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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모더니즘 시, 아방가르드 시의 실험 / 한성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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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례의 현대 일본시 탐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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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래파·다다이즘 운동 그러나 이것이 일본에서는 종래의 민중시파에 대한 반대 운동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1921년 전후의 히라토 렌키치(平戶廉吉, 1893~1922) 등의 일본 미래파 운동은 후에 이어지는 일본 시단의 흐름에서 볼 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 미래파는 서구보다 조금 늦게 도입되었는데, ‘일본 미래파 운동 제1차 선언’은 도회미라든가 기계미를 노래하고, 의성어나 의태어 또는 수학적 기호까지도 채용해서 문체상의 형식 파괴를 꾀했다.
공간적 입체시라고 칭했듯이 시각을 중시해서 글자의 크기를 크고 작게 구분하거나 글자 배열을 다르게 하는 등 표기의 형식이나 소재에 중점을 두고 시각적인 변화를 꾀했는데, 이 또한 마리네티를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 같은 표기법의 새로운 운동은 기성의 의식을 파괴하고 종래의 자유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본 미래파 운동이 전개되던 이 무렵부터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과 대전 직후의 전위(前衛)예술이었던 다다이즘 운동이 서서히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다.
다다이즘은 근대생활의 권태와 무가치에 대한 반발이었고, 니힐리즘과 페시미즘을 보강한 정신이었는데, 세계대전으로 인해 생겨난 정신상 폐허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세계대전 후의 일본사회의 공황이나 불안, 더욱이 관동대지진의 충격과 함께 자연스럽게 일본사회에도 스며들었다.
이 시는 그가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하고 있던 무렵의 시라고 하는데, 비교적 얌전하게 쓴 작품이었는데도, “광기와 치매, 넌센스와 엑센트릭과의 교향곡” “축농증과 변태성욕과의 디스콜드”라는 평을 받았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근대적 고뇌의 둔화’였다. 자신의 관능적 향락 외에는 가치를 두지 않고, 모든 권위를 부정하며 철저하게 무도덕함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다다이즘 시에서 선두에 선 시인은 하기와라 교지로(萩原恭次郞, 1899~1938)였다. 그는 쓰보이 시게지(壺井繁治, 1897~ 1975) 등과 함께 《적과 흑》을 내고, 제1회 선언에서 “……예술의 우상적(偶像的) 가치를 파괴하라! 그 공허한 ‘언어’의 개념을 방산시켜 버려라! 불을 질러 버려라!”라고 외쳤고, 기존의 존재 일체를 부정하면서 ‘아나키스트적인 파괴를 위한 파괴’를 부르짖었다. 그들은 기호나 부호를 시에 도입하고, 크고 작은 글자를 자유로이 배치하고, 읽어도 들어도 느낌이 이상한 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그것은 전통 서정과의 철저한 결별이었다. 그러한 시의 한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하기와라 쿄지로의 《사형선고》는 크게 주목받은 시집이었다. 그의 시에 관통하고 있는 것은 다카하시 신키치 등에서 보이는 무기력한 데카당스의 정신과는 달리 아나키스트적인 절규이고 단말마적인 도회 문명의 거부와 비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다카하시 신키치 등에서 보이는 향락적 요소가 적고 방향이 불분명한 분노와 절망, 불안과 초조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 시집에서 시 한 편을 감상하자.
하기와라 쿄지로의 시집 《사형선고》는 장정, 지면 구성, 삽화 등에 구성파, 입체파의 그림을 넣어서 신기함을 더해 놓았다. 이처럼 일본에서 새로운 시운동과 함께 새로운 예술이 발생했던 것이다. 즉, 1922년 전위화가, 입체파, 미래파, 표현파 등의 그룹인 ‘아크시온’이 결성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독일 표현파를 받아들여 조직한 ‘마보(MAVO)’의 신운동이 일어났다. 마보는 다다이즘의 조형예술상의 표현으로서 관동대지진 후의 불안한 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3과 조형예술협회’를 만들어 전람회를 개최했다. 그 ‘의식적 구성주의’의 데몬스트레이션은 짧은 시간에 일본사회의 문화에 대한 눈높이를 크게 높여 놓았다. 이것은 세계대전 후의 세계의 불안과 그에 따라 어지러운 일본사회의 반영이었고, 또한 직접적으로는 개인주의의 사상과 감정이 막다른 길에 이르면서 생겨난 개성 붕괴 현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사회적인 불안과 어려움을 직접 헤치고 나갈 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는 곳에 무기력한 데카당스가 움트고, 해결할 방향을 찾지 못하는 곳에 아나키스트적인 반항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 시인들의 활동에 대한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시대감각을 문자로서 가장 날카롭게 표현한 시인들이었다. 이 시운동이 직접 목표로 한 것은 시단의 중추적인 존재였던 민중파 시인 중심의 ‘시화회’였다. 또한 ‘일본시인’의 흐리멍덩하고 미적지근한 민주주의, 자유주의 정신과 그것을 근저로 한 지루한 표현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다. 이에 대립은 깊어지고 서로 협조하자는 슬로건은 이미 힘을 잃고만 시대에 민중파 시인의 해체는 시간문제였다. 그들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던 《시라카바(白樺)》도 1923년에 폐간되었고, 1926년에는 ‘시화회’도 해체되고, 연간으로 출간하던 《일본시집》은 제8집을 끝으로 발행을 멈춘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모더니즘의 뒤를 이어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시작된다. 조선 시인 이상(李箱)과 일본 시인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
이상(李箱, 1910~1937)의 문제작 《오감도》는 당초에는 30회 연재 예정이었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거센 항의 속에 15회로 끝을 맺었다. 이 시의 난해함으로 인해 “〈오(烏)감도〉는 〈조(鳥)감도〉의 오자가 아니냐” “미친놈의 잠꼬대가 아니냐” “이 무슨 개수작이냐”라는 등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사실 당시 우리 시단이나 독자들의 수준에서 볼 때, 이와 같은 항의에도 전혀 이유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인 작품 〈오감도〉는 〈시 제1호〉에서 〈시 제15호〉까지 이상의 나이 25세이던 1934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하의 식민지 조선의 젊은 시인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이상 역시 많은 작품들을 일본어로 썼다. 한국 모더니즘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이상의 이 작품은 “무서운 아해는 가해자, 무서워하는 아해는 피해자, 13인의 아해는 불길스럽고 타락한 무리, 막다른 골목은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적 상황, 뚫린 골목은 현대인의 유일한 희망이며, 띄어쓰기를 무시한 까닭은 모든 형식에 대한 부정이나 반발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시 제1호〉 끝줄에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라고 한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한 초현실주의적인 시이다.”라고 《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에 정리되어 있다. 또한 이상에 대한 평가와 견해에서, 조선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인 김기림 시인은 “이상의 죽음은 한국문학을 50년 후퇴시켰다.”고 극찬했고, 최재서는 “이상의 문학은 독자의 곤혹이 있음에도 단연히 환영해야 할 경향이다. 현대의 분열과 모순에 이만큼 고민한 개성도 없다. 그는 풍자, 위트, 야유, 기소(譏笑), 과장, 패러독스, 자조(自嘲), 기타 모든 지적 수단을 가지고 가족생활과 금전과 성(性)과 상식과 안일에 대한 모독을 감행하였다. 이상의 예술은 미완성이다.”라고 이상의 시를 모더니즘의 시각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전위성(前衛性)과 한국 주지시의 풍토를 만든 시인으로도 손꼽았다. 〈오감도〉를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시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리듬감이 있어서 재즈 연주나 랩을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도시인의 수줍은 감성이 아른댄다. 어두운 전쟁의 예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젊은 시인들이 새로운 자기표현의 실험을 모색했던 그 시대의 공기가 이 시에 독특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경성(서울)의 골목길을 질주하는 13명의 아해의 이미지와 ‘무섭다, 무서워하다’라는 말의 반복은 왠지 불길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들지만, 마지막 절에서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고 그때까지 끌고 왔던 이미지를 모두 부정한다. 이는 구성상의 테크닉으로도 보이지만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로운 사고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상은 〈오감도〉 연재가 중단되고 난 2년 후에 도쿄(東京)로 떠난다. 그리고 ‘사상불온’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건강 악화로 석방되지만 같은 해에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27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유해는 돌아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이 27세로 도쿄에서 세상을 떠난 1937년에 동시대의 일본시인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 1907~1937)가 30세로 요절한다. 일본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 나카하라 츄야는 시의 이단아라고 일컬어질 만큼 일본 시단에서 혁명적인 존재이다. 이상과 츄야는 성장 과정이나 처해 있는 상황은 크게 달랐지만 도쿄와 경성이라는 두 도시의 길모퉁이에 선 젊은 두 시인이 길 가는 이들에게 던졌을 시선을 상상해보면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사람을 좋아하고 인생을 사랑하면서도 그 말을 입 밖에 내면 왠지 비틀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꼬여 버리고, 도시의 고독을 섬뜩해 하면서도 결국은 그곳을 가장 편한 장소로 택하고 마는 그런 젊은이의 모습이다.
단어의 반복과 거기에서 빚어지는 독특한 리듬, 그리고 거기에 감도는 적요감이 이상과 나카하라 츄야 두 시인의 시에 공통되는 점이다. 도회의 최신 건축에서 일하는 샐러리맨의 느긋하고 건강한 소시민 의식을 자기 밖의 세계로서 객관화하면서, 보이지 않는 유리창 너머 거리의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애정과 눈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일종의 문병 비판이라는 감이 든다. 오히려 시인은 ‘생’에서 멀리 떨어져 ‘생’과 ‘사’의 경계에 서서, 그리운 듯 ‘생’을 뒤돌아보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결코 샐러리맨을 야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눈길은 한없이 슬프면서도 한없이 따스함이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한 평자도 있다. 나카하라 츄야가 이 시에서 노래한 일본 샐러리맨의 점심시간 풍경은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이 시는 나날의 단조로운 반복을 잘 견디어내는 서민들에 합류할 수도 없고 그 일원이 될 수도 없는 자신의 고독과 허무를 유머로 포장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죽음과 파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릴 듯한 불길한 예감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시대, 표면은 모더니즘 문화에 들뜬 도시, 그 도시에서 마지막까지 새로운 자기표현 방식을 추구했던 한일의 두 젊은 시인이 같은 해에 요절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두 사람의 연관성으로 상상이 이어진다. 이상이 세상을 뜨기 전 도쿄에서 지냈던 그 2년 동안, 이 두 시인은 어쩌면 도쿄의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스쳐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에는 가장 높고 큰 빌딩이었던 도쿄역 앞 ‘마루(丸)빌딩’을 올려다보면서 도회적 사고로 시상을 떠올렸을 것 같다. 이상의 대표적인 소설 《날개》에서는 주인공이 경성의 미쓰코시(三越)백화점 옥상에서 잃었던 날개로 비상하는 꿈을 꾼다. 이상은 빌딩 위에서 비상하는 꿈을 꾸고, 나카하라 츄야는 빌딩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식민지 청년 이상의 비상을 알았다면 나카하라 츄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상과 츄야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이 두 시인에 대한 열기는 한국 시단이나 일본 시단이나 변함이 없다. 츄야 신화라고 할 만큼 에피소드나 일화가 많고 한국에서도 이상은 독보적인 존재이다. 여전히 젊은 시인들은 그들을 추종하고 있으며, 이 두 시인이 각각의 시단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시공을 초월해서 어떤 시대에도 젊은이들에게 존재할 법한 본질적인 고뇌와 갈등이 이들 두 시인의 시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상과 츄야의 시가 울림을 주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우리 누구나가 젊은 시절에 경험했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밀쳐두었던 뭔가를 독특한 방식으로 되살려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계절풍에 날리는 흙먼지와 눈송이가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오후의 거리에서 우연히 조우한 조선여자는 야위어 푸석거리는 피부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그리고 마르고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달아나듯이 급히 걸어간다. 자신은 그저 멍하니 공허한 눈으로 가련한 젊은 조선여자를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녀는 자신에 대해 괴이해 하면서 어떤 동정과 불쌍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두 사람에게 공통된 생활의 피로가 서로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묶은 것일까. 먼지 속에서 서둘러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가버렸지만 그녀에게 뭔가 묻고 싶어 한다. 이 시는 다다이즘과 폴 베를렌느의 세계가 혼합된 시이다. 이런 시를 쓸 만큼 당시 츄야의 마음은 추레하고 늘 추웠으며 공허한 절망감이 가득했다.
《시와 시론(詩と詩論)》과 《아(亞)》의 모더니즘 시인들 모더니즘은 일본 시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 결과 근대시가 현대시로 바뀐다. 그것은 《시와 시론(시토시론, 詩と詩論)》(이하 《시와 시론》으로 통칭. 이 잡지는 후에 《문학》으로 이름이 바뀜)과 《아(亞)》가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은 당시 일본의 시 풍토와 확연히 구분을 두고, 주지적인 시적 공간에 서정과 자연을 배제한 선명한 이미지의 신시운동의 전개를 꾀했다.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1898~1965)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중국 대련에서 다키구치 다케시(口武士, 1904~1982), 기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1900~1990) 등과 함께 시문학지 《아(亞)》를 창간한 것은 1924년이었다. 이 신시 운동은 이미지즘 시운동과 일맥상통하는 단시(短詩)운동과 산문시의 시도였는데, 당시의 실험적인 여러 동인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개성이 두드러진 시문학지였다. 도쿄(東京)보다는 좀 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있고 감각성이 살아 있는 중국의 대련에서 발신되던 《아(亞)》는 일본의 젊은 시인들에게 큰 자극이었다.
닷탄해협은 사할린 북부와 시베리아 동부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동해에 접해 있다. 단시 〈봄〉은 하이쿠(俳句)의 5·7·5라는 음수율과 형식을 따르지 않았는데도 원문을 읽으면 독특한 리듬이 있다. 그리고 이 시는 구어체의 새로운 내재율이 있는 데다 큰 스케일의 영상을 보여 주고 있어서 짧은 시임에도 결코 짧아 보이지 않는다. 낱말과 영상이 하나가 되어 한 편의 시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봄이 온 닷탄해협에 얼음이 서로 부딪치고 있고, 바다가 파도치는지 잔잔한지는 알 수 없지만 하얀 바다 위를 한 마리 희고 작은 나비가 팔랑팔랑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조선의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金起林, 1908~?)의 1946년에 간행된 시집의 표제작 〈바다와 나비〉가 오버랩된다.
모더니스트로서 이상과 함께 한국의 모더니즘 시에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 중 한 사람인 김기림은 일본에서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활동했고, 1930년에 평론가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정착시켰으며,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1920년 전반기 한국시단의 주류였던 낭만주의에 대치하고, 또한 1920년대 후반기 한국 시단의 주류였던 사회주의적 경향에도 대치하는 것이었다. 김기림은 자신의 시집 ‘작가의 말’에서 “이제부터의 시인은 시인들의 노력에 의하여 발견된 새로운 방법들을 종합하여 한 개의 전체로서의 시를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기술에의 새로운 인식은 능동적인 시정신과 그리고 또한 불타는 인간 정신과 함께 있지 아니하면 아니된다.”라고 썼다. 안자이 후유에는 유년기에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중국문학 고전을 탐독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학생 때는 하이쿠에 열중했고, 졸업 후에도 하이쿠 형식에 의한 시의 스케치를 연구한다. 1920년에 교사로 근무하던 부친을 따라 중국의 대련에 건너간다. 하지만 다음 해에 지독한 추위로 인해 오른쪽 무릎 관절염을 앓게 되고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 투병 생활 1년 6개월 만에 퇴원한 후로는 〈대련신문〉 〈만주일일신문〉 등에 단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다음은 안자이 후유에와 함께 《아(亞)》를 창간한 기타가와 후유히코와 다키구치 다케시의 시를 감상해보자.
이 〈말〉은 안자이 후유에의 〈봄〉과 함께 유명한 시이다. 그러나 〈봄〉과는 달리 침울한 공기가 감돌고 있다. ‘말’ ‘군항’ ‘내장’이라는 3개의 단어가 충돌해서 환기하는 영상은 쉬르리얼리즘 화가가 그리는 한 장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그 영상에서 감지되는 것은 전쟁의 섬뜩한 공기이다.
‘말’은 군마가 되고, ‘군항’에 군함이 정박해 있는 광경이 떠오른다. 또한 ‘말’이 시대나 세계를 상징하는 비유라고 한다면 이 시는 세계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으며,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자이 후유에의 〈봄〉이 서정적인 영상의 시라면 기타가와 후유히코의 〈말〉은 첨단적인 풍자성이 녹아 있는 리얼리즘의 시이다. 기타가와 후유히코의 시 〈동백꽃〉을 한 편 더 감상해보자.
기타가와 후유히코는 초등학교 입학 후에 만주철도로 전근 가는 부친을 따라 중국에 건너가 현지 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마치고, 1919년에는 대학 입학을 위해 일본에 돌아온다. 그 무렵에는 문학에 관심이 없었으나 뤼순중학교의 동급생인 키도코로 에이치(城所英一)의 권유에 의해 번역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대련의 집에 돌아가 있던 중에 안자이 후유에 등과 의기투합해서 《아(亞)》의 창간 멤버에 참가한다.
《아(亞)》의 또 한 사람의 창간 멤버 다키구치 다케시의 〈누에〉는 착 가라앉은 맑은 호수처럼 깊은 고요가 가득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이미지가 명확하고 신선하다.
누에와 군함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이미지를 조합해서 표출시킨 시의 영상은 오히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리얼리티가 있다. 이 시에서는 군함의 실루엣을 배치해서, 안정되고 평온한 일상이 전쟁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비춰준다. 1928년 9월, 레스플리 누보(신잡지 정신운동)를 표방하여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가 편집인으로 《시와 시론》이 창간되었다. 이 운동은 사회적, 정치적인 것, 그리고 사상이라고 불리는 모든 관념의 속박이나 중압으로부터 순수하게 시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시로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이 순수한 예술 창작을 모든 지적인 활동에 맡기는 것에 주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 운동은 그 이전의 상징시의 낡은 미학을 부정하고 민중파의 세계관에 절망하며, 시에 과중한 효용을 강요하는 프롤레타리아시파에 이의를 주창한 젊은 시인들에게 새로운 예술성 추구의 길을 열어주었다.
창간 동인은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기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다키구치 다케시(口武士) 이지마 다다시(飯島正), 우에다 도시오(上田敏雄), 간바라 야스시(神原泰), 곤도 아주마(近藤東), 다케나카 이쿠(竹中郁), 도야마 우사부로(外山卯三郞),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였는데, 1929년 9월의 제5권부터는 기고자 제도로 바뀌어, 차츰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郞), 다키구치 슈조(口修造), 사사자와 요시아키라(笹美明), 요시타 잇스이(吉田一)、기타조노 가쓰에(北園克衛), 호리 타쓰오(堀辰雄), 마루야마 가오루(丸山), 무라노 시로(村野四郞) 등이 참가했다. 이들 모두가 일본 시단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거성들이어서 일부러 모두 열거했다. 그 중에서 《시와 시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하루야마 유키오의 시를 살펴보자.
‘흰 소녀’라는 단어를 84개나 늘어놓은 연은 ‘어떤 하나의 관념을 전달하거나 묘사한 것이 아니고, 포름이 기술되는 것에 의해 의미의 세계가 나온다’라고 한 포르말리즘(형식주의)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포름만으로 시에 의한 이화(異化) 혹은 비일상화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즉, 여기에는 이화나 비일상의 현실이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외형적인 포름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재 일본에서 비주얼 시 혹은 콘크리트 시의 장르에 들어가 있지만 “발표 당시는 ‘포르말리즘의 정신은 여기서 극한까지 도달했다’라는 평을 받았을 만큼 기념비적인 실험작이었다.”라고 안자이 후유에는 말년에 논했다. 안자이 후유에의 말대로 이 시는 당시 시의 혁신 운동에서 거대한 영향력이 있었고, 현대시의 발전 단계에서 기념해야 할 모뉴먼트였다. 그러나 하루야마 유키오의 공적은 그의 시 작품보다는 《시와 시론》의 편집자, 시운동의 주도적 이론가로서 일본 시사(詩史)에서 엄청난 공적을 남겼다. 그리고 하루야마의 시단에서의 활동은 그 후 일본 현대시의 전개에서 큰 획을 그었다.
그것은 《시와 시론》과 병행해서 출간한 《현대예술과 비평총서》 전21권, 계간 《문학》 《신영토》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으며, 그만큼 그는 서구 문화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야마는 그 후로도 신진 외국 문학자를 동원하는 등, 기성 시단에 끊임없이 도전해 나간다. 조직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신(新)산문시, 쉬르리얼리즘, 포르말리즘, 시네(cine)시 등의 시운동을 전개하면서 쇼와(昭和, 1926년에서 1989년까지, 일본 쇼와 천황 때의 연호)시대 시문학지의 골격을 형성해 나간다. 그 활동에서 중심적인 존재였고, 모더니즘 운동을 카리스마적으로 이끌었던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郞, 1894~1982)의 시를 감상해 보자.
고대 그리스 신들의 세계를 상상해 보면 고대 그리스적 풍경이 환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맑은 햇살과 신선한 공기가 충만한 눈부신 아침이 눈앞에 펼쳐진다. ‘(엎어진 보석) 같은 아침’이라는 1행의 비유는 3행의 ‘신의 탄생일’로 이어지고, 그 ‘신의 탄생’을 집 앞에서 신들이 속삭인다. 엎어진 보석처럼 투명하고 맑은 ‘날씨’, 아침은 밤의 (엎어진 보석)에 의해서 빛난다. 이 시에는 일본 근대시에 감도는 일본식 정서나 탐미적, 환상적인 정서가 없고, 드라이하고 지적인 서정이 있다.
니시와키는 청년기부터 그리스 문학이나 로마 문학 등의 고전문학을 애호했고, 또한 프랑스의 보들레르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의 새로운 시인들의 시를 좋아했는데 그러한 문학 서적과 시를 많이 읽으면서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니시와키 자신도 1963년에 나온 시집 말미에 이렇게 썼다. 〈날씨〉라는 시는 이 《Ambarvalia》에 수록되어 유명해진 단시이다.
니시와키 준자부로를 ‘초현실주의 시론’을 썼다고 해서 쉬르리얼리즘 시인이라고 단정하기 쉽지만 자신은 프랑스적인 쉬르리얼리스트가 아니고 오히려 쉬르내추럴리스트(초자연주의자)이고 싶어 했다. 쉬르리얼리스트들은 현실감과 지성을 뛰어넘는 구체적인 요소 속에 초현실적인 관계를 설정했고, 메커니즘은 인스피레이션(영감)이나 직감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리얼리즘이나 심리문학에 비해 자유로운 상상을 중시했다. 일본에서도 꿈속의 잠재의식을 분열적으로 기술한 우에다 도시오(上田敏雄)라든가 심리적 자동성의 순수한 표현을 남긴 다키구치 슈조(口修造) 등이 있다. 그러나 기타가와 후유히코, 하루야마 유키오, 니시와키 준자부로 등은 주지적인 형식의 독립을 주장했고, 대상의 감성적인 세계를 중요시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진정한 쉬르리얼리즘과는 약간 방향이 달랐다.
니시와키 준자부로는 시집 《Ambarvalia》를 내면서부터 전후에는 유럽풍에서 동양풍으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모더니즘 시인들의 여러 작품을 감상해보자. ‘의미 없는 시를 쓰는 것에 의해 포에지의 순수는 실천된다’고 했던 기타조노 가쓰에(北園克衛, 1902~1978)는 정서도 의미도 배제하고 감각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순수한 실험적 모더니즘 시인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 《VOU》를 창간했다. 그의 시 〈기호설〉은 추상화 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이 시는 주지적이고 이미지적인 시의 방법을 확립한 시라고 일컬어진다.
한성례 |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세종대학교 일어일문과 졸업. 1986년 《시와 의식》 신인상. 시집으로 《실험실의 미인》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일본어시집)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리터의 눈물》 등 다수. 허난설헌 문학상 수상. 현재 한일 두 나라의 문학지에 교차해서 시를 번역 소개하며 시인·번역가로 활동 중.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겸임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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