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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작가협회 그 발자취
2015년 08월 16일 18시 39분  조회:5778  추천:1  작성자: 죽림


 

 

 

건국후 중국에 조성된 새로운 사회력사적환경과 조건,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생활의 제반 분야에서 거대한 변혁이 이룩된 거창한 현실은 조선족작가들로 하여금 감격과 새로운 지향으로 흥분되게 하였으며 또 그들에게 문학활동의 사회적기반 확립을 위한 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새 시대의 조명을 받는 새로운 민족문학건설에 떨쳐나설것을 절박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시대적요청에 부응한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해방후  해방전 이민문단의 중견작가들이 거의 다가 조선반도에로 대이동함에 따라 이민문단은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중국에 남은 해방전 작가로는 리욱과 김창걸뿐이였으므로 조선족문단은 백지상턔와 다름없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문인과 관계인사들이 해방과 함께 문학단체의 결성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 단체들로는 간도문예협회(연길), 동라문인동맹(연길), 동북신흥예술협회(목단강), 중쏘한문화협회(연길), 로농예술동맹(도문)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단체들은 단명(短命)이였다.  작가들은 자기의 조직적인 문학단체도 없이 분산적으로 창작활동을 벌려야 했음으로 이런 상황은 조선족문학발전을 엄중히 위협하고있었다. 

 

변화된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치열한 민족의식과 조선족문학건설의 사명감을 가진, 전국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적지 않은 작가들 이를테면 흑룡강성 목단강, 할빈지역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고있던 김례삼, 김태희, 최수봉, 김동구, 리홍규, 임효원 황봉룡, 최현숙, 길림성 통화, 매화구지역에서 문학적기량을 과시하고있던 최정연, 주선우, 백남표 그리고 관내의 중국 항일 근거지 태항산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였던 최채, 김학철, 정길운, 고철 등 작가들이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새로운 조선족문학건설을 위해 건국 전야와 직후 당시 조선족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인 연변의 연길에 이주함과 아울러 연길시와 연변의 기타 지역에서 문학창작에 정진하고있던 작가들 이를테면 리욱, 김창걸, 현남극, 채택룡, 마상욱, 설인, 김순기, 홍성도, 김창석, 서헌 등과 대회합하여 새로운 “문화부대”를 이루게 되였다.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문학활동에는 곤난이 첩첩하였고 단체결성, 잡지창간, 인사배치 등에서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무시로 나타나서 당시의 작가들로 하여금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부대”의 문인들은  만난을 박차고 문단의 사회적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50년 1월 15일, 제1차중화전국문학예술일군대표대회(1949년 7월 2일-1949년 7월 19일)의 정신을 받들고 최채, 현남극, 김동구, 임효원 등의 발기하에 연변문예연구회를 성립하였다. 성립대회는 연변일보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 대회당에서 열렸다. 주임에 최채, 부주임에 리욱, 김동구, 상무위원에 전춘봉, 김태희, 고철, 채택룡, 백남표 등 9명으로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산하에 문학,연극, 음악, 무용, 미술 등 5개 부를 두고 문예창작활동을 여러모로 조직하였다. 당시 회원은 26명이였다. 이 연구회는 건국후 조선족문단의 기반을 닦기 위한 첫 조직적거동이였다.  

 

하지만 이 연구회는 조선족문예사업의 급속한 발전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1951년 4월 23일에 연변문예연구회를 해소하고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주비위원회를 결성(주임 김동구)하여 그 산하에 문학, 연극, 무용, 미술, 음악 등 5개부를 두었다. 기관지로 《연변문예》를 6호까지 발간하고 페간되였다. 이 시기의 주필은 김동구, 편집위원은 김동구, 김순기, 리홍규, 채택룡이였다.

 

그 해 8월, “3반5반(三反五反)”운동중에서 정치형세의 변화에 따라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지도부를 다시 정돈하였는데 주임에 최채, 김학철, 부주임에 서령, 비서장에 임효원이였다. 그해 12월에 이르러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또 이른바 “인사변동”을 단행하여 김학철을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복잡다단한 주비작업을 거쳐 1953년 7월 10일, 드디여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제1차대표대회! (대표 56명, 회원 75명)를 열고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일군련합회(략칭 연변문련)를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연변문련은 1954년 1월 《연변문예》지를 복간(1956년 12월까지 총35호를 내고 페간)발행함으로써 조선족작가 예술인들에게 활무대를 마련해 주었고 그들의 창작활동을 추진하였다. 연변문련 창립 당시의 주임에 배극, 리홍규, 부주임에 정길운, 김학철,, 위원들로는 리홍규, 주선우, 임효원, 김태희, 조득현, 조무, 김순기, 김창걸, 배극, 정길운, 김학철, 정명석, 조창선, 정진옥 등 13명이였고 《연변문예》주필은 리홍규, 부주필로는 정길운, 김순기였다. 1956년 3월, 중공연변주위선전부에서는 《연변문예》편집위원회를 개선하였는데 주필로는 리홍규, 부주필로는 정길운, 편집위원들로 김순기, 최현숙, 홍성도, 임효원, 주선우, 리근전, 김학철, 황봉룡 등이였다.

  

제1차연변조선족자치주문예일군대표대회와 연변문련의 성립은 조선족문예사업이 조직적인 궤도에 들어섰다는것을 표징하는바  이것은 조선족의 당대문학발전사에 있어 일대전환을 표시하는 리정표적인 의의를 띠고있다.

   

연변문련의 성립 및 활동은 연변문학발전에 추진적역할을 하였지만 날로 확대되여가고있는 작가군체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따라서  그 당시 작가들은 자기들을 대변할수 있는 독립된 작가협회의 탄생을 갈구하였다.

 

바로 이런 시각에 리홍규와 황봉룡이 연변지역의 문인들을 대표하여 1956년 1월 중국작가협회 주최로 된 소수민족작자좌담회에 참석하게 되였는데 그 좌담회에서 그들은 연변문단 상황회보와 더불어 연변에 작가 자체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중국작가협회 지도부를 감동시켰다. 중국작가협회는 북경에서 열린 제2기 제2차리사회(1956.2.27)에서 신강위글자치구, 내몽골자치구 및 연변조선족자치주 등에 중국작가협회 분회를 성립할것을 결정하였다. 중국작가협회 동북분회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의 성립을 위해 리욱 등 연변작가 10여명을 회원으로 발전시켰다. 연변에서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설립준비위원회(주임:배극, 위원:리홍규, 김순기, 주선우, 비서장:임효원)를 구성하고 복잡다단한 준비작업을 거쳐 1956년 8월 1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소에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연변작가협회 전신) 제1차회원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의 탄생을 선언하는 이 대회는 중국작가협회 지도부와 연변주위 지도부의 각별한 배려를 받아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당시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강탁서기, 동북작가협회(심양분회)사전수부주석, 길림성문련 마염부주임, 당시 중공연변주위 서기 주덕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 부주장 교수기, 리호원 등이 대회에 참석하여 대회를 빛내주었다.  대회에서 강탁서기가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설립에 관한 중국작가협회의 결의를 선포하였다.

 

결의문은  이 단체가 연변 각 민족 작가들 및 기타 지구 조선족작가들이 자원적으로 결성한 인민단체로서 중국작가협회 분회에 속하며 당지 당위의 령도를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준비위원회 주임 배극이 《연변문학의 몇년래 창작상황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임무》라는 제목으로 사업보고를 하였고 강탁서기, 사전수부주석, 마염부주임이 축사를 드렸다. 강탁서기는 축사에서 “소수민족지구에서 작가의 조직 즉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를 성립한것은 우리 나라 력사상 종래로 없었던 일이며 천지개벽이래 첫 일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축하가 얼마나 충분한 리유가 있는가를 설명한다”라고 했다.

 

8월 15일 대회에서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초대 회원39명(그중 한족회원 2명, 회족회원 1명) 명단을 공포하였다. 초대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리욱, 임호(임효원), 김철, 리행복, 최정연, 황봉룡, 김례삼, 란수봉(한족), 조룡남, 정국초(한족), 리근희, 윤정석, 최수봉, 서헌, 최형동, 김인준, 홍성도, 황옥금, 김순기, 차창준, 김창석, 주홍성, 채택룡, 배극, 리홍규, 최현숙, 주선우, 정명석, 마상욱, 김동구, 리근전, 김창걸, 리희일, 정길운 왕유(회족), 마상욱, 최채, 홍춘식, 김태희(총 39명).

 

8월 16일에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제1기 제1차 리사회의를 개최하여 주석단을 선거하고 리사회를 구성하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규약(수정초안)》을 채택하였다.

 

초대 주석에 최채, 부주석에 배극, 김순기, 정길운, 최정연, 리사(12명)에 최채, 배극, 최정연, 정길운, 김순기, 주선우, 임효원, 최현숙, 리홍규, 김창걸, 황봉룡, 리근전 등이였다.

 

이 대회에서는 건국후 조선족의 문학건설과 창작실천의 경험을 총화하고 분회의 중심과업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

“작가들로 하여금 우리 문학의 주인공들의 생활실제에 깊이 침투하도록 조직하고 도와주며 작가들을 사상상과 예술상에서 성숙하도록 하는 방면에서 가능한 일체의 방조를 아끼지 않으며 문학방면에서의 일체의 잠재력량을 발견하고 조직하여 작품을 쓰도록 하며 적극적으로 청년작자를 배양하며 창작경쟁과 자유토론을 전개하면서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잘 관철시켜야 한다.”(배극의《몇년래 연변의 문학창작정황과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임무》에서. 《연변문예》1956년9호)

 

이 대회에서는 작가들이 거창한 사회주의현실속에 들어가며 문학신인들을 배양하며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하여 제재, 쟝르, 형식, 풍격의 다양화를 제창하고 예술상에서 부동한 류파의 자유로운 경쟁을 제창하며 “시대의 영웅적인민의 찬란한 사시로 되는 작품을 창작”하며 조선족의 문학유산을 발굴,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문제 등을 보다 똑똑히 밝히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성립된 후 그 산하에 창작위원회, 민간문학위원회, 번역위원회, 간행물위원회를 설치하고 그를 통해 자기의 활동을 힘있게 추진시켰으며 또한 1957년 1월에 문학월간지 《아리랑》 (그의 전신은 《연변문예》.1958년 12월까지 발간하고 1959년 1월부터《연변문학》으로 개칭)을 발간함으로써 작가들에게 문학광장을 마련해주었다. 《아리랑》의 발간으로 하여 조선족문단의 문학창작이 더욱 생기를 띠게 되였고 사회주의적내용과 민족형식을 갖춘 새로운 민족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가 한결 더 똑똑하게 되였다. 《아리랑》창간사가 그 좋은 실례로 되는데 그 몇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민족정책과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며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위대한 문예방침아래 탄생하였으며 독자 여러 동무들의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협조 지지에 의하여 자기의 첫걸음을 떼였다.”

 

“《아리랑》은 창작상 가장 좋은 방법의 일종인 사회주의사실주의창작원칙에 립각하여 연변 및 국내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이 전국 각 형제민족인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조국 사회주의건설의 줄기찬 로력적생활모습들을 반영하며 그들을 교육하여 사회주의건설의 더 큰 위훈에로 불러일으킨다.”

 

“《아리랑》은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집행하기 위하여 제재와 쟝르 범위를 확대하면서 각종 류파, 각종 형식, 각종 풍격의 예술작품을 대담히 선택 게재하며 간행물의 독특한 풍격과 특색을 수립하기 위해 정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아리랑》은 적극적으로 고전작품을 정리소개하며 민간문예를 발굴, 정리, 소개하는 사업을 집행하며 한족을 비롯한 국내 각 형제민족의 문학성취 및 세계문학의 정화들을 적극 소개함으로써 연변문학으로 하여금 민족문학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 발양하며 민족풍격이 농후한 우수한 사회주의문학으로 되게 하며 조국의 사회주의문학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이바지한다.”

 

이상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성립과 월간지 <<아리랑>>의 탄생은 조선족당대문학사상의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실로 조선족작가들은 이때로부터 자기의 전문적인 문학단체와 문학지에 기대어  자기의 창작활동을 폭넓게 벌릴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형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반우파투쟁” 및 그 후의 지속적인 비판운동과 문예계의 계급투쟁확대화와 절대화 등은 조선족작가로 하여금 “좌”경적로선과 사조의 속박속에서 모대기게 하였고 문단을 위축시키고 작가협회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등 문학예술단체에 “뻬떼피구락부”라는 죄목을 들씌워 강박적으로 해산시켰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1978년 10월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계련합회 제2기 제3차전체위원(확대)회의를 거쳐 연변문련의 회복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도 회복되였다. 이 회의에서 연변분회지도부를 새로 선거하고 연변분회산하에 소설문학, 시문학, 평론문학, 아동문학, 번역문학 등 창작위원회를 설치하고 할빈, 길림, 통화, 장춘, 심양, 북경 등 지역에 작가소조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이때로부터 1985년 4월까지 연변문련산하의 한개 협회로 있었다. 1985년 4월에 연변문련에서 정식으로 분립한 독립한 작가들의 전문단체로 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1996년 8월에 다른 기타 성, 직할시 분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새로운 사단법인등록법에 의해 지방작가협회로 즉 연변작가협회로 개칭하고 중국작가협회 단체회원의 일원으로 되였다.

 

문학지의 운명도 기구하였다.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투쟁가운데서 “아리랑”이란 제목은 협애한 민족주의 색채가 짙다고 하여 1959년 1월 《아리랑》을 《연변문학》으로 개칭하였다. 《연변문학》은 1961년2월호까지 발간하고 페간되였다가 1974년 4월에 복간되였다. 《송화강》지는 할빈에서 1960년에 창간되여 총권 36호를 발간하고 페간되였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넘어가야 할 점은 지난날 우리 문학지들은 “구사일생(九死一生)”, “비명횡사(非命橫死)”의 운명이란 멍에를 지고 숨가쁘게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좌”경적로선의 충격, 경제적곤궁, 문학시장의 한계 등으로 하여 어떤 문학지는 “비명횡사”하였고 어떤 문학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지어 지난날에 우리 문학지들은 자기 이름도 타의나 자의에 따라 수시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족의 문학단체와 문학지의 생존과정은 처절했으며 지어 한때는 죽음의 심연속에 추락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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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성과적으로 페막

최국철 주석으로, 우요동 상무부주석으로,
김영건, 채운산, 전화민, 김경훈, 김혁, 황령향, 정호원, 최동일 부주석에 당선.

좌로부터 황령향, 김영건, 정호원, 우요동, 최국철, 채운산, 김혁, 최동일, 전화민.

2015년 8월 11일에 소집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가 각항 의정을 원만히 완수하고 이날 오후 연길 백사호텔 국제회의청에서 성과적으로 페막.

이번 대회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제8기 리사회 사업보고에 대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결의》, 《〈연변작가협회 장정〉에 수개에 대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결의》, 《연변작가협회 제9기 리사회 리사 선거방법》을 심의 통과하고 제9기 리사회 리사를 선거하였으며 제9기 제1차 리사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리사회 주석, 부주석을 선거하였다.

리사들이 주석, 부주석 선거를 하고있다.

연변주당위 선전부 부부장 리호남의 사회하에 진행된 연변작가협회 제9기 1차리사회에는 113명의 리사가운데서 사유로 17명이 결석, 96명 리사가 선거에 참가하였는데 제9기 리사회 주석에 최국철이, 상무부주석에 우요동(만족)이, 겸직 부주석에 김영건, 채운산, 전화민, 김경훈, 김혁, 황령향, 정호원, 최동일이 당선.
   이번 대회 제9기 리사회 중 시가창작위원회 리사들로는 김영건, 리순옥, 윤청남, 주룡, 김영춘, 김현순, 리임원, 림금산, 박장길, 김승종, 박문파, 김일량, 석문주, 김창희, 허옥진, 김경희, 심예란, 석화 등이 선거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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