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어슷비슷한 시, 상투적인 시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춘문예 제도에서 보듯이 공식과 전형으로 만들어진 타락한 미의 형식, 키치에 가까운 시가 판을 치고 있다. 진정한 미학에서는 중심과 주변이 뒤집혀 있다. 안팎을 뒤집은 영역이 미의 영역이다. 미학에서 주류란 대개는 전복의 대상이고 아주 잠깐 동안은 전복의 결과다. 전위란 앞서 있는 게 아니라 밀려나 있는 것이다.
우리 시의 중심이 서정시에 있다는 것은 계량적인 진실이며, 우리 시의 주변이 서정시 일색이라는 것은 균질적인 진실이다. 안팎을 뒤섞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팎이 존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미학의 비유적 실체는 소라고둥이다. 그것은 소용돌이처럼 혼란스럽지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거칠게 튀어나가서는 덧없이 사라지는 거품이 늘 더 많은 법이다.
우리는 이 거품의 족보를 알지 못한다. 시에 실험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순간, 시는 실패와 좌절을 제 안에 아로새긴다. 현대성과 감상성을 통합하려 했던 박인환이 실패했고, 지적인 조작으로 해학을 실험했던 송욱이 좌절했다. 그러나 그 원심력을 통해서만 미학은 제 영역을 넓혀나간다. 시도의 방법은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다. 없는 중심에서 배회하지 말고 있는 힘껏 박차고 나가야 한다. 가장 높은 데서 시도한 번지점프가, 가장 먼 반탄력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실험만이 중심으로 돌아온다.
실험에 성공한 시들이 새로운 서정을 만든다. 멀게는 기하학과 수학으로 욕망을 설명한 이상이 그랬고, 가깝게는 중얼거림과 중언부언으로 운율을 만든 김수영과 중성적인 문체에 개인의 발언을 싣고자 했던 김춘수가 그랬다.
그것은 완성된 시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비스듬히 횡단하는 일, 거기에서 새로운 미의 곡선이 그려진다. 그 선은 늘 모자라거나 넘치지만, 그 자리가 비너스를 낳은 조개껍질이 놓인 곳이다.
누가 횡단했는가? 가령 80년대에는 허물어진 가족으로 사회를 축약한 이성복이 있었고, 허물어진 몸과 언어를 들여다본 황지우가 있었고, 의식으로 무의식의 저 아래를 탐색한 박남철이 있었고, 격렬한 발언을 하는 소심한 화자를 내세운 장석주가 있었고, 공적인 언어를 극한까지 밀고 갔던 김남주와 백무산이 있었고, 시에 악보를 그려 넣은 박태일이 있었고, 서술적 상상의 지도를 그려 보인 김혜순이 있었고, 들끓는 자의식을 가장 단순한 명제로 요약했던 최승자가 있었고, 物과 物物과 헛것을 이야기한 최승호가 있었다. 그 다음 시기에는 정교한 언어 세공사인 송재학이 있었고, 대중적 감성을 파토스로 삼은 유하가 있었고, 일상의 해부학자인 김기택이 있었고, 物主의 서정을 적어간 기형도가 있었고, 시의 에스페란토어를 썼던 장정일이 있었다.
대가들의 횡단 역시 그치지 않았다. 장려한 정신의 인공 낙원을 건축한 조정권이 있었고, 날것으로 사물을 채집한 오규원이 있었고, 극서정의 영역을 선회한 황동규가 있었고, 한국인의 족보를 작성하려했던 고은이 있었고, 아득하고 막막한 그리움 저편을 호명한 김명이 있었고, 담시와 대설의 시인 김지하가 있었고, 바다 저편에서 시의 몸을 대신 보내어 살게 한 마종기가 있었다.
실험의 결과가 괴물이라는 것은, 실험 이후에나 이전에나 우리가 그 결과물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걸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비너스는 모두 전 시대의 추물이었다. 미적 성과에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많은 작품들은, 사실 미래로 뻗은 우리 미의 촉수와 같은 것이다. 미래의 거울로서의 작품들은, 우리의 자화상을 일그러뜨린다. 어쩌면 그렇게 일그러진 모습이 우리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파격은 정격의 반대로만, 부정어로만 정의될 수 있다. 실험을 그렇게 잘라내고 절단하는 작업이다.
최근의 예를 보자. 박상순은 남성, 여성의 말을 버리고 중성어를 시에 실험했고, 이수명은 사물에서 인간화된 의미를 도려내고 사물들끼리의 인과적 관련을 드러냈으며, 함성호는 서정의 어법을 파기하고 관습화된 전문용어들로 이루어진 서정을 구현했고, 차창룡은 이것과 저것을 이것 아님과 저젓 아님의(교차 부정의) 대상들로 드러냈고, 김참은 상상적 풍경을 서사화했고, 함기석은 기호 내용을 박탈한 기호 표현들의 놀이를 조작했다. 이들의 작품들은 당대의 미적 기준에서는 무엇인가 부족하지만, 같은 말로 무엇인가 잉여적이다. 그 부족분과 잉여분이 이 작품들의 미적 효과다.
새로운 시도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불평/불편함은 각질의 표면 아래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미에 대한 기운과 통한다. 굳은살을 터뜨리고 나온 새 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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