고통스러웠다. 여전한 사내의 감탄, “오, 행복한 날들”! 죽음은 그들에게 멀리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순간의 열락이 지난 후에 무섭도록 오래된 손님이 찾아온다. 순간의 영원성이, 바꾸어 말해 영원할 것 같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우리는 죽음의 저 아늑하고 무서운 품에 안겨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내지른 기쁨의 감탄문들이 실은 “하얀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이 “뜨겁고 바람 한 점 없는 밤”,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으되 그 격정을 옮길 수 없는 텅 빈 밤. “활짝 핀 벚꽃나무”는 그렇게 환하게 피어올랐다가 속절없이 우수수지고 만다. 물론 사나이도 그렇게 파괴된다. “(P507~P509)
이 책은 시론이지만 다른 많은 시론과 시학 서적들 중에서도 학술적 성격이 강한 편인 책 같다. 특히 책에는 많은 각주가 있는데, 그 각주들은 문예비평가들보다는 철학자들의 책(특히 들뢰즈가 많았음)에서 인용하고 참조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참 문예비평도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구나 느끼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책에 평점을 붙이기가 조금 그렇지만 나에게 도움을 준 측면에서 평점을 매겨보면, 5점 만점에 4점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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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의 짧은 시 산책,
<<행복>>
(2001,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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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쉰다섯 편의 짧은 시를 독특한 가창법으로 읽어주고 있는 아름다운 시 해설서이다. 그 자신 시인이기도 한 정끝별의 ‘짧은 시 산책’은 요설과 객설을 용납하지 않는 서정적 문체로 시의 묘미를 풍부하게 살려낸 한 편의 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까다로운 문학 이론의 논리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삶의 체험과 직관으로 작품의 의미를 풀어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시적 몽상의 세계로 길을 열어 준다는 데 있으며, 이미 잃었던 시의 진정한 매혹을 되찾아 준다는 데 있다. 그런 만큼 《행복》은 간결하고 쉬우면서 동시에 지극한 깊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정끝별은 지식인의 근엄함과 권위적인 화법을 자제하고 정감과 유머가 넘치는 친근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의 언어들은 현학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 구어체의 정겨움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살아있는 음성으로 구현해낸다.
총각 냄새 물씬 풍기는 무밭 곁에
웃음소리 소란스런 배추밭
아낙들 머리에 쓴 흰 수건처럼 환한
달빛 웃음 밤새워 참느라고
배추 고갱이 노랗게 속이 밸 때
무들은 흙 속에서
수음하며 몸집을 불린다
신병 훈련소 같은 무밭
신참 이등병 일개 소대 출소 준비 끝
- 〈채마밭〉, 김영무
한여름밤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로군요. 무밭에서 총각 냄새를 맡고, 배추밭에서 아낙들 웃음소리를 듣는 시인의 감각이 압권이네요. 무청을 드러내 놓고 종횡대로 사열해 있는 무밭의 무들을 ‘출소 준비 끝낸’ 일개 소대의 신참 이등병들로 비유하는 것도 즐겁지 않습니까? 출소 준비를 끝마쳤으니 곧, 툭 불거진 푸른 심줄 같은 무 밑동을 내로란 듯 드러내 놓겠지요? 무밭 곁에 배추밭이 이웃해 있는 이유, 무 몸집이 그렇게 불어 있는 이유,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추밭 곁에 상추밭이, 오이나 가지밭 곁에 깻잎밭이 이웃해 있는 이유, 그게 다 섭리였군요! 궁합이었군요!
김영무의 〈채마밭〉 해설의 첫 구절 “한여름밤의 남녀상열지사로군요”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정끝별은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나 정황을 설명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보는 자’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현재화시킨다. 이를 통해 시적 정황은 장면화되고 독자는 그 생생한 현장에 동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조운의 〈상치쌈〉 해설에서 “입을 크게 벌리자니 눈도 크게 벌어지겠죠. 크게 벌어진 눈의 동자들이 울 너머로 쏠려 있군요”라든가, “그러니까 이 시는 해질 무렵 ‘건들’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순간의 ‘건들’ 풍경이로군요.”(〈건들장마〉, 박용래), “스스로는 물론 단 한 사람의 가슴이라도 따뜻하게 지펴줄 수 있는 마음의 군불, 아니 시의 군불을 지피고 있군요”(〈序詩〉, 나희덕)와 같은 해설 방식을 통해 그는 시적 정황과 독자를 밀착시키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그의 ‘짧은 시 산책’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화법은 ‘의문’과 ‘감탄’이다. “즐겁지 않습니까?” “드러내 놓겠지요?”와 같은 의문형은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반응과 동의를 구함으로써 독자와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적인 것으로 유도해 간다. 그리고 여러 개의 물음 끝에 정끝별은 “무밭 곁에 배추밭이 이웃해 있는 이유, 무 몸집이 그렇게 불어 있는 이유, 이제야 알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알겠습니까?’가 아니라 ‘알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와 교감해 가는 과정을, 그 깨달음의 과정을 공공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해설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지속된다. “그렇군요! 힘이 약한 벌레는 뼈가 밖에 있고 살이 속에 있고, 사람을 비롯한 힘센 동물들은 뼈가 속에 있고 털과 살이 밖에 있었군요”(〈힘센 사랑〉, 정진규), “그러고 보니 우리는 ‘우연히’ 죽은 것들은 먹지 않는군요.”(〈우연한 나의〉, 허수경)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는 처음 시적 진실과 대면한 자의 입장을 취하거나 때로 “전 백로와 두루미와 왜가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왜가리〉, 천양희)라고 자신의 부족을 겸손하게 드러내 놓기도 한다. 따라서 그가 “그게 다 섭리였군요! 궁합이었군요!”라고 말할 때의 감탄은 시에 대한 주관적 도취의 발현이 아니라 발견의 기쁨에 대한 표현이다. 그 기쁨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와 공유적인 것이다. 시적 정황의 장면화, 의문과 감탄 외에 청유와 가정, 유머 등 다양한 어법 구사 또한 독자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이끌어 가는 그의 해설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어법을 통해서 그는 시 너머로 의미를 확장해 가는 몽상의 힘을 보여준다.
사랑도 만질 수 있어야 사랑이다
아지랭이
아지랭이
아지랭이
길게 손을 내밀어
햇빛 속 가장 깊은 속살을
만지니
그 물컹거림으로
나는 할말을 다 했어라
〈7번국도 - 등명燈明이라는 곳〉, 이홍섭
7번국도 변에는 등명해수욕장도 있고 등명낙가사라는 큰 절집도 있습니다. 등명燈明! 참 예쁘죠? 등불로(처럼) 밝힌다! 참 깊기도 하지요? 시인은 등명을 사랑으로 밝혀내고 있군요. 만질 수 있어야 사랑이라니 사랑은 만지는 것이라는 말도 되겠군요. 그러니 시인은 물컹거리는 아지랑이의 속살까지 만져보는 것이겠죠. 아지랑이 그 피어오름이 안타깝고, 아지랑이 그 바장임이 서럽고, 아지랑이 그 농이 아픕니다. 나른한 봄날, 등명에서 만져본 아지랑이 속살이 바로 사랑의 속살이었겠죠? 허나, 만질 수 있으니 상할 수도 있는 거겠죠?
이홍섭의 시 〈7번국도 - 등명燈明이라는 곳〉에는 안타까움이나 설움, 아픔이라는 단어가 없다. 이런 사랑의 감정을 시인은 모두 ‘아지랑이’라는 사물성에 응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의 담박한 아름다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다시 아지랑이의 ‘바장임’이나 ‘농’으로 구체화하는 해설자의 혜안 또한 그에 견줄 만하다. 중요한 것은 해설의 마지막 부분에 “허나, 만질 수 있으니 상할 수도 있는 거겠죠?”가 남기는 의미와 여운의 깊이이다. 만질 수 있는 것을 통해 감각되어지는 기쁨과 충만함은 한편 순간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칫하면 상함이나 덧없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끝별은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지랑이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아지랑이의 ‘속살’을 만지고 있는 시적 화자의 정황을 그는 자기의 몽상 속에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아름다운 것, 시는 매혹적인 것, 혹은 시는 낭만적인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만큼 그것에 빠져드는 일은 쉽지 않다. 시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이유는 시의 참맛을 느끼기도 전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낭패감부터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상의 언어와 다를 바 없는 말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시는 언제나 해석을 요구하는 언어의 함축적 집합물로 느껴지곤 한다. 이것이 시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시가 따분한 일상의 재현이라면 우리는 굳이 시를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물의 비밀을 꿰뚫는 떨림의 언어, 깊은 내면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고뇌의 언어와 만나기 위해 우리의 감성은 섬세하고도 역동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위로받으며 풍부해지고 넘쳐나며, 그리고 삶의 진실에 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끝별의 《행복》은 시와의 즐거운 만남을 주선해주는 정감의 시학이라 할 수 있다. ■
엄경희
1963년 서울 출생.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현재 숭실대 및 이화여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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