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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 리욱
2015년 09월 07일 20시 48분  조회:4717  추천:0  작성자: 죽림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리욱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 조선족문학 정초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 조선족문학의 첫 페지를 열어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시인이다.

 

생애:

리욱 (李旭 원명; 리장원 李章源)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 흘러갔다가 리욱이 3 살 나던 해인 1910년 봄,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근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 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파경(破鏡)》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 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 잡지《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鶴城), 월촌(月村), 홍엽(紅葉), 단림(丹林),산금(汕琴), 월파(月波)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폐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李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得意)한 모양”의 “아침 해 욱(旭)”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銅喇)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1949년 두 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 민족출판사), 장시《연변의 노래(한문)》(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장백산하》(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컫는 문화대혁명 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풍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 중 1984년 2월 2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 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었으며 1988년 7월 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 살 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리욱시문학의 작품세계:

시인 리욱은 1924년에 처녀작인 서정시《생명의 례물》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가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기, 특히 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태를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주요 작품으로는 《금붕어》(1936년), 《철촉화》(1942년), 《새 화원》(1942년), 《모아산》(1944년), 《오월의 붉은 맘씨》(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서정시가 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시편에서는 질곡적인 암흑사회를 혐오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마지않는 시인의 미학적 열망을 구김 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시 《금붕어》에서 리욱은 일제 통치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의 의지와 리상을 간곡히 표출하고 있다. 이 시편에서의 금붕어는 시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닫혀있음과 열려있음의 이항대립구조를 설정하여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와 무한한 자유를 표상하는 넓은 바다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식민지치하의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있다. 금붕어는 항시 자유 없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달가워하지 않고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붉은 산호림”을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애타게 찾고 있다. 대해 속에서의 “붉은 산호림” 그것은 시인이 못내 동경하던 자유로운 리상의 동산을 상징한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선 후 그같이 암흑한 현실 하에서도 줄곧 시 창작에 힘써 서정시 《철촉화》와 《새 화원》 등을 창작한데 이어 또한 《모아산》과 같은 역작을 내놓았다. 1944년 이른 봄에 쓴 서정시 《모아산》에서 시인은 모아산을 “대지의 정열을 안은” 창세기의 “위대한 거인”으로 형상화하면서 격정에 넘쳐 “네 머리 위에 해와 달이 흘러흘러/ 쌓은 정 녹아 터지는 날은/ 자유의 깃발이 날리리니”하고 사무치게 고대하였다. 이렇게 미래의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이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모아산을 종래로 “굴한 일 없”는 조선족반일투사의 강인한 투쟁정신의 상징으로 승리의 깃발로 찬송하고 있다. 그의 이런 시적 사상과 미학적 추구는 항일전쟁승리전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지고 명랑하여졌다. 시《북두성》은 광복 바로전야인 1944년에 쓴 작품으로서 시인의 이 시기 창작풍모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시《북두성》에서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길로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암울한 시대는 조만간에 지나가고 대지에 새봄이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위와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는 다소 표현에 있어 모호하고 추상적인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호방한 낭만시로서 시인의 신념을 충실하게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매로 멀리 하늘가에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정겹게 헤아리며 새봄은 꼭 오리라는 굳은 신념에 잠기며 다가올 승리에 무한히 고무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이 서정시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유의 려명이 곧 돌아오며 그 미래는 우리의 것이란것을 확신하고 있는것이다.시인은 일찍 이 시에 담은 시적경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머나먼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별들을 헤아리고 있노라니 나도 그 별들과 함께 빛나며 별무리들이 북두성을 향해 반짝이듯이 느껴졌다. 이 경상은 나에게 피눈물 겨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누렇게 말라빠진 대지에는 봄이 올 날이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새벽이 올 것이다’, ‘내일은 우리 것이다’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

 

이와 같이 이 시기 리욱의 시작품은 호방하고 우미한 랑만적 색채를 보이며 주로 은유적 수법을 애용하면서 잠재의식에 의한 형상적 표현들을 많이 보이고있다. 또한 그의 서정시들은 광명한 미래를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도 몽롱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는 약점도 발로 시켰다.

 

1945년 “815”광복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등 력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리욱의 시세계도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민족의 일제에 의한 압제와 굴욕에서부터의 해방을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특히 백여년간 이 땅을 개척하고 가꾸어 온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새 생활의 희망을 열어준 새로운 중국과 중국공산당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1949년 1월에 간행한 그의 두 번째 시집《북륜의 서정》 서문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시대의 행정에 력사의 지표가 뚜렷이 서서 나의 전진을 재촉하매 나는 고스란히 이 땅의 선구자의 발자국을 더듬어 나가며 인민과 조국에의 충성을 피로써 다할 것을 진정으로 고백한다.”

 

따라서 이 시기 시인의 작품주제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바쳐지게 되었다. 1956년에 쓴 서정시《해란강의 봄철》, 1963년에 쓴 《사랑하는 고향으로 오라!》, 《정월담》 등 작품은 모두 상기 주제를 담고 있다.

 

시인 리욱은 또한 이와 같은 민족적 해방과 인민들의 새 생활은 모두가 수십년간 백두밀림에서 모든 것 다 바쳐 일제와 싸운 항일투사들의 생명으로 바꿔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찬양을 아낌없이 토로하였다. 산문시《연변찬사》(1954년), 서정시 《유격대를 회억하며》(1959년), 《홍군전사의 묘》(1961년) 등 작품들이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 것들이다.

 

시인은 1957년에 창작한 시 《장백산》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성성한 백발을 날리면서도/ 가슴은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불길에 타서/ 항시 두 어깨에 칠색무지개를 걸고/ 목청을 돋구어 꽝꽝 대택을 울리”는 장백산의 거인적 형상을 빌어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산을 주름잡아 달리며 싸워온 반일투사들의 빛나는 력사를 노래하면서 그들의 반일혁명전통이 어떻게 우리시대인민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원동력이 되는 가를 밝힌다.

 

그 천년수림 속에서 타오르던 화톳불이/ 오늘 우리의 힘으로 뻗히고/ 그 동서 봉우리에서 반짝이던 초병의 눈이/ 오늘 우리의 정신으로 빛난다네

― 시 《장백산》 부분

 

이와 같이 거대한 상상의 힘과 웅건한 감정의 폭을 가지고 펼친 이 서정시의 심상은 력사와 반일혁명전통의 소재를 다룬 다른 시들에서도 감동적으로 표출되었다.

 

시인 리욱은 이외 다양한 시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의 내용과 예술성에서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어 내었는바 특히 율시, 절구, 사(詞) 등 한시(漢詩)는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시 《노시인》(1959년), 《독수리》(1960년), 《랑도사 도문강(浪淘沙 圖門江)》(1978년)와 1964년 훈춘에세 창작한 한시 작품 《고성(古城)》 등이 그의 한시대표작들이다. 이 시에서 묘사된 고성은 훈춘 중쏘국경에 있는데 해방전후 토비와 싸움이 여러차레 있었다.

 

고성의 절반 하늘 둘러

옛 풍진은 아득하구나

 

다섯번 진공한 요새요

세번 전승한 진지라네

 

천추에 밝은 달 창공에 걸렸고

만고에 의론 배 큰 강에 비꼈네

 

영웅 달리던 곳 물으니

멀리 큰 산봉을 가리키네

 

시인은 유고로 한시 108수가 수록된 한시집《협중시사(篋中詩詞)》를 남기였다. 그의 한시에 대해 연변대학 교수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라고 말하였고 한국 숭실대학 교수 조규익은 “리욱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시인 리욱은 또한 서사시, 서정서사시의 창작에서도 큰 업적을 남기었다.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1957년), 《고향사람들》(1957년), 서사시《풍운기(제1부)》(1982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그중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은 바로 “간도” 의 조선족들이 일제와 맞받아 싸운 빛나는 력사를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삼득이”와 “정숙이”를 주인공으로 19세기말 이조 말 조정의 폭정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재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하고 이곳 청국 지주의 압박과 착취와 왜놈의 탄압과 만행으로 고역과 학대에 시달리게 되고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게 되자 각성한 인민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게 작품은 만강의 열정으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대를 노래하면서 민족전설을 빌어 반일유격대의 형상창조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력사의 거시적 개괄과 항일유격대 형상 창조 그리고 기백 있고 세련된 시적 표현 및 생략과 함축, 비약의 수법 등 다양한 시적 표현방법을 동원하였고 민간전설의 생동한 도입과 호기로운 서정성의 발로 등으로 높은 사상, 예술적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리욱시문학의 예술특징

1) 그의 작품에서 력사제재에 대한 흥취가 각별하고 거인적 형상창조에 유능하며 격조가 높고 뜻이 깊고 서정이 짙고 낭만적 색채와 민족적 특색이 강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력사의식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일생동안 조선족인민들의 생활과 투쟁의 력사라는 기본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목록에서 우리는 민족의 력사에 바쳐진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서정시《옛말》은 기사년 흉년에 남녀로소가 쪽박차고 샛섬에 건너와 진대나무 속에 구틀막집 짓고 부대를 일구어 감자씨를 박던 개척초기생활을 쓰고 있으며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은 샛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소작인들의 눈물에 젖던 가을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서정시《장백산》, 《유격대를 회억하여》등은 반일투쟁과 유격대의 영웅적 모습을 담고 있으며 서정시《젊은 내외》,《석양의 농촌》, 《황소야》 등에서는 세기적 소원을 이뤄 토지 얻은 조선족농민들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서정시《배나무를 심으며》, 《배낭》, 《봄은 어디에 먼저 왔느냐》등 작품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이 신근한 노동으로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2) 리욱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심오한 사상과 낭만에 바탕을 둔 거인적 형상의 창조에 큰 성취를 이룩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생활의 본질과 특징을 발견하고 심오한 철학적 진리와 숭고한 인민적 지향을 포착하여 거인적 형상을 창조하였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거인의 영웅적 형상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현상도 노상 거인적 형상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투사의 형상창조에서도 장백산의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초인간적인 영웅성을 훌륭하게 부여하였다. 다음과 같은 작품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래 돋힌 용마를 타고/ 고산대하를 주름잡아 넘나들며/ 머리위에/ 하늘이 쪼각쪼각 갈라지고/ 발밑에/ 구름이 실실 흩어지는”

―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에서

 

“변강의 천봉만학을 거느리고/ 창공에 우뚝 솟은 장백산”

― 서정시《장백산》에서

 

“천험의 골짜기/ 만고의 숲을 뚫고/ 몇 천만년을”

― 서정시《두만강》에서

 

시인의 이러한 “거인의 영웅적 형상창조”의 예술추구는 일찍 《모아산》(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초기작품에서부터 나타난다.

 

3) 선명한 민족적 색채가 작품에 두드러지게 표현됨을 지적할 수 있다. 리욱시인은 조선족인민들의 구전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고 발양하여 생동한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였다.

 

서정시《장백산》에서는 “달밤에 백호가 바위 위에서 울면 동해의 룡왕도 소스라쳐 깨여서는 거센 물결을 타고 헤매었다”는 구전설화를 작품 속에 이용하였고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는 “죽은 누나를 불러도 아니 오는 누나는 옛 둥지에 제비를 보냈다”는 전설을 인용하였다. 서정시《황소야》는 “별을 이고 나가고 달을 밟고 들어온다.”는 우리 민족의 속담과 숙어를 도입하여 조선족농민들의 근면한 노동생활을 형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어에 바탕을 둔 언어구사를 주로 택하였고 과정법과 비유법, 생략과 함축 등 다양한 표현수법의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간결성을 이뤄내었다. 그의 시어는 또 대담한 함축과 생략이 특징적이며 조선족민요에 많이 사용되는 음조, 조흥구 등을 창조적으로 도입하여 시의 운치를 돋웠고 민족적 생활의 체취가 풍기는 고유어의 선택과 생활화된 민중언어의 사용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결론:

시인 리욱은 1924년 처녀작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여1984년 장편서사시《풍운기》 제2부의 집필 중 뇌익혈로 돌아가셨다. 향년77세였다. 이와 같이 시인은 70여년의 인생에서 옹근 60년간 진행한 시창작활동 전부를 중국 조선족시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로서 시인 리욱의 작품은 우리문학연구의 소중한 텍스트가 되며 이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따라서 리욱시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우선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시사(示唆)한다.

 


 

 

리욱대표시 6수

 

척촉화(躑躅花)

 

봄은 파일고개를 넘어

탐탁한 척촉(躑躅)꽃이

하염없이 지길래

시드는 꽃송이에

내 진정한 이야기를 부치오

 

꽃보라속에

나비가 놀라오

나도 늙소

 

그래도 내 마음 장미(薔薇)에는

푸른 꿈이 깃들어 슬프지 않소

 

오! 전설의 나라 척촉(躑躅)

이제 성장(盛裝)을 버린 너는

여름철에

백합(百合)꽃을 부러워할테냐?

산국화(山菊花)도 부러워할테냐?

-아니오

-아니오

그렇길래

나는 너의 짧은 청춘을 사랑했다

나는 너의 타는 정열을 사랑했다

 

1935년 시집《재만조선인시집》


 

 

금붕어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련꽃항아리에서

까무러진 상념에

툭―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나서

까만 안공에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 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1938년 연길에서


 

 

 화원

 

북천의 오로라 드리우면

싱싱한 광야를 헤치며

섬어하던 미친동무 있었다

 

애꿎이 의도를 등지고

상화에 사는 동안

비는 말라 화석된 동무 있었다

 

몇번 쇠그물을 뛰쳐나

지상 제하에서 싸우던

구사일생의 정한한 동무 있었다

 

그는 노도였고

그는 제전이였고

그는 표범이였고

 

때는 회한의 그림자를 감추고

력사는  위치를 바꾸어도

잃어진 생리를 찾아

빼앗긴 청춘을 찾아

인생의 대하에 나리거니

생활에 밀림에 들거니

 

오오!

 화원에 나가

씨를 뿌리자

그리고 봄을 불러 꽃을 피우자

붉은 꽃을 피우자

 

1940. 시집 《북륜의 서정》

룡정에서

 

 

 


 

 

북두성

 

백웅(白熊)이 우는

북방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성진

무연한 항구에 기발을 저으며저으며

슬픈 계절―

이 거리와 저― 먼 광야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주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나도

한 개의 작은 별이런가?

 

네 이름 부르노니

괴(魁)

요광(搖光)아 대답하여라

 

그윽이 피어오르는 자연(紫煙)속에

천문(天文)이 움직이다

신화가 바서지다

 

보아 천년

생각해 만년

줄기줄기 흐른 꿈은

지금 내 맘속에 장미원(薔薇園)을 이룩하고

 

구름을 밟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는 지고 달도 기울어

오오, 밤은 상아(象牙)처럼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산맥 너머서

이 강산 새벽을 소리쳐 일으킨다

 

1945년 봄 시집《북두성》


 

 

황소야

 

오늘 석양도

공원삼각정에 들렸다가

홍조속에 넘어간다

 

야학실 가는 길

문을 나서면서 말아문 엽초담배

아직도 반대나 남기까지

령이어 들어오는 공량차

서른대는 되나부다

 

황소야

너 제법 뽐내는판에

두 뿔에 빨간 술을 달아주고싶구나

바로 공량은 만재란다

 

황소야

너 별을 이고나가면

달을 밟고 돌아오는

습성을 즐기더라

황소야

너 계명성이 들리자

느슨히 일어서나니

진정 외양간을 나고고 싶었지

 

황소야

너 뻐꾸기 울어

밭갈이 재촉하면

서리 내려

가을걷이 생활을 배웠나니

지금 공량을 가득 싣고

너는 기뻐서 영각도 하는구나

 

1949년 시집《북륜의 서정》

룡정에서


 

 

할아버지의 마음

 

칠순

할아버지

나무를 심으며

어린 손자를 보고

싱그레 웃는

그 마음, 그 마음…

 

1957. 1 시집《고향사람들》

연길에서

 

(화룡시 로과향{현재 남평진} 호곡령에 세워진 시비의 새겨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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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리욱

 

석화


1. 서론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 조선족문학 정초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설가 김창걸 등과 함께 중국 조선족문학의 첫 페지를 열어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시인1)이다.

중국 조선족은 19세기 후반, 특히는 일제강점기 한반도내에서 대량의 “류이민”2)이 발생하여 조선반도 각지 수많은 파산농민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오면서 형성되였다. 지난 세기 초, “간도”로 불린 길림성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 조선족은 이주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개척과 정착의 력사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또한 동시에 중국 내 한족, 만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공동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뤄왔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바로 이와 같은 조선민족이 중국에 이주하여 새롭게 이뤄낸 삶과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담은 문학이다.

현재 중국 조선족문학에 대하여 그 성격과 특징을 규명하면서 국내외 학계에서는 “중국 조선족문학”3), “중국 조선인문학”4), “조선족이민문학”5), “만주 조선어문학”6), “재중 조선족문학”7), “간도문학”8)  등 여러 가지로 지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담론은 중국 조선족이 월경이민민족으로서 민족과 국가가 불일치되는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특수한 현상이 그 원인으로 된다. 중국 조선족문학이“중국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인민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동족으로” 여러 “사회력사발전단계를 함께 경유하면서 민족문학을 찬란하게 꽃피워 왔”9)으며 또한 19세기 후반기 특히 일제에 의한 국권찬탈이 사실화 되던 1910년대를 기점으로 차츰 중국대륙의 여러 민족인민들과 삶이 밀착되면서 상호간의 수용과 변화의 독특한 발전일로를 걷게 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수성은 중국 조선족문학사를 서술할 때 그 시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1990년 조성일, 권철 주편으로 발간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를 비롯하여 최근에 출간된 문학사10)들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작을 19세기 초, 조선민족이 중국에로의 이주초기로부터 보면서 김택영, 신정, 신채호의 한시작품들을 제시하고있다.

김택영은 1850년 조선개성에서 태여나 1905년 중국에 왔으며 1927년 아편자살로 생을 마감하였고 남통시 랑산에 그의 묘소가 있다. 신정은 1879년 조선 충북에서 태여나 1911년 봄, 중국에 왔다가 1922년 돌아가셨는데 당시 상해홍교만국 공동묘지에 묻혔다. 신채호는 1880년 조선 충남에서 태여나 1910년 중국에 왔으며 그후 일제에게 체포되여 려순감옥에 갇혔다가 1936년 옥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원인이 여하하든 그 족적이 중국에서의 조선민족이주사와 맥을 같이 하였으며 중국에 와서도 끝임없는 민족광복운동과 더불어 활발한 문학활동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김택영의 시에 대하여 당시 양계초선생도 탄복하였으며 엄복은 그에 대하여 “시재는 리백, 두보와 흠사하며 사부는 추앙, 매승을 따른다.”고 격찬하였고 신정도 사후 지인들이 그의 탄신 60세를 기념하여 시집 《아목루(我目淚)》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대부분의 작품이 우리글이 아닌 한문으로 즉 한시(漢詩)로  창작되였다는데 있다. 물론 고려, 조선조 시기부터 창작된 한시도 우리문학의 소중한 유산의 한부분이 되고있다. 그러나 우리 시문학의 흐름은 그래도 신라향가와 고려가요 및 조선조에 와서 시조와 가사로 이어지는 우리말, 우리글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시작도 현재 우리문학의 전통이 될수 있는 우리글로 창작된 시작품과 그 작품을 창작한 시인에게서 찾아야할 것이다. 즉 처음부터 한문으로 창작된 이들 김택영, 신정, 신채호의 시작품을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의론의 소지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혹자는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을 거론하면서 해당 민족구성원 시인, 작가가 창작한 작품은 비록 본 민족언어가 아닌 한문으로 씌여졌다하더라도 그 시인, 작가가 속한 민족의 민족문학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기법에는 상당하게 론의되여야할 문제들이 내포된다. 그 실례를 우리는 로사와 그의 소설 《락타샹즈》, 희곡《차집》등에서 찾아볼수 있다. 로사는 분명히 민족적으로는 만족작가이지만 상기 한문으로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중국 한문문학으로서 중국 한문문학의 수작으로 인정하지 이미 자신의 언어문자를 상실한 만족민족의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언어, 문자에는 그 민족의 문화, 력사, 관습 등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는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5천년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위대한 한족문화의 흐름을 이어온 힘이 바로 위대한 한자문화(漢字文化)에 있음을 똑똑히 보게 된다. 당나라와 송나라 다음 중원대륙에 펼쳐진 료, 금, 원 및 청에 이르는 천년세월의 이민족문화속에서 바로 한자문화가 한족문화를 견실하게 지켜 내였던 것이다.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이민족의 사나운 말발굽과 서리발치는 칼날, 그 거세찬 폭풍취우의 충격속에서 바로 이 위대한 한자문화가 중원의 광활한 땅에 한족(漢族)문화를 지켜내고 끝끝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게 하였던것이다.

현재 우리 조선족시인, 작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구성원으로 물론 한문(漢文)문학으로 대표되는 중국 주류문학에 기여하여야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우리 조선족시인, 작가들이 우리말, 우리글로 창작되는 민족문학의 번영과 발전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중국 조선족시문학은 반드시 우리글로 창작된 작품과 시인에서 그 시작을 찾아야할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문학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우선 텍스트(Text, 原文, 本文)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리유가 있다.

리욱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여야할 것이다. 일제가 전체 조선반도 내에서 조선의 기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의 질서를 모조리 뒤엎어 버리고 조선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민족의식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전체 조선민족을 일거에 말살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우리말교육을 철폐하고 악명 높은 창씨개명을 진행하며 우리글 신문, 잡지를 폐간시키던 19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조선반도에서 흘러온 류이민들의 집거지역인 중국 동북삼성에서는 오히려 우리글 문학지와 작품집들이 륙속 발간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우리 민족문학이 맥을 이어가는 장소가 되였다. 당시 “간도”와 “만주”지역은 “거대한 허상 속에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 공간”11)으로 우리 민족문학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숨통이었고 최후의 근거지였던 것이다.1930년대에 걸쳐서 일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우리민족의 동북삼성에로의 류입은 조선반도에서 활동하던 시인, 작가 등 문학인들의 대거 류입을 불러왔다. 당시 “만주”에 체류하였던 문인들 속에는 김조규, 류치환, 박팔양 등 시인과 안수길, 강경애, 최서해와 같은 많은 소설가들이 있었다. 이 시기 형성된 우리민족시인, 작가들의 문단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이어지는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에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 사실이며 이들의 음으로 양으로 되는 영향이 건국 후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에 큰 기여가 되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찍 조성일선생이 서술한바와 같이 중국 조선족문학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 남아 이 땅에서 삶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이 땅의 시인, 작가들에 의하여 이뤄진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날로 우리민족의 현대사에 있어서의 ‘창상지변(滄桑之變)’이라고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방을 맞은 ‘간도’를 비롯한 ‘만주’전역의 우리민족 이주민 210만명중 절반에 이르는 다시 말하면 100여만에 달하는 이주민들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직전까지 기간내에 조선반도로 돌아갔다. 조선반도로 돌아간 100만중에는 해방전 특히 30년대에 ‘간도’지역에서 창작활동을 벌렸던 ‘문화부대’의 많은 성원도 망라되여있다. 이 ‘문화부대’의 조선반도에로의 대이동으로 말미암아 해방전 ‘간도’를 중심으로한 우리민족의 이민문단은 거의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정세하에서 치렬한 민족의식을 갖고있는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작가들은 조선족문학의 번영와 창창한 앞날을 위하여 건국전야와 직후 당시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연변의 연길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12)

바로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문학은 1945년 “8․15”광복 이후의 기간에 력사적인 재정비를 거치며 성장하여 왔고 그 중심에 리욱시인과 그의 시작품이 있었다. 리욱시문학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2. 리욱의 생애와 문학 활동

 

리욱 (李旭 원명; 리장원 李章源)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 흘러갔다가 리욱이 3 살 나던 해인 1910년 봄, 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근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 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파경(破鏡)》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 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 잡지《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鶴城), 월촌(月村), 홍엽(紅葉), 단림(丹林), 산금(汕琴), 월파(月波)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 대하여 당시 평단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그 지향! 그것만으로 신진시인의 명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 케케묵은 감각의 울타리 안에서 시를 창조하는 대신 시를 복제(모방)하는 이미 퇴색한 청년시인들에 비해 볼 때 아직 체내에 미숙한 오관을 가지고 떨리는 두 손과 두 팔을 한껏 벌리어 새로운 “포에지”의 세계로! 항시 비상을 익망하는 젊은 시인― 신세대 시인들의 활기를 나는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지나친 비상은 오히려 허망과 “넌센스”를 동반하는 수가 있지 않을까? 무의미의 탐미성을 강조하는 슐레알리스트들의 시로에는 경복할 수 없으므로 의미의 혼란으로 충만되어 그것이 반대로 무의미한 시작품으로 화해버리는 이런 유의 시를 쓰는 무의미를 월촌씨에게 삼가 경고하고 싶다. 의미의 남용으로 시인자신이 나중에 판타지병에 걸려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푸념과 넉두리와 언어의 유희로 충만된 시를 쓰는 수가 많고 이런 시를 우리는 재능 있는 신인들에게서 간혹 볼 수 있다. 그러나 월촌씨는 아직 그런 환상병에 걸리지 않을 만한 자성과 건강을 가지고 있다.13)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폐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李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 《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得意)한 모양”의 “아침 해 욱(旭)”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銅喇)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 1949년 두 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 민족출판사), 장시《연변의 노래(한문)》(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장백산하》(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컫는 문화대혁명 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풍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 중 1984년 2월 2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 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었으며 1988년 7월 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 살 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3. 리욱의 작품세계와 예술특징

 

시인 리욱은 1924년에 처녀작인 서정시《생명의 례물》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가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기, 특히 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태를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주요 작품으로는 《금붕어》(1936년), 《철쭉화》(1942년), 《새 화원》(1942년), 《모아산》(1944년), 《오월의 붉은 맘씨》(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서정시가 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시편에서는 질곡적인 암흑사회를 혐오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마지않는 시인의 미학적 열망을 구김 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시 《금붕어》에서 리욱은 일제 통치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의 의지와 리상을 간곡히 표출하고 있다.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련꽃항아리에서

까무러진 상념에

툭―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나서

까만 안공에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 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 시《금붕어》 전문

 

이 시편에서의 금붕어는 시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닫혀있음과 열려있음의 이항대립구조를 설정하여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와 무한한 자유를 표상하는 넓은 바다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식민지치하의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있다. 금붕어는 항시 자유 없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달가워하지 않고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붉은 산호림”을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애타게 찾고 있다. 대해 속에서의 “붉은 산호림” 그것은 시인이 못내 동경하던 자유로운 리상의 동산을 상징한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선 후 그같이 암흑한 현실 하에서도 줄곧 시 창작에 힘써 서정시 《철쭉화》와 《새 화원》등 을 창작한 데 이어 또한 《모아산》과 같은 역작을 내놓았다. 1944년 이른 봄에 쓴 서정시 《모아산》에서 시인은 모아산을 “대지의 정열을 안은” 창세기의 “위대한 거인”으로 형상화하면서 격정에 넘쳐 “네 머리 위에 해와 달이 흘러흘러/ 쌓은 정 녹아 터지는 날은/ 자유의 깃발이 날리리니”하고 사무치게 고대한다. 이렇게 미래의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이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모아산을 종래로 “굴한 일 없”는 조선족반일투사의 강인한 투쟁정신의 상징으로 승리의 깃발로 찬송하고 있다. 그의 이런 시적 사상과 미학적 추구는 항일전쟁승리전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지고 명랑하여졌다. 시《북두성》은 광복 바로전야인 1944년에 쓴 작품으로서 시인의 이시기 창작풍모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백웅(白熊)이 우는

북방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성진

무연한 항구에 기발을 저으며저으며

슬픈 계절―

이 거리와 저― 먼 광야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주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나도

한 개의 작은 별님이런가?

 

네 이름 부르노니

괴(魁) 

요광(搖光)이 먼저 대답하여라

 

그윽이 피어오르는 자연(紫煙)속에

천문(天文)이 움직이다

신화가 바서지다

 

― 시《북두성》 제1련-제4련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으로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암울한 시대는 조만간에 지나가고 대지에 새봄이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위와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다소 표현에 있어 모호하고 추상적인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호방한 낭만 시로서 시인의 신념을 충실하게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매로 멀리 하늘가에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정겹게 헤아리며 새봄은 꼭 오리라는 굳은 신념에 잠기며 다가올 승리에 무한히 고무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이 서정시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보아 천년

생각해 만년

줄기줄기 흐른 꿈은

지금 내 맘속에 장미원을 이룩하고

 

구름을 밟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는 지고 달도 기울어

 

오오, 밤은 상아(象牙)처럼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산맥 너머서

이 강산 새벽을 소리쳐 일으킨다

 

― 《북두성》 제5련-제7련

 

이 시에서 시인은 자유의 려명이 곧 돌아오며 그 미래는 우리의 것이란것을 확신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일찍 이 시에 담은 사상경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머나먼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별들을 헤아리고 있노라니 나도 그 별들과 함께 빛나며 별무리들이 북두성을 향해 반짝이듯이 느껴졌다. 이 경상은 나에게 피눈물 겨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누렇게 말라빠진 대지에는 봄이 올 날이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새벽이 올 것이다’, ‘내일은 우리 것이다’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14)

 

상술한 인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시기 리욱의 시작품은 호방하고 우미한 랑만적 색채를 보이며 주로 은유적 수법을 애용하면서 잠재의식에 의한 형상적 표현들을 많이 보이고있다. 또한 그의 서정시들은 광명한 미래를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도 몽롱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는 약점도 발로 시켰다.

1945년 “8․15”광복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등 력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리욱의 시세계도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민족의 일제에 의한 압제와 굴욕에서부터의 해방을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특히 백여 년 간 이 땅을 개척하고 가꾸어 온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새 생활의 희망을 열어준 새로운 중국과 중국공산당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1949년 1월에 간행한 그의 두 번째 시집《북륜의 서정》 서문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시대의 행정에 력사의 지표가 뚜렷이 서서 나의 전진을 재촉하매 나는 고스란히 이 땅의 선구자의 발자국을 더듬어 나가며 인민과 조국에의 충성을 피로써 다할 것을 진정으로 고백한다.”

 

따라서 이 시기 시인의 작품주제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바쳐지게 되었다. 1956년에 쓴 서정시《해란강의 봄철》,  1963년에 쓴 《사랑하는 고향으로 오라!》, 《정월담》 등 작품은 모두 상기 주제를 담고 있다.

시인 리욱은 또한 이와 같은 민족적 해방과 인민들의 새 생활은 모두가 수  십년간 백두밀림에서 모든 것 다 바쳐 일제와 싸운 항일투사들의 생명으로 바꿔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찬양을 아낌없이 토로하였다.

산문시《연변찬사》(1954년), 서정시 《유격대를 회억하며》(1959년), 《홍군전사의 묘》(1961년) 등 작품들이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 것들이다.

시인은 1957년에 창작한 시 《장백산》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성성한 백발을 날리면서도/ 가슴은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불길에 타서/ 항시 두 어깨에 칠색무지개를 걸고/ 목청을 돋구어 꽝꽝 대택을 울리”는 장백산의 거인적 형상을 빌어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산을 주름잡아 달리며 싸워온 반일투사들의 빛나는 력사를 노래하면서 그들의 반일혁명전통이 어떻게 우리시대인민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원동력이 되는 가를 밝힌다.

 

그 천년수림 속에서 타오르던 화톳불이

오늘 우리의 힘으로 뻗히고

그 동서 봉우리에서 반짝이던 초병의 눈이

오늘 우리의 정신으로 빛난다네.

 

이제 천지의 젖줄이 흘러 기름진 전야마다

오곡의 백과가 탐스럽게 무르익고

장백산 기슭에 늘어선 웅장한 공장마다

기계와 비단이 수두룩이 쌓이거니

 

백옥으로 쌓아올린 장백의 상상봉이여

백발을 구름높이 날리고

웃음을 폭포소리에 터치며

이 나라 아들딸~ 영웅호걸들을 굽어보라

 

― 시 《장백산》 부분

 

이와 같이 거대한 상상의 힘과 웅건한 감정의 폭을 가지고 펼친 이 서정시의 심상은 력사와 반일혁명전통의 소재를 다룬 다른 시들에서도 감동적으로 표출되었다.

시인 리욱은 이외 다양한 시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의 내용과 예술성에서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어 내었는바 특히 율시, 절구, 사(詞) 등 한시(漢詩)는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시 《노시인》(1959년), 《독수리》(1960년), 《랑도사 도문강(浪淘沙 圖門江)》(1978년) 등이 그의 한시대표작들인데 그중 1964년에 창작한 한시 작품 《옛 성(古城)》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멀리 보니 옛 성은

절반하늘 둘러싸

그제 날의 풍진은

저으기 아득하네.

 

녹수의 고기비누

세 번 전승한 진지요,

청산의 호랑날개

아홉 번 진공한 창이라네

 

창공을 우러러

달은 천추에 걸렸고

물결을 헤치며

배는 대강에 비꼈네.

 

영웅 달리던 곳

어딘가 물으니

늙은이 저 멀리

큰 물기슭 가리키네.

 

遙看古城半分天 

昔日風塵已渺然 

綠水魚鱗三捷陳 

靑山虎翼九攻鞭 

霜天寥廊千秋月 

秋水波潤一葉船 

借問英雄馳騁地 

笑指融融大江邊 

 

―  시《옛 성(古城)》 전문

 

시인은 유고로 한시 108수가 수록된 한시집《협중시사(篋中詩詞)》를 남기였다. 그의 한시에 대해 연변대학 교수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라고 말하였고 한국 숭실대학 교수 조규익은 “리욱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시인 리욱은 또한 서사시, 서정서사시의 창작에서도 큰 업적을 남기었다.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1957년), 《고향사람들》(1957년), 서사시《풍운기(제1부)》(1982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은 바로 “간도” 의 조선족들이 일제와 맞받아 싸운 빛나는 력사를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삼득이”와 “정숙이”를 주인공으로 19세기말 이조 말 조정의 폭정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재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하고 이곳 청국 지주의 압박과 착취와 왜놈의 탄압과 만행으로 고역과 학대에 시달리게 되고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게 되자 각성한 인민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게 작품은 만강의 열정으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대를 노래하면서 민족전설을 빌어 반일유격대의 형상창조를 완성하였다.

 

아! 

백성들이 

천만대에 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유격대에는 

나는 장수와

뛰는 장수가 있어

장백산 대택속

해와 달이 질줄 모르는

별천지에서 

천하 력사들을 모아

보검을 치고

대포를 만들면서

때로는 

해왕국 공주들이

여름마다 

목욕하러  

동새에서  

천지로 다니는

무지개 다리를 더듬어

봉래 

방장 

영루에 노릴고

 

제틀로 

수림속에 나오면

천리 련봉~

나뭇가지를 더우잡고

나래 돋친 룡마인양

일행 천리

청운장을 휘둘러

산삼과 

사항과 

지초가 녹아내리는

압록간 

두만강 

송화강을 넘나들며

마음대로 

풍운조화를 부려

불시에  

놈들을 

마른 날에 번개치듯

쳐엎는다 하나니

 

이렇듯 

유격대들이 

때로는 

침실에서  

잠든놈들을 

꿈속에 잡아가고

대낮에 

길가는 놈들도

무망중에 쓸어눕힌다

 

―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 부분

 

이 작품은 력사의 거시적 개괄과 항일유격대 형상 창조 그리고 기백 있고 세련된 시적 표현 및 생략과 함축, 비약의 수법 등 다양한 시적 표현방법을 동원하였고 민간전설의 생동한 도입과 호기로운 서정성의 발로 등으로 높은 사상, 예술적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리욱시문학의 예술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그의 작품에서 력사제재에 대한 흥취가 각별하고 거인적 형상창조에 유능하며 격조가 높고 뜻이 깊고 서정이 짙고 낭만적 색채와 민족적 특생이 강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력사의식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일생동안 조선족인민들의 생활과 투쟁의 력사라는 기본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목록에서 우리는 민족의 력사에 바쳐진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서정시《옛말》은 기사년 흉년에 남녀로소가 쪽박차고 샛섬에 건너와 진대나무 속에 구틀막집 짓고 부대를 일구어 감자씨를 박던 개척초기생활을 쓰고 있으며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은 샛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소작인들의 눈물에 젖던 가을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서정시《장백산》, 《유격대를 회억하여》등은 반일투쟁과 유격대의 영웅적 모습을 담고 있으며 서정시《젊은 내외》, 《석양의 농촌》, 《황소야》 등에서는 세기적 소원을 이뤄 토지 얻은 조선족농민들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서정시《배나무를 심으며》, 《배낭》, 《봄은 어디에 먼저 왔느냐》등 작품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이 신근한 노동으로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다음, 리욱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심오한 사상과 낭만에 바탕을 둔 거인적 형상의 창조에 큰 성취를 이룩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생활의 본질과 특징을 발견하고 심오한 철학적 진리와 숭고한 인민적 지향을 포착하여 거인적 형상을 창조하였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거인의 영웅적 형상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현상도 노상 거인적 형상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투사의 형상창조에서도 장백산의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초인간적인 영웅성을 훌륭하게 부여하였다. 다음과 같은 작품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래 돋힌 용마를 타고/ 고산대하를 주름잡아 넘나들며/ 머리위에/ 하늘이 쪼각쪼각 갈라지고/ 발밑에/ 구름이 실실 흩어지는”

―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에서

 

“변강의 천봉만학을 거느리고/ 창공에 우뚝 솟은 장백산”

― 서정시《장백산》에서

 

“천험의 골짜기/ 만고의 숲을 뚫고/ 몇 천만년을”

― 서정시《두만강》에서

 

시인의 이러한 “거인의 영웅적 형상창조”의 예술추구는 일찍 《모아산》(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초기작품에서부터 나타난다.

리욱시문학의 또 다른 예술적 특징으로 선명한 민족적 색채가 작품에 두드러지게 표현됨을 지적할 수 있다. 리욱시인은 조선족인민들의 구전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고 발양하여 생동한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였다.

서정시《장백산》에서는 “달밤에 백호가 바위 위에서 울면 동해의 룡왕도 소스라쳐 깨여서는 거센 물결을 타고 헤매었다”는 구전설화를 작품 속에 이용하였고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는 “죽은 누나를 불러도 아니 오는 누나는 옛 둥지에 제비를 보냈다”는 전설을 인용하였다. 서정시《황소야》는 “별을 이고 나가고 달을 밟고 들어온다.”는 우리 민족의 속담과 숙어를 도입하여 조선족농민들의 근면한 노동생활을 형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어에 바탕을 둔 언어구사를 주로 택하였고 과정법과 비유법, 생략과 함축 등 다양한 표현수법의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간결성을 이뤄내었다. 그의 시어는 또 대담한 함축과 생략이 특징적이며 조선족민요에 많이 사용되는 음조, 조흥구 등을 창조적으로 도입하여 시의 운치를 돋웠고 민족적 생활의 체취가 풍기는 고유어의 선택과 생활화된 민중언어의 사용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4. 결어

 

본문은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인 시인 리욱(1907~1984)의 생애와 문학 활동 및 그의 작품세계와 예술특징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리욱시문학의 의의와 예술적 가치를 진일보 확인하였다.

시인 리욱은 1924년 처녀작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여 1984년 장편서사시《풍운기》 제2부의 집필 중 뇌익혈로 돌아가셨다. 향년77세였다. 이와 같이 시인은 70여년의 인생에서 옹근 60년간 진행한 시창작활동 전부를 중국 조선족시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로서 시인 리욱의 작품은 우리문학연구의 소중한 텍스트가 되며 이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따라서 리욱시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우선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시사(示唆)한다.

 

2011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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